碩士學位論文
道詵의 唯心論的 禪思想과 그 意味
國民大學校 大學院 國 史 學 科
韓 太 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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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詵의 唯心論的 禪思想과 그 意味
指導敎授 金 杜 珍
이 論文을 碩士學位 請求論文으로 提出함 2000年 12月 日
國民大學校 大學院 國 史 學 科
韓 太 逸
2 0 0 0
韓 太 逸 의
碩士學位 請求論文을 認准함
2000年 12月 日
審査委員長 朴 宗 基 審 査 委 員 金 杜 珍 審 査 委 員 張 錫 興
國民大學校 大學院
目 次
論文槪要
1. 머 리 말 ……… 1
2. 道詵의 生涯 ……… 4
3. 唯心論的 禪宗思想의 登場 ……… 13
4. 道詵의 唯心論的 禪思想 ……… 20
5. 唯心論的 禪思想의 佛敎史的 意味 ……… 26
6. 맺 음 말 ……… 31
參考文獻 ……… 34
附 錄 ……… 42
論 文 槪 要
本稿는 新羅 下代의 禪僧이었던 道詵의 禪思想을 그의 風水地理說과의 관련 속에서 살펴 본 것이다.
羅末麗初의 사회변동은 당시 地方社會의 실력자로 등장한 豪族勢力을 중심으로 이 루어졌다. 이 때 지방호족의 세력형성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당시 유행하였던 禪宗과 風水地理說이었다. 곧 선종의 個人主義的인 성격과 풍수지리설의 國土再計劃案 으로서의 성격은 지방호족의 세력형성에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그런데 선종이나 풍수지리설의 유행은 서로 무관하지 않았다. 풍수지리설에 정통한 것으로 알려진 도선은 신라 하대 桐裏山門에 속한 선승이었으며, 그 외에 당시 선승들 가운데는 風水地理를 이해하였던 경우가 많았다.
도선의 家門은 본래 中央의 貴族이었으나 신라 하대에 치열하게 전개된 王位繼承戰 에서 武烈王系와 그 정치적 입장을 함께 하다가 落鄕하여 靈岩地方의 호족세력으로 성립하게 되었다. 그는 出家하여 처음에는 華嚴을 익히다가 敎學佛敎의 한계를 느끼고 桐裏山門의 開祖인 慧徹에게 나아가 당시 새롭게 유행하던 선종사상을 습득하였다.
도선의 행적을 살펴보면 적어도 혜철의 생존시까지는 동리산문과 밀접하게 관련되 어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受戒 이후 도선은 각처를 遊歷하면서 다수의 寺刹을 開 創하였는데, 이 때 그가 세운 사찰들은 대부분 혜철의 영향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그 가 玉龍寺에 주석하기 이전에 개창한 米岵寺・道詵寺・三國寺는 모두 혜철과 관련되 었기 때문이다.
도선은 景文王 4년에 옥룡사에 주석하면서 독자적인 禪門을 세워 활동하였다. 이러 한 그의 행적은 景文王 元年 혜철의 入寂과 무관하지 않다. 도선은 <終焉之志>를 품고 옥룡사에 주석하면서 門下에 제자들을 받아들였다. 이는 그가 혜철의 입적을 계기로 스스로 선문을 세우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 이듬해에 이루어지는 雲岩寺의 창건은 옥룡사를 중심으로 한 道詵系 세력의 확대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도선의 생존시에 도 선계는 光陽과 求禮지역뿐만 아니라 潭陽지역에까지 그 세력을 확대시키고 있었다.
한편 羅末麗初의 禪僧들 가운데 風水地理을 이해하였던 경우가 상당수 있다. 그들은 주로 사원을 개창하는 과정에서 풍수지리적인 지식에 의해 그 基地를 구하였다. 대표 적으로 曦陽山門의 개조인 道憲은 鳳巖寺를 세우는 과정에서 사원을 진압하기 위해 丈六玄金像을 주조하여 봉안한다던가, 地勢를 누르기 위해 瓦 과 鐵佛像을 設하는 등 풍수지리에 밝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도헌의 사상은 올바른 마음의 깨달음, 곧 心識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彌勒으로 관념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그의 사상이 唯識 思想과 관련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眞鑑 慧昭와 朗空 行寂, 眞鏡 審希, 雲門寺의 寶壤 등도 풍수지리에 유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들의 사상경향도 유식사상을 이 해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이처럼 유식사상을 이해하였던 선승들에게 나타나는 풍수지 리적인 인식은, 그들이 유식사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풍수지리를 받아들였음을 보 여준다.
風水地理說은 도선의 핵심사상이었다. 그의 사상경향은 <眞空不空>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眞空이면서 空이 아닌 非有非無의 中道實相을 드러내었다. 그것은 禪的인 唯識 思想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도선은 根機의 차별을 인정하거나 平常心을 강조하였 는데, 이를 통해 그의 사상 안에서 유식사상이 중시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하 여 도선의 선사상은 禪宗思想 안에 唯識, 즉 法相宗思想을 아우르는 唯心論的인 경향 으로 성립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도선의 사상경향은 동리산문의 사상경향과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즉 동리산문의 선종사상 자체가 유식사상을 중시하는 유심론적인 경향으 로 정립되어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도선의 선사상도 유심론적인 경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도선의 제자인 慶甫도 유식사상을 강조하였는데, 그것은 역시 도선의 영향으 로 이해할 수 있다.
풍수지리설이 유독 도선에게서 강조될 수 있었음은, 그의 사상이 유심론적인 경향으 로 성립하였음과 무관하지 않다. 도선의 사상경향은 유식사상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現 象界를 인식하는데에 소홀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그것은 地勢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 山川의 順逆形勢를 살피려는 그의 풍수지리설은 구체적인 地相을 드러내려는 것이므로 法相에 대한 인식과 서로 통할 수 있다. 곧 全國山水의 順 逆形勢를 살펴 정해진 明堂으로 재편하려 하는 풍수지리설은 유심론적인 그의 사상경
향을 중심으로 형성될 수 있었다. 도선의 풍수지리설에서는 國土의 합리적인 운영방안 으로 裨補를 내세웠다. 비보사상은 도선 풍수지리설의 특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비보를 내세우기까지 합리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지만, 비보 이 후 그것은 圖讖으로 흘러 더 이상의 발전을 보지 못하였다. 이는 유심론적인 그의 사 상경향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유심론적인 그의 선사상은 유식사상을 중시했기 때문에 풍수지리설을 형성시킬 수 있었지만, 현상계의 모습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유식사상과 그것을 초월하려는 선종사상은 서로 입장이 모순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비보에서 도참으로 흐르게 되 었다.
1. 머 리 말
羅末麗初에 나타난 思想界의 변화로 禪宗의 유행을 지적할 수 있다. 禪宗思想은 개 인주의적인 경향을 지녀서, 당시 중앙정부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 했던 地方豪族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선종사상과 함께 지 방호족의 세력형성에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던 것으로 風水地理說이 중요시되어 왔다.
풍수지리설은 정해진 明堂을 중심으로 한 國土再構成案의 성격을 띠었으므로, 慶州 중 심의 지역관념에서 벗어나려 했던 지방호족에게 적극적으로 수용될 수 있었다.
당시에 유행하였던 풍수지리설에 대해서는 道詵(827~898)의 그것이 주로 알려져 왔 다. 곧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王建에게 수용되어 지방호족을 아우르면서 高麗를 建國하 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이해되었다. 그러나 도선은 桐裏山門의 禪僧이었음을 유념하여 야 한다. 따라서 도선 풍수지리설의 진면목은 그의 禪思想과의 관련 속에서 추구될 필 요가 있다.
도선에 대한 연구는 일찍부터 이루어져 왔다. 日人 學者인 今西龍은 관련자료의 분 석을 통해 도선의 행적이 후대에 윤색되는 과정을 살핀 바 있다.1) 하지만 이 분야의 본격적인 연구는 李丙燾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먼저 圖讖과 風水地理의 개념을 정리 하면서, 풍수지리설을 미신적인 도참사상과 연결하여 地理圖讖으로 규정하였다. 그리 하여 도선은 圖讖的 형식에 의해 地理衰旺說과 地理順逆說 내지 寺塔裨補說을 말하였 고, 禪僧으로서의 면모 이외에 術僧 즉 地理圖讖家로서 陰陽地理에 관한 著述을 남긴 데 특색이 있다고 하였다.2) 그의 연구는 풍수지리설의 유행을 高麗時代 政治勢力과의 관계 속에서 분석함으로써 이후의 연구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후 李龍範은 종래 부정적으로 인식되던 풍수지리설이 나말려초의 사회전환기에 國土再計劃案的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견해를 제기하였으며,3) 이는 崔柄憲에 의해
1) 今西龍,〈新羅僧道詵に就きて〉(《東洋學報》2-2, 朝鮮學會, 1912 ;《高麗史硏究》, 近澤書店, 1944).
2) 李丙燾,《高麗時代의 硏究 — 特히 圖讖思想의 發展을 中心으로 — 》(乙酉文化社, 1948 ; 亞細亞文 化社, 1980).
3) 李龍範,〈處容說話의 一考察 — 唐代 이슬람商人과 新羅 — 〉(《震檀學報》32, 震檀學會, 1969).
