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탐욕을 억제하는 금욕적 정신이었다. 즉 열정은 감정적으로 터져 나오는 충동 이 아닌 엄격한 규율의 교리로서 복음에 복종하고 신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가르친다 (최장집, 2013, p. 84). 따라서 베버가 말하는 열정은 신념에 대한 헌신을 바탕으로 하 면서도 이성에 의해 규율 되는 심리적 상태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며, 그렇기 때문 에 객관적인 태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베버는 저작 어디에서도 신념의 배제나 가치 중립이 객관적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베버는 내면의 신, 즉 소명의 대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있어서는 제약을 두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든 소명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가 헌신하고자 하는 목표는 민족 또는 인류를 지향할 수도 있으며, 사회적 윤리적 또는 문화적, 현세적 또는 종교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진보- 이것이 어떤 의미이든 간에 강한 믿음에 차 있을 수도 있고 또는 이런 종류의 믿음을 냉철히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하나의 이념에 헌신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으며 아니면 이념에 헌신한다는 이런 생각 자체를 원칙적으로 거부하면서 일상 생활의 외적 목표에 헌신하고자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이든 하나의 신념이 있어야만 합니다(Max Weber, 1919/2011, pp. 108- 109).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다. 열정과 책임, 그리고 균형감각의 이상적인 조합이 당시 독일 사회에 만연하던 정치적 아마추어리즘을 극복하는 길이었다.
“정치에 대한 헌신은 열정에서만 태어나고 열정에서만 자양분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열정적 정치가의 특징인 강한 정신적 자기 통제력은 거리감에 익숙해짐으로서만 가능한 것이며, 이러한 정신적 자기 통제력이 그를 단순히 비창조적 흥분에만 빠져 있는 정치적 아마추어들로부터 구분하는 자질이다(Max Weber, 1919/2011, p. 105).
균형감각은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의미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적 집중과 평정 속에서 상대는 물론 나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흥분 상태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관심이나 초연도 아니다. 흥분은 이성의 통제를 받지 않은 상태지만 무관심이나 초연은 행위의 내적 발판인 열정이 없기 때문이다.
균형감각은 둘 또는 그 이상의 적절한 안배를 의미하는 중립도 아니다. 현실 정치에서 주관적으로 볼 때 상충되는 견해들을 중재하는 것이 둘 중 어느 하나를 편드는 것만큼이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베버는 이것은 과학적 객관성과는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과학에서 중간 노선은 좌파나 우파의 극단적인 정파적 이상들에 비해 “머리카락 한 올 굵기만큼도 진실에 가깝지 않다”는 것이 베버의 생각이었다(Max Weber, 1904/2011, p. 41). 연구자는 베버가 말하는 균형감각은 전쟁터에서 병사가 취해야 할 사주경계와 같은 자세로 냉철함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거리감의 상실은 이런 냉철함을 잃은 상태인 것이다. 어떤 치명적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를 물리적 강제력을 행사하는 정치가가 이성에 의해 통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책임하게 또는 자기 자신을 위해 권력을 행사한다면 이는 권력에 ‘의지해서’ 사는 생업 정치가의 모습인 것이다.
<직업으로서의 학문> 강연에서도 베버는 사실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학문을 하는데 있어 “정열 없이 하는 일이란 무가치” 하다며 열정을 강조했고, 학자가 학문을 해야 하는 이유가 “진보해야 하는 운명에 놓여있기” 때문이라며 책임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학자가 균형감각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베버는 이것을 가치자유라는 방법으로 말하고 있다.
자질(열정, 책임, 균형감각)만으로 소명을 완수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베버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는 자질을 이끌어줄 윤리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정치 행위의 윤리적 원칙을 두 가지로 나누는데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였다. 신념윤리는
종교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올바른 행동을 하고 그 결과는 신에게 맡긴다”는 원칙이고, 책임윤리는 “우리는 우리 행동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원칙이다.
