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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新羅 下代 桐裏山門의 禪僧으로 활약한 道詵의 사상경향을 風水地理說과 의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道詵의 행적은 慧徹이 入寂함을 계기로 그 양상을 달리하였다. 그의 사찰창건 활동을 통해 이러한 면을 살필 수 있다. 도선은 受戒를 받고 나서 각처를 유력하며 사 찰들을 건립하였는데, 米岾寺・道詵寺・三國寺는 玉龍寺에 주석하기 이전에 세워졌다.

그런데 이들 사찰의 개창은 모두 혜철과 관련되어 이루어졌다. 즉 도선은 수계 이후에 도 계속 혜철의 영향 아래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景文王 元年(861)에 혜철이 入寂 하면서 그의 행적에는 변화가 나타났다. 경문왕 4년에 도선은 <終焉之志>를 품고 玉 龍寺에 住錫하면서 門下에 제자들을 받아들였는데, 이는 혜철의 입적을 계기로 그가 스스로 禪門을 세우는 모습으로 이해된다. 그 이듬해에 이루어지는 雲岩寺의 창건은 옥룡사를 중심으로 한 道詵系 세력의 확대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도선의 생존시에 道 詵系는 광양과 구례지역뿐만 아니라 담양지역에까지 그 세력을 확대시켰다.

둘째, 風水地理說은 주로 唯識思想을 이해하고 있던 禪僧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졌다.

먼저 曦陽山門의 智證 道憲은 풍수지리에 상당히 밝았다. 그의 사상경향은 올바른 마 음의 깨달음, 곧 心識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彌勒의 下生으로 관념되었는데, 이는 그의 사상이 유식사상과 연관되었음을 알려준다. 다음으로 眞鑑 慧昭와 朗空 行寂, 眞 鏡 審希 등도 풍수지리에 유념하였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色空雙泯>을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곧 色과 空의 융합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色空雙泯>의 사상경향은 이들이 禪宗의 입장에서 法相宗思想을 융합하려 했음을 보여주며, 이는 이들이 유식, 즉 법상 종사상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특히 심희는 戒와 識을 강조하였는데, 이 는 그의 사상이 <色空雙泯>의 사상경향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유식이 중시되었음을 알려준다. 또 後三國 쟁패기에 雲門寺에 住錫했던 寶壤도 풍수지리를 이해하였다. 곧 그는 犬城의 地勢를 풀이하여 王建의 東征에 도움을 주었다. 그의 행적은 知識이나 圓 光의 그것과 혼동되었다. 원광이나 지식은 유식사상과 관련되었으며, 이들과 연결되는 보양의 사상은 역시 유식과 관련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유식사상을 이해하였던 선

사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풍수지리적인 인식은, 그들이 유식사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풍수지리를 받아들였음을 알려준다.

셋째, 도선의 사상경향은 禪宗思想 안에 唯識, 즉 法相宗思想을 아우르는 唯心論的 인 禪思想으로 성립되었다. 그의 사상경향은 <眞空不空>으로 나타났는데, 그것은 非 有非無의 中道 를 표방하는 禪的인 유식사상으로 이해된다. 곧 <眞空不空>은 眞空이 면서 空이 아닌 非有非無의 中道實相을 드러내며, 實相을 갖추었다는 면에서 그것은 유식사상으로 이어진다. 이는 그의 사상 안에서 유식사상이 중시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도선은 제자들에게 平常心을 지킬 것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三界唯心의 유심론적 인 사상경향에서 비롯되었다. 도선의 스승인 혜철은 是心과 是慧를 강조하였는데, 이 러한 그의 사상경향이 도선에게 그대로 이어져 도선의 사상도 유심론적인 성격으로 나타났다. 곧 도선이 평상심을 강조하였음은 동리산문의 유심론적인 사상경향을 배경 으로 형성되었다. 그의 제자인 경보도 역시 평상심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역시 도선의 영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넷째, 風水地理說은 도선의 유심론적인 사상경향을 바탕으로 형성될 수 있었다. 그 의 풍수지리설은 山川의 順逆形勢를 살피는 것으로, 그것은 구체적인 地相을 드러내려 는 것이므로 法相에 대한 인식과 통한다. 도선의 사상경향은 유식사상을 아우르고 있 었으므로 山水의 形勢를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全國山水의 順逆形勢를 살펴 정해진 明堂을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그의 풍수지리설이 형성될 수 있었다.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비보사상을 중시하였다. 비보는 국토의 합리적인 운영방안으로 내세워졌다. 이러한 비보사상은 도선 풍수지리설의 독특한 경향으로 이해할 수 있으 며, 그것을 내세우는 과정에서 도선의 관심은 산수의 형세에 대한 인식보다는 비보에 맞춰지게 되었다. 곧 그의 풍수지리설은 유심론적인 선사상을 바탕으로 형성되었지만, 그것의 특징은 비보사상으로 나타났다.

다섯째, 道詵의 風水地理說은 裨補에서 圖讖으로 전개되었는데, 이것은 唯心論的 禪 思想이 가지는 근본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유심론적인 선사상은 선종사상 안에 유 식, 즉 법상종사상을 아우르는 것이었다. 유식사상을 중시했기 때문에 그것은 풍수지 리설을 형성시킬 수 있었지만, 현상계의 존재형태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유식사상 과 그 논리를 초월하려는 선종사상은 서로 입장이 모순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비보에서 도참으로 흐르게 되었다.

도선의 풍수지리설에서 비보사상은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살피지 못 하였다. 또한 그것이 도참으로 전개되는 과정을 다루지 못한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러한 점들은 앞으로의 과제로 삼아 계속 보완해 나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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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錄 1】

【附錄 2】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