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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자녀를 낳은 후 삶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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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이야기 1: 어딘가 이상한 아들

결혼 후 복지현은 시댁에서 살았다. 시할머니, 시아버지, 시어머니, 막내시누이가 있었다. 그러다 큰 시누도 옆집으로 이사를 와 대가족의 살림을 도맡아 해야 했다. 허니문 베이비로 큰딸을 가졌는데, 첫 손녀라 시부모가 아기를 끼고 살았다. 복지현은 엄마에게 다정한 손길 받지 못하고 ‘스파르타’식으로 자란 장녀이기에 딸을 살뜰하게 챙기거나 예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큰딸이 발밑에서 안아달라고 울 때도 선뜻 안아 들고 다독이거나 엄마니까 무엇을 해야 했다는 기억이 없다. 그저 많은 가족들의 의식주를 제대로 책임지는 살림꾼으로 살았고, 실제로 집 안에서의 서열도 가장 아래였다. 그러다 두 살 터울로 아들을 낳았는데 그 때 비로소 이 집안의 며느리가 되었다고 느꼈다.

‘아들’이 있고 없음, 그리고 아들의 성공과 실패가 대가족 내에서 아이 엄마의 지위를 결정했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사회 통념은 남자와 아들을 노골적으로 좋아하고 대우했다.

우리 딸 낳을 때는 그 당시 나에 대한 그거 쉽게 말하면 여왕 대접을 별로 안 해줬어요. 그런 데 아들이 귀하니까 우리 재용이를 놓고 나니까 정말 여왕 대접을 해주는 거예요. 심하게 표현 을 하면 시집살이 많이 풀리고 모든 게 좀 수월했어요 그때서야 며느리로 인정을 해줬다고 그랬 을까. 딸 낳고는 안 그랬는데 우리 아들 낳을 때는 특실에다가 막 꽃집이지만 막 꽃다발도 제일 큰 거 갖다 놓고. 화장실 다니기도 힘들다고 소변 줄까지 해서 막 못 움직이게 해주고 보약도 몇 십만 원짜리 갖다 해주고. 그런 대우가 너무 좋았어요. 시아버지가 나에 대한 태도가 많이 변했 고. 모든 주위의 환경도..내 지위가 좀 올라간다 그런 거 느꼈죠. (복지현과의 대화, 2021.8.14)

그런데 아들은 큰아이와 너무 달랐다. 먹지도 않고 잠만 잤다. 발달도 조금씩 느렸다. 걸어야 할 때 걷지 않았고,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았다. ‘좀 이상한데..’

싶었지만 시댁 식구들에게 ‘괜히 유난’을 떤다는 비난을 받을까 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대가족 틈에서 아이의 교육을 결정할 권한은 엄마가 독점할 수 없었다. 아이는 자라면서 더 나아지지 않았다. 어린이집에 보내도 한 달 내내

울기만 해서 원장이 사정하며 아이를 못 보겠다고 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어린이집을 가서 이렇게 우는 거야. 계속 울어 계속. 집에서는 절대 집에서는 쉬도 안 하는데 거기만 가면 그냥 서서 울면서 쉬도 싼다는 거야. 처음에는 가방에다 옷을 막 세 벌 네 벌씩 넣 어서 보냈어. 근데 한 달 지나니까 원장님이 사정을 하는 거야. ‘어머님 제가 너무 실력이 부족 해서 그러니 아이 좀 다른 데로 보내주면 안되겠냐’고. 너무 힘드니까. 왜냐하면 갈 때부터 올 때까지 우니까. 그렇게 사정을 하는데 “알겠습니다.”하고 데리고 왔어. 다른 데 가서 거기서 또 그러는 거예요. 거기는 이제 원장님이 조금 나이가 드셨으니까 손자 같은 마음으로 받아주셨 는데 또 전화가 왔어요. 거기는 3개월은 버텨줬어요. 선생님들이 한 달은 그런가 보다 하시는데 3개월 내내 그러니까...(복지현과의 대화, 2021.8.14)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가 장애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장애’일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시댁에는 시부모님, 시할머니, 시누이가 같이 살고 있었고, 지현씨는 아이를 키우며 그 사람들의 살림을 혼자 담당했다. 너무 힘들어서 아이가 어떻게든 기관에 가야 좀 덜 힘들게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일’이란 대가족의 식사와 청소, 빨래가 거의 전부인 살림이었는데, 힘이 들면서도 살림에 있어 자신이 정한 기준을 분명히 지켜 똑부러지게 해내야 했다. 아이가 지나치게 울고 큰아이에 비해 발달이 늦어서 어딘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늦더라도 걷고 말을 했으므로 기다리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아들이라고 귀하게 키우며 오냐오냐 하는 시부모님 앞에서 ‘아이가 좀 늦어서 상담을 받아보고 싶다’고 이야기할 계재가 되지 않았다. 지현씨는 어떻게든 기관에 보내면 결국 적응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와 함께 마음 속 한 켠에 존재하고 있는 불안감을 애써 눌렀다.

