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여가적 풍경’에 내재된 ‘의경’
3) 생기와 소박한 기쁨
[작품도판 27] <Wild Plants>, 2019, 장지에 혼합매체, 53.0×45.5cm
새 삶을 부여받는 기쁨이 되었다.
‘생기’는 친숙하게 자연(自然)으로 표현된다. 자연의 표현방식이나 자연의 표현규모와는 상관없이 자연은 고유의 ‘생기’를 머금고 있다. ‘대자연(大自 然)’의 일렁이는 ‘파도’에서나, 화분에 심겨진 ‘풀잎’은 각자에 알맞은 ‘생기’
를 지니고 있다.([작품도판 27]) 나는 화초를 가꾸는 일을 즐긴다. 왜냐하면 작은 화분 안에는 ‘우주(宇宙)’의 ‘기운(氣運)’을 빨기 위해 뻗어내는 풀의
‘상승적 힘’이 감지된다.([작품도판 10]) 화초를 가꾸는 취미는 이 힘을 발견 하는 기쁨에 있을 것이다.266) 이와 같은 소박한 기쁨을 찾기 위해서, 나는
266) 바슐라르는 일상적인 대상의 재인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늘 볼 수 있는 것을 (구태여) 다른 곳에서 되찾고자 하는 격이다. 일상의 삶을 아름다움으로 무겁도록 덧입히는 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공기와 꿈 – 운동에 관한 상상력』, 정영란 옮김(서울:이 [작품도판 10] <하얀 식탁 1>, 2019, 장지에 혼합매체, 97.0×130.3cm
‘대자연’의 엄숙한 힘보다는 ‘풀’이나 ‘나뭇가지’를 작품 안으로 끌어온다. 이 소박한 자연(自然)의 단편(斷片)에 주목하면 그 안에는 ‘생명(生命)’이라는 큰 원리가 자리하고 있다.([작품도판 28])
그림의 대상으로 ‘거(居)’와 ‘유(遊)’의 장소를 택하라는 조언에는 예술을 대하는 곽희(郭熙)의 태도를 전제하고 있다.267) 먼저 밝힌 바와 같이 『임천 고치집(林泉高致集)』은 ‘군자(君子)’가 추구하는 세계를 형상화하는 것에 목 적을 두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잠깐 “방문해볼만한 곳”268)이나 “한번 구경해 볼만한 곳”269)처럼 흥미롭고, 재미있는 장소보다는 거주하거나, 오랜 시간동
학사, 2001), 25.
267) 곽희는 ‘가거-살만한 곳’과 ‘가유-노닐만한 곳’의 장소를 취하라고 하면서, 이런 장소가 군자가 갈망하는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유검화, 『중국고대화론유편 - 제4편 산수1』, 230-231.
268) 유검화, 위의 책, 230-231.
269) 유검화, 위의 책, 230-231.
[작품도판 28] <호수공원>, 2017, 장지에 혼합매체, 130.3×193.9cm
안 노닐만한 세계를 택하기를 권장한다. 이처럼 회화의 대상을 선택하는 일 은 작품이 낳은 미적효과의 결을 결정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판단기준이 다. 화가는 작품의 첫 번째 관객이다. 화가는 자신 작품이 낳는 예술적인 효 과에 영향을 받게 된다. 곽희는 ‘군자’가 마땅히 살만한 장소를 꿈꿨기 때문 에 자신도 그 세계의 한편에 거처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도 적용된 다. 회화는 외부로 향하는 표출이지만, 화가는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그려놓은 그 세계에 구속된다. 우리가 부정적인 생각에 집중할수록 회의감(懷疑感)이 커지듯이, 작품도 그런 방식으로 작용한다. 나의 ‘여가적 풍경’은 적적한 인 생감을 내포하지만, 누릴만한 기쁨과 소망을 잃지 않고 있다. 이는 작품에 대한 나의 기대이다. 삶이 겪어낼 근원적인 고통의 문제를 부인할 수는 없겠 지만, 조금 더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견뎌보는 것이다. ‘여가적 풍경’은 현실 을 부정하거나 도피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서 조망 한다. 그래서 잠잠히 누릴만한 기쁨을 회복하고자 한다. 이것이 지식을 포괄 하는 지혜이며, ‘여가적 풍경’에 담긴 기대라고 할 수 있다.
회화에서 얻는 주된 ‘즐거움’은 시지각의 감각적 만족과 그것에 이어지는 관념적인 확장으로부터 온다. 감각적인 만족들은 자연스럽게 관념에 순종한 다. 나는 이러한 미적체험이 회화가 주는 예술이 가야할 최종적인 ‘즐거움’이 라고 생각했고, 때때로 주어지는 이지적(利智的) 기쁨을 창작에서 맛보았다.
