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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굿을 통한 제의와 한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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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의 연극은 제의적 종교 행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처 럼 제의적 종교행사로부터 탄생한 연극은 인류의 발전과 더불어 놀이적 형태로 발전하 면서 시대적 특성에 맞는 고유의 관습과 형태를 가지며‘형식’을 만들게 된다.「신 명」작품 중 역사적 사건을 재해석하고 그 속에 살아 숨 쉬던 민초들의 삶을 다룬 작 품은 제의의 형식을 띠고 있다. 이들 작품은 남도의 무당굿 놀이나 씻김굿을 차용하거 나 변용하고 있으며 굿의 제의성이 연행의 원리이다. 「신명」의 작품에서 제의의 형 식을 차용한 굿에 대한 양상은 크게 두 갈래로 구분된다. 하나는 공동체 집단의 염원 을 결집하는 무당의 역할과 놀이적 성격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 사건의 희생자들을 해원하는 씻김굿의 활용이다. 전통의 수용미학 측면에서 공연자 자신의 의식 발전을 도모하는 심리치료학적 측면도 나타난다. 굿의 제의성은 시대에 따라 양상이 변화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가. 현실비판적 제의

무속의식 중에 중요하게 여기는‘굿’은 일종의 종교의례이다. 인간의 출생, 사망, 행운, 장수, 치병,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심성에서 비롯되어 미래의 행운을 무당에게 의존하여 축원하는 것이 목적이다. 무당과 인간, 그리고 신령이 만나 현세의 인간문제를 해결하는 성스런 행위인 것이다. 굿을 차용한 공연은 관객과 두 가지 차원 에서 교감이 이루어진다. 하나는 무당이 홀로 공연을 할 경우 관객은 굿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정신적 염원을 지니지만, 다른 하나는 무당과 관객이 어느 대상 에 대한 공동의 갈등을 느낄 때는 비판적 입장에서 굿판에 개입하여 굿판을 제의로부 터 현실적 무대로 전환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를 <돼지풀이> 는 앞풀이 마당에서 잘 보여 주고 있다.

공연은 무당이 등장하여 죽은 돼지혼령을 위로하는 위령제부터 시작된다. 앞풀이는 놀이판의 정화의식이자 서사(序詞)의 위치를 갖는다. 이는 일상적인 세속 공간에서 거 룩한 공간으로 변전되는 것으로 일상적·현실적·세속적인 것이 거룩한 것과 서로 다르 지 않다는 것을 실체화하는 극의 도입부이다. 마당판에는 제상이 놓이고 동서남북에는 죽은 돼지사령들이 사방신이 되어 위치하고 있다. 돼지 사령들은 제상의 돼지탈에게 억울하게 죽은 사연을 고하면서 도둑놈들 없애주고, 돼지 혼백을 건져주고, 세상을 건 져줄 것을 기원한다. 무당은 판을 씻고서 돼지 혼백을 위로한다. <돼지풀이>는 1970년 대 말을 전후해서 농업축산정책의 파행적 모순에 의한 돼지값 폭락을 극화한 작품이 다.

무당 : (일어나서 강신이 된듯 한찬 어지럽게 춤을 추다가) 쉬-돼지 사연 듣고 보니 그 사 연 한번 서럽고 더럽다. 인간세상 돼지로 태어나 허구헌날 더러운 돼지우리 속 한평 생 좋다 싫다 말 한마디 없이 인간 위해 목숨 끊고 고기 주고 털도 주고 새끼까지 주 었더니 어쩌다 이런 날벼락이 우리에게 떨어졌단 말이냐 어찌 돈신께서 서러워하지 않으시리. 지상천지 만물 중 으뜸이 사람으로 태어나 돼지신세 같은 우리 농부님네 주인님네 잘살아보려 해도 이리 뺏기고 저리 쫓기다가 새마을이다, 새마음이다 새것 참 좋아하더니 어쩌다가 그런 변을 당했단 말이냐. 말세로다 말세로다. 알다가도 모 를 일이다. 허허, 참 모를 일이다. 돼지대신 이름 빌어 혼백한번 건져주소, 넋이라도 내리시고 혼이라도 내리시어 억울하게 죽은 혼백 내력이라도 밝혀주소. 허어- 83)

무굿의 기본 구조는 신을 모셔 들여 신에게 소원을 빌고 신을 돌려보내는 청신(請 83) 놀이패‘신명’엮음, 앞의 책,1989, 53쪽.

