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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산업도시 거제, 빛과 그림자

양승훈 지음

논문이나 보고서에서 지역산업의 흥망성쇠는 흔히 간단한 수치와 그래프로 압축되곤 한다. 이 책의 무대인 거제 역시 2000년대 이래 가파른 성장과 쇠퇴를 경험한 산업도 시 중 하나다. 2018년 상반기 거제시의 실업률은 전년 대비 4.1%p 상승한 7.0%를 기 록했는데, 이는 시·군 실업률을 통계 작성한 이래 가장 높은 수치에 해당했다. 대우 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의 구조조정에서 비롯된 주력산업의 위기는 이내 도시 전체의 위기로 확산되었다. 2018년 거제시의 아파트 가격은 전년 대비 25% 하락했고, 청년층 을 중심으로 한 인구유출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산업위기는 실제 거제의 일터와 삶터를 구성하는 근로자와 가족들의 삶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 여파는 전술한 몇 개의 지표로 납작하게 요약될 수 없는 입체적이 고 지속적인 결과를 빚어냈다. 조선소의 몰락은 보수적이던 산업도시의 삶의 양식을 신속하게 해체했고, 결혼생활 영역에 한정되었던 여성과 딸들의 세계관을 지역 바깥 으로 확대하였다. 지역 청년들의 삶의 경로에도 갑작스런 균열과 분기점이 발생했 고, 옥포 조선소의 엔지니어들은 기존 산업의 경계 밖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기 시작 한다.

이 책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는 산업위기의 영향을 통계 너머 실제 사람들의 이 야기를 통해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완벽하게 추천할 수 있는 책이다. 사회학자이자

문화인류학자인 양승훈 교수는 현 직장인 경남대 사회학과에 재직하기 전, 거제시에 위치한 대우조선해양에서 5년간 근무했다. 흔치 않은 경험에 기초해 이 책은 2015년 부터 2017년까지의 해양플랜트 위기가 지역에 미친 영향을 생생하게 추적한다. 이 책 을 통해 저자는 2019년 한국출판문화상(교양 부문)과 2020년 한국사회학회 학술저술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제목에 실린 중공업 가족의 개념에는 중의적 의미가 담겨 있다. 일차적으로 중공업 가족은 조선소에 근무하는 남성 가장이 가족 전체의 생계를 책임지는 산업도시의 전 형적인 외벌이 가족 모델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 중공업 가족은 끈끈한 유대감을 강요하며 폐쇄적인 정체성을 만들어냈던 대기업 중심의 ‘회사-가족 공동체’를 뜻하고 있다. 어느 쪽이든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는 지역을 관통한 산업위기의 과정 속에서 사정없이 흔들린다.

이 책의 1부는 거제시 중공업 가족의 탄생을 다루고 있다. 옥포 조선소 주변으로 일 감을 찾아 몰려온 전국의 노동자들은 도시 전체의 경관과 구조를 변화시킨다. 거제의 조선업은 1990년대 후반 세계시장을 제패하게 되고, 조선소에 흘러내린 막대한 부는 큰 도시가 부럽지 않을 위락시설, 교육기관, 문화시설의 조성을 이끌어냈다. 고액 연 봉과 정년을 보장받는 원청 노동자들의 ‘중공업 가족’은 거제 사회를 이끄는 중심계층 이 된다. 삼성중공업이나 대우조선해양의 근로자들은 상갓집이나 선 보는 자리에도 깨끗이 다려진 작업복을 입고 참석할 만큼 자신들이 거제시의 발전을 이끄는 존재임 을 인정받았다. 반면, 하청기업의 노동자들은 작업장 안에서나 바깥에서나 밑자리 카 스트의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책의 2부는 저자의 전공 분야이기도 한 현장 엔지니어들의 관습과 도전을 심도 있게

ⓒ삼성중공업 홈페이지

연구자의 서가 49

연구자의 서가 50회 예고

이윤석 국토연구원 부연구위원이 다음 필자로 나섭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파헤친다. 특히 지역 공고 출신의 ‘작업장 엔지니어’와 서울 공대 출신의 ‘랩실 엔지니 어’들의 갈등을 다루는 부분은 분석의 깊이와 현장성이 남다르다. 하면 된다는 근성과 손끝 숙련에 의존하던 전통적인 조선업의 엔지니어들과 달리, 디지털 기술로 무장한 새로운 세대의 엔지니어들은 훨씬 더 개방적인 방식으로 다양한 지식 커뮤니티에 참 여하며 자기 주도적인 학습경로를 전개해나가고 싶어한다. 금요일마다 셔틀버스에 몸 을 맡기고 수도권을 향하던 후자의 집단은 조선업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대부분 지역 을 이탈한다. 고도화와 다각화를 추진해야 할 산업도시 거제에 있어 젊은 엔지니어들 의 이탈은 뼈아픈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책의 3부는 산업위기 과정에서 거제를 떠나는 다양한 사회집단의 이야기를 다룬다.

저자는 특히 지역을 떠나는 여성 근로자들의 상황에 조명하고 있다. 외벌이 중공업 가 족이 대세를 이루던 거제에는 여전히 여성을 위한 일자리가 마땅치 않다. 더는 조선소 의 사무보조직 입사를 거부하는 젊은 여성들은 수도권의 삶과 기회를 찾아 지역을 떠 난다.

산업도시 거제는 그래서 어떻게 발전해나가야 할까? 조선업 내부의 다양한 이해관 계와 기술 여건의 변화를 다루던 저자가 결국 찾는 답은 도시다. 젊고 창의적인 인재 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도시, 청년들에게 지속적인 학습의 기회를 제공하고 여성 근로 자에게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는 도시가 될 때에야 노후화된 중공업 벨트의 미 래를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가 우리에게 남기는 비전이자 과제다.

창조적 도시재생 시리즈 16

공공서비스를 정부와 민간이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