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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외의 관계에서 경험한 삶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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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이야기 1: 엄마 되기보다 어려운 아내 되기

복지현을 처음 만났을 때, 복지현은 아는 사람이 몇 명 없다며 조심스레 자신이 4년째 이혼소송 중이었으며 막 최종 판결이 났다는 사실을 공개하였다.

남편은 10년 전에 집에서 나갔다. 가게에서 업무상 사용하던 승합차를 끌고, 아이들을 두고, 아내를 두고, 가게를 두고, 혼자 나가버렸다.

남편에게는 ‘만들고 가꾸어야 할 내 가족’의 개념이 처음부터 없었다. 결혼 후 시할머니, 시누와 갈등이 생겨도 왜 문제를 만드냐고 타박했다. 생활비는 시아버지에게 받았다. 남편은 한 가정의 가장이 아니라 시부모의 아들이고, 시누의 남동생이었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유복한 집안에서 필요할 때마다 ‘떼’를 써서 돈을 요구했다. 그래서인지 시댁에서는 복지현과 남편이 꾸린 가정을 하나의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몸도 고되고 마음도 힘들었다. 특히 ‘가족사진’을 찍자고 했다가 거절당한 일은 무엇을 위해 이 고된 살림을 하고 살고 있는지 두고두고 회의가 들게 만들었다.

살면서 부딪히고 싸우면 내 편은 한 명도 없는 거야. 남편까지도 이제 내 편이 없는 거야. 그 러니까 나는 나 혼자 다니니까 어떻게 돼 점점점 벽을 나는 높이 높이 쌓는 거지. 이제 내 편이 없으니까 이제 말도 안 하고 이렇게 하고 하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집 안에 나의 위치는 며느리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속되게 표현하면 뭐 일하는 아줌마? 시어머니한테 가족사 진 찍자는데도 무시당했어요. 자기 딸 이혼해서 없는 거랑 우리 가족 사진 찍는 거랑 무슨 상관 이 있어. 그런 거에 너무 상처가 깊은 거야. 남이 와서 찍자고 그런 거야? 며느리가 가족사진 찍 읍시다 했는데도 우리는 안 찍었어요. 없어요, 그런 거. 어느 집이든 다 가면 가족사진 있잖아.

우리 친정도 있어요. (사진에) 우리 그 인간도 있어. 가족이 같이 사는 사람이지. 우리가 가족 사진이 없어요. 그래서 가족사진 없는 그게 진짜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그런 게 한두 가지가 아 니야. 내가 별로 그렇게 기울지도 않는 결혼을 했는데 말이야. (복지현과의 대화, 2021.8.31)

남편은 오래된 우리 사회의 남존여비 사상을 체화한 상태에서 자립하는 마음과 경제적인 책임을 질 줄 모르는 의존적인 사람이었다. 장녀로 책임감 있게 자신의 삶을 일구어 온 복지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의 태도였다. 남편은 수시로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첫 부부싸움에서는 화장대를 엎었고, 그 다음에는 따귀를 때렸다.

남편에게 복지현은 마음에 안 들면 때려도 되는 존재, 아무렇게나 대해도 괜찮은 존재, 자신을 받들어서 요구를 들어주어야 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복지현은 폭력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따귀 때린 날 나가자고 그래서 서울대공원 갔어. “내가 너한테 맞으려고 시집 왔냐. 너 당장 이혼서류 안 갖고 오면 어머니한테 쳐들어가서 내가 얘기할 거야. 너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난 너네 집에 와서 식모처럼 일하는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나한테 손찌검까지 하면 나 는 못 살지. 난 안 살아. 내일 당장 이혼서류 해가지고 와. 도장 당장 찍어.” 막 해댔어. 그다 음부터 손찌검은 안 하더라고. 처음에 그렇게 했어야 되는데. (시부모와) 같이 사는 게 단점이

그런 거야. 그 다음부터는 지랄은 떨어도 손찌검은 안하더라고요. (복지현과의 대화, 2021.8.31)

남편은 복지현과 상의 없이 직장을 그만두고 다단계 사업, 부동산 관리 등의 일을 하다가 보증을 잘못 서서 신용불량이 되었다. 나중에는 시아버지가 하시던 꽃집을 복지현과 같이 운영하였다. 그 때도 주문관리, 회계관리 등 거의 모든 일은 복지현이 주도했다. 남편은 마치 남의 가게처럼 수금한 현금을 개인 용돈으로 챙겼다. 빚이 얼마나 늘고 있는지, 아이들 등록금과 결혼자금 등은 어떻게 할 것인지, 시댁의 성화로 할 수 없이 계약한 아파트의 중도금과 잔금은 어떻게 할 것이지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았다. 꽃집 매출은 계속 하향이었고, 매장을 줄여야 했다. 권리금과 보증금을 받고 매장을 줄였는데, 현금이 있으면 스르르 사라질 것 같아 남은 돈으로 대출을 갚았다. 그러자 남편은 불같이 화를 내며 가출을 했다.

