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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황제 숭배와 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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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로마 제국의 황제 숭배

Ⅱ. 유대󰠏크리스트교 사회의 종교와 정치관

Ⅲ. 황제 숭배와 크리스트교 박해

Ⅳ. 크리스트교도의 황제 숭배 비판과 습합 현상

Ⅴ. 끝맺는 말

최혜영

**1)

Ⅰ. 로마 제국의 황제 숭배

통치자가 여러 문화적 기제1), 특히 종교적 기제를 이용하여 통치에 필요 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발견된다. 그중에

* 이 논문을 위한 연구는 한국학술진흥재단 기초연구과제 (해외지역연구: 과제번호 KRF 2007󰠏323󰠏A00008)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졌다.

**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1) 로마 황제 숭배의 경우, 황제의 신성을 유포하기 위해서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아 스󰡕처럼 널리 읽히는 문학을 이용하거나. 머리 형태 등 적절하게 치장된 황제의 외모, 화려하게 꾸며진 황제의 여러 공식 행사들, 특히 국가적 축제, 축제 시의 은전나누기, 초상화, 화폐, 개선문 등의 기념물, 화려하고 압도적인 공공건축물, 메달이나 펜던트 등을 이용하였다. 특히 adventus 관련 의례처럼, 황제의 나들이, 즉위식, 장례식 등의 제의에는 화려한 의식이 뒤따랐다. cf. S. MacCormack, Art and Ceremony in late antiquity (California,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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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 로마 황제 숭배에 대해서는 정치적 현상인가, 종교적 현상인가를 둘 러싸고 매우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져왔다. 종교를 가장한 정치적 통치술에 다름없다는 의견에서 종교적 차원으로 충분히 승화되었다는 입장, 종교성 을 강조할 때도 공동체 통합의 ‘사회적 종교’ 원리, 정치 이데올로기 등의 기능적 측면을 함께 보아야한다는 견해 등 매우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여왔 다.2) 최근 프라이스(S.R.F. Price)는 교육받은 이교도들이 어느 정도로 황제 의 신성을 믿었던가하는 케케묵은 논쟁은 이미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보 았다. 황제 숭배는 권력의 거미줄의 일부로서의 종교와 정치 모두를 고찰 함으로써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보았다3). 실제로 로마를 비롯한 고대 국가에서는 종교는 국가 사회정치적 질서의 토대로 이해되었고, 정치적 이 데올로기는 제의와 의식을 통해서 표현되었으므로, 정치냐 종교냐를 따지 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황제 숭배 제의의 형태는 다른 신들에게 드리는 제의와 비슷한 가운데, 여러 다양한 모습을 띠고 나타났다. 즉 지역이나 시대나 영역에 따라서, 혹은 숭배자의 성향이나 지식의 정도에 따라서 황제 숭배에 대한 태도나 반응은 다르게 나타났다. 예를 들어 대중이 보다 열광적으로 숭배하는 경 향을 띠었다면, 회의적 지식인들은 형식적이거나 관습적인 수준으로 받아

2) L.R. Taylor, The Divinity of the Roman Emperor (Boston, 1919)의 고전적 저서를 필두로 해서 오늘날까지 수많은 연구물들이 나타났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녹(A.D. Nock) 이 나 라트(K. Latte) 같은 학자들은 황제 숭배 의례에서 전통적 신에 대한 종교성을 찾기가 힘들다고 주장하였다. 키이(A. Kee) 역시 로마 황제 제의를 포함한 지배자 숭 배는 종교의 가면을 쓴 정치적 이데올로기였다고 하였다. 반면 플레케트(H.W.

Pleket)나 라티모어(R. Lattimore), 밀러(F. Millar) 같은 학자는 황제 숭배 의례가 단순 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신앙의 차원으로까지 승화된 면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H.W. Pleket, “An Aspect of the emperor Cult: Imperial Mysteries,”, HThR 58(1965), n.4, pp. 336󰠏343; R. Lattimore, “Portents and Prophecies in Connection with the Emperor Vespasian”, CJ 29(1931), pp. 441󰠏449; P.A. Harland, “Honours and Worship: Emperors, Imperial Cults and Associations in Asia Minor and the Apocalypse of John,”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New Testament 77(2000), pp. 99󰠏121.

3) S. Price, Rituals and Power. The Roman Imperial Cult in Asia Minor (Cambridge,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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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는 경향이 강하였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황제 숭배에 대한 황제 본인의 입장도 각각 달랐다. 옥타비 아누스처럼 황제 숭배 의례를 일종의 정치적 도구로 보고, 이를 거부한 유 대인 같은 이들에게는 종교적 강요를 삼가는 이들도 있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41년 알렉산드리아 인들에게 보낸 ‘요청한 대로 나의 생일을 신성 한 날로 기념할 것과 나와 나의 가족의 조상을 건립할 것은 허락하지만, 사람들의 비방을 원치 않으므로 신들에게만 허용되었던 신전이나 사제를 나에게 바치는 것은 거절한다‘4)는 편지의 내용을 미루어, 당시 황제 숭배 관행을 비방하는 이들도 있었음을 추측케 해준다. 그는 만신전에 자기 이 름이 등재되는 것을 거부하고, 자기의 조각상이 다른 신들의 조각상과 함 께 세워지는 것을 거부하기도 하였다.5) 하지만 칼리굴라나 도미티아누스, 헬리오가발루스처럼 황제 숭배 그 자체에 강하게 집착하여 강요하는 경우 도 있었다.

또한 지역에 따라, 예컨대 로마와 로마 제국의 속주에서 각각 다르게 나 타났다. 잘 알려져 있듯이, 동방 속주 지역에서의 황제 숭배는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지역의 공적인 황제 숭배 장소는 아우구스테움 (augusteum) 혹은 카이사레움(caesareum)으로 불렸다. 이는 처음에는 카이 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신전을 뜻하였다가, 점차 황제 숭배의 일반적 장소 를 의미하게 되었고, 결국 각 도시에서 가장 중요하고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6). 특히 동방지역의 로마 제국에 복속하게 된 지역의 지도자 들은 보통 아우구스테움 앞의 아우구스투스의 제단에 모여 황제와 황제 가 족을 두고 충성을 맹세하였다. 로마 지배 지역의 최상류 계층은 대개 아우 구스투스 및 여신 로마의 사제단으로, 이들에게는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다.

두라 오이로파의 제단에 새겨진 ‘아엘리우스 티티아누스가 콤모두스 아우

4) Select Papyri 212, LCL 5) Dio, 35. 27.3

6) H.F. Burton, “The Worship of the Roman Emperors”, The Biblical World, 40,2(1912), pp. 8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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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투스 피우스 펠릭스, 우리의 주 황제, 승리, 세상의 평화, 무적의 헤라 클레스를 위하여 두라의 게니우스에게 봉헌한다’고 새겨져 있는 비문을 통 해 당시 널리 퍼져 있던 황제 숭배 의식을 엿볼 수 있다7).

일찍부터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진행된 동방 속주에서와는 대조적으로, 황제 숭배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였던 로마에서는 전통적 신앙 대상인 라레 스나 게니우스 숭배와 결합, 활용되면서 황제 숭배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기원전 12년 라레스에 대한 의례와 더불어 황제의 제단이 세워지게 되어, 교차로의 라레스 신당이 복구되었다. ‘라레스 아우구스티’가 세워지는 한 편 황제의 게니우스 상이 건립된 것이다. 로마의 여러 구역으로 확대된 이 러한 제단과 희생제는 제국에 대한 확고한 충성의 상징이 되었다.

공적인 영역에서 시작된 황제 숭배는 사적인 영역에까지 스며들었다. 기 원전 30년 원로원은 공적이거나 사적인 축연에서 아우구스투스의 게니우 스에 대해서 헌주하라는 칙령을 내렸다8). 각 로마의 가정에서 정찬 시에 의례적으로 집안의 게니우스에게 헌주하였듯이, 이제는 국가의 가장인 황 제의 게니우스에게도 헌주를 하게 된 것이다. 이 이후 각 가정은 가정의 신들과 함께 모셔진 황제 상 앞에서 음식이나 음료를 바치고, 향을 태웠다.

