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艸衣禪師의 茶道觀 硏究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2

Share "艸衣禪師의 茶道觀 硏究"

Copied!
152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碩 士 學 位 論 文

艸衣禪師의 茶道觀 硏究

指導敎授 韓 泰 植(普光)

東國大學校 大學院 禪學科 金 英 姬

2 0 0 3

(2)

碩 士 學 位 論 文

艸衣禪師의 茶道觀 硏究

指導敎授 韓 泰 植(普光)

東國大學校 大學院 禪學科 金 英 姬

2 0 0 3

(3)

碩 士 學 位 論 文

艸衣禪師의 茶道觀 硏究

金 英 姬(修忍)

指導敎授 韓 泰 植(普光)

이 論文을 碩士學位論文으로 提出함.

2003年 12月 日

金英姬의 文學 碩士學位 論文을 認准함 2003年 12月 日

委員長 (인) 委 員 (인) 委 員 (인)

東國大學校 大學院

(4)

目 次

第1章 序 論 ···1

第1節 硏究의 目的 ···1

第2節 硏究의 範圍 및 方法 ···2

第1節 硏究現況 ···4

第2章 艸衣禪師의 生涯와 思想 ···7

第1節 艸衣禪師의 生涯 ···7

1. 誕生과 出家 ···7

2. 求道修行과 悟道 ···9

3. 著述과 入寂年代 ···17

第2節 艸衣禪師의 思想 ···22

1. 禪思想 ···25

2. 茶思想 ···29

3. 詩思想 ···34

第3章 東茶頌 의 內容分析과 特徵 ···39

第1節 時代的 背景과 著述動機 ···39

1. 時代的 背景 ···40

(1) 社會的 背景 ···40

(2) 佛敎的 背景 ···42

2. 著述動機 ···47

第2節 東茶頌 의 構成 ···49

第3節 東茶頌 의 內容的 分析 ···52

(5)

1. 茶의 起源 ···54

2. 茶名 ···55

3 中國茶에 대한 神異的 傳說 ···56

4. 차나무의 생김새와 입지조건 ···58

5. 茶의 藥理 ․生理的인 效能 ···61

(1) 心身回復 ···61

(2) 熟醉와 睡魔除去 ···62

(3) 頭痛治療 ···63

(4) 八耋還童 ···64

(5) 消化劑 ···66

6. 물에 대한 품평 ···67

7. 法喜禪悅茶 ···71

第4節 東茶頌 의 特徵 ···74

第4章 艸衣禪師의 茶道觀 ···77

第1節 禪宗에서 茶가 發達하게 된 動機 ···77

1. 禪修行의 手段 ···78

2. 禪의 公案提示 方法 ···79

第2節 艸衣禪師의 茶道 ···84

1. 東茶의 理論的 定立 ···85

(1) 맛과 약효를 겸함 ···86

(2) 土壤의 우수성 ···89

(3) 採茶時期 ···90

2. 東茶의 實踐 ···92

(1) 一染失眞 ···93

(6)

(2) 九難四香 ···94

(3) 造茶 ···96

(4) 泉品 ···97

(5) 泡法 ···98

(6) 茗席 ···103

(7) 茶道 ···104

3. 東茶文學의 定立 ··· 112

第5章 艸衣茶의 傳承 ···116

第1節 梵海禪師의 艸衣茶 ··· 118

1. 茶藥說 ···119

2. 茶詩 ···121

第2節 應松의 釜炒茶 ···128

1. 茶生活 ···129

2. 製茶法 ···131

第3節 曉堂의 蒸茶 ···132

1. 茶生活 ···134

2. 製茶法 ···134

第6章 結 論 ···136

參 考 文 獻 ··· 140

ABSTRACT ···144

(7)

第1章 序 論

第1節 硏究의 目的

佛敎가 한반도에 전래된 이래 광범위하고 심오한 敎義는 이 땅의 전통문 화와 결합하면서 뿌리를 내렸다. 佛敎의 역사만큼이나 우리 茶文化는 숱한 우여곡절 속에 禪宗의 茶禪一如․茶禪一味思想으로 명맥을 유지해 왔다.

朝鮮後期에는 艸衣禪師가 東茶頌 과 茶神傳 을 저술하여 우리 茶文化를 정립하고 정신을 계승하는 데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우리에게 전해지는 몇 편 되지 않는 茶書 중에서도 해결되어야 할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 艸衣禪師가 쓴 東茶頌 과 萬寶全書에서 초 출한 茶神傳 이다. 東茶頌 과 茶神傳 의 저자와 저술동기, 저술방식, 출 전, 그리고 필사본의 오류유무에 관해 서로 다른 의견이 상존한다. 이는 원 본이 상실되고 필사본만 전하기 때문이다.

본 논고는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서 韓國佛敎全書 第十冊1)에 실린 東茶頌 을 중심으로 朝鮮後期 茶道를 정립한 艸衣禪師의 茶道觀에 대해 서 살펴보고자 한다. 정치․경제․사회․종교 등이 어지러웠던 당시 한반 도의 땅끝 大芚寺에서 東茶에 대한 자긍심으로 茶文化를 부흥시킨 艸衣禪 師의 역할은 대단했다고 할 수 있다. 佛敎의 스님들이 천민으로 분류되었 던 당시의 상황으로 본다면 儒․佛․仙을 넘나들며 양반지식인들과 東茶 에 대한 談笑를 나눌 수 있었다는 것은 스님의 깊고 넓은 수행력에서 가

1) 意恂作 東茶頌 (韓佛全10, pp.873下-876中).

(8)

능했을 것이다. 지금처럼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가 出家 修行者의 신분으로 茶가 항상 필요했고, 茶를 마시면서 禪修 行하는 것이 둘이 아니라는 茶禪一味의 思想에서 東茶頌 이라는 茶의 古 典을 저술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海居道人의 정중하고도 간곡한 권고에 따라 東茶頌 을 저술한 점도 있지만, 이것은 수행자의 입장에서 보면 日常的인 茶生活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이미 萬寶全書 에서 초출한 茶神傳 을 저술한 경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禪講을 겸하고 儒敎와 道敎

․詩․書․畵에 능통하였으며, 梵語에도 造詣가 뛰어난 學僧이기도 했다.

艸衣禪師의 思想에 대한 연구는 禪思想과 茶思想, 詩思想의 세 가지 측 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禪思想은 대략 禪門四辨漫語 와 艸衣禪課 에서 살펴볼 수 있다. 詩思想은 一枝庵詩稿 와 艸衣詩稿 등에서 朝鮮後期의 詩風에 대한 흐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禪思想과 詩思想은 此後의 연구과 제로 삼고자 한다. 그리고 본 논고에서는 禪思想을 바탕으로 해서 茶思想을 드러내는 것으로 한정을 지었다. 스님의 修行履歷 가운데 특히『東茶頌 에 나타나 있는 茶道觀에 대하여 중점적으로 고찰해보고자 한다. 艸衣의 生涯 와 思想을 槪括하면서 細部的으로 禪의 바탕에서 출발한 艸衣茶道의 내용 과 意義를 부연하여 東茶頌 을 중심으로 艸衣의 深妙한 茶道世界를 규명 하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는 艸衣의 茶生活을 제대로 이해하고 올바르게 傳承하기 위해서다.

第2節 硏究의 範圍 및 方法

海南 大芚寺의 艸衣禪師에 대해 茶와 관련된 분야에서는 ‘韓國의 陸羽’2)

(9)

․‘茶道의 達人’3)‘․朝鮮의 陸羽’4) 등으로 평가하고 있다. 艸衣禪師는 茶禪 一致요 詩禪一致며 茶詩一體인 우리나라 역사상 자랑할 茶僧이며 茶聖이라 일컬을 만하다.5) 한편 東茶頌 은 ‘朝鮮의 茶經’으로6) 평가되고 있다.

艸衣禪師는 東茶頌 을 저술하여 전통차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했다. 중 국에는 陸羽의 茶經 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艸衣禪師의 東茶頌 이 있 다. 여기에 대한 硏究方法으로 陸羽의 茶經 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은 艸 衣禪師의『東茶頌 에 나타나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기후조건 에 맞는 東茶의 특성을 바르게 알고 東茶文化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제시 하고자 한다.

본 논문의 제Ⅱ장에서는 艸衣禪師의 生涯와 思想을 살펴보면서 艸衣禪師 의 家風을 이해하고, 大芚寺를 거쳐 내려오는 法脈과 저술된 문헌에 대해 槪括한다.

제Ⅲ장에서는 東茶頌」의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위하여 먼저 1. 東茶頌 의 時代的 背景과 著述動機

2. 東茶頌 의 構成

3. 東茶頌 의 內容的 分析

4. 東茶頌 의 特徵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제Ⅳ장에서 東茶頌 은 艸衣禪師가 茶神傳 을 엮으면서 茶思想에 대한 깊이를 더하여 연구하고 고증된 이론과 茶生活의 실천에서 나온 체득된 것 이다. 東茶頌 을 통해서 艸衣禪師의 茶道觀을 살펴볼 것이다. 한편 朝鮮後 期에는 어떤 飮茶風이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왔는지를 살펴보고, 艸衣禪

2) 崔凡述 韓國의 茶道 (寶蓮閣, 1980) p.32.

