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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가족에게 일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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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과 의무가 지워져 있고, 배우자를 비롯한 가족은 양육의 주체인 엄마에게 책임과 압력을 지우며, 이러한 불균형을 조정하는 정보 제공이나 절차를 안내하는 체계는 전무하다(임은정, 주정민 2021). 본 연구에서 복지현은 배우자가 장애 자녀를 무시하고 버릇을 잡는다며 때리는 일을 수시로 겪었다. 조부모는 장애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버릇’을 잡는 행동을 교육적이라고 착각하였다. 이수정은 장애가 있는 아이 때문에 자신의 삶이 불행해졌다는 배우자에게 절망하였다.

정은정은 어머니에게 ‘아이를 시설에 보내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며, 남편은 아이의 교육에 관해 전혀 소통하지 않았다. 가족 내 장애 수용의 편차는 가족 기능의 저하로 이어지기 쉽다. 따라서 장애인 가족 지원은 자녀의 장애에 대한 부모의 태도와 지식의 불균형을 장애 진단 초기부터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 적극적으로 가족 전체에 개입할 필요가 있다.

정해지지 않는 한, 성인 발달장애 자녀를 둔 여성이 일을 하기는 어려움이 많다.

자녀가 성인이 아닐 때에도 보호자가 필요한 ‘긴급한 요청(con-call)’에 응해야 하는 대기 상태여야 하므로 정규직 진입은 쉽지 않다. 이수정은 학위를 받고 경력이 쌓인 후 정규직으로 진입할 기회가 있었으나 ‘나에게 제1의 프로젝트는 아이’임을 깨닫고 포기하였다. 정은정은 아이의 장애 진단과 동시에 방송작가 일을 그만두었는데, 양육과 방송작가 일은 모두 노동시간이 불규칙하여 병행할 수 없었다. 정은정의 자녀는 의사소통이 쉽지 않은 자폐성 1급의 중증발달장애임에도 교통수단 이용 및 등하교를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기술을 훈련하였고, 그 덕분에 정은정은 자녀가 중고교에 다닐 때 치료사로서 새로운 커리어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방 도시에서 서울로 이주한 후 자녀는 급격히 바뀐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공격행동 등이 불거져 함께 일하기 어려운 조건이 되었다. 성인이 되어 오히려 돌봄 부담이 더 생긴 탓에 정은정은 일을 줄이고 진학한 대학원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복지현은 고등학교 졸업 후 장애인직업학교에 자녀를 진학시키고, 이후에는 보호작업장에서 일하게 하였다. 복지현은 별거 후 남편이 경제적으로 양육에 참여하지 않아 혼자서 생계와 양육을 책임져야 할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자녀가 ‘갈 곳’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렇듯 성인 발달장애 자녀를 둔 여성의 일은 자녀의 ‘갈 곳’과 연동되어 있다.

최근 장애인부모연대가 입법을 촉구하고 있는 <발달장애 국가책임제>에는 성인장애인을 위한 ‘의미 있는 낮 활동’, ‘발달장애인의 ‘노동할 권리’, ‘주거정책 확대’, ‘공적 소득 보장’, ‘장애인가족지원센터 확대’가 포함되어 있다. 성인 발달장애인을 위한 공적 지원 체계의 확립과 실효성 있는 운영은 장애부모 개개인 삶의 질과 직결되어 있으므로 장애인부모연대의 주장은 단순히 발달장애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부모 및 가족 구성원 전부의 절실한 삶의 질 문제일 것이다.

한편 장애 자녀를 둔 여성은 진로상담영역에서 소외된 존재다. 경력단절여성을 위한 고용노동부의 여성새로일하기센터는 자녀 돌봄 지원기관 연계 및 경력개발상담, 심리 고충상담 등을 실시하고 있는데, 자녀 돌봄을 일반 기관에 맡기기 어려운 장애 자녀 어머니의 특성은 고려되지 않고 있어 접근성이 낮다.

