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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단과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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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패「신명」(이하,「신명」)은 1982년 7월 국립극장에서 극회 「광대」가 공연하 였던 <돼지풀이> 재공연과 창립공연 <안담살이 이야기>(1982)부터 광주와 전라도를 중 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당극 전문연희 극단이다.‘신명’이란 명칭은 민중의 정서적 기능과 함께하는 활동성을 강조한 의미이다.

현재의 주요 활동은 창작극 공연, 강습활동, 청소년교육 사업이다. 전통극, 노동극, 청소년극, 오월극 등 사회 제반에 대한 다양한 소재의 창작공연활동과,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탈춤, 풍물, 민요놀이 등의 강습이 있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문화 사업은 마당극캠프, 찾아가는 마당극학교, 청소년문화한마당 등 다양한 형태로 문화 공간 확충과 문화예술교육의 일환이다.

약 30년에 걸친「신명」활동을 시기 별로 구분하면 1970년대 후반기의 극회「광대」

활동, 1980년대 초기「신명」 창립 이후의 활동, 1980년대 중반 이후 마당극 전성기와 함께했던 활동, 1990년대의 어린이와 청소년을 주요대상으로 활동했던 시기, 2000년대 의 새로운 모색의 시기 등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전라도 지역의 마당극과의 첫 인연은 해남 YMCA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던 해남농어민 회의 가을농민잔치부터이다. 놀이패「한두레」를 초청(1977년 12월)하여 봉산탈춤의 먹중춤, <진오귀굿>의‘도깨비장면’을 공연하였다. 이 행사에 참가한 학생들은 1977 년 겨울 Y가면극회를 조직한 후 방학기간동안 서울 놀이패「한두레」의 채희완(현 부 산대 교수), 김봉준(화가), 류인택(영화 제작자) 등의 지도로 이론과 실기를 쌓게 된 다. Y가면극회가 1978년 봄 개학과 함께 광주·전남에서 최초의 대학 탈춤반인 전남대 민속문화연구회를 등록하게 되면서 광주지역의 마당극이 태동하게 되었다. 한편, 1974 년 〈서울 말뚝이〉(허규 작, 손진책 연출)공연 전후에 광주의 극단「향토」에서 〈전 라도 꼴뚜기〉(한옥근 작·연출)를 창작탈춤으로 공연68)한 바 있다.

전라도 지역의 마당극 효시는 함평농민들의 고구마 피해 보상 투쟁담을 다룬 <함평 고구마>(1978, 박효선 연출)이다. 전남대 민속문화연구회와 전남대 연극반이 중심이 된 <함평고구마>는 여러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먼저, 최초의 공연 작품이 현장성을 강하게 담보함으로써 이후 전개되는 작품의 방향성을 미리부터 확고하게 했다는 점

69)에서 마당극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였다는 점이고, 극회「광대」(1979, 이하「광 대」)를 결성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전남대 탈패, 국악반, 연극반, 조선대 탈 패가 중심이 된 문화패였다. 서울의 놀이패「한두레」(1974년도 소리굿 <아구>공연 후 창단)에 이어 지역에서는 첫 번째 마당극 공연단체가 된다.

「광대」는‘민주화의 봄’인 1980년 3월에 농촌사회극 <돼지풀이>를 YMCA 무진관에 서 창단 공연을 하였다. 이어 농촌현장 공연과 더불어 <한씨 연대기>를 준비하던 중 광주 5·18 민주화운동이 발생하였다.「광대」회원들은 광주 5·18 민주화운동에 참여하 여 대중연설과 홍보활동 등의 진행을 맡았다. 당시‘들불야학’교사이자 단원이었던 윤상원은 산화하고 다수가 구속과 수배 및 강제징집 등을 당했다. 이후 진보적 예술 운동가들은 이를 ‘5월 문화항쟁’으로 명명하며 문화운동의 표상으로 삼고 있다.

「광대」에서 활동했던 주요 인물은 윤상원, 윤만식, 김정희, 김선출, 임희숙, 김정 희, 김태종, 김윤기 등이다.

「광대」는 1981년도 5월 광주민중항쟁 1주년이 되는 해에 마당극 <호랑이 놀이>(김 정희 연출)를 공연하였다. <호랑이 놀이>는 광주 5·18문제를 처음 다룬 작품이다. 공 연 장소 광주 YMCA의 무진관은 1980년 5·18 당시에 항쟁지도부가 자주 옥내집회를 열 던 곳이고 시민군의 총기 훈련을 실시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YMCA 무진관에서 <호랑이

68) 한옥근.『광주·전남연극사』, 금호출판사, 1994,121쪽.

69) 박영정,「광주·전남지역의 마당굿운동에 대하여」,『전라도 마당굿 대본집』, 들불, 1989, 10 쪽.

