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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클레티아누스의 최대 박해와 콘스탄티누스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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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클레티아누스의 최대 박해와 콘스탄티누스의 등장

• 5현제 이후 군인황제를 거치면서 로마 제국은 제정 후기로 구분

• 192년에서 284년 사이 로마의 내부적 정치적 상황은 매우 혼란했음

• 이러한 혼란을 종식시키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의 전제황제로 정 권을 잡음

•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거의 무정부 상태였던 3세기의 로마 제국에 효율적 인 통치 체제를 회복시켰다. 재무·행정·군사 기구를 재편성해 제국의 동부지역에는 비잔틴 제국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고 서부지역의 쇠퇴하 던 제국에는 잠시나마 활력을 불어넣었다. 한편 그는 통치기간 중 그리 스도교에 대해 마지막 대박해를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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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클레티아누스의 최대 박해와 콘스탄티누스의 등장

• 디오클레티아누스 사후 로마제국은 극심한 내전에 돌입했고 콘스탄티 누스(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Constantine Ⅰ;280-337)는 리키니우스 와 함께 로마 제국의 실권을 장악

•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성공을 그리스도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여기고 개종과 동시에 기독교를 공인함(A.D. 313)

• 서로마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동로마 황제인 리키니우스를 밀 라노에서 만나 기독교의 공인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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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클레티아누스의 최대 박해와 콘스탄티누스의 등장

•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궁정에서 어린시절을 보 낸 콘스탄티누스는 일련의 복잡한 내전을 거친 뒤 서로마 황제가 되었으며(312), 이어서 로마 제국 전 체를 다스리는 단독 황제가 되었다(324). 콘스탄티 누스는 자신의 성공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덕분 이라고 평생 동안 믿었다. 그는 늦어도 313년까지 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교에 귀의했고, 그해에 밀 라노 칙령을 발표해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관용을 확대했으며, 신학 논쟁에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니케아 공의회(325)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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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클레티아누스의 최대 박해와 콘스탄티누스의 등장

• 그는 콘스탄티노플(옛 이름은 비잔티움)을 재건하고 확장시켜 수도 로 삼았는데, 이는 아마도 그가 거둔 마지막 군사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 도시는 그후에도 1,000년이 넘도록 로마 제국 수도의 기능을 유지했다. 그의 개종은 그후 수세기 동안 교회와 국가 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자신이 하느님에게 선택받은 종복이 라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교회를 잘 다스리는 것이 하느님에 대한 책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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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클레티아누스의 최대 박해와 콘스탄티누스의 등장

•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에 힘입어 로마 제국은 그리스도교 국가로 변모하 기 시작했으며, 그의 추진력 덕분에 형성된 그리스도교 문화는 비잔틴 제국과 서유럽의 중세 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 일찍이 소수 종파였던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었고, 콘스탄티누스와 후계자들의 후원으로 큰 발전을 이룩했다. 교회는 재산을 늘렸고 교회 의 수도 늘어났다. 덕분에 교회는 배교자인 율리아누스 황제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확고한 지위를 굳힐 수 있었다. 그리스 정교회에서 는 콘스탄티누스를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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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클레티아누스의 최대 박해와 콘스탄티누스의 등장

• 동방교회는 313년 6월 리키니우스에 의해 선포된 이 포고령에서 모든 사람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고 그리스도교도에게 법적 권리(교회를 조직 할 권리도 포함)를 보장해주며, 몰수한 재산을 기독교도에게 신속히 돌 려주도록 지시했다. 이전에 내렸던 여러 칙령들은 그것을 선포했던 역 대 정권들만큼 단명했으나, 이 밀라노 칙령은 종교 관용을 제도적으로 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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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로마 국교 확립

• 테오도시우스 제는 교회가 수동적인 자세에서 적극적인 자세를 가질 것 을 촉구

• 그는 380년에 “우리가 다스리는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 이 우리의 뜻이다. 우리가 불건전하다고 판단하는 이들, 곧 불명예스러 운 이단 사상을 주장하는 이들은 먼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그 다음에 우리의 보복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라고 생각한다.”라고 선언

• 테오도시우스는 이단사상이 로마의 정치와 종교를 혼란하게 할 것을 우 려해 종교적 논쟁을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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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타니아의 기독교화