경력단절여성의 재취업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분석한 김정원(2020)은 개인요인과 상황요인, 지원요인 및 전략요인 중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여성을 둘러싼 상황임을 밝혔으며 자녀 양육의 대체자 존재 여부가 경력단절여성의 재취업을 결정한다고 하였다. 개인요인 중에서는 가치관갈등이 재취업 과정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행사한다고 하였는데, 특히 일하는 엄마에 대한 사회의 냉혹한 시선, 주변 사람들의 만류 등과 같은 성역할 고정관념에 근거한 비공식적이고 비합리적인 내적 외적 요구가 경력단절 여성 스스로 재취업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만든다고 하였다. 이 연구 결과는 각 개인의 삶의 사회적 맥락을 일을 통한 삶의 질의 핵심 변인으로 강조하는 일의 심리학(PWT)이론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PWT는 난민, 이주민, 성소수자,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가 일을 가지기 어려운 것은 개인 내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적 장벽이 견고하기 때문으로 본다(Bluestein, Kenny, Di Fabio, & Guichard, 2019). 사회적 소수자가 가지는 정체성은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적 차원에서 상호 구성되고 유동적이며 권력의 역학에 의해 지속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며 장애인, 장애인 부모 등의 정체성은 개인의 삶에 내재된 측면이 아니라 사회성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은 고용율, 근무의 질, 소득, 직업 안정성 등에 영향을 미치고 여기에서의 낮은 대접은 사회적 소수자의 정체성을 강화한다. 특히 여성은 일을 할 때에도 고용시장에서 소외를 경험하는데,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돌봄 영역에 집중되어 있거나, 일터의 조건이 유연근무, 가족휴가 등을 제공하지 않아 가정 내 돌봄을 보호하지 않는 상황으로 직장 선택의 기회가 적기 때문인 PWT의 본 연구 결과의 참여자들의 경험과 일치한다. 또한 PWT는 괜찮은 일을 갖기 위한 매개변인으로 일 자유의지와 진로 적응성을 꼽고 있는데, 이는 비판적 의식, 적극적인 성격 등의 개인 내적 요인들의 영향을 받는다. 특히 비판적 의식은 사회적으로 부과된 성역할 고정관념 등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아차리는 요소로서, 경력단절의 어려움을 개인 내적으로 환원하지 않는 자원이 된다. 본 연구 참여자의 내러티브에서도 가치관과 비판적 의식이 경력유지에 중요한 요소임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복지현은 60대 여성으로서 고용시장에서 여성이 소외되었던 시대에 일 경험을 하여 ‘결혼하면 당연히 일은 그만두는 것’인 사회적 인식 아래에서 사내커플로 결혼하였으므로 ‘내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결혼했으면 집안 일에 전념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대가족 살림을 도맡아 했다. 반면 이수정은 사회학자로서 사회와 개인의 관계 및 가치관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지고 있어서 ‘내 일이 중요하다’는 관점을 생애 내내 가지고 있었다. 이수정이 경력을 단절한 기간은 자녀의 장애 진단 시기에 즈음한 2년 여에 불과하며 스스로 유연한 일자리를 찾아 가정 돌봄 노동과의 균형을 맞추었다.

정은정이 수월하게 재활서비스 전문가로 전업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적 인식이

경력단절여성의 재취업을 독려하는 것으로 변화하고, 자격증을 쉽게 딸 수 있는 사이버대학제도가 생긴 덕분이었으며, 주변에서 주는 ‘일해도 괜찮다’는 메시지에 힘입어 일을 향한 의지를 낼 수 있었다.

진로상담에서 환경을 고려하는 상담, 즉 상담자가 사회적 제도적 문제를 적극적으로 상담실 안으로 가져와서 심리적 환원주의에서 벗어나 내담자를 둘러싼 맥락과 거시체계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연구들이 있다(김하나, 2019; 박숙경, 이지연, 2020; 안진아, 2019; 안진아, 정애경, 2019). 이에 따르면 환경요소를 다루는 상담자의 태도에 따라 개입방법의 변화가 있었으며, 환경요인을 인지하는 교육을 받은 후에 상담자의 사례개념화가 변화하여 개인과 외부 체제 사이의 균형있는 관점을 상담자가 가지는 것이 효과적인 진로상담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성인 발달장애 자녀를 둔 여성들은 고유한 맥락에 대한 이해의 욕구가 높으므로 장애의 특성, 장애자녀의 특성 및 양육자의 삶의 맥락을 사회적으로 이해하는 상담자 교육이 필요할 것이다.

