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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 개발에서 포기하지 않으면 실패는 없다

문서에서 R&D 성공실패사례 에세이 (페이지 57-63)

과학기술 개발에서 포기하지 않으면 실패는 없다

ReSEAT 전문연구위원

변선호

국의 초대 대통령은 원유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이 택해 야 할 가장 경제적인 에너지원으로 이미 원자력발전(이하

‘원전’)을 택하여 1958년 원자력법 제정과 함께 대학교에 원자력 과를 최초로 신설하였다.

나는 1980년 중반 G사 연구소의 고분자 연구실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당시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 캐나다 그리고 일본 등에선 이미 원전이 정상 가동 중이었고, 국내도 5기가 가동 중이었다. 원전에는 측정, 제어, 전력 에너지 공급 등에 각종 전기·전자기기, 전선 케이블이

필요하다. 이들의 절연체 및 외피에는 방사능에 견딜 수 있는 고분자가 규격으로 정해져 있었다. 과거에 외국의 전선용 고무 기술을 배운 적이 있다. 그래서 본인의 남다른 호기심도 있었지만 국가적인 관점에서도 방사능에 견디는 국산 케이블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다. 회사에서도 고부가가치 사업 확장을 위해서 이를 위한 연구개발이 필요하다고 생각 했다.

그리하여 1982년경 회사 내부 관계부서에 이러한 취지를 설명하고 방사능에 견디는 고분자 기술의 연구개발 프로젝트화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회사 망하는 것 보고 싶은가? 고분자가 방사능에 견딜 수 있나? 회사가 시키는 일이나 열심히 하라”는 것이었다. 실망이 컸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전선 케이블용 절연에 사용하는 고분자 재료는 화학적 및 전기적으로 가장 안정된 재료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가 규정한 방사능에 견딜 수 있는 성능을 실험실에서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이 프로젝트가 성립되어야 한다고 설득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한편 으로는 원전의 위험성이 우려되는 사회적 통념상 쉽게 허락받기 어려운 상황이 이해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방사능에 견딜 수 있는 고분자 재료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에 쉽게 물러서지 못하였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기에 대안을 궁리해냈다. 회사에 공식적으로 알리지 않고 연구를 진행해 실험결과로 직접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관계부서의 합리적인 분들이 당연히 회사의 정책으로 추진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문제는 시험을 위한 비용 마련이었다.

당시 방사선 관련 국내 유일한 국가연구소장을 만나 협조를 요청하였다.

이 시험이 몇 개월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방사능 시험에 필요한 초고전압 절연용 가스를 한 드럼만 가져오면 협조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을 수 있었다.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다. 우리 고분자 연구실 내 연구비로 초고 전압 절연용 가스를 구입해 제공하고 몇 개월 간 국가연구기관에서 방사능 피폭시험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의욕적이고 창의적인 연구실 동료들과 함께 절연체 및 외피의 용도·재료별에 따른 여러 고분자 처방을 위해 토론을 거듭한 끝에 연구를 거쳐 방사능 시험용 시료를 준비했다. 그리고 우리는 또 하나의 전략을 강구하였다. 처음부터 방사능에 견딜 수 있는 제품을 만들기보다는 비방사능용 제품 납품을 공식 목표로 설정했다. 그러나 실제 특성은 방사능에 견딜 수 있는 수준의 실험을 진행해 데이터를 축적하기로 하였다.

국가연구소에서 수개월에 걸쳐 여러 차례 방사능 피폭 처방 시험이 진행됐다. 그리고 드디어 희망적인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의 고분자 연구가 가능성을 보인 순간이다. 데이터를 가지고 프로젝트를 반대하던 부서에 찾아갔다. 적극적인 협조를 약속받고, 회사의 공식 개발과제로 추진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렇게 개발한 비방사능용 제품을 원전에 납품하였고, G사는 우리 연구팀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되었다.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방사능에 견디는 제품도 공식적으로 추진 하였다. 그 동안 축적된 방사능 피폭 데이터에 의한 고분자 처방에 근거 하여, 전사적 프로젝트로 여러 용도와 종류의 시제품을 제조했다. 사내 시험을 거친 후, 당시 미국의 유명한 FRC 방사능 시험기관에 보내

