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다. 답사현장 참고자료

문서에서 목 차 (페이지 102-119)

이 부분은 답사장소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자료를 수집하였고, 그에 대해 학 생들에게 선지식으로 안내를 해주거나, 후에 학습할 때에 제시할 수 있도록 하 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준비한 참고 자료이다. 이 자료는 학생들이 조사해서 발 표하도록 하는 내용이 되면 더 좋을 것이다. 학생들이 이 내용이 들어갈 수 있 도록 자세하게 알아보는 태도를 가지면 더욱 좋을 것이고, 포트폴리오 작성에 도움이 되도록 하면 더 좋을 것이라 제시한다.

농경을 주업으로 하는 호남 땅에 수많은 정자들이 널려 있다. 그 중에서도 담양 주변의 정자를 둘러보다보면 조선 중기의 문화중심지가 이곳이 아니었는 가 하는 착각이 든다. 그야말로 조선시대의 르네상스라 말할 만큼 수많은 인물 들이 담양에 칩거하며 시론을 논했으며 가사를 지었고 후진들을 양성했다.

사미인곡, 속미인곡 같은 빼어난 가사를 지었던 송강정을 비롯 송순이 관직

을 그만둔 뒤에 퇴계 이황 같은 유학자와 함께 나랏일을 의논하고 몸소 후진에 게 학문을 가르쳤던 면앙정, 식영정 등이 그것이다. 선비들은 이들 정자를 오가 며 시를 주고 받았으며 이러한 가운데 하나의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이 곳은 조선조 사화의 영향으로 자신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자의든 타의든 낙향하여 세상을 등지고 자연 속에서 은둔하며 자신의 이상세계를 실현시키려 는 노력의 흔적들이 돋보이며, 그들의 못다 이룬 학문에 대한 사랑이 사림과 교류를 통하여, 혹은 후학교육에 정열을 받치면서 풀었던 흔적이 온전히 남아 있는 곳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곳은 퇴계 이황을 비롯하여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옥봉 백광훈, 서하당 김성원 등이 교류하였음을 말해주는데, 이러한 흔적으로 보아도 이 곳은 이 고장의 문화적 보루요, 선비정신의 상징이며, 예술혼의 원류인 것이 다.

송강은 송강정에서 연군의 정을 노래한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의 가사 작품을 비롯하여 수많은 시조들을 창작하였다. 이곳 창평에서 사는 동안은 정 치적으로 실의와 역경에 처했던 시기에 해당하지만, 문학적으로는 그 아픔을 딛고 주옥 같은 작품을 산출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송강정은 1770년 (영조46 )에 세월이 흐르면서 소실되어 그 흔적만 남은 것을 정철의 후손들이 언덕에 소나 무를 심으면서 다시 지은 것이다. 사람들이 그 동안 죽록정이라고 불렀던 탓에, 지금도 이 정자를 보면 정면에는 송강정 이라는 현판이, 그 옆면에는 죽록정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정자 옆에는 1955년에 세운 <사미인곡>시비가 서 있 다.

송강정, 그리고 가까이 있는 식영정 등을 오가며 심신을 위로받고 휴식을 취 하면서 작품을 낳은 송강이기에, 어린 시절 학문과 문학을 익혔던 창평이야말 로 그에게는 소중한 문학의 모태라 할 것이다. 또한 정치적으로 실의하여 낙향 한 곳이기도 하지만 울분을 달래며 재기의 의지를 불태웠던 곳이기도 하다. 이 런 그가 훗날 당쟁의 와중에 수많은 전라도의 인물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니, 역사적으로 대단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호남 사람들에게 송강은 한편으로는 몹쓸 사람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자랑거리이기도 한 이중적인 존재 로 남아 있다.

송강에 대한 평가가 이중적으로 된 것은 바로 기축옥사 때문이다. 그의 나이 54세인 1589년 (선조22 ) 8월, 큰아들 기명이 죽어 그가 경기도 고양에 머물러 있을 때, 정여립 모반사건 이라는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송강은 이 일이 자신의 반대파인 동인과 관련된 것으로 짐작하고, 고양에서 즉시 대궐로 들어가 임금 을 아뢴 뒤 반역자를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일로 왕으로부터 충성심을 인정받아 우의정에 임명되면서 그 사건의 조사를 담당하게 된 그는 정언호, 이 발, 정개청, 최영경 등의 동인을 박해하고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 옥사로 인하 여 전라도는 반역향이 되고, 호남인들의 등용은 제한되었다. 그는 이 일을 처리 한 공으로 55세에 좌의정에 올랐으며 인성부원군이 되었다.

56세 때 왕세자의 책봉 문제가 일어나자, 그는 동인의 영수인 이산해와 함께 공빈김씨 소생인 광해군을 옹립하기로 하였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졌다. 이산 해가 송강을 모해하기 위하여 송강 혼자서만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게 한 것 이다. 이 일로 평소에 인빈김씨 소생의 신성군을 마음에 두던 왕의 분노를 사

게 되었다. 그리고 양사의 탄핵을 받고 파직된 송강은 급기야 명천으로 유배되 었다가 다시 진주, 강계 등으로 이배되었다.

그러나 57세인 1592년 (선조25 )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이 피난을 하 게 되었는데, 개성에서 왕은 송강을 방면하여 불렀다. 이에 그는 평양에서 임금 을 배알하고 곁에서 모셨다. 9월에 충청・전라 제찰사가 되었다가 이듬해에는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 그러나 송강은 명나라 조정에 왜군이 물러갔다는 거 짓보고를 올렸다 는 동인의 모함을 받아 사직하게 되고, 강화도 송정촌에서 머 무르게 된다. 여기서 그는 울분과 빈한으로 병을 얻어 추운 겨울인 12월에 둘 째 아들 종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58세였다.