3) 文一平 湖岩全集 2卷 (一成堂, 1948) p.380.

4) 文一平 湖岩全集 2卷 (一成堂, 1948) p.381.

5) 이귀례 韓國의 茶文化 (悅話堂, 2002) p.81.

6) 文一平 湖岩全集 2卷 (一成堂, 1948) p.381.

(10)

師가 말하는 茶道의 요지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제Ⅴ장에서는 艸衣茶의 飮茶風은 趙州風이라 할 수 있다. 趙州風을 전승 하고 있다는 것은 茶神傳 을 마무리 하면서 “叢林에는 趙州風을 확인할 수 있으나 모두 茶道를 알지 못하는 까닭에 이를 騰抄하여 후학들에게 보 이는 바이다”라고 하는데서 확인할 수 있다.7) 이러한 艸衣茶에 대하여 가 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艸衣禪師의 茶文化를 계승하고 발전시켜온 전승 자들의 茶生活이라고 할 수 있다. 艸衣茶 傳承者인 梵海, 應松, 曉堂 등의 茶生活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제Ⅵ장 結論에서는 고찰해 본 바를 정리하고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를 이 후 연구과제로 삼고자 한다. 艸衣禪師의 茶道觀을 더 깊게 연구하는 과정 에서 그의 茶生活이 禪宗의 일상적인 禪修行에서 나온 實踐茶道로 규명될 것으로 기대한다.

第3節 硏究現況

오늘날 茶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는 활발한 편이다. 물론 다른 나라의 연 구 실적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국제간 茶文化에 대한 심포지움이나 세 미나도 종종 열린다. 茶文化 보급에 헌신한 茶人들에 의하여 1981년 5월 25일 경남 진주에서 “茶의 날”이 선포되기도 했다.

국내 대표적인 연구자로 김명배를 들 수 있다. 그는 한중일 삼국의 茶에 대한 이론을 집중 연구하여 체계적인 학술논문을 많이 발표한 茶道學界의 선구자이다. 선혜스님․여연스님․용운스님․응송스님․효당스님 등은 茶

7) 意恂抄錄 茶神傳 (韓佛全10, p.873中).

(11)

僧들로서 茶禪文化 보급에 기여한 분들이다. 그밖에 김상현․정상구․정영 선 등의 학자들을 들 수 있다. 김상현은 東茶頌 에 대한 이론연구의 업적 이 있고, 효당 최범술은 우리나라의 上古 茶道硏究에 괄목할 성취를 보였 고, 정상구는 茶道를 이론적, 문화사적으로 정립하는 공을 세웠다. 용운스 님은 佛家理論과 발전과정을 체계적으로 집약하는 등 고전연구 및 선인 재 조명에 업적을 남겼다.8) 應松의 東茶正統考 와 선혜스님․여연스님의 차 문화 운동은 東茶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한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曉堂은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韓國의 茶․茶論 ․ 韓國의 茶道 를 저술하여 茶道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면서 艸衣禪師를 ‘韓國茶의 中興祖’라 고 칭송하였으며, 스님의 茶道觀을 ‘茶禪一體’․‘茶禪一味’9)라고 집약하였 다. 이것을 계기로 茶人들은 艸衣禪師와 茶에 관심을 기울이고 一枝庵10)을 茶의 聖地로 복원하면서 東茶에 대한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茶文化를 바르 게 인식하고자 활발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

김상현 「艸衣禪師의 茶道觀」 ( 史學誌 10, 1976) 朴暎熙 東茶正統考 (호영출판사, 1985)

龍雲 艸衣禪師全集 (아세아문화사, 1985)

채정복 「艸衣禪師의 茶禪修行論」 (碩士學位論文, 연세대, 1992) 林鍾旭 艸衣選集 (東文選, 1993)

김명배 茶道學論考 (大光文化社, 1996) 通光 譯 艸衣茶禪集 (佛光出版部, 1996)

나남미 「朝鮮後期의 茶道思想 硏究」 (碩士學位論文, 中央大, 1997)

8) 나남미 「朝鮮後期의 茶道思想 硏究」 (碩士學位論文, 中央大, 1997) p.3.

9) 崔凡述 韓國의 茶道 (寶蓮閣, 1980) p.116.

10) 1979년 1월 韓國茶人會가 창립되고 1980년 4월 一枝庵 복원을 위한 추진위원

회가 결성된 후에 茶人들의 노력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12)

以上 선행된 연구가 있지만, 본 논고에서는 艸衣禪師가 어떤 동기에서 東茶頌 을 저술했으며, 이러한 茶書를 통해 무엇을 전달하고자 했고, 茶生 活에서 얻어지는 茶道란 무엇인가에 대한 艸衣禪師의 茶道觀을 고찰해 보 고자 한다.

(13)

第2章 艸衣禪師의 生涯와 思想

第1節 艸衣禪師의 生涯

우리나라 茶道의 中興祖이며 茶禪一如의 思想家로서 朝鮮後期 꺼져가던 禪文化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 艸衣禪師의 生涯를 크게 誕生과 出家, 求道 修行과 悟道, 著述과 入寂年代 등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 誕生과 出家

艸衣禪師(1786-1865)는 정조 10년 4월 5일 전남 무안군 삼향면에서 태어 났다. 스님의 부모 형제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스님의 法名은 意恂이고, 艸衣는11) 法號이며, 字는 中孚로서 務安張氏의 후손이다. 스님의 어머니가 꿈에 큰 별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잉 태하여 丙午年(1786) 4월 5일에 태어났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12) 別號로는 海翁․海老師․紫芋山房․休菴病禪․紫霞道人․芋社․海上也耋 人․一枝庵 등이 있다.13)

11) 艸와 草는 同一語인데, ‘草’ 그 音을 나타내기 위해 ‘早’가 붙여졌다. ‘艸’는 풀 의 形象으로 풀을 뜻한다.

12) 意恂 艸衣詩稿 卷下 (韓佛全10, p.869中).

按師法名意恂字中孚 務安張氏方其身也 母夢大星投懷 以丙午四月五日來.

13) 艸衣에 대한 이러한 別號는 「阮堂先生全集 卷五에 金正喜가 艸衣禪師에게 준

38회의 「與艸衣」라는 서신에 나타나 있고, 그 외에도 小癡의 夢緣錄 , 艸衣

(14)

5세(1790) 무렵 강가에서 놀다가 잘못하여 깊은 곳에 빠져 급류에 휘말 렸을 때 누군가가 구출하였다고 한다.14) 庚申年인 정조 24년 15세(1800)의 나이로 全南 羅州郡 茶道面 德龍山 雲興寺에서 碧峰敏性스님을 은사로 출 가하였다.

우리나라에서 茶道란 낱말이 땅이름으로 사용된 곳은 佛會寺와 雲興寺가 있는 全南 羅州郡 茶道面 뿐이다.15) 이곳은(所) 특수 행정구역으로 삼국시 대 이후 각 지역의 토산물을 공물로 나라에 바쳤다.16) 茶所는 차를 만들어 바치던 곳이다. 世宗實錄地理志 에 「古茶所」라고 기록된 고려의 茶所를 살펴보면 19개의 茶所 가운데 南平懸 茶所도 포함된다.17) 雲興寺는 행정구 역이 바꾸기 이전에 南平懸에 소속된 곳이다. 예로부터 이 주변은 차나무 가 무성하고 이러한 차나무들은 거의가 사찰주변에 야생하고 있었다. 스님 들은 茶生活을 유지하기 위하여 차나무를 재배하고 번식시켰다.18) 이러한 雲興寺의 출가 인연은 후일에 艸衣禪師의 茶思想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음 을 알 수 있다.

그리고 申櫶(1810-1888)이 撰한 「賜號普濟尊者艸衣大宗師意恂塔碑銘」과 李喜豊이 撰한 「艸衣大師塔銘」, 九階(梵海)和尙이 저술한 『東師列傳』 중 의 「艸衣禪伯傳」, 留耕道人이 찬한 「艸衣大禪師韻」, 진도사람 愚堂이 쓴 「 大芚寺草庵序」, 許小痴의 夢緣錄 , 李能和의 朝鮮佛敎通史 下卷을 통해 그 행장을 살펴볼 수 있다.19) 이 가운데 艸衣禪師의 생애를 보다 정확하고

集 上・下의 내용에 나타난 것이다.

14) 意恂 艸衣詩稿 卷下 上同.

五歲時出遊江渚誤墮悍流中 若有挾而出者.

15) 이귀례 韓國의 茶文化 (悅話堂, 2002) p.81.

16) 邊太燮 韓國史通論 (三英社, 1990) p.254.

