•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북한 유엔참여 저지와 한계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139-152)

① 남북한 초청안 문제와 미국의 태도 변화 모색

냉전기 유엔은 한국이 자신의 정통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무대였고, 한국에 통일 문제 주도권을 부여하는 중요한 국제 장소였다. 유엔의 한반도 문제275) 토의에서 한국 은 항상 초청을 받았고 북한은 늘 거부당했다. 한국 정부는 유엔의 한반도 문제 논의 에 자신의 대표를 보냈고 유엔 감시 아래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한국 통일을 골자로 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켜왔다. 이 과정에서 UNCURK는 한국 정부와 긴 밀히 연계되어 한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조직이었다.276)

년 2월 시점을 기준으로 대략 6만여 명에서 4만 4천여 명으로 감축이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다.

1973년 11월 키신저 국무장관의 방한에 대비해서 외무부가 작성한 회담자료를 보면 주한미군의 규 모는 1968년 6월 8만여 명으로 정점을 찍고 이후 1969년 8월까지는 전반적으로 감소하는 추세 속에 서 규모의 등락이 있었다. 하지만 69년 9월 이후부터는 인원 회복 없이 지속으로 축소됐으며, 한·미 가 주한미군 2만 명 감축에 합의하기 약 1주일 전인 1971년 1월 말 주한미군의 규모는 이미 4만 7 천여 명으로 축소된 상태였다. 미국이 주한미군 감축을 공식 결정하고 한국과 협의하는 약 1년도 안 되는 사이 주한미군 인원은 약 5만 3천여 명에서 4만 7천여 명으로 약 1만 4천여 명이 이미 줄어든 상태였다. 1971년 2월 주한미군 철수 발표는 군사적 조치라기보다는 다분히 정치적 선언의 성격이 강했다. “월별 주한미군 현황.” Kissinger, Henry A. 미국 국무장관 방한, 1973.11.16., 분류번호:

724.32US, 등록번호: 5937, 대한민국외교사료관.

275) 유엔에서 한반도 관련 논쟁은 남북한을 옵서버로 초청하는 문제, 한국통일을 위한 유엔의 정치조 직인 UNCURK와 한반도에서 유엔의 군사조직인 UNC를 해체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발생했다.

UNCURK는 UN 산하 한반도 통일문제를 다루는 정치조직으로 한국 정부가 지지하는 자유선거와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지향했다. UNCURK는 연례적으로 한반 도 상황을 유엔사무총장에게 보고했고, 유엔총회의 결의를 통해 활동을 유지했다. 북 한은 당연히 이 조직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반도 주민들의 자주성에 기반해서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유엔과 같은 외부세력이 통일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 했다. 만일 북한이 통일문제에서 유엔의 역할을 인정하면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UNCURK의 활동을 인정해야 했고, 이는 한국이 주장하는 방식의 통일방안을 수용하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유엔의 한반도 문제 논의에서 한국이 계속해서 유리한 위치를 차 지하는 상황은 북한의 외교에 부담스러운 사안이었다. 북한 역시 유엔총회에서 한국문 제 토의에 자신의 대표를 참석시킬 것과 한반도에 있는 모든 외국군대 철수 후 남북한 총선거를 시행하는 것을 주장했으나 이는 유엔에 접수조차 되지 않았다.277)

유엔에서 활동이 봉쇄된 상황에서 북한의 주장은 주로 사회주의 우호국들로부터 지 지를 받고 있었다. 1958년 2월 19일 북한은 중국과 공동성명을 통해 연말까지 북한에 주둔하고 있는 중국 인민지원군을 단계적으로 철거할 것을 발표함으로써 한국으로부터 유엔군 철수 및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압박했다.278) 북한지역에서 중국군 철수를 통해 국제사회에 한반도 문제를 환기하고, 북한 입장의 정당성을 강화하려 한 조치였 지만 중국(공산당) 역시 유엔에 가입되지 못한 상황이고 유엔회원국 대다수가 미국의 우호국임을 고려할 때 유엔에서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1960년대 들어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이 대거 국제무대에 등장했다. 이는 북한에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줄 사안이었다. 1961년 4월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 프리카 단결 이사회 4차 회의는 13일 폐막 회의에서 ‘조선에 관한 결의’를 채택했 다. 이 결의서는 남북한 연방제를 지지하며 외세의 간섭없이 민주주의적 기초 위에서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지지하고 있었다.279) 북한의 통일정책이 비동맹국가들로부터 지 지를 받게 되는 중요한 외교적 성과였다.

