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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기(西遊記)와 실크로드

서유기(西遊記)와

문학작품으로서의 「서유기」

손오공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고전 「서유기」는 11세기 송나라 때부터 유행한 ‘설화예술(說話藝術)’, 즉 장터의 직업적 이야 기꾼들이 쓰던 대본에서 점차 발전한 것이다. 16세기 명나 라에 이르러 저자 오승은이 이러한 이야기들을 하나의 소설 로 엮어 만든 ‘집단 누적형(集團累積形)’ 소설로서 「삼국지연 의」, 「수호지」와 함께 중국의 3대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정작 이 소설은 629년부터 17년간 산스크리트어 로 쓰여진 경전 원서1)를 구하기 위해 폐쇄된 국경을 넘어 천축국(인도)까지 138개국에 달하는 나라를 여행하고 온 삼 장법사2) 현장3)스님의 여행기 「대당서역기」와 그의 제자들 이 기록한 「대자은사 삼장법사전」에 그 기원을 두었으며, 이 기록의 이야기가 구전되고 지역마다의 설화와 상상력이 첨 부되어 16세기까지 이어진 것이 그 뿌리이다. 여기에 인도 의 대서사시 ‘라마야나(Ramayana)’에 등장하는 원숭이 장 군 하누만(Hanuman)이 각색되어 손오공으로 등장하고, 도 교의 최고 신인 옥황상제와 여러 제신들, 불교의 석가모니 를 비롯한 관세음보살과 그 수호자들이 등장해 이야기의 역 동성을 더하였다. 또한, 동물이 변화한 팔계와 용마, 괴물이 변화한 사오정이라는 제자가 편승하면서 총 100회의 이야 기를 만들어냈다. 그러다 보니 「서유기」는 적층문학으로서 의 특징과 이야기 전개의 구도에 대해서 다양한 학문적 접 근이 이루어지고 있다.

공간적 배경에 대한 관찰

이야기의 배경에는 수없이 많은 높은 산들과 매서운 바람, 깊은 연못과 동굴 그리고 온갖 상상 속의 나라들이 등장한 다. 여인이 지배하는 나라, 사시사철 불타오르는 산, 괴물이 숨어 있는 한없이 넓은 강물과 각종 요괴들이 사람의 모습으 로 변하여 인간세계를 지배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장소들이 이야기꾼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가상의 공간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 오늘 날 실크로드라 불리는 오아시스 국가들의 지도를 펼쳐놓고 손오공과 삼장법사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많은 공간들이 상상과 전설에 의지했다 치더라도 또한 많은 공간들은 「대당 서역기」와 「대자은사 삼장법사전」에 기록된 공간을 그 배경 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당서역기」의 138개국에 대한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오 늘날 실크로드를 이루고 있는 주요 국가의 모든 도시들이 등 장한다. 특히 이 기록의 시기는 7세기의 모습으로, 지금 우 리가 볼 수 있는 실크로드의 유적들보다 훨씬 이전의 모습 을 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지금 볼 수 있는 사마르칸트의 과 거 모습은 15세기 전후의 모습이지만, 삼장법사 현장스님의 눈으로 바라본 사마르칸트는 이미 폐허가 되어 사라진 아프 라시압 언덕이 번성하던 도시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문학적 가치보다는 기행문으로서의 가치가 더 크기에, 문학 으로 정리된 「서유기」에서 기록하고 있는 현실 세계의 공간 은 어떤 곳이고 어떻게 기록했는지 따라가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소설 속 삼장법사라는 법명은 당 태종이 만들어준 호(號) 이며, 본래 이름은 진현장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서유기」

의 인물은 삼장으로, 「대당서역기」를 기록한 현실 인물은 현 장으로 표현하여 소설과 기록물을 구분토록 하겠다. 7세기 삼 장법사와 손오공이 지나갔을 현실 속의 공간을 찾아가 보자.

제8회: 여래의 명을 받고 장안으로 향하던 관세음보살은 ‘유사하’에서 사오정을 만나다

인간 세상의 혼란을 지켜보던 여래(釋迦)4)는 온갖 역경을 이 겨내고 여래가 있는 영취산으로 진경을 가지러 올 자를 찾게 되는데, 관음보살은 제자 하나를 데리고 이 뜻을 이루기 위 해 당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떠난다.

1)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진 경전이 한자로 번역되면서 잘못된 내용의 전달이나 의미를 알 수 없는 내용이 많아지자 원서를 통해 본래의 의미를 알고 싶어 하 는 학승들이 4세기부터 인도로의 기행을 시작했으며, 신라의 혜초스님도 8세기 이를 실천했던 학승 중 한 명임.

