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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가적 풍경’의 수양적 태도

대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이 어떤 가교로도 이어질 수 없다면, 그 세 계는 무의미한 ‘죽음의 세계’일 것이다.62) 경험적 세계에 대한 주관적 체험이 라는 범주가 그려내는 세계는 제각각 다르다.63) 그러나 인간의 주관이 이미 보편을 내재하고 있기에 개별의 진리는 전혀 다른 별개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연결이 가능한 섬들처럼 교통이 가능하다.64) 산수(山水)를 그리고 향 유하던 예술세계에 속했던 이들은 이러한 보편적 이치를 토대로 예술의 ‘경 계(境界)’를 추구했다. 철학적 차원에서 인식의 ‘경계’는 다양하고 주관적이지 만, 그들의 예술이 ‘경계’를 추구한다는 것은 그들이 보고자 하는 하나의 세 계가 공통의 향방을 갖는다는 말이다.65) 그리고 그것은 ‘도(道)’에 이른다.

예술철학과 삶이 일체되길 추구한다면, 예술가의 작품은 하나의 통일된 세계

62) 곰브리치는 우리의 인식체계는 시행착오로 습득한 규칙성에 기초한다고 설 명한다.

에른스트 곰브리치, 『예술과 환영 – 회화적 재현의 심리학적 연구』, 차미례 역(경기도:열화당), 260-261.

63) 홍옥진은 자신의 논문에서 메를로-퐁티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그는 “행동 혹은 지각을 통해 세계에 참여하는 의식에게 지각 대상들은 ‘인식’되기보다 현실 로 ‘체험’된다.”고 말한다.

홍옥진, 앞의 논문, 38.

64) 박재석, 「北宋 後期 山水畵 理念의 二元的 特性 -林川高致集을 中心으로-」

(서울대학교 학위논문, 1986), 77.

65) 이상우는 ‘경계’의 보편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양자역학이 다루는 미시의 세계나 상대성이론이 다루는 거시의 세계라는 특정 영역을 제외 한다면 수학의 정리나 공리들은 아직도 널리 유효하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 다. 그러고 이러한 사실은 동시에 우리의 삶이 수학이나 과학과의 밀접한 관계를 벗어나기 어려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더욱이 합리나 인과율에 의하지 않고서 우 리가 어떠한 지식을 타당하게 갖는다는 것도 사실 불가능하다.”

이상우, 『동양미학론』, 141.

로 수렴한다. 이러한 관점은 나의 작품세계가 지향하는 바와 유사한 지점이 다. 나는 나의 작품과 실제의 생활을 일치하고자 한다. ‘여가적 풍경’은 일상 의 작은 안위를 표현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관조(觀照)’로 획득한 ‘관망 (觀望)’의 자세가 스며있다. ‘여가적 풍경’이 ‘인생을 위한 예술’을 소박하게 실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가적 풍경’은 진리를 강요하지 않으며, ‘일상의 풍경’으로 ‘자연(自然)스럽게’ 존재한다. 나는 작품에 내포된 보편적 진리가 엿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이런 작업적인 성향을 스스로 잘 알고 있고, 이러한 경향을 추구하는 다른 작가들의 시도를 알아볼 수 있으며, 그 들의 예술과 음악, 그리고 문학에 흥미가 끌린다. ‘경계론’의 수양적(修養的) 특성은 이러한 예술경향의 심리적인 근원을 설명한다.

(1) ‘여가적 풍경’에서의 ‘수양론’

‘경계(境界)’의 개념은 일반적으로는 “수양(修養)이나 수련(修練)이 도달한 어떤 정도를 의미하는 경지(境地)”66)라고 정의된다. 동양예술론에서 ‘경계론’

은 일반철학의 내용을 여전히 담고 있다. 장자(莊者)의 인생철학에서 ‘경계’

는 참된 것을 ‘본다는 것’이다. 철학적 ‘경계’의 개념이 ‘도(道)’를 향하는 것 처럼, 예술론에서는 ‘경계’는 총체적인 예술관(藝術觀)을 결정짓는다. 미적체 험의 기대가 순간적이거나 감각적인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미적체험은 인생감을 포함한다. 이것이 ‘경계’의 미학적인 함의이다. 이 총체 적인 미감의 목적은 장자가 말하는 ‘허정(虛靜)’을 통해서 얻은 ‘명(明)’67)의 상태이고, 바로 ‘대미(大美)’, ‘지미(至美)’68)의 경지이다. 만약 ‘상외지상(象 外之象)’69)을 추구하는 한 예술가의 마음이 인생 궁극의 ‘경계’를 구한다면,

66) 이상우, 앞의 논문, 126.

