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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는 것’에 대한 이해는 마치 화가에게 주어진 자격요건시험과 같다.

왜냐하면 이는 자신의 세계관 형성에 앞선 전제이자 작품론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술에서만큼은 ‘보기의 방식’이 곧 ‘작가의 예술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가적 풍경’은 작품의 형성 이전에 나의 내면에 먼저 새롭게 발견된 세계이다. 그것은 하나의 의미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것 이다. ‘본다는 것’은 이 의미로 향하는 출발점이다. ‘본다는 것’에 대한 탐구 는 ‘여가적 풍경’이라는 의미의 세계로 자라나기 이전에 내적인 이미지의 성 장원리를 먼저 파악하고자 함이다. 그리고 이 고찰이 중요한 이유는 보기의 방식 안에 이미 세계를 향한 호흡의 결이 들어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내 작품의 전개에 있어서 보기의 방식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쟁점이었다. 내 가 ‘본다는 것’에 대해 항상 신중히 생각해온 이유는 ‘본다는 것’에 대한 확 신이 화가에게 개념적인 전개의 명확함을 줄 뿐만 아니라, 작품의 작용원리 를 파악하기 위한 토대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지속된 증명 의 욕구는 자신감이 부족한 화가가 겪어온 일종의 불안감에서 시작된 습관이 다. 내게 창작의 고민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세계를 바라보는 예술가는 작품을 고안하여서 자신이 경험했던 하나의 세 계를 제시한다. 사물에서 발견한 하나의 진리가 가시화된다. 관람자는 이 사 물로 이루어진 작품을 보고, 그것에 담긴 의미의 세계, 즉 예술가가 이른 비 물질의 세계에 다가간다. 이때 바라보는 이의 눈이 중요하다. 예술작품으로 바라보는 눈이 존재해야지만 사물로 이루어진 작품이 의미를 낳는 예술로써 보이기 때문이다.22) 작품이 미술관에서 전시되었을 때, 작품은 미적체험이 가능한 환경에 속에 놓여진다. 미술관이라는 환경이 예술적인 인식의 조건을 형성한다. 전시장 벽면에 ‘테이프로 붙여놓은 바나나’23)조차 새로운 의미의

22) 자크 랑시에르, 앞의 책, 137.

23) 2019년 《아트 바젤 마이애미비치(Art Basel Miami Beach)》에서 전시장의

세계로 투사될 가능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외적인 환경이 투사 의 조건이 된다는 말은 아니다. 모든 일에 앞서 최초의 사건은 예술가의 내 면에서 발생한다. 예술가는 현실을 다시 보아내는 특별한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면 예술가는 어떻게 연속적인 삶에서 특별한 미적체험을 경험하게 되는 것인가. 작품이 제작되기 이전에 예술가에게 먼저 이런 특별한 체험이 선행되어야 하겠다. 그래서 예술가는 잠들지 않고 꿈꾸는 자들이라고 한다.

나는 ‘본다는 것’이 미적경험으로 작용하는 원리를 살펴보려고 한다. 나는 동 서양의 예술론을 살펴봄으로 ‘본다는 것’의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한편 ‘본 다는 것’은 곧바로 작업의 방법적인 견해로 자리 잡는다. 특히 동아시아 전 통의 ‘관조(觀照)’와 ‘경계(境界)’에는 이미 ‘여가적 풍경’을 배양할만한 토질 을 갖추고 있다.

‘여가적 풍경’은 의미로 이루어진 세계, 곧 진실의 세계이다. ‘여가’의 시 선은 현실을 돌파하여 그곳에 머문다. 내가 ‘여가적 풍경’으로 포착하는 현대 의 자연환경의 모습은 그 외형을 뚫고 인간 정서의 반사를 나타내고 있다.

과거의 산수자연(山水自然)으로 향한 시선은 현대의 풍경에서도 유효하다.

화가는 자신의 마음을 펼치기 적합한 대상을 선택하였는데, 문인(文人)들에 게 그것은 자연(自然)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연의 영속성(永續性)을 사모 했기 때문이다. 내가 현대의 생활에서 발견하는 풍경은 이와 유사한 목적을 띤다. 현실의 자연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다. 이처럼 회화는 ‘지각한 현실세

벽면에 덕트 테이프로 바나나를 붙여놓은 작품이 전시되었다. <코미디언 (Comedian)>이라는 제목을 단 이 작품은 이탈리아 출신의 마우리치오 카델란 (Maurizio Cattelan)의 작품이다. 작가는 평소에 위트와 역설적 유머로 전통의 예 술적인 가치에 끊임없이 도전하는데, <코미디언(Comedian)> 역시 신선한 아이 디어로 현장의 많은 주목을 끌었다. 이 작품은 아트 페어 동안에 수많은 패러디 를 만들어 내었고, 12만 달러에 거래되면서 많은 관객들의 놀라움을 샀다.