폼페이의 저택에 그려진 한 벽화에서 헌주를 받는 게니우스는 그 아래, ‘원 로원의 포고에 의해서’라는 문구가 쓰여 있는 것으로 미루어 황제의 게니 우스로 추정된다.9)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세기에 이르면 집에 황제의 신상이 없는 사람은 불경하다고 여겨졌고, 3세기 말경에도 황제의 신상은 집안의 페나테스 신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전한다.

공적, 사적 영역을 포괄하여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삶의 주기와 형태를 강하게 규정하는 칼렌다 자체가 황제숭배와 강한 연관을 갖고 재편성되었 다. 기원전 9󰠏8년 파울루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아우구스투스의 탄생일이

7) M.P. Speidel, “Commodus the God󰠏Emperor and the Army,” JRS 83(1993), pp. 109󰠏

114 8) Dio, 51. 19

9) A. Mau, Pompeii in Leben und Kunst (Leipzig, 1908), p.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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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시작이 되도록 칼렌다를 새로 만들었다. 황제의 생일은 모든 사물 의 시작과 같은 것이며, 모든 이에게 황제의 탄생은 삶의 시작이라는 것이 다. 또한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도시를 첫 방문해준 날을 새해 첫날로 삼 는 곳도 있었다. 황제의 기념일󰠏생일이나 즉위, 승전 기념일 등이 여러 신 들의 기념일 대신에 중요 축제일로 자리 잡았다. 황제의 이름이나 칭호가 달이나 날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도시의 명칭도 황제의 칭호를 따라서 카이사레아, 세바스테스라고도 불리기도 하였다. 황제에게 신전이나 제단, 조각상을 세운 후에 종교행사와 희생 제사를 드리는 도시 도 있었다. 지배자 숭배는 지배를 받는 자가 권력을 가진 자의 우호적 행동 을 이끌어내는 하나의 소통 수단으로, 황제 하부의 권력층에게도 적용되었 다. 파견된 총독들까지 그 지역의 신으로 존경받았으며, 호화스런 제단과 신전, 제사와 숭배 심지어 희생제물까지도 바쳐졌다는 수에토니우스의 기 록을 보면 황제에게 이런 의례가 드려졌을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 다. 황제를 위하여 개최된 공식적 축하 행사는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지역 적 발의나 지역 간의 경쟁의 산물로 다층적이며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었 다. 개인적인 숭배 의식과 각 지역의 종교성, 문화적 배경, 국가적 관심사가 된 의례 의식에 정치적인 것이 가미되었던 것이다.10)

Ⅱ. 유대󰠏크리스트교 사회의 종교와 정치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황제 숭배는 처음에는 그 의례에 대하여 거부감 이 있던 로마에서조차 게니우스 숭배와 결합된 형태로 정착되면서 2세기경 이 되면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대와 지역, 계층을 막론하고 황제 숭배 관행과 끊임없이 갈등을 빚던 이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바로 유대교 도와, 여기에 뿌리를 두고 나타난 크리스트교도들이었다.

고대 유대인의 왕정관 자체가 고대의 여느 민족과 다른 점이 많았다. 유

10) Cicero, De divinat, 2, 33; De Nat. Deor.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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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들은 주변 민족들이 거의 왕정국가 체제를 이루었던 가운데서도 왕이 라는 존재 자체가 없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순종하는 모세나 여호수 와 같은 지도자, 혹은 삼손이나 입다, 기드온 등 사사라고 불리던 민족 지 도자가 있었을 따름이었다. 한때 이스라엘 여성이 아닌 세겜 여인을 어머 니로 둔 기드온의 서자 아비멜렉이 칠십 명 가까운 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이때 유일하게 죽음을 피하였던 기드온의 막내아들 요담은 가시나무 비유를 들며 왕이 된 아비멜렉을 비판하였고11), 결국 왕 을 자처한 아비멜렉은 비참하게 죽는다. 그 후에도 이스라엘인들은 여호와 를 ‘왕’으로 섬기면서12), 제사장 중심 국가 형태를 띠었다. 이런 점은 주변 민족들에게 색다르게 비추어져서, 예컨대 기원전 4세기말 아브데라의 헤카 타에오스는 ‘그들은 왕이 없고 성직자들 중 미덕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 이 지도자였던’ 사회로 유대 사회를 묘사한다.

하지만 블레셋 사람들과 오랫동안 싸우는 와중에 유대인들도, 왕이 통치 하며 앞장서서 전쟁터에서 싸우는 국가를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요구에 유대인들의 ‘여호와 하나님’은 당시의 제사장 사무엘에게 유대 백성들이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왕의 제도란 아들과 딸들을 징발하고, 재산을 가져가고 억압할 것’임을 경고하면서도 왕정을 허락해준다.13)

이런 배경 아래 성립된 이스라엘 왕권은 주변 다른 나라들의 왕정과는 성격이 달랐다. 우선 왕권은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닌 매 우 제한적인 것이었다. 이는 나봇의 포도원을 둘러싸고 일어난 이스라엘

11) 나무들이 나무의 왕을 뽑으려 감람나무, 무화과 나무, 포도나무를 찾아가지만 모두다 어찌 나무들위에 요동하리요하면서 왕이 되기를 거절하는데, 가시나무만 승낙하고 자 기를 따르지 않을 경우 모두 불로 살라버릴 것이라 위협한다. 여기서 가시나무는 왕 이 된 아비멜렉을 의미한다. 사사기 8장 33절,

12) eg. 말라기 1. 14 “나는 위대한 왕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 니라”

13) 사무엘 상, 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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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아합과 나봇 사이에 일어난 갈등에서 잘 드러난다14). 나봇은 자기가 가 진 포도원을 사겠다는 왕의 요청을 ‘하나님이 금지하신다’면서 거절하자, 왕은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고민한다. 결국 페니키아 출신 왕비 이세벨이 아합에게 ‘이스라엘 왕이 되어서 그것도 못하느냐’하고 질책하면 서 간계로 포도원을 빼앗지만, 결국 아합이나 이세벨은 비참한 최후를 맞 이하게 된다.

또한 유대인들은 국가를 지키는 최대의 무기는 왕의 말과 병거가 아니라 선지자 혹은 제사장이라고 보았다. 󰡔신명기󰡕에는 ‘만약 왕을 세우려거든, 말(馬)을 많이 두거나 구하지 말고, 아내를 많이 두지 말고, 금은을 쌓지 말 것’을 명령한다.15) 일반적으로 국가를 다스리는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 각되는 세 요소, 즉 군사력(馬󰠏말로 대변되는)이나 외교관계(아내를 많이 두는 것󰠏고대에는 결혼동맹으로 주로 이를 추진하였다)나 재력(금은) 대신 에 오로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지도자를 의지하라는 것이다.

한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군사의 수효를 의지하려 시도하였던 다윗 왕은 선지자의 책망과 더불어 하나님으로부터 큰 벌을 받게 되었다.16) 또 한 이스라엘 왕은 선지자 엘리사를 ‘이스라엘의 병기와 무기여’ 라고 부른 다.17) 무엇보다도 왕은 사람들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공의로 다스려야하 였다.18)

이상에서, 유대인들은 처음 여호와 하나님을 그들의 ‘왕’으로 여기고, 하 나님의 말씀과 권능이 임하였던 사람이 그 때 그 때의 지도자가 되어 이끌 어가는 신정국가적 형태를 띠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팔레스타인 이 웃 족속과의 전쟁 속에서 왕정을 형성하게 되면서 정치와 군사를 담당한 왕과 제사, 종교를 담당하는 제사장의 이원체제로 접어들게 되었다. 왕권과

14) 신명기 17. 20; 열왕기상 21장.