당장 내 손에 쥐어지는 현금이 중요한 사람이었다. 분명히 ‘우리’ 집 대출을 갚았는데, 그게 왜 집을 나가는 이유가 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가끔 가게에 찾아와서 천만 원, 이천만 원 돈을 요구하였다.

복지현은 빚을 내서 요구하는 돈을 마련해 주면서 집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복지현은 남편이 철없는 행동들을 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미안하다고도 했고, 돈도 마련해 주었으니 기분이 풀리면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복지현에게는 ‘이혼’이란 큰딸을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결손가정을 만들어주는 일과 다름이 없었다. 한 번 결혼했으면 끝까지 그 집에서 죽어야 하는 게 복지현이 가지고 있던 ‘당연한’ 윤리이자 정의였다.

남편이 가출한 상태에서도 복지현은 5년 동안 시댁에 드나들며 ‘할 도리’를 했다. 남편이 없다고 며느리로서 도리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내나 엄마보다 며느리로서의 역할이 더 우선시되는 대가족 중심의 가치관이 복지현 의식에 뿌리 깊게 있었다. 시부모는 큰며느리라고 큰 권리를 주지는 않았지만 ‘고생했지’, ‘우리 며느리 정말 잘한다.’는 등 다정한 말을 해주었고, 경제적으로도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시부모에게 애틋한 감정이 있기도 했다. ‘스파르타’식으로 자신을 대하고, 거친 말로 자신을 무시했던 원가족의 분위기보다는 그나마 존중받는 느낌이 들었고, 자신은 보답해야 도리라고 생각했다.

시부모가 굉장히 잘했어요. 그러니까 나도 보답한다고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았을까. 우리

엄마는 딸을 막 스파르타식으로 키웠는데 우리 시어머니는 나한테 너무 잘하는 거예요. 결혼할 때부터 정말 예뻐하셨어요. 특히 이제 시아버지가 뭐든지 내 편에 서서 얘기를 하셨어요. 많이 기대고 챙기고 정 주고.. 남편이 IMF 때 집에 있을 때 아들이 돈을 못 벌어 왔다는 걸 알아서 그랬는지 그때 100만 원씩 줬어요. 내 생활비로. 그걸 당연히 줘야지 생각할 수도 있는데 저는 그것도 고맙게 생각한 거죠. 왜냐하면 그렇게 안 줬으면 또 어떻게 했을 거에요. 그러니까 경제 적인 거는 다 책임을 져주신 거예요. 거의. 저는 또 남의 거 먹고만 사는 그런 성격이 아니에요.

같이 살아도 시부모님이 이렇게 해 줬으니까 나도 이만큼 해야된다는 게 있었던 거지. 그게 도 리다 이런 거..시부모님들은 착하다 잘한다 막 이렇게 하니까 예쁘다. 착하다 우리 며느리. 너 무 착하네. 너무 잘하다. 오늘 고생했지. 그런 얘기. 남편은 그런 얘기를 안 하는데 부모님들은 그 얘기를 하는 거야.(복지현과의 대화, 2021.8.31)

장유유서, 노인공경과 같은 유교적 이념을 잘 지키고 ‘결혼했으면 그 집 귀신이 되는 일’이 복지현이 가지고 있었던 성공한 삶의 덕목 중 하나였다.

복지현이 남편의 가출 후에도 6년이나 결혼생활을 이어간 것은 ‘이혼’이 삶의 선택지에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혼녀’라는 딱지를 절대 가지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에게도 ‘이혼 가정’을 만들어주는 것은 못할 일이라 생각했다. 이혼은 실패이고 흠이었다. 그렇게 버티다가 ‘그래 이혼하자.’고 결심한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대출 많던 아파트를 팔았다고 집 나간 남편이 찾아와 칼을 휘두르며 살림을 망가뜨리며 화를 냈을 때, 남편이 딸에게 ‘잘 있어라’하고 문자를 보내 딸이 아빠가 어떻게 될까봐 놀라서 경찰에 신고한 후 경기도 저수지에서 낚시하던 걸 발견했을 때도 그랬지만, 아들이 집을 나갔을 때 시아버지가 한 행동도 결정적이었다.