神) - 오신(娛神) - 송신(送神) 과장으로 구성된다. <돼지풀이>의 앞풀이는 사건을 맞이하는 굿의 청신과정으로 서사적 해설이며 제의의 신성성을 현실의 세계로 확장해 주는 기능을 한다. 앞으로 전개될 전체 공연은 죽은 돼지 혼백을 위로하고 농민들의 맺힌 한을 해원하는 굿판으로 설정되어 있다. 무당은 제의를 통해 사건을 도출하고 이 사건을 현실 문제로 전환하는 것이다. 사건의 내용은 농촌 소득증대 방안으로 돼지사 육을 권장한 당국의 지시에 따라 농가에서는 돼지를 사육하였다가 과다물량과 수입 돼 지, 그리고 중간상인의 가격 농간으로 돼지 값이 폭락하여 농민들은 절망에 빠진 것이 다. 작품의 마지막부 뒤풀이는 농민의 절망을 잽이의 선소리와 함께‘쾌지나칭칭나 네’를 부르며 현실의 아픔을 집단적 신명으로 승화시킨다.

무당은 굿을 주관하는 사람으로 한자어로 무(巫)라 하며, 이는 무당이 무형의 신을 섬길 때 양편소매를 드리우고 춤을 추면서 신을 내리게 하는 형상을 따서 만든 글자라 한다. 곧 무당은 노래와 춤으로 하늘과 땅, 신과 인간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사제이자, 신과 인간의 중개자이다. ‘굿’은 때로‘풀이’라고도 하는데, 이능화는 ‘굿’을 재 액(災厄)을 풀고 복을 비는 제의라고84) 해석하고 있다. 무당굿이란 결국 무당의 제의 적 행위를 통한 주술적인 종교현상인 것이다. 작품은 이러한 종교적 의례 행위를 의식 의 표현 양식이 아니라 문제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재현하고 농민의 한을 달래주고 풀 어준다.

<호랑이 놀이>는 연암 박지원‘호질’의 전통적 틀을 인용하여 우화적 기법으로 한 국의 현대사를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작품은 미국이라는 외세에 주목하여 해방 이 후 5·18까지의 정치적 흐름을 정리하고 있다. 신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코커국이란 나라 가 만만국을 침략하고 이에 대항하는 민초들의 저항을 통해 현대사 속의 광주를 조명 한다. 신제국주의의 본질을 상징하는 인물들은 전귀(전쟁귀신), 분귀(문화귀신), 금귀 (경제귀신) 등 의인화된 인물들이며 이들에 의해 조정된 한국의 정치사를 조소와 풍자 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호랑이 놀이>의 마지막 장면은 민초들의 전형적 대표성을 띤 팥죽할멈이 무당으로 분하여 전지전능한 힘에 의한 해결보다는 ‘만만국 백성의 힘 을 모아’해결하는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팥죽할멈 : (무당역할) 이 땅을 수 년간 지켜온 천지신명님, 비나이다. 저 괴물들을 깨끗 이 쓸어내고 정한 마당을 만들 터이니 만백성의 힘을 모아주소서.85)

84) 이능화·이재곤 역, 『조선무속고』, 동문선 , 1991, 176쪽.

85) 놀이패‘신명’엮음, 앞의 책,1989, 101쪽.

팥죽할멈의 기도를 실현할 사람은 모든 백성으로 배우와 마당판의 관객이다. 배우들 의 권유에 따라 마당판에 나온 일부 관객들은 배우들의 동작을 따라 하고 관객석에서 는 야유와 함성으로 팥죽할멈과 참여자를 응원한다. 배우와 관객들은 전투적인 풍물소 리와 함께 하늘과 땅의 기운을 모으는 반복된 동작에 힘이 모이면 호랑이 일당에게 일 격을 가하여 마당에서 물리친다.‘이겼다’라는 함성은 승리의 환호이며 공동의 힘에 대한 각성은 바로 뒤풀이 축제로 이어지게 된다.86) 관객은 참여와 응원이라는 집단 적 체험을 통해 낙관적 승리의 신명을 체험하게 된다. 집단적 신명은 곧 시위라는 현 장적 운동성으로 전환되어 마당공간이 현실의 공간으로 전환되고, 현실의 삶을 변화시 키고자 하는 시위 형태의 운동성으로 발휘되기도 하였다. <돼지풀이>가 스스로에 대한 위안과 해원이라면 <호랑이 놀이>는 마당판을 현실 세계로 확장하여 능동적으로 사건 을 해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집단적 신명을 이끌어 내는 무당은 신과 인간을 하나 로 연결시키는 사제가 아니라 현실과 인간의 중개자로서 문제의 해결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일어서는 사람들>은 1980년 5월 광주의 아픔을 극복하고 미래를 이야기하는 광주시 민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특히, 극의 전 과정을 역동적인 춤과 노래 그리고 풍물 등을 활용하여 5·18을 상징적으로 형상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섯째 마당은 무굿 의 고풀이를 변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망자는 매듭지어진 고가 풀렸을 때 이승의 결 박에서 풀려나 저승길로 갈수 있는 것으로, 고풀이는 망자의 원한을 구상화하고 있는 행위이다. <일어서는 사람들>에서는 이러한 굿적 행위를 제주 스스로가 시행함으로써 신(神)내림의 의미를 갖고 있다.