이는 장자(壯者)가 말하는 ‘지락(至樂)’이라고 할 수 있다.270) 한편으로 이러 한 ‘즐거움’은 숙성을 거쳤기 때문에 비교적 차분하고 심심하다. 감각은 절제 되고 조형적인 운동력은 줄어든다. 그러나 과장을 피하기 위해서 조형적인 소리가 줄어든 것이지, 감각(感覺)은 자연스럽게 활동한다.271) 단지 ‘여가적 풍경’에서는 감각 자체가 주인이 되지는 않을 뿐이다. 또한 감각으로부터 연 쇄된 감정(感情)은 지나침이 없다. 감정 또한 낭비되거나 소비되지 않으며, 적절한 표현으로 대상의 깊은 의미를 형성한다. ‘의경’은 이러한 총체적인 미 감(美感)을 불러온다.
270) 서복관, 앞의 책, 90.
271) 서복관, 앞의 책, 91.
Ⅳ. ‘여가적 풍경’의 회화적 표현
본 장에서는 나의 예술론을 바탕으로 수행된 구체적인 창작과정을 정리한 다. 나의 작품은 현대적인 자연의 모습을 동아시아적인 관념으로 해석하고 동시대의 풍경화 형식으로 담아내고 있다. 이렇게 회화(繪畫)의 관념(觀念)과 장르(Genre), 대상(Object, 對象)이 자리잡아감에 따라서, 화가는 작업실에서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을 직면한다. 한편으로 이런 회화적 과제들을 발견 한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작업실에서 큰 동력으로 작용하 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가가 성실하게 작품에 임하더라도 진심과 성실함이 작품을 형성해내지는 못한다. 화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술적인 지위 의 타당성이다. 내가 믿고 있는 회화의 성공은 정제된 정신과 그것에 걸맞은 형식적인 아름다움에 있다. 어느 한쪽도 양보될 수는 없다. 다시 말하자면 미술작품은 관념적인 깊이를 갖추었으며, 또한 이미지 그 자체도 매력적이고 아름다워야 한다. 또, 이 둘은 상호간에 합목적성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나 는 작업 중에 수시로, 혹은 작품이 완성되면, 언제나 ‘그림이 되었는가?’를 스스로 점검한다. 지나친 표현일 수 있겠으나 ‘그림이 생각한 대로 잘 작동 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말하자면 ‘여가적 풍경’은 ‘여가적(餘暇的)’ 심 경으로 바라본 세계에 대한 미적효과를 잘 디자인해내야 한다. 이때 화가는 대상 너머의 세계를 바라면서 동시에 물질로 이루어진 작품의 작용에 귀 기 울여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인다. 이는 마치 음악을 사랑하는 음악가가 자신이 내는 소리 자체에 집중하는 것과 같다. 음악가가 곡조에서 흥얼거릴 만한 거리를 즐기듯이 화가도 창작과정에서 즐길만한 거리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음악가나 화가의 작업은 훨씬 더 ‘감각적’이고, ‘감각(感覺)-귀나 눈’
에 매여 있다. 그들은 ‘실제의 소리’나 눈을 자극하는 ‘색채(色彩)와 형태(形 態)’의 작용에 온전히 집중한다.272) 그들의 작업은 감각에 집중하여서 명확 한 것들은 선별해내는 일이다. 이처럼 창작의 활동에는 분별력, 즉 지성(知 性)이 따른다.273) 나는 지성이 수반된 감각이야말로 예술의 학문적인 가치를 보존할 최선의 근거가 된다고 생각한다.
개념과 형식의 맥락을 이어 붙이려는 시도는 내가 작품에서의 부조화(不 調和)를 인정하면서 시작되었다. 결핍감(缺乏感)은 필요를 알게 한다. 나는 내 작품에서 드러난 양자 간의 부조화에서 오는 불편함을 수정하고 싶었다.