67) 서복관, 앞의 책, 115.

68) 서복관, 앞의 책, 90.

69) 이상우는 ‘상외지상’을 설명하기 위해 언어를 예시로 들고 있다. “언어로 전 달하고자 하는 뜻이 전해지고 나면, 처음 뜻을 파악하기 위해 우리가 주의를 기 울였던 현상으로서의 문자에는 다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게 된다는 말이다.

그는 나무 한그루와 풀 한포기의 그림을 통해서도 인생경계인 ‘도’를 찾게 될 것이다.70) ‘무엇을 볼 것인가’에 대한 예술가의 입장이 이처럼 분명하다 면, 예술가의 ‘경계’를 담아내는 작품에는 일정한 예술적 경향이 드러날 것이 다. ‘본다는 것’이 우리가 이미 장악한, 혹은 장악하기로 한 방식으로 작용하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를 얻고자 하는 자에게 ‘도’는 주어질 것이다. 작 가가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 ‘도’라면, 그의 예술세계에서 ‘도’가 실현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현대의 일상적인 풍경이라도 말이다. 심적 태도는 ‘여가적 풍 경’의 예술관을 결정한다.

예술이 사물에 대한 거부라고 말한다.71) 더 정확하게는 사물로 이루어진 세계에 대한 거부이다. 또한 예술은 아는 것, 혹은 신념과 세계의 불일치를 해소하려는 시도이다. 동양예술론이 말하는 ‘심재(心齋)’와 ‘좌망(坐忘)’의 ‘경 계’에서는 이러한 시비가 사라진다.72) 인간이 완전해질 때 종교와 예술이 사 라진다고 했던 H. W. 잰슨(Horst Waldemar Janson, 1913-1982)의 말처 럼, 의지함이 없는 최상의 인생 ‘경계’는 초월적 ‘무(無)’의 세계이다.73) 예술

유우석(劉禹錫)의 ‘境生於象外’와 ‘義得而言喪’이라는 말은 《壯者·外物》에 그 유 래가 있는 것이다.”

이상우, 앞의 논문, 165.

70) 바슐라르는 인식으로 인한 존재의 확장을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꽃 한 송이가 몸을 열고 사과나무가 제 빛을, 제 고유한 빛을, 저 희고 장밋빛 띤 빛을 그러내려 할 때 우리는 한 그루 나무가 바로 온 우주 전체임을 잘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공기와 꿈 – 운동에 관한 상상력』, 정영란 옮김(서울:이학 사, 2001), 399.

71) 존 버거, 앞의 책, 230.

72) 서복관은 ‘심재’와 ‘좌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무기(無 己)·상아(喪我)의 진실한 내용이 바로 심재(心齋)이며, 심재의 의경이 곧 좌망(坐 忘)의 의경이다. 심재와 좌망에 도달하는 과정은 아래에 서술하는 바와 같이 바 로 미적관조에로의 과정이다. 따라서 심재와 좌망은 미적관조가 성립될 수 있는 정신의 주체인 동시에 예술이 성립될 수 있는 최후의 근거이기도 하다.”

서복관, 앞의 책, 105-6.

73) 이상우, 앞의 논문, 159.

가의 작품활동을 이러한 철학의 ‘경계’로 간단하게 대입하여 설명하기는 쉽 지 않다. 예술작품이 노장철학의 궁극인 ‘도’를 지향한다고 하더라도 예술작 품의 존재는 여전히 나와 관계하며 미적체험을 낳고 있기 때문이다. 최고의

‘경계’를 순수한 철학의 의미로 이해한다면, 초월적 단계의 ‘경계’에서는 예술 의 존재자체가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나 ‘경계’로 나타난 인식의 변화와 그것 에 내포된 미적태도는 우리에게 건강한 예술의 안목을 제시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우리의 삶에서 예술의 존재가치는 분명하다. 대상을 통해서 대상 너머의 것을 파악하려는 자동적인 인식의 운동력, 아는 것과 사 실 간의 불일치를 극복하려는 ‘꿈틀거림’이 바로 그것이다. 장자는 불안을 해 소하기 위하여 ‘심재(心齋)’와 ‘좌망(坐忘)’을 제시한다. 이런 방식의 ‘경계’에 서는 불일치를 조율하기보다는 초월하고자 한다. ‘도’라는 초월적 차원에서는 사물을 바라본다면, 상대적인 가치 평가는 무의미해진다.74) 강하고 단단한 것이거나 연하고 부드러운 것이거나, 생명의 시간이 긴 생명체나 짧은 것이 나, 어떤 것이든지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소멸과 생성의 과정이 순환 한다는 차원으로 본다면, 이들 간에 차별과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진다는 것 이다. 새롭게 열린 시각에서는 ‘열정’과 ‘냉정’이 가라앉고 ‘평정’에 이른다.