• 로마 속주 브리타니아는 기독교 공인 이전에 이미 기독교 확산. 정확한 사료는 없으나 로마인 정착민들과 상인들에 의해 기독교가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있음

• 314년 아를르에서는 켈트족 감독들이 영국교회를 대표

• 아우구스티누스의 적수였던 펠라기우스 영국 교회 출신. 펠라기우스는 410년경부터 대륙에서 펠라기우스주의를 전파

• 초기 영국의 켈트족 교회는 로마 감독의 지위를 부정했음 또한 부활절 절기 역시 동방교회의 관습을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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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타니아의 기독교화

• 5세기 초 로마 군대가 본토로 철수하자 켈트족 교회들은 무방비였고 이 교도이자 게르만족인 앵글족, 색슨족, 주트족에 의해 몰살되거나 웨일즈 및 스코틀랜드로 쫓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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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트족의 기독교화

• 울필라스(Ulfilas; Wulfila; 310-383)는 고트족을 복음화한 주교·선교사.

• 울필라스는 고트족의 문자를 창안했다고 하며, 최초로 게르만어로 성서 를 번역했다. 그의 생애를 분명하게 재구성할 수는 없지만 4, 5세기 교 회사가들의 글에는 그에 관한 단편적인 자료들이 나타난다. 3세기에 고 트족에게 포로로 잡혀가 도나우 강 북쪽으로 옮겨져 그곳에 정착한 카 파도키아인들의 자손인 것으로 믿어지며, 30세 때 로마 황제에게 대사 로 파견된 듯하다. 341년 아리우스주의자인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인 니 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에게 고트족 그리스도교도들의 주교로 임명되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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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족의 기독교화

• 클로비스는 아리우스 기독교가 아닌 정통 가톨릭으로 개종

• 투르의 그레고리우스가 그를 제2의 콘스탄티누스 대 제로 표현하고자 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클로비 스는 여전히 영웅적인 이방인으로서 걸출한 인물이다.

그는 작은 영토에서 이방인의 족장으로 출발하여, 갈 리아에 사는 로마인들에게 통치자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황제의 승인을 받아, 서유럽의 아리우스 종파와 고트족의 연합 세력에게 처음으로 심각한 공격을 가 했다. 그는 종족을 대신하여, 프랑크족은 아리우스 종 파가 아니라 결국 가톨릭교로 개종해야 한다는 중대 한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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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족의 기독교화

• 클로비스의 무엇보다도 뛰어난 업적은 오늘날의 벨기에와 라인란트에 살던 프랑크족의 여러 부족을 정치적으로 통일된 하나의 민족으로 만든 것이었다. 프랑크족의 세력은 라인 강 동쪽으로 침투하여 그 지역에 정 착했다. 그의 가문은 강력한 지배권을 확보했고, 이 지배권은 8세기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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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기독교화

• 성 패트릭은 5세기에 브리튼과 아일랜 드에서 활동한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이 며 사도.

• 아일랜드와 일부 픽트족과 앵글로색슨 족에게도 그리스도교를 전파한 인물이 다. 그에 대한 자료는 영적 자서전인

〈고백록 Confessio〉과 브리튼인들의 아일랜드인들에 대한 학대를 비판한

〈서신들 Epistola〉이라는 2권의 짧은 책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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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회(Council)

•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교리·행정·규율 등 여러 문제를 논의하고 결정하 기 위해 열리는 주교들과 그밖의 다른 지도자들의 모임.

• 에큐메니컬 공의회, 즉 전(全)그리스도교회 공의회는 모든 교회 주교들의 모임이다. 한편 관구 또는 총대주교구와 같은 지역을 대표하는 지방공의회 는 흔히 교회회의(synod)라고 불린다. 로마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교황이 소집하지 않으면 에큐메니컬 공의회가 아니며 공의회 법령은 교황이 공표 하기 전까지는 구속력이 없고, 공표된 교황령은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 동 방정교회는 7개의 공의회만을 에큐메니컬 공의회로 인정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를 영원히 갈라놓은 1054년의 분열 전에 열렸 던 제8회 공의회를 추가로 인정한다. 이 제8회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플 총 대주교 포티우스를 파문한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였다(869~870).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뒤 13차례의 공의회도 역시 에큐메니컬 공의회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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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정교회및 로마가톨릭 모두 인정한 에큐메니컬공의회(Council)