『ARTNET NEWS』

(검색일:2021.3.31.,

https://news.artnet.com/market/maurizio-cattelan-banana-art-basel-miami-beac h-1722516).

계’와 ‘그것의 의미’ 사이에 위치한다. 회화는 이들을 중재한다. 세계를 바라 보는 예술가는 자신이 창조한 작품을 고안하여, 자신이 경험했던 하나의 ‘경 계(境界)’를 드러낸다. 관람자는 사물로 이루어진 작품을 보고, 그림에 담긴 그 ‘무엇’을 파악한다. 미적체험은 대상을 ‘바라봄’이라는 인식의 ‘경계’가 순 간 허물어지고, 작가의 뜻과 그것을 체험하는 주체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작품의 ‘사물성’이 사라지고, 의미의 세계와 이것을 받아들이는 주체자로 이 루어진 상태이다.24) 이때 보는 사람의 ‘경계’, 보이는 대상의 ‘경계’ 그리고 인식이라는 ‘경계’ 사이에서 변화가 생긴다. 보는 ‘사람’과 대상을 꿰뚫고 도 달한 ‘의미’라는 두 가지의 경계가 존재하게 된다. 동양철학에서는 이러한

‘경계’의 변화를 ‘물아양망(物我兩忘)’, ‘심재(心齋)’와 ‘좌망(坐忘)’으로 말한 다. ‘경계’의 변화는 ‘본다는 것’을 지각의 차원에서 내적인 ‘관조(觀照)’의 차 원으로 옮겨놓는다. 이러한 전통의 사유철학이 동양예술론의 근원이 되고 있 다.

전통의 사유철학은 인류의 삶과 매우 밀착되어 있다. 동양철학의 일관된 면모이다. 그것은 ‘생(生)’을 단위로 삼으며, 그것을 관통하는 생활의 태도를 제시한다. ‘경계론(境界論)’은 이처럼 수양적(修養的) 면모를 놓치지 않고 있 다. ‘경계론’은 인식의 원리를 설명할 뿐만 아니라, 내가 소망하는 세계를 쫓 는 안목을 길러낸다는 것이다. 나는 ‘여가적 풍경’을 통해서 현실을 마주하길 원한다. ‘경계론’의 독특한 인식론적 태도는 화가에게 세계와의 충돌을 해소 하고 공존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길러준다. 이 현실은 덧없는 것이기도 하지 만, 우주(宇宙)가 깃드는 무한한 가능성의 땅이기도 하다. 이 둘 간의 균형에 서 마땅히 누릴만한 기쁨이 있다. 나는 ‘경계론’의 수양적인 측면이 이러한

‘여가적 풍경’이 소망하는 크고 은밀한 꿈을 불러올 만한 바탕이 되어준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경계론’에서 나타나는 ‘수양적 특징’에 대해 살펴봄으 로 ‘여가적 풍경’의 내재적 가치를 파악하려고 한다.

24) 마르틴 하이데거, 『숲길』, 신상희 역(경기도:나남, 2008), 51.

(1) ‘관조적’ 시선

내 앞에 놓인 대상을 포착하는 일에는 조건이 따른다. 무심하게 지나쳐가 는 경험의 세계가 특별한 앎으로 포착되는 체험에는 고립이라는 특수한 환경 이 전제된다. 화가는 경험의 세계라는 ‘연속된’ 세계의 흐름 속에서 늘 알고 있던 것을 다시 본다. 바로 따로 떼어내어서 본다는 것이다.25) 현실에서의 분리를 통해서 고립된 대상은 집중화되고 강화하게 된다.26) ‘관조(觀照)’는 고요한 마음으로 비추어보는 것이다. ‘좌망(坐忘)’은 조용히 앉아서 잡념을 버리고 무아(無我)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이다. ‘관조’의 조건과 같다. ‘좌망’

의 태도는 ‘관조’의 대상을 경험의 세계에서 분리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시선 은 ‘쓸모’나 ‘이유’를 구하지 않는다. ‘무목적한 시선’으로서 쓸모를 찾지 않 는 순수한 인식으로 대상을 취하는 일이다. 이 무목적성이 미적체험의 필수 적인 조건이 된다. 실용의 세계에서 벗어난 상태에서야 비로소 순수한 지각 으로 대상을 투사할 여지를 갖는다. 이것이 ‘여가적 풍경’의 관조적 시선이 다. 그래서 ‘여가적 풍경’의 시선은 ‘텅 빈 곳’으로 향한다.

