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원론 4강
2013년 3월 28일 목요일 오후 2:09
발제: 김성수
성수) 토론을 위한 질문에서도 던졌듯이, 자꾸 개념화하는 역사 속에 대안으로 주어진 신앙과 전통도- 결국 가르는 것이 나와 타자였던 것처럼- 이런 개념도 역시 그렇게 되지 않을까. 사실 종교라는 개념 아래 신앙과 전통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새기고 있듯이… 저는 종교라는 말을 쓸 때, 제 자신을 비춰보거든요. 종교가 이토록 어렵고 불편한 말일까. 저는 그렇게 불편하지 않았거 든요. 나와 다른 종교, 다른 신앙을 바라보는 태도가 중요한 게 아닌가. 그렇게 질문이 나온게 아닌가 싶습니다.
교) 오늘 책을 털어야 하는 시간. 주어진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니- 지금 거기서 시작해도 좋 아. 전체적인 정리는 이따가 하도록 하고. 종교가 불편하지 않았는데, 둘로 쪼개고. 번거롭게 뭐 있냐. 이것도 세월 지나면 별다른 운명이 아닐 텐데. 결국 화석화되지 않겠느냐. 이제 그런 얘기 인데. 거기에 대해 스미스는 뭐라고 했어요. 지금 내가 종교라는 개념을 치우고, A와 B로 대체하 려고 할텐데. 종교가 담아왔었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 담았냐? 그때 전통과 신앙- 스미스가 설정 하는 방식-물론 이거라도 결국 연결고리는 인간. 개념이 뭐든. 그래서 인간으로 되돌아가지 않으 면 안 되는. 뭐든 문제가 다 이렇지. 종교도 인간과 관계고. 정의, 사랑 다 마찬가지야. 결국은 동떨어진 것. 과거의 종교는 이렇게 찢어놓은 걸 어떻게 엮었느냐. 사실은 뭐여. 전통과 신앙이라 는 것은 앞서서 바로- 5장서 그런 얘기하잖아. 적합한 개념이냐- 적합하지 못한 이유- 신과 역 사. 물론 신현적 종교겠지. 결국 초월. 역사라는 이유 때문에 담아내지 못한다는 거야. 종교가 역 사를, 초월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거야. 굉장히 환원주의라는 거지. 그 표현은 안 써도. 신에 대한 대안으로, 스미스가 제안한 것이 공시적인 틀에서 신앙이고, 역사 대신에 전통이죠. 종래의 종교 개념이 못 담았다. 그래서 바꾼 거지. 근데 왜 역사에서 전통으로, 神에서 信으로 바꾼 걸까. 무 슨 뜻을 의미하고 함의를 기대하면서 용어를 제안했는가. 액면적으로만 그렇게 갈 일은 아닌가 싶고요. 그걸 주목을 해야 해. 종교 개념이 담아내지 못한 것. 근데 자네는 불편하지 않았어. 해 왔다고 주장하죠. 주장했었어. 그래서 전개하고 있어. 근데 하기를 어떤 방식으로를 비판하잖아.
전통과 신앙을, 신과 역사를. 여기서 나는 하나 더 주장하고 싶어. 전통 앞에 축적적이라고 하는 것처럼, 신앙 앞에서도 뭔가 해서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시각적 그림을 완성했으면 좋겠어. 수식 어를. 결국 종교라는 개념이 신과 역사라는 두 항목을 담으려고 했는데- 어느 한쪽으로 몰아가는 방식으로 담았다는 거야. 왜 그랬을까? 왜 인간이 그 무엇이 되던지- 개념화하는게, 뭐가 되었든 지, 뭔가 개념화하면 꼭 작동을 해. 이것과 저것, 신과 역사- 한꺼번에 담을 수 있어? 초월과 내 재에요. 단순하게 말하면. 근데 이거로만 설명할 수 없지. 여러 레퍼런스 중에 하나인데, 다 담을 수 없지. 종교적 궁극성의 원칙을 어떻게 담을 것인가. 이렇게 장난치기도 해. 단순 쪼개기로는 다 못 담아내. 그래서 대립항을 가지고 2팩토리알 해. 초월적 초월, 초월적 내재. 내재적 초월, 내재적 내재. 유형 분류를 이렇게 해요. 뭘 말해주냐? 초월과 내재의 관계를 4가지로. 이게 단지 이론적인 경우의 수인가. 앞의 초월과 뒤의 초월은 또 다르겠지. 앞에 이름 안 붙였어. 그러면 앞의 초월과 뒤의 초월은 달라. 더 중요한 것은 초월과 내재를 묶는 방식이 어렵기 때문에, 그렇 게 했지만. 결국 어느 한 쪽으로 몰리는 현실. 그래서 정말 어떻게 담아낼 수 없는, 내내 구호로 읊는 삶, 사람 못 담아내니까 일그러지는 계기가 되었다. 작동하지 못하는 개념이라는 거지. 삶과