곱 추 : 우리 아들 아는 사람 없소 함 께 : 얼싸 어기여차

유가족 1 : 당신 아들은 민주의 투사 함 께 : 얼싸 어기여차

유가족 2 : 당신 아들은 우리의 희망 함 께 : 얼싸 어기여차

곰배팔이 : 우리아들 어떠했소 함 께 : 얼싸 어기여차

유가족 3 : 용감하고 똑똑하고 분명 잘난 아들이었소 함 께 : 얼싸 어기여차

곱 추 : 그러면 그렇지 우리아들 보았소

86) 필자는 이 공연을 1981년 당시에 관람하였음.

함 께 : 보았오!

유가족 4 : 자유 사랑하는 얼굴, 민주향해 뻗치단 팔, 평화향해 달리던 다리 함 께 : 얼싸 어기여차 얼싸 어기여차

(굿거리 장단에)

얼씨구 절씨구 모두가 내 아들 얼씨구 절씨구 모두가 내 형제 얼씨구 절씨구 한가족이었다네

유가족 모두 합류하면 굿거리 장단에 다같이 끈을 어깨에 메고 춤을 추며 원을 만든다.

원이 만들어지면 앞뒤로 걸어 가면서 어깨에 있는 끈을 풀어 개별적으로 끈을 나눠 가진 뒤 ‘꽃아, 꽃아’ 노래를 부른다.87)

배우들이 어깨에 메고 있는 고를 상징하는 빨간색 끈은 광주를 상징하는 피의 상처 이다. 유가족들이 고의 매듭을 풀어가는 것은 감정의 매듭을 푸는 것이요, 스스로에 대한 해원이다. 고풀이는 유족과 광주시민에게 있어 죽은 자와 산자에 대한 해원의 의 미를 지니고 있다. 풀어진 고는 노래‘꽃아, 꽃아’에서 꽃으로 활용되었다가 이어서 머리띠로 사용 된다. 고에서 꽃으로, 꽃에서 머리띠로 변화하는 고의 의미적 요소는 해원을 통한 현실극복이며 살아남은 자의 결의이다. 이는 제주 스스로가 접신하여 살 아 있는 본인의 삶을 확인하고 생명력을 역동적으로 살려냄으로써 굿은 내세적 관계가 아니라 현세적 관계임을 보여준다. 삶과 죽음에 대한 세계관속에서 해원과 현생에 대 한 씻음을 통해 삶에 대한 욕망과 삶의 주체자로서 강한 의지이다.

<돼지풀이>의 무당은 사건의 재현을 위한 안내자이고, <호랑이 놀이>의 팥죽할멈 은 사건해결을 위한 선동가이고, <일어서는 사람들>은 해원하고자 하는 제주가 굿을 통해 스스로를 해원하는 내림을 받은 무당이다. 무당은 신에게 소원을 고하여 한풀이 를 염원하기 보다는 생산물의 폭락에 따른 고통과, 외세에 의한 민족성 상실의 위기, 군부에 의한 죽음에 대한 슬픔과 극복을 인간 스스로가 해결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제의’를 통해서 나타내고 있다. 제의의 틀 속에 풍물·춤·놀이 등의 역동성을 결합 하여 ‘집단적 신명’에 대한 ‘미적 체험’을 관객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 럼 작품은 사건을 있는 그대로의 재현보다는 무당을 매개로 사건의 이면에 대한 집단 의 해석과 집단적 재구성으로 풀어가고 있다.

1980년대 마당극은 등장인물의 전형성을 중시했다. 전형성이란 개별적인 구체성과 특수성을 지닌 채로 사회 전체적인 모습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성격, 즉 구체성을 통한

87) 놀이패‘신명’엮음, 위의 책, 1989, 212~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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