17) 노사신 외 新增東國輿地勝覽 제36권 (명문당, 1994) p.644.

18) 석용운 韓國茶藝 (圖書出版 艸衣, 2000) pp.29-30.

19) 龍雲 艸衣禪師 全集 (亞細亞文化社, 1985) p.1.

(15)

자세히 기록한 문헌으로 「艸衣大宗師塔碑銘」과 「艸衣禪伯傳」을 들 수 있 다. 申櫶의 「艸衣大宗師塔碑銘」에는 지은이인 申櫶이 「의순공에게서 보고 들은 바로써 붓을 든다」20)라고 기록하여 사실적이고도 생생한 艸衣禪師의 생전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한다. 한편 大芚寺 門徒인 梵海禪師가 저술한 「 艸衣禪伯傳」은 大芚寺에 전해져오는 자료와 전기들을 종합적으로 기록했다 고 볼 수 있다. 이 두 자료를 통해 艸衣禪師의 生涯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2. 求道修行과 悟道

19세(1804, 순조 4) 무렵 전남 영암군 월출산을 혼자 지나다가 그 산세가 기이하고 아름다움에 빠져 저도 모르게 그 산봉우리에 올라갔다. 멀리 바 다에서 보름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서 황홀하여 마치 杲老21)가 훈풍을 만 난 듯 찰라에 가슴에 맺힌 것이 풀리었다. 이후로부터 가는 곳마다 걸림이 없었다.22) 그 후 해남 大芚寺의 玩虎禪師( ∼1807)를 戒師로 具足戒를 受 持하고 法脈을 이었다. 玩虎禪師는 大芚寺에 傳燈해온 蓮潭有一禪師(172 0∼1799)의 嫡嗣로서 높은 수행과 학덕을 겸비한 禪師였다. 艸衣禪師의 法 脈을 列擧하면 다음과 같다.

玩虎禪師는 蓮潭의 법손으로 曹溪門人이다. 그 법맥을 보면 西山大師

20) 意恂 艸衣詩稿 卷下 (韓佛全10, p.869中).

乃以所見聞於恂公者 爲之言.

21) 杲老는 宋나라 때의 看話禪을 주장한 大慧宗杲禪師를 말한다.

22) 意恂 艸衣詩稿 卷下 (韓佛全10, p.869中).

弱冠過月出山 愛其奇秀 不覺縱步獨躋其嶺 望見滿月出海 怳若杲老之遇薰風

去却碍膺之物 自是以往 所遇無所忤者.

(16)

(1520∼1604)에게서 鞭羊彦機禪師(1581∼1644)가 나왔고, 鞭羊禪師에게서 楓潭義諶禪師(1592∼1665)가 나왔다. 楓潭禪師에게서 月潭雪齋禪師(생몰연 대 미상)가, 月潭禪師에게서 喚醒志安禪師(1664∼1729)가, 喚醒禪師에게서 虎岩體淨禪師(1687∼1748)가, 虎岩禪師에게서 蓮潭有一禪師가, 蓮潭禪師에 게서 白蓮禱演禪師(1737∼1807)가. 白蓮禪師에게서 玩虎淪佑禪師가, 玩虎禪 師에게서 艸衣意恂이 나온 것이다.

艸衣는 玩虎禪師에게 建幢함으로 인하여 얻어 堂號이다. 이때 받은 ‘艸 衣’라는 堂號(法號)에 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23)

첫째는 고려말 野雲比丘가 지은 自警文 가운데 “풀뿌리와 나무열매로 주린 창자를 위로하고, 솔잎과 풀옷으로 몸을 가린다.”(草根木果慰飢腸 松 落草衣遮色身)는 구절에서 유래했다는 崔凡述의 설,24) 둘째, 中國史略 가 운데 “굴을 파서 즐겨 살며 나무를 얽어매어 집을 삼고 나무열매를 먹고 풀옷을 입는다.”(穴居陶居構木爲巢 食木實衣草衣)에서 따왔다는 한기두의 설,25) 셋째는 申櫶이 撰한 「艸衣大宗師意恂塔碑銘」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艸衣는 그 염화의 이름이다.”(草衣其拈花之號也)라는 설, 넷째는 紫霞 申 緯가 艸衣集 序文에서 “一枝庵은 호남승 장의순의 재호이다. 의순이 詩 를 잘하므로 世上 사람들이 그를 초의스님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름이 높더 라.”26)고 했다는 설, 다섯째 ‘艸衣’의 法號는 拈花之號이면서 동시에 첫째 설과 둘째 설의 뜻이 함께 담긴 것이라는 채정복의 설이다.27)

23) 法號는 建幢함으로 인하여 얻어지는 이름이다. 法幢을 세운다는 뜻으로 行解 가 높아서 중생의 師表가 될만하면 佛敎에서는 法脈을 잇는 것을 의미하고 入室이라고 한다.

24) 崔凡述 韓國의 茶道 (寶蓮閣, 1973) pp.116-117.

25) 한기두 「艸衣의 四辨漫語」 ( 원광대학 논문집 5輯, 1970) p.5.

26) 意恂 艸衣詩稿 卷上 (韓佛全10, p.831上).

序文에서 ‘一枝庵 湖南僧意恂齋號也 意恂 工詩 世號草衣師 其名藉甚.’

27) 채정복 「艸衣禪師의 茶禪修行論」 (碩士學位論文, 연세대, 1992) p.4

(17)

‘艸衣’28)라는 뜻은 여러 가지가 있다. 불교 수행자들이 입는 옷을 통칭 ‘法 服’이라고 부르지만 袈裟, 長衫 등 모양이나 용도에 따라 僧服은 각기 다른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佛敎에서는 예로부터 ‘僧服’ 보다는 ‘糞掃衣’라는 명 칭으로 더 많이 불려왔다. 糞掃衣는 사람들이 입다 버린 헌 옷을 가지고 만 든 袈裟를 일컫는 말로 원래는 똥 묻은 천이나 얻은 천을 조각조각 이어 꿰 매 만들었다. 불제자가 貪心을 여의기 위해 검소함을 닦는다는 뜻으로 입는 옷이라 해서 ‘法衣’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糞掃衣’와 ‘艸衣29)’라는 글자가 갖고 있는 뜻 그대로 청빈한 승가의 생활을 상징하는 수행자의 옷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玩虎禪師가 수법제자에게 주어진 ‘艸衣’의 堂號는 申櫶의 세 번째 설이 담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님은 23세가 되면서 더욱 용맹 정진하여 제방의 善知識을 두루 찾아 가르침을 받고, 佛敎의 經․律․論 三藏에 通達하여 막힘이 없게 되었다.

蓮潭有一禪師의 禪脈을 繼承하고, 지리산 七佛庵에서 정진 끝에 끊어진 戒 脈을 계승한 錦潭律師의 戒脈을 傳戒받았다.30)

朝鮮後期의 大隱郞旿(1780∼1841)는 錦潭和尙에게 출가하여 그의 제자가

28) 梵網經述記 上 (韓佛全2, p.127上-下).

人棄捨此戒 雖居山苦行 食果服藥 與禽獸無異 或有人伹服水爲戒或 著艸衣 或著木皮衣 受行苦行 以無此戒 空無所得 若有人雖處高堂 無此戒 空無所得 若有人雖處高堂大殿 好衣美食 而能行此戒者 得生好處及得道果.

29) 覺岸 東師列傳 卷四 (韓佛全10, p.1039上).

門行雖多 特與縞衣荷衣艸衣 互相鍾愛 諸山之稱三衣者茶矣.

30) 李能和 朝鮮佛敎通史 上中 (寶蓮閣, 1972) pp.78-79.

月出之大隱律師 東師列傳 師出家於月出山剃染於錦潭禪師 遍參蓮潭 白蓮義菴

朗巖 玩虎蓮坡諸大德 道已成拈香於錦潭禪師 開堂提接 物情猶云云 則大隱始終

爲 錦潭之弟子也 今據諸方叢林喧傳之說 潭隱兩師 將欲設戒 患無師承 遂共謀

之 先禱于智異山之七佛庵 驗其瑞應 卽爲戒師 虞禱七日 忽見自佛像放瑞光 灌

大隱頂 錦潭遂受戒于大隱 如新羅朗智大師 受戒于沙彌智通之古事焉 故以法系

言之 錦潭爲大隱之師 以戒詠言之 錦潭爲大隱之資 而以戒法傳于大興寺之艸衣

禪師 艸衣傳之梵海和上 又梵海授戒之弟子曰大興翠雲 仙岩之錦峰 海印之霽山

等諸和尙是也 霽山禪師 于傳于本寺之龍城.

(18)

되었다. 그런데 그는 스승과 하안거를 수행정진하던 중 慈藏과 眞表律師 이후 우리나라의 戒脈이 단절되었음을 탄식하였다. 그는 스승인 錦潭과 함 께 七佛庵에서 기도를 하여 불보살로부터 瑞祥受戒 받을 것을 발원하고, 먼저 상서로운 기운을 받는 사람이 계를 주기로 하자는 약속을 하고 기도 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7일만에 제자인 大隱和尙의 머리에 서광이 비쳤다.