사람을 떠나서 작동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인데. 그래서- 어… 어… 본격적으로 얘기하려는 것 은 아니니까. 간단히 추리자면- 어어… 어… 종교… 이 책이. 전체를 마감하는 마당에- 제목이 의미와 목적인데요. 스미스가 종교의 의미와 목적이라고 했는데. 스미스는 종교의 의미와 목적을 뭐라고 했을까? 종말도 말했는데, 종말은 뭐라고 할까? 그걸 추려야겠고. 그걸 위해서 우리가 생 각해야할 것은- 목적이면서 종말이라는 중의적인 표현으로까지 나타나지만, 여기서 종말은 종교 개념의 종말이겠지. 결국 내내 스미스가 여기서 처음부터 끝까지 꿰뚫는 것은 종교의 극복되어 야, 폐기되어야 할 종교개념이겠죠. 개념이라는 단위를 하나로 놓고. 하나의 실체, 현상, 본질이 있을 것이고, 용어들을 다 쓰고 있어. 그런 위상들이 이 안에 흩어져 있어요. 이 사람이 target 으로 삼고 있는 대상이야. 그러면 불필요한 논의는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주문이고요. 이야 기가 길어졌지만- 어… 책 전체를 통해, 의미와 목적으로 계획한 것이 개념의 해체라면- 작동했 는데 뭔 일인가. 이미 파악하고, 깔고 나오는 이야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대안이- 우 려하는 실체화로 되돌아가지 않을 장치를 그가 나름대로 노력했다고 보는데, 적극적으로 읽어내 는 작업을 해야 하지 않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결고리가 인간이다보니 생기는 문제를 고려해 야하지 않겠나. 그런 식으로 논의를 모아봅시다.
오늘은 6, 7, 8만이 아니라 다 추려야 하니까.
말 안하니까-
내가 마음이 급해서- 열심히 시간을 지켜보려는 각오를 하고 왔거든요. 시작은 늦게 해도, 끝 은-
하나 또. 발제에서.
맺으며에서. 다양한 종교체계가 … 풍요로움…
쯥..
요게 제가- 사실 여러분에게 물어보고 싶었어. 요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물론 요렇게 표현할 수 있는 이해를 서술한 대목들이 많이 있어요. 따라 읽어가면서 나름대로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어요. 근데 이게 논의의 출발점이고, 그 토대 위에서 뭔가 종교가, 여러 종교들이 가야할 마땅한 목표. 가치. 이런 이야기가 개진될 터전으로써 종교 체계라면, 조금 주의 할 필요가 있어요. 간단히 이야기하면, 서구 기독교에서 나온, 일원적 종교다원주의 방식일 수 있 어요. 간다하게 하자면- 이미 피할 수 없는 다양한 종교. 그렇게 스미스가 보는지. 여러분이 이 걸 읽으면서. 고런 나름대로의… 엇비슷하게 보이기에 혼동스럽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체계는 하나의 단위로 설정 가능하다는 것에서 시작하는 거예요. 이 토대 위에서 어찌 평화를 공존하면서 잘 살까. 다원주의의 목적이지. 다만- 다원주의도 종류가 여러 가지에요. 배타 주의도 여러 가지지만- 내용이 여러 가지지, 형식은 하나에요. 하지만 다원주의는 내용과 형식에 서 다 각양각색이야. 그래서 다원주의지. 그래서 앞에 일원적 다원주의. 사실 모순이지. 그리고 다원적 다원주의. 일단 분류하면 그렇고. 일원과 다원 사이의 간격이 있을꺼 아니야. 그러면 뭐가 먼저인가. 그거 가지고 싸워. 앞에 일원이냐 다원이냐 따라 달라져. 근데 아무리 찢어져 봤자, 일 원적 다원주의야. 서구적 기독교. 근데 비서구적 기독교 다원주의, 비기독교적 다원주의 다 달라.
