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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북한 기술혁명의 한계와 그 영향

문서에서 북한과학기술연구 (페이지 84-89)

북한의 기술혁명론과 1960년대의 기술혁명 경험

Ⅳ. 1960년대 북한 기술혁명의 한계와 그 영향

1960년대 들어 북한은 전면적 기술혁명을 통해 고도성장을 유지하고 체제의 물 적 기반을 더욱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제1차 7개년 계획이 3년 연장된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 북한의 기술혁명 시도는 성공적이지 않았다.36) 이러한 ‘실패’의 경험은 사상혁명 선행 원칙의 확립, 수령체계 확립, 후계체제 구축과 새로운 과학 기술 정책 모색 등 이후 북한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 1960년대 전면적 기술혁명 시도와 실패

로동당은 1950년대 후반 고도 경제성장의 후유증을 제거하고 인적・물적 ‘예비’

가 소진된 상황을 극복하면서 고성장을 유지하기 위해 기술혁명을 핵심 국정 과 제로 결정했다.37) 이에 따라 1961년 시작된 제1차 7개년 계획은 목표 성장률의 75-80%를 기술혁신에 기초한 노동생산 능률 향상을 통해 달성하고자 한, 말 그대 로 ‘전면적 기술혁명의 계획’으로 작성되었다.38) 로동당은 생산 현장과 과학계의 기술혁신을 활성화함으로써 기술혁명을 실현하려 했고, 이를 위해 공장・기업소・

연구 기관들의 천리마작업반 운동 강화, 과학원 재편 및 원장 교체 등 다양한 조 치를 취했다.39) 나아가 로동당은 기술혁명을 생산 현장과 과학계의 연계에 기초하

36) 아래에 언급하겠지만 1960년대 북한은 안보위기 증대로 인해 국방에 대한 투자를 계획보다 크게 확 대했다.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에 있어서도 1964년에 설립한 국방과학원(제2과학원)에 우수한 인력과 물적 자원을 우선적으로 배분하였고, 이는 1990년대 중후반 소위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마찬가지였 다. 따라서 현재까지도 거의 공개되어 있지 않은 국방 부문이 북한 전체의 과학기술 역량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추정되며, 이하 언급할 북한 기술혁명의 실패는 민간 부문에 한정된 것임을 밝 혀둔다.

37) 북한에서 ‘예비’란 “재생산과정에 쓰이지 않고 있거나 효과적으로 쓰지 못하고 있는 생산요소로서 생 산을 늘리는 데 동원,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 능력”을 의미한다.

38) 김 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 경제 발전 7개년(1961~1967) 계획에 대하여,” 『근로자』

1961. 9, 137-192쪽, 특히 188쪽.

39) 1961년 3월 과학원 원장이 경제학자 백남운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강영창으로 교체됨으로써 1952 년 과학원 설립 이후 처음으로 이공계 출신 원장이 등장했다. 그러나 당시 원장 교체에서 더욱 주목할 점은 강영창이 한국전쟁 전 성진제강소 개건, 전쟁 중 군수품 생산, 전후 황해제철소 복구 및 확장 등

여 조직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1962년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설립했고, 제도적으로 각급 생산 단위의 혁신 지향적 활동을 유도하기 위해 1963년 모든 공장・기업소 들의 기술발전계획 작성 및 실행을 의무화했다. 이와 함께 로동당은 공업과 농업 부문에 각각 대안 체계와 협동조합경영위원회를 도입함으로써 생산에 대한 기술 적 지도를 강화하고 기술혁신을 촉진하려 했다. 덧붙여 로동당은 생산현장에 부족 했던 고등 기술 인력을 충원하기 위해 1960년대부터 주요 공장과 기업소에 공장 대학을 설립했다.40)

그러나 생산 현장과 과학계의 기술혁신 활동을 제도화하고, 이를 통해 내포적 경제 성장을 실현하려 한 로동당의 의도는 1960년대에 실현되지 못했다. 북한을 둘러싼 안보 환경이 급속히 악화되자 김일성과 로동당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1962년 12월 ‘경제와 국방의 병진 노선’(이하 ‘병진 노선’)을 채택했고, 이후 애초 계획보다 많은 자금과 인력을 국방 분야에 투입하기 시작했다.41) 병진 노선은 자 원 제약 심화, 기술혁명 과제의 하향조정, 과학계 역량의 분산 및 약화 등 기술혁 명 정책과 과학기술 정책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의 경제 현 장에서는 생산과 건설의 ‘파동성’・자원 낭비・전문화와 협동 생산의 부진・외화 부족 등 낮은 과학기술 수준에서 비롯된 여러 문제들이 지속되었다.42) 그러나 생 산 현장과 과학계의 기술혁신 활동 부진, 로동당과 내각의 취약한 과학기술 정책 역량과 간부들의 낮은 수준, 당 정책 실행에 대한 당원과 인민들의 소극적인 태도 등으로 인해 이러한 문제들이 쉽게 해결되지 않았고, 결국 7개년 계획은 3년 연장 되었다.

2. 기술혁명의 부진과 사상혁명의 부상

1960년대 초 로동당이 전면적 기술혁명을 추진했지만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1950년대 후반 이후 로동당 중공업부장‧내각 금속공업상 등을 역임하면서 천리마운동‧천리마작업반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즉, 당시 로동당은 과학 연구의 현장 성을 강화하기 위해 그간 김일성의 지시와 당의 경제정책을 충실히 이행한 인물을 원장에 임명한 것 이다.

