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장애 자녀를 낳기 전 삶의 이야기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69-75)

제5장 성인 발달장애 자녀를 둔 일하는 여성의 삶의 이야기 풀어내기

제1절 복지현의 이야기

목표에 도달하는 근성을 가지게 되었다.

등산을 가도 1등으로 올라가서 꼭대기에 앉아 있어야지 늦게 올라가면 못 견디거든. 초등학 교 때 산으로 소풍가도 늘 1등이었어. 우리가 가을에 소풍을 가잖아요. 가다가 스님을 만난거 야. “니 왜 왔나.”, “OO 국민학교에서 소풍왔어요.”, “너 왜 혼자냐?” 라고 해서 “제가 1등 해야 되거든요.” 이랬거든요. 그러더니 어디 데리고 가더니 거기다 앉혀놓고 ‘니가 1등으 로 올라왔으니까 상으로 준다’고. 그래서 곶감을 주신 거야. 난 그게 잊혀지지가 않는 거야.

뭐든지 1등하고 잘하면 상을 받는구나 그런 걸 안 거지. (복지현과의 대화, 2021.8.14).

하지만 집안에는 어마어마한 남아선호사상이 존재했다. 세 남동생이 항상 복지현보다 우선시되었다. 부모님은 남동생들을 줄줄이 진학시켜야 하기 때문에 중학교를 졸업한 복지현에게 고등학교 진학은 포기하라고 말했다. 남동생들을 대학까지 공부시켜야 하는데, 대학도 못 갈 딸을 굳이 고등학교에 보낼 필요는 없다는 게 당시의 사회적 통념이었다. 그 즈음 아버지는 빚보증 때문에 집을 날려 셋방살이를 했고, 부유하던 가세도 기울어 복지현까지 공부시킬 여력이 없었다.

복지현은 중학교 졸업 이후 친구들이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것이 너무너무 부러웠다.

친구들은 다 학교 갔는데 나는 못 가고. 그래서 광주로 보내달라고 했어요....집에 있기는 싫었던 거예요. 친구들이 막 학교 가는 게 보기 싫어서. 나랑 똑같이 중학교 다니던 희경이 중학 교 때 같은 교복을 입었지만 고등학교가 더 예쁜거야. 이렇게 가방 들고 학교로 가는거야. 너무 그게 부러운 거야. 진짜 부러웠어.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그랬지. (복지현과의 대화 2021.8.14)

친구들은 교복 입고 학교에 가는데, 집 근처 가내수공업체로 일하러 가는 게 너무 싫었던 복지현은 광주에 있는 이모네에 보내달라고 졸랐다. 광주에는 일하며 공부하는 학교가 있어서 혹시 학교에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아무도 학교에 보내지 않자 나름대로 배움의 길을 찾아간 것이다. 그러던 중 엄마 아빠가 서울에 취직하러 간 중학교 때 친했던 친구와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 받다가, ‘우리 집에 와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롯데 제과에 다니고 있던 그 친구 엄마 아빠가 롯데 제과에서 사람을 뽑는다는 이야기를 해준 것이다. 복지현은 엄마에게 ‘나 서울로 가야겠어’ 하고 그냥 서울로 올라와버렸다. 그리고 서울에서

롯데제과 입사시험을 치루었는데 그때 얼마나 자신이 일을 잘했는지 아주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게 동글동글한 장기판 같은 게 있는데 동그라미에 이런 원통형처럼 생긴 거를 1분에 60개 이상 꽂아야 합격을 하는 거에요. 그게 2차가 3차인가 그래요. 내가 65개를 꽂았잖아. 경애네 아버지랑 엄마도 그게 쉽지가 않다는 거야. 1분에 65개 꽂는 게 쉽지가 않아서 거기서 많이 떨어 진다는 예요 거기서 2분의 1이 떨어져 나간대요. 컨베이어 벨트가 이렇게 막 흘러가잖아요. 그 러면 거기 앞에서 포장해야 돼서 손 빠른 게 중요했던 거예요. 거기 붙었다니까 통과됐으면 그 냥 붙은 거라 그랬어요. (복지현과의 대화 2021.8.14)

롯데제과 입사 ‘시험’에 합격을 한 것은 비록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못했지만,

‘나는 일 잘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복지현은 합격한 롯데제과에 다닐 수 없었다. 첫 출근을 하는 날, 아버지가 혹시 딸이 서울 유흥업소나 안 좋은 곳으로 빠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지현이가 서울로 갔는데 좀 찾아봐라’고 고모 내외에서 부탁하여 복지현을 잡은 것이다.