북한은 유엔 내 우호 국가들의 협조 아래 한반도 통일문제를 유엔총회 의제에 올려 놓기 위해 노력했다. 1961년 제16차 유엔총회를 앞두고 소련은 남북한 대표에게 옵서

276) “면담요록(외무부장관, Trirona 주한 비율빈 대사).” 1970년 7월 31일, 유엔총회, 제25차 New York, 1970.9.15.-12.17 전10권(V.1 기본대책), 분류번호: 731.2, 등록번호: 3677, 대한민국외교사료관.

277)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남일 외무상 성명(1955.11.16.).” 로동신문 1955년 11월 18일 1면.

278)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공동성명.” 로동신문 1958년 2월 20일 1면.

279) “아세아 아프리카 인민단결 이사회.” 로동신문 1961년 4월 15일 6면.

버 자격을 주어 이들을 한반도 문제 토의에 초청할 것을 주장했고, 미국은 한국 대표 만을 초청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280) 이후 미국 대표 스티븐스는 자신이 제출한 결의 안을 다소 수정하여 이른바 조건부 초청안을 제출했고 이는 가결되었다. 조건부 초청 안은 북한이 유엔의 권능을 인정하는 조건 아래 북한 대표를 유엔의 한반도 문제 논의 에 초대하는 것을 말한다. 북한 외무성은 4월 17일 성명을 발표하여 미국의 조건부 초 청안을 비난하고 북한 대표 참여 없는 어떠한 유엔의 결의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281) 북한은 통일에 있어 유엔의 역할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의 조건부 초청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미국의 조건부 초청안은 물론 북한의 반대가 충 분히 예상되는 안이기는 했지만, 기존의 한국 단독 초청안에 비하면 다소 완화된 방식 의 초청안이기는 했다.

1961년 16차 유엔총회가 시작하자 북한은 정부 비망록을 통해 UNCURK의 해체와 UNC 철거를 주장하며 외세의 간섭없이 전한반도에 걸쳐 자유선거를 실시하여 통일문제 를 해결할 것을 주장했다.282) 12월 11일 소련은 UNCURK 해체안을, 몽고는 외국군 철거 와 남북한 대표의 한반도 문제 논의에 참여시키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한반도 문 제 토의는 몇 차례 중단되었고, 본격적으로 토의되기도 전에 영국 대표가 표결을 주장함 으로써 소련대표가 자신의 결의안을 철회하고 미국의 결의안이 표결로 총회에 상정됐 다.283) 유엔에서 한반도 문제는 항상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우방국들의 영향력 아래 미 국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미국은 남북한 초청안 문제를 비롯한 UNCURK, UNC 문제에 대해 항상 표 대결에서 이겼고, 유엔에서 북한의 발언권을 계속 봉쇄했다.

1966년 들어 상황이 변화했다. 1966년 8월 11일 UNCURK의 회원국이었던 칠레가 탈 퇴를 선언한 것이다.284) 1966년 5월 북한의 친선문화 대표단이 칠레를 방문하였고, 칠 레는 미국이 주도하는 남미국제기구에 참가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북한과 칠레 관계가 강화되면서 급기야 칠레가 북한을 반대하는 UNCURK를 탈퇴한 것이다. 물론 칠레의 UNCURK 탈퇴를 반드시 북한과 관계 강화의 측면에서만 볼 수는 없다. 칠레는 미국과 구리 교역에 대해 불만이 있었던 것 같다.285) 이후 칠레는 9월에 탈퇴선언을 번복했다.

