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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발명가의 무기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정보’다

문서에서 R&D 성공실패사례 에세이 (페이지 44-50)

1인 발명가의 무기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정보’다

ReSEAT 전문연구위원

김석진

가 특허 정보실의 연구원으로 5년 정도 일했을 때의 이야 기다. 특허청에 제출된 특허 출원 내용이나 중소기업의 신제품, 신기술을 조사하는 일을 맡았는데, 종종 발명가를 만나 상 담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상담을 하면서 느끼는 건, 개인의 아이디어가 아무리 뛰어나도 사업화 시키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 같단 것이었다. 대부분 사업화에 실패하는 이유는 갖고 있는 경험 이나 자본, 인력의 한계였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하더라도 대기 업이 갖고 있는 환경을 따라갈 순 없는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자기 제품에 과한 자신감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경우였다. 자기 최면에 걸려 다른 사람의 조언은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는 발명가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는데, 그 중에 상담하느라 꽤나 애를 먹었던 이가 아직 기억에 남는다.

어느 날, 한 발명가가 새로운 방식의 무한동력 발전기를 발명했다고 특허 상담하러 온 적이 있었다. 그가 고안한 발명은 발전기의 전기를 두 가지 용도로 사용하는 방식이었는데, 발전기를 작동해서 얻은 전기를 일부는 사용하고, 나머지 일부는 발전기의 배터리를 충전하는데 사용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반복해서 전기를 사용하면 무한 동력을 얻을 수 있다는 이론을 주장한 건데, 이것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완전히 어기는 이론이었다. 나는 그에게 시제품을 실제 제작하더라도 작동되지 않을 것이라 설명해주며, 입력 에너지 대 출력 에너지를 계산해 보여 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발명가는 오히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틀렸다며, 시제품을 만들면 틀림없이 작동할 수 있다고 막무가내였다. 더 이상 그를 설득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일단 특허 출원해 보라고 하며 돌려 보냈다. 이런 사례가 종종 있다 보니, 그 뒤 1인 발명가를 상담할 때는 경계심부터 갖게 되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던 중, 또 다른 발명가를 만났다. 그는 기계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냉장고 용 기계식 과전류 계전기 OCR(OverCurrent Relay)을 대체할 모터 보호용 전자식 과전류 계전기인 EOCR(Electronic OverCurrent Relay)을 개발하고 있던 1인 발명가였다. 이때의 냉장고는 대부분 OCR(Over Current Relay)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냉장고 모터가 자주

고장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 냉장고 모터가 고장 나는 원인의 대부분은 과부하로 인해 모터 코일 과전류가 일어나고, 이것 때문에 모터 내부의 열이 상승하여 모터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OCR을 사용하는 것인데, 기존 사용하고 있던 열동형과 유도형 OCR에는 제각각 단점이 있었다. 열동형은 성능과 정밀도가 떨어지는 반면 유도형은 정밀도는 높지만 성능 대비 가격이 높아 경제적인 부담이 있었고, 부피가 컸다. 반면, 발명가가 개발하고자 하는 EOCR은 OCR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보완하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엔지니어 출신인 그는, 수십 년의 현장 경험을 통해 쌓은 기술력과 가능성 있는 시장성에 자신감을 갖고 발명을 시작했다고 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발명에 매달리다보니, 재정 상황이 한계까지 다다른 모양 이었다. 중소기업청의 기술 개발 지원 자금을 받기 위해 나에게 상담을 요청한 것인데, 만약 받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해온 일을 중단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이었다. 절박한 상황에서도 발명가의 자신감만큼은 넘쳐났다. 자신이 개발할 기술은 세계 최초이고, 개발에 성공한다면 시장성은 어마어마할 것이라고 자부했다.

물론, 그동안 만난 발명가 중에 자신의 발명품에 자신감이 없는 이는 없었지만, 그의 경우는 완전 달랐다. 본인 소개부터 수십 년간 다진 경력이 묻어 나왔고, 개발하고자 하는 제품에서 철저한 시장 예측, 명확한 개발 동기, 자신감이 보이는 기술력 등을 읽을 수 있었다. 무엇

보다, 물려받은 유산까지 투자할 만큼 제품 개발에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집념이 돋보였다. 누군가 조금만 더 도와준다면 금세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게 했다. 그에게 개발 제품에 관한 설명을 듣고 난 후, 관련된 국내 및 해외 특허 정보를 검색해 보았다. 그 역시 여느 1인 발명가와 같이 자기가 개발한 EOCR이 세계 최초라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검색해보니 이미 EOCR의 개념이 발표되어 있었고 해외 특허도 다수 등록되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EOCR이 아직 개발 초기 단계여서 출원 양이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나는 검색된 국내 외 관련 특허 전문을 모두 복사해서 그에게 건네주고, 이 전문을 모두 검토해서 본인이 개발하고자 하는 EOCR 기술 내용과 유사점, 차이점을 파악한 후 차이점만 가려내 신규 특허로 출원하라고 권유했다. 그리고 상대방의 특허 청구 범위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이미 공개된 특허 기술을 활용해 자신만의 기술로 변형시키면 신규 특허 출원을 할 수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그 다음 자기가 개발한 열동형 과전류 감지기를 대체할 수 있는 영상 전류 변류기(ZCT)회로 기술의 특허를 출원함과 동시에 결상, 역상, 단락 예방회로도 추가시켜서 보다 광범위한 특허 청구 범위가 설정되도록 했다.

아마 그에게 특허 제도와 정보를 활용하는 것이 기술 개발과 특허 출원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각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상담 이 후, 그는 탄탄대로의 길을 걸었다. 그가 개발한 EOCR은 기존 기계식 OCR보다 소형 경량화 됨은 물론, 전류 조정 범위가 광대역으로

넓어지고, 가격도 저렴하게 공급하게 되었다고 들었다. 게다가 수백억 원 이상의 전력 소비까지 줄일 수 있는 반영구적 제품이어서, 앞으로 시장에서 꾸준히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EOCR은 1985년 전국우수발명품 전시회에서 대통령상을, 스위스 제네바 국제신기술발명전시회에서 은상, 프랑스 파리 국제발명 대회에서 금상을 받는 등 세계 각국에서 기술력을 인정받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 미국, 유럽 등에도 150여건의 특허를 출원, 등록해 특허 강소기업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게다가 한국 전기 연구소와 한국선급의 신뢰성 시험에 합격해 미국 UL 규격을 취득 하기도 했다.

개발 자금이 없어 절박한 심정으로 나를 찾아온 발명가가 건실한 중견 기업의 오너이자 국내외 EOCR의 선구자로 성장한 것이다. 그를 통해 개인의 의지와 집념, 인내심이 신제품 개발에 얼마나 중요한 조건 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기존 특허 제도와 특허 정보를 현명하게 잘 활용했기에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내와 집념만 갖췄다고 해서 신제품이 뚝딱 개발되어 세상에 빛을 보는 것이 아니다. EOCR 발명가처럼, 자기 기술의 방어력을 높이고 경쟁력을 확보하는 방법을 찾아야 오랜 시간 인고하며 만들어낸 기술에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1인 발명가들이 자본, 경험, 인력의 한계에 부딪히고 있을 것으로 안다. 정보와 집념으로 싸워보라.

자본과 경험, 인력은 불공평하지만 정보와 집념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다. 내가 특허 정보실에서 근무하며 겪은 발명가들의 이야기는 여기 까지다. 이 이야기를 통해, 부디 신제품 개발을 꿈꾸는 1인 발명가들 에게 작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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