2) 삼장은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의 세 가지 불교경전으로, 모든 불교문서를 총망라한 것을 의미함. 「서유기」 제12회에서 당 태종이 아우 삼은 현 장에게 ‘삼장’이라는 호(號)를 지어줌.

3) 현장은 이름이며 성은 진씨임.

4) 부처의 여러 칭호 가운데 하나이자 석가모니가 자신을 가리킬 때 가장 자주 사용한 칭호. ‘석가’는 종족의 이름이며 ‘부처’는 깨달은 자를 뜻함. ‘여래’ 역시 깨달음을 체험한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음. 우리가 알고 있는 실존 인물의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Gotama Siddhartha)임.

두 사람이 한참을 가고 있으려니, 갑자기 강물이 출렁출렁 앞길을 가로막는다. 이른바 약수(弱水) 삼천리, 바로 유사하 경계에 다다른 것이다.

동편은 모래 자갈 투성이의 사막과 연접했고, 서쪽은 번족5) 들이 우글대는 황무지의 땅에 잇닿았네.

남쪽으로는 오과국 경계에 다다르고, 북쪽은 달단국 오랑캐의 땅으로 통한다.

강을 건너려면 아득한 800리 길, 상류에서 하류까지는 천만 리 머나먼 길이다.

흐르는 물살이 마치 대지가 뒤집히는 듯 사납고, 도도히 용솟음치는 물결은 산악이 솟구쳐 오르는 듯한데,

호호탕탕, 끝도 안 보이는 아득한 강물, 만 길 높이로 길길이 날뛰는 물소리가 10리 밖에까지 들린다. - 서유기

이곳에서 물결을 헤치고 불쑥 튀어나와 관음보살을 낚 아채려 했던 추악한 요괴 하나가 있었으니 바로 사오정이 다. 원래 옥황상제의 부하이던 권렴대장이었으나, 연회석에 서 유리잔을 깨뜨린 죄로 인해 흉악한 몰골로 하계에 떨어져 2~3일에 한 번씩 지나가는 나그네를 잡아먹고 살던 처지였 다. 어찌 관음보살의 권력을 당할 수 있을까. 관음보살에게 귀의하기로 약속한 사오정은 동녘으로 경을 가지러 갈 자를 기다린다. 그리고 22회에서 사오정은 저오능(저팔계)과 일대 격전을 벌이고 삼장은 사오정을 제자로 받아들인다.

문학과 공간 14

5) 투르판족.

둔황 막고굴

옥문관

원래 장안을 떠나 양주를 지나면 하서회랑이라 불리는 길 고 척박한 땅을 지나야 둔황에 도착할 수 있다. 둔황을 지나 면 당나라의 국경 검문소인 양관과 옥문관을 만나게 되는데,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으로 가는 루트를 서역남로라 해서 양 관을 통해야 했고 톈산(천산)산맥 남쪽,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 으로 가는 루트를 서역북로 또는 천산남로라 해서 옥문관을 지나야 했다. 서기전 2세기 한무제(漢武帝, BC 156년~BC 87 년)는 장안 서쪽의 하서회랑을 공략하고 가장 서쪽의 변방 요 새에 ‘옥문관도위(玉門關都尉)’를 설치했다. 그때부터 이 관을 넘는 것을 ‘출새(出塞)’라고 했는데, 그것은 변방을 벗어나 다 른 나라로 가거나, 외적을 정벌하러 나간다는 뜻이다.

이 국경 검문소를 넘은 후에는, 오늘날의 투루판인 고창 국 초입에 해당하는 하미라는 도시에 이르기까지 고비사막 을 건너가야 한다. 중국의 지리지 「산해경」에는 ‘유사(流沙)’

에 관한 이야기가 21군데나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실제 강물 이 아니라 유동하는 모래바다, 즉 사막이다. 이 사막을 둔황 서쪽에 있는 고비사막으로 보고 있다. 800리(320㎞)에 달하 는 ‘모래의 강’ 유사하는 서역으로 가는 승려들이 맞닥뜨리는 첫 번째 위험지대였다.

