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까지 전하는 道詵에 관한 기록은 양적으로 상당수에 이르지만, 그 대부분이 고 려시대 이후 도선의 명성에 가탁하거나 그의 行蹟을 윤색하여 기록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자료의 유포과정에서 도선은 그의 스승인 寂忍 慧徹이나 嗣法弟子인 洞 眞 慶甫, 迦智山門의 先覺 逈微, 華嚴寺의 烟起 등과 혼동되었으며, 그에 따라 그는 地 理圖讖에 정통한 神僧 혹은 術僧으로서의 성격만이 부각되었다. 그러므로 도선 관련자 료들을 史料로써 활용할 때는 상당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도선 관계 사료로서 가치가 높은 것으로는 高麗 毅宗 4년(1150)에 崔惟淸이 王命을 받아 撰述한〈光陽玉龍寺先覺國師證聖慧燈塔碑〉(이하 본문에서는〈道詵碑〉로 줄임) 가 있다.7)〈道詵碑〉의 건립에는 당시 비석 건립의 실질적인 책임을 맡았던 雲岩寺의 住持 志文을 비롯하여 도선의 法孫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8)
그런데 도선비의 건립은 이미 도선의 入寂 직후에 시도되었다. 도선이 入寂했던 해 (孝恭王 2년, 898)에 孝恭王은 그에게 了空禪師라는 諡號를 내리면서 王命으로 瑞書學 士 朴仁範에게 碑文을 撰하도록 하였다. 이때 朴仁範이 찬했다는 도선의 비문은 도선 관련 자료 가운데 가장 정확한 것이었겠지만,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끝내 돌에 새겨지 지 못하였다.9) 朴仁範 撰의 도선비문과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을 참고할 수 있다.
7) 崔惟淸이 撰한〈道詵碑〉도 道詵의 入寂(898년)으로부터 약 250여 년이 지난 이후에 撰述된 것이 므로, 그 사이에 적지 않은 윤색이 가해졌을 가능성도 간과할 수는 없다.
8) 道詵의 碑가 建立되는 과정에서 志文 등 道詵의 法孫들이 다수 참여하였음은 碑陰記의 기록을 통 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까지 전해지던 道詵에 관한 가장 자세한 기록이〈道詵 碑〉의 내용에 반영되어졌을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므로 道詵의 행적은 이〈道詵碑〉의 내용 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살펴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9) 崔惟淸 撰,〈光陽玉龍寺先覺國師證聖慧燈塔碑〉(《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561쪽)에 門人洪寂等 懼先師之景行不傳 啣涕奉表 乞爲紀述 王乃命 瑞書學士朴仁範 爲碑文 而竟未鐫于石 이라고 하였다. 朴仁範이 撰한〈了空禪師碑〉가 건립되지 못한 이유를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은 道詵의 檀越勢力과 관련지어 생각될 수 있다. 道詵의 檀越과 관련해서〈道詵碑〉에는 王 建의 父인 龍建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後代에 高麗王室에 의해 윤 색된 기록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오히려 道詵이 활동했던 지역은 주로 全羅南道 一帶였으며, 後三國 戰亂期에 이 지역 豪族勢力은 대부분 後百濟의 甄萱과 연결되어 있었다. 道詵의 弟子인 慶甫는 中國에서 歸國하는 과정에서 甄萱의 도움을 받고 있으며, 그가 玉龍寺로 나아가는 모습도
<A> 湖南道 秋城郡(현재의 潭陽)의 法雲山에 玉泉寺가 있는데, 곧 예전의 淨源寺이다.
다음으로〈道詵碑〉를 통해 도선의 행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家系와 出生 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B> 大師의 諱는 道詵이요, 俗性은 金氏로 新羅國 靈巖人이다. 그 世系는 父祖의 史實 이 유실되었다. 혹은 이르기를 太宗大王의 庶孼孫이라고도 한다. 母는 姜氏이니, 어느 날 꿈에 어떤 사람이 明珠 1顆를 주면서 삼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姙娠하였다.14)
도선은 新羅 興德王 2년(827)에 태어났다. 俗姓은 金氏이고 靈巖人이다. 도선의 世系 와 관련하여 위의 기록은 父祖 때의 史實이 유실되었음과 그의 집안이 본래는 무열왕 의 庶孼孫이었다는 점을 特記하고 있다. 그 중 前者의 내용은 도선의 父祖 때에 그 世 系上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도선의 父祖가 활동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시기는 신라사회가 中代에서 下代로 넘어 가는 전환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 신라사회에 나타나는 변화 가운데 하나가 중대 이 래 독점적으로 왕위를 계승하던 武烈王系가 왕위계승에서 밀려났다는 점이다. 특별히 奈勿王의 後孫인 元聖王이 卽位하는 과정에서 무열왕계의 金周元이 溟州로 退去하는 모습은 중대를 지탱해 온 무열왕계의 쇠퇴라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도선의 世系가 武烈王의 庶孼孫이었다는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굳이 무열왕의 後孫으로 표현한 것은 적어도 그의 家系가 무열왕계와 무관 하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아마도 도선의 가계는 중대 말 하대 초에 전개된 王位 繼承戰에서 무열왕계와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그 과정에서 그의 가문은 落鄕하여 靈巖地方의 豪族勢力으로 성립하였을 것이다.15) 도선의 母 姜氏는 영 암지방의 토착세력 출신으로 생각되는데, 이로 보아 도선의 가계는 적어도 그의 父代 에 이르러서는 영암지방에서 地方勢力化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도선은 태어나면서부터 佛敎와 매우 친숙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母는 그를
明宗 2년에 이르러서야 光陽縣의 歲貢船으로 옮겨져 玉龍寺에 세워질 수 있었다.