15) 신명기 17, 14󰠏20.

16) 사무엘상 24장 17) eg. 열왕기하 13.14.

18) eg. 사무엘하 23.3; 신명기 1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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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은 권한은 분리되어 있었으므로, 이를 어기고 직접 제사를 지냈던 왕 사울은 결국 비참한 죽임을 당하였으며, 제사장 대신에 분향하려 한 웃 시야 왕은 문둥병이 들어 물러나게 되었다.19) 그 후 이스라엘과 유대가 아 시리아(BC 722)와 바빌로니아(BC 586)에게 각각 망하고, 후에 바빌로니아 에서 70여년의 포로기를 살던 유대인들이 페르시아의 관용책으로 예루살 렘에 되돌아왔을 때 이들이 세운 국가는 제사장 중심의 일종의 신정국가 형태를 다시 띠게 된다. 페르시아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무너진 후의 헬레니즘 시대에 이스라엘은 시리아의 학정을 겪게 되었고, 이에 반발하여 일어난 마카베오의 난의 결과 하스몬 왕조가 성립되었다. 그 뒤 로마 제국 이 서쪽으로 진출해 오면서 로마는 유대 땅을 통치하기 위해 헤롯 왕가를 내세우고 총독을 파견하였는데, 이런 로마 통치 아래 크리스트교를 창시한 예수가 태어나게 된다.

고대 사회의 종교는 기본적으로 어떤 지역이나 부족에 따른 것으로, 각 기 수호신들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은 대부분 신전에서 형상물로 숭배되고 있었다. 각 지역의 숭배대상인 신은 그 지역의 운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있 다고 생각되었고, 종교는 공동체 의식과 애국심을 묶는 정치적 힘으로 작 용하였었다. 특히 전쟁에서 수호신의 역할은 두드러졌다. 예컨대 바빌로니 아의 세력이 커지면서 바빌로니아의 수호신 마르둑이 신들의 왕좌에 앉게 되는 과정은 서사시 󰡔에누마 엘리쉬󰡕에 잘 나타나 있다. 하나의 강력한 국 가가 나타나면, 병합된 지역의 신들은 각자가 수호하는 나라의 정치적 상 황에 따라 정복국가의 수호신을 최고신으로 하는 신들의 위계질서 속에 자 리잡게 되고, 지상의 평화와 함께 ‘신들의 평화’도 이루어진다. 유대의 주 변 민족들, 특히 유대인을 지배한 적이 있던 아시리아의 예를 들자면, 아시 리아왕은 자신이 정복한 이스라엘 땅에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이 생기는 것 을 보고, 아시리아가 이스라엘의 신을 제대로 섬기지 못한 결과라고 보고 잘 섬길 수 있도록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 몇 명을 훈련시켜 사마리아 땅에

19) 역대하 27.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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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기 까지 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신을 포함하여, 각 지역의 신들을 통합하여 자신의 정치권력을 공고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20)

또한 제권은 가끔 어느 신들보다 우선하기도 한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이 통치할 당시, 그의 신하들은 다리우스에게 한 법령을 공포하기를 구 하였다. 그 내용은 삼십일 동안에 페르시아 왕 이외에 어떤 신이든지 사람 에게든지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자는 것이었고 이 칙령은 통과되 었다. 이것은 페르시아 왕이 여러 신들 위에 설 수 있었음을 보여주며, 왕 이야말로 모든 인간과 신들보다 우선적인 숭배와 기도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강력한 황제권이 신들보다 우선될 수 있다는 관념은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있었다. 여기서 지상의 왕들의 질서와 천상의 신들의 질서 는 상응하는데, 이는 로마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관행이었다.

케일리우스가 로마인들은 모든 인류의 예배 의식을 떠맡게 되는 것과 동시에 그들의 제국을 얻었다고 말한 것은 같은 맥락이다. 켈수스나 율리 아누스 황제도 마찬가지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율리아누스의 설명에 의 하면, 온 우주의 중심에는 가장 위대한 신이 있으며, 그 아래 여러 지역신 이 있어서 각 민족에게 할당된다.21) 이들 지역신은 최고신의 대리인 같은 역할을 한다. 각 민족의 기질이나 성격은 이들 지역신의 성격에 의해 달라 지는데, 예컨대 전쟁의 신이 그 민족의 수호신일 경우 그들은 호전적인 민 족이 되며, 지혜나 기교의 신이 그들의 수호신일 경우 그들은 예술적인 민 족이 된다.22) 당연히 세계 제국을 세운 로마 제국의 황제와 그 수호신은 우주 최고의 황제이며, 가장 서열이 높은 신이다.

하지만 ‘정통’ 유대인들은 (그리고 유대교를 배경으로 나타난 크리스트

20) 열왕기하, 17. 27.

21) Jul. Log. 11, 148c.

22) Ibid., 143a󰠏b. 신들의 위계질서는 로마의 통치구조, 정치적 위계질서를 반영하는 듯이 보인다. Cf. H.A. Naville, Julian Apostat et sa philosophie du polytheism (Paris, 1877),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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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들은) 이러한 신들의 평화󰠏위계질서 안에 들어오기를 거부하였다. 유 대-크리스트교의 하나님은 다른 신들에 대한 숭배 금지를 제 1계명으로 내 세우면서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유대󰠏크리스트교도 들은 자신들의 초라하기조차 한 정치적 입지에 상관없이, 가장 절대적이며 우월한 신, 세계를 창조한 하나의 신을 믿고 다른 어떤 신들도 거부하였다.

따라서 각 민족의 관습과 종교를 허락해주었던 페르시아 통치 아래에서 유 대인들은 별 문제없이 지낼 수 있었지만, 자기의 종교를 강요하는 나라의 통치를 받을 때에는 분란의 여지가 많았다. 이는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 조나 로마 제국 치하에서 유대인들의 반란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유대인의 모습은 대부분 국가나 민족들에게 너무나 이질적으로, 배타적으 로 비추어지기 마련이었다.

골드스타인(N.W. Goldstein)은 일찌기 ‘유대인과 이웃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있다고 하였는데23), 이는 로마 시대 문헌에서 자주 발견되는 관점이다. 카시우스 디오는 유대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독특한 율례를 가진 이들로 나머지 인류들과 너무나 다르다고 보았다(37. 17. 2󰠏3). 타키투스는 유대인은 타민족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있으며, 전통적 관습 중 하나인 할 례로써 다른 모든 민족들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고 있으며, 다른 모든 신들과 국가를 부인케 하며, 부모와 형제를 무시하도록 가르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들의 비타협성과 배타성이 인류를 증오하는 이들로 미움을 받 게 하였다는 것이다.

유대인에 대한 비판이나 불평은 구체적으로는 그들의 출신, 독특함, 종 교와 의례, 안식일, 할례, 그리고 돼지고기 등의 관습, 개종, 배타성24), 반역

23) N.W. Goldstein, “ Cultivated Pagans and Ancient Anti󰠏Semitism,” JR 19(1939), p.

346, cf. J.L. Daniel, “Anti Semitism in the Hellenistic 󰠏Roman Period,”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98,1 (1979), p. 46.

24) 키케로는 유대를 의심과 중상의 나라로 본다(Flac. 68). 마르티알리스은 유대인의 할례 와 방탕함, 비천함을 지적하며(7. 30; 12. 57.13), 세네카는 안식하는 날을 좋아하는 게으른 저주받은 종족으로 보았으며(Augustinus, Civitas dei, 6.11에서 언급), 유베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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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관련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가장 치명적인 유대인의 ‘죄’는 반역적 인 민족이라는 점이었다. 유베날리스는 그들은 자기들의 법은 열심히 지키 지만, 로마법을 조롱하는 경향을 지적하며(14. 100󰠏104), 실리우스 이탈리 쿠스는 무서운 민족으로(fera gentis, Pum. 3. 605), 필로스트라투스는 로마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반란을 일으킨 민족으로(VA 5.33), 퀸틸리아누 스는 다른 이들에게 파괴적인(perniciosam) 민족으로 보고 있으며(Inst.