몹시 허탈하고 서운했지만, 그래도 가족과 함께 있다는 게 안심도 되었고, ‘나를 챙겨주기도 하네.’라는 마음도 들어 고모네 집에 머물면서 일자리를 찾게 되었다.

비록 원하는 고등학교, 원하는 회사는 가지 못했지만, 부모님의 결정한 대로 시골에 남아 있지 않고 서울에 와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한 것은 복지현이 ‘나는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일컫는 근거가 되었다.

나. 이야기 2: 콘크리트 틈에서 돋아난 새싹

서울 고모집에 머물게 된 복지현은 OO물산이라는 공장을 소개받아 취직을 했다. 자동차 계기판과 비행기에 쓰는 계기판을 만드는 곳인데, 그 당시 중국으로 진출을 시작할 정도로 승승장구하는 회사였다. 처음에는 노무과에서 일했다.

복지현은 손발을 써서 재빠르게 하는 일을 잘하고 좋아했는데, 노무과에서 하는 일은 한 달에 한 번 월급 줄 때만 바쁘고 평상시에는 그다지 할 일이 없었다.

복지현은 계기판 만드는 현장을 지켜보다가 ‘저기로 보내주세요’라고 했다. 상사는 왜 고생을 사서 하냐면서 방송통신고등학교에 다닐 것을 권했다. 당시 방송통신고등학교는 한 달에 한 번 출석만 하면 진학을 시켜주는 곳이라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한 복지현의 성에 차지 않았다. 복지현은 사무실에 앉아만 있는 게 따분하고 허리가 아파서 싫었다. 재차 생산 라인에 가고 싶다고 요청하여, 결국 공정을 다 마스터하면 조장으로 보내주겠다는 조건부 승낙을 받아냈다. 그 때부터 두 달 동안 복지현은 새벽 6시에 출근하여 한 조에 11명이 담당하는 모든 공정을 익혀 조장으로 생산라인에 옮길 수 있었다. 조장은 회사에서도 꽤 중요한 ‘끝발 있는’ 자리였다. 조장의 가장 큰 업무는 생산목표관리였다. 회사에서는 조장을 잘 관리하는 것이 생산과 직결되기 때문에 조장을 중심으로 회사가 움직였다. 열심히 살면서 더 큰 꿈을 꾸고 싶었다. 하루는 감사로 있는 사장 부인이 조회 시간에 나와 연설을 하는데 카리스마가 있고 너무 멋있어서 ‘저 정도는 되고 싶다. 여자로 태어나 저 정도는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경쟁적인 상황에서 ‘다른 조를 이기고 싶다’고

내가 또 악바리잖아요. 지기 싫어가지고 이게 11명이 쭉 하니 11명이 다 똑같을 수가 없잖아 요. 여기 이 사람이 잘하는데 이 사람이 못하면 여기가 막 쌓이는 거예요. 그럼 쌓인 데 앉아서 막 해. 그러다 저기 쌓이면 저기 앉아서 하고. 그래서 조장이 11개 공정을 다 알아야 되는 거였 어. 이거 하다 보면 또 지기 싫어가지고 동점이라도 나와야 되는 거야. 그날 지면 잠이 안 오는 거야. 지금 생각하면 그 때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가. 그렇게 직원들이 열정으로 하는데 회사가 어떻게 잘 안 되겠어요.(복지현과의 대화, 2021.8.14)

