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oston Tea Party
1773년 - 미국 독립전쟁의 발단
The Boston Tea Party (1773.12.16)
The Boston Tea Party 미국 독립전쟁의 시작
• 1773년 12월 16일 밤
• 차를 가득 싣고 보스턴 항구에 입항한 “다트머스 호”를 비롯한 영국 동인도 회사 소속의 소속 배 3척이 인디언 차림으로 변장한 괴한들에게 습격을 당함.
• 이들은 1773년 영국이 동인도 회사에 차 무역 독점권을 주고 면 세특권까지 주는 것에 반발하여, 아메리카 식민지의 차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배를 습격함.
• 총 342상자의 차를 바다에 버 림.
보스턴 차 사건의 원인 및 배경(1)
• 17세기 초, 유럽에 차가 전해지다.
- 1610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배가 녹차를 일본 나가 사키(長崎) 현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운반
- 아시아의 발달한 경제와 문화에 압도되었던 유럽인들은 차를 ‘외래의 선약’으로서 외경심을 갖고 받아 들임.
- 18세기를 거쳐 차 마시는 습관이 보급됨에 따라 영국에 서는 독자적인 홍차문화가 형성
- 18세기 후반 영국 전역에 차문화 보급 – 대륙 국가 전체 소비량의 약 3배를 소비
- 북미 식민지에도 차문화 보급 – 1760년 500톤의 차 소 비
보스턴 차 사건의 원인 및 배경(2)
• 본래 영국의 아메리카 정책은 너그러운 편
- 다른 식민지와는 달리 신앙의 자유 혹은 정치적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난 사람, 큰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모인
‘새로운 세계’로 여겼기 때문
• 18세기에 이르러 영국의 너그러운 태도가 바뀜
- 심한 재정난에 부딪힌 영국 정부가 식민지로부터 세금 을 거두어 재정난을 해소하려 함
- 이때부터 아메리카는 영국의 식민지로서 본국의 가혹 한 착취를 당함
- 영국 왕 조지 3세는 식민지에 여러 가지 세금을 부여 - 그 중 인지세(1965년 제정)가 가장 악명 높음
보스턴 차 사건의 원인 및 배경(3)
- 인지세란 신문이나 책, 공문서, 트럼프, 학위증명서 등 온갖 것에 인지를 붙이도록 한 법으로, 이는 과세를 의미.
• 반대 슬로건 – “대표 없이 과세 없다.”
- 본국 의회에 대표를 보내지 않으므로 과세도 할 수 없 다.
- 신문발행인, 법률가, 실업가 등이 중심
• 영국 정부와 식민지 간의 갈등 첨예화
- 영국 정부는 식민지에 대한 입법권이 본국 의회에 있다 고 주장
- 식민지 측은 본국 의회의 지배가 부당하다고 주장
보스턴 차 사건의 원인 및 배경(4)
• 재정난에 빠진 영국 정부
- 프랑스와의 7년 전쟁(1756~1763) 등 식민지 쟁탈전으 로 인해 재정난에 빠짐
- 이를 위해 소비세를 걷으려 함
설탕조례, 타운센트법(유리, 종이, 차 등 대중소비품목) - 타운센트법은 불매운동으로 인해 차세를 제외하고 철폐 - 이로 인해 차 소비가 1770년에는 50톤으로 격감하고 동
인도회사는 과잉재고를 안게 됨
보스턴 차 사건의 원인 및 결과(5)
• 경영위기에 빠진 반민반관인 동인도회사를 구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차 조례’를 발표
- 동인도회사의 차를 세금 없이 독점적으로 식민지에 판 매할 수 있는 권리를 줌.
• 보스톤 차 사건 발생(1773년 12월 16일)
- 직접 피해를 입은 차 무역상인들과 다른 품목에까지 독 점판매가 확대될 것을 두려워한 상공업자, 그리고 지금 세금 없는 차를 마시는 것은 본국의 과세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애국파’들이 합류
• 이후 차를 거부하고 대용품으로 커피를 마시게 됨 – 현 재 세계 제일의 커피 소비국이 되는 계기
• 독립에 반대한 왕당파(홍차파) – 캐나다로 망명 – 캐나다 를 세계 유수의 차 소비국으로 만듬
인디언 복장으로 위장한 미국인들이 보스턴 항구에 정박 중인 영국 배에 올라 차 상자 를 바다 속으로 처넣고 있다.