아들이 집을 나가서 이틀 안 들어왔을 때에요. 이틀을 찾지 못했으니까 내가 어떻게 됐겠어.

진짜 정말로 막 잠도 못 자고 이틀 동안 막 찾으러 다니고. 사람이 멍 때리잖아요. 근데 시아버 지가 아침에 가게 갔다가 우리 집에 오신 거에요. 난 잠도 못 자고 멍 때리고 죽겠는데 밥을 먹 어야 된다는 거예요. 시아버지가 누룽지를 좋아하니까 그 정신에 누룽지를 눌려서 찌개 있는 거 데워서 드렸는데 밥을 다 한 그릇 먹고 나서 식탁에 앉아봐라 하더니 “틀린 것 같다. 우리 포기 하자.”고 그러는 거에요. 더 이상 그만 찾자는 얘기잖아요. 그 소리에 진짜로 내가 그때 딱 차 고 일어났어요. ‘아버지 무슨 말씀이냐고. 난 내가 내 눈에 흙 들어갈 때까지 찾을 거라고. 지 금 못 찾으면 평생 내 눈에 흙 들어갈까 찾을 거다’고 그랬지. 진짜 속으로 뭐라 그런 줄 알아.

‘이놈의 늙은이가 배고파서 밥 실컷 차려줬더니 밥 한 그릇 다 먹고 배부르니까 진짜 못할 소리

가 없네.’생각했다니까. 그 얘기를 하는데 진짜 너무 정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난 그때 느낀 거야. ‘우리 아들은 내가 아니면 아무도 안 거두는구나. 우리 아이는 진짜 너네한테 귀찮은 존 재구나’ 그렇게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아버지 가시라고 그랬잖아. 아버지 보시기에는 내가 이렇게 헤매고 다니니까 당신의 아들이 불쌍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을 할 일이에 요? 그 때 진짜 가슴에 상처를 입었어요. ‘이것들이 그렇구나.’아들은 내가 아니면 그 누구 도 가족에서 어떤 지지를 받기 어렵구나. 남편은 애가 없어졌다는데 낚시를 가는 인간이고.(복 지현과의 대화, 2021.8.31)

시아버지의 행동은 복지현이 이혼 결심을 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혼 후 혼자 사는 게 두렵고, 이혼녀라는 딱지를 갖게 되는 것도 수치스럽고, 가정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 때문에 남편이 집을 나간 후에도 ‘가정’이라는 것을 유지했는데, 결국 아이를 거두는 것은 복지현 본인밖에 없다는 생각은 오래도록 붙들고 있던 가족을 향한 미련을 끊게 만들었다.

하지만 재산분할 때문에 4년간의 소송과 항소를 거쳐 이혼을 하면서도 복지현은 남편과 헤어지는 것보다 자신을 아끼고 잘해주었던 시부모를 저버리는것이 더 가슴아팠다. 이미 노인이 되어버린 시부모를 외면한다는 죄책감 때문에 병이 날 지경이었다. 이혼소송 중에 이석증, 공황장애, 불안장애로 신경안정제를 먹을 만큼 힘들었는데 그것은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준 어른들을 배신하고 이제 영영 남이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만약 아이가 장애가 없었다면 남편이 없더라도 눈 딱 감고 시부모를 모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부모는 장애 있는 손자를 끝까지 책임지지 않을 것임이 확인된 이상, 복지현은 아이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이혼을 선택해야 했다.

어떻게든 나는 가정을 지켜보려는 마음에 이렇게 한 거지. 지금 와서 보니까 고생한 건 이제 어디 가고 내가 너무 억울하고 그러네요. 내가 너무 바보처럼 그런 거를 지키려고 노력을 했던 것 같아. 너무 후회된다 세월이 너무 아까워. 너무 억울하고 진짜 후회되고. 10년의 세월이 너 무 아까운 거야 10년이면 50이었을 텐데. 딱 줘버리고 50에 시작했으면 됐을 텐데. (복지현과의 대화, 2021.8.31)

10년 동안 시달린 이혼이 정리된 지금, 복지현은 후회와 아쉬움, 홀가분함 등 여러 복잡한 마음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4인 가족을 정상적으로 지키려고 하였으나 그것은 혼자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복지현은 ‘정상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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