놀이>의 공연은 마당극의 ‘상황적 진실성’이 구현된 작품이었다. 그러나 공연 이후 회원의 부재와 운영상의 어려움 등으로 유명무실해지면서 자연 해체하였다.

「광대」해체 이후,「광대」의 뒤를 이을 사회·문화운동단체의 시대적 필요성에 따 라 「신명」이 창단되었다. 당시 필자가 활동하던 기독교청년회 산하 문화선교단 「갈 릴리」가 사회·문화패로 활동하고 있었으나, 종교적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내부의 과 제였다. 여기에 「광대」와 대학 탈패들이 결합하여 놀이패「신명」 창단을 준비하였 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2년 국립극장장 허규의 <돼지풀이> 초청70)은 극단 창단의 탄 력을 받게 되었고, 이후 창립 작품 <안담살이 이야기>를 공연하였다.

「신명」의 창립 취지는 전통 문화의 올바른 발굴·조사 및 그 현대적 수용, 향토문 화의 독자적 전승과 보급, 근대적 시민의식의 형성을 위한 정기 공연, 근대화 운동을 위한 현장공연, 회원의 능력계발을 위한 기능 수련, 이상적 문화예술연구의 확장71) 등이다. 당시에는 마당극 공연 자체를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는 것과 전통문 화의 현대화를 주요한 활동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구성원 다수가 학생 신분이고 병역문제나 학내문화패로 복귀하게 되자 활동은 공백기가 된다. 다만 대표였 던 윤만식과 기획자 박선정이 주도하여 무대극 <단독강화>(1983)와 <그 입술에 파인 그늘〉(1985)등의 공연을 통하여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후, 전남대학교 민속문화연구 회의 학내 공연만이 유일한 마당극 공연이었다. 당시 민속문화연구회의 회장이었던 문 병화는 대학 탈패와 사회문화패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대학에서 공연이 활발하게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것은 대학이 5·18 이후 국가권력에 의한 강압적인 시대에 집회가 가능했던 합법적인 공간이었다는 점과 문화운동을 했던 선배들의 지원이 컸다. 당시 탈패는 사회운동차원에서 여러 부문운동에 진출하던 시기였으며「신 명」과도 연계를 가지고 있어서 문화운동 차원에서 「신명」에서 활동 할 수 있는 인적자 원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72)

위에서 알 수 있듯이「신명」은 5공화국 시절 마당극을 통한 사회적 활동이 어려웠 던 반면, 대학 탈패에 대한 지원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다 음에 마당극을 재개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70) 당시 <돼지풀이>의 돈철 애비역을 맡은 필자의 기억으로는 제목이 ‘마당극의 어제와 오늘 그리 고 내일’이라는 주제의 세미나였으며 <서울말뚝이>도 함께 공연하였다. 우천으로 인해 공연장소 는 국립극장 대극장 무대였지만 원형무대로 공연되었고 관객들도 무대에 올라와 관람하였다. (오 늘날 해오름극장)

71) <안담살이 이야기>(1982), 극단「신명」, 창립공연 팜플렛 中.

72) 문병화(1980학번, 1981년도 민속문화연구회 회장역임) 전화인터뷰, 2011년 3월 1일.

「신명」활동의 전성기는 80년대 중반의 정치적인 유화국면기와 더불어 대학 탈패 출신의 입단이 이어지면서부터 이다. 1985년 4월 광주지역 민중문화 운동의 일환으로 노래, 영상, 문학패들은 ‘광주문화큰잔치’를 개최하였다.「신명」은 신주거지개발 이주문제를 다룬 사회 고발극 <신가리 성주풀이> 로 참여하였다. 이어서 정기 공연

<당제>(1985)를 준비하면서 극단의 정상적인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당시 주요 활동 가는 전남대 민속문화연구회 출신의 정진모, 이태영, 문병화 등이다. 이후 이용석, 신 정근, 이승호, 김창준, 김은희, 주상기, 김학진 등 탈패 출신 다수가 합류하면서 안정 적 기반을 확보하게 되었다. 단원의 재생산구조로 대학 탈패가 되는 것은 탈패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하였기에 가능하였다. 대학에서 탈춤에 대한 기량과 공연 경 험이 바로 「신명」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이는 문병화의 진술이 뒷받침하고 있다.

1987년도에 공연된 <광대>는 암울한 시대상황에서 진정한 문화란 어떻게 자기 모습을 취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을 다룬 작품이다. 새로이 전열을 가다듬은「신명」의 문화운 동에 대한 자기 선언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신명」은 작품 <광대〉를 가지고 전국 각 대학과 부산, 대구, 원주 등 사회단체 초청으로 처음으로 전국 순회공연을 하였다.