3.7.21), 제정 말기의 사가 마르켈리누스 역시 그들의 반역성(22. 5.5)을 지 적하고 있다.25) 아피아누스는 유대인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켜서 더 많은 인두세를 내어야했다고 증언한다(Syr. 50).

로마 시대에 일어난 이러한 갈등의 근본적인 배경은 앞에서도 언급이 되었다시피 주로 종교적인 것󰠏일신교 및 신의 형상의 유무, 그리고 이가 초래한 정치적 갈등이었다. 로마 사회에 예속된 모든 민족들이 로마의 황 제를 기리기 위해 제단과 신전을 건축하며 그를 신으로 섬기는데 반해, 오 직 유대인만은 로마 황제의 흉상을 세우고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반동적 민족으로 비추어졌다. 타키투스는 BC 66년 과 AD 136년

리스는 우울한 풍채를 지적하고(14.110), 루틸리우스 나마티아누스는 불결함과 어리 석음을 지적하고 있다. Lutilius Namatianus, 1. 397󰠏98. 또한 유대인들도 개종자를 얻으려 하였다. Horatius, Sat. 1. 4. 143; Tacitus, Hist. 5.5. 효과적인 유대인 개종을 한탄한다.

25) 유대인에 대한 긍정적인 언급도 있다. 정치적 갈등이 표면에 떠오르지 않았을 때에는 칭송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요세푸스가 전하는 헤카타에우스의 단편들은 그 진위 가 의심되기는 하지만, 유대인들을 현명하고 계몽된 일신교적 경향을 가진 이들도 묘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던 테오프라스투스 역시 유대인들을 철학자들로 묘사한다. cf. M. Hengel, Judaism and Hellenism (Oregon, 2003 rev.), p.265. 또 다른 제자 헤르미푸스는 피타고라스가 유대인과 트라키아인의 견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리스 문헌에서 기원전 2세기 말까지 ‘철학자’들을 묘사되던 유대인들은 아마도 2세 기 후반경, 즉 마카베오의 반란 이후 특히 혐오스럽게 묘사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후에도 스트라본은 올바르게 행동하고, 신을 향한 진실한 경건(NH, 16.2.37)을 좋 게 이야기하고 있다, 유대인을 싫어한 디오 카시우스와 타키투스조차도 그들의 용기 (65.6.3)와 단호성을 인정해주었다(Hist. 5.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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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난 두 차례의 반란은 유대교 각 분파의 열광적인 배타성과 이 땅에 신정왕국을 건설한다는 유일신 신앙으로부터 생겨난 현상으로 보았다. 이 로써 로마의 반유대감정이 극에 달했으며, 유대인들은 국가의 배신자이자 반로마적 정치 집단으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고대 세계의 일반적 심성 구 조에서 형상 없는 하나의 신을 섬기며26), 황제를 포함하여 다른 일체의 신 이나 형상을 숭배하지 않고 이를 강요할 경우 죽음을 무릅쓰고 저항하는 것 등은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을 것이다. 특히 이로 인하여 야기되는 정치 적 갈등이 이러한 사태를 악화시키게 마련이었다.

로마 황제를 비롯한 정치가들 중에는 카이사르처럼 유대인 관용정책을 쓰거나 안토니누스 피우스처럼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처벌받지 못하도록 한 이들도 있었지만27), 대체로 유대인에 대해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 았다. 티베리우스는 유대인 종교를 단속하고 예배용 옷과 의식용 집기를 모두 불태우도록 명령하였다. 유대인 청년들은 병역 의무를 구실로 기후가 나쁜 속주로 보내지고, 남은 유대인이나 유대교 신봉자는 수도에서 추방당 하였다. 이 명령에 따르지 않은 사람은 종신 노예형에 처해졌다고 전한 다28). 특히 한때 티베리우스의 총신이었던 세자누스는 유대인을 박멸하기

26) 형상 없는 예배와 신앙에 대해서 디오는 유대인들이 이름 없고 형상 없는 것을 믿으면 서 그들은 지구상 가장 열렬하게 믿는다고 언급하고(37.12.2), 바로(Varro)도 유대인 의 형상 없는 예배(Augustinus, Civitas dei 4. 31에서 언급)에 대해서 말한다. 나아가 루카누스는 유대인들은 미지의 신에게 숭배를 드리며(2. 592󰠏3), 유베날리스는 그들 은 다름 아닌 구름과 천체의 신을 섬긴다고 보았다(14. 97󰠏98).

27) ‘나는 신들이 이러한 사람들을 구별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신들을 예배하지 않는 사람 들을 처벌하는 일은 당신들보다도 신들에게 속한 일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그들로 하여금 폭동을 일으키게 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불경하다고 고발함으로써 그 들의 마음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분(안토니누스 피우스)은 크리스트교 도들이 로마 정부에 반항하려하지 않는 한 그들을 괴롭히지 말하는 회신을 보냈습니 다… 아직 크리스트교도라는 이유로 고발하고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 의 고발 때문에 심문 받는 사람을 풀어주고, 오히려 고발자를 유죄로 선고하시오’.

유스티누스의 변증문 속에 나오는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아시아 의회에 보낸 편지>

를 에우세비오스가 인용. Eusebius, HE,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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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며29), 가이우스 칼리굴라 치세에 알렉산드리아 의 유대인 회당에 황제의 상이 세워지고 유대인들은 약탈당하였다.30) 칼리 굴라는 나아가 예루살렘 성전에까지 자신의 초상화와 신상을 세우고 ‘눈에 보이는 유피테르, 가이우스 2세의 신전’으로 바꾸려 시도하였다31). 뒤를 이 은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49년 유대인들에게 로마를 떠나라고 명하였고,32) 70년 티투스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은 유대인에 대한 반감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는 티투스의 동생 도미티아누스 황제에게도 그대 로 이어져 유대교와 크리스트교도에 대해서 특히 적대적이었다. 그에게 황 제숭배는 충성의 표시였는데, 이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신만을 숭배하려는 유대교나 크리스트교는 불충하면서 불경한 종교로 여겨졌던 것이다33). 셉 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유대인으로 개종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였다.

이러한 유대인에 대한 반감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크리스트교도들에게 도 그대로 적용되는 바가 많았다. 무엇보다도 크리스트교인에 대한 인식은

28) Suet. Tiberius, 36. 디오는 티베리우스가 로마에서 유대인을 내몰려하였다고 전한다.

57. 18.5

29) Eusebius, HE. 3. 17 30) Josephus, 유대고대사 18.8

31) 에우세비오스는 필로(Philo)의 글을 인용하여 ‘스스로 신이라 칭하였던 가이우스(칼리 굴라)는 유대인들의 예배 장소를 자기를 예배드리는 장소로 바꾸어 자신의 조상과 초상으로 가득히 채우고, ‘눈에 보이는 유피테르, 가이우스 2세의 신전’이라고 부르 게 하였다고 전한다. Eus. HE, 79. 이에 유대 지도자들이 예루살렘에 황제의 성전을 세우기 전에 먼저 유대인 모두를 죽여야 할 것이라고 응답하자, 칼리굴라는 부장 페 트로니우스에게 군대를 주어 파견하면서 신상을 성전에 세우는 것을 반대하면 모두 죽이고 나머지는 노예로 삼으라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Josephus, 유대전쟁, 2.