그래서 제자인 大隱이 스승인 錦潭에게 大戒를 주어 師弟관계가 바뀌게 되 었다. 이러한 계맥은 錦潭이 艸衣意恂에게, 艸衣는 梵海에게, 梵海는 禪谷 에게, 禪谷은 龍城에게로 代代相傳하였다.31)

艸衣禪師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24세(1809) 때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보내던 茶山 丁若鏞(1762∼1836)과 교유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茶山 丁 若鏞은 이보다 먼저 萬德山 白蓮社의 兒庵禪師와 교유하면서 茶生活을 시작 했다. 丁若鏞은 艸衣禪師에게 茶生活에 대하여 묻고, 艸衣禪師는『周易 과 儒書를 배우면서 詩道에 눈을 뜬다.

30세(1815) 되던 해 처음 한양에 올라와서 勝雪 金正喜(1786-1856)․山 泉金命喜․琴眉 金相喜의 형제와 丁若鏞의 아들인 酉山 丁學淵․耘逋 丁學 游의 형제, 그리고 紫霞 申緯․洪顯周 등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이들 文人 들과의 교유는 평생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和韻한 시가 60여 수 있다.

艸衣禪師가 전국의 名山大刹인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 등을 찾아 선경에 도취하다가 32세(1817) 때 6월 경주 불국사를 찾았다. 신라 천년의 갖가지 사연들이 갈무리져 있는 유서 깊은 고찰을 찾아 「佛國寺 懷古」의 九首를 남기고 있다.32)

31) 韓普光 大覺思想 創刊號 (大覺出板部1998) p.39.

32) 艸衣 艸衣詩稿 卷上 (韓佛全10, pp.835下-836上).

野鸎烟樹緣迢迢 蕭寺無人晝寂廖 翠竹樓連緣楊閣 紫霞門對白雲穚(一) 昇天穚外九蓮池 七寶樓臺水底移 無影塔看還有影 阿斯來鑑到今疑(二) …

苦憶先生久在行 紫霞門外看新晴 佛國人間寧易得 相邀始可遂閒情(九)

(19)

38세(1823) 때에 玩虎․兒庵․縞衣․袖龍․騎漁 등과 더불어 大芚寺誌

33) 편집에 참여하고 茶山 丁若鏞에게 부탁하여 大芚寺誌 를 필사했다.

朝鮮佛敎通史 에 의하면

해남 대흥사 대둔사지를 편찬했다. 초의와 수용스님이 편집하고 호의 스님과 기어스님이 교정하였으며, 완호스님과 아암스님이 감정을 해 서 대둔사지 를 편찬하기에 이른 것이다.

라고 하였다.34)

艸衣禪師가 一枝庵35)에 언제부터 結庵을 하였는가에 대한 年代는 확실히 밝혀져 있지 않고 다만 추정하고 있다. 그 근거로 삼는 첫째는 申櫶이 撰 한 「艸衣大宗師塔碑銘」에 “一枝庵에서 홀로 止觀하기를 사십년이 된다”는 것,36) 둘째는 癸巳年(1833)에 艸衣禪師가 지은 ‘種竹’이라는 詩의 내용에

“아득히 산봉우리엔 구름만 걸려 있네. 십년을 벼르면서 돌아가고자 했지 만 대나무와도 영영 이별해야 하나 어제 와 다시 우사를 경영하니 금강산 과도 그리 멀지 않다네. …37)”라고 하여 10년간이나 돌아오지 못했다. 이

33) 艸衣禪師의 代까지는 寺刹의 名이 ‘大芚寺’라고 불리었고, 梵海禪師 당시에는

‘大興寺’로 改名하였다가 다시 근래에 ‘大芚寺’로 寺名이 還元되었다.

34) 李能和 朝鮮佛敎通史 下 (寶蓮閣, 1972) p.765.

海南大興寺大芚寺志(玩虎淪祐鑑定 兒庵惠藏留授 袖龍賾性 艸衣意恂編輯 騎漁 慈弘縞衣始悟校正) 大芚寺者 大興寺也.

35) 김명배 艸衣全集 제1집 「茶論」 (艸衣文化祭集行委員會, 1992) pp.177-178.

「일지암」의 유래에 대해서 몇 가지 설이 있다. 김명배는 첫째 「장자」의 「 逍遙遊」편에 나온 ‘뱁새가 깊은 숲에 보금자리를 만드는데 필요한 것은 나 무 한 가지에 불과하다는 것, 사람은 각자 자기 분수에 만족하여야 한다.’(鷦 鷯巢林於深不過一枝)는 설, 둘째, 당나라 寒山子스님은 ‘늘 생각하노니 뱁새 도 나무 한 가지에서 몸을 편안히 의존하고 산다.’(常念鷦鷯鳥安身在一枝)는 偈頌에서 인용했다는 설이다.

36) 意恂 艸衣詩稿 卷下 (韓佛全10, p.869下).

師乃歛跡崙光 就頭於山頂藤蘿陰中 結一小庵 編曰一枝 獨處止觀四十年餘.

37) 意恂 艸衣詩稿 卷上 (韓佛全10, p.850中).

(20)

詩를 지은 때가 艸衣禪師의 48세이었다. 셋째는 艸衣禪師가 癸卯年(1843)에 지은 詩句38)에 “이로부터 온갖 일들 모두 그만두어라 한갓지게 이십년을 머무를 수 있겠네”라고 하니 그때가 艸衣禪師의 58세 때이니 곧 20여 년전 이 된다. 따라서 一枝庵을 結庵한 시기는 39세(1824) 때로 볼 수 있다. 자 신의 명성이 세상에 알려지자 은거의 뜻을 갖고 大芚寺 동쪽 계곡으로 들 어가 一枝庵을 중건하고, 그 후 사십 여년 동안 止觀을 닦으며 일생을 보 내는 근거지로 삼았다.

小癡許維는 艸衣禪師가 거처하는 곳은 두륜산 꼭대기에 있는데, 소나무 가 울창하고 대나무가 무성한 곳에 두어 칸 초가를 얽어 그 속에서 살았으 며 수양버들이 처마를 스치고 작은 꽃들은 뜰에 가득하여 함께 어울리면서 뜰 복판에 파 둔 상하 두 연못 속에 비치어 아롱지고 추녀 밑에는 크고 작 은 茶 절구를 마련해 두었다고 한다.39)

艸衣禪師는 43세(1828년)에 東茶의 근원지인 지리산 화개동의 七佛庵 亞 字房에서 參禪하는 여가에 淸의 毛煥文이 엮은 백과사전 격인『萬寶全書』

가운데『茶經採要 에서 『茶神傳 을 抄錄하고, 45세(1830) 되던 해 侍者인 修洪의 청에 의해 一枝庵에서 『茶神傳 을 저술하였다.

50세(1835) 때에는 27세의 小癡40)가 大芚寺에 들어가 一枝庵에 방을 빌

遙遙滯雲頂 十年歸不得 恨別此君永 昨來營芋社 金剛拒不夐 38) 意恂 艸衣詩稿 卷下 (韓佛全10, p.856中).

從今萬事都休了 猶得閒居二十年.

39) 許維 小癡寶錄 (瑞文堂, 2001) pp.70-71.

40) 許維 위의 책 p.212.

小癡는 1809년 진도에서 출생했다. 字는 摩詰, 號는 小癡, 이름은 維라 하다가 후에 鍊이라 불렀다. 1893년(고종30) 9월에 85세로 운명하기까지 朝鮮末期 南 宗文人畵의 大家이다. 흔히 小癡를 詩 ・ 書 ・ 畵의 三絶이라 했다.

특히 두륜산의 艸衣禪師 밑에 들어가 그림을 시작한다. 金正喜가 小癡의 예

술 세계를 이룩해 준 스승이라면 艸衣禪師는 화엄의 길을 잡아주고 인생의

눈을 뜨게 해준 스승이다. 艸衣禪師는 大宗師이면서 덕망과 학식이 뛰어났고

一枝庵에 머무르면서 艸衣禪師의 지도를 받고 현재 태평양다예박물관에 소장

(21)

어 거처하면서41) 艸衣禪師에게 詩․書․畵 등을 지도 받아 습작을 하였다.

大芚寺에 남아있는 10여점의 탱화와 전국의 寺刹에 걸려있는 몇 점의 佛畵 는 艸衣禪師가 그렸거나 스님의 지도아래 제자들이 그린 것이다.42)

52세(1837) 봄 艸衣禪師는 洪縣周의 부탁으로 一枝庵에서 韓國의 茶經이 라 할 수 있는 東茶頌 을 저술하였다. 東茶頌 은 우리나라 茶의 聖典으 로 높이 추앙받고 있으며 朝鮮時代 전 기간을 통해 보더라도 茶의 專門書 로서 가장 충실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43) 이 시기에 文字般若集 도 저술 하게 된다.

