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실(극동문제연구소, 연구원) [email protected]
▣ 요약문 ▣
본 연구는 북한예술영화 9편을 분석하여 북한이 중점 추진한 과학기술분야와 과학기술자의 삶을 살펴본다. 본 연구에서 분석한 예술영화 9편은 모두 사실에 기 초하고 있다. 과학기술 개발 대상과 과학기술자도 실제 인물을 형상하였다. 이들 예술영화를 분석하여 북한 과학기술연구 현장과 북한사회에서 과학기술자가 차지 하는 사회적 지위에 대한 이해를 제공할 것이다. 9편의 예술영화는 과학기술정책 변화에 따라 다음 4개 시기로 구분하여 분석하였다. 기술혁신을 강조한 1960년대, 3대 기술혁명을 추진한 1970년대, 선진과학기술을 추구한 1980년대, 경제난 극복 을 위해 과학기술을 중시한 1990년대와 2000년대이다. 연구대상 선정은 북한이 가 장 주력한 과학기술 2개 분야를 소재로 한 각 시기를 다룬 예술영화로 하였다.
Ⅰ. 머리말
북한영화는 기본적으로 대중계몽과 선전선동수단으로써 역할이 강하게 나타난 다. 그러나 과학기술과 관련된 영화, 실화를 바탕으로 창작한 영화는 다분히 북한 통치자의 의도나 당의 정책관철을 위한 방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관행이지만, 그 렇다고 하더라도 그 바탕에는 과학기술자들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당대 과학기술 문제를 제기하고 그 해결 과정을 과학기술인의 삶을 닮아 비교적 솔직하게 보여 주고 있다.
북한의 문학예술은 1960년대 ‘사회주의 문화건설’이라는 문예정책에 따라 추상 주의문화에서 사회주의 민족정신에 기초한 사실주의 문화 창조로 그 방향이 바뀌 기 시작하였다. 특히 1970년대 김정일의 등장과 함께 정립된 ‘주체의 문예이론’은 작가 예술가들이 당과 노동계급, 인민의 입장에서 사회주의현실을 진실하게 담아 내는 창작활동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모든 문학예술작품은 생활 속에서 종자를 골라잡아야 하며, 종자는 철저히 당의 노선과 정책에 의거해야 한다는 원칙이다.1) 1960년대를 배경으로 창작된 예술영화는 도시와 농촌, 공장기업소의 노동생활을 비롯해 다양한 주제로 사회주의 문화 생활상을 그려냈다.
본 논문에서 살펴본 과학기술을 소재로 한 예술영화 9편은 모두 실화를 바탕으 로 창작한 것이다. 1960년대를 형상한 예술영화 <곡절 많은 운명 1부>는 일본 유 학생 출신인 금속전문가 주종명을 원형으로 하고 있다. 1980년에 창작된 <열네 번째 겨울>은 육종학 박사인 국가과학원 실험생물학연구소 소장 백설희를 형상한 작품이다. 2007년에 개봉되어 칸영화제에 출품되었던 예술영화 <한 여학생의 일 기>는 국가과학원 조종기계연구소 소장 김사명 박사의 가정을 원형으로 한 작품 으로 북한 과학자의 일상을 생동하게 담아냈다.2)
이 글에서는 북한 예술영화로 북한의 과학기술을 재조명 해본다. 아울러 과학기 술의 한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북한 과학기술인의 삶도 함께 살펴본다. 예 술영화를 통한 북한 과학기술 검토는 지금껏 문헌 중심으로 분석되었던 북한 과 학기술을 실제 과학기술 현장을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이다. 시대별로 북 한이 주력하고자 했던 과학기술 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의 미가 있다.
1) 종자론은 소재의 선택과 구상으로부터 작품의 얽음새와 구성, 성격창조와 양상 등 창작의 전 과정에 전일적으로 작용하는 근본 고리에 대한 사상이다.
2) 조선중앙방송, 위대한 령도따라 전진해온 주체과학의 영광 넘친 60년, 2012년 12월 1일.