하지만 칼리굴라가 마침 살해됨으로써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32) 사도행전 18.2; Suet. Claud. 25.4 ‘Judaeos impulsore Chresti assidue tumulantes Roma expulit’. Josephus, 『유대고대사』. 18.3.5 ; Tacitus, Ann. 2. 85; Suet. Tib. 36; Nerva, 68.2

33) 그는 유대 속주에서의 세금을 엄격하게 징수하도록 하고, 다윗을 자손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고, 또한 요한을 그리스 파트모스 섬에 유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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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살펴본 유대인에 대한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 인간 유형 을 유대인과 비 유대인으로 나눈 이들이 많았듯이, 플리니우스는 모든 인 간을 크리스트교도와 비크리스트교도로 나누면서 크리스트교도의 이질성 을 강조하였다. 크리스트교도는 유대교도와 마찬가지로 무신론자 혹은 불 경한 자로서 미신적이면서 반동적이며 사악한, 사회의 잠재적 위협 세력으 로 간주되었다. 예컨대 플리니우스는 크리스트교를 ‘질서를 해치는 왜곡된 미신(superstitio prava immodica)’으로, 수에토니우스는 ‘새로이 나타난 사악한 미신(superstitionis novae et maleficae)’으로, 타키투스는 파괴적인 미신(exitiabilis superstitio)이자, 모든 종류의 불명예스러운 것(flagitia)으로 보았다.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것은 유대교나 크리스트교도들이 ‘무신론자(atheos)’

라는 비난을 들었다는 것이다. 유대인이나 크리스트교도들의 유일신적 신 앙은 전통적으로 숭배되던 국가의 신들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무신론자 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카시우스 디오나 아폴로니오스 몰로는 유대인을 무신론자로 불렀는데, 크리스트교도(혹은 유대교도)로 알려진 플 라비우스 클레멘스와 그의 아내가 atheotis로 불리었던 것은 그 대표적인 예 이다. 크리스트교도 순교자 유스티누스도 크리스트교에 대한 일반사람들의 비난은 무신론이라는 것이라고 전하면서, 사실 크리스트교도들은 그리스 로마의 전통신들과 관련해서는 무신론자라는 것이 맞다고 인정한다.34) 크 리스트교도들이 비크리스트교도들을 진실한 신을 알지 못하는 무신론자로 보았던 이상으로, 비크리스트교도들은 유대인들이나 크리스트교인들을 무 신론자로 보았던 것이다. 로마제국의 여러 신들에게 예배를 거절한 무신론 의 죄는 나아가 불경건(impietas, ἀσέβεια)의 죄이며, 때로는 대역죄 (majestas)에 해당되므로 처벌받아 마땅하다고 생각되었다. 도미티아누스는 앞서 언급된 플라비우스 클레멘스와 플라비아 도미틸라를 무신론으로 처 형하였다.35) 디오 카시우스는 불경건(asebeia)과 유대적 삶(Ioudaikos bios)이

34) Apol. I, 6

35) 카이사르처럼 유대인에 대해서 관용적인 정치가도 있었고 인두세를 내면 그들의 독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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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용어를 같은 맥락에서 쓰면서, 유대인으로 개종한 많은 이방인이 무 신론자로 처벌받았다고 전한다.

사회와 문화 전반이 이교 신들의 숭배 관행과 결합되어 있던 당시 유대 교도와 크리스트교도는 인간성의 측면에서도 비난받으며 정상적 사회생활 을 하는데 애로를 느끼게 마련이었다. 유대인이나 크리스트교도들은 나약 함(mollesse), 무기력함(inertie)과 욕구의 부재(contemptissimae inertiae)라는 표현으로 자주 비판받으면서 경멸당하였는데, 이는 “나는 너희들을 크리스 트교인이라(χριστιανόν)고 부르지 않고 무용지물(ἄχρηστον)이라 부른 다”라는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Prudence, 348󰠏410).

그런데 유일신 사상을 축으로 하여 처음 비슷한 부류로 인식되었던 크리 스트교와 유대교가 달랐던 점들도 발견된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대교는 끝까지 유대 민족에 기반하고 있었던 종교로 남은 반면, 크리스 트교는 ‘탈민족적’ 성격이 강했다는 점이다36). 유대인의 종교적인 민족주 의는 크리스트교도들의 만민주의, 세계주의에 대조적인 것으로, 유대인들 은 민족과 유대인의 정권과 정치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유대인들은 이로 인해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와 티투스,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의 공격 과 박해를 겪은 후에 결국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는 고향에서 강제로 쫓겨 나 세계로 흩어지기에 이르렀다. 크리스트교와 유대교 모두를 박해하였던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한번은 예수의 친족에 속한다는 두 사람을 로마로까 지 끌어와서 심문하였는데, 그리스도의 나라가 지상에 속하지 않고 천상에 속한다는 것과 그 나라가 세상 마지막 날에 수립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놓아주었다고 전한다. 아무래도 유대인들보다는 크리스트교도들은 탈민족 적인 성향이 강하여 민족 반란에 연루되지 않았으며, 현실적 정권을 갖춘

한 관습을 인정해준 적도 있었다. 네르바는 유대인적인 삶(Ioudaikos bios)이나 불경건 (asebeia)이라는 죄목으로 아무도 고소되지 않도록 하였는데, ‘유대적’인 것을 그리 좋 아하지 않았지만 죄악으로 보지는 않았던 것이다.

36) cf. A.G. Russell, “The Jews , the Roman Empire, and Christianity, AD. 50󰠏180,” Greece

& Rome 6, 18(1937), pp. 170󰠏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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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를 세우는 데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었으므로, 여러 박해에도 불구하 고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왕국’을 키워나갈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경우에 따라서 유대인이 축출당할 때에도 크리스트교인은 안전 한 적도 있었다. 유대인을 박해한 적이 있는 티베리우스는 예수에 대해서 는 호의적 관심을 보였으며, 오히려 크리스트교도를 비난하는 사람을 죽이 겠다고 위협하였다고 전한다37). 유대인을 학살하였던 하드리아누스 황제 도 초기에는 크리스트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하여 속주 관리들에게 정당한 재판을 거치지 않고는 크리스트교인을 처형하지 말라는 칙령을 내린 적도 있었다38). 유대교로의 개종을 금지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도 크리스트교 인에 대해서는 호감을 가졌다고도 전한다.

하지만 2세기 디아스포라 이후 세력이 약화된 유대인에 대한 반감은 줄 어들게 된 반면, 성장일로에 있던 크리스트교에 대한 적대감이나 두려움은 증가하게 된다. 그리하여 켈수스나 율리아누스 황제 같이 유대교보다도 크 리스트교가 더 나쁘다고 주장하는 이도 나타났다. 켈수스는 ‘전통이 있는 유대에 비해서, 크리스트교는 자신의 전통도 버리고 예수의 가르침을 잘못 따른다. 그들은 유대인과 같은 민족적 단위도 아니다‘고 비판하며, 39) 율리 아누스도 마찬가지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크리스트교도의 탈민족적 교리 는 특히 게르만족의 침입 등의 위협 시에 국가에 위협적인 것으로 여겨졌 는데, 3세기 게르만족의 침입 등의 국가적 위기에 크리스트교에 대한 박해 가 극심해졌던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닐 것이다.

Ⅲ. 황제 숭배와 크리스트교 박해

이상에서 유대교와 크리스트교의 종교적 특색과 가치관을 살펴보면서,

37) Eusebius, HE, 76󰠏7 38) Eusebius, HE, 4. 9.