55세(1840)에 憲宗으로부터 ‘大覺登階普濟尊者艸衣大禪師’라는 스님으로 서 최상위인 賜號를 하사 받았다. 왕사제도가 사라진 朝鮮中期 이후에 국 왕으로부터 賜號를 받는다는 것은 스님으로선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처럼 스님의 학덕이 널리 알려져 많은 선비들과 교유했으며, 왕사나 국사제도가 폐지된 조선시대에 憲宗으로부터 賜號를 받았다는 것은 오로지 스님의 학 덕과 지행이 모두 높았기 때문이다. 왕사제도가 폐지된 朝鮮中期 이후에 賜號를 받은 사람은 스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해 9월에 勝雪 金正喜 는 제주도 大靜에 유배된다.

56세(1843) 때 白坡禪師(1767∼1852)가 白羊寺에 은거하며 八十餘歲가 되었는데 스스로 이르기를 “나는 십육세 때부터 禪에 뛰어 들었지만 일찍 이 한번도 물러나지 않았다고 하면서 매번 臨濟禪師의 玄要句를 얘기하며 機用을 분첩(分貼: 약재를 나누어 첩약을 만드는 것으로 중생의 근기에 따 라 제접)하면 깨달을 것”이라고 하였다. 艸衣禪師가 白坡禪師의 잘못된 곳

되어 보관된 초상화도 小癡 작품이다.

41) 許維 위의 책 p.40.

42) 龍雲 艸衣禪師 全集 (亞細亞文化社, 1985) p.6.

「觀世音菩薩像」과 「準提菩薩像」, 「四十二手十一面觀世音菩薩像」이 두 점 보관, 단청은 조사전의 「大光明殿」, 「寶蓮閣」 등이 남아 있다.

43) 임혜봉 茶聖 초의선사와 대둔사 다맥 (예문서원, 2001) p.84.

(22)

을 지적하며 나의 견해를 묻는지라 내가 스님도 잘못된 곳이 있는 듯 하다 고 하니 스님은 나의 견해를 웃음으로 받아넘기면서 말하기를 ‘白坡禪師와 나의 잘못이 모두 허물이 되지 않으니 잘못된 곳이 곧 깨닫는 곳이기 때문 이다’라고 하였다.44) 스님의 禪思想이 잘 나타나 있는 『禪門四辨漫語 는 당대의 禪杖 白坡禪師가 『禪門手鏡 을 세상에 발표한 것을 계기로 艸衣禪 師가 白坡禪師의 소론을 하나하나 변증하기 위해 저술한 것이다.

58세(1843) 무렵에는 늙은 몸을 이끌고 고향을 찾지만, 고향집은 다 허물 어지고 잡초만 무성한 부모의 무덤을 돌아보며 눈물로 「고향에 돌아와서」

라는 詩를 짓는다. 梵海禪師도 「茶哥」45)에서 이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고향에 돌아와서

(계묘년 1843)

고향을 떠난 지 사십 여년인데 돌아와 보니 센 머리도 모르겠구나.

새 터전은 잡초에 묻히고

옛 묘는 이끼만 끼어 걸음마다 기름이구나.

마음을 잃었는데 한은 어디서 생겨나는가 피눈물도 말라서 흐르지 않네.

외로운 운수납자 다시 구름 따라 떠나노니 아서라 고향 찾는 단 말 부끄럽네.

라고 한다.46) 艸衣禪師는 58세 된 던 해에 고향을 찾아 갔다. 그것은 출가

44) 意恂 艸衣詩稿 卷下 (韓佛全10, p.869下).

白坡璇公 隱白羊山 年八十餘 自云從十六歲 投禪未嘗一念退轉 每演臨濟玄要句 分貼機用以爲悟徹 師因辨坡誤處 以寄示余 余又辨師誤處 師笑受之云 不妨俱誤 誤處卽悟處也.

45) 覺岸 梵海禪師詩集 卷二 (韓佛全10, p.1119).

‘中孚舊居已成丘’

46) 意恂 艸衣詩稿 卷下 (韓佛全10, p.858下).

(23)

한지 사십여 년만에 찾아간 것이다. 집을 나설 때의 십 오세의 소년이 머 리 희어진 줄 모르고 돌아왔다. 살던 집 터전은 잡초에 묻혀 버려 흔적도 없다. 돌보는 이 없어 옛 묘소는 이끼만 가득 덮여있고, 소식조차 물을 사 람이 없다. 여우가 죽을 때는 머리를 제가 살던 고향 언덕쪽으로 향하고 죽는다고 한다. 하물며 사람으로서 어찌 고향을 쉽게 잊으랴, 피가 말라 눈 물도 흐르지 않은 운수납자는 다시 구름 따라 떠난다. 고향 그립다는 말조 차 부끄럽다고 세월의 무상함을 회상하고 있다.

71세(1856) 되던 해 10월에는 동갑내기이면서 42년간 金蘭之交를 맺어온 勝雪 金正喜가 과천 청계산 아래에서 운명을 달리하자, 그의 영전 앞에

「玩堂金公祭文」을47) 지어 올리고 一枝庵에 돌아와 홀로 茶를 마시며 止觀 修行으로 보낸다.

3. 著述과 入寂年代

고려 중․후기에는 선사들의 어록이 많이 편찬되었으나 그 내용은 주로 上堂法語를 비롯하여 書狀․示人․示衆․小參․偈頌․詩文 등으로 편찬되 었다.

歸故鄕 癸卯年(1843)

遠別鄕關四十秋 歸來不覺雪盈頭 新基草沒家安在 古墓苔荒履跡愁 心死恨從何處起 血乾淚亦不能流 孤笻更欲隨雲去 已矣人生愧首邱

47) 意恂 艸衣詩稿 卷下 (韓佛全10, pp.867中-868上).

惟咸豊八年 二月淸明日 方外淸交某 謹以淸酌 敢昭告于阮堂先生金公 几筵帳下

伏以嘉祥現世 固先擇乎良時 靈瑞應時 冥莫違於明世 現若違世 … 我來元不至

公去亦無歸 只這無來去 這箇是阿誰 盡大地人都不識 祇許先生獨自知 尙饗.

(24)

조선조에 와서는 신분상으로는 똑같은 선종의 선사들인데 어록보다는 문 집이라는 명칭으로, 그 내용도 오언절구․오언율시․칠언절구․칠언율시 등의 시구를 비롯하여 서장․서문․기․발․소․권문․제문․상량문․중수 문 등의 잡저와 행장 등이 수록됨으로써 명칭에 따른 내용상의 同異点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내용적 배경으로 볼 때, 조선시대 사회 지식인층의 대부분이 유학자 로서 오언․칠언 등의 시문을 즐겨 했으므로, 그들과 교류하고 시류에 부 합하여 포교 내지 신분유지상 시문의 교류는 필요한 도구이기도 했다.48) 艸衣禪師가 남긴 저술은 그 성격상 세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우선 그 의 뛰어난 詩․文들을 모은 詩文集이 있으며, 茶와 관련한 茶書, 그리고 그 의 禪思想이 집약된 禪書들이 있다.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저술들의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艸衣禪師의 著書로는 사대부와 교유하면서 시를 모아 지은 『一枝庵詩稿

49)와 일생 동안 지은 疏․記․序․跋․祭文․影讚 등을 실은『一枝庵文集 ,50) 艸衣詩藁 ,51) 선의 요지를 밝힌『禪門拈頌』중에서 골자만을 골라내 어 41則으로 정리하고52) 주석을 달아 놓은『艸衣禪課 ,53) 白坡禪師의 禪論

48) 李法山 한국불교사의 재조명 (불교신문사, 1994) p.352.

49) 一枝庵詩藁 는 여러 文士들과 교유하며 주로 받은 시를 묶어놓은 시집. 권1, 2, 3, 4의 네 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 책으로 묶어진 필사본이다. 필사자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曉堂 崔凡述이 소장하고 있다가 1975년 영인본이 발간된 바 있다. 詩稿의 끝부분에 石梧 尹致英과 威堂 申觀浩, 白坡居士 申獻求가 지 은 발문이 붙어 있다.

50) 一枝庵文集 은 스님이 지은 疏․記․序․跋․祭文․影讚 등과 스님의 塔碑銘 이 함께 수록된 필사본 자료이다. 1890년 스님의 문인인 月如梵寅이 편집하고, 圓應戒定이 정서하여 펴냈다. 2권 1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申櫶과 李喜豊이 지은 碑文이 함께 들어 있다.