LOCA(냉각재상실사고) 시험에 도전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방사능 기술 개발은 녹록지 않았다. 제1회 시제품 시료는 아슬아슬하게 기준치를 못 넘기고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3천만 원 가량 들어간 시험비용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이 비용은 값진 수업료로 생각하고, 앞으로 개발계획을 계속 진행하라는 회사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후 회사 관계부서가 일본의 전선회사와 접촉해 관련된 기술 자료를 지원 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일본 원전용 케이블 기술 자료는 비등수형 원자로(BWR) 계통이었다. 대부분 한국의 원자로는 가압수형 원자로(PWR) 계통이었는데, 이보다 헐거운 규격의 LOCA 시험용 케이블을 위한 자료였기 때문에 우리에게 도움은 되지 못했다. 오히려 PWR용 해외 기술 문헌이 훨씬 도움이 되었다. 여러 차례 보완 연구를 거쳐 케이블 시료를 보내고, 드디어 합격 판정을 받을 수 있었다.

사실은 독자 개발로 도전해 그 까다롭기로 소문난 LOCA시험을 두 번째 시도만에 성공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합격 판정을 받고도 순간 믿어지지 않아 어안이 벙벙했다. 방사능에 견디는 원전제품의 개발 성공은 우리 회사 고분자 연구진만의 기쁨이 아닌, 국내 고분자 기술의 쾌거나 다름없었다.

개발된 원전용 케이블은 기술적인 부분이나 경제적인 면으로도 G사의 인기 제품이 되었다. 이 고무 재료가 방사능에 견디는 케이블 절연 재료로 인정은 받았지만, 과연 원전 내 방사능에 견디는 다른 용도에도 사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은 계속 남아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20년 후인 2008년 6월, 뜻밖에도 이 궁금증을 풀 기회가 왔다. 본인이

현직을 마치고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ReSEAT 프로그램의 전문연구 위원으로 일한지 3년이 지났을 무렵이다.

Y사는 수리용 국내 원전 고리 1호기에 방사능에 견디는 스위치를 납품해왔었다. 이후 규격이 더 높아진 한국 표준형 신고리 원전 1, 2 호기에도 납품을 해오다가 LOCA(냉각재상실사고) 성능에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Y사는 새롭게 소개받은 국내 고무 가스켓 제조업체 I사가 제조한 리미트 스위치를 LOCA 시험에 의뢰하기 전에 본인에게 자문을 요청하였다. Y사 설계실 담당 과장을 만나 상황 설명을 듣고 자료 검토를 진행했다. 그런데, Y사가 과거에 사용하다 불합격 판정을 받은 미국제 S고무와 새롭게 시험을 의뢰하려는 F고무 모두 규격에 미달되는 것이다. 이유를 설명하고, 케이블 절연재료 계통의 실용적 고무를 추천했다. 이는 기존 재료보다 훨씬 저렴할 뿐만 아니라 방사능에 견뎌낸 응용실적도 많았다. 해당 재료는 나도 경험한 적이 있었기에 자신 있게 추천하며, 새롭게 확인된 자료도 함께 제공하였다.

뜻하지 않게 방사능에 견디는 리미트 스위치용 밀봉 재료를 연구할 기회를 얻게 되어 기쁜 순간이었다. 내가 추천한 고무재료 기술에 따라 시제품용 실링재가 제조되고, Y사 품질보증부 검사에서 당당히 합격 판정을 받았다. 그 뒤 상당한 기간이 흐르고, 한수원의 LOCA 시험에 Y사의 시제품이 합격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로써 방사능에 견디는 동일한 실용적 고무재료가 케이블 절연 재료와 실링 재료로 모두 합격을 받아 뜻깊은 순간이었다. 20년 전, 케이블에 사용하여 LOCA 시험에 합격된 고무 재료가 20년 후에 스위치 밀봉재로 사용

되어 LOCA 시험에 합격된 것이다. 그것도 70대 중반의 나이에 중소 기업을 도우며 이뤄낸 성과였다. 스위치 밀봉재 규격이 케이블 규격과 달라 처방도 다르긴 하지만 고무 기본 재료는 같았다. 과학 기술은 거짓이 없고,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원전용 기술 같은 첨단 기술에 난관은 없다! 포기가 실패일 뿐이다. 성공할 수 있는 연구 방법을 스스로 찾아 도전하는 것만이 과학 기술에서 성공의 열쇠이다.

국제 협력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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