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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기(1990년대 초반~90년대 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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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극 한마당 참가 후 정기공연과 순회공연을 기획하거나 이전에 이미 극장 공연이나 현장 공연 등을 하였고, 일부 극단은 참가를 목적으로 작품을 제작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제2회 민족극 한마당’의 경우 대부분의 작품이 참가 이전에 현장공연, 또는 극장공연을 마친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참가작이‘노동문제’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제3회 민족극 한마당’에서는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 은 모든 극단들이 일치하지만 작품의 소재는 다양화된 경향으로 나타났다.

당시‘민족극 한마당’은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다. 먼저, 민간차원에서 이루어진 전국적 규모의 행사로서 70년대 이래 마당극의 역량을 결집하여 스스로를 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점. 둘째,「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라는 전국적인 연극 예술단 체를 조직하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 셋째, 민족극의 동숭동 공간의 공연 진출과 예술 극장「한마당」(대표 유인택. 서울 신촌) 을 개관하여 지역 극단이 서울에서 마당극을 공연할 수 있는 공연 공간이 마련된 점이다.

전국 규모의 연극제는 마당극의 전국적인 고른 성장을 의미하며, 전국에 흩어져 있 어서 교류가 쉽지 않았던 연극운동의 작품적 성과를 모아 현 단계의 수준을 평가하고 문제점을 정리해 앞으로 민족극운동의 나아갈 바를 전망해 보는 것이‘민족극 한마 당’의 중요한 목적53)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 시기는 공연윤리위원회의 공연대본 사 전심사가 완화되었고, 민주화에 대한 욕구도 폭발하여 극장에도 많은 관객들이 들었 고, 사회운동의 확장으로 노동조합, 농촌현장, 대학 등 각종 집회와 행사에서 활발한 공연들이 이루어졌다. 가히 마당극이 이 시대의 연극적 경향을 대표하는 보통명사가 될 정도로 일반화되고 상투화된 시기54)이다. 70년대에 자생적으로 발생하여 대중운동 을 발전의 동력으로 삼아왔던 그간의 마당극은 이 시기가 현실참여를 통한 사회운동성 의 정점이었고, 자생적인 발전과정을 밟아왔던 마당극 양식이 정립되는 시기가 된다.

지역 극단명 작품 내용 기타

서울 놀이패 한두레 소리없는 만가 역사극 종군위안부

대전 놀이패

우금치 아줌마만세 농민극 부대행사

부산 새벽 우끼시마호

폭침에 대하여 역사극 우끼시마호

침몰 사건

의 OECD가입과 세계화 정책, 문화의 산업화와 세계화 양상으로 중국, 소련, 구동구권, 북한 등 국경 없는 연극 교류가 실현되기 시작하였다.

마당극의 정치적 배경과 성장은 사회에 대한 반영과 비판이었고, 1980년대 한국사회 의 최대 관심사는 민주화여서 마당극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었다. 마당극은 사회 변혁 을 위한 목적극으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민정부와 더불어 민주 주의 사회가 형성되면서 이념논쟁, 정치투쟁 등의 거대담론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마 당극 활동은 협소해지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문예사를 훑어볼 때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정치성향의 예술은 그 사명이 끝나면 소멸55) 하듯,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마당극은 사회변혁과 민주화에 대한 소명이 사라진 것처럼 인식하게 되고 마당극 존재 여부에 대한 위기의 시기가 온다.

1990년대 초반은 마당극의 위기에 대한 반작용인양 새로운 소재와 주제를 찾게 되고 공연 대상의 변화도 발생하게 되었다. 아동이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교육극 또는 환 경문제를 다룬 작품들이 많아졌다.「함세상」재창단 직전의 놀이패「탈」의 <골프 공 화국>(1990), 극단「자갈치」의 공해풀이 마당극 <온산미역국>(1991), 극단「갯돌」의

<아! 영산강>, 극단「현장」의 <공해 공화국>(1992) 등 환경극과 관련된 공연작품은 1980년대부터 시민환경운동단체의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시작되었고,1980년대 중후반기 의 민주화운동이 환경운동과 결합되면서 생태주의로까지 외연이 확대되었다.