서 더욱 계승 발전되었다. 최병헌은 一行의 地理法과 연결되는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국토재계획안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그것은 한반도의 역사무대를 동남부의 慶州 중심에서 중부지방인 松嶽으로 옮기게 함으로써, 王建이 後三國을 統一 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나말려초의 禪師들에게 풍수지리적 인 인식이 폭넓게 나타났음에 주목하여, 당시의 禪師들은 일반적으로 풍수지리에 대한 지식을 갖추었다고 보았다.4) 이 외에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도참이 아닌 密敎의 영향으 로 나타났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徐閏吉에 따르면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裨補思想에 중심이 있으며, 도선뿐 아니라 그와 法脈이 연결되는 慧徹이나 智藏도 密敎僧이라고 파악하였다. 곧 그는 도선의 비보사상은 밀교의 擇地法에 따라 나온 것으로 도참과는 구별되는 密敎的 法用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5)
한편 도선의 풍수지리설을 그가 속한 桐裏山門의 사상적 특성과 관련하여 파악한 연구가 있어 주목된다. 金杜珍은 동리산문의 禪宗思想은 唯識, 즉 法相宗思想과 밀접 한 관련이 있으며, 풍수지리설이 도선에 의해서 정리되는 것은 동리산문의 이러한 사 상경향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도선의 嗣法弟子인 慶甫가 後百濟 甄萱과 연결되었음에 주목하여, 後三國 戰亂期에 玉龍寺는 물론 동리산문에 이르기까 지 견훤을 檀越로 하였다고 지적하였다.6)
이상의 연구성과를 통해 道詵의 風水地理說에 대한 이해는 상당히 진척되었지만, 오 히려 그의 禪思想과의 관련 속에서 그것을 천착하려는 시도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 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에 本稿에서는 도선이 桐裏山門의 禪僧이었음에 주목하여 그의 禪思想이 唯心論的인 경향으로 성립되었음을 밝혀보고자 한다. 나아가 唯心論的인 그 의 사상경향은 唯識, 즉 法相宗思想을 아우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바탕으로 그의 風水地理說이 형성될 수 있었음을 이해하려고 한다.
기존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本稿에서는 다음의 문제들을 究明하고자 한다. 첫째, 道詵의 행적을 검토하면서 그가 속한 桐裏山門과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둘
4) 崔柄憲,〈道詵의 生涯와 羅末麗初의 風水地理說—禪宗과 風水地理說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韓國史硏究》11, 韓國史硏究會, 1975).
5) 徐閏吉,〈道詵과 그의 裨補思想〉(《韓國佛敎學》1, 韓國佛敎學會, 1975) 및〈道詵 裨補思想의 淵 源〉(《佛敎學報》13, 東國大學校 佛敎學硏究所, 1976).
6) 金杜珍,〈羅末麗初 桐裏山門의 成立과 思想 — 風水地理思想에 대한 再檢討 — 〉(《東方學志》57, 延世大學校 國學硏究院, 1988).
째, 羅末麗初 禪僧들에게 나타나는 風水地理的인 인식을 그들의 사상경향과 관련하여 검토해보려고 한다. 셋째, 道詵의 禪思想에 주목하여 그것이 어떠한 경향으로 나타났 는지를 고찰해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 桐裏山門에 소속된 다른 禪僧들의 사상경향과 비교하는 과정을 거칠 것이다. 넷째, 道詵의 禪思想과 風水地理說은 어떻게 연결되었 는지에 대해서 살피고자 한다. 그리고 그의 풍수지리설이 뒤에 圖讖으로 변질된 원인 을 그의 사상경향에서 찾으려 한다.
이러한 시도를 통하여 道詵의 唯心論的 禪思想과 羅末麗初에 활동하였던 여러 禪僧 들의 사상경향을 비교함으로써, 당시 思想界의 변화와 그 재편과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史料의 부족으로 추측과 비약이 적지 않다.
많은 叱正을 바란다.
2. 道詵 의 生涯
현재까지 전하는 道詵에 관한 기록은 양적으로 상당수에 이르지만, 그 대부분이 고 려시대 이후 도선의 명성에 가탁하거나 그의 行蹟을 윤색하여 기록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자료의 유포과정에서 도선은 그의 스승인 寂忍 慧徹이나 嗣法弟子인 洞 眞 慶甫, 迦智山門의 先覺 逈微, 華嚴寺의 烟起 등과 혼동되었으며, 그에 따라 그는 地 理圖讖에 정통한 神僧 혹은 術僧으로서의 성격만이 부각되었다. 그러므로 도선 관련자 료들을 史料로써 활용할 때는 상당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도선 관계 사료로서 가치가 높은 것으로는 高麗 毅宗 4년(1150)에 崔惟淸이 王命을 받아 撰述한〈光陽玉龍寺先覺國師證聖慧燈塔碑〉(이하 본문에서는〈道詵碑〉로 줄임) 가 있다.7)〈道詵碑〉의 건립에는 당시 비석 건립의 실질적인 책임을 맡았던 雲岩寺의 住持 志文을 비롯하여 도선의 法孫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8)
그런데 도선비의 건립은 이미 도선의 入寂 직후에 시도되었다. 도선이 入寂했던 해 (孝恭王 2년, 898)에 孝恭王은 그에게 了空禪師라는 諡號를 내리면서 王命으로 瑞書學 士 朴仁範에게 碑文을 撰하도록 하였다. 이때 朴仁範이 찬했다는 도선의 비문은 도선 관련 자료 가운데 가장 정확한 것이었겠지만,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끝내 돌에 새겨지 지 못하였다.9) 朴仁範 撰의 도선비문과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을 참고할 수 있다.
7) 崔惟淸이 撰한〈道詵碑〉도 道詵의 入寂(898년)으로부터 약 250여 년이 지난 이후에 撰述된 것이 므로, 그 사이에 적지 않은 윤색이 가해졌을 가능성도 간과할 수는 없다.
8) 道詵의 碑가 建立되는 과정에서 志文 등 道詵의 法孫들이 다수 참여하였음은 碑陰記의 기록을 통 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까지 전해지던 道詵에 관한 가장 자세한 기록이〈道詵 碑〉의 내용에 반영되어졌을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므로 道詵의 행적은 이〈道詵碑〉의 내용 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살펴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9) 崔惟淸 撰,〈光陽玉龍寺先覺國師證聖慧燈塔碑〉(《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561쪽)에 門人洪寂等 懼先師之景行不傳 啣涕奉表 乞爲紀述 王乃命 瑞書學士朴仁範 爲碑文 而竟未鐫于石 이라고 하였다. 朴仁範이 撰한〈了空禪師碑〉가 건립되지 못한 이유를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은 道詵의 檀越勢力과 관련지어 생각될 수 있다. 道詵의 檀越과 관련해서〈道詵碑〉에는 王 建의 父인 龍建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後代에 高麗王室에 의해 윤 색된 기록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오히려 道詵이 활동했던 지역은 주로 全羅南道 一帶였으며, 後三國 戰亂期에 이 지역 豪族勢力은 대부분 後百濟의 甄萱과 연결되어 있었다. 道詵의 弟子인 慶甫는 中國에서 歸國하는 과정에서 甄萱의 도움을 받고 있으며, 그가 玉龍寺로 나아가는 모습도
<A> 湖南道 秋城郡(현재의 潭陽)의 法雲山에 玉泉寺가 있는데, 곧 예전의 淨源寺이다.
先覺國師 道詵公이 始創한 3,000 裨補 중의 하나이다. (중략) 朴仁範 學士가 王命을 받 들고 지은〈了空禪師碑〉에 의하면 弟子 10餘人을 열거하였고, 그 가운데 한사람이 法雲山 淨源寺에 居하고 있었다. 了空禪師는 道詵의 諡號로, 新羅 孝恭王이 了空이라 諡號를 내리고 塔名을 證聖慧燈이라 하였으며, 瑞書學士 朴仁範에게 命하여 碑文을 撰하도록 하였다. 또한 高麗 仁宗은 先覺國師라 追封하였고, 崔惟淸으로 하여금 碑文 을 짓게 하였다. 그렇다면 지금의 玉泉寺는 淨源寺로 扁額을 바꿨음이 분명하다.10)
위의 기록은 朝鮮後期의 高僧인 栢庵 性聰(1631~1700)이 秋城郡(담양)의 法雲山 淨 源寺가 玉泉寺의 前身임을 고증하기 위해 朴仁範이 撰한〈了空禪師碑〉의 碑文을 읽 고 인용한 부분이다. 그가 보았다는〈了空禪師碑〉의 내용이 어떠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박인범이 撰한 비문이 조선후기까지 전해졌음을 위의 기록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11) 그렇다면 최유청은 道詵의 碑文을 찬술하는 과정에서 朴仁範이 撰한 비 문의 내용을 참고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그는 비문을 찬할 때에 그 事實의 詳細한 것을 얻어서 차례대로 기록하였다 12)고 하였으므로, 당시에도 전했을 박인범의 비문내 용을 반영하였을 가능성이 크다.13)
甄萱의 배려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곧 後三國 戰亂期에 玉龍寺는 甄萱과 연결되어 있었다(金杜珍, 앞의 논문, 19~24쪽 및 43쪽). 아마도 朴仁範이 撰한〈了空禪師碑〉에는 道詵의 檀越로서 新羅王 室에 적대적이었던 세력과 관련된 내용이 언급되어 있었기 때문에 끝내 세워질 수 없었을 것이 다. 이러한 추측이 가능하다면, 道詵의 檀越勢力은 甄萱이거나 최소한 그와 연결된 地方豪族勢力 으로 볼 수 있을 것이며, 이들과 관련된 行蹟을 담고 있었던 까닭에 朴仁範의 碑文은 돌에 새겨 질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10) 性聰,〈湖南潭陽法雲山玉泉寺事蹟〉(《栢庵集》卷下 ;《韓國佛敎全書》卷8, 477~478쪽)에 湖南 道秋城法雲山有玉泉 卽古之淨源寺 先覺國師詵公 始創 裨補三千之一也 (中略) 按朴學士仁範奉製 撰了空禪師碑 列弟子十餘人 其一居法雲山淨源寺 了空卽詵公之諡 新羅孝恭王 贈諡了空 名塔曰證聖慧 燈 命瑞書學士朴仁範撰碑 又高麗仁宗 追封先覺國師 命崔惟淸撰碑文也 然則今玉泉 是淨源之改扁者明矣 라고 하였다.