복지현은 버는 돈을 악착같이 저축하고 절약하며 살았다. 버스를 타지 않고 한 시간 반 이상 걸리는 거리를 일찍 일어나서 걸어다녀 두 달 만에 신발 밑창이 떨어지곤 했다. 복지현은 출퇴근 때 걸으면서 양 옆으로 펼쳐진 논밭을 보며 언젠가는 저 논 하나는 꼭 사겠다고 결심하기도 하였다. 돈이 모아질 만하면 친척에게 꼭 크게 쓸 일이 생겨서 바람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내 돈’을 모아 내 인생을 계획하는 삶을 살았다. 복지현이 그렇게 독하게 살았던 이유는 아버지에게 보란 듯이 성공하여 복수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 혼자 살아남는 거지. 그래서 내가 생활력이 강한 것 같아. 내 마음에 우리 아버 지에 대한 복수심이 찬 거야. 나를 이제 학교를 안 보냈잖아. 내가 아버지 보란 듯이 성공해서 내려간다는 그런 거. 그거 하나 있었어요. 그러니까 사람이 마음에 독한 뭔가 있어야 잘 돼.(복 지현과의 대화, 2021.8.14)

일도 안 하고 빚보증으로 집을 날리고 술을 마시고 다니면서도 딸을 학교에 보내지 않은 아버지는 복지현에게 인생 전체를 마음대로 해버린 존재였다. 본인은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도 딸에게는 전통적인 역할을 강요했던 아버지에게 ‘아무리 그래도 꼭 성공하겠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다. 이야기 3: 겨울 동백보다 화려하게

조장이 되고 나서 회사 내에서도 ‘끝발’을 갖게 된 복지현은 어느 날 조장 중의 대표가 되었다. 20개 조에 11명씩 210명을 대표하는 중요한 사람이 된 것이다.

나이는 어렸지만, 공장 사회에서는 나이나 성별보다 일을 잘하는 사람을 가장 우선으로 대우해주었다. 회사가 매년 매출이 오르고 생산물량이 많아지고 있던 어느 해, 공장에 노조 바람이 불었다. 한참 사회에서 근무조건과 임금인상을 목표로 여기저기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단체로 임금 협상을 하고, 그것이 관철되지 않을 때는 파업을 일으키던 시절이었다. 복지현이 다니던 회사도 월급 외의 상여금이나 복지가 없었다.

어느 날 공장에 출근했더니 사원들이 파업을 했다. 직원들의 요구사항은 추석과 설 명절에 50프로씩 1년에 100%의 상여금을 지급하라는 것, 명절 때 고향에 갈 수 있게 사원용 버스를 대절해 달라는 것으로 복지현이 듣기에는 단순하였다. 사실 근무 강도가 높아 야근과 밤샘이 비일비재했고, 주말에도 일하는 날이 많았다. 복지현은 직원들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조원들에게 ‘회사가 있어야 우리가 있지, 회사가 없으면 우리가 있을 수 있겠느냐’고 설득했다.

복지현은 사장과의 면담자리를 자청했다.

사장님 제가 들었는데 별거 아닌 것 같습니다. 다른 데서 다 지금 추석 설 1년에 100%. 그러니 까 추석 때 50% 설날이 50% 준대요. 그거 달라고 하고요 또 지금 다른 회사는 명절에 내려갈 때 차 대절해 준다는데 우리만 안 해 주니까 그거 해달라고 그럽니다. 그거만 들어주면 다 내려온 대요.”사장 면담 자리에서 그렇게 말했어. 사장을 별로 본 일도 없는데 쫄지 않고 일부러 싱글 싱글 웃으면서 얘기를 했어. “그렇게만 들어주면 지금 당장 내려오겠다는데요.”하니까 “ 김 조장이 내려올 수 할 수 있겠나?” 또 이 사장이 그러는 거야. “내려온다고 약속 받아왔습니 다. 이제 사장님만 결단을 내리시면 돼요. 여기서 사장님이 오케이 안 하면 나 옥상에 못 올라가 요.” 그랬지.(복지현과의 대화, 2021.8.14)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6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