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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신저-저우언라이의 한반도 평화협정 쟁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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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키신저-저우언라이 1차 회담

1971년 7월 키신저는 중국 비밀 방문을 앞두고 미·중 대화의 목표와 논의될 의제들 에 대해 막바지 점검을 하고 있었다. 준비과정에서 작성된 문서들을 보면, 키신저는 중국방문의 목표로 미·중 정상회담 개최와 공동선언에 대한 합의, 대만과 인도차이나 전쟁에 관한 문제를 두고 중국과 의견교환 및 공감대를 확인하는 것에 있었다. 당시 작성된 키신저의 모두 발언 초안에서 미국은 ① 대만(중국의 중요한 관심사) ② 인도 차이나(아시아 내 주요 갈등 지역) ③ 주요국들과 관계(소련, 일본) ④ 남아시아대륙의 폭발적인 상황(많은 국가가 관계됨) ⑤ 군비통제 문제(다자적, 양자적) ⑥ 한국 문제(여 러 국가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또 다른 문제) ⑦ 양자 문제(연락 채널, 무역, 여행) ⑧ 중국이 다루기를 원하는 문제 등 총 8가지 구체적인 사안을 두고 중국과 논의하고자 했다. 그런데 모두 발언 초안에 나타나 8가지 의제는 수정을 거쳐 7가지로 줄었는데, 5번과 7번 사안은 그 순서가 바뀌었고 한국 관련 의제는 삭제됐다.55)

5번 군비통제 문제와 7번 양자 문제의 순위가 바뀐 이유는 장시 미국이 미·중 관계 개선이 우선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수 있다. 또한 중국의 핵무기 능력이 지역적 타 격 능력만을 보유하고 있고 대륙간 탄도 미사일 같은 미국을 위협하는 발사체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미국과 동등한 핵 능력을 갖춘 국가라고 할 수는 없었다.56) 이 때문 에 7번째에 위치해 있던 미·중 간 교역과 대화채널에 관한 의제가 5번째 순위의 의제 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의제 선정 변화는 7월 9일 중국방문 첫날 키신저가 저우 언라이에게 행한 모두발언에 그대로 반영됐다.57)

55) “(Draft)Opening Statement.” July 4, 1971, p. 10. Folder Title: Briefing book for HAK’s July 1971 Trip POLO Ⅰ, For the President’s Files(Winston Lord)-China Trip/Vietnam, Box 850, NSC Files, NPL.

56) “Communist China’s Strategic Weapons Program.” NIE, Number 13-8-69, Feb. 27, 1969, Folder Title:

NSC Meeting(San Clemente), 8/14/1969, Briefing: Korea; China(3 of 3), Box H-23, H-files, NPM NARA.

57) “Memorandum of Conversation.” July 9, 1971, Afternoon and Evening(4:35 p.m.-11:20 p.m.), p. 5, Folder Ttitle: China-HAK memcons July 1971, Box 1033, Series: For the President’s Files-China/Vietnam Negotiations, NSC Files, NPL.

모두 발언 초안 변화과정에서 중요한 사항 가운데 하나는 처음에는 중국과 대화에서 한반도 문제를 논의 의제로 넣었다가 왜 대화를 앞두고는 이 문제를 뺐는가이다. 그 이유를 추측해보면, 당시 닉슨 행정부가 베트남, 대만뿐만 아니라 한반도 등의 아시아 의 핵심 쟁점 지역 모두를 중국과 첫 번째 고위급 회담에서 논의하는 것을 부담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미국이 미 중대화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했던 목표는 당연 미·중 관계 개선이었는데, 한반도 문제까지 끌어들여 협상을 복잡하게 끌고 나갈 이 유가 없었다. 미국에게는 중국과 대화에서 대만과 베트남 문제가 한반도 사안보다 더 긴급한 사안이었고,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한반도 문제를 두고 미·중이 논쟁을 한다 면 양국의 갈등 범위만 넓히는 결과를 불러오는 위험성이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미·

중 간에 직접 연계된 대만, 베트남, 한반도 문제들 가운데 대만과 베트남 문제는 중국 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했고 미국 역시 대만에서 미군 철수를 인도차이나에서 전쟁 종결을 위한 협상의 지렛대로 삼고자 했다.58) 반면, 상대적으로 한반도 문제를 둘러싼 미·중 대립은 베트남이나 대만만큼 심각한 사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후 미·중 대 화 전개에서 보듯 저우언라이가 한반도 문제를 쟁점화하면서 미국과 중국은 이 문제에 관해 긴밀한 의견교환이 이루어졌다.

