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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江 戸) 시대의 독도 관련 문헌과 지도

문서에서 385 2011 (페이지 34-39)

2.1 고문헌에 기술된 독도

일본에서 독도가 기록된 최초의 고문헌은 『은주시청합기』(1667)이다(그림 1). 에도(江 )시대 초기에 저술된 이 문헌은 오키 섬을 기술한 현존 최고의 지지(地誌)이다. 원본의 소재는 명 확하지 않지만, 사본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문헌에 저자명이 없기 때문에 저자를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1941년의 『松江市史』에 의하면, 마쓰에번(松江潘)의 번사(潘士)였던 사이토 간스케( 藤勘介, 豊宣·豊仙)가 오키의 군다이(郡代)로 부임했기 때문에 그를 유력한 저자 로 보고 있다. 그는 약 2개월에 걸쳐 오키 섬을 순찰했을 때, 그 지역에서 보고 들은 것을 그 대로 채록했던 것이다.

그림 1. 은주시청합기(국립중앙도서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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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본 의 고 문 헌 과 고 지 도 에 서 본 독 도 영 유 권 특 별 기 획 고 지 도

서문에서 오키 섬을 실제 답사했을 때에 토지의 노인, 오래되고 유서 깊은 사찰로부터 묻고 들은 것을 기록했다고 했듯이 지세, 인구, 명승, 유적, 신사불각, 예의 등을 기행문 형식으로 기술하였다. 당시 오키 섬의 지리적 현황을 상세하게 기록했고, 지명과 거리 관계를 자세히 기재했기 때문에 현재와 대비할 때 크게 참고가 된다. 『은주시청합기』 는 권4, 지도 1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권1에는 서문과 「국대기(國代記)」에 대한 내용이다. 국대기에는 오키 섬의 위치에 대한 개요가 기재되어 있고, 미나모토노 요시치카(源義親)가 오키 섬을 차지한 이후 의 역사를 기술하였다. 에도 시대에 제작된 『은주시청합기 권1』의 「국대기」에는 오키 이외에 독도, 울릉도의 위치 관계도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키 섬은 북해(동해) 가운데 있다. 생각건대 일본 고유의 말로 바다 가운데를 오키라고 하 므로 이와 같이 이름 붙인 것일까? 그 남동에 있는 땅을 도젠(島前)이라고 한다. 치부리군 (知夫郡)과 야마군(海部郡)이 여기에 속한다. 그 동쪽에 있는 땅을 도고(島後)라고 한다. 스키 군(周吉郡)과 오치군( 地郡)이 여기에 속한다. 그 관청은 스키군 남안의 사이고 토요사키(西 豊崎)이다. 오키 섬에서 남쪽, 시마네현의 미호노세키(美保 )까지는 35리. (오키 섬에서 보 아) 동남에 있는 돗토리현의 아카사키우라(赤 浦)까지는 40리. 남서에 있는 시마네현의 유노 쓰( 泉津)까지는 58리. 북에서 동에 이르는 사이에는 기준이 되는 땅이 없다. 북서 사이에는 2일 1야를 가면 독도가 있다. 여기에서 하루 일정의 곳에 울릉도가 있다. 일반적으로 이소타 케시마(磯竹島)라고 한다. 대나무, 물고기, 바다사자가 많다. 생각건대 신서(神書)에 기술되어 있는 이소타케의 신일까? 이 독도와 울릉도 두 섬은 무인도이다. 여기에서 고려(조선)가 보이 는 것은 정확히 이즈모(出雲)로부터 오키 섬을 원망(遠望)하는 것과 같다. 그런즉 일본 북서의 땅은 이 주(섬)를 경계로 한다.

위와 같이 한국과 일본 사이의 동해에 위치한 섬들을 둘러싸고 독도영유권과 관련된 내용 은 특히 밑줄의 “일본 북서의 땅은 이 주(섬)를 경계로 한다.”는 부분이다. 일본 북서의 경 계를 가리키는 ‘이 주(섬)’가 오키 섬인가, 아니면 독도인가를 둘러싸고 한일 양국 간에 해석 이 다르다.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둘러싸고 최초로 『은주시청합기』를 언급한 것은 1954년 2월 10일자 외 교각서이다. 과거 일본인들은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인식하고, 항해에 이용해 왔으며 어업 활동을 했다고 하면서 이 문헌을 제시했던 것이다. 즉 일본 측은 밑줄의 ‘이 주(섬)’를 오키 섬이 아닌 독도로 해석하여 일본의 서북 한계를 독도로 규정지었던 것이다. 그 후 한일 양국 의 학자들 사이에는 이 문제가 쟁점이 되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일본의 학자들도

‘이 주(섬)’는 독도가 아닌, 오키 섬에 해당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池 敏, 2001; 大西俊 輝, 2007). ‘이 주(섬)’가 독도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 문장의 ‘원망(遠望)’이라는 용어, 그리고

이 문헌의 내용 기술에서 파악할 수 있다.

