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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 나타난 원심적 선교

B. 신약의 원심적 선교

1. 복음서에 나타난 원심적 선교

‘복음’이라는 용어 자체는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101)이었 다. 신약시대를 시작하면서 ‘복음’102)은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 하여 구체화 되었다. 복음서를 통하여 나타난 원심적 선교에서 가장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보편적 구원 약속”(창12:2)의 성취를 위해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심으로 하나 님께서는 주권적인 선교를 행하신다는 것에서 부터이다. 이러한 “성육신의 사건”

(요1:14)은 하나님의 인류구원 역사의 중심이며, 절정이 된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하여서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세상의 빛(요 8:12)이 되시고 길이요, 진리요, 생 명(요 14:6)이 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에 이르지 못 한다.103)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보면 태어날 때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어나자마자 애굽으로 피난을 해야만 했고 갈릴리 나사렛에 정착하여

101) Paul J. Achtemeier, Joel B. Green, Marianne Meye Thompson, Introducing The New Testament: Its Literature Theology, 소기천・윤철원・이달 옮김,

『새로운 신약성서개론』(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4), 89쪽.

102) 신약 시대에 유앙겔리온(euaggelion, “좋은 소식”, “복음”으로 번역한다)은 한 권의 책이나 글을 언급하였던 것이 아니라, 선포 혹은 메시지를 지시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것은 이 단어의 배경을 알면 이해될 수 있다. 이것과 관련된 단어들은 좋은 소 식, 특히 전쟁에서의 승리를 알려주는 소식이라는 의미로 비기독교인들의 헬라어에서 사 용되었다. 또한 황제 숭배에서 황제의 탄생과 참석은 로마 세계에 좋은 소식을 가져다주 는 것이었다. 유앙겔리온과 관련된 칠십인역 단어들은 히브리어 바사르에서 파생된 단어 들을 번역한 것이다. 이 단어는 좋은 소식, 특히 이스라엘의 승리 혹은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한다는 비슷한 의미를 띠고 있다. 더욱 광범위하게,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영광 스러운 행위를 선포한다는 의미를 띨 수 도 있다. Raymond E. Brown, An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김근수・이은순 공역,『신약개론』(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5), 174쪽.

103) 이광순・이용원,『선교학 개론』, 64-65쪽.

그의 생애의 대부분을 보내면서 공생애를 준비하게 된다. 아무도 기대도 않는 지역 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라 나셨고 만민의 구주와 주로서의 배경이 되시면서 유대 인만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마리아와 이방 만민의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이미 이사야서 53장에 예언으 로 알려져 있었고 고난의 종으로 또한 많은 사람의 대속물(막 10:45)로 자기 자신 을 내어 주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하나 님의 구원의 사역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건이 된다. 이 고난 쫓아 그리스도인들도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게 된다. 마가복음 13장의 배경된 전쟁은 주후 66-70년의 유대-로마 전쟁이다(13:7-8). 이 전쟁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은 예 루살렘을 떠나 요단강 건너편의 펠라로 도망가게 된다.104) 피흘림이 없으면 죄 사 함(히 9:22)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근본적인 목적이 이스라엘 민족에 한정되지 않고 보편적인 구원임을 확인하고, 그의 죽으심이 만민을 위한 것임을 분 명히 할 수 있다.”105) 이렇게 경계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선교를 바로 찾 아 볼 수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교회는 세워졌고 만민을 구원하시기 원하 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의 죽으심으로 선교의 확장 은 세계로 퍼져나가는 것이다. 구약에서 선교 관념은 바벨론 포로시기에 특히, 고 난의 종이란 사람으로 해서 가장 높고 가장 깊은 점에 도달했듯이 신약에서의 가 장 높고 깊은 선교 관념은 인자의 고통으로 특히,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자 기 삶을 내어 준 골고다에서 절정에 달한다. 예수 자신의 고난과 죽음으로 인해 예 수는 가장 신실한 선교사였다.

부활과 선교는 불가 분리의 연관을 가지고 있다. 그것에 대하여 스리엘 (H. Shriel)은 세 가지 사실을 지적한다. ① 부활 이전에는 이방의 선교가 없었다.

다만 구약의 예언대로 이방이 이스라엘로 올라올 것을 기대하였다. ② 이방 선교는 예수님의 죽으심, 부활, 그리고 높아짐에 의하여 가능하였다. ③ 이방 선교는 말세

104) 김득중,『마가복음 연구』(서울: 나단출판사, 1992), 80쪽.

105) 이광순・이용원,『선교학 개론』, 65-66쪽.