280) “조선문제는 조선인민 자신의 문제이다.” 로동신문 1961년 4월 12일 6면.

28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 성명 발표.” 로동신문 1961년 4월 18일 1면.

28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비망록.” 로동신문 1961년 12월 7일 2면.

283) “미제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투쟁하는 조선인민의 불구대천의 원수이다.” 로동신문

1961년 12월 22일 4면.

284) “칠레가 미제의 조선침략도구인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에서 탈퇴.” 로동신문 1966년 8월 13 일 4면.

285) Talking paper for Secretary of State Dean Rusk's discussion with Chilean representatives at the UN.

UNCURK 위기의 징조였다.286) 미국 역시 UNCURK가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287) 하지만 UNCURK 구성국이 미국에 우호적인 국가들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유엔에서 북한의 주장을 봉쇄하고 한반도 통일문제에 대해 미국의 이해관계를 관철하는 데 쓸모있는 기구였다. 미국이 앞장서서 이 조직을 해체할 필요 성은 없었다.

1966년 제21차 유엔총회를 앞두고 북한은 남북한과 관련 이해 당사국들이 참석하는 회의를 개최해 한국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자고 주장했다. 당시 미국은 북한의 제안 이 유엔의 한반도 문제 논의에 복잡한 상황을 연출할 것을 염려하기도 했으나, 그 영 향력은 크지 않으리라 판단했다. 그에 따라 그들은 한국과 미국의 입장이 반영된 기존 의 통일안인 유엔 감시 아래 남북한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를 북한이 수용할 것을 촉 구했다.288)

1960년대 중후반 북한의 대외활동 중심은 반미주의 확산과 한반도 통일문제를 연계 시키는 데 있었다. 그들은 한반도 통일의 방해 세력으로 미국을 지목했고 미국의 한반 도 주둔의 부당성을 세계적 차원에서 알리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289) 북한은 유엔의 한반도 통일문제 논의의 부당성을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유엔의 한반도 문제 논의에 자 신의 대표 참여는 정당하느는 다소 모순적인 행동을 통해 이념적 이득인 반미주의와 정치적 목적인 한반도 통일을 결합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유엔에서 점점 다수가 되어 가고 있던 3세계 나라들과 관계 발전을 바탕으로 한반도 문제의 국제적 논의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려고 노력했다. 1966년 21차 유엔총회에서 처음으로 UNCURK 해체안이 단독으로 유엔총회에 상정됐다. 그러나 60대 24, 기권 29 압도적인 표 차이로 부결되 었다.290) 북한이 바라는 바와 달리 유엔에서 승자는 미국이었다.

하지만 남북한 초청안 문제에 대해 미국은 조금씩 변화를 모색했다. 그들은 1966년

Department Of State, 8 Sept. 1966. U.S. Declassified Documents Online, http://tinyurl.galegroup.com/

tinyurl/89U3K3. Accessed 26 Oct. 2018(Gale Document Number: CK2349494989).

286) 칠레는 1970년 제25차 유엔총회 기간인 11월 17일 UNCURK를 다시 탈퇴했다.

287) DOS has serious reservations about attempt to establish a UN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of Vietnam. Department Of State, 7 Aug. 1965. U.S. Declassified Documents Online, http://tinyurl.

galegroup.com/tinyurl/89SQW4. Accessed 26 Oct. 2018(Gale Document Number: CK2349458330).

288) “91. Memorandum From the Deputy Assistant Secretary for Far Eastern Affairs (Berger) to the Ambassador at Large(Harriman).” Subject: North Korean-Bloc Initiatives on the Korean Unification Question, Sept. 22, 1969, Department of State, FRUS, Korea, 1964~1968.

289) 박태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외관계사 제2권, 50~56쪽.

290) UNCURK, 「Report of the UNCURK, A/7212」(New York: UN, 1968), p. 5. https://digitallibrary.un.

org/record/725064(검색일: 2019.6.8.).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139-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