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기술혁명론과 1960년대의 기술혁명 경험
Ⅱ. 기술혁명론 연구의 필요성
1. 기술혁명은 북한 경제 발전 전략의 핵심 요소
로동당은 기술혁명을 “근로자들을 어렵고 힘든 일에서 해방하며 더 많은 물질 적 부를 생산하여 인민 생활을 더욱 넉넉하고 문명하게 만드는 혁명”으로서 ‘자립 적 민족경제를 건설하고 인민들을 자연의 구속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투쟁’으로 규 정했다.2) 즉, 사상혁명과 문화혁명이 각각 인민들의 공산주의적 개조, 인민들의 문화적 소양 향상과 그들의 문화적 수요 충족을 목표로 한 것이라면, 기술혁명은 국가 운영의 핵심 영역 중 하나이자 사회주의를 강화하고 공산주의를 건설하는 데 불가결한 요인인 생산력 발전과 직결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북한의 기술혁명론과 기술혁명 정책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 어지지 않았으며, 북한 정권이 기술혁명에 기초한 내포적 성장을 추진했다는 사실 에 주목한 연구도 소수에 불과하다. 내포적 성장과 그에 대비되는 개념인 외연적 성장은 사회주의 국가의 경제를 분석할 때 자주 이용되는 개념이다. 이 중 내포적 성장 방식은 생산요소의 생산성 증대를 통해 경제를 발전시키는 방식으로서 노동 강도 강화, 기술진보, 노동 숙련도 향상, 조직 개선 등이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꼽 힌다. 이와 달리 외연적 성장은 노동자 수 증가, 잦은 교대와 노동 시간 연장, 경 작 면적의 확대, 자원 개발 확대처럼 노동력과 자본 등 요소 투입의 확대를 통한
1) 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 『철학사전』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85), “3대혁명” 항목.
2) 사회과학원 주체경제학연구소, 『경제사전』 (1)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85), “기술혁명” 항목; 사 회과학원 철학연구소, 앞의 책, “기술혁명” 항목.
성장 방식이다. 코르나이(Janos Kornai)에 따르면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외연 적 성장과 내포적 성장 방식이 동시에 나타났지만, 국가 주도의 강제적 성장 (forced growth) 국면에서는 공통적으로 외연적 방식이 우세했고 내포적 방식이 보완적이었다고 한다.3)
1950년대 말 이후 북한 사회를 이해하는 학계의 전반적 시각은 ‘당시 북한 사회 에서 사상 우위가 확고해졌으며 기술혁명보다는 사상적 각성에 기초한 대중 동원 이 강조되었다’는 데 머물러 있다. 이는 무엇보다 당시 북한 경제에서 외연적 성 장 패턴이 우세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많은 연구자들이 외연적 성장이 두드러졌던 북한 경제의 현상에만 주목하여 북한 정권이 외연적 성장만 추구했다고 파악했다.4) 1960년대 북한 정권이 기술혁명에 기초한 내포적 성장을 추진했음을 포착한 연구들도 대외 여건 악화에 따른 선진 기술 도입 제한, 기술혁 신 의욕을 저하시킨 계획경제의 한계 등 내포적 성장 실패의 원인은 짚었지만 로 동당의 기술혁명론과 관련 정책을 분석하지는 않았다.5)
북한의 기술혁명론과 내포적 성장 시도에 대한 연구자들의 관심을 차단하는 또 하나의 요인으로 ‘북한은 사상의 나라’라는, 학계와 남한 사회 전반의 뿌리 깊은 선입견을 들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북한에서 객관적, 물질적 조건의 어려움을 사상의지로 극복할 수 있다는 의미의 ‘사상론’이 1950년대 말에 이미 확립되었다 고 주장한 이종석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북한 정권이 외연적 성장을 위한 집단적 인 대중 동원에나 적합한 사상론을 1960년대에도 고수한 채 내포적 발전에 필수 적인 기술혁신을 부차화했기 때문에 196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의 경제 발전이 지 체되었다고 파악했다.6) 심지어 1960년대 북한의 기술혁명 시도를 비교적 자세히 분석했을 뿐 아니라 김일성이 일관되게 이데올로기적 목표와 경제적 목표를 동시 에 추구했다고 파악한 이태섭도 1958년에 이미 사상혁명이 가장 중요한 혁명 과 업으로 자리 잡았다고 주장했다.7)
3) 이상 내포적/외연적 성장에 대한 내용은 Janos Kornai, The Socialist System: The Political Economy of Communism (Princeton: Princeton Univ. Press, 1992), pp. 180-184에서 정리.