나. 이야기 2: 로드킬

8)

을 겁내지 않는 동네 북

아이가 유치원, 초등학교에 가면서 문제행동은 더 심각해졌다. 아이는 ‘가출’을 시작했다.

대문만 열렸다면 그냥 직행인 거에요. 유치원 때는 그래도 이제 집에 와서 없어져. 데려다 놓

8) 동물이 도로에 나왔다가 자동차 등에 치여 죽는 일. 혹은 도로에 나온 동물을 자동차 등으로 치 어 죽이는 일.

고 부엌에서 뭐 좀 하다 보면, 뭐 과일 깎다 문 열고 현관문이 열렸다면 얘가 없어진 거지. 동네 만 몇 바퀴 돌았어요. 유치원 갔다 오면 한두 시 이렇게 되잖아요. 2시 3시 그 동네를 몇 바퀴씩 도는 거예요. 초등학교를 가면서가 이제 문제였어요. 얘가 지하철을 타고 서울 시내 투어를 하 기 시작하는 거지. 학교 문이 두개잖아요. 할머니는 후문에 지키고 나는 정문에 지키는 거예요.

그러면 5분만 3분만 늦어도 없어요. 얘는 벌써 준비 딱 하고 튀어나가요. 처음에는 한두 번은 잡 히더니 할머니하고 엄마가 나를 잡으러 온다는 거 알고 다 준비하고 있다 미리 도망치는 거에 요. 어떨 때는 선생님이 종례도 안했는데 튀어 나간다는 거야. 엄마한테 안 잡히려고.(복지현과 의 대화, 2021.8.14)

‘가출’인지 ‘도망’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말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전화번호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집 주소도, 엄마 아빠 이름도 알고 말할 수 있었는데 절대 알아서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의 가출은 일주일에 두세 번씩 반복되었고, 복지현은 아이를 찾으러 경찰서와 구청 사회복지과를 수시로 드나들었다. 당시에는 아이들을 잡아다가 다치게 해서 앵벌이를 시킨다는 이야기가 많이 돌았다. 실제로 1987년 부산의 형제복지원에서 부랑인을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장애인, 고아 등을 불법감금하고 강제노역, 구타, 학대 등을 자행한 사건이 있었고, 당시만 해도 교차로 등에서 껌을 팔면서 구걸하는 걸인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9) 그러니 아이가 올 때까지 그냥 기다릴 수 없었다.

초등학교 할 때는 그때 왜 앵벌이 시키는 게 그렇게 많았어요...서울 시내 있는 구청에 있는 사회복지과는 다 뒤져가지고 그런 시설을 다 찾았어요. 내가 진짜 말을 할 수가 없다. 하루만 지 나가도 해가 지면 어떡하나.. 진짜 어디서 그러니까 우리 애들 잡아서 지하철에 이렇게 하는 사 람들, 애들 잡아다가 거꾸로 매달아가지고 다리에 피를 안 통해서 걷지를 못하게 해서 앵벌이시 키는 일 같은 게 그때는 일이 비일비재했어요. 그리고 길거리에 그런 거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 이 있었어요. 그러니 내가 살겠어요? 서울시 구청에 다니면서 계속 누가 새로 들어왔는지 물어 봤어. 그러면 허가된 시설은 누가 들어왔는지 알 수가 있어. 그 시설을 다 돌아다닌 거에요. 경 비실에 가서 이름 대고 이런 사람 혹시 들어왔냐고 물어보고 다 안 들어왔다 그러면 미쳐버리는 거예요. (복지현과의 대화, 2021.8.14)