또한, 1993년 제6회 전국 민족극 한마당을 기점으로 살펴보면, 1980년대 후반부터 1992년까지 우위56) 를 차지하던 노동연극 편수는 노동연극을 전문으로 하는 극단을 제외하고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소재나 주제가 다양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표-4> 제6회 전국 민족극 한마당 참가 작품

(1993.4.30. ~ 5.30. (청주) 예술공간 두레마을, (대전) 예술마당 우금치, 한남대학교 성지관)

55) 유민영, 『한국 연극운동』, 태학사, 2001, 558쪽.

56) 1992.4.3 ~ 5.31, 부산 민족굿터 신명천지에서 진행된 ‘제5회 민족극 한마당’ 참가작 15편의 작품 중 노동극은 5편으로 제일 많이 차지함.

광주 놀이패

신명 말숙이와 봉란이 노동극 여성노동자

제주도 놀이패

한라산 살짝이 옵서예 역사극 제주도 4.3항쟁

서울 아리랑 마법의 시간여행 아동극 부대행사

부산 자갈치 봄날 우리 어머니의

어머니의 역사극 정신대 문제

서울 한강 잠적과 토템 노동극

서울 현장 심봉사 코끼리를

보다 사회극 세태풍자

부산 놀이패 일터

파스2장,피로회복제 1알 그러나 벅찬

새날을 위해

노동극

청주 열림터 대돈무문 사회극 사회풍자

참가한 작품 내용도 기존 노동 연극의 치열한 대립과 대응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두 면서 동지애와 사랑, 일상공간에서 노동자들의 서로 돕는 삶을 다루는 등, 달라진 시 각으로 변화되었다. 즉, 그간 마당극이 사회에 대한 관심이었다면 이후는 그 속에 존 재하는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소재의 다양성을 모색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마당극 내부는 인본주의의 관점에서 진지한 자기성찰의 시기가 되었고, 예술성에 대한 고민과 형상화문제, 미학적 근거와 양식화에 대한 자기를 돌아보는 기간이 되었다.

이 시기「신명」은 농민문제와 역사·민족문제 등의 기존의 소재에서 벗어나 〈말숙 이와 봉란이〉같은 노동문제를 다룬다.「얼카뎅이」는 내부 논쟁의 과정을 밟고서「우 금치」로 재창단하며, 대구지역은 진보적 연극 역량을 모아 새로이「함세상」으로 재 창단하게 되는 것은 위기의식에 대한 반사작용 이다. 거대담론의 붕괴와 함께 시민사 회로 전환되는 사회문화적 현상에서 마당극은, 수요의 약화와 극단의 내분으로 연극 목적에 대한 자기 방향성의 상실과 새로운 도전을 모색해야 했던 것이다.

90년대 마당극의 정체현상은 다음과 같은 변화가 발생하였다. 먼저, 마당극은 대중 과의 접촉을 위해 공연현장을 넓혀왔다. 그러나 그 현장이 좁아지면서 사회적 운동현 장 대신 학교연극교육, 문화의 집, 공공문화 공간 등으로 공연 공간의 이동하게 된다.

또한 과거에는 현장공연의 연장선상에서 극장 공연이었다면, 극장공연이 당연시 되면 서 이념적 가치보다는 각계·각층의 욕구를 맞추는 주제를 다룬 작품을 공연하기 시작

하였다.

결론적으로, 80년대 사회적 환경에서 열린 연극으로서 양식적 개념이 일반화 되었던 마당극은 1990년대 들어 전통 미의식과 양식의 다양한 실험 등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 었던 것이다. 이는 마당극의 정체기가 작품의 일신과 공연양식의 다변화 그리고 새로 운 대중기반의 확대 등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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