물론 이들은 미·중 대화에서 한반도 문제를 선제적으로 다루지 않겠다는 계획을 세 웠지만, 그렇다고 한반도 문제가 미·중 대화에서 전혀 다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 하지는 않았다. 미국은 중국이 한국 정부의 군비증강과 대북 군사도발 가능성, 한반도 유사시 일본의 개입 문제, 이로 인한 자국의 안보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는 수준에서 한반도 문제를 제기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에 따라 그들은 중국이 위의 사안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경우, 북한의 군사력 강화에 따른 한국 군사력의 현대화 조치는 방어적 임을 강조하고, 남북한 간 군사적 불균형이 발생한다면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므 로 미·중 두 나라가 각각의 동맹국인 한국과 북한에 대한 억제의 필요성을 재촉한다 는 계획을 세웠다.59)

미국은 한반도에서 안정을 도모하는 정도의 선에서 중국과 한반도 문제를 다룬다는 원칙적인 입장이었다. 키신저의 중국 방문을 약 일주일 앞둔 7월 1일 닉슨, 키신저, 헤 이그(Alexander Haig)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 회합에서 닉슨은 키신저에게 미·중 대화

58) “Taiwan.” July 3, 1971, Folder Title: Briefing book for HAK’s July 1971 Trip POLO Ⅰ, Box 850, Series: For the President’s Files(Winston Lord)-China Trip/Vietnam, NSC Files, NPL.

59) “Korea.” July 3, 1971, Folder Title: Briefing book for HAK’s July 1971 Trip POLO Ⅰ, Box 850, Series: For the President’s Files(Winston Lord)-China Trip/Vietnam, NSC Files, NPL.

에서 한국문제에 관한 부분은 “매우 잘 되었다”고 언급했다.60)

1971년 7월 9일 키신저는 중국을 비밀리에 방문했다. 그는 사전에 계획했던 대로 저 우언라이에게 중점적으로 논의할 사안으로 대만, 인도차이나, 소련 및 일본과 관계 설 정, 미·중 간 안전한 대화 통로, 군비제한 등의 문제를 제시했다.61) 저우언라이는 키 신저가 제시한 의제 자체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도차이나반도 문제를 두고 진행된 저우언라이와 키신저 사이의 대화는 아시아의 또 다른 불안 지역인 한반 도로 대화 주제가 옮겨갔고, 저우언라이가 한반도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했다.

저우언라이는 키신저에게 미군이 베트남으로부터 철수하고 주월한국군, 주한미군 역 시 철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저우언라이가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한 이유는 단순했다.

중국이 1958년 북한 지역에서 자국의 군대를 철수시킴으로써 북한의 주권을 존중한 것 같이, 미국도 주한미군을 철수시켜 남한의 주권을 존중하라는 것이었다. 남한에 대한 내정간섭을 그만두고 한국인들이 외세의 간섭없이 자기의 일을 스스로 해결하도록 내 버려 두라는 요구였다.62) 그러자 키신저는 평화공존 5개 원칙에 기반에서 중국과 이를 합의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63) 이는 한국으로부터 격렬한 반응을 불러올 수도 있는 발 언이었다. 물론 키신저의 평화공존에 대한 강조는 한반도 냉전질서의 안정적인 현상유 지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저우언라이의 요구사항과는 결이 달랐다.