4) 예를 들어 김용현은 북한 정권이 1950년대는 물론이고 1960년대에도 외연적 성장 전략을 고수했기 때문에 1962년 ‘경제와 국방의 병진 노선’을 채택했다고 주장했다. 즉, 그는 북한 정권이 대외 환경의 악화에 대응하기 위해 병진노선을 채택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노동 동원 체제를 구축하여 외연적 성 장을 지속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안보 위기의식을 조장하여 병진노선을 채택하고 이를 이용해 사회를 군사화했다고 본 것이다. 김용현, “북한 군사국가화의 기원에 관한 연구”, 『한국정치학회보』 37.
1(2003), 181-198쪽. 3장에서 자세히 논하겠지만 김용현의 이러한 진단은 원인과 결과를 뒤바꾼 것 이라 할 수 있다.
5) 양문수, 『북한 경제의 구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김석진, “북한경제의 성장과 위기―실적과 전망”(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2) 등.
6) 이종석, 『새로 쓴 현대 북한의 이해』 (역사비평사, 2000), 224-227쪽.
북한이 사상을 중시하는 나라이며 김일성이 1950년대 말부터 사상성과 사상 개 조의 중요성을 본격적으로 강조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로동당은 ‘제1차 5개년 인민경제계획’(계획은 1957-61년, 완료는 1959년 6월. 이하 ‘5개년 계획’)을 준비하던 1956년부터 기술혁명을 본격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한 이래 지속적으로 기술혁명에 기초한 내포적 성장을 시도했다.8) 예컨대 1960년대에 진행된 ‘인민경 제 발전 7개년 계획’(계획은 1961-67년, 완료는 1970년. 이하 ‘제1차 7개년 계획’) 의 핵심 목표는 ‘전면적 기술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공업화 완성’이었다. ‘조선로동 당 제 5차 대회’(이하 ‘5차 당 대회’)에서 확정된 ‘인민경제 발전 6개년 계획’(계획 은 1971-76년, 완료는 1977년. 이하 ‘6개년 계획’)의 기본 과업도 ‘3대 기술혁명으 로 경제적 토대를 더욱 강화하며 근로자들을 힘든 노동에서 해방하는 것’이었다.9) 로동당은 제2차 7개년 계획(1978-84년)과 제3차 7개년 계획(1987-93년)에서는 ‘인 민 경제의 주체화, 현대화, 과학화’를 표방했는데, 이 때 ‘현대화’의 의미가 ‘기술혁 명의 심화를 통한 종합적 기계화와 자동화 실현’이었다. 이처럼 기술혁명은 1960 년대 이후 로동당의 경제 개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핵심 방법으로 자리 잡았으 며, 1972년 12월 제정된 이른바 ‘사회주의 헌법’에서부터 2012년 개정 헌법에까지 기술혁명은 북한 경제 발전의 “기본 고리”로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북한의 경제 발전 전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술혁명론과 관련 정책에 대한 분석을 빼놓을 수 없다.
2. 기술혁명과 북한의 정치사상사
북한 역사에서 기술혁명은 북한의 경제 발전 전략과 직결되었을 뿐 아니라 주 체 노선・수령 체계・후계 체제 등 북한 체제의 핵심 특징이 형성되는 과정에 중 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그간 기술혁명은 연구자들의 관심 밖에 있었기 때문에 북한 사회와 그 역사에 대한 정태적이고 일면적인 이해 가 존재한다. 북한은 사상 우위의 국가라는 평가를 북한 역사의 전 시기에 적용하 거나, 사상혁명을 김일성에 대한 충성의 강조만으로 이해하는 시각이 그 예이다.
따라서 기술혁명 관련 담론과 정책에 대한 분석을 추가함으로써 향후 북한 역사
7) 이태섭, 『김일성 리더십 연구』 (들녘, 2001), 192쪽.