•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

•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

• 에페소스 공의회(431)

• 칼케돈 공의회(451)

•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53)

•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680~681)

•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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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가톨릭만 인정한 공의회(Council)

•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869~870)

• 제1차 라테란 공의회(1123)

• 제2차 라테란 공의회(1139)

• 제3차 라테란 공의회(1179)

•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

• 제1차 리옹 공의회(1245)

• 제2차 리옹 공의회(1274)

• 빈 공의회(1311~12)

• 콘스탄츠 공의회(1414~18)

• 페라라-피렌체 공의회(1438~45경)

• 제5차 라테란 공의회(1512~17)

• 트리엔트 공의회(1545~63)

•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70)

•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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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 공의회

• 325년 고대 도시 니케아(지금의 터키 이즈니크)에서 열린 그리스도교 교회 의 첫번째 에큐메니컬 공의회.

•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초심자였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소집하여 개 회식을 주재하였으며 논의에도 참석하였다. 그는 아리우스주의(알렉산드 리아의 아리우스가 처음 내세운 이단교리로 '그리스도는 신이 아니라 피조 된 인간'임을 강조했음) 때문에 동방교회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이 공의회 에서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랐다. 교황 실베스테르 1세는 이 공의회에 참석하 지 않는 대신 특사를 보냈다.

• 주교정치를 확립하고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로마의 주교를 총대주교로 인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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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우스 주의

• 4세기초 알렉산드리아 사제 아리우스가 처음 주장한 그리스도교 이단설.

• 그는 그리스도가 실제로는 신이 아니라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내세 운 기본 전제는 스스로 존재하며 불변하는 하느님의 유일성이었다. 반면에 성자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신성은 유일한 것이어서 나누거나 전가할 수 없으며 신성은 불변하기 때문에 복음서에 나타난 성장하고 변화하는 성 자는 하느님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성자는 무로부터 존재하게 되었 으며, '시작'이 있는 피조물로 본다. 게다가 성자는 유한하고 존재 질서가 다르기 때문에 성부에 관한 직접적인 지식을 가질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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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우스 주의

• 아리우스주의를 반박한 사람들, 특히 주교 아타나시우스에 따르면, 아리우 스의 가르침은 성자를 반신(半神)으로 전락시켰고 성자에 대한 예배를 포 기하지 않았기에 다신론(polytheism)을 다시 도입했으며, 참된 하느님인 성 자만이 사람과 하느님을 화해시킬 수 있다는 그리스도교의 구속 개념을 훼 손했다고 논박했다.

• 이 논쟁은 니케아 공의회(325)가 아리우스와 그의 교리를 정죄하고, 정통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기 위한 신조를 공포함으로써 끝이 나는 것처럼 보 였다. 이 신조는 성자가 '성부와 하나의 본질을 갖고 있다'(homoousion t Patri)라고 진술하며, 이로써 성자가 성부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완전한 신 이라고 공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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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 신조

• 최초로 교회사를 저술한 가이사랴의 주교 유세비우스는 니케아 신조를 초 안했음

• 니케아 공의회에서 유세비우스는 다른 주교들과 함께 기독교 신앙을 간결 하게 요약해놓은 신조가 필요하다는 점에 합의

• “참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신 참하나님이시요, 창조된 자가 아닌 나신자요,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세비우스가 만든 초안에 더함

• 니케아 신조는 로마 가톨릭, 성공회, 동방교회의 신조로 지금까지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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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나시우스

•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한 사람 중 가장 유명한 자는 아타나시우스였다. 그는 328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아리우스주의자들, 이교도들을 반박하는 각종 글을 집필했고 수도원 운동을 확산시킨 안토니우스의 생애 를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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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

• 제1차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제2차 에큐메니컬 공의회(381)로 황제 테오도 시우스 1세가 소집해 콘스탄티노플에서 모였다. 이 공의회에서 니케아 신 조를 재확인했으며, 성령이 성부 및 성자와 동등하다는 삼위일체 교리를 최종적으로 공포했다. 이 공의회가 내놓은 법령들 가운데는 '콘스탄티노플 이 새로운 로마이기 때문에' 로마 주교를 제외한 다른 모든 주교들에 우선 하는 명예를 콘스탄티노플 주교에게 부여한다는 내용의 법령이 있었다. 이 공의회에는 동방교회 주교들만 참석했지만(모두 150명 정도), 그리스 교회 는 이 공의회를 에큐메니컬 공의회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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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

• 381년 5월 로마 황제 데오도시우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에큐메니컬 공의 회를 개최하여 니케아 신조의 동일 본질을 재강조하고 니케아 정신을 재확 인.