11) 許興植,〈高麗中期 四聖의 追念과 先覺國師碑의 建立〉(《道詵硏究》, 民族社, 1999, 205~206쪽).
12) 崔惟淸 撰,〈光陽玉龍寺先覺國師證聖慧燈塔碑〉(앞의 책, 560쪽)에 得其事實之詳者 乃序次而紀 之 라고 하였다.
13) 毅宗代〈道詵碑〉의 건립도 순조롭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道詵碑〉의 陰記에 따르면, 崔惟淸은 王命에 의해 碑文을 그 이듬해(1151)에 완성하였다. 그러나 이 해에 撰者인 최유청과 書者인 鄭 가 모두 王弟 大寧侯 暻의 讒訴사건에 연루되어, 최유청은 南京留守使로 좌천되었고 정서는 東萊로 杖流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碑石은 開京 國淸寺의 뜰에 20여 년 동안 버려졌다.
그리하여〈道詵碑〉는 의종 당시에는 세워지지 못하다가, 毅宗 末年(1170)에 武臣亂이 일어나고
다음으로〈道詵碑〉를 통해 도선의 행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家系와 出生 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B> 大師의 諱는 道詵이요, 俗性은 金氏로 新羅國 靈巖人이다. 그 世系는 父祖의 史實 이 유실되었다. 혹은 이르기를 太宗大王의 庶孼孫이라고도 한다. 母는 姜氏이니, 어느 날 꿈에 어떤 사람이 明珠 1顆를 주면서 삼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姙娠하였다.14)
도선은 新羅 興德王 2년(827)에 태어났다. 俗姓은 金氏이고 靈巖人이다. 도선의 世系 와 관련하여 위의 기록은 父祖 때의 史實이 유실되었음과 그의 집안이 본래는 무열왕 의 庶孼孫이었다는 점을 特記하고 있다. 그 중 前者의 내용은 도선의 父祖 때에 그 世 系上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도선의 父祖가 활동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시기는 신라사회가 中代에서 下代로 넘어 가는 전환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 신라사회에 나타나는 변화 가운데 하나가 중대 이 래 독점적으로 왕위를 계승하던 武烈王系가 왕위계승에서 밀려났다는 점이다. 특별히 奈勿王의 後孫인 元聖王이 卽位하는 과정에서 무열왕계의 金周元이 溟州로 退去하는 모습은 중대를 지탱해 온 무열왕계의 쇠퇴라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도선의 世系가 武烈王의 庶孼孫이었다는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굳이 무열왕의 後孫으로 표현한 것은 적어도 그의 家系가 무열왕계와 무관 하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아마도 도선의 가계는 중대 말 하대 초에 전개된 王位 繼承戰에서 무열왕계와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그 과정에서 그의 가문은 落鄕하여 靈巖地方의 豪族勢力으로 성립하였을 것이다.15) 도선의 母 姜氏는 영 암지방의 토착세력 출신으로 생각되는데, 이로 보아 도선의 가계는 적어도 그의 父代 에 이르러서는 영암지방에서 地方勢力化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도선은 태어나면서부터 佛敎와 매우 친숙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母는 그를
明宗 2년에 이르러서야 光陽縣의 歲貢船으로 옮겨져 玉龍寺에 세워질 수 있었다.
14) 崔惟淸 撰,〈光陽玉龍寺先覺國師證聖慧燈塔碑〉(앞의 책, 560쪽)에 師諱道詵 俗姓金氏 新羅國靈 岩人也 其世系 父祖史失之 或云 是太宗大王之庶孼孫也 母姜氏 夢人遺明珠一顆使呑之 遂有娠 이 라고 하였다.
15) 崔柄憲, 앞의 논문(108~109쪽). 이 글에서는 道詵뿐 아니라 그의 嗣法弟子인 洞眞 慶甫 역시 金 氏이면서 靈岩 鳩林人이었음에 주목하여, 당시 靈岩地方에는 道詵과 同一親族集團이 中央으로부 터 落鄕하여 土着勢力을 형성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잉태한 이후 고기를 일체 먹지 않고, 오직 讀經과 念佛로써 佛事에 지극하였다. 도선 도 어려서부터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언제나 부처를 敬畏함이 두터웠으므로 그의 부 모는 자연스럽게 그의 出家를 허락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도선은 15세가 되던 文 聖王 3년(841)에 月遊山 華嚴寺에 들어가 大藏經을 讀習하였다. 여기서의 월유산 화엄 사는 求禮의 華嚴寺로 이해된다.16) 그곳에서 華嚴學을 익히던 도선은 신라 하대의 다 른 禪師들처럼 敎學佛敎의 한계를 느끼고, 20세에 桐裏山門의 開祖인 慧徹(惠哲)의 門 下에 나아가 이른바 <無說之說 無法之法>의 禪思想을 習得하였다.17)
문성왕 11년(849)에 穿道寺에서 具足戒를 받은 도선은, 이후 38세에 玉龍寺에 주석하 기까지 약 15년간 雲峯山과 太伯岩 등지를 遊歷하면서 禪修行을 하였다. 도선이 受戒 를 받은 穿道寺는 桐裏山門에 소속된 사찰로 이해되며,18) 그가 혜철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는 기록19)은 수계 당시 도선이 혜철의 영향 아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면 受戒 이후에 이어지는 그의 선수행 역시 그 연장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다음의 기록은 수계 이후 그의 행적을 살피는데 도움을 준다.
<C> 癸巳(高麗 明宗 3년, 1173) 6월 14일 判許와 아울러 法孫들이 傳持하고 있는 4곳의 寺院도 새겨둔다. 大中 10월(文聖王 18년, 856) 丙子에 祖師가 神人과 만난 嶺에 庵子 를 結成하여 米岾寺를 開創했으며, 大中 12년(憲安王 2년, 858) 戊寅에는 求禮縣의 道詵 寺와 더불어 神人이 모래를 모아 三國圖를 그리던 곳에 三國寺를 開創했으며, 咸通 6 년(景文王 5년, 865) 乙酉에 雲岩寺를 開創하였다.20)
도선이 開創하였다고 전하는 사찰은 무수히 많지만, 후대의 윤색이 심하기 때문에
16) 崔柄憲, 위의 논문(109쪽).
17) 崔惟淸 撰,〈光陽玉龍寺先覺國師證聖慧燈塔碑〉(앞의 책, 560쪽)에 大師嘉其聰敏 接以至誠 凡所 謂無說之說無法之法 虛中授受 廓爾超悟 라고 하였다.
18) 金杜珍, 앞의 논문(4쪽).
19) 道詵의 碑文資料는 비문의 내용이《東文選》(卷117)에 실려있던 것을《朝鮮金石總覽》上에 재인 용하여 附錄한 것과 1712년(朝鮮 肅宗 38)에 玉龍寺에서 開刊한 開刊本의 2가지 版本이 있다. 이 두 기록은 표현상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거의 동일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도선의 受戒 와 관련하여 前者의 기록에는 年二十三 受具戒於穿道寺 라고 한 것과 비교하여, 後者에는 年二 十三 受具戒於惠徹大師 라고 기록되어 있어 서로 차이가 있다. 이 점은 도선의 受戒과정이 혜철 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임을 생각하게 한다.
20) 崔惟淸 撰,〈先覺國師碑陰記〉(今西龍, 앞의 책, 111쪽)에 癸巳六月十四日 判許幷刻法孫傳持寺四 所 大中十年丙子 祖師結菴 嶺 與神人相會 開創米岾寺 十二年戊寅 開創求禮縣道詵寺 與神人聚沙 劃三國圖處 開創三國寺 咸通六年乙酉 創雲岩寺 라고 하였다.