송강은 이듬해 2월에야 고양의 신원에 장사되었다. 그러나 그 해 6월에는 김 우옹의 건의로 송강의 관직이 삭탈되는 불운을 겪기도 하였다. 그 뒤 인조 4년 ( 1626 )에 신원되어 관작이 내려지고, 현종 6년 ( 1665 ) 3월에는 송시열의 주선으 로 충북 진천의 지장산에 이장되었다.

송강이 젊은 시절을 보냈고 실의할 때마다 찾았던 곳이 창평이다. 그러나 그 가 창평에만 줄곧 머물렀던 것은 아니고 경기도 고양의 신원에도 한때 머물렀 다. 신원은 그가 죽어서 한동안 묻혔던 곳이자 그의 부모와 아들이 묻힌 곳이 기도 하다. 송강은 벼슬에서 잠시 물러나면 이곳 신원에 가서 머무르곤 하였다.

경기도 고양의 신원은 그 동안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지 금은 행정구역상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으로 되어 있는데, 송강마을 로 불리는 마을의 뒷산에는 송강의 부모와 그의 큰아들 기명의 묘가 있다. 그리고 송강의 부모 묘소 아래에는 송강의 형과 누이도 묻혀 있다. 인종의 귀인이었던 송강의

큰누나와 송강의 셋째 형인 황 (滉 )의 묘가 그것인데, 위쪽에 있는 것이 누나의 묘이다. 이들 두 무덤은 마을의 인가 바로 위쪽에 자리잡고 있어 멀리서도 보 인다.

현재 정철의 묘소는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에 있다. 송시열이 주선하여 후손 정양이 이장했다고 하는데, 1978년부터 4년여에 걸쳐 묘역이 정비되어 단 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때 세워진 사당 송강사에는 그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그 앞에는 <사미인곡>시비가 서 있다. 송강의 묘소는 사당의 왼쪽 산에 있으니,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일렬로 묘 2기가 있는데 앞쪽은 강릉부사를 지낸 그의 둘째 아들 종명의 묘이고, 그 뒤쪽이 송강의 묘이다.36)

송강은 적출 소생으로 4남 3녀, 서출 소생으로 1남 1녀를 두었다. 첫째는 기 명으로 요절하고, 둘째가 종명으로 강릉부사를 지냈으며, 셋째는 진명으로 진사 에 그쳤고 넷째가 홍명인데 과거에 급제하여 대사헌, 대제학을 지내 형제들 가 운데 학문과 벼슬이 가장 높았다. 이 가운데 넷째 홍명의 후손인 송강의 16대 종손이 담양의 지실마을에 거주하고 있다.

1) 호남의 으뜸 명승지 소쇄원

남면 지곡리에 있는 식영정은 명종15년 (1560 )에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인 석 천 임억령을 위해 세운 정자다. 서하당은 석천의 사위이면서 제자였다. 그때 석 천에게 시문을 배우던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등도 함께 교유했다. 그래서 석 천, 서하당, 제봉, 송강을 식영정 사선 (四仙 ) 이라고 불렀고 식영정을 사선정

이라고도 했다. 이들은 성산의 경치 스무 곳을 택하여 각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 이십영을 지었다. 이것은 송강의 <성산별곡>의 밑바탕이 되었다.

성산은 이 지방에선 아직도 별뫼 라고 부르는데 이는 식영정의 뒷산이다. 당 시의 시인들이 이곳에 모여 뒤에 있는 별뫼와 앞에 흐르는 자미탄을 주제로 시 와 노래를 많이 읊었다. 지금은 동쪽으로 무등산, 남쪽으로는 광주호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위에 있지만, 광주호가 생기기 전에는 정자 바로 밑으로 흐르는 자 미탄이라는 여울이 있었고, 물섶을 따라 백일홍이 10리나 자랐었다고 한다.

당시 식영정에 출입한 문인들은 사선 외에 면앙정 송순, 사촌 김윤제, 하서 김인수, 고봉 기대승, 소쇄옹 양산보, 옥봉 백광훈 등 당대를 대표하던 많은 이 들이 있었다. 그리고 식영정 근처에 있은 서하당, 환벽당, 취가정 등은 이들의 문학을 탄생하게 한 산실로서 이른바 누정문학의 본고장이라 하겠다.

식영정과 지척에 있는 소쇄원은 조선 중종대의 학자 양산보가 기묘사화로 관 직에서 물러나 이곳에다 광풍각, 제월당, 오곡문, 애양단 등을 짓고 은둔생활을 했던 곳이다. 조선 중엽의 민가정원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소쇄원은 나 라 안에서 경치가 빼어난 곳을 따로 떼어다가 줄여서 이곳에다 한데 모아 놓은

식영정과 지척에 있는 소쇄원은 조선 중종대의 학자 양산보가 기묘사화로 관 직에서 물러나 이곳에다 광풍각, 제월당, 오곡문, 애양단 등을 짓고 은둔생활을 했던 곳이다. 조선 중엽의 민가정원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소쇄원은 나 라 안에서 경치가 빼어난 곳을 따로 떼어다가 줄여서 이곳에다 한데 모아 놓은

문서에서 목 차 (페이지 102-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