8) 예를 들어 김일성은 1956년 5월 5개년 계획을 달성하고 경제를 빠르게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기술혁 명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김일성, “당 제3차 대회 결정 관철을 위한 함경남도 당 단체들의 과 업”(1956. 5. 17), 『김일성저작집』 10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0), 306-329쪽, 특히 324쪽.
9) ‘3대 기술혁명’이란 ‘중노동과 경노동의 차이를 없애는 것’, ‘공업 노동과 농업 노동의 차이를 없애는 것’, ‘여성들을 힘든 가사에서 해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를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각 시기별 경제 개발 계획과 구체적인 기 술혁명 정책 사이의 관계, 내외 조건의 변화에 따른 사상혁명과 기술혁명의 관계 와 강조점의 변화, 김일성과 김정일의 연속성과 차별성 등을 동태적으로 파악하고 북한 역사를 말 그대로 역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기술혁명과 북한의 자립노선
1950년대 말 북한의 기술혁명 성과는 북한 정권이 196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추구한 자립노선, 주체노선의 물적 기반을 제공했다. 북한 과학기술사에 대해 선 구적인 연구를 진행한 김근배에 따르면 1960년대 초 화학공학자 리승기의 비날론 공업화 성공 이후 북한에서 ‘주체’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북한에서 주 체는 1955년 12월 김일성이 ‘사상 사업에서 주체 확립’을 제기한 이후에도 신중하 게 사용되었지만, 북한 자체의 과학기술 역량과 국내 자원에 기초한 비날론 공업 화를 계기로 자신감을 갖게 된 북한 정권이 이후 주체 노선을 본격적으로 전개했 다는 것이다.10) 북한의 핵심 과학기관인 과학원의 설립 및 발전 과정, 북한의 ‘현 장 중심의 과학기술 정책’ 형성 과정을 분석한 강호제도 북한 정권이 1950년대 후 반 북한의 기술혁신 성과들을 통해 독자 노선에 대한 확신을 강화했음을 보여주 었다. 그에 따르면 북한은 1956년 소련이 일방적으로 원조 감축을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 현장과 과학계의 다양한 기술혁신 성과에 힘입어 5개년 계획 기간 고도 경제성장을 달성했고, 이에 고무된 김일성은 소련의 영향에서 벗어난 자립 발전의 가능성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11) 이러한 경험을 통해 김일성은 자립노선 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술혁명을 통한 물적 기반의 강화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했 고, 이에 따라 1960년대 이후 주체노선을 강화하고 유일사상체계를 수립할 때도 기술혁명을 포기하거나 부차시하지 않았다.
1950년대 말 북한의 기술혁명 성과는 북한 정권이 196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추구한 자립노선, 주체노선의 물적 기반을 제공했다. 북한 과학기술사에 대해 선 구적인 연구를 진행한 김근배에 따르면 1960년대 초 화학공학자 리승기의 비날론 공업화 성공 이후 북한에서 ‘주체’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북한에서 주 체는 1955년 12월 김일성이 ‘사상 사업에서 주체 확립’을 제기한 이후에도 신중하 게 사용되었지만, 북한 자체의 과학기술 역량과 국내 자원에 기초한 비날론 공업 화를 계기로 자신감을 갖게 된 북한 정권이 이후 주체 노선을 본격적으로 전개했 다는 것이다.10) 북한의 핵심 과학기관인 과학원의 설립 및 발전 과정, 북한의 ‘현 장 중심의 과학기술 정책’ 형성 과정을 분석한 강호제도 북한 정권이 1950년대 후 반 북한의 기술혁신 성과들을 통해 독자 노선에 대한 확신을 강화했음을 보여주 었다. 그에 따르면 북한은 1956년 소련이 일방적으로 원조 감축을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 현장과 과학계의 다양한 기술혁신 성과에 힘입어 5개년 계획 기간 고도 경제성장을 달성했고, 이에 고무된 김일성은 소련의 영향에서 벗어난 자립 발전의 가능성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11) 이러한 경험을 통해 김일성은 자립노선 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술혁명을 통한 물적 기반의 강화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했 고, 이에 따라 1960년대 이후 주체노선을 강화하고 유일사상체계를 수립할 때도 기술혁명을 포기하거나 부차시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