먼저, 원망이라는 말은 멀리서 바라볼 수 있다는 의미로서 이는 하나의 생활권이 형성될 수 있음을 가리킨다. 울릉도에서 독도까지는 87.4km, 독도에서 오키 섬까지는 157.5km의 거 리이다. 울릉도에서는 날씨가 맑은 날에 독도를 육안으로 볼 수 있지만, 오키 섬에서는 아 무리 날씨가 맑더라도 독도를 볼 수 없다. 하물며 일본 시마네현의 이즈모에서 육안으로 독 도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어렵고, 오키 섬까지는 가능하다. 따라서 일본 북서의 땅으로 ‘이 주 (섬)’에 대한 해석은 오키 섬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이 문헌은 오키의 지지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에서 독도를 제 외시켜 기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은주시청합기』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총 4권으로 이루어 져 있는데, 권1은 서문과 국대기(國代記), 권2는 스키군(周吉郡), 권3은 오치군( 地郡), 권 4는 치부리군(知夫郡)과 야마군(海部郡)·사찰일람·몬가쿠(文 )에 대한 인물평 등이 실려 있다. 본문에서 필자의 사견은 한문으로 되어 있고, 결코 과장하지 않고 겸허한 필치이다.

권3의 오치군은 일본의 행정구역상 독도가 포함되어야 할 지역이다. 그러나 최북단에 대한 기술은 있지만, 독도에 대한 언급은 볼 수 없다. 이는 독도가 일본의 영토와 무관하다는 것 을 의미한다.

에도 시대의 『은주시청합기』는 오키의 지지에 대한 내용이며, 개인적으로 조사하여 발간한 것이 아니다. 각 지방의 막부 직할지를 다스리던 군다이(郡代)라는 관직의 관리와 그 일행들 이 함께 오키 지역을 실제 답사하여 만든 것이다. 만약 그들이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인식했 다면, 이 문헌에는 독도에 대한 내용이 기술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시 일본의 최하위 지자체가 독도를 일본과 무관한 땅으로 인식한 것은 중앙 정부에도 영향을 미쳐 메이지(明 治)까지 계속되었다. 또한 이후 제작된 지도에도 독도는 일본령과 무관하게 다루어졌다. 무 엇보다 최초로 독도를 일본의 고문헌에서 언급했지만, 일본의 영역 밖의 섬으로 기술한 것 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2.2 고지도에 나타난 독도

일본의 외무성 홈페이지에 탑재된 팸플릿 「독도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10가지 포인트」의 표 지와 본문에는 나가쿠보 세키스이(長久保赤水)의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가 실려 있다. 10 가지 포인트 가운데 「1. 일본은 옛날부터 독도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라는 내용에 서 각종 지도와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언급하고, 1846년에 모사된 「개정일본여지노정 전도」를 사례로 제시하였다.

이 지도의 제작자 나가쿠보 세키스이는 미토번(水 潘)의 유학자로 『대일본사』 지리지의 편 찬과 관련된 인물이다. 그는 20여 년에 걸쳐 다수의 자료를 수집하고 섭렵하여 1775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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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본 의 고 문 헌 과 고 지 도 에 서 본 독 도 영 유 권 특 별 기 획 고 지 도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를 완성했다. 지도에 일본 열도의 윤곽은 양호하고, 일본에서 최초 로 경위선을 기입하는 등 정교하게 제작되었다. 토지 측량을 하지 않고, 지지적·지리적 정 보를 집적하여 제작한 편집도이다. 그 결과 이 지도에 대한 평가는 낮지만, 목판에 의해 여 러 종류의 지도가 간행되어 에도시대 서민의 지지적·지리적 지식의 보급과 국가의식 형성 에 큰 역할을 했다.