근데 이렇게 하면- 다름들 사이의 구분을 확확 하잖아. 그래서 나는 일원적 다원주의는 심각한 수정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이게 이렇게 우리를- 비슷하게 겹치는 분위기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 가 어어어… 겹친 것 못지 않게, 차이에 주목해야 하지 않겠냐. 발제자만이 아니라 여러분도 그 랬을 수 있으니. 테두리 짓는 작업이니. 논의가 이리저리 굴러져서 맺어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경계해달라는 거죠.
스미스의 주장은 다 종교현상이라고 오늘 부르는 것- 다종교현상이라는 말이요- 이런 말도 같
이 숙지시켜야 하는 표현이야. 다와 종교 다 썼잖아. 종교다원주의는 그 안에- 근원을 놓고… 종 교다원주의라는 표현이 현상을 지칭하는 거냐, 당위-규범을 지칭하느냐. 그래서 기술적 다원주의 와 규범 다원주의. 전자를 다종교현상이야. 근데 이건 주장이라고 할 수 없죠. 그러나 기술적 다 원주의가 의미가 있는 이유가 있어. 뭐인 거 같애? 기독교 제국주의야. 다른 종교는 종교로 인정 안 해. 여기에 바르트는 각 세우고, 종교는 걔네 하라고 해. 우리는 복음이야. 하는데- 세속에서 는 이게 참된 종교야- 실체화의 과정으로 쓸 수밖에 없던 종교, 유일한 참된 종교. 나머지는 가 짜니까 종교가 아니지. 기독교 제국주의에서 보니까 다종교현상은 받아들일 수 없죠. 유일참된 종교-> 가장 높은 종교-> 여러 개 중 하나의 종교 로 떨어지는 가운데, 제국주의는 못 받아들여 요. 그래서 기술적 다원주의가 안 된다. 눈 감아봤자 뭐하냐. 그래서 의미가 있어요. 자기 종교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어떻게 그렇다면 행동해야 하냐- 규범 다원주의.
근데 스미스가 기술적과 규범 다원주의를 왔다갔다하냐? 아니면 한층 더 내려가는 것인가. 근 본적으로 종교라는 당위 자체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고 있어.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종교의 의미 지만- 스미스 책에 비추자면- 나는 뭐라고 추리겠느냐 일차적 대답도 해야겠지만- 그 다음 우리 가 할 일은, 해체의 의미. 왜 해체하는지. 스미스가 지적하는 것 이상으로 뭐가 문제인가. 도대체 종교다원주의 얘기도 대중에게는 택도 없는 얘기인데- 스미스는 그것 가지고도 성이 안 차는 거 거든. 그 거리도 알아야 해. 그 얘기보다 더. 한 방향은 아니에요. 하지만 대중에게는 받아들이지 않은 과격한 드라이브다 라고 생각할 필요 없어. 더 나가지만, 우회적으로, 비의도적으로 정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위해서, 그 사람과 삶이라는 것. 그리고 거기 착지할 신앙이라는 것. 의미 를 구현해야 마땅한 것으로 신앙이라는 것, 향해 더 들어가려는 몸부림으로 이해해줄 것이라는 뜻도 필요하기 때문에. 다원주의에서 더 나간다는 뜻이 기술적에서 더 로 이해할 필요는 없겠다.
그래서. 요 거리. 무슨 차이일까. 요걸 좀 더 주목해야! 축적적 전통과 신앙의 의미를 추릴 수 있 어요. 요 거리. 종교 다원주의가 아직도 설정하고 상정하는 거리. 이 종교와 저 종교의 다르다.
물론 그렇다고 같다는 게 아니에요. 그런 현상을 그렇게 볼 단계가 있어. 그리고 다음 단계로 가 야지. 경계지어진다- 폐쇄성의 가능성. 그게 실체지 뭐야. 그러면 배타주의만이 아니라 다원주의 도 실체성을 상정하고 있어. 그걸 비서구, 비기독교에서 다른 이해를 갖죠. 아프리카, 아시아권에 서 터져나왔어. 고것도 논의를- 범위를 제한하면서 혼동을 줄입시다라는 의미에서 미리 깔았습니 다. 저는 잠시 사라지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3시반까지, 발제 후 토론으로 갑시다. 저는 교통정리만 했습니다.
2번 문제는 본격적으로 논해볼 만한데요.
1번은 충분히 의미는 있는데, 앞서서 등장시켰던 신과 역사. 그 긴장관계를 무슨 이유로 치환 시켰는지를 생각해보면, 고쳐 물어야겠지. 좀 물꼬를 터볼까요? 두 번째 얘기.
그러면 좌중에 선교 전공도 있는데, 한 마디만 하소서 분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애.