의 전제로서 존재한다. 즉, 말세 전에 먼저 선행된다. “보쉬(Bosch)는, 예수님은 부 활 이전에는 이방 선교를 원치 않았다고 하는 견해에 반대한다. 이유는 부활 이전 의 일도 부활 이후의 이방 선교를 위한 분지로 보았기 때문이다. 부활 후의 이방 선교는 주의 삶과 죽으심을 전함이 그 내용이었다.”106)

‘나는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 니하였노라’(마 15:24)는 예수의 선언은 그의 사역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한정됨 을 보여 주는 것 같이 보인다.107) 또한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라(마10:5)라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말씀을 보면 마찬가지로 보인다. 그러나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는 “그 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들로 제자를 삼아”108)라고 하셨다. 즉 이 본문은 지 금 여기 우리에게 예수의 권위에 근거하여 주는 위임령이 있다는 것이며, 이 위임 령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출발하였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며, 또한 이 위임령은 제자들로 하여금 세계 선교에 참여하라는 것을 의미함이 부 인될 수 없는 점으로 계속 남는다.

왜 이런 반대적인 말씀을 하셨을까? 여기서 우리는 먼저 최근 예수의 이 방선교관에 대한 연구 가운데 네 가지의 학설을 잠깐 살펴 볼 수 있다. 신성종은

『신학지남』109)에서 한(Hahn)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첫째로, 하르낙 (Adolf, Von Harnack)은 예수는 그의 선교의 대상으로 주로 유대의 전통주의자들 로 생각하였으므로 이방 선교는 예수의 목적 밖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 은 너무나도 편협하고 일방적인 오류에 빠지는 독자적 해석이다. 두 번째로, 스피 타(Friedrich Spita)는 이방 선교는 처음부터 예수님의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언제

106) 채은수,『선교학 총론』, 217-18쪽.

107) 이광순・이용원,『선교학 개론』, 67쪽.

108) Johannes Blauw, 전재옥・전호진・송용조 옮김,『교회의 선교적 본질』, 76 쪽.

109) 신성종,『선교의 성경적 근거』(서울: 신학지남, 1974년 겨울호), 51-52 쪽에서 재인용.

나 팔레스타인 국경밖에 잇는 이방인들과 접촉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 태복음 10장 5-6절의 말씀에 대하여 만족할만한 해답을 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세 번째로, 메네츠(Max Meinetz)의 선교이해에서는 하르낙과 스피타의 중간 입장 을 취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사실에 있어서 어떠한 뚜렷한 선교관을 제시하지 못 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맨슨(T. W. Manson)과 예레 미야스(J. Jeremias)의 주목 할만한 견해는 “예수님은 유대내에 신앙의 공동체를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온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어떤 견해도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선교를 바로 말하고 있지 않는다.

신성종은 “선교의 성경적 근거”110)에서 말하기를 예수님의 선교를 두 가 지로 나누어 생각 하였다. 첫째는 “3년간의 공생애를 중심한 지상선교(earthly mission)와 부활후의 천상선교”(heavenly mission)로써 전자에서 예수님은 때로는 이스라엘의 국경을 넘어 사마리아에도 가셨으나 선교의 중심지는 여전히 이스라엘 로써 이방선교의 구약에서와 같이 구심적 의미(centripetal sense)를 가진다. 그러 나 둘째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으로 휘장은 찢어지고 사흘만에 부활하 심으로 예수님의 구심력 이방전도는 적극적인 성격으로 변하여 원심적 의미 (centrifugal sense)의 선교”로 그 방향을 전환하였다. 따라서 마태복음 10장 5-6 절의 이방전도를 금지한 말씀은 첫 번 제자파송에 속한 잠정적 의미(temporal meaning)를 가질 뿐임을 말하고 있다.111)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은 이렇다. 예수께서는 항상 이방인들을 만나고 그 들을 고쳐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하신 것은 예수께서 의식적으로 이방인 선교를 시작하셨다는 증거를 보여 주신 것이다. 예수의 우선순위의 선교는 유대인 이었지만 이방인이 예수의 선교 사역에서 배제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만나서 하신 일들을 보면 말씀 전파와 병고침과 이 적과 기사를 행하셨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들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이방인과 이

110) 신성종,『선교의 성경적 근거』, 52쪽.

111) 강문석,『선교신학총론』, 48-49족.