3. 장애 자녀 어머니의 통합(inclusion)의 실천자 정체성

장애 자녀를 둔 여성에 대한 기존의 연구와 인식은 ‘어머니’라는 관계적 자아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어머니 여성을 위한 부모교육 및 상담내용은 주로 자녀의 부모 역할을 어떻게 하면 잘 수행할 것인지, 어떻게 하면 심리적 어려움을 해소할 것인지에 대해 제공되어 왔다(김소희, 2019). 상담, 사회복지, 특수교육 및 보건의료 분야의 연구는 장애 자녀 어머니를 ‘대상’의 관점에서 대한다. 아동상담의 분야에서 는 장애 자녀 부모에게 언어치료나 놀이치료의 원리를 익혀 아이에게 중재하는 치료사로서의 역할을 기대하거나 우울감이나 양육스트레스 등의 부정적 정서를 잘 다루기를 기대한다(김나경, 최지혜, 박지연, 2021). 특수교육이나 보건의료 분야에서는 어머니가 아동의 부적절한 행동에 적절하게 대처하여 사회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요청하거나, 장애 자녀의 재활 기술 등 사회복지 분야에서는 사회서비스나 복지서비스를 이용하는 서비스 이용자로서 서비스의 욕구와 효과성을 알려고 한다. 연구에서뿐 아니라 각 분야의 현장에서도 장애 자녀의 어머니는 사회복지서비스의 수혜자 또는 사회적 약자인 장애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어떻게 해주어야 하는 대상’으로서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내러티브 탐구를 위하여 만난 참여자들은 본인을 약자나 단순한 수혜자로 여기지 않았다. 연구자 역시 장애 자녀 어머니 당사자로 20여년 살아오면서 사회적 지원을 받아야만 하는 서비스의 수혜자로서의 약자로 스스로 정체화한 경험이 없다. 오히려 비장애인으로서 어머니는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장애 자녀를 이해하기 위해 지식을 쌓고, ‘다름’에서 오는 어색하고 불편한 정서를 개인내적으로 처리하여 자녀를 공감하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사회를 향해 ‘통합’의 이념과 방법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낸다.

장애자녀를 둔 가족에게 통합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연구참여자가 고백한 ‘죽고 싶었던 순간’이 모두 통합이 좌절된 순간임을 상기하면 알 수 있다. 정은정의 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때는 2007년인데, 그 때는 <특수교육진흥법>이

<장애인 등에 대한 교육법>으로 바뀌면서 장애인 통합교육을 교육장의 의무로 명시한 시기라 학교 현장에서의 통합교육 인식이 다소 높아져 있던 시절이었다.

특히 개별화교육계획회의에서 보호자가 통합교육을 요청했을 때 이를 거부할 수 없도록 법은 규정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다른 시도를 전혀 해보지 않은 채 ‘통합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정은정은 서울에서 장애인부모연대 소속 회원으로 활동했기에 법적 권리가 있음을 알고 있었고, 학교측과의 이야기 끝에 원반 통합 1시간을 확보했다. 하지만 그 결과를 전혀 ‘승리’로 느끼지 못했는데, 고작 통합 1시간을 얻기 위해 ‘싸워야’ 했던 일 자체가 장애를 향해 조금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비장애사회의 완고함을 경험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정은정이 죽고 싶었던 순간은 바로 비장애 중심사회가 가지고 있는 장애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편견이 만든 배제와 고립의 순간이었다. 편견은 배제를 낳고 배제와 고립은 장애인 가족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 장애 자녀 가족에게 ‘통합’이란 생존과도 같은 일이며 장애를 가진 삶의 궁극적인 방향이 된다. 이수정과 복지현 역시 학교와 사회에서 장애 자녀가 차별받고 배제되고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다.

차별과 배제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연구 참여자들만은 장애인 자녀를 끝까지 이해하여 함께 살려는 노력을 한다. 장하원(2021)은 장애 자녀 어머니의 장애를 향한 ‘앎’에 대한 추구를 ‘지적 실천’이라고 불렀다. 자녀의 특성을 알려는 어머니의 행동은 단순한 지식의 획득이 아니라 하나의 중요한 사회적 실천이라는 것이다. 본 연구 참여자인 이수정은 초등학생 때 지적장애를, 중학생 때 자폐성장애 진단을 받은 자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이해하고 적절하게 대처하기 위해 사이버대학 사회복지학과에 편입하여 공부하였고, 특수교육에 관한 지식도 쌓았다. 일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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