이 시기는 민주화를 위한 사회적 분위기가 가장 고조된 때였다. 집회와 시민사회단체 의 활동이 활발하였고 공연 초청이 쇄도하였던 마당극의 전성기로서「신명」의 인지도 를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호랑이 놀이2>(1987) 도 계속적인 순회공연을 하였고, 1988년도‘제1회 민족 극한마당’에 참가하게 된다. 참가작 <일어서는 사람들>(1988)은 1980년 5월 광주민주 화운동을 전면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일어서는 사람들>은 호평과 더불어 60여 회의 순회공연과 약 3만여 명의 많은 관객이 관람하였다. <함평고구마>(1978)공연 이후 10 여 년간의 축적된 역량이 결집된 작품이었다. 당시「신명」작품은 ‘전라도 마당굿’

이라고 지칭할 정도로 활동적이었다. 가장 주요한 특징으로‘집단적 신명성’73) 을 꼽고 있다. 작품이 서사적이기보다는 풍물과 춤이 어우러진 집단춤을 주요하게 사용하 였고 정치적 색채가 강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에 괄목할 만한 성과는

‘시민문화교실’의 기획이다. 공연수익금으로 연습장 겸 강당을 마련하여 목판화교 실, 시 창작교실, 판소리교실, 풍물교실, 연극교실 등의‘시민문화교실’을 기획한 것 이다. 당시 기획자 이용석은 문화교실 기획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시민을 대상으로 한 예술교육을 통해 예술이 예술가들만의 소유가 아니라 모두가 예술가 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 문화예술에 대한 이해력과 감상력을 높이고자 하였다.74)

73) 박영정, 앞의 논문, 1989, 26쪽.

문화교실 기획은 문화·예술교육을 지향하는 것으로 6·29선언 이후 민주화된 분위기 에 기인한다. 오늘날처럼 백화점이나 문화단체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교육이 나 프로그램 등이 없던 시기에‘시민문화교실’은 예술의 대중화에 접근하려는 선진 적 기획이라 할 수 있다. 마당극의 전성기를 「신명」은 활발한 순회공연과 문화교실 을 통해 문화의 대중화 사업에 주력했던 것이다.

「신명」의 공연은 정기공연과 현장공연 등 두 가지 방식이다. 정기공연은 대학이나 사회단체 초청에 따라 하는 작품이고, 현장공연은 농촌 현장, 시위 현장, 민주열사 장 례 현장, 광주 5·18 행사 현장 등 주로 집회나 사회적 사건이 발생한 곳에서 이루어진 공연이다. 현장공연은 문화운동 단체로서의 성격이 담보된 활동이었으며, 정기공연은 대중 지향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오늘날에도 진행되고 있다.

마당극의 전성기 시기의 현장 공연 사례로 <못내 못내 절대 못내, 부당수세 절대 못 내>(1989, 공동창작, 김도일 연출)를 들 수 있다. 1980년대는 극회 「광대」의 활동과 마찬가지로 「신명」은 농민운동과 연대 사업이 활발하였다. 당시 전라도 지역의 물적 토대가 농촌경제였던 것도 컸다. <못내 못내 절대 못내, 부당수세 절대 못내>는 지역 농민회와 기획하여 화순, 진도, 해남 등 전남 각지에서 공연되었다. 필자는 화순 공연 현장에서 연출가 김우옥을 만났다. 그는 공연을 통하여 수세를 왜 내지 말아야 하는가 를 농민들에게 현장극으로 보여주는 작업은 마당극 본래의 목적을 훌륭하게 달성하는 작업이며, 마당극이 정치극의 기능을 달성한 모범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농민의 일상적인 생활로부터 시작하여 농민대회라는 의식행위를 거쳐 마당극이라는 신명나는 놀이를 지나 시위라는 정치적 운동에 이르는 전체과정이 바로 마당굿의 이상적인 본보 기라는 거다. 춘양면에서의 공연처럼 생활의식놀이가 뒤범벅되어 삶의 개선을 부르짖 으며 시위에 이르는 그 과정이 바로 Victor Turner나 Richard Schechnes 등이 주장하 는 일상생활 속의 연극, 그리고 연극 속의 일상생활을 보여주는 뛰어난 사례로 규정하 였다.75)

한편 채희완은 이 시기에 공연된 <황토바람>(1989) <밥이지일이여>(1990) <조씨네 마을 사람들>(1992) 등의 농민마당극은 「신명」이 체득한 전래의 농촌 심상속의 ‘신 명’이 오늘의 농촌문제를 풀어 가는데 구체적인 힘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76)고 말한다. 주요 공연 소재였던 농민 문제가 1980년대 종반에 노동자 문 74) 이용석과 제주도 여행길에서 인터뷰, 2011년 1월 8일.

75) 김우옥, 「마당극의 본질과 현장성」,『실험과 도전으로서의 연극』, 월인, 2000, 203쪽.

76) 채희완,「전라도 개땅 쇠의 신명으로 역사적 상흔을 치유하는」『놀이패신명 창립 20주년 기념 정기공연작품 모음』, (사)광주민족예술인 총연합 연행위원회, 2003, 9~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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