따라서 내가 아는 미술의 공부는 추구하는 관념과 수행된 형식 사이의 간극 을 좁혀가는 일이다. 그리고 부조화에 대한 반성은 뜻밖에도 내게 미술적인 안목을 길러주었다. 당시 나는 대가(大家)의 작품들과 성공적인 근현대회화 작품들을 찾아보았는데, 그들의 성공적인 요인들을 분석해감에 따라 점차 그 들의 ‘의식세계’와 ‘형식적인 매력’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추후의 작 품연구에서 기준점을 발견하는 큰 사건이었다. 늘 알던 작품들이 새롭게 인 식되었다. 예를 들자면 과거에 나는 베이컨(Francis Bacon)의 작품을 그저 소름끼치는 섬뜩한 이미지로 알았다. 그러나 그의 세계관을 떠나서 그의 작 품에서 보이는 평면조형의 수준은 높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촉지적(觸指 的) 색채주의(色彩主義)’는 스토리를 피하면서도 대상을 직관할 수 있게 만 든다.274) “공포보다는 외침을”275) 추구했던 그의 예술적 목표가 완벽하게 실
272) 루이스는 작품을 대할 때 예술가들은 먼저 순수한 감각에 집중한다고 말한 다. “(하지만) 이것(음악가의 감정)은 대중적 사용법보다 훨씬 감각적이고, 귀에 더욱 매여 있습니다. 그들은 실제 연주 소리에 온전히 집중합니다. (···) 그림 에 대한 첫 번째 요구가 ‘보라’이듯, 음악에 대한 첫 번째 요구는 ‘들으라’입니다.”
C. S. 루이스, 『오독: 문학 비평의 실험』, 36.
273) 루이스는 먼저 순수한 감각에 집중한 다음 지적인 판단이 뒤따른다고 말한 다. “여기에는 지성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C. S. 루이스, 위의 책, 36.
274) 들뢰즈는 색채주의의 조형적인 작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색채주의 는 시각의 특별한 의미를 도출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빛-시간의 광학적 시각과는 다른, 색-공간의 눈으로 만지는 시각이다. 뉴턴적인 광학적 색채의 개념에 반대
행되고 있다. 이는 놀라운 성공이다. 내가 그의 세계관에 동의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그의 예술적 성취는 존경받아야 마땅하다.
이야기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과거와 현재의 내가 베이컨의 그림을 받아 들이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작품을 ‘사용(使用)’했다면, 지금은 먼저 ‘수용(受容)’한다.276) 예술의 ‘사용’은 누군가 주관적으로 무언가 하려는 것과 같다. 이는 관객이 필요에 의해서 자신의 감정이나 상상력을 발 휘할 요소를 찾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말이다.277) 이런 방식에서 작 품은 하나의 대체물, 혹은 ‘표상물(表象物)’278)이 된다. 작품이 보는 이의 필 요를 채우면 역할은 끝난다. 그는 사용해버린 작품을 두 번 다시 찾지 않는 다. 그러나 올바른 감상은 ‘수용’으로 이루어진다. 예술을 ‘수용’한다는 것은 정반대의 과정으로 작용한다. 먼저 자신의 ‘주관성-편견이나 관심사, 의도, 연상(聯想)’을 내려놓고, 작품 자체에 주목한다. 작품이 먼저 작용하도록 하
하여, 괴테는 눈으로 만지는 이러한 관점의 일차적인 원칙들을 도출하였다.
(···) 색채주의는, 자기의 고유한 수단들을 가지고서, 그 옛 이집트의 면들이 서로 분리되고 멀리 떨어지게 된 이래로 시각이 버렸을 만지는 힘을 되돌려주고 자 한다고 주장한다. 색채주의의 어휘들, 즉 차고 따뜻할 뿐만 아니라, ‘터치’, ‘생 경한’, ‘생생하게 포착하다’, ‘밝히다’ 등은 눈의 이 만지는 힘을 증명한다. (반 고 흐가 말했듯이. ‘눈을 가진 모든 사람이 거기서 명확히 볼 수 있는’ 그러한 시력 을 말한다.”
질 들뢰즈, 앞의 책, 158-60.
275) 들뢰즈는 베이컨의 작품이 현실적인 묘사보다는 감각적인 힘에 대한 것이 라고 말한다. “그(베이컨)는 더욱더 공포 없는 형상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과 연 어떤 점에서, ‘공포보다는 차라리 외침을’ 선택하고, 광경의 격렬함보다는 감 각의 격렬함을 선택해야 하는가?”
질 들뢰즈, 앞의 책, 75.
276) 루이스는 예술이 두 가지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진다고 말한다. 하나는 “사 용”으로 예술을 자신의 필요대로 쓴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수용”인데 순수한 예술의 작용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그는 후자가 올바른 예술 감상의 태도라고 설 명한다. “이 구분을 가장 잘 표현하는 방법은 다수는 예술을 ‘사용’하고 소수는 예술을 ‘수용’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 『오독: 문학 비평의 실험』, 30.
277) C. S. 루이스, 위의 책, 30.
278) C. S. 루이스, 위의 책,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