• 로마 교황 성 다마수스 1세는 이 공의회가 공포한 니케아 신조는 받아들이 되 법령들은 받아들이지 않은 듯하며, 적어도 콘스탄티노플의 우월성을 주 장한 법령은 받아들이지 않았다(실제로 로마는 13세기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콘스탄티노플에 세워진 라틴 제국이 존속하는 동안만 콘스탄티노플에 로마에 버금가는 지위를 부여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방과 서방 모두 이 공의회를 에큐메니컬 공의회로 인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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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

•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니케아신조와 더불어 예수그리스도가 배고픔, 갈증, 피로와같은 육체적 고통을 당하셨으며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 만일 그리스도가 완전한 인간이 되 지 않으셨다면 인간의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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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 공의회(431)

• 431년 6월 22일 성 마리아 교회에서 열렸고 회의 초장에 알렉산드리아 주 교였던 키릴루스와 그의 관구하 주교들은 콘스탄티노플 주교였던 네스토 리우스를 파문했다.

•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독립성을 강조.

• 그당시 알려진 대로 네스토리우스주의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간성을 지 나치게 강조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가 그리스도를 인간 과 신 2개의 위격으로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 자신은 그러한 견해를 배척했으며,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키릴루스의 해석은 오해 에 근거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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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토리우스 주의

• 실제로 네스토리우스가 가르친 것은 ' 프로소폰'(prosopon) 방식의 결합이 었다. 그리스어 프로소폰은 다른 대상들을 수단으로 사용해 자신을 확장하 는 한 개인의 자기현시를 뜻한다. 예를 들면 붓은 화가에게 프로소폰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아들은 인성(人性)을 사용하여 자신을 현시하였다. 그 러므로 인성은 그의 프로소폰 안에 포함되며, 따라서 현시의 유일한 대상 은 그 자신이었다.

(27)

칼케돈 공의회 (451)

• 칼케돈(지금의 터키 카디코이)에서 열린 그리스도교의 4번째 에큐메니컬 공의회(451).

• 칼케돈 공의회는 신조 앞에 네스토리우스와 극단적 키릴루스파인 단성론 자, 유티케스를 모두 단죄하고 키릴루스가 네스토리우스와 안디옥인들에 게 보낸 서신들을 승인

• 칼케돈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가운데 어느 하나만 강조하는 것은 옳 지 못하다는 기준을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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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케돈 공의회 (451)

• 마르키아누스 황제가 소집한 이 회의는 520명가량의 주교들 또는 대표자 들이 참석했고, 초기 공의회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으며 가장 상세히 기록 된 회의였다. 니케아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재확인하고 키릴루스의 서신을 승인

• 키릴루스의 서신은 네스토리우스의 이론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통일성을 주장했다. 또한 이 회의는 그리스도 안에 2개의 다른 성이 있음을 확증하고 그리스도가 하나의 성만 갖고 있다는 단성론을 부인한 교 황 레오 1세의 ‘토메’ (Tome)를 지지. 칼케돈 공의회는 이러한 교리들을 신앙고백의 형태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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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케돈 공의회 (451)

• 이외에도 몇몇 지역 교회회의들의 선언과 이전의 교회 공의회들의 법령을 강화했으며 수사들과 성직자들을 훈련하기 위한 법령을 발표했고, 콘스탄 티노플을 관구 교회회의를 위한 항소법원으로 정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27개 조항의 교회법 통과시켜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권위를 확인해 예루살 렘과 콘스탄티노플을 총대주교구로 공포했다. 이 모든 것은 교회가 보다 더 안정된 제도를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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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라기우스(Pelagius, 354-420)

• 영국의 수사·신학자.