51) 艸衣詩藁 는 1906년 스님의 법손 祥雲應惠와 法弟인 雙修一閒이 펴낸 목활자

본이다. 전 2卷 2冊이며, 하권 후반부에 文이 실려 있고, 詩篇은 一枝庵詩稿

의 내용과 동일하며, 문편은 一枝庵文集 보다 훨씬 적게 실려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25)

에 반대의 입장을 밝힌 『禪門四辨漫語 ,54) 韓國의 茶經으로 불리는 『東 茶頌 과 萬寶全書 에서 騰抄한 『茶神傳 ,55) 序․跋․祭文․書簡을 모은

『文字般若集 , 大芚寺誌 56) 등이 있다. 한편 朝鮮中期의 진묵대사를 이상 적인 인물로 생각하여 당시까지 전해오던 진묵대사의 일화를 모아『震黙祖 師遺蹟攷 를 편집하였다.57)

艸衣禪師의 모습은 「艸衣大宗師塔碑銘」에 의하면 스님은 풍체가 위엄이 있고 梵相이 뛰어나서 옛날 존자의 모습을 닮았다. 艸衣禪師는 여든이 넘 어서도 소년과 같이 건강한 모습을 간직하고, 봉은사에서 大敎를 刊布할 때 證師로 모셨다. 達磨山 美黃寺의 無量殿을 짓는 佛事에도 主禪의 자리 에 모셨다. 그 당시 美黃寺는 圓妙了世의 白蓮社 계통의 만일염불결사 도 량이었다.58) 그가 72세였던 1858년에 여기에 참여하였다가 金正喜의 죽음 에 임하여 추사댁이 있던 과천을 다녀왔던 것으로 보여 진다. 따라서 美黃 寺의 만일결사에 있어서 艸衣의 역할은 단순한 결중이 아니라 主禪이라고

52) 한기두 艸衣全集 2 「艸衣 張意恂의 禪思想」 (艸衣文化財執行委員會, 1993) pp.25-27.

53) 艸衣禪課 는 禪門拈頌 가운데 일부 내용을 추려내어 주석을 더한 것이다.

1冊, 34張으로 되어 있고, 본문의 내용은 모두 55개 항목이며 문답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一枝禪房 中孚子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54) 禪門四辨漫語 는 白坡禪師의 제자로부터 白坡의 禪思想을 전해 듣고, 그 내 용의 잘못됨을 조목조목 논박하기 위하여 저술한 것이다. 19세기 禪思想史에 서 가장 주목되는 저술 가운데 하나이며, 책머리에 圓應戒定의 序文이 있다.

55) 意恂抄錄 茶神傳 (韓佛全10, pp.871-873).

茶神傳 은 「採茶」, 「造茶」, 「辨茶」, 「藏茶」, 「火候」, 「湯辨」, 「湯用老嫩」, 「泡 法」, 「投茶」, 「飮茶」, 「香」, 「色」, 「味」, 「點染失眞」, 「茶變不可用」, 「品泉」, 「井水 不宜茶」, 「貯水」, 「茶具」, 「茶盞」, 「拭盞布」, 「茶衛」 등 22개 항목으로 되어있다.

56) 大芚寺의 역사와 사적을 기록한 4卷 1冊의 史誌로 목활자본이다. 1823년에 간 행되었으며 艸衣禪師가 이 책의 편집을 맡았다.

57) 震黙祖師遺蹟考는 1847년에 저술한 것으로 1842년 전주 봉서사에 있을 때 전 해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구성된 것이다. 朝鮮中期의 고승인 진묵스님의 행 장과 관련된 유일한 자료이고, 상․하 2권 1책으로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 등 에 소장되어 있다.

58) 韓普光 信仰結社硏究 (如來藏, 2000) p.255.

(26)

하는 결사의 정신적인 지주를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艸衣는 만년을 염불결사로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美黃寺의 입장에서는 당 대의 대선지식이었던 艸衣와 같은 고승이 만일염불결사의 주선으로 동참하 여 결사를 지도하였다고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나 불교계에서 그 비중을 한 층 더 크게 하여 주고 있다.59) 그 후 줄곧 一枝庵에서 주석 하면서60) 禪에 빠지지도 않고 敎理를 講하는 것도 거절하지 아니하고 조용히 지내다가 入 寂하셨다.61) 艸衣禪師의 入寂說은 몇 가지 설이 있다.

첫째, 東師列傳 의「艸衣禪伯傳」에 同治 4년 乙丑年(1865) 7월 2일 快年 閣에서 入寂했다. 세수는 80세, 법랍 65세라는 기록이 있다.62)

둘째, 李喜豊의 「艸衣大師塔銘」에는 乙丑年(1865) 스님의 나이 80세에 大芚寺에 있다가 질병을 얻었는데 어느 날 저녁 시자를 시켜 서쪽으로 가 부좌를 틀고 조용히 入寂했다. 몸에서는 따뜻한 향내가 풍겨 오래도록 사 라지지 않았으니, 바로 8월 2일(乙丑 師年八十 在大芚寺示疾 忽一夕命侍者 扶起 西向跏趺 冉然入寂 體膚溫香 經久不滅 卽八月二日也)이었다는 것이 다.

셋째, 申櫶의 「艸衣大宗師塔碑銘」에 丙寅年(1866) 8월 2일에 一枝庵에서 入寂했다. 세수는 81세이고 법랍은 나이와 같다는 기록이다.63)

넷째는 小癡가 쓴 夢緣錄 64)에는 艸衣禪師는 새로 불전을 완성하고 丙

59) 韓普光 信仰結社硏究 (如來藏, 2000) p.261.

60) 意恂 艸衣詩稿 卷下 (韓佛全10, pp.869下-870上).

61) 艸衣詩稿 卷下 (韓佛全10, pp.869下-870上).

師軀幹豊碩 梵相奇古 類古尊者象 旣耋艾而輕健如少年 當奉恩寺有大敎刊布之 役 邀師爲證師 達摩山 建無量之會 奉師主禪席 皆暫膺卽還示化一枝菴中 現世 之年.

62) 覺岸 東師列傳 卷四 「艸衣禪伯傳」 (韓佛全 10, p.1039上).

同治四年乙丑七月初二日 復立終身之幕 快年閣也.

63) 意恂 艸衣詩稿 卷下 (韓佛全10, p.870上).

示化於一枝庵 現世之年 八十有一 法臘爲若干歲.

64) 許維 小癡實錄 (瑞文堂, 1981) p.212.

(27)

寅年(1866) 7월 2일에 一爐香室로 옮겨 入寂했다는 설 등이 있다.

위의 여러 가지 入寂說에서 梵海禪師와 李喜豊은 각각 乙丑年(1885) 7월 과 8월에, 申櫶과 小癡는 각각 丙寅年(1886) 7월과 8월에 艸衣禪師의 入寂 에 대하여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入寂에 대하여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내용들을 근거로 살펴보면, 첫째로 위의 네 사람이 艸衣禪師와는 친밀한 교분이 있었다. 둘째는 李喜豊과 申 櫶은 艸衣禪師의 직계 제자인 善機와 梵雲 등의 청촉에 의해 碑銘을 撰하 였다. 李喜豊은 辛未年(1871)에 申櫶은 그 보다 5년 후인 丙子年(1876)에 자신이 직접 撰하지 않고 姜秋琴으로 하여금 代作케 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小癡의 夢緣錄 은 젊은 시절부터 틈틈이 적어오던 자신의 행장을 만년에 보완하여 펴낸 것이다. 梵海禪師의 東師列傳 은 이 땅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활동하였던 僧侶 196명과 佛敎人 2명의 행장을 보다 전문적인 입장에서 목적의식을 갖고 기록하였다. 위의 세 사람보다는 가장 후대인 고종 31년 丙午年(1894)에 저술한 것이다. 梵海禪師는 大芚寺 門徒로 艸衣 禪師에게 比丘戒와 菩薩戒를 받은 受戒 제자이고 東師列傳 을 저술한 작 가이다. 艸衣禪師의 入寂에 대한 기록을 참고하는 것은 梵海禪師의 入寂說 을 가장 확실한 근거로 삼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위의 두 碑銘의 내용 및 두 전적의 내용과 아울러 乙丑年에는 閏 五月이 들어있어 혹 세월이 지나 撰하는 것이라 기억상의 착오가 있을 수 도 있음을 고려할 때 채정복은 艸衣禪師가 乙丑年(1885) 7월 2일에 세수

허유는 1857년 고향인 진도로 돌아와 첨찰산 자락에 터를 잡았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여 지은 『夢緣錄 의 머리글에서, ‘이곳에 다시 돌 아오니 실로 전생의 인연을 알겠고, 지난날 놀던 임을 회상해보니 모두 아득 한 꿈이었더라.’고 그 소회를 밝혔다. 뜻밖에 먼 곳에서 손님이 찾아와 다정하 게 며칠을 쉬는 동안 문답한 것이 있어, 그것을 엮어 『夢緣錄 이라 불렀다.

이를 『小癡實錄 이라 고쳤다. 그는 자신의 책이름을 夢緣錄 이라 하였다가

小癡實錄 으로 바꾸었다.