미국의 독립전쟁(1775~1785) - 1
• 보스턴 차 사건에 대해 영국은 보복적인 탄압책을 써서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고, 보스턴이 속해 있는 매사추세 스 주에 대한 지배를 강화 → 식민지 전체 백성들의 반감 을 삼.
• 제1차 대륙회의(1774년 9월) – 식민지 대표들이 필라델 피아에서 모여 식민지 주민의 권리를 선언하여 본국에 대한 반성을 촉구
• 1775년 보스턴 교외의 렉싱턴에서 본국 주둔군과 식민 지 민병 사이에 무력충돌 발생 – 독립전쟁 시작
• 제2차 대륙회의(1775년)
- 조지 워싱턴(1732~1799), 총사령관으로 임명 - 페트릭 헨리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 토마스 페인 <상식 Commen Sense>, 50만부 판매
조지 워싱턴 토마스 페인
독립군 총사령관 및 초대대통령 <상식 Commen Sense>의 저자
미국의 독립전쟁(1775~1785) - 2
• <독립선언서> 공포 - 1776년 7월 4일
- 토마스 제퍼슨(1742~1826, 제3대 대통령)이 기초
• 독립군의 고전
• 프랑스, 에스파냐, 네덜란드가 독립군을 도움
• 러시아, 프로이센 등은 무장중립동맹으로 중립
• 1777년 사라토가 전투 승리
• 1778년 필라델피아 탈환
• 1781년 요크타운 전투 승리
• 1783년 영국은 식민지 13개 주의 독립을 인정
• 7월 4일을 독립기념일로 삼음
• 1789년 프랑스 혁명의 단초 제공
1776년 7월 4일 아메리카 식민지 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을 결의하고 있다.
존 트럼블 작
독립선언서
1776년 7월 4일, 토마스 제퍼슨 이 기초하고, 플랭클린을 포함한 기초위원에서 결정한 <독립선언 서>가 공포되었다.
그 한 구절을 보면,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평 등하며, 조물주가 부여한 인간의 권리 가운데는 자유와 행복을 추 구할 권리가 있다. 이 권리를 확 보하기 위해 인간은 정부를 만들 었다. 정부의 권력은 국민의 동의 에서 나오 것이다. 정부가 이러한 목적을 파괴했을 때에는 그 정부 를 변혁하여 새로운 정부를 세우 는 것이 국민의 권리이다.”
요크타운의 항복 – 영국을 격파하고 독립전쟁의 전세를 역전 시킴으로써 독립전쟁의 막을 내리는 계기를 만든 1781년 10월 의 요크타운 전투에서 영국군 사령관이 항복하는 장면을 그리 고 있다. - 1979년 존 트럼블 작
아편전쟁과 차
1차 아편전쟁
(1840~1842년)
아편전쟁의 발발(1840년)
유럽으로의 차의 전래
• 17세기 초, 유럽에 차가 전해지다.
- 1610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배가 녹차를 일본 나가 사키(長崎) 현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운반
- 1637년에는 중국 차를 영국, 독일, 프랑스 및 스칸디나 비아의 여러 나라로 수출
- 아시아의 발달한 경제와 문화에 압도되었던 유럽인들은 차를 ‘외래의 선약’으로서 외경심을 갖고 받아 들임.
• 영국의 홍차 문화
- 18세기를 거쳐 차 마시는 습관이 보급됨에 따라 영국에 서는 독자적인 홍차문화가 형성
- 산업혁명 이후 18세기 후반 영국 전역에 차문화 보급 – 대륙 국가 전체 소비량의 약 3배를 소비
18세기 후반 영국의 차 수입 현황(1)
- 당시 대 중국 무역은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거의 독점
- 실크와 차, 도자기 등 비싼 물건을 수입하고, 영국은 겨우 모직물 정도를 수출
- 영국은 당시 유일한 차 수출국이었던 청나라로부터 막대 한 양의 홍차를 수입해야 했음.
- 인도와 동남아에서 차를 재배하기 전인 1870년경까지 중국에서만 차를 수입
- 홍차는 지나치게 발효된 우롱차였고 중국에서는 흔하게 여겨져 값이 쌌기 때문에 영국이 대량으로 수입
- 당시 청나라는 광주 한 곳만을 대외무역항으로 지정하고, 해외무역 특허 상인조합인 13공행이 대외무역을 독점하 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영국의 수출은 부진했고 홍차를 사기 위해서는 대량의 은이 필요했음.