만약 순수한 신념에서 나온 행위의 결과가 나쁜 것이라면, 신념윤리를 원칙으로 하는 사람은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 세상 또는 타인들의 어리석음, 아니면 인간을 그렇게 만든 신의 책임이라고 말할 것이지만, 반면에 책임윤리를 원칙으로 하는 인간은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릴 것이다. 책임윤리는 행위자가 자신의 결정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를 상상하고 그가 원래 바라던 목표와 관련해 그것이 어떤 차이를 가져올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려 깊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베버는 인간 행위를 네 가지 이념형으로 구분했는데, 신념윤리는 가치 합리적으로 규정된 행위, 그리고 책임윤리는 목적 합리적으로 규정된 행위와 동일한 내용이다(Max Weber, 1976/2011, pp. 237-240).
정치행위에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균형의 특수성은 정당한 폭력이라는 수단에서 출발한다. 폭력이라는 특수한 수단과 손을 잡는 자는 누구든지 그 수단이 가져오는 특수한 결과들에 직면하게 된다. 베버에게 국가는 정당한 또는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물리적 강제력(독일어로는 ‘physische Gewaltsamkeit’인데 물리적 폭력이라는 뜻도 담고 있음)이라는 수단에 기반하여 성립되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 관계일 뿐이다(Max Weber, 1919/2011, p. 21). 따라서 국가가 존재하려면 피지배자는 지배 집단이 주장하는 권위에 복종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국가는 무정부상태로 빠지게 된다. 물론 강제력이 국가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수단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베버는 국가를 그것이 가지고 있는 강제력이라는 특정 수단을 준거로 정의함으로써 근대사회로 와서 국가만이 물리적 강제력을 독점했고 물리적 강제력을 사용할 권리의 유일한 원천이 되면서 국가와 강제력의 관계가 특히 긴밀해졌음을 말하고자 했다.
친족이나 사적 조직체들의 강제력은 점점 비정상적인 수단이 되어 갔고 이들이 물리적 강제력을 행사하고자 한다면 국가가 정한 범위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가의 역할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정치행위는 권력 투쟁이고 정치의 과업들은 폭력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완수될 수 있는 것, 이것이 베버가 생각하는 정치의 본질이다. 따라서 권력과 폭력을 수단으로 하는 정치에 뛰어드는 사람은 “악마적 세력과 계약을 맺는 것”으로, 정치의 지고지순한 대의가 치명적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폭력이라는 악마적 수단에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정치 권력이 경제 권력이나 문화 권력 등 다른 유형의 권력들과 차별화되는 점인데, 다른 권력들도 현실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합법적 폭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정치를 직업으로 삼겠다는 사람이면 누구나 상기한 윤리적 역설들을 자각하고 있어야 하고 또한 이 역설들의 중압감에 눌려서 자신이 변질된다면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는 모든 폭력성에 잠복해 있는 악마적 힘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Max Weber, 1919/2011, p. 133).
정치가는 권력을 목표로 활동하는 사람으로 권력 본능은 정치가의 지극히 정상적인 성질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정치가는 때로는 “자신들이 보통 사람들 위에 있다”는 권력감에 빠지게 된다(Max Weber, 1919/2011, p. 103). 때문에 권력감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이 직업 정치 세계에서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그것이 정치를
‘위해서’ 사는 길이며 그 실천은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의 균형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대안적 리더십에 목말라 했던 독일 사회에 내놓은 베버의 처방은 소명의식이었다.
소명의식이 있는 사람은 자아 내부 심연으로부터 형성된 신념을 가진 인격체로서 냉철한 안목으로 현실을 직시하고 일상을 책임윤리적으로 통일시켜 나가는 인간인 것이다.
성숙한 인간이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진정하고 그리고 온 마음으로 느끼며 책임윤리적으로 행동하다가 어느 한 지점에 와서 “이것이 나의 신념이요. 나는 이 신념과 달리는 행동할 수 없소”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비할 바 없이 감동적인 것이다(Max Weber, 1919/2011, p. 137).
그러나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의 균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신념을 유보해야 해야 하거나 모든 희망이 좌절되는 상황에 봉착할 수도 있다.
베버의 이런 주장에 대해 불가능에 가까운 엄격한 책임을 부여하면서도 의지라는 신비로운 수단 외에는 별다른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또 이런 엄격한 요구들의 실천적 결과는 오히려 내재적 갈등 때문에 고민하면서 신념을 행위로 쉽사리 옮기지 못하는 무기력한 자아로 나타날 수도 있다(김성호, 2003).
베버는 그럼에도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인간 사회는 없었을 것이며, 이런 도전은 정치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해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