그러한 내용을 모두 믿을 수는 없다. 위에 기록된 米岵寺 등 4곳의 사원들은 고려 중 기까지 도선의 法孫들에 의해서 傳持되었다고 전해지는 만큼, 도선 당대에 창건되었다 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들 사찰 가운데 米岵寺는 文聖王 18년(856)에 개창되었고, 道詵寺와 三國寺는 憲安王 2년(858)에 개창되었으며, 雲岩寺는 景文王 5년(865)에 세워 졌다. 도선이 옥룡사에 주석하는 864년을 기준으로 보면 米岵寺・道詵寺・三國寺의 개 창은 옥룡사에 주석하기 이전에 이루어졌고, 雲岩寺의 개창은 그 이후의 사실이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米岵寺는 도선이 神人을 만났던 곳에, 三國寺는 神人이〈三國 圖〉를 그리던 곳에 각각 창건되었다고 하여, 이들 사찰의 개창이 神人과 관련되었음 을 알 수 있다. 三國寺와 함께 같은 해에 道詵寺가 세워지는 경위도 이와 크게 다를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데, 이렇게 보면 도선이 옥룡사에 주석하기 이전에 개창한 3곳의 사찰들은 모두 神人과 관련되어 개창된 셈이다. 여기서 神人은 도선에게 풍수지리를 전수해 준 인물로〈道詵碑〉의 기록에는 異人으로 표현되었다. 이때의 이인은 도선의 스승인 혜철과 동일인물이라고 보여진다.21) 도선의 선수행이 혜철의 영향 아래에서 이 루어졌다고 할 때, 이인(혹은 神人)을 혜철로 보는 견해는 무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선이 옥룡사에 주석하기 이전에 米岵寺・道詵寺・三國寺를 개창하는 모습 은 혜철의 영향 아래에서 이루어졌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雲岩寺의 개창은 특별히 神人과의 관련이 엿보이지 않는다. 운암사의 창건배 경은 자세하지 않다. 다만 도선이 옥룡사에 주석한 바로 다음 해인 경문왕 5년(865)에 그것이 세워졌음은, 그가 옥룡사에 주석하는 정황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 다. 다음의 기록을 통해 도선이 옥룡사에 주석하는 모습을 살필 수 있다.
<D> 曦陽縣 白鷄山에 古寺가 있는데, 그 이름이 玉龍이었다. 師가 遊歷하다가 이곳에 이 르러 그 幽勝함을 좋아하여 堂宇를 改葺하고, 시원하게 여겨 終焉할 뜻을 품고 宴坐하 여 忘言하기를 35年이었다. 이에 四方에서 學徒가 구름을 좇고 그림자에 붙어오듯 하 였다. 수건과 물잔을 들고 錫杖과 신발을 받들어 弟子된 者가 항상 數百人이었다.22)
도선은 光陽의 玉龍寺에 이르러 <終焉之志>를 품고, 이후 孝恭王 2년(898)에 72세로
21) 崔柄憲, 앞의 논문(115~120쪽).
22) 崔惟淸 撰,〈光陽玉龍寺先覺國師證聖慧燈塔碑〉(앞의 책, 561쪽)에 曦陽縣白鷄山 有古寺 曰玉龍 師遊歷至止 愛其幽勝 改葺堂宇 灑然有終焉之志 宴坐忘言 三十五載 於是 四方學徒 雲趨影附 執巾
奉杖 爲弟子者 常數百人 이라고 하였다.
入寂할 때까지 이곳에 머물며 禪法을 펼쳤다. 이후 옥룡사에는 소문을 듣고 學人들이 四方으로부터 운집하여 그의 門下에는 洞眞 慶甫23)와 洪寂 등 수백 명의 제자들이 모 여들었다. 도선이 주석한 이후 옥룡사는 그 寺勢가 크게 일어났다.
옥룡사에 주석하기 이전에 이미 도선은 禪師로서 그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24) 그러 나 도선이 <終焉之志>를 품고 門下에 弟子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옥룡사에 주석한 이 후였다. 이 점은 이전까지 그의 행적이 주로 혜철의 영향 아래에서 이루어졌음과 비교 하여 구별된다. 도선의 행적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변화는 혜철의 入寂과 관련하여 이 해할 수 있다.
혜철은 景文王 元年(861)에 入寂하였는데, 도선이 옥룡사에 주석한 것은 그로부터 3 년 뒤의 일이다. 그렇다면 도선은 혜철의 입적을 계기로 스스로 禪門을 세우려는 뜻을 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한 모습이 碑文에는 <終焉之志>를 품고 옥룡사에 주석 하여 門下에 弟子들을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표현되었을 것이다.25) 그 이듬해의 운암사 개창은 옥룡사를 중심으로 한 道詵系 세력의 확대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도선이 이전에 개창했던 米岵寺・道詵寺・三國寺의 사찰들도 도선계로 귀속되었다. 왜 냐하면 이들 사찰은 고려 중기까지 도선의 法孫들에 의해 傳持되었기 때문이다. 이 외 에 담양의 淨源寺(玉泉寺)도 도선의 생존시에 도선계에 속했던 사찰이었다. 朴仁範이 撰한〈了空禪師碑〉에는 도선의 제자 10여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중 한 명이 정원사에 머물렀다고 하였다(사료 A참조). 도선의 제자 수백 명 가운데, 비문에 이름이
23) 慶甫는 白鷄山의 道乘和尙에게 나아가 弟子가 되었는데, 이때의 道乘은 道詵이라고 이해된다(金 映遂,〈曹溪禪宗에 就하여—五敎兩宗의 一派, 朝鮮佛敎의 根源—〉,《震檀學報》9, 震檀學會, 1938, 153쪽). 이 글에 따르면, 慶甫가 白鷄山에서 道乘和尙의 제자가 되었을 때와 그 후 그가 華 嚴寺에서 具足戒를 받고 白鷄山으로 다시 돌아간 시기는 道詵이 玉龍寺에 住錫하고 있던 시기이 므로, 道乘은 곧 道詵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24) 崔惟淸 撰,〈光陽玉龍寺先覺國師證聖慧燈塔碑〉(앞의 책, 560쪽)에 名稱普聞 海尊仰 이라고 하였다.
25) 道詵이 玉龍寺에 주석하면서 桐裏山門은 大安寺를 중심으로 하는 大安寺派와 玉龍寺를 중심으로 하는 玉龍寺派로 나뉘어 졌지만, 玉龍寺派의 성립이 大安寺派와의 對立으로 이어졌는지는 확실하 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高麗初까지 道詵系가 桐裏山門의 正統인 大安寺派와 對立한 分派로서의 의식을 강하게 지닌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참고된다(金杜珍, 앞의 논문, 7~8쪽). 사실〈道詵碑〉
를 비롯한 桐裏山門 출신 禪師들의 碑文에는 그들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나타나지 않으며, 後代의 기록이긴 하지만 金寬毅의《編年通錄》(《高麗史》〈高麗世系〉에 引用)에 道詵 을 <桐裏山祖>로 기록하고 있음은 高麗 後期까지 道詵系가 桐裏山門에의 소속감을 가지고 있었 음을 생각하게 한다.
기록된 10여 명은 도선의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비중있는 인물들이었다고 짐작된다.
정원사는 그들 중 한 명이 머물던 곳으로 도선의 입적 당시 비문에 寺名이 기록될 만 큼 도선계의 비중있는 사찰로 보아 좋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도선의 생존시에 도선계 는 광양과 구례지역뿐만 아니라 담양지역에까지 세력을 확대시키고 있었다.
下代의 禪師들이 대부분 신라왕실과 일정한 관계를 맺었던 것처럼, 도선도 왕실과 緣故를 맺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왕실에 대한 그의 입장은 어떻게 나타났는지 궁금해진다. 도선과 중앙왕실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의 기록을 참고할 수 있다.
<E> 獻(憲)康王이 그의 高德을 恭敬하여 使臣을 보내어 禁中(궁궐)으로 맞이하고 初面 에 크게 기꺼워하여 禁中에 머물도록 하였다. (머무는 동안) 수시로 玄言과 妙道로써 君心을 개발하도록 助言하였다. 얼마 후 시끄러운 경주가 싫어서 本寺(玉龍寺)로 돌아 가기를 懇請하였다.26)
도선이 왕실과 연고를 맺는 시기는 憲康王(875~885) 때로, 王이 使臣을 보내어 그를 맞이했기 때문이었다. 경주에 머물면서 도선은 玄言과 妙道로써 수시로 조언하여 君心 을 개발하도록 노력하였다고 한다. 적어도 위의 기록만을 통해서 보면, 도선은 신라왕 실과 매우 가까웠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도선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경주의 번잡함을 싫어하여 다시 玉龍寺로 돌아가기를 懇請하였다. 아마도 중앙왕실에 대한 도선의 입장이 사실적으로 드러난 것은 바로 이 부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곧 헌 강왕은 도선과의 관계에 대해 상당히 적극적이었지만, 정작 도선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물리쳤던 것이다. 이로 보면 도선과 왕실과의 관계는 다분히 형식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이해된다.27)
26) 崔惟淸 撰,〈光陽玉龍寺先覺國師證聖慧燈塔碑〉(앞의 책, 561쪽)에 獻康王敬其高德 遣使奉迎 一 見大悅 留止禁中 每以玄言妙道 開發君心 未幾 不樂京輦 懇請還歸本寺 라고 하였다.
27) 新羅王室에 대한 道詵의 입장을 이해하는데 있어 憲康王 당시의 사회상을 알려주는 다음의 기록 들이 참고된다.
