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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원’의 구도적 특성

2) 사진의 평면화

나는 작업과정 중에서 사진을 자 주 참고한다. 그러나 내가 보고자 하 는 것은 사진에 남겨진 사실성이라 기보다는 나의 기억과 함께 기록된 내재적(內在的) 운동감(運動感)이다.

사실성의 포착에 있어서 사진은 우 수하다. 사진은 가장 빠르고 정확한 스케치이다. 그러나 사진에 고정된 실체(實體)는 본질적인 ‘힘’을 잃는 다. 오히려 내가 머물렀던 장소에 대 한 기억이 진실을 담고 있다. 그래서 나는 먼저 내면에 자리 잡은 기억을 더듬으며, 사진이 기록한 사실들을 참고하는 것이다. [참고도판 23]과 나의 작품 [작품도판 34]을 비교해보 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주목해야할 부분은 구조물 사이로 보이는 ‘나무 기둥과 빛’이다. 나는 그것이 만드는

‘음악-율동적인 움직임’을 기억한다.

사진은 기억을 돕는 도구이다. 내가 회화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운동’

이다. 나는 그것을 ‘평면의 배열’에 나타나는 리듬, 즉 ‘움직임’으로 환원한 다. 결과적으로 완성된 작품은 사진과 많이 달라졌다. 틈 사이로 보이는 ‘빛’

과 ‘나무기둥’ 그리고 ‘물의 반사’가 만드는 움직임은 사진에 비해서 많이 강 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음악적 운율이 내가 진정으로 본 것이고, 또한

[참고도판 23] <Waterside B>의 참고사진 (촬영일: 2019.6.23.).

[작품도판 34] <Waterside B>, 2019, 장 지에 혼합매체, 45.5×53.0cm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사진이 등장한 이래 평면은 재현의 구속에서 벗어났다. 회화는 새로운 자 유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따라서 재현의 구속에서 벗어난 회화는 오히려 입체를 묘사하는 수고를 경멸한다.315)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회화의 발전에 따라 우리의 눈도 개발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미술을 보는 즐거움 에는 끊임이 없다. [참고도판 24]는 내가 머물렀던 공원풍경의 사진이다. 이 는 <호수공원 2>를 제작하기 위한 밑그림이 되었다. 사진은 아주 세밀하고 자연스럽다. 그러나 나는 이미지를 큰 덩어리로 구분해낸다. 빛과 공간이 만 드는 자연스러운 변화를 단순화하여 구분지음으로써 몇 단계의 레이어 (Layer)로 변형한다. [참고도판 25]를 보면 석조(石造)로 된 하단의 보도는 담채(淡彩)된 종이 그대로 남겨두고 가운데의 초록색 물을 두텁게 칠했다.

또한 멀리 보이는 숲은 농담(濃淡)의 변화가 있는 먹(墨)의 수직적인 붓질로 염색되었다. 나는 사진의 정확성에는 관심이 없다. 사진은 이미지가 평면 위 에 어떻게 배열될지를 돕는 정도의 역할에 머문다. 표면, 즉 면적들을 채우

315) 에른스트 곰브리치, 앞의 책, 268.

[참고도판 24] <호수공원> 시리즈의 참고사진(촬영일: 2016.8.30.).

고 있는 ‘종이의 표면’과 ‘두터운 안료의 면적’, ‘수묵으로 그려진 면적’ 그리 고 ‘그것들 간의 경계가 만들어내는 인상’에 집중한다. 더 진행된 사진([참고 도판 26])을 보면 원경(遠景)의 숲이 더 그려졌다. 확대된 사진 [참고도판 28]에서 보이는 것처럼 숲의 상단에 빛을 받은 면적을 뚜렷하게 구분해서 밝 은 색조로 칠했다. 하나의 대상에서 어두운 면적과 밝은 면적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내기보다는 각각 따로 구분된 색조로 그려졌다. 이때 나는 채색면적을 형성하는 붓질의 질감과 형태에 집중한다. 왜냐하면 평면의 구성이 무엇보다 [참고도판 25] <호수공원 2>의 제작과정 1.

