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의 서가 19
80 국토 제458호(2019. 12)
문정호 | 국토연구원 부원장([email protected])
모든 것에 대해 조금씩
It’s my job to know little something of everything (모 든 것에 대해 조금씩은 알아야 하는 게 내 직업이외다).
영어로 시작해서 죄송합니다. 미국 드라마 ‘CSI: New York’을 보시다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과학수사 대 일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제 느낌엔 국토, 지역, 도 시에 대한 계획과 정책을 공부하는 저 같은 사람에게도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다면적인 현상, 평면 아닌 입체 일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는 관계들, 바깥과의 연 관, 그러한 것들이 축적된 시간…. 저는 그런 것들을 맥 락(context)이라 부르고 어떤 공간의, 어떤 일을 대하든 이른바 ‘맥락적’으로 이해하려 애씁니다.
어려서부터 놀러 다니기 좋아하고 만화 보기를 즐겨 하던 저는 1987년 무렵에 여섯 권짜리 「먼나라 이웃나 라」 초판을 접하게 됩니다. 통상 만화는 만화방에서 한 번 보면 지나가는 것이지만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이 원복, 1975) 시절부터 흠모했던 작가님의 새로운 고차원 적인 작품 같아서 과감하게 사들였고, 그 후로 30년 넘 게 제 책꽂이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 버전에서는 독일이 통일되기도 전이라 동독과 서독 얘 기도 나오고 등등 그 당시의 시대상황이 많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계속 개정판이 나왔기 때문에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유럽 나라들부터 시작해서 일본, 중 국, 미국, 스페인, 동남아 · 터키까지 20권 한 세트로 구 성되어 있었습니다(편집자주: 처음 책으로 묶인 1987년 이후 개정을 거듭해 2018년 5판이 발간되었으며, 신간 이 계속 선보일 예정임).
초등학교 때 국사 과목부터 시작해서, 중학교 때 세계 사, 간간히 철학 · 문학 · 음악 · 미술 관련 사조의 흐름이 나 경제사, 도시계획사 같은 전공 수업을 통해 역사에 대 해서는 제법 많이 배웠습니다. 외우기도 많이 했지만 실 제로 그 맥락을 제대로 이해했던 것일까요? 석사학위 받 을 때까지 학교만 18년 다니면서 배웠던 역사지식과 당 시 「먼나라 이웃나라」 유럽편 6권에 담긴 얘기가 큰 차이 는 없었을지 몰라도, 멀게만 여겨지던 유럽 역사의 맥락 이 훨씬 쉽고 선명하게 다가오더군요. 아마 디테일에 있 어서는 많이 미흡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이른바 사관(史 觀) 관점에서는 잡탕 같은 느낌이 있었을지 몰라도 도시 계획을 공부하던 그 당시 제게는 유럽 도시계획을 이해 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었지요. 그래서 「먼나라 이웃나 라」는 제게는 귀중한 장서가 되었고 그후로 30년, 한 권
먼나라 이웃나라
이원복 지음 김영사 발간
81 한 권 새로 나올 때마다 버릇처럼 사들였습니다.
오랜 세월 연구원을 다니며 이 지역 저 지역, 이 일 저 일 다양하게 했고요, 최근에는 국제협력 연구도 더러 하 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연구 주제나 시 · 공간 적 범위를 막론하고 맥락을 잡는 일부터 시작하게 됩니 다.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문제점이나 이슈, 그 속에 목에 낀 때처럼 숨어 있는 배경, 그냥 이대로 두면 어떻게 흘러갈 것이다 하는 예단, 어떤 미래가 더욱 바 람직한 것인지에 대한 생각, 누가 반대할 것이고 무엇이 장애가 될 것인지, 그러면 어떤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 지…, ‘맥락’을 이해하려 애쓰다 보면 이런 온갖 생각들 이 뒤엉켜가다가도 조금 조금씩 연구의 큰 줄거리로 자 리 잡아 갑니다. 잡다한 정보와 지식 조각들을 큰 통 속 에 몰아넣고 휘젓다가 한숨 돌리다 보면, 예컨대 동동주 와 막걸리, 술지게미로 분화가 일어나고, 이것이 바로 술도가의 맥락이 되는 것이지요.
제가 「먼나라 이웃나라」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보다 넓게 인정받는 사회적 흐름을 간결하고 알기 쉬 운 방식으로 전달해서 매우 복잡할 수 있는 한 나라 혹 은 사회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는 것입니 다. 우리나라만 해도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쉽지 않 습니다. 솔직하게 터놓고 말해봅시다. 우리 국민 사이 에서도 얼마나 다양한 역사인식의 스펙트럼이 존재합니 까? 하물며 외국 역사는 어떨까요? 공감대율 100%짜리 가 어디 있나요? 공부가 직업인 사람이 드릴 말씀은 아 닐지 모르겠습니다만 역사, 사회, 문화, 정치 같은 영역 에서는 너무 깊지 않게 상식적인 수준에서 보다 많은 사 람들이 수긍할 수 있는 수준에서 그 맥락을 이해하는 편 이 낫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하는 생각과 제가 아 는 것이 시대에 뒤처지는 것은 싫고요, 그렇다고 주제넘 게 시대를 앞서갈 생각은 애당초 없습니다. 이승의 밥줄 은 지금 직장에 달려 있으니 더욱 그렇지요.
둔한 머리와 침침한 눈, 애초에 깊지 않은 지식으로는 모든 것은 고사하고 어떤 작은 부분에 대해서도 깊게 정 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국토 · 지역 · 도시라는 영역에서 계획과 정책에 대해 공부하는 일에는 어떤 상대적으로 좁은 분야에서의 전문성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모든 것 에 대해 조금씩은 알고 전체 맥락을 파악하는 관점도 필 요한 듯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먼나라 이웃나라」와 같 은 책으로부터 배운 것은 “쉽고 넓게 접근하면서 전체를 파악하는 일은 바람직하고 중요하다”라고 정리할 수 있 겠네요. 그래서 제게는 “모든 것에 대해 조금씩” 알려고 하는 버릇이 생겼고요, 결국은 “모르는 게 없는 것처럼 아는 체 하지만, 실제 제대로 아는 것은 하나도 없는” 사 람이 되었습니다.
반드시 이 책 덕분만은 아닙니다만, 아직도 여기 저기 여행 다니기 좋아라 하는 저는 어디 가기 전에 저 혼자 만의 먼나라 이웃나라를 써보곤 합니다. 그러면 볼 것과 다닐 곳이 별로 없는 것 같은 가난한 나라의 진부한 장 소에서도 뜻밖의 재미를 발견하고 혼자 낄낄대고 웃을 수도 있습니다. 아! 제가 「먼나라 이웃나라」를 좋아하는 이유가 하나 더 떠오르는군요. 그건 아마 ‘애정 어린 관 심’인 것 같습니다. 작가의 시선은 항상 따뜻합니다. 동 서고금 언제 어디서나 고생하는 사람들 많지요. 다들 빡 세게 살아남아 역사가 되고 문화를 이루고, 세세대대가 이어집니다. 어디를 보든 누구를 보든 어떤 이야기를 전 하든 공감하기 편한 이야기, 가벼운 것 같아도 결코 그 렇게만은 볼 수 없는 만화책, 오늘도 제 책꽂이에서 낡 아가고 있네요.
연구자의 서가 20회 예고
이용만 한성대학교 교수가 다음 호 필자로 나섭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