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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Ⅱ-1> 남한의 평화체제 제의 변화과정

구분

시기 박정희정부 전두환정부 노태우정부 김영삼정부 김대중정부 노무현정부

당사자

남북 불가침 협정(’74.6) 3당국 (남북·미) 회담(’79.7)

남북평화협정 (’90.8)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3원칙 (’95.8) 남북당사자 해결

한반도냉전 구조 해체방안 (’99.5)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구상 (’03.2)

조건 또는 기타 사항

남북한 당사자 해결원칙에 입각 한 정전협정 대체 방안 모색 용의 (’76.5)

정전협정유지하에 군비경쟁 및 대치 상태 해소 (’82.1)

정전협정을 항구적 평화체제 대체 용의 표명 (’88.10) 남북기본합의서 5조 (’92.9)

남북합의서 존중 관련국의 협조와 뒷받침

남북화해협력,

미·일의 대북 관계개선,

북한의 대외개방 환경조성,

비핵화 및 재래식 군비통제,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 의 전환

선 북핵문제해결 후 평화협정체결 (남북당사자, 국제사회지지 보장)

전환시키”기 위해 ‘외국군대 철수와 남북군대 축소’와 더불어 ‘조선의 평화적 방도를 강구하기 위한 극동회의 소집’을 제의하였다. 한국 전쟁이후 전후복구가 최우선적 과제가 될 수밖에 없었던 북한정권 으로서는 내부체제 강화를 위해 방어적·선전적 차원에서 평화협정 을 제의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외군(미군)철수와 남북 군대 축소는 이후 북한이 주장하는 모든 제의에서 각각 대미관계와 대남관계에 서의 핵심목표로 꾸준하게 제시되었다.

1962년 10월 23일 최고인민회의 제3기 제1차 회의에서 북한은 내

각수상 김일성 연설을 통해 ‘남북 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하였다. 김 일성은 ‘미국군대 철수와 남북 평화협정 체결 및 무력 감축(각각 10만명 이하)’이 ‘연방제 통일’에의 ‘중요한 첫 걸음’이라고 강조하 였다. 당시 남한에서 4·19학생혁명(1960)과 5·16군사혁명(1961)이 발생하자, 북한은 조선로동당 제4차 전당대회(1961.9)를 통해 3단 계 통일방식17을 수립한 바 있다. 이후 북한은 ‘미제를 타도하기 위 한 민족해방 투쟁’과 ‘반동정권을 퇴진시키기 위한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달성해야, 남북한의 ‘인민정권’이 ‘합작(평화)통일’을 이룩 할 수 있는 것으로 주장해왔다. 남북평화협정 체결은 이 같은 남한 의 정치적 상황변화를 공산화통일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통일 전선전술의 일환으로 제안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17 _ 북한은 제1단계 ‘민족해방’을 위해서는 주한미군 철수(1974년 3월 이후부터는 대미 평화협정 체결 → 주한미군 철수 → 한·미 상호방위조약 폐기의 순서/

1988년 이후부터는 신뢰구축 → 북남무력감축 → 주한미군 철수 → 평화협정 체결)를, 제2단계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위해서는 60년대 ‘통혁당’같은 전위당 구축과 통일전선체 형성 → 남조선혁명 → ‘인민정권’출범의 순서를, 제3단계

‘조국통일’을 위해서는 남북 「정치협상회의」개최를 통한 연방제 통일의 순서로 발전시킬 것을 강조해 왔다. 허문영, “북한의 대남 및 통일정책,” 󰡔북한외교정책󰡕

(서울: 서울프레스, 1995), pp. 131~172.