현장의 제자가 지은 「삼장법사전」에는 당시 현장이 고비 사막을 지나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밤에는 귀신불이 별처럼 휘황하고 낮에는 모래바람이 모래 를 휘몰아 소나기처럼 퍼부었다. 5일 동안 물 한 방울 먹지

못하여 입과 배가 말라붙고 당장 숨이 끊어질 것 같아 한 걸 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 법사는 마침내 모래 위에 엎드려 수 없이 관세음보살을 외었다. - 삼장법사전

제15회: 하비에 이르러 용마를 얻고, 제18회: 티베트에 도착했다 하는데…

실제로 고비사막을 건너던 현장은 늙은 말의 간을 꺼내 먹기 까지 하면서 목숨을 부지한다. 「서유기」 제15회에서는 관음 보살이 구해준 서해 용왕의 셋째아들 용 한 마리가 경전을 가지러 가는 현장을 기다리다 그만 현장이 타고 가던 백마를 먹어버리고 만다. 결국 그 용은 똑같은 백마로 변해 현장을 호위하는데, 그렇게 도착한 고장이 지금의 신강성 하미현, 소 설 속 하비국이다. 이후 흑풍산 흑곰 요괴에게 호되게 당하 며 여행을 계속하던 현장의 일행은 18회에 이르러 티베트에 도착한다. 손오공과 실랑이를 벌이던 젊은이가 대답하니,

이곳은 우쓰장국(烏斯藏國)의 국경 지대요. 마을 이름은 고 로장이라 부르오. 마을 사람 가운데 절반 이상이 고씨 성을 가진 집성촌이오. - 서유기

여기서 우쓰장국은 티베트의 옛 별칭이다. 「서유기」에서 티베트와 관련된 이야기는 두 군데가 나오는데 그 첫 번째가 직접 티베트를 언급한 18회이고, 두 번째는 서량여국을 이야 기한 53회이다. 그러나 실제 현장스님의 「대당서역기」에서

는 티베트를 거쳐 간 적이 없다. 다만 후에 히말라야산맥 남 쪽 기슭에 티베트족으로 추정되는 서량여국(여인국)을 다녀 간 적이 있을 뿐이다. 즉, 「서유기」에서 직접 언급된 티베트 는 당시의 중국인들 입장에서 알고 있는 서역지방의 한 나라 로 등장한 것이고, 53회의 여인국과 관련된 이야기는 「대당 서역기」의 기록에 근거해 여인들만 산다는 흥미로움이 이야 기로 전해졌을 것이다.

하비(하미)를 지나 고창국에 이르러 실제 현장은 보좌관을 얻게 된다

천신만고 끝에 하비에 도착한 현장은 마침 그곳에 와있던 고 창국의 사신과 만나게 되고, 이를 들은 고창국 왕 국문태(재 위 624~640년)는 630년 2월에 현장을 고창국으로 초대하 여 설법을 듣는다. 1개월을 머물다 고창국을 떠날 때 국문태 는 현장과 의형제를 맺고, 지금의 키르기스스탄 지역까지 그 의 인맥을 동원해 모든 여행의 편의가 제공될 수 있도록 전 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4명의 종자와 법복 30벌, 황 금 100근, 은전 3만 냥, 비단 500필, 말 30두, 인부 25명 등 을 여비로 선사한 것이다. 또한 돌아가는 길목의 24개국 제 왕들에게 주는 의뢰장과 더불어, 당시 실크로드를 왕래하는 데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던 서돌궐의 왕 통엽호카간에게 는 비단 500필, 말린 과일과 정중한 의뢰장을 보냈다 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이 바로 4명의 종자, 즉 보좌관이다. 주 로 통역관으로 선발된 사람이며,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인 가 필시국까지 보좌했다고 한다. 이후 국문태의 지원하에 서역 국까지 가는 길은 톈산산맥을 넘을 때의 고난을 제외하고는 사마르칸트를 거쳐 발흐까지 일사천리로 통과할 수 있었다.

「서유기」 속 제자가 손오공, 저오능, 사오정, 그리고 말로 변 한 용마까지 4명임을 생각하면 고창국은 「서유기」의 전개에 있어 또 하나의 중요한 모티프(motif)를 제공한다. 또한, 「서유 기」에서는 당 태종이 현장과 의형제를 맺는다는 설정으로 현 장이 고창국에서 머무른 시간은 「서유기」의 이야기 전개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원래 고창국의 토착민들은 톈산산맥 북쪽에서 유목하다 남하한 이란계 차사인(車師人)으로, 중국 전한시대(BC 3세 기~AD 1세기)에 교하를 도읍 삼아 차사전국을 세웠다. 그 후 한나라와 흉노가 번갈아 통치하다 5세기 중엽 북량(北涼) 고비사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