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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수 ․ 한동근(2002)의 주장과 문제점

문서에서 토지는 공유되어야 하는가? (페이지 102-112)

전강수 ․ 한동근(2002)은 먼저 1970년대 이래로 우리가 경험했 던 몇 번의 경기순환 중 1971~72년의 불황, 1979~80년의 불황, 1984~85년의 불황 그리고 1992~93년의 불황 등이 토지투기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1990년대 후반의 소위 외환위기도 그 주된 원인이 1980년대 후반에 있었던 토지투기에 있다고 주장 한다.

아울러 토지투기가 용지가격은 물론, 임금, 금리 등을 높게 하고 사회간접시설투자를 저해하여 물류비용을 높이는 주된 원인이었다 고 주장한다. 그리고 금융부문의 비효율을 가져온 것도 토지투기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관련된 1970년대초에서 1996년까지의 연간 시계열 자료를 이용하여 Granger-causality test 결과를 제시하고 있다. 이 절에서는 이들 의 주장을 살펴보고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1. 지가와 경기변동

(1) 1960년대말의 부동산 가격 급등과 70년대초의 경기침체 주지하는 것처럼 1960년대초에 소위 증권파동 사건으로 우리나 라의 증권시장은 사실상 기능을 중단한 상태를 오래 유지하였다. 물 론 증권파동 이전에도 증권시장이 일반 국민들의 저축자산을 운용 하는 시장으로서의 기능은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1965년의 금리 현실화 이후 은행의 저축성 예금이 크게 늘어났다. 경제성장의 시작 으로 소득이 늘기 시작했고 이로써 개인들의 저축이 증대되기 시작 했으며, 이러한 저축이 은행예금으로 흡수되는 현상이 나타났던 것 이다. 마침 이러한 때에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 대규모 개발투자가 시작되었고 196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고금리 정책도 후퇴하 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와중에도 통화량은 계속 높은 속도로 증가되 었기 때문에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0% 이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러한 상황에서 적절한 저축수단을 찾지 못한 국민들은 인플레이션 으로부터 안전한 부동산과 위험성이 높더라도 고수익이 보장되는 사채 등에 많이 의존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러한 때에 마침 개발 투자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부동산 투기의 바람이 쉽게 일

어날 수 있었다. 토지가격은 1968년과 1969년에 각각 명목으로 35% 및 52% 상승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43) 1968년과 69년의 물가는 특이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으나 성장률은 각각 12.6% 및 15.0%를 기록하여 국민소득계정 편제 이래 최고 기록을 연달아 갱 신하였다. 이와 같은 경기과열은 무엇보다도 국제수지적자의 급격 한 확대를 가져왔고 당시 정책당국자들에게는 이것이 가장 커다란 문제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44)

이러한 인식에 입각해서 1969년말과 1970년 초에 강력한 안정 화대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대책의 결과로 통화 증가율은 1968년과 1969년의 44.6% 및 41.7%에서 1970년과 1971년에는 각각 22.1%와 16.4%로 급락하였고, 대미환율은 1968년의 281.50원에서 1970년에는 316.65원, 그리고 1971년에는 373.30 원으로 급격하게 인상되었다. 그런데 마침 1960년대말부터 장기호 황을 보이던 세계경제는 둔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고 1970년대 에 접어들면서 주요 선진국들의 경기침체가 나타났다. 이와 함께 보 호주의 경향도 강화되기 시작해서 수출의존도가 갑자기 높아진 우 리 경제는 안팎으로 압력을 받고 급속하게 위축되는 결과가 나타났 다.

이러한 과정을 살펴볼 때 1970~72년의 경기침체는 지나치게 과 격한 경기억제정책과 선진국의 경기침체가 동시에 나타난 것이 주 원인이라고 할 수 있으며 조지스트들이 주장하는 투기와 이에 따른 토지관련 부문의 위축에 의한 불황의 파급 또는 임대료 상승과 임금 상승 등에 의한 투자위축 등의 요인으로 설명할 여지는 거의 없다고 판단된다. 더구나 “부동산 투기의 덫에 걸린 기업들의 자금난을 덜

43) 전강수 ․ 한동근(2002), p.226.