14) 崔惟淸 撰,〈光陽玉龍寺先覺國師證聖慧燈塔碑〉(앞의 책, 560쪽)에 師諱道詵 俗姓金氏 新羅國靈 岩人也 其世系 父祖史失之 或云 是太宗大王之庶孼孫也 母姜氏 夢人遺明珠一顆使呑之 遂有娠 이 라고 하였다.
15) 崔柄憲, 앞의 논문(108~109쪽). 이 글에서는 道詵뿐 아니라 그의 嗣法弟子인 洞眞 慶甫 역시 金 氏이면서 靈岩 鳩林人이었음에 주목하여, 당시 靈岩地方에는 道詵과 同一親族集團이 中央으로부 터 落鄕하여 土着勢力을 형성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잉태한 이후 고기를 일체 먹지 않고, 오직 讀經과 念佛로써 佛事에 지극하였다. 도선 도 어려서부터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언제나 부처를 敬畏함이 두터웠으므로 그의 부 모는 자연스럽게 그의 出家를 허락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도선은 15세가 되던 文 聖王 3년(841)에 月遊山 華嚴寺에 들어가 大藏經을 讀習하였다. 여기서의 월유산 화엄 사는 求禮의 華嚴寺로 이해된다.16) 그곳에서 華嚴學을 익히던 도선은 신라 하대의 다 른 禪師들처럼 敎學佛敎의 한계를 느끼고, 20세에 桐裏山門의 開祖인 慧徹(惠哲)의 門 下에 나아가 이른바 <無說之說 無法之法>의 禪思想을 習得하였다.17)
문성왕 11년(849)에 穿道寺에서 具足戒를 받은 도선은, 이후 38세에 玉龍寺에 주석하 기까지 약 15년간 雲峯山과 太伯岩 등지를 遊歷하면서 禪修行을 하였다. 도선이 受戒 를 받은 穿道寺는 桐裏山門에 소속된 사찰로 이해되며,18) 그가 혜철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는 기록19)은 수계 당시 도선이 혜철의 영향 아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면 受戒 이후에 이어지는 그의 선수행 역시 그 연장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다음의 기록은 수계 이후 그의 행적을 살피는데 도움을 준다.
<C> 癸巳(高麗 明宗 3년, 1173) 6월 14일 判許와 아울러 法孫들이 傳持하고 있는 4곳의 寺院도 새겨둔다. 大中 10월(文聖王 18년, 856) 丙子에 祖師가 神人과 만난 嶺에 庵子 를 結成하여 米岾寺를 開創했으며, 大中 12년(憲安王 2년, 858) 戊寅에는 求禮縣의 道詵 寺와 더불어 神人이 모래를 모아 三國圖를 그리던 곳에 三國寺를 開創했으며, 咸通 6 년(景文王 5년, 865) 乙酉에 雲岩寺를 開創하였다.20)
도선이 開創하였다고 전하는 사찰은 무수히 많지만, 후대의 윤색이 심하기 때문에
16) 崔柄憲, 위의 논문(109쪽).
17) 崔惟淸 撰,〈光陽玉龍寺先覺國師證聖慧燈塔碑〉(앞의 책, 560쪽)에 大師嘉其聰敏 接以至誠 凡所 謂無說之說無法之法 虛中授受 廓爾超悟 라고 하였다.
18) 金杜珍, 앞의 논문(4쪽).
19) 道詵의 碑文資料는 비문의 내용이《東文選》(卷117)에 실려있던 것을《朝鮮金石總覽》上에 재인 용하여 附錄한 것과 1712년(朝鮮 肅宗 38)에 玉龍寺에서 開刊한 開刊本의 2가지 版本이 있다. 이 두 기록은 표현상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거의 동일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도선의 受戒 와 관련하여 前者의 기록에는 年二十三 受具戒於穿道寺 라고 한 것과 비교하여, 後者에는 年二 十三 受具戒於惠徹大師 라고 기록되어 있어 서로 차이가 있다. 이 점은 도선의 受戒과정이 혜철 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임을 생각하게 한다.
20) 崔惟淸 撰,〈先覺國師碑陰記〉(今西龍, 앞의 책, 111쪽)에 癸巳六月十四日 判許幷刻法孫傳持寺四 所 大中十年丙子 祖師結菴 嶺 與神人相會 開創米岾寺 十二年戊寅 開創求禮縣道詵寺 與神人聚沙 劃三國圖處 開創三國寺 咸通六年乙酉 創雲岩寺 라고 하였다.
그러한 내용을 모두 믿을 수는 없다. 위에 기록된 米岵寺 등 4곳의 사원들은 고려 중 기까지 도선의 法孫들에 의해서 傳持되었다고 전해지는 만큼, 도선 당대에 창건되었다 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들 사찰 가운데 米岵寺는 文聖王 18년(856)에 개창되었고, 道詵寺와 三國寺는 憲安王 2년(858)에 개창되었으며, 雲岩寺는 景文王 5년(865)에 세워 졌다. 도선이 옥룡사에 주석하는 864년을 기준으로 보면 米岵寺・道詵寺・三國寺의 개 창은 옥룡사에 주석하기 이전에 이루어졌고, 雲岩寺의 개창은 그 이후의 사실이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米岵寺는 도선이 神人을 만났던 곳에, 三國寺는 神人이〈三國
위의 기록에 따르면 米岵寺는 도선이 神人을 만났던 곳에, 三國寺는 神人이〈三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