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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사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심층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문화기술지 연구 방법을 선택한 상황에서 연구자가 수많은 탐사보도 현장을 모두 다루는 것은 불가능 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연구문제 해결에 가장 적합 한 탐사보도 생산 현장 사례를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연구목적에 부합하는 사 례를 선택하는 것은 연구의 질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인데 연구자는 두 가지 조건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다. 첫째, 탐사보도 언론인의 소명과 소명의 실천 그리고 탐사보도 전문성이 연구문제의 핵심이기 때문에 가급적 탐사보도를 오랫동안 그리고 지속적으 로 하고 있는 언론인이 많은 현장이 더 바람직했다. 둘째, 언론사 내 탐사보도를 전담 으로 하는 부서이거나 아니면 별도의 조직이며 동시에 탐사보도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구기획 당시 이 두 조건 하에서 검토한 결과, 신문의 경우 탐사보도 전담 조직을 운영하는 언론사가 거의 없는 상태였다(정서린, 2010). 방송의 경우 <KBS>가 유일하게 보도본부에 안에 5명으로 구성된 탐사보도팀을 두고 있었지 만 두 가지 조건 모두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또 PD들이 제작하는 지상파 탐사보도

8. <뉴스타파>에 대한 현장연구는 2016년 3월 시작해 2017년 6월 마무리됐다. 연구 마무리 한달 전인 2017년 5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교체가 이뤄진 후 <KBS>, <MBC>, <SBS> 등 지상파 언론은 보도본부 내 탐사보도 전담 조직을 부활하거나 신설해 탐사보도를 생산하고 있다.

프로그램(추적60분, PD수첩, 그것이 알고 싶다)들의 경우 탐사보도의 위축이 지적되고 있었다(김상균 & 한희정, 2014; 박인규, 2010, 2017). <JTBC> 스포트라이트는 연구 기 획 당시 프로그램이 생긴지 오래되지 않은 상태였다.

<뉴스타파>와 취재팀은 연구문제와 목적에 부합하는 가장 이상적인 사례였다. 오 랫동안 탐사보도를 해온 언론인이 많았다. <뉴스타파> 대표인 김용진은 <KBS> 전 탐 사보도팀장으로 방송에서 탐사보도를 선도해 온 인물이다. <뉴스타파>를 이끌어 가는 또 한 명의 인물이 있는데 최승호이다. 이 외에도 <뉴스타파>를 처음 시작했던 최경 영이나 박중석 등은 <KBS>에서 탐사보도를 하면서 이미 능력이 검증됐다는 평가를 받는 언론인들이었다. 이런 기자와 PD들이 모여 4년 넘게 탐사보도를 이어오고 있었 던 만큼 <뉴스타파> 취재팀은 연구문제를 탐구하는데 가장 적합한 연구대상이었다.

또 <뉴스타파>는 “99퍼센트 시민들의 독립언론” 또는 “진실의 수호자가 되겠습니 다”라는 모토에서도 나타나듯이 탐사보도 전문 언론을 표방하고 있었고 외부적으로도 활발하게 탐사보도를 하고 있는 언론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한국 언론에는 다양한 시민 참여 실험이 이루어져 왔는데, 예를 들어 <한겨레신문>의 창간 당시 시민 모금,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제, <뉴스타파>의 시민 후원금, <국민 TV>의 미디어 조합 등이 대표적이다(Kim, 2015). <뉴스타파>는 미국의 <프로퍼블리 카>(ProPublica)를 모델로 한 비영리 탐사도보 언론으로 지속 가능성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이민규, 2013). <뉴스타파>에 대한 여러 평가들이 있지만 <뉴스타파>가 그동안 수상한 내역을 보면 국내 언론 가운데 탐사보도 전문 언론으로 상당 부분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 물론 탐사보도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현장 에서의 연구도 잘 이뤄지는 현장에서의 연구 못지 않게 이론 형성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매우 특이하고 극단적인 사례를 통해 이론화에 성공한 연구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스타파>를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은 연구자 로서는 행운이었다.

<뉴스타파>와 연구 참여자들에 대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뉴스타파>는 전국언 론노동조합(줄여서 언론노조) 산하 민주언론실천위원회(줄여서 민실위)가 2011년 10 월경 프로젝트 형식으로 기획한 것이 출발점이었다. 당시 민실위 위원장이었던

<KBS> 기자 박중석과 부위원장이던 춘천 <MBC> 기자 박대용이 구상했고, 이를

<YTN> 해직 기자와 <MBC> 해직 PD였던 노종면과 이근행에게 제안하면서 구체화

9. <뉴스타파>가 출범한 이후 조직 또는 개인이 받은 수상 내역은 뉴스타파 홈페이지에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다(https://kcij.org/awards)

됐다. 이후 김용진이 형식적으로는 자문, 실질적으로는 데스크로 참여하면서 정식 출 범하게 됐다(김수지, 2016, pp. 34-36). 아래 <자료 1>은 당시 프로젝트를 기획한 이유 에 대한 참여자의 설명이다.