44) 한국은행(1975), p.183.

어주기 위해” 8.3사채동결조치가 실시되었다는 주장은 더욱 앞뒤가 맞지 않는다. 당시의 사채이자율은 연율로 40~50% 수준이었기 때 문에 이러한 자금으로 부동산 투기를 할 개인이나 기업은 합리적인 경제주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45) 대기업들은 관치금융하에서 여 러 가지 훨씬 낮은 금융기관 대출이나 각종의 특혜적인 재정자금 융 자 등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채동결의 더 큰 수혜자들은 주 로 중소기업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차입경영에 주로 의존하 던 대기업들의 재무구조가 매우 나빴고 호황을 맞아 무리하게 확장 투자를 하던 중에 급격한 긴축금융정책을 실시하면서 일부대기업들 의 부실이 나타났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실기업들의 부 실원인이 대부분 부동산 투기 때문이었다거나 부동산 투기 기업들 의 사채차입을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 주기 위해 8.3조치를 취했다 는 주장은 사실을 매우 왜곡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2) 1979~1980년의 불황

1972년 실시된 8.3조치와 뒤이어 추진된 다양한 구조조정, 그리고 1973년의 중화학 공업화 선언 등에 힘입어 1973년에는 사상 최고 의 경제성장을 기록하는 호황을 맞이하였다. 1973년말에 제1차 석 유파동이 있었지만 적극적인 정책대응으로 단기간 내에 극복하고 1970년대 내내 고도성장기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소 위 중동 붐이 이어져서 해외부문을 통한 자금공급이 풍부하게 이루 어졌고 또 중화학 공업화의 과감한 추진과정에서 대규모 산업시설 투자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개발 붐이 나타났다. 그 결과 자산 인플레이션도 만만치 않게 진행되었다. 1970년대초의 금융구

45) 2005년 6월 9일자 edaily의 연재기사 (한국경제 반세기)"한밤의 충격"..8.3 사채 동결조치②에 의하면 8.3조치 당시 평균 사채이자율은 월 3.84%였다고 한다.

조개혁정책의 일환으로 증권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도입된 정책들이 주효하면서 중동 붐과 함께 주식시장의 활황이 이어졌고 토지시장 에서도 투기적인 가격상승이 이루어져 그 피크라고 할 수 있는 1977~78년에는 토지가격의 명목으로 각각 33% 및 49%나 상승하 였다. 이 기간중 다시 저금리 정책으로 복귀하였고 환율도 484원에 서 고정되어 수입대체적인 정책기조가 유지되었다.

1980년 제2차 석유파동이 당시 경기침체의 주된 원인이었지만 그 이전에 이미 경기후퇴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었다는 진단은 사실 이었다. 전강수 ․ 한동근(2002, p.226)은 이러한 침체의 원인으로 지가상승에 의한 생산의 압박을 강조한다. 회사채 수익률이 10%로 높은 수준에 있었던 것이 부동산 투기의 높은 수익률에 기인하는 것 이며 실질노동비용도 1977~78년중 각각 22% 및 17%나 상승하여 이로 말미암은 경기불황이 초래되었다는 것이다.46) 1970년대 중후 반의 임금급등은 주지하는 것처럼 급격한 중화학 공업화 추진과정 에서 나타난 인력수급의 불균형에 기인한 것이지 조지스트들이 주 장하는 것처럼 주거비 상승에 따라 노동조합이 임금상승을 요구해 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대형의 첨단설비를 갖춘 공장들이 건설되 어 가동을 시작하게 됨에 따라 고급인력의 수요는 급증했으나 국내 의 이공계 대졸인력 공급이 태부족했기 때문에 이들의 임금이 급등 했던 것이다. 금리에 대해서도 회사채 금리가 높았다고 해도 회사채 에 의한 자금조달비율은 매우 낮았고 주로 금융기관으로부터의 차 입에 의존했으며 금융기관의 금리는 정책적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토지가격이 영향을 줄 여지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1970년대말에 들어서면서 투자가 둔화되고 경기후퇴의 징후가 나타난 것은 사실 이다. 투자의 둔화는 그동안 과감하게 추진되어 온 중화학 공업화

46) 전강수 ․ 한동근(2002), p.226.