• 펠라기우스주의로 알려진 이단적 신학체계에서 영혼이 구원받는 데 있어 인간의 노력이 우선한 다는 것을 강조.

• 380년경 로마에 간 펠라기우스는 사제는 아니 었지만 영적인 지도자로서 성직자와 평신도들 에게 크게 인정을 받았다. 그를 추종하는 사람 들의 엄격한 금욕주의는 로마의 많은 그리스도 교도들의 영적 게으름에 대한 비난으로 작용했 다. 펠라기우스는 로마의 기독교도들의 도덕 수 준에 크게 실망했다.

(31)

• 인간 본성의 선함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했다. 펠라기우스는 기독교도들 사이에 만연해 있는 도덕적 태만을 걱정했으며, 자신의 가르침을 통해 그들 의 행위가 개선되기를 원했다. 인간이 약하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고 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거부한 이들은 하느님은 인간이 선과 악 사이에서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했다고 주장했고, 따라서 죄란 한 인간이 하느님의 법 을 저버리고 자발적으로 범한 행위라고 했다.

• 펠라기우스의 제자인 켈레스티우스는 원죄에 대한 교회의 교리와 유아세례 의 필요성을 거부했다. 히포의 주교인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주의를 반대했는데, 그는 인간이란 그들 자신의 노력으로는 의(義)에 도달할 수 없고 온전히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해야 한다고 주장.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가 필요하다고 주장

(32)

펠라기우스주의

•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고 원죄, 그리스도의 구원, 세례 등 의 의미를 왜곡.

• 죄는 유전되지 않으며 복종과 불복종은 인간이 결정한 문제라고 주장. 수도 사였던 펠라기우스는 인간은 금욕을 통해 자신을 통제함으로써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주장

•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는 418년 결국 파문.

(33)

• 니케아 공의회(325): 아리우스주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함

•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381): 성령의 위격과 그리스도의 인성을 다짐하기 위 함

• 에베소 공의회 (431): 그리스도의 인격의 통일성 강조(네스토리우스주의 단 죄)

• 칼케돈 공의회 (451):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관계

•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553): 단성론 논쟁 해결을 위해

•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680): 일신교설을 정죄함

• 니케아 공의회 (787): 성상숭배 논쟁 문제 해결을 위해

(34)

크리소스토무스 (St. John Chrysostom;

Ἰωάννης ὁ Χρυσόστομος, 347?-407)

• 초기교회 교부, 성서해석가, 콘스탄티 노플 대주교.

• 주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열정적이 고 명쾌한 설교를 함으로써 그리스어 로 '황금 입'이라는 뜻의 별명을 얻었다.

대주교로 있을 때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고, 유배지에서 죽었다. 438년 유 골들이 콘스탄티노플로 되돌아왔으며, 훗날 교회박사(교사)라는 칭호를 받았 다.

(35)

크리소스토무스 (St. John Chrysostom; Ἰωάννης ὁ Χρυσόστομος, 347?-407)

• 고급장교의 아들로 태어나 미망인이 된 어머니 밑에서 기독교도로 양육 받았고, 어머니의 뜻에 따라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명한 이교 수사학 자 리바니오스에게 배웠다. 그러나 신학도 함께 공부했음.

• 386년부터 12년 동안 사역한 끝에 위대한 설교가로 성장했고, 제1·4복 음서, 사도 바울의 8개의 편지에 대한 설교를 남겼다.

(36)

크리소스토무스 (St. John Chrysostom; Ἰωάννης ὁ Χρυσόστομος, 347?- 407)

• 크리소스토무스는 뛰어난 신학자나 신학 저자가 아니었으므로 신학사에 있 어서 언급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뛰어난 웅변가였다. 설교를 할 때 비유보다는 평이한 말을 사용했고, 성서의 뜻을 깊이 통찰함과 동시에 그 뜻을 적용하는 데 뛰어났다. 그의 설교에는 도덕적·사회적 교훈이 담겨 있 다. 저서들은 성서에 관한 수많은 설교들과 그외 설교들, 논문 몇 편, 편지들 로 구성됨.

(37)

유세비우스 (Eusebius of Caesarea, 263- 339)

• 세기에 팔레스타인 카이사리아 팔레스티 나이 지방에서 활동한 주교·해석가·변 증가·역사가.