憲康王이 나라의 동쪽 州郡을 巡幸할 때,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4人이 왕의 수레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山海의 精靈들이라 하였다(《三國史記》卷11, 憲康王 5年 3月조). 그런데 이들은 각각 南山神・北岳神・地神 등으로 나타났으며, 그 모습이 오 직 왕에게만 보였다. 이들 諸神은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춤을 추어 경고한 것이었지만, 國 人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祥瑞가 나타났다고 여겨 더욱 耽樂에 빠졌다고 한다(《三國遺 事》卷2, 紀異2, 處容郞 望海寺조). 이는 憲康王 때의 王權强化를 위한 노력이 소기의 성과를 거 두지 못하고 실패하였음을 알려준다. 더욱이 後者의 기록에는 憲康王을 보좌하기 위해서 東海의
왕실에 대한 도선의 입장은 스승인 혜철(785~861)의 경우를 통해 보다 분명해 질 수 있다. 혜철은 文聖王代(839~856)에 중앙 왕실과 관계를 맺었다. 문성왕이 사신을 보내어 나라를 다스릴 방책을 구하자, 그는 封事 若干條를 올렸는데 모두 時政의 急務 였으므로 왕이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문성왕은 그가 머물던 大安寺의 四 方 밖에 禁殺幢을 세우도록 허락하였다고 한다.28) 이렇게 보면 외형상 혜철은 왕실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가 올린 封事가 신라 조정에 수용되어 정 책에 반영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어쩌면 혜철이 왕실과 가까웠다는 기록은 형식적인 서술일 수 있다. 왜냐하면 대안사는 경주와는 너무 떨어진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 며, 문성왕 이후 혜철은 한 번도 조정에 나아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29) 왕실에 대한 혜철의 이러한 입장은 그의 제자인 도선에 있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도선은 왕실 과의 관계에 특별히 연연해하지 않았다.
도선과 관련지어 마지막으로 王建과의 관계를 살펴보려고 한다.〈道詵碑〉에는 도선 이 장차 天命을 받고 태어나 後三國을 統合하게 될 왕건의 출생을 미리 알고, 왕건의 父인 世祖를 찾아가 은밀히 太祖의 創業을 도왔다고 전한다.30) 왕건과 연결된 그의 행 적은 후대의 윤색이 심하기 때문에 그대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31) 그것은 후삼
龍王이 보낸 處容이 결국 慶州를 떠나는 모습이 함께 서술되었는데, 이 또한 憲康王 때의 정치상 황에 실망한 東海의 豪族세력이 王室과 결별하여 독립해나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李佑成,〈三 國遺事所載 處容說話의 一分析—新羅末・高麗初의 地方豪族의 登場에 대하여—〉《金載元博士 回甲紀念論叢》, 1969 ;《韓國中世社會硏究》, 一潮閣, 1991, 193~196쪽). 憲康王 때의 이러한 분 위기는 道詵이 慶州로 나아간지 얼마되지 않아 다시 玉龍寺로 돌아가는 정황과도 무관하지 않았 을 것으로 생각된다.
28) 崔賀 撰,〈谷城大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碑〉(앞의 책, 118~119쪽)에 文聖大王聞之 謂現多身於 象末 頻賜書慰問 兼所住寺四外 許立禁殺之幢 仍遣使問理國之要 禪師上封事若干條 皆時政之急務 王甚嘉焉 其裨益朝廷 王侯致禮 亦不可勝言也 라고 하였다.
29) 金杜珍,〈新羅下代 禪師들의 中央王室 및 地方豪族과의 관계〉(《韓國學論叢》20, 國民大學校 韓 國學硏究所, 1997, 18~19쪽).
30) 崔惟淸 撰,〈光陽玉龍寺先覺國師證聖慧燈塔碑〉(앞의 책, 561쪽)에 爾後新羅政敎寢衰 有危亡之 兆 師知將有聖人 受命而特起者 因往遊松岳郡 時我世祖在郡方築居第 師過其門曰 此地當出王者 但 經始者未 耳 適有靑衣聞之 入白世祖 遽命出迎 入咨其謀改營之 師因曰 更後二年必生貴子 於是撰 一卷書 實封之進世祖曰 此書上未生君子 然須年至壯 實而後授之耳 是歲新羅獻康王立 唐乾符二年 也 四年我太祖果誕降于前第 逮壯得其書觀之 於是知天命有所 屬遂 除寇暴 肇造區宇 라고 하였다.
31)〈道詵碑〉에서 道詵이 世祖와 만나는 기록은 崔惟淸과 同時代 인물인 金寬毅의《編年通錄》에 보다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王建의 先代와 연결된 道詵의 行蹟은 당시에 상당히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에도 도선의 행적은 더욱 윤색을 더하여 忠烈王 때
국을 통일한 이후에 風水地理에 정통한 그의 명성을 빌어 高麗의 建國을 합리화하기 위해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후삼국 정립기에 道詵系의 중심사찰인 玉龍寺는 後百濟의 甄萱을 檀越로 하였으며, 그의 風水地理說은 본래 견훤에게 봉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32) 도선의 행적이 왕건과 직접 연결되는 것은 후삼국을 통일할 무렵에 그의 제자인 慶甫가 高麗에 歸附한 이후였을 것이다.33) 그렇지만 일단 桐裏山門이 왕건과 연결된 이후, 도선은 高麗王室에 의해 國祖의 創業을 도운 聖僧으로서 尊崇받게 되었 다. 곧 왕건은 그의 風水地理說을 통해 후삼국 통일의 名分을 얻으려 하였으며, 이는 고려시대 내내 꾸준히 강조되었다. 그리하여 도선은 顯宗代에 大禪師로 追崇된 이래 肅宗 때에는 王師, 仁宗 때에는 國師로 각각 封해졌다.34) 그의 행적이 윤색되는 것은 고려시대에 그의 諡號가 계속해서 追贈되는 모습과 관련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후대 에 도선은 地理圖讖에 능한 神僧・術僧으로서의 성격만이 부각되었다.
閔漬의《編年綱目》(《高麗史》〈高麗世系〉에 引用)에는 도선이 17세의 王建과 직접 만나서 出 師置陣・地利天時의 法과 望秩山川・感通保佑하는 理致를 가르쳐 주었다고 기록되었다. 이로 보 면 도선의 행적은 고려시대에 계속해서 윤색되고 있었다.
32) 金杜珍,〈羅末麗初 桐裏山門의 成立과 思想〉(19~24쪽).
33) 金杜珍, 위의 논문(14쪽). 하지만 王建은 그 이전에 西南海岸 地方을 經略하는 과정에서 道詵과 같은 靈岩出身인 崔知夢이나 先覺 逈微 등을 만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道詵의 행적을 일찍부 터 접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李丙燾, 앞의 책, 61~63쪽).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행적 이 王建에게 직접 전해지는 것은 慶甫가 歸附한 이후의 사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34) 崔惟淸 撰,〈光陽玉龍寺先覺國師證聖慧燈塔碑〉(앞의 책, 561쪽)에 蓋其功烈 巍巍赫赫 如此之盛 宜在褒大 而追崇之 故顯王有大禪師之贈 肅祖加王師之號 逮于我聖考恭孝大王 丕揚列聖 所以念功 報德之意 遂進封爲先覺國師 라고 하였다.
3. 唯心論的 禪宗思想의 登場
風水地理說은 일종의 人文地理的 지식으로 이미 三國時代에서부터 활용되어 왔고, 특히 新羅 下代에 이르러 광범위하게 유행되었다.35) 그런데 下代에 활동한 禪師들의 碑文을 보면 그들에게서 풍수지리적인 인식이 나타나는 경우를 상당수 볼 수 있다. 이 점은 풍수지리설의 유행이 禪宗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임을 생각하게 한다. 그런 의 미에서 풍수지리설과 선종과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禪師들이 풍수지리를 이해하고 있었던 사실은 먼저 曦陽山門의 開祖인 智證 道憲 (824~882)에게서 잘 드러난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을 참고할 수 있다.
<F> ① 他日에 門人에게 이르기를, 故 韓粲 金公 勳이 나를 제도하여 승려가 되게 하였으니, 公에게 佛像으로써 보답하겠다 고 하고는 이에 丈六玄金像을 鑄造하여 金 을 입혔다. 여기에 奉安하여 仁宇를 진압하고 冥路를 인도하였다.36)
② 沈忠의 요청이 더욱 집요할 뿐만 아니라, 이에 더하여 山이 神靈스러워 갑옷 입은 騎兵을 先鋒으로 삼은 神異로운 형상이 있었다. 이에 錫杖을 樵溪에 세워놓고 자세히 살펴 推察하였다. 또 山이 병풍처럼 四方을 둘러 있어서 鳳의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 쌓였은즉 뿔 없는 龍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 았다. 이미 경악하고 탄식하여 이 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 는가. 靑衲(승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黃巾(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 라고 하였 다. 드디어 大衆을 솔선하여 後患을 막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다. 기와집을 짓고 四 方으로 추녀를 드리워 地勢를 누르고, 鐵佛像 2軀를 鑄造하여 衛護하였다.37)
35) 風水地理說의 개념은 李丙燾에 의해 자세하게 정리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風水地理說은 처음 에 경이로운 숭배의 대상이었던 自然에 대한 이해가 경험과학에 의한 지식으로 체계화되면서 성 립되었다고 한다. 風水地理는 都邑이나 宮宅, 陵墓의 터를 卜相하는 일종의 觀相學이기 때문에 相地學으로 규정되며, 본래의 그것은 일종의 大地母的인 信念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 것은 뒤에 陰陽五行의 形而上學的 理論의 근거를 부여하고, 天文・方位 등의 사상 및 儒家의 윤 리사상과 결합되어 상당한 발달을 보게 되었다고 하였다(李丙燾, 앞의 책, 21~26쪽).