(2) 북·미 평화협정

1974년 3월 25일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3차 회의에서 북한은 「미합

중국 국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북·미 평화협정’18 체결을 제안 하였다. 당시 닉슨 독트린과 파리협상으로 주월미군 완전철수

(1973.3.19)와 베트남 공산화통일(1975.4.30)이 가시화되자, 이에 고

무된 북한이 한반도 공산화통일에 최대 걸림돌인 주한미군 철수에 주력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은 1974년 제29차 유엔총 회에서 남한으로부터 유엔군을 철수시키려는 결의안을 제출하여 찬반 동수인 48:48의 지지를 얻었고, 1975년 10월 제30차 유엔총회 에서 유엔군사령부 해체와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결의안을 제출하 여 51:38로 지지를 이끌어 냈다. 북한은 대미평화협정체결 → 유엔 사 해체 및 주한미군 철수 → 남한정권 타도 → 한반도공산화 통일 의 수순을 적극 모색하였다.

(3) 북·미 평화협정과 남북 불가침선언

1984년 1월 10일 중앙인민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연합

회의에서 북한은 ‘서울당국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남북불가침 공 동선언 및 북·미 평화협정의 병행체결’의 ‘3자회담’19을 제안하였다.

18 _ 평화협정의 주요내용은 ① 상호불가침서약 및 직접 무력충돌 위험제거, ② 무력 증강 및 군비경쟁 중지, ③ 한국주둔 외국군으로부터 유엔군 모자 제거 및 완전 철수, ④ 외국군에 의한 조선의 군사기지화 및 작전기지화 방지 등이다. “최고 인민회의 제5기제3차 회의(1974.3.25)에서 채택된 미합중국 국회(상하 양원)에 보내는 편지,” 허문영 외, 󰡔한반도평화체제: 자료와 해제󰡕, pp. 252~254.

19 _ 3자회담의 주요 내용은 ‘북한과 미국 사이에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미군을 남조

선에서 철거시키며, 북과 남 사이에 불가침 선언을 채택’하는 것이다. “중앙인민 위원회·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연합회의, 서울당국에 보내는 편지,” 허문영 외, 위의 책, pp. 239~240.

이는 당시 3개월 전에 한국대통령의 암살을 기도했던 버마 랭구운 테러사건으로 인해 북한에 대한 국제여론이 극도로 악화되자, 한·

미가 제의했던 3당국회담(1979.9.1)과 남북불가침협정(1974.6.18 박 정희대통령 연두기자회견)에 응하는 모습으로 국제적 비난을 모면 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북한은 여전히 파리 협상을 준용하여 주당사자인 미국과는 주한미군 철수를 이끌어 내 기 위한 평화협정을, 종속적 당사자인 한국과는 남북 군비축소를 이루기 위한 불가침선언을 다룬다는 자세를 견지하였다.

1988년 11월 7일 중앙인민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정무

원 연합회의를 통해 북한은 ‘포괄적 평화방안’을 제의하였다.20 그 주요 내용은 북·미 평화협정과 주한미군 철수(’91년말까지 3단계 철수완료), 남북한 불가침선언과 남북간 무력축감(’91말까지 3단계 군축, ’92년이후 병력은 각각 10만명 유지)으로 제시되었다. 당시 북한은 1985년에 등장한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의 개혁·개 방정책으로 동구공산국가의 몰락과 베를린 장벽붕괴(1989.11.9), 몰타(Molta)냉전종식 선언(1989.12.25), 동서독 통일(1990.10.3) 등 한국전쟁 이래 최악의 국제정세와 경제난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에 북한은 발빠르게 대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책조정 차원만으 로는 대세를 거역할 수 없었다. 따라서 북한은 남북총리급회담에 응할 수밖에 없었고, 1991년 9월 30일 남북 유엔동시가입과 12월 13일 남북기본합의서에 합의하였다. 이후 북한은 남북한 사이에 불 가침 및 화해·협력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하기 시작 하였다. 그리고 유엔과 북한간의 비정상관계 청산 차원에서 정전체

20 _ 김태영, 󰡔애국애족의 통일방안󰡕 (평양: 평양출판사, 2001), p. 174.; 심병철, 󰡔조국 통일문제 100문 100답󰡕 (평양: 평양출판사, 2003), pp. 95~97.