(28)

80, 法臘 65세에 快年閣에서 入寂한 것으로 추측한다고 했다.65) 이러한 상 황을 살펴보건데, 梵海禪師의 入寂說을 근거로 하여 艸衣禪師의 入寂說은 세수 80, 法臘 65세라고 할 수 있다. 스님의 浮屠는 大芚寺 남쪽 기슭에 세 워져 있고, 松坡 李喜豐이 塔銘을 지었으며 탑의 오른쪽에는 碑石을 세웠 다. 養石 申觀浩가 碑文을 지었다.

第2節 艸衣禪師의 思想

艸衣禪師의 思想은 禪思想과 茶思想, 그리고 詩思想으로 집약할 수 있다.

艸衣禪師의 思想을 살펴보기 전에 茶山 丁若鏞66)과 艸衣禪師, 그리고 勝雪 金正喜67)를 연결하면서 폭 넓은 사상을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본고에서는

65) 채정복 「艸衣禪師의 茶禪修行論」 (碩士學位論文, 연세대, 1992) pp.6-7.

66) 丁若鏞: 字는 美鏞·頌甫․歸農, 號는 茶山․三眉․與猶堂․俟菴․紫霞道人․襲 翁․苔戒․門巖逸人․鐵馬山樵, 가톨릭 세례명 요안이다. 諡號 文度, 廣州 출 생이다.

가톨릭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功西派의 탄핵을 받고 海美에 유배되었 다. 10일만에 풀려나와 持平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城制와 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水原城 수축에 기여하였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辛酉敎難 때 長寅에 유배, 뒤에 黃 嗣永 帛書事件에 연루되어 康津으로 유배되었다. 그곳 茶山 기슭에 있는 尹博 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 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지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체계는 柳馨遠과 李 翼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朴趾源을 대표로 하는 北學派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저서 丁茶山全書 에 牧民心書 , 經世遺表 , 欽欽新書 , 麻科會通 , 毛詩 講義 , 梅氏書平 , 尙書知遠錄) , 喪禮四箋 , 四禮家式 , 樂書孤存 , 周易 心箋 , 易學諸言 , 春秋考徵 , 論語古今注 , 孟子要義 등이 있다.

67) 충청남도 예산에서 출생하였다. 字는 元春이다. 號는 阮堂·秋史·禮堂·詩庵·老果

(29)

지면 관계상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艸衣禪師는 西洋宗敎인 天主敎 信者이고 實學과 易學의 태두인 茶山 丁 若鏞과 절친한 교유를 하고, 오랜 儒敎的 家風을 이어받은 權門勢家의 後 孫으로 金石學․書誌學에 바탕을 둔 淸朝文化 수입의 선구자인 勝雪68) 金 正喜 등과 茶緣으로 교유한 행적들이 艸衣禪師의 思想에 폭넓게 영향을 주 었음을 짐작케 한다.

茶僧艸衣69) 思想에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던 茶山 丁若鏞은 천주교 박해 사건으로 강진에 유배된 후 兒庵禪師를 만남으로 인하여 茶와 佛敎를 접하 게 된다. 茶詩와 茶에 관한 많은 글을 남긴 茶山 丁若鏞에게 艸衣禪師는 詩와 周易 등을 배우면서 신학문의 깊이를 더하게 된다. 勝雪 金正喜와 艸 衣禪師의 茶緣에는 茶山 丁若鏞이 있었다. 勝雪 金正喜는 茶山 丁若鏞의

이다. 24세 때 燕京에 가서 당대의 巨儒 완원·옹방강·조강 등과 교유, 經學·金 石學·書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예술은 詩·書·畵를 일치시킨 고답적 인 이념미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나라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하였 다. 1840년 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풀려나 왔다. 1851년 헌종의 廟遷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 다. 학문에서 實事求是를 주장하였다.

서예에서는 독특한 秋史體를 대성시켰으며, 또한 實事求是說 을 저술하여 근거 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으로 학문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종교에 대한 관심도 많아 北京으로부터의 귀국길에는 불경 400여권과 불상 등을 가 져와서 麻谷寺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70세에는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先考 墓 옆에 가옥을 지어 수도에 힘쓰고 이듬해에 奉恩寺에서 수계를 받은 다음 귀가하여 세상을 떴다.

문집은 阮堂集 , 저서는 金石過眼錄 , 阮堂尺牘 등이 있고, 작품에 墨 竹圖 , 墨蘭圖 등이 있다

68) 김운학 한국의 차문화 (현암사, 1994) pp.77-78.

應松은 龍鳳團茶 이상으로 勝雪茶의 上品을 이야기하며 大院君도 高麗 때의 한 古塔을 헐어 勝雪茶 세 개를 구했다는 기록을 들고 있다. 金正喜도 중국의 대학자 예운대의 초청을 받고 勝雪茶 마신 것을 가장 인상 깊었다고 한다. 勝 雪茶는 말탈 때의 발거리 모양으로 표면에는 銙字(띠를 매는데 달린 쇠) 모양 으로 새겨 놓은 것이다.

69) 勝雪 金正喜에게 매월 보내진 茶가 한양 선비들에게 뜻밖에 널리 알려지게 되

면서 艸衣禪師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茶僧’이라는 명성을 갖게 되었다.

(30)

아들 酉山의 소개로 동갑인 艸衣禪師를 만나 친교가 두터워진다. 그러나 茶山이 유배지인 강진을 떠나면서 朝鮮後期의 차이야기는 金正喜와 艸衣禪 師에게 넘겨진다. 金正喜는 19세기 전반의 탁월한 실천사상가이며, 金石學 者이고 위대한 書藝家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金正喜를 다시금 보게 되는 이유는 그가 쇠퇴해가는 朝鮮後期 茶文化의 맥을 현재까지 이끌어 온 주요 茶人이였다. 金正喜는 朝鮮時代 실제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하고 空理空論을 떠나서 정확한 고증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적, 객관적 학문태도 를 취한것으로 실학파의 학문에 큰 영향을 주었다.

두 분의 茶緣은 각별하여 金正喜가 제주도에 귀양을 갔을 때 艸衣禪師는 다섯 번이나 직접 찾아가 같이 지내며, 차나무를 심고 參禪도 하였다. 이에 대한 답례로 金正喜는 艸衣禪師가 보내준 茶를 마시며, 茶禪一味의 三昧境 에 붓을 들어서 대필로 ‘茗禪’이란 두 자를 써 스님에게 보내기도 했다.70) 金正喜에게 있어 茶는 그의 학문과 예술의 경지를 더욱 승화시키는 하나의 매개체이기도 하였다. 그는 제주도 유배생활의 적적함을 차 한 잔으로 달 래며 작품세계에 몰두하였다. 독특한 그 만의 서체인 ‘秋史體’와 ‘歲寒圖’라 는 걸작이 바로 이곳에서 완성된 것이다.

또한 艸衣禪師에게 써준 ‘茗禪’과 ‘參禪과 茶 끓이는 일로 또 한해를 보 낸다’71)라고 한해를 회후하던 勝雪 金正喜의 일상생활은 茶로 맺은 艸衣禪

70) 「澗松文華」書藝V (韓國民族美術硏究所, 1980) p.9.

중국 청나라 고증학의 학문태도에서 볼 수 있는 그의 實事求是의 밑바탕에는 茶生活이 영위되어 있었다. 書道의 밑바닥에는 茶道가 깔려 있었으며, 參禪의 밑바닥에는 茶禪이 함께 숨쉬고 있었던 것이다. 金正喜의 글씨로 艸衣禪師가 茶를 보내온데 대해 답례로 써서 艸衣禪師에게 보낸 것이다. 「茗禪」이라는 글 씨 오른편에 ‘艸衣禪師가 손수 만든 차를 보내왔는데 몽정노아보다 못하지 않 다. 글로써 보내온 茶에 보답한다 (艸衣寄來自製茶 不減蒙頂露芽 書此爲報)’라 고 한 것이다.

71) 金正喜 阮堂全集 卷五

茶禪烟又是一年

(31)

師와의 茶緣이 얼마나 두터웠던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생활 자체가 茶 와 禪으로 일관된 茶道人의 경지까지 이르렀음을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상기하면서 朝鮮後期의 禪思想과 茶思想, 그리고 詩思想에 큰 변화를 주었던 艸衣禪師의 思想을 살펴보고자 한다.

1. 禪思想

스님의 禪思想은 禪門四辨漫語 와 艸衣禪課 에서 살펴볼 수 있다. 禪 의 학문적 흥미를 불러일으킨 것으로는 白坡의 禪門手鏡 에 대한 艸衣意 恂의 禪門四辨漫語 에 의한 공격과 論敎의 往復書는 고답적 틀에 박힌 유 학자들의 눈을 빛나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불교의 학적지위를 확고히 다져 준 계기가 되었다.72)

당시 白羊寺에 주석하였던 禪僧 白坡亘璇은 禪門手鏡 을 저술하여 禪의 宗旨를 후학들에게 알려 주고자 펴낸 것이다. 여기에서 白坡禪師는 臨濟三 句에 의거하여 모든 법을 중생의 근기에 두고 우열을 논하였다. 이에 艸衣 禪師가 시대의 변화에 따른 신학풍의 고증적인 영향을 받아 모든 중생이 相依相資하고, 현실에 적합한 일상생활 속에서 모두가 하나 되어 작용을 전개 해나간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반박으로 저술한 것이다.73) 이러한 禪에 대한 論爭은 金正喜, 雪竇有炯(1824∼1887), 優曇洪基(1822∼1881), 竺 源震河(1861∼1926) 등을 중심으로 크게 일어 朝鮮後期 禪思想 흐름에 중 대한 영향을 주었다.74)

72) 李法山 한국불교의 재조명 (불교신문사, 1994) p.351.