저우언라이는 강해지는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선봉 역할을 하고, 주한미군이 이러한 미국의 계획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우려했다.64) 그러자 키신저는 저우 언라이의 주한미군 철수 요구가 내심 일본에 대한 경계의 차원에 있음을 꼬집으며 말 하면서, 한반도 지역은 미·중 관계에 크게 영향을 받고, 급작스러운 미군 철수는 동 북아시아에서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으므로 미·중이 협조해서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점진적으로 해결하자고 저우언라이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길, 주한 미군 주둔은 미국의 대외정책에 있어 항구적인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며, 닉슨 행정부 는 이미 2만 명을 철수시켰고 닉슨의 다음 임기 또는 매우 가까운 미래에 상당한 규모 로 추가 철수를 할 수 있다고 저우언라이를 안심시키려 했다.65) 닉슨의 다음 임기까지

60) “137. Memorandum for the President’s File.” July 1, 1971, May 7, 1971, Department of State, FRUS, China, 1969~1972, p. 357.

61) “Memorandum of Conversation.” July 9, 1971, Afternoon and Evening(4:35 p.m.-11:20 p.m.), p. 5, Folder Ttitle: China-HAK memcons July 1971, Box 1033, Series: For the President’s Files-China/Vietnam Negotiations, NSC Files, NPL.

62) Ibid., p. 35.

63) Ibid.

64) Ibid., p. 37.

주한미군 상당 부분을 추가로 철수시킨다는 키신저의 말은 중국과 그 동맹국 북한을 고무시키는 발언이었다. 물론 키신저의 주한미군 추가 철수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은 한국 정부를 불안케 하는 요인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다음 날 7월 10일 12시 10부터 18시까지 키신저와 저우언라이는 장시간의 두 번째 대화를 진행했다. 한반도 문제는 두 번째 대화에서도 논의됐다. 저우언라이는 전날 예 기했던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다시 한번 언급했고, 1954년 제네바 회의에서 결론에 이 르지 못한 평화협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한반도 긴장상태의 모든 뿌리가 평화 협정을 맺지 못한 것에 있다고 말하면서, 상대방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북 한은 불안해한다고 말했다.66) 저우언라이는 한반도에서 평화협정 체결의 필요성을 강 조했지만, 키신저는 이에 대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키신저의 방중을 앞두고 미국은 한반도 안정화 방안으로서 미·중 간의 노력을 통한 남북한 간의 적대성 완화 가 필요하다는 사전 입장을 마련했었지만, 한반도에서 평화협정 체결 문제는 준비되지 않은 사안이었다.67)

1차 미·중 대화의 마지막 날인 7월 11일 오전 저우언라이와 키신저는 1시간 30분가 량 회담을 진행했다. 저우언라이는 마지막 날 회담에서 남한 내 한·미 공동사령부가 북한을 자극할 수 있고 중국 역시 이를 반대한다고 언급했다. 그러자 키신저는 이 조 직은 한·미 군사 공약 확대가 아닌 미군 철수를 손쉽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저우언라이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면서 중국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해 북한이 미국과 한국에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게 하는 것이 아시아 평화에 이바지한다고 말했다. 저우 언라이는 1954년 제네바 회의를 상기시키면서, 당시 미국 측의 반대로 제네바 회담에 서 한국 문제논의는 성과 없이 끝났고, 이후 한반도는 ‘화약고’가 돼버렸다고 말했 다. 북한을 억제하는 것보다 한반도 정전체제를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것이 실질적인 평화를 불러온다고 강조함으로써 키신저를 에둘러 비판한 것이다. 그는 극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는 미군이 아시아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68)

저우언라이가 한반도에서 평화협정의 필요성을 언급했지만, 이에 대해 키신저는 구 체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중국의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우려를 이용해

65) Ibid., pp. 38~39.

66) “140. Memorandum of Conversation,” July 10, 1971, 12:10-6:00 p.m. Department of State, FRUS, China, 1969~1972, p. 419.

67) “Korea,” Folder Title: Briefing book for HAK’s July 1971 Trip POLO Ⅰ, Box 850, Series: For the President’s Files(Winston Lord)-China Trip/Vietnam, NSC Files, NPL.

68) “143. Memorandum of Conversation,” July 11, 1971, 10:35-11:55 a.m., Department of State, FRUS, China, 1969~1972, pp. 449~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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