• 그의 ‘교회사’ (Ecclesiastical History)에 실려 있는 그리스도교의 처음 몇 세기에 관한 기록은 그리스도교 역사기록의 이 정표이다.

(38)

히에로니무스, 제롬 (Eusebius Hieronymus; St. Jerome, 347-419)

• 성서 번역자, 수도원 지도자.

• 전통적으로 라틴 교부들 가운데 가장 학 식이 높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한동안 은 수자로 지낸 뒤 사제가 되었고, 교황 다 마수스 1세의 비서로 일했으며, 389년경 베들레헴에 수도원 공동체를 세웠다. 성 서·금욕주의·수도원주의·신학에 대 해 쓴 수많은 저서들은 중세 초기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라틴어 번역성서 불 가타역 성서로 유명하다

(39)

히에로니무스, 제롬 (Eusebius Hieronymus; St. Jerome, 347-419)

• 로마에서 성서연구를 계속하면서 금욕생 활을 보급했고, 다마수스의 요청으로 간 단한 해석학 논문들을 쓰고 오리게네스 의 〈아가〉 설교 2편을 번역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수한 그리스어 사본들을 토대로 옛 라틴어 복음서 역본들을 자기 방식대로 개정한 일과 70인역 구약성서 (그리스어 역본)의 몇몇 사본을 토대로

〈시편〉의 옛 라틴어 역본을 처음 개정 한 일이다.

(40)

히에로니무스, 제롬 (Eusebius Hieronymus; St. Jerome, 347-419)

• 제롬은 폭넓은 학식, 특히 고전, 성서, 그리스도교 전승에 대한 이해로 유 명.

• 제롬의 정신세계는 라틴이었다. 제롬은 그리스와 히브리어 실력이 탁월했 음.

• 그의 생애는 학문과 금욕주의를 절충한 것이며, 그가 남긴 편지는 역사가

·성서학자·신학자 들의 학문적 관심을 끌었다. 그의 영향은 특히 중세 초반에 더욱 폭넓고 깊었다. 주로 매체는 불가타(그가 번역한 라틴어 성서 역본)였으나, 해석학자 겸 인문주의자로서 남긴 저서들을 통해서도 중대 한 영향을 끼쳤고, 그리스 사상의 많은 부분을 서방에 전달했다는 점에서 도 그러했다.

(41)

히에로니무스, 제롬 (Eusebius Hieronymus; St. Jerome, 347-419)

• 다마수스 1세는 라틴적인 교회를 부흥시키려 했고 그리스어로 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는데 힘씀

• 제롬은 그리스 고전과 라틴어를 연구했던 학자로서 히브리어에도 능통.

• 다마수스 1세는 제롬에게 라틴어 번역을 부탁, 제롬은 382년 번역작업을 시작해 405년 작업을 번역 작업을 마침

(42)

히에로니무스, 제롬 (Eusebius Hieronymus; St. Jerome, 347-419)

• 제롬은 구약성경의 그리스어 역본이 70인역 성경을 토대로 번역을 했으며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직접 번역하여 구약성경번역에 좋은 선례를 남 김, 또한 번역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제롬은 많은 유대랍비들의 조언을 구함. 유대교 성경이 외경이 포함되어있지 않았으나 70인역에는 외경이 포함되어서 어쩔수 없이 번역.

• 제롬은 외경은 신자의 믿음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나 교리를 세우기 에는 부적합하다고 밝힘

• 서방교회가 사용할 수 있는 언어로 성경을 번역한다고 한 것이 오히려 평 신도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된 성경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게 된 결과 초래, 그러나 서방교회가 라틴적인 교회가 되도록 힘을 실어줌

(43)

암브로시우스 (St. Ambrose; Aurelius Ambrosiu, 339-397)

• 밀라노의 주교, 성서 비평가.