39) Celsus, ap. Origen, 5. 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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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종교가 로마 사회와 차이와 갈등을 가져오게 된 근본적인 배경은 바 로 일신교 및 신의 형상의 유무, 그리고 이가 초래한 정치적 갈등이었음을 살펴보았다. 이런 크리스트교와 유대교는 로마의 황제 숭배와 갈등을 일으 키게 마련이었다. 로마의 황제 숭배 역시 종교와 정치가 융합되어 나타났 던 것으로, 로마 황제 그 자신이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대제사장(폰티펙스 막시무스)직을 겸하여 몸소 종교적 의 례를 행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로마가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을 때, 각 지역마다 각 지역신의 고유 신앙이 혼재하던 로마 제국의 공통분모는 바로 권력의 현현인 로마 황제였 다. 각 식민시들은 각기 스스로의 제의 위에 로마 여신 및 로마 황제 숭배 를 받아들였다. 로마 제국 안의 모든 계층과 지역으로 재빨리 퍼져간 황제 숭배는 로마 정부를 공적, 사적인 생활의 핵심적 힘으로 여기는 정치적이 자 종교적인 규범이 되었다. 로마 문화와 로마 시민권의 이점은 이 숭배의 확산을 도왔다. 로마 제국 안의 여러 종족과 민족, 각 지역의 수호신과 그 위의 로마 황제 숭배는 가족과 도시, 국가를 포함한 공동체의 존립과 긴밀 하게 묶여있었으며 이는 침해받을 수 없는 신성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앞 에서 살펴본 것처럼 황제 생일, 승전 기념일, 즉위일 같은 축제일 행사는 제국 전체에서 행해져 사회의 공동체적 행동과 관습을 형성해 주고 제국의 단합과 권력을 공고하게 하였다.

로마 황제는 로마 제국의 신들의 지상의 대리자, 파트너로서 천상의 질 서를 지상에 건설해나가는 수호자로 간주되었다. 로마 황제와 제국의 정치 적 평화의 토대는 신들의 평화(Pax Deorum)였다. 디오 카시우스는 옥타비 우스 아우구스투스의 정치적 혁명과 함께 이루어진 황제 숭배라는 종교개 혁으로 신들의 평화가 도래하였고, 그 결과 야누스 신전 문이 닫히고 황금 시대 augurium salutis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선언한다.40) 아우구스투 스가 지중해세계를 통합하기 전의 70년간의 내란의 정치적 혼란은 바로

40) Dio, 37.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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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노여움(ira deorum)의 결과였으며(Pharsalia, I, 589󰠏590), 황제 숭배 야 말로 황금시대를 여는 토대가 될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정치적 혁명은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혁명과 함께 온 것이다.

전통적 수호신들을 숭배하면 이 신들이 로마를 보호하고 평화를 가져다 주므로 이들을 숭배하는 것은 시민의 의무로 당연시 되었다. 예컨대 루스 티쿠스는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신들에 바치는 종교적 희생과 로 마 황제에 대한 정치적 순종을 같은 뜻으로 받아들이고, 이러한 것들을 시 민의 최소한의 의무로 보았으므로,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와 황제 명령에 순종하기를 거절한 자들은 법에 따라서 처형해야한다고 선포하였다41).

아우구스투스를 신들 속에 포함시키는 의례는 로마 신민들의 충성을 확 립하는 도구가 되어 특히 동방의 거주민에게 널리 퍼져갔다. 소아시아를 비롯한 동방 지역의 아시아 공동체는 황제 숭배가 시작되었던 지역으로서, 해마다 로마와 아우구스투스를 숭배하는 연례 회합을 가장 성대하게 개최 하였다. 소아시아의 페르가뭄 등이 선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즈미르나, 에 페소스 등도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다. 이들 지역에서 크리스트교도 이그나 티우스가 체포되고, 폴리캅이 순교하였던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순교는 황제 의례와 분명히 연관되어 나타났으며, 이 지역은 크리스트교 박해의 온상이 되었던 것이다. 크리스트교를 심하게 박해하였던 많은 로마 황제와 그들의 치세기의 공통점은 제정 초기의 네로42)나 도미티아누스 황 제처럼 자신의 신성성을 과신하거나, 중반기 이후의 아우렐리우스, 데키우 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와 같이, 전란의 위기나 전염병의 유행, 화재 혹은 수재, 지진 등의 대 변란의 발생 시기였다.

도미티아누스는 유대교와 더불어 크리스트교를 믿는 행위를 국가 전복 을 꾀하는 범죄로 보았고, 크리스트교도들을 무신론자라는 죄목으로 처형 하기도하고, 예수의 제자 요한을 파트모스 섬에 귀양을 보내기도 하였다.

41) H. Musurillo, ed. The Acts of the Christian Maryrs (Oxford, 1972), p. 48.

42) 하지만 네로 당시에는 황제 숭배가 이유가 되어 박해를 당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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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낸 플리니우스의 편지43)에서는 세 부류의 크리스 트교도가 등장한다. 크리스트교인이라고 자백하는 이들과, 과거에 크리스 트교인이었으나 지금은 아니라고 하는 이들, 크리스트교인이라는 혐의를 받았으나 과거에도 지금도 전혀 아니라는 이들이 그들이다. 이때 이들이 진짜 크리스트교도인가 아닌가를 구분하는 방법은 신들을 향한 기도와 노 래, 특히 황제 신상에 분향과 포도주로 간구를 올리는지의 여부였다. 즉 그리스도를 저주하고, 그리스로마의 전통적 신들의 형상을 숭배하고, 무엇 보다도 황제 숭배를 할 경우에는 크리스트교인이 아닌 결정적 증거가 되었 던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주장하거나 황제 숭배를 거부할 경우에는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원후 155년경 소아시아 즈미르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이 크리스 트교인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당할 위기에 놓였을 때, 그가 죽는 것을 원치 않았던 지역 실권자 헤롯과 니세테스는 폴리캅에게 ‘카이사르를 신이라 말 하고 제사를 지내 목숨을 구하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해로운 일이냐’ 라면 서 神인 황제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죽음을 피하도록 권유하였지만, 폴리캅 은 이를 거절하였다. 처형당하기 위해 끌려갔을 때, 군중들은 폴리캅을 향 하여 ‘그는 크리스트교도들의 선생으로 우리들 신의 파괴자이며, 희생 제 사를 드리지도 못하게, 숭배도 못하도록 가르쳤다’고 외쳤다. 총독 스타티 우스 콰드라투스(Statius Quadratus)가 다시 한번 ‘신이신 카이사르의 이름 으로 맹세’하고 목숨을 구할 것을 권유하였을 때, 폴리캅은 황제 숭배와 희생 제의를 거절하면서 ‘내가 카이사르의 이름으로 맹세하리라는 헛된 생 각을 버리라’ ‘나를 구원한 나의 왕을 두고, 어찌 황제의 게니우스를 두고 맹세하랴’면서 기꺼이 죽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당시 갈등의 핵심에 황제 숭배 제의가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44)

43) Plinius Ep. 10. 96.

44) Eusebios, HE, 4. 15. 그런데 2세기의 폴리캅의 순교 당시와 비교해볼 때, 3세기 중엽 이후인 데키우스 황제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이르면, 박해의 초점이 황제 숭배 여부보다는 희생제사 문제로 변화해갔음을 보여준다. 물론, 황제 숭배가 절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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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황제 숭배와 크리스트교의 갈등이 다신교 대 유일신의 갈등이었던가, 혹은 종교적 현상이었던가, 정치적 현상이었던가 하는 것 이 상의 궁극적 갈등의 문제는 크리스트교도들 대다수가, 현시적인 ‘권력’(신 적이든 인간적이든)에 대해서 공동체의 대다수가 적합하고 올바른 관계로 생각하던 것에 동참하기를 거절하였던 점에 있었다고 보인다. 즉 크리스트 교도들은 이교 신들과 황제 숭배를 거절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로마제국의 전통적 근본 구조를 공격하였던 것에 있었다는 점이다.

달하던 2세기에 크리스트교 박해도 조직화되지만, 황제 숭배가 쇠퇴하던 3세기에 크 리스트교 박해가 절정에 달하였다는 점은 크리스트교 박해는 황제 숭배 뿐만 아니라 다양한 다른 요소들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3세기에 로마 제국의 상황은 전반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경제적 위기와 전염병의 유행, 여러 이민족의 칩입, 해적이나 도적떼가 횡행하던 총체적 위기의 시기였다. 로마인들은 이는 바로 신들의 노여움으로 말미암았다고 생각하였고, 그 치료책은 신들이 노여워하는 이유, 즉 신들의 평화를 위협하는 크리스트교인들을 제거하면서 전통신들에 대한 숭배를 부흥시켜서 그들의 화를 누그려 트려야 한다고 믿었다. 데키우스 황제가 박해를 시작 한 250년경 이전에 간헐적 박해는 있었을 지라도 이때처럼 로마 정부가 전면적으로 크리스트교를 파괴시키려한 때는 없었다. 크리스트교인을 오히려 선량한 시민, 조용 하고 근면하고 세금을 내는 이들로 인식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같은 황제 치세기도 있었던 것이다. G.T. Oborn, “Why did Decius and Valerian Proscribe Christianity?.”