프로젝트들이 거의 마무리되었으나 이러한 사업들 중 다수가 기술 및 경험 부족 등으로 경쟁력 있는 제품을 출하하지 못하는 등 어려 움을 겪거나 국내 시장에 과잉공급사태가 발생하는 등 무리한 중화 학 공업화의 부작용들이 가시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거기에 다가 중동 붐도 퇴조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중동에서 철수하는 인 력과 건설장비 등은 국내의 생산요소시장을 압박하는 또 하나의 부 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와 같이 부동산 투기를 거론하지 않아도 당시의 경기둔화는 충분히 설명된다. 그리고 물론 1980년에 나타난 석유파동은 국내의 부동산 투기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3) 1990년대의 불황

1984~85년의 불황에 대해서 전강수 ․ 한동근(2002)은 매우 간 단하게 언급하고 넘어간다. 이 불황의 앞에도 1982년부터 시작된 토지투기가 있었다는 점과 이 토지투기는 금융실명제의 추진과 관 계가 있다는 점만을 언급하고 있다. 토지가격지표와 경기지표간에 선후행 관계가 규칙적으로 나타난다고 해도 논리적으로나 실증적으 로 설득력 있는 이론에 의한 인과관계의 설정이 불가능하다면 토지 가격이 경기불황을 가져왔다는 주장은 그 타당성을 인정받을 근거 를 잃는다. 이 기간의 불황은 건국 이래 지속되어 온 만성적 인플레 이션을 근절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에 따라 1983년에 실시된 재정 금융의 ‘무자비한’ 긴축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전강수 ․ 한동근(2002)은 1992~1993년의 경기후퇴와 1997년 의 경제위기를 1988년과 1989년의 부동산 투기로 설명한다. 1980 년대 중반 이후의 경상수지 흑자와 1988년의 주택 200만 호 건설 계획 등으로 토지가격이 다시 급등하였고 이러한 현상은 토지 공개 념 논의를 촉발하여 토지 및 주택과 관련한 상당히 과격한 제도들이

1990년대초에 도입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조치들로 토지 가격의 급락이 있었는데47) 이것은 조지스트의 이론에 의하면 심한 불황을 초래해야 할 것이나 이 기간중 해외 여건이 매우 우호적이었 기 때문에 1992~1993의 불황은 상당히 정도가 약했다는 것이 전 강수 ․ 한동근(2002)의 설명이다. 그러나 결국 1980년대말 및 그 이전의 토지투기에 의한 생산압박요인이 누적되어 1997년의 경제 위기를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대단히 막연한 것이기 때문에 반박하는 것도 매우 어렵다. 특히 1997년의 외환위기를 1980년대말의 부동산 투기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나타난 필연적 현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억 지로라도 이해하려 해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실마리조차 찾기 어렵 다. 조지스트들의 주장처럼 1990년대초의 강력한 투기억제정책으 로 부동산 거품이 꺼지는 과정에서 나타나야 할 충격들이 다행스럽 게도 해외의 유리한 여건 때문에 크게 완화되어 미약한 불황으로 그 치고 말았다면 오히려 1990년대 후반에는 보다 견실한 성장이 가 능했어야 할 것이다. 외환위기 당시의 고금리 정책에 의한 자산 가 격 급락 이전까지는 토지가격이 매우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이 러한 상황하에서 충격적인 대규모 경제위기가 나타난 것은 토지가 격변수 이외의 외생적 변수로 설명하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 다. 물론 외생적 충격이 있었을 때 그것을 극복할 만큼 우리 경제가 건강하지 못해서 그러한 위기가 발생했다는 주장도 가능하며 그러 한 주장이 원론적으로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경 제체질의 취약성이 주로 거의 10년 전에 있었던 토지투기에 기인하

47) 김경환 ․ 이한식(2000)은 공개념제도 도입보다는 주택 200만 호 건설계획에 따른 가용택지 공급의 증가가 당시의 지가를 떨어뜨린 실질적으로 더 중요한 요인이 되 었다는 분석결과를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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