<자료 1>10 선배 집단 한 명과 심층면담 중에서(2017년 5월 24일)11

문제의식이 어떤 거였냐면 민실위로 와서 했지만 첫 번째 얘기는 아주 단순한 거거든요. 어느 날 오다 보니까 금속노조에 우리가 산별노조잖아요 민주노총 산하의 언론노조 금속노조 보건의료노조 다 있는데 뭔가 이렇게 약간 나쁘게 이야기하면, 뭐라고 해야 하지, 이렇게 계모임이나 혹은 이렇게 품앗이 하듯이 한 열 명씩 다섯 명씩 공동 집회, 어떤 집회 현장에 가서 참여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해요. 금속노조가 여의도에서 하면 언론노조 간부들이 가가지고 공동 발언해주고 거기에 앉아서 있고 뭐 이런 게 있었고. 또 하나는 언론노조는 금속노조는 그래도 2천 명, 3천명 모여 그 세 과시를 해. 그런데 언론노조는 만 천 명 정도 조합원이 있었는데 천 명은 불가능이고 오백 명 모으기도 힘든 상황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연대라는 방식은 다른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거기에 다섯 명 참여할 게 아니라 우리가 제일 잘하는 방식 그거는 금속노조의 그 목소리를 우리가 보도하는 거다, 세상에 알려주는 거다, 그게 창구가 없으면 우리가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그거를 보도를 안 했다고 사후비판적으로 모니터링 식으로 민실위 보고서를 내는 건 약간 좀 뒤늦은 거 아니냐? 우리가 그냥 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 사실은 처음 만들 때 어떤 고민도 없었어요. 그리고 그 처음 만들 때 늘 얘기했지만 프로젝트였거든요. 1년 간 한시적인 프로젝트 개념.

참여자들은 <뉴스타파> 역사를 시즌 1, 2, 3으로 구분해서 부르는데 2012년 1월

~ 6월까지를 시즌 1, 2012년 8월 ~ 12월까지를 시즌 2, 그리고 2013년 3월 이후를 시즌 3으로 부른다. <뉴스타파>가 언론사로 등록한 정식 명칭은 <한국탐사저널리즘센 터 뉴스타파>인데, 이 이름을 내걸고 독립언론을 지향하며 본격적인 탐사보도를 시작

10. 이하에서는 분석을 위해 관찰, 면담 자료에 자료 번호를 매겨 < > 속에 표기하였다.

11 . 연구 참여자의 직접 언급을 인용하는 것은 세 가지 종류로 나뉜다. 연구자가 참여자와 사전에 면담 날짜를 잡은 뒤 반구조화된 질문지를 이용해 진행한 ‘심층면담’과, 연구자가 참여자들을 관찰하 는 과정에서 연구자와 참여자 사이에 자연스럽게 오고 간 ‘일상대화’, 그리고 기획회의나 편집회의에 서 기자나 PD들 사이에서 오고 간 ‘회의대화’이다. 회의대화 역시 참여관찰 결과의 일부분이다. 본 연구는 참여관찰과 심층면담의 결과를 구분하기 위해 참여자의 직접 언급을 세 가지로 구분해서 제 시했다.

한 것은 시즌 3부터이다. 따라서 시즌 1, 2 기간의 <뉴스타파> 보도는 탐사보도 전문 언론 보다는 언론노조의 보도 프로젝트 성격이 강했다.

<뉴스타파>의 첫 보도는 2012년 1월 27일이었다12 . 한시적인 프로젝트로 출발했 기 때문에 운영 자금은 언론노조의 언론개혁기금에서, 공간은 언론노조 사무실 한 켠 을 이용했다. <KBS>와 <MBC>, <YTN> 그리고 <국민일보> 등에서 해직이나 퇴직한 언론인과 언론노조 파견자들이 합류했지만 당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지금의 <뉴스타파>로 조직이 확대될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2013년 초 <뉴스 타파>는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 뉴스타파>라는 이름 아래 언론노조에서 벗어나 서울 창전동에 자그마한 사무실을 얻을 수 있었다.

본격적인 현장연구를 처음 시작한 때인 2016년 3월 현재 <뉴스타파> 구성원은 대표인 김용진과 앵커인 최승호를 포함해 모두 43명이었다. 당시 <뉴스타파> 조직은 대표와 앵커를 중심으로 탐사 1팀과 탐사 2팀, 제작편집팀, 영상취재팀, 데이터팀, 데 이터저널리즘연구소, 개발팀, 경영미디어실로 구성돼 있었다. <뉴스타파>는 지속적으로 인원을 늘려가고 있었다. 회원수가 늘어 재정에 여력이 생기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 라도 필요한 인력 소요가 생기고 적임자가 있을 경우 내부 회의를 거쳐 적극적으로 인력을 충원하고 있었다.

본 연구의 연구 참여자는 모두 19명이다. 김용진과 최승호를 포함해 취재팀 소속 기자와 PD들이다. 참여자들은 스스로를 ‘시니어’ 또는 ‘주니어’라고 부르는데 시니어 는 선배 집단으로 다니던 언론사에서 해직이나 퇴직을 통해 합류한 사람들로 <뉴스타 파> 합류 전 이미 10여 년 이상의 취재 경력을 갖고 있었다. 주니어는 후배 집단으로

<뉴스타파>가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라는 명칭을 사용하며 탐사보도 전문 언론을 천명 한 이후 공개채용을 통해 기자나 PD로 입사한 사람들이다. 이들 중 일부는 다른 언론 사 경력을 갖고 있었지만 기간이 길지 않았다. 이들이 스스로를 주니어로 부르는 데 는 취재 경력이나 능력에서 시니어와 차이를 스스로 인정하는 측면도 있었다.

아래 <표 4>에 정리되어 있듯이 선배 집단의 경우 참여 경로와 출신 언론사, 언 론인 경력 등에서 다양했지만, 후배 집단의 경우는 사실상 탐사보도를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다. 19명 가운데 선배와 후배 집단은 각각 11명과 8명이다.

12. 뉴스타파가 첫 보도를 내보낸 날짜는 2012년 1월 27일로, 이날 세 건을 보도했는데 ‘10.26 투 표소 변경 … 선관위의 거짓말 Part.1’, ‘10.26 투표소 변경 … 선관위의 거짓말 Part.2’, ‘MB 임기 말 14조 무기도입 추진 … 미국의 압력 의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