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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시 시장

1. 세종대왕의 도시, 여주시

세종대왕은 한국인은 말할 것도 없이 외국에서도 추앙을 받는, 백성들이 각자 자신의 생활과 일터에서 행복해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 역사상 최고의 리더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백성을 사랑하는데서 나아가 백성과 함께하 는 마음으로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소통하고, 여러 위기와 고난 속에서도 국론을 통합해 조선의 500년 기틀을 다진 세종대왕은 누구라도 본받고, 닮고 싶어 하는 위대한 성군입니다. 바로 이 세종대왕께서 550년이 다 되도록 영면해 계신 곳이 바로 여주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세종대왕님을 모시고 있는 ‘세종인문도시 명품 여주’ 원경 희 여주시장입니다.

세종대왕 영릉이 여주에 있다는 것만으로 여주 역사에 많은 변화가 있어 왔지만, 이제부터는 시대를 앞선 혁신 적인 리더십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세종대왕의 통찰과 지혜를 여주시가 중심이 되어 적극적으로 실천하려고 노력 하고 있습니다. 국가적 사업이라 할 수 있는 ‘세종대왕과 한글의 세계화’를 기초 자치단체인 여주시가 팔 벗고 나 서는 것은 여주가 ‘세종대왕의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2. 세종대왕과 여주의 각별한 인연

세종대왕 영릉이 여주시에 위치한 사실 외에도 세종대왕과 여주시는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습니다. 1469년(예 종1년) 음력 8월 8일에 광주 대모산(지금의 서울 서초구 내곡동) 자락에 모셔져 있던 세종대왕 영릉을 여주 능서 면으로 천장하면서 여흥도호부가 여흥목으로 승격됩니다. 이어 같은 달 18일 여흥목이 여주목으로 개호돼 이때부 터 지금의 여주라는 지명으로 불리게 됩니다. 원경왕후는 조선 3대 임금 태종의 비이자 세종대왕의 어머니이신 분으로, 여주는 세종대왕의 외가가 있던 곳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세종대왕께서는 강무(講武)를 위해 여주를 3번이나 직접 방문하셨습니다. 조선 초기 강무는 군사 의 조련과 사냥을 겸한 무예연습의 일환으로 임금에는 필수적인 일이었습니다. 세종대왕께서는 1417년 아버지 태 종 임금과 함께 여주 이포(梨浦)에서 강무를 한데 이어 2년 뒤인 1419년에는 지금의 여주시 북내면에 위치한 금 당천 가를 다녀가셨습니다. 또 다시 2년 뒤에는 현재 여주시청 건너편 강변에 위치했던 팔대숲과 청심루를 강무 차 방문하셨습니다. 1469년인 예종1년 세종대왕릉이 여주로 옮겨오며 한반도 최고의 명당자리 주인공이 됩니다.

그리고 남한강가의 천년 고찰 신륵사는 세종대왕의 원찰이 되면서 그 이름이 더욱 알려지게 됩니다. 원찰(願刹)이 란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진 사찰을 말합니다. 이런 까닭에 신륵사 경내의 주된 불전은 대웅전이 아 닌 죽은 이의 극락왕생을 비는 극락보전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현재 여주시 점동면 덕평리에 위치한 제간공 권규의 묘역 또한 세종대왕과 깊은 인연을 갖고 있습니다. 이곳에 조선 태종의 셋째 딸이자 세종대왕의 누이인 경안공주께서 잠들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태종과 원경황후 사이에는 딸이 넷 있었는데 그중에 셋째 딸이 경안공 주입니다. 세종대왕과 천성과 기품이 서로 닮아서 궁중에서 그 현명함을 함께 일컬었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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