Church History, 2,2 (1993). 리브스(J.B. Rives)에 의하면 데키우스는 종교 문제라기보 다 국가 정책 문제로 크리스트교인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고 분석한다. J.B. Rives,

“The Decree of Decius and the Religion of Empire” JRS 89 (1999), pp. 135󰠏154.

데키우스는 250년 황제와 황가의 안녕과 승리를 간구하는 dies Imperii를 발포하였다.

그는 로마 제국 창립 1000주년에 로마 제국이 경제적 쇠퇴와 전염병의 유행 등의 국가적 위협을 맞이하게 된 것은 전통적 로마신들의 노여움 때문이며, 이는 바로 크 리스트교의 성장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교회는 국가 안의 국가이며 위협적 존재라고 생각하였다. 3세기말, 황제권 및 제국의 통치를 확고하게 확립하기를 원하였던 디오 클레티아누스 시대에 크리스트교는 다시 극심한 탄압을 받게 된다. 락탄티우스에 의 하면 밀레시아의 아폴론신의 신탁이 크리스트교 박해를 명령하였다고 한다.

Lactantius, De mor. 11.8 크리스트교도들의 죄목은 국가 의식에 참여하지 않는 비애국 적인 인물, 황제를 신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무신론자들, 사회 안녕을 위협한다는 것에 여러 가지 사회적 혼란과 위기 속에서 박해가 극심하여져 갔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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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터(B.N. Porter)는 크리스트교와 황제숭배의 갈등은 일신교와 다신교 사이의 단순한 대립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제까지 자명한 것으로 알려진 일신교와 다신교 사이의 차이는 ‘분류와 강조에 대한 선입견의 차이’에 기 인하였을 수 있다는 것이다. 크리스트교와 유대교 역시 천사들을 비롯한 존재들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 그 예인데, 다만 이들은 천사들에게 신격을 부여하지 않을 따름이다는 것이다. 포터는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진정한 일 신교는 시기적으로는 신명기 이후에 나타났으며, 계층적으로는 유대의 일 부 지배층을 중심으로 유포된 현상이었다고 지적한다. 크리스트교도 역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론을 비롯하여 천사의 존재 등 보기에 따라서는 일종의 다신교적 요소가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다신교 안에서도 일신교적 경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같 은 신이 지역에 따라 이름만 달리 불릴 따름이라는 주장이 그 예이다. 로마 의 유피테르가 유대지방에서는 여호와로, 팔레스타인에서는 바알로 불리었 을 것이라는 견해에 대해 물론 크리스트교도는 제우스처럼 성적 욕망에 불 타 바람피우는 신과 여호와는 같을 수가 없다고 항변하였다하더라도, 점차 여러 이교신들도 하나의 신으로 수렴되는 경향이 나타났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로마 제정 후반기에 이르면 제설혼합주의적 경향으로 태양신이 유일 신적 존재로 떠올라, 다른 모든 신들은 태양신의 분신 혹은 그에 종속된 천사급 신, 하급 신으로 간주되었다45). 제정 말기 디오클레티아누스 치세 의 사두정 체제 아래의 아버지 제우스와 아들 헤라클레스(정제 아우구스투 스와 부제 카이사르)의 구도가 크리스트교의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 리스도라는 구도와 닮아 있었던 점은 그런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따라서 로마 황제 숭배와 크리스트교적 신앙 사이의 갈등은 유일신과 다신교 사이의 종교적 갈등에 물론 연유하였지만, 나아가 그 사회의 근본 적인 토대, 종교적 토대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 보았다시피, 고대의

45) 최혜영, 「로마의 종교」, 󰡔로마 제정사 연구󰡕(서울대학교 출판부, 2000), pp. 346-37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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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나 지역들은 그들의 지역적 종교를 그 지역의 경제정치와 연합하여 다 루었고, 많은 신전, 성직자들 종교적 축제일 등은 모두 지역 사회의 구조의 일부분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무신론자’가 된다는 것은 사회적 질서의 토 대를 갉아먹은 사람으로, ‘우리’가 아니라 ‘타자’이며 기존의 도덕과 관습,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위협하는 이가 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앞에서 언급 된 즈미르나의 군중들이 폴리캅이 여러 신들의 존재와 황제 숭배를 부정하 였다는 것을 사형의 구실로 삼고, 그의 유죄 여부를 심문하는 기준도 황제 숭배 의례였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즈미르나의 군중들이 폴리캅을 그토 록 없애기를 원하였던 이유는 단순히 폴리캅이 황제 숭배를 거부해서라기 보다는, 그들의 정치적, 문화적 구조의 토대를 근본적으로 부인하였기 때문 이었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46). 즉 핵심적인 것은 그가 대다수의 로마 제국민들이 신적이거나 인간적인 현시로 나타난 ‘권력’이라는 것에 대한 그들의 공동체의 올바른 관계로 생각하던 것을 참가하기를 거절하였다는 것이다.

크리스트교도들은 공동체의 안녕이 달려있는 신들과 로마 황제의 힘, 즉 보통의 제국민들이 믿고 있는 신념을 거부하면서 로마 제국의 기반과 권력 의 토대를 공격하는 자들이었다. 로마 황제의 입장에서는 크리스트교란 로 마 제국의 변두리에 살던 한 臣民인 예수란 청년이 만든 시시한 종교에 불과하였으나, 크리스트교인들 입장에서는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의 아들이 계시한 유일하게 참된 종교였던 것이다. 몸젠은 ‘로마의 국가 종교는 국가 의 존립에 필수적인 요소였는데, 종교적 요소들을 배제한 채 국가를 건설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한 바 있다. 이러한 체제 아래서 어떠한 다른 신들도 신으로 숭배하기를 거절한 크리스트교는 권력의 국가 종교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제국의 표상인 황제와 조

46) L.L. Thomson, “The Martyrdom of Polycarp : Death in the Roman Games”. The Journal of Religion, 82,1 (2002), pp. 27󰠏52. cf. V. Bryce, “Religon as a factor in the history of Empires”, JRS 5 (1915), pp.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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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숭배를 거부한다든가, 국가의 경축 행사 때 전제국적으로 행해지던 제 식에 참여하지 않는다든가, 가정의 의례나 초창기 군대에 복무하기를 꺼렸 던 점 등으로 크리스트교인들은 국가와 사회를 전반적으로 전복하려는 반 역의 음모를 꾀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을 받았던 것이다.