18세기 후반 영국의 차 수입 현황(2)
- 영국의 대 중국 무역은 언제나 수입초과였고, 이를 위해 막대한 양의 은을 청나라에 결재해주고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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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아편전쟁(1840~1842)
양귀비의 꽃과 봉우리
양비귀는 두해살이풀로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이다. 높이 약 1m. 줄기는 곧게 서고 꺾으 면 흰색의 젖 액이 나온다. 잎은 녹백 색이며 털이 없고 잎자루도 없다.
5월경 가지 끝에서 꽃이 하나로 피며 꽃봉오리는 밑을 향하고 있는데, 꽃이 필 때에는 위를 향하며 하루 만에 시든다. 꽃잎은 4장이며, 색깔은 흰색·빨간색·보라색 등이 있다.
양귀비(앵속)의 열매
익지 않은 양귀비 열매에 상처를 내면 젖빛 액즙이 나오고 이를 60도 온도에서 말린 것 이 아편이다. 공기 중에서 산화돼 검은색으로 변하는데 특유한 냄새가 있고 맛은 쓴 편 이다. 양귀비 재배지가 19만㏊에 이르는 아프가니스탄은 세계 생산량의 90%인 8200t의 아편을 생산해 한해 1000만 명을 중독에 빠뜨린다고 한다.
전세계에 250여종이 있다. 열매 하나가 깨알 같은 씨를 4000여 개나 품고 있어 지구를 덮는 데 5년 이면 충분하다고 할 만큼 번식력이 강하다. 흔히 마약을 연상하지만 재배가 금지된 마약 성분 양귀 비는 두 종류밖에 안 된다. 파파베르 솜니페룸L, 파파베르 세티게름D.C다. '꽃 양귀비‘는 관상용으로 줄기와 꽃봉오리에 잔털이 나 있는 게 마약 성분 양귀비와 다르다.
제1차 아편전쟁(1840~1842)
• 전쟁의 발단은 영국의 아편 밀수
• 영국은 만성적인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식민지 인도 에서 나는 아편을 청으로 밀수출하기 시작
• 18세기 이후로 영국 동인도 회사는 본국에서 생산된 면 포를 인도에 수출하고, 인도의 아편을 중국에 밀수출하 고, 중국으로부터 홍차를 사서 본국으로 가져오는 “삼각 무역”을 개시
• 청 정부는 마약 밀수를 금지했으나 지방 관리들이 뇌물 을 받고 묵인하여 아편복용은 순식간에 확산
- 1830년대 중반 아편인구 200만 명이 넘음
- 1839년에는 60kg짜리 4만 상자 이상 밀수입, 500만 명 이상
제1차 아편전쟁(1840~1842)
• 그 결과 해마다 대량의 은이 유출되어 은의 가격이 상승, 은으로 납세하는 농민들의 생활이 곤궁해짐
• 청 정부는 은의 유출로 극심한 재정난을 겪고, 아편중독 자의 급증으로 국민 건강을 해침
<아편 흡입기구>
아편 흡입 장면
아편 흡입 장면
마약에 의한 폐해가 커지자 청 정부는 마약 밀수를 금지했으나 지방 관리들이 뇌물을 받고 묵인하여 아편복용은 순식간에 확산되었다. 1830년대 중반 아편인 구 200만 명이 넘었고, 1839년에는 60kg짜리 4만 상자 이상이 밀수입되어 아 편인구는 500만 명이상이 되었다.
아편금지운동 포스터
제1차 아편전쟁(1840~1842)
• 임칙서(1785~1850) 파견 - 1839년 아편을 근절하기 위
해 도광제가 임칙서를 흠차 대신(欽差大臣)으로 임명
- 광주만 안에 정박하고 있던 영국상선을 수색하여 약 2 만 상자의 아편(1425톤)을 몰수, 폐기함
- 1940년 아편전쟁 발발
- 영국하원 271대 262(9표차) 로 전쟁을 승인함
▲광동성 동완시(広東省 東莞市) 아편전 쟁 박물관 앞에 서 있는 임칙서(린쩌쉬·
林則徐)의 동상. 임칙서가 태어난 복건성 (푸젠성·福建省)은 아편을 흡입하는 습관 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이다. 그의 남동생 도 이로 인해 요절하여, 그 무서움을 통 감하고 있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 흠차대신 임칙서의 초상화
제1차 아편전쟁(1840~1842)
• 난징 조약(1842) - 전쟁 배상금 지불
- 몰수 아편 대금 600만 달러 배상 - 홍콩(1997년 반환)을 영국에 양도 - 상해 등 5개항 개항
- 공행 폐지
- 차를 제외한 모든 물품에 5% 관세(관세자주권 상실)
- 영사재판권
- 최혜국 대우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강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