36) 崔致遠 撰,〈聞慶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앞의 책, 93쪽)에 他日 告門人曰 故韓粲金公 勳 度 我爲僧 報公以佛 乃鑄丈六玄金像 傅之以銑 爰用鎭仁宇 導冥路 라고 하였다.
37) 崔致遠 撰,〈聞慶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위의 책, 93쪽)에 忠請膠固 加山靈有甲騎爲前騶之異 仍錫挻樵蹊而歷相焉 且見山屛四 則 雲水帶百△ 則●腰偃石 旣愕且 曰 獲是地也 庸非天 乎 不爲靑衲之居 其作黃巾之窟 遂率先於衆 防後爲基 (起)(瓦)( )四柱以厭之 鑄鐵像二軀以衛之至 라고 하였다.
도헌은 賢溪山 安樂寺에 住錫할 무렵, 지난날 金 勳의 도움을 입어 승려가 될 수 있었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丈六玄金像을 만들어 奉安하였다. 丈六玄金像을 봉안함 은 仁宇 즉 사찰을 진압하기 위해서였으며, 한편으로 亡者의 冥路를 인도하기 위함이 었다(F-①). 도헌이 풍수지리를 이해하고 있었음은 鳳巖寺를 開創하는 과정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그는 봉암사 주변의 山勢와 水勢를 직접 살피면서, 그 地勢가 승려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장차 盜賊의 소굴이 될 것이라 하여, 봉암사의 터를 얻음은 하늘 이 내린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봉암사를 개창할 때, 사찰 주변의 지세를 눌러 後 患을 막기 위해서 瓦 4柱와 鐵佛像 2軀를 設하였다(F-②). 사찰을 진압하기 위해서 丈六玄金像을 주조하여 봉안한다던가, 지세를 누르기 위해 瓦 과 鐵佛像을 設하는 것 은 역시 風水的인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도헌이 풍수지리에 상당히 밝았음을 알 수 있다.
도헌이 풍수지리에 밝았음은 그의 사상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 같다. 다음의 기록은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G> (憲康王이 大師를) 맞이하여 月池宮에서 心에 대해 물었다. 그 때는 蘿에 바람이 불지 않고 溫室樹에 바야흐로 밤이 될 무렵이었는데, 마침 달의 그림자가 맑은 못 가 운데 똑바로 비친 것을 보고는 大師가 고개를 숙여 유심히 살피다가 다시 하늘을 우 러러보고 말하기를, 이것(月)이 곧 이것(心)이니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이 씻은 듯 마음이 契合하여 金仙(부처)이 연꽃을 들어 뜻을 나타냈거니 와 전해지는 風流가 진실로 이에 들어맞습니다 라고 하였다. 드디어 拜受하여 忘言師 로 삼았다.38)
憲康王은 도헌을 親見하여 그에게 특별히 <心>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도헌은 달에 비유하여 연못에 비친 달의 그림자를 여의고 달의 본래 모습을 아는 것이 바로 <心>
이라고 하였다. 곧 도헌은 佛心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이지 몸밖에 있는 것이 아님을 설 명하였다. 그리하여 헌강왕은 그를 忘言師로 삼아 恭敬하였다.
그런데 위의 헌강왕과의 대화 속에서 나타난 도헌의 대답은 올바른 마음의 깨달음, 즉 心識에 대한 강조로 이어질 수 있다. 물의 형상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날 수
38) 崔致遠 撰,〈聞慶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위의 책, 94쪽)에 引問心 于月池宮 時屬纖蘿不風 溫 樹方夜 適覩金波之影 端臨玉沼之心 大師俯而 仰而告曰 是卽是 餘無言 上洗然(昕)(契)(曰)金仙花 (目) 所傳風流 固(協)於此 遂拜爲忘言師 라고 하였다.
있지만 물이 가진 本性은 여럿일 수 없듯이, 달의 그림자는 여럿일 수 있지만 그 본연 의 모습은 오직 하나이다. 그러므로 연못 속에 비친 달의 모습은 虛象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도헌은 하늘의 달이 곧 마음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면 연못 속에 비친 달의 허상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되어, 一切의 事相은 오직 마음작용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唯識, 즉 法相宗思想과 연결될 수 있다. 현상인 달의 그림자를 여의듯, 心識에 의 해 一切의 허망한 분별을 여읠 것을 말하는 도헌의 사상은 유식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그는 彌勒으로 관념되었다.
<H > 咸通 5년(景文王 4년, 864) 冬에 端儀長翁主가 未亡人이 되어 (大師에 대해) 當來佛 이 여기에 왔다 고 칭송하고, 恭敬하여 (彌勒의) 下生으로 여겨 두텁게 供養하였다.39)
위의 기록에 나타나는 當來佛은 彌勒으로 이해된다. 도헌의 檀越인 端儀長翁主는 그 를 미륵의 下生으로 여겨 공양하였다. 도헌 자신이 미륵임을 내세웠는지는 의문이지 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미륵으로 칭해졌다는 사실은 그의 사상경향과 관련지어 주 목된다. 미륵은 法相宗의 主尊佛로 中代 이래 新羅의 法相宗 敎團에서는 미륵을 중시 하는 경향을 보였다.40) 도헌의 사상이 心識을 강조하였음을 생각할 때, 역시 그것은 유식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41)
풍수지리설은 자연적인 地勢를 면밀히 관찰하여 그 가운데 明堂을 찾으려는 것이다.
이는 色界를 인식하려는 법상종사상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풍수지리적인 인 식을 갖추었던 선사들의 사상은 유식사상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雙溪寺를 세운 眞鑑 慧昭(774~850)와 山門의 朗空 行寂(832~916), 鳳林山門의 眞 鏡 審希(853~923) 등도 풍수지리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寺院을 개창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다음의 기록을 참고할 수 있다.
39) 崔致遠 撰,〈聞慶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위의 책, 92쪽)에 咸通五年冬 端儀長翁主 未之人爲 稱 當來佛是歸 敬謂下生 厚資上供 이라고 하였다.
40) 文明大,〈新羅 法相宗(瑜伽宗)의 成立問題와 그 美術(下) — 甘山寺 彌勒菩薩像 및 阿彌陀佛像과 그 銘文을 中心으로—〉(《歷史學報》63, 歷史學會, 1974, 150~155쪽).
41) 道憲과 法脈이 연결되는 神行(704~779)의 碑文에 의하면, 그의 塔碑가 건립된 곳을 摩訶迦葉이 慈氏(彌勒)를 기다리는 鷄足山의 石室에 비유하였다. 곧 신행은 계족산에서 미륵을 기다리는 摩 訶迦葉으로 관념되었다. 이처럼 曦陽山門의 사상경향이 彌勒信仰과 연결되고 있는 모습은 도헌의 사상경향이 唯識思想을 아우르고 있었음과 관련하여 중요하게 생각된다.
<I> ① 드디어 좋은 境界를 찾아 돌아다니며 南嶺의 산기슭을 얻으니, 상쾌하고 앞이 트여서 거처하기에 으뜸이었다. 이에 禪廬를 지으니 뒤로는 안개 낀 높은 봉우리에 의지하였고, 앞으로 내려다보면 구름 덮인 시내를 두르고 있었다. (중략) 사철마다 모 습이 변하고, 萬象이 빛을 바꾸니 온갖 소리가 和音을 이루며 수많은 바위들이 다투 어 빼어났다.42)
② (明瑤夫人이) 石南山寺를 스님께 드려서 영원히 住持하기를 請하니, (神德王 4 년, 915) 秋 7月에 大師는 기꺼이 이를 받아들이고 비로소 이 절에 住錫하기로 결심하 였다. 이 절은 멀리는 四岳을 連하였고, 높기로는 남쪽의 바다를 눌렀으며, 시냇물과 石間水가 다투어 흐르는 것은 마치 쇠로 만든 수레를 계곡으로 끄는 것과 같았다. 岩 巒이 다투어 빼어난 것은 紫色 구슬로 장식한 車盖가 하늘로 치솟은 것과 같았으니, 참으로 隱士를 초빙하여 幽据하게 할 만한 곳이며, 또한 禪을 닦기에 좋은 佳境이라 하겠다. 大師는 오래 전부터 靈山을 찾아다녔으나 定居할 곳을 구하지 못하다가 이 山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지막 涅槃할 곳으로 삼았다.43)
③ 이 절은 비록 터는 山脈에 이어져 있었으나 門은 담장 밑까지 기울어져 있었다.