이교신들에 대한 희생 제사를, 최소한의 시민적 의무라고 생각하였던 이 교도들과 그리스도에 대한 배신으로 생각하였던 크리스트교도들과의 차이 는 이처럼 컸고 갈등과 박해를 불러일으켰다47). 많은 이교도들은 전통 신 들을 담대하게 거부한 이들을 허용하는 것은 신들의 분노를 사는 것이며 신들의 평화(pax deorum)를 해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교신들에 대해서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지식층에게도 크리스트교의 이러한 도전은 위험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이들은 옛 종교들은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유용 한 목적을 위해, 즉 철학적 사고가 불가능한 대중들에게 도덕성과 사회적 단합의 토대라는 목적을 위해서 불가결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48)

Ⅳ. 크리스트교도의 황제 숭배 비판과 습합 현상

박해를 받던 크리스트교도의 로마 황제와 권력에 대한 태도는 복합적이 었다. 예수는 일찍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 님에게’ 드릴 것을 말씀하셨다. 신약 성서 「베드로서」, 「로마서」, 「디모데

47) 스코트(E.F. Scott)는 황제숭배 관행과 기독교 사이에는 놀라울 정도의 유사성이 있었 으므로 특히 서로 대립하였다고 분석하였다. 첫째, 둘 다 ‘모든 사람(그리스도의 왕국 민과 로마 세계 제국민)을 위한 종교’였다. 둘째, 둘 다 ‘인간의 몸으로 온 신의 화신’

으로 간주되었다. 셋째, 둘 다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같은 시대와 문화의 산물이었으 므로 처음부터 경쟁자로 간주되었다. 넷째, 업적 역시 유사한 것으로 비추어졌다. 둘 다 이 땅에 평화를 가져왔고, 무서운 악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였으며, 각기의 법과 충성스러운 신하들을 통하여 모든 지역에 임하였다. E.F. Scott, The Opposition to Caesar Worship, Church History, 2, 2(1933)

48) Brunt, “Marcus Aurelius and the Christians”, Studies in Latin Literature and Roman History (Brussels, 1979󰠏1983) I, p.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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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서」등에서는 ‘위에 있는 권위’에 굴복할 것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들 서신이 쓰여진 시기는 아직 로마 정부에 의한 크리스트교도에 대한 조직적 인 박해 이전일 것으로 보이며, 박해가 조직화되던 2세기경이 되면 정부 권력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과 비판을 가하는 크리스트교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크리스트교도 학자 클레멘스는 수많은 신들의 기원이나 종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천체신이 신격화된 경우, 땅의 소산 물(디오니소스의 포도주나 데메테르의 곡물처럼)이 신격화된 경우, 호메로 스나 헤시오도스 등의 문학 속에서 나오는 신들, 운명, 분노 같은 악의 처 벌자가 신격화된 경우, 희망이나 사랑 같은 감정이 신격화된 경우, 승리 등의 사건이 신격화된 경우, 헤라클레스나 디오스쿠리 형제, 아스클레피오 스 같은 구원자격 영웅들이 신격화된 경우, 그리고 정치, 전쟁, 예술 등 특 정 분야에 뛰어난 사람들이 죽은 후에 신격화된 경우 등이 그것이다49). 클 레멘스에게 이러한 것들을 신들로 숭배하는 자들이나, 사람을 신들로 숭배 하는 자들, 보이는 신들을 숭배하는 자들은 모두 불쌍한 자이다. 특히 그는 하드리아누스가 사랑한 소년 안티누스가 이집트에서 죽은 후에 신격화된 사건에 대해서 ‘이집트에서 새로운 신이 추가되었다. 제우스가 가니메데를 사랑하듯이 하드리아누스는 안티누스를 신격화하였다. 왜 그를 신들 중 하 나로 치는가? 안티누스는 불경과 아름다움 때문에 신들 중 하나가 되었고, 동성애자 소년의 무덤은 신전이 되었다’고 비판한다50).

또한 아테나고라스는 ‘너희들은 황제들이 죽을 때 그의 이미지를 성화하 고 신이라 부르지만, 우리들은 인간이 만든 것을 신으로 숭배하지 않고, 성소에 두지도 않는다’51)고 선언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하나님 외에 다 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는 인류의 첫 죄요 세상의 최고 범죄’이라고 하면

49) Protrepticus, 2.

50) Prot. logos, 3.44; 4. 47 51) Apol.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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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왕국과 제국들은 전쟁과 승리로 세워지는 것이므로 신전과 가옥, 궁궐 을 약탈하고 파괴하면서 제국을 얻은 로마인들의 경건은 정복욕 밑에 있는 것이라고 비판한다52).

변증가 유스티누스는 로마 황제 권력의 시스템을 타락한 천사들인 이교 신들의 존재와 연관시킨다. 유스티누스에 의하면 황제 숭배는 사람들을 두려움으로 묶어 지배하려는 사탄의 대표적 기제이며, 이교 신들의 만신전 이야말로 잘못된 정부를 지지하고 지탱해주는 근거가 된다. 크리스트교도 들도 예전에는 이들을 신이라 부르며 믿었었지만, 이제는 비록 죽음의 위 협을 받을지라도 이것들을 경멸하며 오로지 그리스도를 믿는다. 자신들도 예전에 가지고 있던 폭력적이고 폭군적인 성향들을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요구하는 관용, 신실함, 정의감에 맞추어 자신들을 바꾸어 간다.53) 현제로 알려진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 대해서 처음 에는 그들을 ‘경건한 철학자, 정의의 수호자, 배우는 것을 사랑하는 자’로 인정해주지만, 곧 이어서 경건과 철학에 순응하여 정치하지 않으면 폭력과 폭정이 된다고 경고한다. 즉 이교신들을 파트너로 삼은 로마 황제들은 가 장 현명하였던 이들조차 자기도 모르는 새에 결국 사막의 강도와 마찬가지 로, 사탄의 폭정의 집행자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크리스트교가 전통 없는 신흥 종교로 조상의 관습을 무시하였다는 주장 에 대해서 락탄티우스는 이교의 신들이야말로 전통을 거슬린 ‘최근의’ 발 명품이라고 항변한다. 락탄티우스에 의하면, 본래 인간의 종교는 일신교였 으며54), 인간이 두 다리로 똑바로 걷는 것 자체가 하늘의 신을 바라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점차 지상의 것들을 숭배하기 시작하면서 다신교가 퍼졌다. 이집트인들이 가장 오래된 신들을 숭배한다는 헤로도토스의 말 은55) 이집트가 가장 먼저 우상숭배를 시작하였다는 뜻이다. 따라서 크리스

52) Apol. 25 53) Apol. 1, 16 54) Inst. 2. 11. 63󰠏5.

55) Hist, 2. 53ff, 144 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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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교는 조상의 전통으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최초의 신앙으로의 회복을 의미한다고 강변한다.56)

또한 크리스트교도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신들의 권위를 로마 황제의 권력과 비교하기까지 이르렀다. 주교 이그나티우스에게 주교로서의 자기의 권위는 로마 권력과 대립되는 더 우수하고 영적인 권위였다. 그는

‘나로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이 지구 끝까지 통치하는 것보다 더 낫다’라고 황제의 권력보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승리를 선포하고 있 다57).

하지만 박해를 받으면서 황제 숭배에 대해서 이론적 비판을 형성해가던 크리스트교의 교리나 의례가 황제 숭배와 서로 닮아갔다는 점은 흥미롭다.

처음 둘 사이의 대조는 뚜렷하여, 황제는 정치적 권력의 육화로서 공적인 칙령에 의해서 그 신성함이 공포되었던 반면, 변두리 식민지의 초라한 한 청년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비참한 죽임을 당한 뒤에 하나님의 아들로 숭배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점점 황제 숭배와 크리스트교는 비슷 한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적은 미워하면서 서로 닮아간 것이다. 크 리스트교도들은 황제 숭배에 혐오감을 가지면서도 황제 숭배적 제식의 영 향을 받아갔다. 황제 숭배 역시 점차 크리스트교적 분위기를 강하게 띠기 시작하였는데, 이교도로부터 크리스트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황제 숭배의 영향으로 예수의 신성을 더 쉽게 믿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특히 황제 숭배에 따른 여러 종교적, 정치적 의례와 크리스트교 의례는 비슷해지는 양상을 보인다.

브렌트(A. Brent)는 황제숭배가 특히 발달하였던 소아시아 지역에서의 크 리스트교적 의례와 황제 숭배적 이교적 의례의 유사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 하고 있다58). 우선 크리스트교의 성만찬 등의 행위는 황제 숭배와 관련된

56) C. Nichoson & O. Nichoson, “Lactantius, Hermes Trismegistus and Constantinian Obelisk”, JHS 109(1989), pp. 198󰠏200.

57) Rom. 6.1.

58) A. Brent, “Ignatius of Antioch and the Imperial Cult”, Vigiliae Christianae, 52, 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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