잔잔하게 가라앉은 물이어야 얼굴을 비추어볼 수 있다.27) 장자(莊子, BC 369-289)가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세계의 소음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한 내 면의 태도를 갖추라는 것이다. ‘위함이 없이 허정한 마음으로 바라보라’는 장 자의 인생철학적인 태도는 미학적 차원으로 옮겨온다. 이러한 관조방식은 미 적체험의 전제가 된다. 우리는 ‘관조’로부터 깊은 미학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25) 질 들뢰즈, 『감각의 논리』, 하태환 옮김(서울:㈜민음사, 2008) 19.

26) 서복관은 예술적인 지각에 대해 다음과 기술하고 있다. “지각이 고립화되면 자연히 집중화하고 강도화하게 되는데, 이는 곧 장자가 말하는 ‘마음의 활동을 하나로 통일시켜 잡념을 떨쳐버리는 일’ 및 ‘그러므로 진인에게는 좋아하는 것도 하나의 입장이고, 좋아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입장이다’는 것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서복관, 『중국예술정신』권덕주 外 역(서울:東文選, 1990), 108.

27) 서복관, 위의 책, 114.

있다. ‘쓸모’라는 ‘유형(有形)’적인 가치로 존재하는 대상의 사물적인 차원을 비워내고, ‘무형(無形)’의 가치를 불러낸다. 이러한 비움의 태도가 장자의 ‘허 (虛)’28)이다. 우리의 세계는 ‘실(實)’의 세계로 사물들로 가득 차있다. 사물의 세계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일은 우리 정신의 호흡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자는 호흡의 회복을 위해서 ‘비움’을 제시하고 있다. 동양철학이 말하는 ‘허’나,

‘무(無)’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없음’이 아니다. 반쯤 비워진 물통이 신선한 새로운 물로 채워질 가능성을 갖는 것처럼, 비움은 순환하는 ‘기(氣)’

의 필수조건이다. “도(道)는 텅 빈 곳에 모인다.”29) 이 무용으로 비워진 마음 의 상태에서 미적체험의 가능성이 발생한다. ‘허’의 세계에서는 시간과 공간 을 초월하고 제약이 사라진다. 제약이 사라진 몸, 즉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눈이 목격한 세계에는 생명력이 넘친다. 이 ‘허’의 세계에서는 비워진 우리의 내면에 그것의 의미가 자연스럽게 순환하게 된다. 언어로 고정되었던 현실의 이름30)과 용도로 규정된 사물이 제약에서 풀려나서 의미와 가치가 회복된다.

미의 본질은 이러한 내면적인 순환에 자신을 맡기는 일이다. 사물에 대한 새 로운 미적인 가치의 발견은 주체와 객체라는 분리의 상태에서 얻어내는 강제 적인 것은 아니다. 목적을 두고 결과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비움’

으로 우주의 순환하는 ‘기’에 맡긴다면 자연스럽게 보게 되는 것이다.

‘허’의 실현은 ‘정(靜)’이다. 고요함을 가리키는 ‘정’은 내면의 상태이자 곧 결과이다. 또 ‘허정’함이라는 지각활동은 이지적인 것을 떠난 ‘망지(亡智)’의 앎이며, 느낌이나 감정이라는 의미의 감성을 초월한 초감성적인 것이다.31) 이는 자연의 순리에 감정이 끼어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학이 감정 에 대한 학문이라고도 하는데, 이 ‘관조’의 미학이 이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우리는 인간적인 사사로운 내적인 감정의 소란이 잠잠하고서야 정말로 바라보아야 하는 초연하고도 숭고한 인생경계를 목격하게 된다. 이는 28) 김용옥은 ‘허(虛)’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허라는 것은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가능성이며, 실현되기 이전의 잠능(潛能)이며, 잠재 태이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포텐시알리티(Potentiality)인 것이다.”

김용옥, 『노자와 21세기』(서울:통나무, 1999), 192.

29) 서복관, 앞의 책, 113.

30) 김용옥, 위의 책, 107 31) 서복관, 앞의 책, 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