大師는 水石이 기이하고 빼어난 곳을 찾고 가렸으나, 날쌘 말이 서쪽 산봉우리에서 놀고 올빼미가 옛터에서 운다고 하였으니, 바로 大士의 情에 과연 마땅하여 神人의
△에 깊이 맞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작은 절을 고쳐지어 발길을 멈추었으며, 鳳林이라 이름을 고치고 다시 禪宇를 열었다.44)
慧昭가 세운 雙溪寺는 뒤로는 높은 봉우리를 의지하였고, 그 앞은 물이 흘러 풍수지 리에서 말하는 背山臨水의 形局을 갖춘 곳이었다. 또한 그 주변의 地勢는 빼어난 勝觀 을 이루고 있어 사찰이 자리잡을 만한 입지조건을 두루 갖추었다. 그가 쌍계사에 住錫 하기까지 奇境을 찾아 두루 유람함은 풍수지리에 의해 사원의 基地를 구하는 과정으 로 이해할 수 있다(I-①). 또 行寂이 <終焉之所>로 삼아 住錫했던 石南山寺는 그 地勢 가 뛰어나 <栖禪의 佳境>으로 관념되었다. 이 절의 지세는 주변의 높게 솟은 산들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으며, 시냇물과 석간수가 다투어 흐르는 풍수지리적으로도 빼어
42) 崔致遠 撰,〈河東雙谿寺眞鑑禪師大空塔碑〉(앞의 책, 69쪽)에 遂歷銓奇境 得南嶺之麓 爽塏居 經始禪廬 却倚霞岑 俯壓雲澗 (中略) 四時變態 萬象交光 百 和 千巖競秀 라고 하였다.
43) 崔仁 撰,〈奉化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위의 책, 159쪽)에 以石南山寺 請爲收領 永以住 持 秋七月 大師 以甚 雅懷 始謀栖止此寺也 遠連四岳 高壓南溟 溪澗爭流 酷似金與之谷 巖巒鬪峻 疑如紫盖之峰 誠招隱之幽● 亦栖禪之佳境者也 大師遍探靈 未有定居 初至此山 以爲終焉之所 라 고 하였다.
44) 崔仁 撰,〈昌原鳳林寺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위의 책, 99쪽)에 此寺 雖地連山 而門倚墻根 大師以水石探奇 煙霞選勝 遊西岫 梟 舊墟 豈謂果宜大士之情 △ 神人 所以 修 舍 方止●輿 改 鳳林 重開禪宇 라고 하였다.
난 景觀을 갖추었다(I-②). 審希가 住錫한 鳳林寺의 지세도 대체로 이와 유사하게 표현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山水의 경관이 빼어난 곳을 찾아다니다가 봉림사 만한 곳이 없 음을 깨닫고 거기에 禪門을 열었다(I-③). 말하자면 이들은 풍수지리에 유념하여 山門 을 개창하였다.
그런데 慧昭를 비롯하여 行寂, 審希의 사상은 공통적으로 色과 空의 雙泯을 주장하 였다.45) <色空雙泯>으로 나타나는 이들의 사상경향은 色과 空의 융합사상으로 이해되 어, 華嚴思想과 法相宗思想을 융회하려는 均如의 性相融會 思想과 서로 통할 수 있다.
성상융회사상은 본래 敎宗 내의 性宗과 相宗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서 性宗, 즉 화엄 사상을 근간으로 그 안에 相宗인 법상종사상을 융합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화엄사상과 법상종사상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성립할 수 있다. 혜소 등이 화엄사상과 법상종사상을 융합하려고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오히려 그들에게 나타나는 空의 泯滅 은 性宗보다는 禪宗의 입장에서 주장된 것일 수 있다. 또한 色은 곧 法相에 대한 인식 으로 이어지므로, 色의 泯滅은 그들이 禪宗의 입장에서 법상종사상을 융합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볼 때, 空과 色을 雙泯하여 양자를 융합하려는 이들 의 사상은 유식 즉, 법상종사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나타났다고 이해해도 좋을 것 이다. 특히 심희는 戒의 구슬을 識宇에 걸었다 46)고 하여 戒와 識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그의 사상이 성상융회적인 사상경향으로 나타나는 과정에서 유식을 중시하였음 을 보여준다.
後三國 쟁패기에 雲門寺에 住錫했던 寶壤도 풍수지리를 이해하고 있었다. 보양의 풍 수지리에 대해서는 다음의 기록에 잘 드러난다.
<J> 처음 大師가 入唐했다가 돌아와서 먼저 推火郡(현재의 密陽)의 奉聖寺에 머물렀다.
때마침 太祖가 東征하여 淸道 지경에 이르렀는데, 山賊이 犬城 — 산봉우리가 물을 굽 어보고 뾰족하게 섰으므로, 오늘날 民間에서 그것을 미워하여 그 이름을 고쳐 犬城이 라 했다고 한다 — 에 모여 교만을 부리며 항복하지 않았다. 太祖가 산밑에 이르러 大
45) 慧昭와 行寂, 審希의 사상경향에 대해서는 다음의 기록을 참고할 수 있다.
① 眞鑒 慧昭 : 以禪師 色空雙泯 定慧俱圓(〈河東雙谿寺眞鑑禪師大空塔碑〉, 위의 책, 69쪽).
② 朗空 行寂 : 四遠參尋 無方不到 雖觀色空 豈忘偏 (〈奉化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 위의 책, 183쪽).
③ 眞鏡 審希 : 諸法皆空 萬緣俱寂(〈昌原鳳林寺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 위의 책, 100쪽).
46) 崔仁 撰,〈昌原鳳林寺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위의 책, 101쪽)에 戒珠 於識宇 라고 하였다.
師에게 (賊을) 쉽게 제어할 방법을 물으니 大師가 대답하기를, 대개 개란 짐승은 밤 만 맡고 낮은 맡지 않으며, 앞만 지키고 그 뒤는 잊고 있으니 마땅히 낮에 그 북쪽을 쳐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太祖가 그 말을 따랐더니 賊이 과연 敗하여 항 복하였다. 太祖는 그 神謀를 가상히 여겨 해마다 가까운 고을의 租 50碩을 주어 香火 를 받들게 하였다. 이로써 二聖의 眞容을 모시니 因하여 절 이름을 奉聖寺라 한다.47)
寶壤이 歸國하여 奉聖寺(密陽)48)에 머물렀을 무렵, 때마침 王建은 東征하여 淸道지방 에서 山賊세력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때 보양은 犬城의 地勢를 풀이하여 왕건을 도왔 다. 즉 견성의 지세를 개에 비유하여 낮에 그 북쪽을 공격하도록 권유함으로써 왕건이 賊黨세력을 쉽게 제압하는데 도움을 주었다.49) 위의 기록에서 보양이 犬城의 지세를 살피는 모습은 그가 풍수지리에 상당한 지식을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보양은 鵲 岬寺로 옮겨 거주하였는데, 이때 그의 행적은 祖師 知識의 행적과 서로 혼동되었다.
지식은 中國에서 佛法을 전해받고 돌아와 後三國의 戰亂 중에 허물어진 鵲岬寺를 다시 세웠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50) 그런데 鵲岬寺의 再建은 비슷한 시기에 귀국하는 보양의 행적으로 기록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지식과 보양이 서로 무관하지 않았음을 생각하게 한다. 더욱이 이들의 행적은 모두 圓光(542~640)과
47)《三國遺事》卷4, 義解5, 寶壤梨木조에 初師入唐廻 先止于推火之奉聖寺 適太祖東征至淸道境 山賊 嘯聚于犬城 有山岑臨水 立 今俗惡其名 改云犬城 驕傲不格 太祖至于山下 問師以易制之述 師答曰 夫 犬之爲物 司夜而不司晝 守前而忘其後 宜以晝擊其北 祖從之 果敗降 太祖嘉乃神謀 歲給近縣租五十 碩 以供香火 是以寺安二聖眞容 因名奉聖寺 라고 하였다.
48) 奉聖寺는 현재의 密陽郡 山外面 金谷里에 있는 寺址로 추정되고 있다(李雲成,〈推火奉聖寺址에 대하여〉,《考古美術(上)》, 韓國美術史學會, 1979, 574쪽). 특히 이곳에서는 <奉聖寺>의 銘文이 새겨진 瓦片이 발견되었다.
49) 王建이 東征하여 寶壤과 연결되는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대략 920년(景明王 4) 康州將 軍 閏雄의 歸附 이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金杜珍,〈王建의 僧侶結合과 그 意圖〉,《韓國學論叢》
4, 國民大學校 韓國學硏究所, 1981, 134쪽의 주18 참조).
50)《三國遺事》卷4, 義解5, 寶壤梨木조에 羅代已來 當郡寺院 鵲岬已下中小寺院 三韓亂亡間 大鵲岬 小鵲岬 所寶岬 天門岬 嘉西岬等五岬皆亡壤 五岬柱合在大鵲岬 祖師知識 上文云寶壤 大國傳法來還 次西海中 龍邀入宮中念經 施金羅袈裟一領 兼施一子璃目 爲侍奉而追之 囑曰 于時三國擾動 未有歸 依佛法之君主 若與吾子歸本國鵲岬 創寺而居 可以避賊 抑亦不數年內 必有護法賢君 出定三國矣 言 訖相別而來還 及至玆洞 (中略) 於是壤師將興廢寺 而登北嶺望之 庭有五層黃塔 下來尋之則無跡 再 陟望之 有群鵲啄地 乃思海龍鵲岬之言 尋掘之 果有遺塼無數 聚而蘊崇之 塔成而無遺塼 知是前代伽 藍墟也 畢創寺而住焉 因名鵲岬寺 (中略) 未幾太祖統一三國 聞師至此創院而居 乃合五岬田束五百結 納寺 以淸泰四年丁酉 賜額曰雲門禪寺 以奉袈裟之靈蔭 (中略) 後遷至鵲岬 而大創終焉 이라고 하였 다.
