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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시대・사회적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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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정철은 야심만만한 정치가, 우리 문학사 최고의 시인, 수많은 정적을 제 거해 버린 매파의 우두머리, 당대 인격자들과 평생 우의를 다진 최고 엘리트.

이렇듯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질적인 형상들로 비추어지고 있다.

그의 자 (字 )는 계함 (季涵 ), 호는 송강 (松江 )이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고, 임 정 (臨汀 )・칩암 (蟄庵 )이라는 호도 있다. 송강이라는 호는 전라남도 담양 창평 에 있는 죽록천의 별칭에 말미암은 것이고, 임정은 그의 본관 영일의 옛 이름 에서, 그리고 칩암은 그가 한 때 경기도의 옛 현인 음죽에 칩거하며 지낸 적이 있었던 데 말미암은 것이다.

송강이 생존・활동했던 16세기 중엽에서 말엽에 이르는 기간은, 조선왕조 건 국과 함께 시작된 새로운 체제 확립과 문물의 창조・정비 등이 크게 한 단락 지어지고, 바야흐로 또 다른 변화와 발전을 위한 움직임들이 다방면에 걸쳐 제 기된 시기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른바 사림 (士林 )이라 는 사회 세력이 우리 역사상에 등장하여, 마침내 이 시기에 이르러 기존의 훈 구・척신 세력을 밀어내고 집권 세력을 형성하였다는 사실이다.19 ) 송강은 바로 사림 출신이다.

사림 세력의 형성 및 집권 이후의 동향과 관련하여 우리 역사는 엄청난 격변 의 소용돌이를 겪는다. 정치적・사회적 입장이 다른 사대부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으로 빚어진 사화 (士禍 )와 당쟁 (黨爭 )이야말로, 그 격변의 소용돌이를 일 으켜 나간 태풍의 눈이었다. 크게 네 차례에 걸쳐 일어난 사화는 신흥하는 사 림 세력에 대해 기존의 훈구・척신 세력이 대대적으로 정치적 반격을 가한 결 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조선조 후기까지 지속된 당쟁은 선조 이후 집권 세 력을 형성한 사림 내부에서 정론 (政論 )과 입지 (立地 )가 서로 다른 정파 (政派 ) 간의 대립과 분열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당쟁의 경우는 흔히 생각하듯 부정적 측면만을 지녔던 것은 아니다. 그 것은 공도 (公道 )의 실현이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상호 비판과 견제로 정치를 이끄는 이른바 붕당정치의 활발한 실현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러나 세부실상이야 어떻든 사화에서 당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태들로 인해, 나라가 어수선해지고 민생이 피폐해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지배층의 분열과 국력의 쇠퇴가 당시 혼란과 변혁의 기운에 싸여 있던 동아시아의 역사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임진왜란이라는 엄청난 민족적 위기 앞 에 거의 속수무책이었던 결과를 낳았던 것으로 보인다.

송강은 이러한 역사 현실의 일선에서 대부분의 사태를 직접 체험하며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당대 이름 있는 사대부 지식인들이 그랬듯, 학자면서 정치가였 고 문인이었다. 그의 일생은 타고난 성격이 범상치 않았던 데다 역사 격변기를 살았던 만큼, 파란만장한 삶 바로 그것이었다. 따라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 기가 많을 것은 물론, 그 내용 또한 남다른 바가 있다.

송강은 스스로가 옳다고 믿는 바에 대해서는 그 뜻을 추호도 굽히지 않았다.

민본 (民本 )과 훈민 (訓民 )을 위정이념으로 한 왕조시대를 살면서, 그 자신이 바 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경국제민의 뜻을 타고난 기질에 충실하여 펴 나갔다. 그 리하여 자신의 뜻을 실천에 옮기는 과정에서 파란 만장한 삶을 자초하기도 했 다. 당쟁의 한복판에 서서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거침없이 밀고 나간 정치가였 는가 하면, 우리 문학사상 불후의 명작들을 창작해 낸 문인이었고, 무엇보다도 우리네 인간의 유한한 삶을 이해하고 즐길 줄 아는 풍류인이요, 타고난 재인이 었다.

송강 정철은 결코 순탄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서 김 인후로부터 이어받은 충성심을 바탕으로, 문학적인 면보다는 정치적인 면에 더 많은 열정의 의지를 펼쳐보려 노력하였지만,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송강에게는 끊임없이 영향관계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사우들이 많았다. 호방

하고 표일한 선취적 풍류로 송강 문학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석천 임억 령과 평생의 지기였던 율곡 이이 등이 그에게 정신적인 토양이 되어 주었다.

그와 더불어 문학 이라는 매력이 정치적으로 크게 성공하지 못한 인생에 대한 돌파구로써 자리잡고 있었던 것은 거작을 이룰 수 있는 바탕이 이미 완비되어 있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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