‘도’를 바라본다는 것은 이와 같은 태도로 세계를 향한다. ‘여가적 풍경’이 시 선은 이런 태도를 근원으로 삼고 있다. 바로 초연한 태도로 세계를 바라보 고, 온 세계를 관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관념에서는 ‘나무 한그루’나 혹 은 ‘풀 한포기’에 온 우주(宇宙)가 들어있다는 말이 옳다.75)

74) 이상우, 앞의 논문, 152.

75) 바슐라르는 몽상적인 인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그리고) 꽃 한 송 이가 몸을 열고, 사과나무가 제 빛을, 제 고유한 빛을, 저 희고 장밋빛 띤 빛을 드러내려 할 때 우리는 한 그루 나무가 바로 온 우주 전체임을 잘 깨달을 수 있 게 된다.”

가스통 바슐라르, 앞의 책, 399.

그리고 예랑은 ‘의경’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이러한) 상외지상, 경외지경 가운데 그들이 전체 인생에 대하여 느낀 바를 표현하였다. 중국 고대의 화가는 하나의 돌, 풀벌레, 몇 마리의 새, 몇 그루의 대나무를 그리더라도 모두 전체 우주의 생기를 표현하려고 하였으며, 화면이 화가의 전체 인생에 대한 느낌 과 깨달음을 체현하도록 함으로써 일종의 철학적 이치를 지니고 있는 인생감을

보기의 방식에 따라서 세계는 변화한다. ‘여가적 풍경’은 휴식적인 풍경이 다. 그런데 이 휴식은 인생을 범주로 삼는 ‘도’ 안에서의 휴식이기에, 긴 시 간을 포괄하는 통찰과 그것에 따르는 수양을 요구한다. 동양철학에서는 ‘도’

를 향하는 삶은 곧 인생의 ‘경계’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미학적 차원의 ‘경 계’는 인식론과 동양예술론의 특색인 수양적인 측면이 모두 포함된다는 것이 다. 장자가 말하는 ‘도’를 오늘날의 미학적 목적인 미적체험으로 이해한다면,

‘의경(意境)’의 “형이상학적 위안”76)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바로 나의 ‘여가적 풍경’에서 감추어진 기대이다. 이러한 미학적인 접근은 작 업적인 성취와 함께 인간내면의 성숙을 돕는다. 회화는 빗대어 표현하기 좋 은 수단이다. ‘여가적 풍경’은 ‘도’를 향한 태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 1932-2018)의 책 제목처럼 우리는 진리를 말 할 때, ‘비유로 말해야 한다.’77) 우리의 존재는 너무도 연약하여 그것을 담아 낼 만한 내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담겨진 것들이 진리의 빛을 머금고 있다면, 그것을 담은 그릇 역시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 그래서 예술 작품 이전에 결정된 그 ‘무엇’이 중요하다. 이 ‘무엇’은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가 말하는 “예술의 내용”78)이며, 바로 이것이 우리를 건강한 삶으로 이끌어준다. 그래서 이것이 육체(즉, ‘어떻게’)보다 훨씬 더 중 요하다.79) ‘경계론’은 이 ‘무엇’에 대한 감각을 놓치지 않고 있다.

(2) ‘여가적 풍경’에서의 ‘창신’

종병(宗炳)의 「화산수서(畫山水序)」는 최초의 산수화론(山水畫論)으로

드러내도록 하였다.”

예랑, 「중국예술에서의 의경」,서진희 역, 『예술문화연구』4(1994), 220.

76) 예랑, 앞의 논문, 230.

77) 유진 피터슨, 『비유로 말하라』, 양해원 옮김(서울:IVP, 2008).

78) 바실리 칸딘스키,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 칸딘스키의 예술 론』, 권영필 옮김(경기도:열화당미술책방, 2000), 31.

79) 바실리 칸딘스키, 앞의 책, 26-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