40) 1960년대 초 기술혁명을 위한 로동당의 조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변학문, “1960년대 초 북한의 기술발전계획과 기술혁신의 제도화 시도”,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3호 (2013), 410-434쪽을 참고할 것.

41) “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5차 전원회의에 관한 보도,” 『근로자』 1962. 21, 2-8쪽.

42) ‘파동성’은 생산과 건설이 안정적으로 진행되지 않아 생산량이나 건설 속도가 어느 때는 매우 높았다 가 다른 때는 매우 저조해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반대로 생산과 건설이 일정한 수준과 속도에서 안정 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태를 ‘정상화’라고 말한다.

는 사실에 주목하면 북한에서 강조하는 ‘사상성 제고’의 의미와 ‘사상혁명 선행’

원칙의 확립 시점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로동당이 말하는 사상성 제고는 주관적 의지만으로 객관적 어려움을 극복하자는 것이 아니라, 기술 혁명을 포함한 당 정책을 철저하게 집행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사상혁명 선행 원 칙도 일부 연구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1950년대 말에 확립된 것이 아니라, 김일성 과 로동당이 1960년대 전반기에 발생한 문제들에 사상성 제고로 대응한 결과 1960년대 중반에 확고해졌다. 이에 대해 간단히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북한에서 사상의 중요성이 본격적으로 강조되기 시작한 시점은 여러 선행 연구 자들이 밝힌 것처럼 1950년대 말이었다. 이때 ‘사상’은 공산주의 건설을 위한 장기 적 혁명 과제로서 농민 인텔리 등 중간층의 사상 개조를 의미하는 ‘사상혁명’과, 당원과 인민들이 당면한 당 정책을 자신의 과제로 인식하고 그 실현에 적극 나서 도록 하는 것을 뜻하는 ‘당적 사상 체계 확립’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강조되었 다. 중요한 점은 1961년까지는 당시 핵심 국정 과제였던 기술혁명의 관철을 의미 한 후자의 언급 빈도가 높았으며, 사상혁명도 그 효과가 구체적인 경제 사업에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되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1960년대 초 사상혁명과 당적 사 상 체계 확립 모두 ‘기술혁명을 위한 사상성 제고’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전반기를 거치며 사상혁명의 중요성이 점차 부각되었다. 그 첫 째 계기는 안보 환경 악화였다. 1962년을 전후로 수정주의・사회주의 분업 체제 등에 대한 이견 때문에 소련과 관계가 악화된 데 쿠바 사태・베트남전 확전・한 미일 삼각 동맹 현실화 등이 더해져 안보 위기가 심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당원과 지식인을 포함해 전 사회적인 동요의 조짐이 나타났다. 이에 김일성이 사회적 긴 장 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계급의식 및 자력갱생 정신 고취와 사상 투쟁을 강조했 기 때문에 사상성 문제가 부각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1964년 “우리나라 사회주 의 농촌 문제에 관한 테제”(농촌 테제)가 채택된 것도 사상의 중요성을 높인 요인 이었다. 로동당이 당시 북한 주민의 과반수가 거주하고 있떤 농촌 사업의 가장 중 요한 과제로 사상혁명을 제시했기 때문이다.43)

위와 같이 사상의 중요성이 높아졌다고 해서 기술혁명의 중요성이 낮아지지는 않았으며 기술혁명을 위한 사상성 제고라는 기조도 유지되었다. 대외 관계가 악화 된 상황에서 김일성이 자립노선 강화를 택하면서 도리어 북한 자체 역량에 기초 한 기술혁명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로동당은 특히 1960년대 전반 기술혁신 과정에 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과학자, 기술자들의 역할을 높임으로써 기술혁명의 속도 와 수준을 높이려 했다. 당연히 생산 현장 중심의 연구를 강화하라는 과학계를 향 43) 김일성, “우리나라 사회주의 농촌 문제에 관한 테제”, 『근로자』 1964. 5, 2-30쪽.

한 요구도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과학계의 기술혁신 관련 연구는 여전히 김일성 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이 또한 사상성을 부각시킨 요인으로 작용했다. 김일성 이 기술혁명과 현장 중심의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과학자들의 소극적인 태도를 기술혁명 부진의 한 원인으로 지목했고, 이러한 소극성의 근원을 그들의 낮은 사 상성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1965년부터 김일성이 인텔리의 혁명화, 노동계급화를 강조한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판단이 자리했다.44) 따라서 인텔리 혁명화를 통한 사상 개조의 목표는 당 정책에 대한 인텔리들의 이견을 제거하고 그들의 역량을 당 정책 실현에 총동원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1960년대 초 중간층의 사상 개조만 을 의미했던 사상혁명이 당 정책의 철저한 관철을 촉구하는 당적 사상 체계 확립

한 요구도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과학계의 기술혁신 관련 연구는 여전히 김일성 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이 또한 사상성을 부각시킨 요인으로 작용했다. 김일성 이 기술혁명과 현장 중심의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과학자들의 소극적인 태도를 기술혁명 부진의 한 원인으로 지목했고, 이러한 소극성의 근원을 그들의 낮은 사 상성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1965년부터 김일성이 인텔리의 혁명화, 노동계급화를 강조한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판단이 자리했다.44) 따라서 인텔리 혁명화를 통한 사상 개조의 목표는 당 정책에 대한 인텔리들의 이견을 제거하고 그들의 역량을 당 정책 실현에 총동원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1960년대 초 중간층의 사상 개조만 을 의미했던 사상혁명이 당 정책의 철저한 관철을 촉구하는 당적 사상 체계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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