Ⅱ. 사회주의공업화와 기술혁신: 1960년대
북한경제역사에서 1960년대는 ‘사회주의공업화’실현을 목표로 한 장기경제계획 인 7개년계획을 처음 추진한 시기이다. 계획은 사회주의식 산업화 추진을 위한 기 본방향으로 중공업 우선 발전을 보장하면서 경공업 및 농업의 동시 발전을 경제 정책으로 내세웠다. 다시 말해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는데 필요한 자원의 70%를 국 내에서 조달하도록 튼튼한 원료·연료기반을 조성하고 최신 기술을 접목시켜 자립 적인 민족경제발전을 이루겠다는 전략이다.3)
북한이 중공업 우선 발전을 강조한 것은 일제가 버리고 간 산업기반이 모두 중 화학공업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1962년 발생한 카리브해 위기와 한·일 회담, 베트 남전 등 국제정치 환경이 급변하면서 군사위협이 조성된 것과도 관련된다. 북한지 도부 같은 해 12월 당중앙위원회 4기5차 전원회의를 개최하고 경제와 국방건설 병진노선을 채택하였고 국방공업을 육성하기 위한 대규모 기계제작공업기지를 구 축하였다. 또한 1차7개년계획을 3년 연장하여 원료에서 최종 생산품까지 자립생산 이 가능한 국방산업의 일괄생산체계를 갖추게 하였다.4)
과학의 사명도 산업부문에서 기술혁신을 전면화하도록 규정한다. 과학원 창립 10주년 당 정치국회의에서는 과학사업에 국가투자를 늘여 국내연료를 사용하는 철강생산연구를 중점해결분야로 강조하였다. 이듬해 3월 ‘전국 과학자, 기술자대 회’에서는 기술혁신 기본대상을 공업기계화와 농업기계화, 전기화로 정하였다. 아 울러 철강과 화학공업에서 국내원료·연료 사용을 다시 제기하였다. 1차7개년계획 의 당면 목표는 철강과 공작기계의 개발 생산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영화 <공장의 주인들>은 1963년 대안전기공장이 금속공업성에서 하달된 ‘전기 기관차 견인 모터 계열생산’을 실현하기 위해 종합가공반을 개발 생산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정전직후 북한의 공장기업소에서는 이른바 ‘지배인 독단주의’가 만 연하여 불량품을 생산하고 국가계획이 무시되는 등 기업생산관리 개선과제가 제 기되었다. 김일성은 1961년 대안전기공장의 생산실태를 요해하는 과정에 기업 활 동에서 ‘지배인 유일관리제’를 없애고 공장당위원회와 기사장, 생산자의 집체적인 토의로 생산관리를 실현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를 ‘대안의 사업체계’로 규정하고 모든 공장기업소에 적용하도록 하였다.
3) 김일성, “조선로동당 제4차당대회에서 한 중앙위원회사업총화보고(1960년 9월 11일),” 『김일성저작 집 15권』,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1년), 211쪽.
4) 김일성, “여섯개고지 점령을 위한 투쟁에서 이룩한 성과를 더욱 공고발전시키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 회 4기5차회의에서 한 결론,” 『김일성저작집 16권』, (평양: 조선로동당출산사, 1982년), 546쪽.
그러나 ‘대안의 사업체계’의 본보기를 창조한 대안전기공장에서 불과 몇 년 만 에 다시 지배인 독단주의가 나타났다. 성에서 내려온 견인 모터 계열생산 국가과 제 수행은 불가능하였다. 공장 생산능력보다 훨씬 높은 생산 목표를 받은 공장 당 위원회는 가공속도가 높은 종합가공반을 개발하여 방대한 생산과제를 수행하고자 했다. 종합가공반은 이미 공장대학 출신 기술자가 연구 중이었다. 미진한 부분은 공장에서 기술혁신으로 풀어가고 내부예비를 찾아 해결하면 될 것으로 타산하였 다. 반면 지배인은 공장대학생이 무슨 최신기술 선반을 연구하겠냐며 성에서 가공 설비를 더 받아오고 노력을 더 투입하면 된다고 주장하였다. 성은 아무 지원도 없 이 무조건 공장자체가 해결하여 생산량을 보장하도록 독촉하였다.
공장당위원회는 전기기관차용 견인 모터 계열생산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공장 내 협의회를 조직하고 새로운 생산방법을 논의하였다. 우선 부품생산 공정대로 공 작기계를 다시 배치해 시간과 노력을 절약하고, 기대공이 생산능률을 올리도록 부 품과 공구를 보장해주어 기대공이 자체로 설비수리를 하도록 하였다. 또한 공장 내 폐자재를 모아 다시 주물하고 가공하여 예비를 확보했다. 공장당위원회는 종합 가공반 개발에 기술 집단을 총동원하여 축과 권선을 비롯한 부품가공을 흐름식 생산체계로 바꾸어 조립을 실현하였으며, 제 기일에 제품을 출고해 철도국에 보내 주게 된다.
영화 <공장의 주인들>에서는 대안전기공장의 종합가공반 개발생산을 통해 1960년대 ‘대안의 사업체계’가 공장기업소에서 실제로 작동하지 못했음을 반영한 다. 그리고 기술개발에 과학자가 아닌 공장 기술자들이 설비개선 및 개발을 주도 하는 등 당시 현장 중심의 과학연구 활동이 상당히 저조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 <곡절 많은 운명>은 과학원 중앙금속연구소 주종명의 김책제철연합기업 소에서 과학연구 활동을 원형으로 하고 있다. 그는 철강생산에서 콕스를 저사용하 는 ‘철콕스’ 개발을 위해 노력하였다. 북한은 정전직후 복구건설에서 강재수요가 급증하자 5대제철제강소에 공칭능력을 넘어서는 강재생산을 제기했다. 높아진 강 재생산 요구를 보장하려면 제철소에서 쇳물 생산을 늘려야 했고, 쇳물 생산 증대 에는 많은 콕스 사용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1950~60년대는 중국의 대약진 운동과 중소 분쟁, 그리고 ‘코메콘’ 가입을 둘러싼 북한과 소련의 갈등 심화 등으로 중국 과 소련에서 콕스수입이 어려웠다.
때문에 국내연료를 사용하는 제철기술 개발이 더욱 강조되었다. 주종명은 이미 15명의 과학자와 함께 실험로에서 철콕스 생산기술을 확립하고 경제지표를 찾아
때문에 국내연료를 사용하는 제철기술 개발이 더욱 강조되었다. 주종명은 이미 15명의 과학자와 함께 실험로에서 철콕스 생산기술을 확립하고 경제지표를 찾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