웃에 대한 사랑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개인적인 관심을 기울여서 필요로 하는 사람 들을 볼 보아 주셨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해주셨다. “예수는 또한 제자들을 훈련시키셨다. 그리고 훈련시키는 데만 머물러 있지 않고 그들을 선교현 장으로 파송하셨다.”112) 이와 같은 제자들의 훈련과 파송은 선교적 관점에서 볼 때 매우 큰 의의를 지닌다. 부활 후의 지상명령이 주어지기 이전에 그것이 어떤 것인 지를 이미 충분히 보여 준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주제가 되고 심혈을 기울려 전한 것은 하나님 나 라였다. 이것은 또한 구약성경에 약속된 약속의 말씀의 성취이기도 하다. 이 말씀 은 또한 구체적으로 예수의 가르침에서 시작된다.”113) 하나님 나라는 신약 성경에 서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실 때 선포하도록 한 것은 하나 님 나라였다. 그리고 “예수님이 천국에 대하여 말씀을 전할 때는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을 하였다.”114)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바실레이아(헬라어, basileiva), 혹은 말쿳(말쿠트)이라는 말이다. 의미는 하나님의 왕적 통치(kingly rule of God), 하나님의 왕적 주권(kingly sovereign of God)이다. 브라이트는(John Bright)는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 백성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라고 하고, 특별 히 역사 종말에 있을 영광 가운데 실현되는 그의 통치와 그의 통치를 받는 백성의 세계이다”115)라고 말했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행한 교훈을 요약하 면 하나님 나라에 집약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예수는 갈릴리에서 공생애의 사역 을 시작하면서 첫 일성이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고 외쳤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본질을 말해주는 단적

112) 이광순・이용원,『선교학 개론』, 68쪽.

113) Johannes Blauw, 전재옥・전호진・송용조 옮김『교회의 선교적 본질』, 80쪽.

114) 채은수,『선교학 총론』, 209쪽.

115) John Bright, The Kingdom of God, (NY: Abingdon Press, 1964). 채은 수, 『선교학 총론』(서울 : 기독지혜사, 1991), 209쪽에서 재인용.

인 예가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의 구원 관계의 역 사이며, 또한 방향성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는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 었는가를 보여 주는 세 가지 면이 있다. 첫째는, 그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종 말적인 특징을 가지며 이는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모든 세상의 절대주 권”을 지닌 주님으로 드러내시리라는 표현이다. 둘째는, “신학적인 특징이다.” 구약 성서와 유대교의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곧 하나님께서 친히 오심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하나님께서 친히 오셔서 통치하고 지배하 심을 가리킨다. 이것은 바꾸어서 말하면 바로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하나님의 구원 을 위한 임재인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구원론적 특성”을 지닌다. 이스 라엘을 통치하시기 위해서 도래하시는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구원을 책임지고 계 시는 하나님이시며, 고통과 질병과 악과 죽음을 물리치시려는 뜻을 지닌 하나님이 시다.116) 또한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통하여 말씀되어진 교훈을 살펴 보면 거기 에는 보편적 선교에 대하여 명확히 나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보편성은 증명되고도 남는다. 그의 교훈도 예외가 아니다. 복음서에 이를 보여 주는 그의 말 씀들이 산재해 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3-14).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유대인들)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 사 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 하리리(눅 13:29).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 념하리라(막 14:9). 요한복음에도 증거가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고(3:16),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고 그 아들을 세 상에 보내셨다(3:17).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 로 세상에 오셨고(1:29), 그는 참으로 세상의 구주(4:42)로, 또 하늘에서 내려 세 상에게 생명을 주는 떡(6:33)으로 오셨으며, 세상을 구원하려(12:47) 오셨다. 그 는 세상의 빛(8:12)이시다.117)

116) 이광순・이용원,『선교학 개론』, 70쪽.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그는 세계선교를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 그 명령은 흔히 “지상명령”118) 또는 대위임령으로 불리어진다. 예수, 즉 선교하러 파송받았고 그의 사명을 완성한 분은 이제 보내는 자가 된다. 마태의 산상집회에 대한 이야기(마 28:16-20)는 제자들이 모든 권세를 갖고 예배받으시 기에 합당하신 분을 선교하러 보냄받은 분으로 분명하게 말한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그 범위가 넓어져서 이제는 모든 복속이 그 대상이 되었고 제자로 삼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되었다. 세례를 주는 일과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이 그것이다. 사실 이 두 가지가 빠져서는 온전한 선교 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선교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예 수님께서 선교적 사명을 주신 뒤에도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을 잊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 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이 말씀은 “마가복음 16장 15절”119)과 “누가복음 24장 47-49절”120) 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 말씀에서 세계선교를 명한 이 말씀은 다른 어떤 말씀 보다 중요한 것을 볼 수가 있다. 부활하신 이후의 그리스도는 선교 이외의 부탁을 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한편 마태복음을 일컬어 “유대인의 복음서”라고 부르는 것과는 대조적으 로 누가복음을 가리켜서는 흔히 “이방인의 복음서”라고 부른다. 그것은 누가의 주

117) 이광순・이용원,『선교학 개론』, 72-73쪽.

118) 마태복음 28:16-20절의 이 말씀은 산 위에서(변화산으로 추정) 승천 이 전에 제자들(열한 제자 외 500명)에게 주신 말씀인데, 그 명령의 대상자는 주의 제자들 과 함께 주의 교회에 해당되는 것이다.

119)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20)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 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 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