• 암브로시우스는 본래 밀라노의 총독으로 매우 정직하고 유능한 인물이었음

• 밀라노 주교가 죽자 사람들은 암브로시 우스를 밀라노 주교로 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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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브로시우스 (St. Ambrose; Aurelius Ambrosiu, 339-397)

•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한 중세 개념의 전형이 된 여러 사상을 맨 처음 내놓은 인물이다. 그의 저서들은 라틴 웅변의 걸 작으로 인정받아왔으며, 그가 지은 찬송 가들을 통해 그의 음악적 업적은 오늘날 까지도 기억되고 있다. 또한 위대한 그리 스도교 신학자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 스를 개종시키고 세례를 준 교사로, 교회 가 로마 제국의 폐허 위로 떠오르는 환상 을 본 모범적인 주교로도 기억된다.

(45)

암브로시우스 (St. Ambrose; Aurelius Ambrosiu, 339-397)

• 암브로시우스는 라틴 지식인들에게 그리스도교를 고전 라틴어로 번역하 여 나무랄 데 없이 전해주었다. 성직자들의 도덕적 의무에 대해서 쓴

‘성직자의 의무에 대하여’ (De officiis ministrorum) (386)을 저술

• 그는 로마의 영웅들 대신에 구약성서의 성인들을 기독교로 개종한 귀족 의 행동 모범으로 삼기 위해 노력했다. 많은 편지를 쓰고, 많은 지역을 방 문하고, 많은 사람을 임명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한때 로마 총독으로 다 스린 적이 있는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에 이 귀족적인 그리스도교를 강화 했다. 밀라노에 있을 때 그는 새로운 동방 음악들을 도입하고, 아름다운 찬송가들을 작곡.

(46)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Aurelius

Augustinus; St. Augustine of Hippo, 354-430)

• 로마령 아프리카에 있던 도시 히포의 주교 (396~430).

• 당시 서방교회의 지도자이자 고대 그리스도 교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 일컬어진다.

• 신약성서에 나타난 종교성과 그리스 철학의 플라톤 전통이 그에게서 완벽하게 융합되었 다. 그러한 그의 사상은 중세 로마 가톨릭 세계로 이어졌고 근대의 프로테스탄트를 낳 았다.

(47)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Aurelius Augustinus; St.

Augustine of Hippo, 354-430)

•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두 실체, 즉 육체와 영혼의 복합체이며 그중 영혼이 훨씬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본성에서 육체를 배제해 서는 안 되며 죽은 뒤 육체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 이 보증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Confessions)(400경)과 ‘삼위일체론’ (De Trinitate) (400~416)에는 인식·지각·기억·사랑 등에 대한 날 카로운 심리학적 분석이 가득 차 있다. ‘신국론’(De civitate Dei)(413~426)에서 인간 역사의 전체 이야기는 인류가 신의 구원을 받아 결국 창조주 안에서 안식하 는 진보적 움직임으로 나타나 있다.

(48)

13. 교부철학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St.

Augustine; 354-430)

• 로마 속주 아프리카(카르타고) 히포의주교

• 고대 기독교의 사상가

•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배우고 키케로와 같 은 라틴어 학자의 사상에 영향 받음

• 그의 사상은 로마가톨릭세계뿐 아니라 중세 이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에 영향

• 신플라론주의에 심취

• 고백론(Confessions)에서 신은 우리의 직관 을 통해 진리와 선을 알려주는 근원이라고 기술

• 구원문제에 있어서 인간의 무능함과 신의 은총을 강조

(49)

13. 교부철학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St.

Augustine; 354-430)

• 스토아 학파의 결정론과 운명론과 반대해 인간의 자유의지(free will)는 신의 전지전능 성과 양립하며 인간의 의지는 신의 섭리를 받으면서도 자유

• 인간은 원죄(sin)를 짓기전 완전한 자유를 향유

• 모든 죄악의 시초는 인간의 자만심

(50)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Aurelius Augustinus; St.

Augustine of Hippo, 354-430)

• 악의 본질과 권위와 이성의 관계같은 지적 문제들을 위주로 마니교를 논박하는데 치중했고 주교가 되어서 는 성경 해석 특히 바울 서신의 해석에 깊이 파고듦

• 신학에 대한 이해력이 증대되면서 일반적인 인간 본 성과 자기 자신의 역량을 평가하는데 직접적인 영향 을 끼침

(51)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Aurelius Augustinus; St. Augustine of Hippo, 354-430)

•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를 반박하면서 인류는 파멸덩어리로서 구 속의 은혜를 입지 못하면 순수한 선한의지의 행위를 내놓을 수가 없으며 선량한 이교도들의 덕행도 모두 죄로 얼룩져있다고 봄.