[참고도판 26] <호수공원 2>의 제작과정 2.

[참고도판 27] <호수공원> 시리즈의 참고사진에서 부분.

[참고도판 28] <호수공원 2>의 제작과정에서 부분.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퍼져나간 먹의 표면 위 선명한 색조의 두터운 색채는 사진([참고도판 27])과 비교해 볼 때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는 사물 의 형태와 변화된 색조(色調)의 유사성으로 인해 어둡고 밝은 두 층위의 구 분된 레이어로 숲을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색면(色面)의 분리는 평면성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방식이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현실과의 거리감을 확보한 다.

나의 작품에서는 구도에서도 평면성이 강조되고 있다. 이는 회화적 가치이 다. 회화는 사진이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원근(遠近)을 무시하고, 화면의 평 면적인 배열(排列)에 더 집중한다. 사진([참고도판 29])에서 소실점(消失點) 으로 향하는 보도블록의 패턴은 평면적으로 변형되었다. 화면의 가장 넓은 부분을 차지하는 보도블록은 마치 위에서 바라본 것처럼 일어선다.([작품도판 35]) 이는 의도적인 구도의 변형이다. 변형된 구도 안에서 화면을 가득 채우 는 보도블록의 패턴이 작품의 주된 리듬을 형성한다. 현대의 구상미술에서 구도의 평면화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의 현대회화를 대표할만한 마키 코 쿠도(Makiko Kudo, b.1978)의 작품을 보면, 인물이 공간 속에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화면 중심의 공간은 인물을 위한 무대가 된다고 보인다. 그 녀는 무대의 공간을 확보하는데 구도를 평면화한다. 내 작품에서처럼 쿠도의 그림은 소실점으로 향하는 원근을 무시한 채 평면적으로 일어선다. 그녀는 [참고도판 29] <붉은 정원> 시리즈의 참고사진(촬영일: 2017.5.6.).

[작품도판 35] <붉은 정원>, 2018-9, 장지에 혼합매체, 72.7×90.9cm

바닥에 깔린 ‘잔디밭’을 마치 ‘카펫’을 위에서 보고 있는 듯 넓게 펼쳐서 그 리고 있다.([참고도판 30])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평면의 사건이다. 이를 이에 대한 연구는 오랜 전 통을 지닌 회화의 과제였다. 사진기술이 사실성이라는 ‘사소한’ 문제를 단번 에 해결해버리자 평면성은 더욱 강조되었다. 우리는 이제 순수한 형상으로부 터 더 많은 도출을 이끌어 낸다.316) 우리의 미술은 평면에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무한한 자유에도 책임은 따른다. 구상미술이나 비대상회화(Non-objective Painting), 양자 모두의 경우에서 그렇다. 지금까 지 살펴본 것처럼 구상회화에서의 평면성은 그려진 대상의 가치를 유지하면

316) 자크 랑시에르, 앞의 책, 144.

[참고도판 30] 마키코 쿠도, <카펫>, 2011, 캔버스에 유채, 65.5×80.5cm

서도 그것의 의미를 다듬는다. 평면으로의 환원은 지각을 고립화하고 집중화 함으로써 의미를 명료하게 한다.317) 그래서 현실의 이차원적 표현은 격하가 아니다. 평면성은 대상의 ‘감추어진 힘’을 재생하는 회화 고유의 방식이다.

317) 서복관은 하만의 말을 인용하면서 고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립 된 지각은 특수한 상태이며, 그 근저를 이루는 것이 바로 미적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만은 미적형상은 지각의 고립과 집중화 강도화에 의해 서 얻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때는 마치 하나의 물건에 전일하는 것과 같으므로 그 전제조건은 바로 심리적 주체를 철저하게 배제해 버리는 것이다.”

서복관, 앞의 책, 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