학교생활에서도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다.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가능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업을 따라가거나 친구를 사귀는 일은 어려웠다. 다른 사람 9) 신안군 염전노예사건. 가족이 없는 무연고자 및 장애인을 불법 고용하여 감금, 학대하여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2222&fbclid=IwAR2eBQvl4HWB ZntGDFm6SsUN6hITfaQb0ZLYWQJW5dW32G2TF1lDA9LH4VU

말을 잘 듣지 않고, 질문에 답하지 않고, 같은 말을 반복하니 교사건 학생이건 아이를 기피하고 무시했다. 그러한 태도는 학교 친구들의 절제 없는 폭력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초등학교 갔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거야. 일반 학급에 있으니까 그 아이들의 괴롭힘이 (많았어) 그거는 정말로 지금도 너무나 가슴이 아파. 우리 아들이 진짜 확실하게 특수학급이 있 었던 게 아니기 때문에 애들이 그렇게 많이 괴롭혔어요. 어떤 애들은 막 화장실까지 쫓아가서 애를 괴롭히기도 하고, 꼬집혀 오기도 하고, 멍도 들어 있고. 애들이 막 가방도 갖다 어디다 던 져 버려서 가방도 없어져 막 찾으러 가고. 어느 때는 막 실내화 신고 오고. 신발이 없어진 거예 요. 여자애들이랑 짝 되면 꼬집혀서 멍 들어오고, 남자 애들 짝꿍되면 이런 데 막 긁혀 오고.

그때는 그런 게(특수학급 같은 게) 없어서. 너무 가슴이 아팠던 거지.(복지현과의 대화, 2021.8.14)

반 아이들만 폭력을 가한 것은 아니었다. 교사도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이의 문제행동을 강도 높은 물리적 훈육으로 수정하려고 했다. 그런 교사가 학교 현장에 드물지 않게 존재했다. 장애인 등에 관한 특수교육법은 2007년 5월에 제정되어 2008년에야 시행되었다. 그 전까지 1977년에 제정된 특수교육진흥법이 있었으나 장애인교육권을 보장하는 내용이 아니어서 학교에서 입학 거부를 해도 법적 제제를 받지 않았다10). 장애자녀를 둔 부모는 학교가 받아주기만 하면 아무 권리를 호소할 수 없는 약자 중의 약자였다. 그런 상황에서 교사가 아이를 때리는 일은 노골적이었다. 복지현 아이는 이런 전환기에 학교를 다녔다.

그때 당시에는 이런 개념이 없었잖아요. 장애 학생에 대한 이런 관심이 거의 없었어요. 지금 은 진짜 너무 좋아진 세상이죠. 너무 감사하죠. 그때는 특수학급 뭐 그런 게 없었고, 장애 등록 은 안 했으니까. 학년 올라갈 때마다, 선생님 바뀔 때마다 미리 가서 우리 애에 대해서 얘기를 해요. 늘 상담번호 1번이야. 한번은 아이가 하도 학교 끝나고 지하철 타러 도망가서 “우리 아 이가 학교 끝나고 그렇게 지하철 타러 못 가게 좀 이렇게 타일러 주세요.” 이렇게 했는데 그게 잘못한 거야. 얘가 아이가 묻는다고 대답하는 애가 아니잖아. 앞으로 나가지 말라고 혼내는데 대답을 안한다고 회초리로 때린거야. 아우 그때 있잖아요, 내가 가슴을 쳤어. 애가 세상에 등이 랑 다리랑 피나기 직전이더라고. 너무 할 말이 없는 거야. 내가 잘 타일러달라고 얘기했잖아.

10) http://m.ablenews.co.kr/News/NewsContent.aspx?CategoryCode=0020&NewsCode=9563 2006년 특수교육진흥법의 한계를 알리고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을 요구하는 운동이 한참 크게 일었다. 그 결과 2008년 장애인 등에 대한 교육법이 시행되어, 장애인을 공교육 현장에서 배제 하는 일은 금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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