• 펠라기우스 논쟁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온 인류가 지옥에 떨어진다면 그것은 엄격한 공의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 신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소수의 영혼들을 구원하기로 선택 하시되, 그들이 일체의 공로를 나타내기 전에 예정하심으로써 선택하신 다. 이 선택이 불공평하다고 불평한다면 그것은 자범죄는 물론이고 원죄 에 붙은 죄의 무게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라고 반박.

(52)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Aurelius Augustinus; St. Augustine of Hippo, 354-430)

•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교리에는 은혜가 불가항력적이라는 결론이 필연 적으로 따르게된다. 사람이 심하게 타락하여 더 이상 선을 행할 자유의 지가 없다면 은혜가 모든 것을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 권능이 불가항 력적이라는 것은 그렇지 않을경우 무력하게 될 하나님의 예정에서 추론 할 수 있는 분명한 결론이다. 따라서 은혜를 확인하려면 생애를 마칠때 까지 평생 선한 인격을 견지하는가, 즉 최종적인 견인(堅忍)을 견지하는 가를 확인하면 된다. 그것은 인간의 공로와 무관한 하나님이 미리 정해 놓으신 선물이다.

(53)

고백론

• 고백론은 영혼이 창조주께 돌아가기까지는 안식할 수 없다는 영원한 진 리를 무의식중에 보여주게끔 구성된 점에서 독특함

• 개인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으나 그 목적은 신학적 논제를 예시하고 있 음

(54)

13. 교부철학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De civitate Dei ; The City of God)

•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는 로마말기로써 게르만족의 침입등 매우 혼란했던 시기

• 410년 로마가 고트족에 의해 약탈을 당하자 이교도들은 로마가 전통적인 신 을 버리고 낯선 기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비난

•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년인 413-426년에 저술된 것으로 서구사상의 금자탑

• 로마가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에게 함락된 사건을 계기로 저술

•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의 전반부에 그러한 비난이 근거없음을 논하고 후반부에서 기독교의 입장을 천명하여 기독교적 사관을 제시

• 아우구스투스에 의하면 인류의 역사는 신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며 인 류가 낙원에서 추방된 뒤에 신의 나라(civitas Dei)와 지상의 나라(civitas

terrena)의 투쟁은 계속된다는 것이고 결국 신의 나라의 승리로 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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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교부철학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De civitate Dei ; The City of God)

• 그리스 로마의 고대 역사관은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순환사관이 일반 적이었으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순환사관을 깨뜨리고 인류역 사는 시초와 끝이 있으며 원죄(sin)에 의한 타락과 구제가 마련되는

‘신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의 투쟁과정이 매우 극적이고 동적 인 역사관을 제시하고 인류 역사의 궁극적 의미는 신의 섭리에 있음 을 밝힘

• 시사적 서술과 함께 플라톤 철학의 한계, 자연신학의 문제, 신국의 기 원으로서 창조와 시간의 문제, 악의 문제, 성서의 역사관, 평화, 최후 심판, 법과 질서 다룸

• 인간의 역사는 지상의 나라와 천상의 나라와의 싸움이며 인간은 궁 극적으로 지상의 나라를 추구하지 말고 신의 나라를 추구해야 함.

•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러한 역사관은 중세교회와 신학의 토대가 됨

(56)

신국론

• 신국론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년인 413~426년에 저술된 것으로 서구사 상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인류의 전역사를 신의 뜻과 구원계획에 따라서 진행되는 일회적인 과정으로 본다. 신국이 보여주는 사상체계는 이후 서구의 신학사상뿐 아니라 철학사상, 특히 역사철학의 바탕을 이룬다. '신국', 곧 신의 나라는 세상나라(Civitas mundi)와 구별되 는 개념이다. 이 세상에는 신의 나라와 세상나라가 서로 얽혀 있지만 결 국 신의 나라가 승리한다고 본다. 두 나라를 구분했다 하여 아우구스티 누스의 사상을 이원론으로 보기도 하지만 신국은 결코 그러한 이원론과 무관하다. 신의 나라는 이 세상나라에 참여하여 세상나라를 끊임없이 변화시킨다고 보기 때문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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