발제자 입장에서 다시 설명하면서 토론을 시작합시다.
장목) 축적적 전통과 현재적 신앙. 그렇게 타이틀을 붙였어요.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
교) 충분히 의미가 있는 어휘선택입니다. 축적적은 통시적이고, 현재적은 공시성의 씨줄을 보여 주죠. 축적적과 긴장이면서도 얽히는. 그런 표현으로 읽을 수 있겠죠. 좋습니다.
성수) 2번 문제- 지난 시간에 이어서 그랬습니다.
@) 저도 다원주의 이야기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결국 기독교를 중심에 두고, 종교라고 하기 전에- 종교하다라는 표현으로 종교의 의미와 목적을 설명하다보니 상관관계에서 목적이 밝혀진 다, 하지만 종말론적으로 밝혀진다. 그러면 결국 규범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규범에 관한 문제인
데. 그 규범이 결국 참여자와 관찰자 사이에서, 신앙의 행위와 표현을 통해서만 가능한 거잖아요.
관찰자는 결국 종교적 타자인가. 그러면 선교로 넘어가는 것 같아요. 제가 발제자에게 얘기하고 싶은 것은- 스미스가 말하고 싶은 게 결론이 안 나더라고요. 발제자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 종교 의 의미와 목적은 뭐냐. 신앙과 전통의 관계는 알겠는데. 어떻게 본 건지. 동사, 형용사 아니면 뭐가 있는지?
성수) 그 고민을… 다 같이…
교) 맞아. 발제자 혼자 뒤집을 일이 아니고.
@) 종교라는 게, 객관적인 종교를 하나로 보는 거 같아요. 뭐라고 해야 하나. 예를 들면- 역사 적 산물이라고 했거든요? 스미스가. 그런 입장에서 봤을 때. 결국 종교 자체가 참 의미가 밝혀지 려면, 종교 스스로가 폐쇄성을 포기하고, 개방적이 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 요.
장목) 스미스는 종교의 의미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러나는 매일매일이라고 하잖아요. 삶이 빠진 종교행위를 의미 없다고 보잖아요. 성과 속으로 나누어서 종교가 속이라면, 그래서 해체되 어서 없어지면- 결국 하나님께로 귀의하게 되는데- 종교가 성으로 회복된다고. 종교의 목적에 대 해 답을 내린다기보다 하나님께로 귀속되는 것으로 보거든요. 종교가 사라지고, 하나님이 결국은 종교의 종말이- 종교의 목적은 하나님께 맡기고 있고, 본인 스스로 답을 내리지 않는 인상을 받 았어요. 8장 마지막 부분에.
@) 그러면 종교 없어져야 하는 것?
진호) 종교 개념이 없어져야. 대상 자체가 없음. 삶. 그런 논의 자체가 어렵다.
#) 새로운 접근. 어떤 개념. 설명하는 수준에 있지 않을까. 그것도 대체되더라도.
$) 축적적 전통, 신앙이라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축적적 전통의 내용이 있고, 신앙의 내용 이 있는데- 잘 파악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두 개의 개념을 대입해도,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 지 모르겠지만. 그 단계가- 얽혀있다는 거예요. 그게 얽히면, 신앙이 포함될 수 있고, 그게 역사 적으로 흐르면서 관찰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남게 되고, 개인의 신앙이 초월적으로 나타나고.
미래적으로. 생동적으로 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저는 스미스의 관점에서는 생동적 신앙이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여기서 주장하는 게- 서양에서 규정한 종교 개념에 대해서 신앙의 표현을 가 지고 많이 분석하는 것을 봤는데, 교리나 신조에서 비판하는 것을 많이 봤는데, 명사화 개념화되 는 것을 보면서 종교가 물상화되는 것을 얘기하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다종교라는 말 자체는 종 교라는 말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타인의 삶. 신앙과 축적적 전통이라는 개념을 통해 조금 더 이해하고자 하는데- 타인의 삶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 는 것을 제시한다고 보는 것 같아요.
정우) 종교적이라는 의미가- 속성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점은, 개인 인격체를 계속 중시하기 때 문에 신앙과 전통을 쓴다고 봐요. 본성을 규정하는 것 자체를 반대해요. 지적으로 올바르지도 않 고. 수행될 과업으로 보기 때문에. 과연 스미스가 그걸 원했을까. 또 개념화되는데. 종교적인 개 념의 종말이라고 보는데.