73) 채정복 「艸衣禪師의 茶禪修行論」 (석사학위논문, 연세대, 1992) p.1.

(32)

그러나 여기에 대한 선행된 연구가 있고,75) 본 논고의 범위가 아니므로 자세히는 논하지 않는다. 본 논고는 艸衣禪師의 茶道觀을 밝히는데 그 연 구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禪論과 詩論은 제외하고, 다만 스님의 저술인 東茶頌 과 茶詩 등을 중심으로 그 사상을 파악해서 禪思想의 특징이 무엇 인가를 밝혀내고 스님의 茶思想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 는 것이다.

스님의 思想的인 특색은 止觀兼修이다. 艸衣禪師의 禪思想은 평소에 敎 에만 치우치지 않고 그렇다고 禪에만 기울지도 않는 止觀法으로 수행했다 고 하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止觀法은 불교의 독특한 수행법으로 불교 전통의 수행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불교의 수행법은 크게 두 가지로 구 분할 수 있다. 止와 觀은 불교의 독자적인 낱말로서 붓다의 선정은 止와 觀을 그 내용으로 한다. 止는 마음을 통일하는 것이며 적정의 경지에 달하 는 것이고, 觀은 止에 의거하여 몸과 마음의 현상으로부터 그 본성을 보며 연기의 법과 삼법인 등을 관조하고 일체중생의 구제에 마음을 쓰며 見性하 여 生死없는 涅槃을 성취하는 것이다.76)

止觀이라는 한역의 원어를 보면 반드시 止와 觀을 구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止는 사마타(samatha)이고 觀은 비파사나(vipaṡyana)인데, 모두 佛敎의 독자적인 낱말로 印度 일반의 문헌에서 사용되고 있지 않다. 사마 타는 가장 오래된 佛典 부분에서는 ‘평정’을 의미하고 있다. 예전에는 이처 럼 ‘가라앉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또한 비파사나는 ‘세간의 진실 된 모습을 본다.’라는 동사형 비파사티(vipassati)로 쓰여 졌고, 觀法으로 번

74) 통광 艸衣茶禪集 (불광출판부, 1996) p.14.

75) 한기두 「韓國禪思想에 있어 三宗禪과 二宗禪間의 論爭點 考察」 (원광대학교, 1969).

채정복 「艸衣禪師의 茶禪修行論」 (석사학위논문, 연세대, 1992).

76) 최현각 선학의 이해 (불교시대사, 2003) pp.241-242.

(33)

역되었다. 止와 觀 중에서 觀은 오히려 지혜를 본질로 하는 것이고, 止 쪽 이 禪에서는 본질적인 것이다.77)

大乘起信論 에서 사마타는 일체 모든 현상과 본질이 무상함을 정념하는 것이고, 비파사나는 생각의 변화를 잘 분별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사마타는 관찰의 대상이 변화하지 않는 것이고, 비파사나는 변화하는 대상 을 관찰하는 것이다.78) 예를 들면 사마타는 총을 겨누는 것, 즉 총을 쏠 때 사마타는 그 표적이 움직이지 않는 고정된 것이고 비파사나는 표적이 움직 이는 것을 정확히 관찰하여 맞추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고요하게 되 면 觀속에 止가 동시에 이루어지게 된다. 결국 止觀兼修는 분리 될 수 없 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茶와 禪, 禪과 詩, 茶와 詩가 둘이 아니고 禪과 敎 또한 분리하지 않는다. 「艸衣大宗師塔碑銘」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스님은 禪에만 專念 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스님이 대답하기를 ‘근기가 약하면 禪에만 專念하거나 敎에만 專念하지만, 이 것은 두 가지가 모두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어찌 이것만을 고집하 겠는가. 오로지 敎만 專念하는 사람 또한 허물이 없을 수 없으며, 오 로지 禪만을 고집하는 사람 역시 모두 진리를 얻는 것이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라고 한다.79) 艸衣의 禪思想은 專禪이나 專敎로 치우치지 않고 止와 觀의 兼修로 특징지어진다. 禪機만으로는 이롭지 못하고 專禪이나 專敎가 다름

77) 최현각 인도의 선 중국의 선 (민족사, 1994) pp.39-40.

78) 眞諦 譯 大乘起信論 1卷 (大正藏32, p.582上).

云何 修行止觀門 所言止者 謂止一切境界相 隨順奢魔他觀義故 所言觀者 謂分 別因緣生滅相 隨順毗鉢舍那 觀義故 云何隨順 以此二義漸漸修習 不相捨離 雙 現前故.

79) 意恂 艸衣詩稿 卷下 (韓佛全10, p.869下).

或有問者曰 子其專於禪者乎 師曰機苟不利 則專於禪 與專於敎 無以異也 吾何

苦爲此哉 其意盖以專敎者 未必無失 而專禪者 亦未爲得也.

(34)

없는데 왜 하나만을 국집하여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가? 대체로 專禪하는 사람은 그 敎의 뜻을 잊지 않기 어렵다. 그렇다고 專敎하는 사람도 그 禪 의 뜻을 얻기가 어렵다고 한다.

이와 같이 止觀法은 禪敎兼修로서 처음에 敎에 들고 나중에 禪에 드는 初心者의 수행지침으로 한동안 우리나라 佛敎界를 지배해 오고 있었다. 이 사상은 중국의 天台大師(538∼597)나 통일신라의 元曉大師(617∼686)와도 같은 사상이며, 고려시대의 大覺國師(1055∼1101)나 普照知訥(1158∼1210) 도 이와 같은 주장을 했으며, 조선중기의 西山大師(1520∼1604)와 그의 제 자들도 다 선호했던 수행방법이다. 禪家龜鑑 에 의하면

敎門에는 오직 一心法만을 전하고, 禪門에는 오직 見性法만을 전하 였다. 그러나 諸佛께서 說하신 경전은 먼저 諸法을 가리시고, 뒤에 필 경 空한 이치를 말씀하셨지만, 祖師가 보인 글귀는 자취가 생각에서 끊어지고, 이치가 마음의 근원에서 드러난다. 부처님은 활같이 말씀하 시고, 祖師들은 활줄같이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걸림 없는 法이란 바로 一味에 돌아가거니와, 이 一味의 자취마저 떨쳐 버려야 비로소 祖師가 보인 一心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므로 「庭前栢樹子」라고 한 話頭는 용궁의 藏經에도 없다. 그러 므로 배우는 이는 먼저 부처님의 참다운 가르침으로써 변하지 않는 것과 인연 따르는 두 가지 뜻이 곧 내 마음의 본바탕과 형상이고, 단 박 깨치고 오래 닦는 두 가지 門이다. 이것은 공부의 시작과 끝을 몸 소 행한 연후에 敎義를 놓아 버리고 다만 자기의 마음을 가지고 한 생각을 들어내어 자세히 禪旨를 參究한다면 반드시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出身活路이다.

라고 한다.80) 西山大師의 禪과 敎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禪深敎淺, 禪主敎

80) 禪家龜鑑 (韓佛全7, pp.635中-636上).

敎門惟傳一 是心法 禪門惟傳見性法. 然諸佛說經 先分別諸法 後說畢竟空 祖師

示句 迹絶 於意地 理顯於心源 諸佛說弓 祖師說絃 佛說無碍之法 方歸一味 拂

此一味之迹 方現祖師所示一心 故云庭前栢樹子話 龍藏所未有底 諸佛說弓 祖師

참조

관련 문서

Animating View s (via their ViewModifier s which can implement the Animatable protocol) Transitions (animating the appearance/disappearance of View s by specifying

1 John Owen, Justification by Faith Alone, in The Works of John Owen, ed. John Bolt, trans. Scott Clark, "Do This and Live: Christ's Active Obedience as the

However Rikuy has created his brilliant creativity and applied it to chanoyu such as not just appreciate the vase without flowers or decorations or so. It

The goal of this paper is to study curriculum and management status of Arts and Culture Education Instructors focused on Korean music among the

It is considered that the research on the influence of The Book of Changes on tea culture and tea ceremony thought should be performed in various areas.. But, there

* 韓國法制硏究院

Therefore, this study aims to maintain the even saponin content by standardizing balloon flower extract (60ml) to use as tea to maximize the

Not only indigenous Korean food culture formed its traditional way in the latter part of the Chosun Dynasty, but also was the transition period fr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