이 지도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오키 섬의 북서쪽에 함께 그려져 있다. 또한 울릉도(竹島)와 독 도(松島) 두 섬 옆에는 “見高麗猶雲州望 州”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그림 2). 이 글귀는 “여 기에서 고려(조선)가 보이는 것은 정확히 이즈모(出雲)로부터 오키 섬을 원망(遠望)하는 것 과 같다”는 뜻으로 앞에서 언급한 『은주시청합기』 권1의 국대기에 나오는 내용을 옮겨 적은 것이다. 그는 지도를 제작함에 있어서 『은주시청합기』 내용을 신뢰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지 도로 나타내고, 글귀도 그대로 적었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 일본인들의 울릉도와 독도에 대 한 영토 인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림 2. 개정일본여지로정전도(좌)와 독도(松島) 부분(우)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제외한다는 뜻으로 경·위도선 자체가 울릉도와 독도 부분 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또한 울릉도, 독도와 함께 한반도 남단 지도 부분에도 같은 공식을 적용시켜 경·위도선을 그리지 않았다(호사카 유지, 200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외무 성은 이 지도를 사례로 제시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한국과 오키제도 사이에 정확하게 기재하 고 있는 지도가 다수 존재하고, 또한 일본은 옛날부터 독도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고 홍 보하고 있다.

한편 에도(江 ) 시대의 일본고지도 가운데 독도와 관련된 또 하나의 중요한 지도는 1785년 하야시 시헤이(林子平)가 제작한 「삼국접양지도」이다. 이 지도는 독도영유권과 관련하여 우

리나라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가장 많이 소개되어 있다. 에도 시대의 지리서, 경세서에 해 당하는 『삼국통람도설』에 첨부된 5장의 지도 가운데 하나로 지도의 정확성은 결여되어 있지 만, 쇄국 하에서 이웃 나라의 상황 등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이다.

지도에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바다에 죽도(竹嶋)라고 표기한 섬과 그 옆에 작은 섬이 그려져 있다. 이 섬들은 모두 조선 본토와 동일하게 황색으로 채색되어 있고, 그 옆에는 ‘조선의 것 (朝鮮ノ持也)’이라고 표기되어 있다(그림 3). 이들 섬 가운데 죽도(竹嶋)는 울릉도에 해당하 지만, 그 동쪽의 작은 섬이 독도인가 아닌가에 대해서 한일 간의 주장이 다르다. 즉 한국은 울릉도 옆의 작은 섬을 독도로 보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독도가 아니며 그것은 울릉도의 북 동 2km에 위치한 죽도(댓섬)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림 3. 삼국접양지도의 독도 부분

이와 관련하여 호사카 유지(2006)는 하야시 시헤이가 지도를 작성할 때 나가쿠보 세키스이 의 「개정일본여지로정전도」를 모범으로 했으며, 하야시 시헤이의 지도에 기재된 울릉도 바 로 우측의 작은 섬은 나가쿠보 세키스이의 지도에 기재된 마쓰시마(松島, 독도)이며, 하야시 시헤이는 이 두 섬을 나가쿠보 세키스이와 동일하게 조선의 영토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당시 하야시 시헤이가 지도를 제작함에 있어서 현재 울릉도 북동에 있는 죽도(댓섬)의 존재를 인 식하고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하야시 시헤이가 지도를 작성할 때, 나가 쿠보 세키스이의 「개정일본여지로정전도」를 참고한 것으로 보고 있다(下條正男, 2005). 따라 서 하야시 시헤이의 「삼국접양지도」에 나타난 울릉도 옆의 작은 섬은 독도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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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본 의 고 문 헌 과 고 지 도 에 서 본 독 도 영 유 권 특 별 기 획 고 지 도

하야시 시헤이의 「삼국접양지도」는 그 법적 성격상 관찬도서가 아닌 민간도서에 첨부된 지 도로서 공식기록, 문서에 첨부·부속된 예시지도의 지위를 가질 수 없으며 단독지도의 성격 에 가깝다. 이 지도는 독도가 의문의 여지없이 조선 영토임을 증명하는 증거이나, 비공인지 도라는 점에서 그 증명력은 제한될 수 있다(박현진, 2007).

비록 이 지도는 관찬이 아니지만, 영유권을 인정받은 적이 있다. 호사카 유지(2006)에 의하 면, 이 지도는 일본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된 적이 있다. 독일의 클라프로트는 1832년에 『삼국 통람도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출판했다. 에도 막부는 여기에 실린 프랑스어판 「삼국접 양지도」를 1854년 미국과 오가사와라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이 발생했을 때 공식 지도로 사 용하여 미국으로부터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결국 하야시 시헤이의 「삼국접양지도」는 사찬지 도에 해당하지만, 지도의 증거력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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