제의 평화체제 전환 및 유엔사 해체, 대미 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수를 더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4) 새로운 평화보장체계와 북·미 잠정협정

한편 북한은 1991년 3월 유엔사(UNC)측 군사정전위 수석대표에 한국군 장성(황원탁 소장)이 임명된 후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를 중단한 상태였다. 그러나 유엔사 해체 및 주한미군 철수가 전혀 이 뤄지지 않자, 북한은 중립국감독위원회(이하 “중감위”) 체코대표부 철수(93.4), 군사정전위원회(이하 “군정위”) 북한대표단 철수(94.4),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 설치(94.5), 군정위 중국대표단 철수

(94.12), 중감위 폴란드대표단 철수(95.2), 판문점 중감위 건물 폐쇄

조치 발표(95.5) 등으로 정전협정체제를 무력화시켜 나갔다. 이 와 중인 1994년 4월 28일 북한은 외교부 성명을 통해 북·미 평화협정 체결과 정전기구를 대체할 ‘새로운 평화보장체계 수립’을 위한 대 미협상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2년 뒤 1996년 2월 22일 외교부대변 인 담화를 통해 ‘북·미 잠정협정’21체결을 제의하였고,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 대변인 담화를 통해 ‘비무장지대 유지 및 관리임무 포기’를 선언하였다. 북한이 평화협정의 과도적 조치로서 북·미 잠 정협정 체결을 제안한 것은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및 남북 군사공동 위원회 발족과 병행하여 북·미 잠정협정 체결 및 북·미 군사공동기 구 구성을 이뤄보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북한이 탈냉 전기 대미관계정상화를 통해 체제생존을 보장받으려는 의도에서 돌파전략에 기초한 벼랑끝 전술을 구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21 _ 잠정협정의 주요내용은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의 관리, 무장 충돌과 돌발사 건 발생시 해결방도, 군정위를 대신하는 조미 공동군사기구 구성 등이다.

북한은 평화협정 체결당사자에서 남한을 배제하고 있는 데, 남한이 정전협정의 서명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뿐만 아니라 남한으로부 터의 자유화 바람을 차단하고 체제결속에 주력하려는 의도도 있었 던 것으로 판단된다.

나. 현황 : 북·미 불가침조약과 평화체제 수립

2000년대 들어와 북한은 3가지 제안을 보여주었다. 2000년 10월 12일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의 특사 방미시 합의·발표된 「북·

미 공동코뮤니케」를 통해 평화협정체결을 위한 4자회담 유용성에 견해를 같이하였다. 2002년 10월 25일 외무성대변인 담화를 통해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체제보장을 전제로 한 ‘북·미 불가침조 약’ 체결을 제의하였다.22 그리고 2005년 7월 22일 외무성대변인 담화를 통해서는 한(조선)반도 평화체제 수립을 주장하였다.23 북 한이 북·미 양자회담이 아닌 다자인 4자회담에도 동의한 것은 당 시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미관계개선의 돌파구가 열리는 기회를 활용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2002년 북한이 대북 핵 불사용을 포함한 불가침을 법적으로 보장해 줄 것을 제의한 것은 부시행정부의 대북정책 조정이 완료된 상황에서 북·미대화 재개를 기다리던 북한의 기대와 달리, 미국 켈리 특사가 방북(10.3~5)하 여 고농축우라늄(HEU)핵무기개발문제를 제기하는 등 대북 강경 정책을 전달하자, 위협감을 느낀 가운데 제기하였던 것으로 보인

22 _ 조선외무성대변인 담화, “조미사이의 불가침조약체결이 핵문제해결의 합리적 이고 현실적인 방도,” 󰡔조선중앙방송󰡕, 2002년 10월 25일.

23 _ 조선외무성대변인 담화, “미국이 정전유지정책을 평화체제수립에로 전환할 것,” 󰡔조선중앙통신󰡕, 2005년 7월 22일; 허문영 외, 󰡔한반도평화체제: 자료와 해제󰡕, pp. 183~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