연결되었다.
보양의 행적은 후대에 원광과 많이 혼동되었다. 그 때문에 一然은 사람들이 미혹되 지 않도록《三國遺事》에 <圓光西學>과 <寶壤梨木>의 기록을 나란히 실어 그것을 분 명히 하려고 하였다.51) 곧 이들의 행적은 일연이 그것을 굳이 구분해야 할 정도로 심 하게 혼동되었다. 마찬가지로 지식의 행적도 원광과 연결되었는데, 그는 작갑사를 다 시 세우는 과정에서 원광을 만나 印櫃를 전해받았다고 한다.52) 그가 三國統一 이전에 활동한 원광을 만났다는 기록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이 원광 으로부터 인궤를 전해 받았다는 緣起說話는 그의 사상이 원광의 그것과 가까울 수 있 음을 추측하게 한다. 원광은 일찍이 중국에 유학하여 攝論宗에 심취하였으며, 그의 사 상은 唯心論的인 唯識思想으로 이해된다.53) 원광과 연결되는 지식은 그 이름에서 나타 나듯 유식사상과 관련된 인물로 생각된다. 아마도 지식이 원광에게 인궤를 전해 받는 緣起說話는 그의 사상이 원광의 유식사상과 유사했기 때문에 나타났던 것으로 믿어진 다. 만일 이러한 추측이 허락된다면, 지식이나 원광과 연결되는 보양의 사상도 원광의 유식사상과 이어질 수 있다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후대에 보양의 행적이 원광과 혼 동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러한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상에서 新羅 下代에 활약했던 禪師들 가운데 풍수지리적인 지식을 갖추었던 승려 들의 사상경향을 살펴보았다. 이들 禪師들의 사상은 공통적으로 唯識, 즉 法相宗思想 에 대해 유념하고 있었다. 유식사상을 이해하였던 선사들에게 나타나는 풍수지리적 인 식은, 그들이 유식사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풍수지리를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풍수지리설은 유식사상과 관련이 있는 선사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51) 圓光과 寶壤의 행적이 혼동된 것은 鄕人 金陟明이〈圓光法師傳〉을 지으면서 寶壤의 事迹을 圓 光의 행적과 혼합하여 잘못 기록하였기 때문으로,《新羅殊異傳》과《海東高僧傳》에서도 이러한 잘못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一然은 지적하였다(《三國遺事》卷4, 義解5, 寶壤梨木조).
52)《三國遺事》卷4, 義解5, 寶壤梨木조에 忽有老僧 自稱圓光 抱印櫃而出 授之而沒 이라고 하였다.
53) 李基白,〈圓光과 그의 思想〉(《創作과 批評》10, 1968 ;《新羅思想史硏究》, 一潮閣, 1986, 103~
105쪽).
4. 道詵의 唯 心論的 禪思想
道詵은 桐裏山門 慧徹의 門徒였으며, 그로부터 心印을 받아 玉龍寺를 중심으로 독자 적인 禪門을 개창하였다. 그의 활동이 대체로 동리산문과의 관련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때, 그의 사상 역시 동리산문의 사상경향과 무관할 수 없다고 여겨진다.
동리산문을 개창한 혜철의 사상과 관련하여 그에게서 풍수지리적인 인식이 나타남 을 주목할 수 있다. 다음의 기록이 참고된다.
<K> 谷城郡 동남쪽에 山이 있어 桐裏라 하였고, 그 속에 암자(舍)가 있어 大安이라 하 였다. 그 절은 수많은 봉우리가 막아 가리고 한줄기 江이 맑게 흘렀다. 길이 멀리 끊 기어 世俗의 무리들이 오는 이가 드물고, 경계가 그윽이 깊어 僧徒들이 머물러 고요 하였다. 龍과 神이 祥瑞와 神異를 나타내고 해충과 뱀은 그 毒과 形을 숨기며, 소나무 숲이 빽빽하고 구름은 깊어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바로 이곳이 三韓 의 勝地였다.54)
慧徹이 住錫한 桐裏山의 大安寺는 수많은 봉우리들에 의해 둘러싸인 사이로 江이 흐르는 이른바 山河襟帶 , 山水回抱 의 形局을 갖추었다. 그리하여 대안사의 지세는
<三韓의 勝地>로 관념되었다. 혜철은 入唐하여 풍수지리설이 성행하였던 江西地方에 머문 일이 있었으므로, 이때에 풍수지리설을 접하게 되었던 것 같다. 강서지방에 유행 한 풍수지리설은 山形과 水勢를 살펴 都城이나 宮室의 基地를 선정하려는 陽基的인 것으로, 혜철의 풍수지리에 대한 인식에서 山水를 중시하는 경향은 이와 관련될 수 있 다.55) 또한 그의 門下에는 풍수지리설로 유명한 道詵이 있었다. 곧 혜철은 풍수지리설 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
혜철은 是心과 是慧를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洪州宗의 사상적 특성과 연관하여 이해 할 수 있다. 그는 중국에서 西堂 智藏의 心印을 받아 귀국하였는데, 지장은 <卽心卽佛>,
<非心非佛>을 주장하였다. 지장의 스승인 馬祖 道一은 自心이 바로 佛心이며, 一切法이
54) 崔賀 撰,〈大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碑〉(앞의 책, 118쪽)에 谷城郡東南有山 曰此桐裏 中有舍名 曰 大安其寺也 千峯掩映 一水澄流 路逈絶而塵侶到稀 境幽邃而僧徒住靜 龍神呈瑞異 蟲蛇遁其毒形 松暗雲深 夏 冬 斯三韓勝地也 라고 하였다.
55) 金杜珍,〈羅末麗初 桐裏山門의 成立과 思想〉(31쪽).
모두 마음에 따라 생긴다고 하여, 三界唯心의 사상에 기인한 禪思想을 주장하였다. 이 러한 唯心論的인 사상경향은 혜철에게 전해져 桐裏山門의 사상적 특징으로 정립되었 다.56) 혜철은 禪과 戒律을 함께 닦았고, 一識 에 대한 깨우침을 강조하였다. 말하자면 그의 선사상은 唯識, 즉 法相宗思想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동리산문의 唯心論的인 사상경향은 道詵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 이다. 만약 도선의 사상에서 유식사상을 아우르는 모습을 지적할 수 있다면, 그의 사 상도 유심론적인 사상경향에서 비롯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 여 먼저〈道詵碑〉의 碑銘에 기록된 다음의 내용을 유념해 볼 수 있다. 碑文에 드러난 그의 사상이 단편적으로 남아 있음과 비교해서, 碑銘에는 비록 축약된 형태이지만 撰 者가 해석한 그의 사상적인 면모가 총체적으로 정리되어 있어 도선의 사상을 이해하 는데 도움을 준다.
<L> 過去 諸佛의 微妙한 法은 文字로 詮하지도 않고 思修로 攝하지도 않는다. (一切의 外緣에) 超然하여 直指(人心)하니, 一念이 千劫이다. 오직 우리 國師만이 넉넉하게 그 경지에 들어갔다. 잘 배움은 배움이 없는 것이니, 眞空이면서 空이 아니다. 正法眼을 갖추었으니, 四方으로 열리고 六通을 얻었다.57)
過去 諸佛의 微妙한 法은 一切의 因緣을 끊고 衆生들에게 각자 가지고 있는 佛性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文字로 詮하는 것이 아니고 思修로 攝하지도 않으며, 깨 닫게 되면 一念이 千劫이 된다. 도선은 過去의 諸佛에 비견될 만큼 그 경지가 殊勝하게 표현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無學하는 禪의 宗旨를 잘 익혀 眞空이면서 空이 아님을 깨 달았고, 正法眼을 갖추어 四闢 六通하였다. 여기에서 <一念千劫>이 도선이 깨달은 禪 의 경지를 나타낸 것이라면, <眞空不空>은 그의 사상경향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眞空不空>의 사상경향은 非有非無의 中道 를 표방하는 禪的인 唯識思想으로 이어 질 수 있다. 正法眼과 연결된 <眞空不空>은 文字나 사유를 떠났기 때문에 禪觀으로 이해된다. 또한 그것은 眞空이면서 空이 아닌 , 非有非無의 中道實相을 드러낸다. 實相 을 갖추었다는 면에서 <眞空不空>은 유식사상으로 이어지고, 이는 바로 直指人心하여
56) 金杜珍, 위의 논문(26~29쪽).
57) 崔惟淸 撰,〈光陽玉龍寺先覺國師證聖慧燈塔碑〉(앞의 책, 562쪽)에 過去諸佛 有微妙法 非文字詮 非思修攝 超然直指 一念千劫 惟我國師 優入其域 善學無學 眞空不空 具正法眼 四闢六通 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