주원) 왜 그런 두 가지 개념을 대안으로 내세웠는지. 생각해본 바로는-책에서 개인 인격체적 새로운 준거틀로 제시된 축적적 전통에 대해 말해보면, … 스미스가 두 가지를 내세운 이유는 인 간의 종교적 삶의 인격성을 가장 잘 반영할 수 있기 때문에 개념화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알면서도- 부족함은 아니더라도 하여간. 인격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것-
$) 생동적 성질로 풀어내면서. 고정되어 있지 않은 … 251쪽. 정적이지 않은 것.
정우) 신앙은 인격체적 신앙. 전통은 인격체 간의 문제.
진호) 두 개념 쓰는 것은 교통정리. 개념화 문제는 걱정 안 해도 될 듯. 안전장치를 계속 세운 다.
#) 종교 다음의 무엇? 역사적 산물이다 인격체다… 종교 일반에 대한 얘기잖아요. 각 종교들이 수레바퀴가 돌아가듯이. 어느 시점에서 교류가 일어나고. 뭔가 하나 나오지 않겠느냐. 종교 넘어 뭔가를 제시하는 게 아닌가.
태진) 저는 그건 아닌 거 같은 게. 축적적 전통 신앙 결론 읽으면서 남은 게 개인인격체. 시간 좀 더 있으면 2번 문제 더 다루면 좋겠는데. 파니카. 자신의 저작에서, 신앙이 개종 가능성을 염 두에 둔 신앙으로 가야 한다고 하거든요. 소위 종교 간 대화-비적절성에는 공감하니까. 뭘 하려 고 하는가. 저는… 이런 문제의식을 갖는다면, 종교 간 대화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 거든요. 동일성의 축으로 갈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스미스는 그런 거 없다. 내가 지녀야 하는 이상적인 신앙은 없다. 신앙이라는 것, 동일성으로 착각할 수 있기 때문에. 제가 묻고 싶은 지점 은- 종교 간 대화라는 것은- 종교라는 단위가 없는데. 그러면? 선교의 정합성이나, 해야 하는 당 위성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어떤 종교를 넘어서는 뭔가를 잡겠다는 아닌 거 같아요.
%) 저도 동의하는 게- 신앙은 관찰될 수 없다. 그리고 삶 역시 관찰될 수 없고- 삶을 사는 거 잖아요. 근데 학문하면서 계속 같아야 한다는 압박감. 그러면서 타자화 현상. 스미스, 오랫동안 갇힌 것 안에 다름을 말하려는 노력. 뜨뜻한 물에 커피 타고… 앎에서… 같음과 다름… 삶에서는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고… 계속 종교… 같은 담론. 스미스는 결국 인간을 얘기하려고 하지 않는가.
정우) 종교 넘어가 아니라 개념 해체를 통해 종교적 인간, 삶- 깔려있는 삶을 드러내려는 듯.
다른 게 이미 내재한 뭔가를 드러낸 거지, 또 다른 뭔가를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아닌 것 같아요.
2번 선교 문제, 말장난 할 때- mission이잖아요. Miss I on. 고정된 자아를 잊어가는 것이 스미스 입장에서 이야기하지ㅣ 않을까.
#) 저도 계속 고민하는 중인데- 2번 질문. 선교의 당위- 좀 잘라야 할 듯. 선교 자체가 개념 화, 가르치다는 어휘. 종교가 개념화되어서- 선교라는 단어도 잘못된 듯. 선교를 해야 한다 말아 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것. 신앙적 차원에 있어서- 이런 저런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 도하는 것. 개인적인 관점일 수도 있겠지만, 인도의 역할로서 선교. 만나게 해주는.
$) 종교 일반- 대화의 필요성을 거기서 찾는 것 같아요. 다른 종교와의 만남, 새롭게 재발견해 야 한다. 그러다보면- 종교들 간의 만남- 당연한 귀결일 지도 모르지만, 새로운 뭔가가 탄생할 지도 모른다는 것을 독자가 당연히 생각할 수 있죠. 종교 다원주의… 어쨌든. 스미스가 분명히 그런 부분에서 의도하고, 필요성을 끌어내는데 있어서. 종교의 해체를 통해서? 의미와 목적- 결 과적으로 새로운 뭔가를 지향하는 것이 아닌가. 너무 나이브하지 않고 래디컬하게 보면 이 책은 굉장히 기독교 전체, 다른 모든 종교 개념 전체를 흔들면서 뭔가 새롭게 가야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 새롭게 제시하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관계. 개종이라는 의미도 종교가 들어가있 기에, 스미스에게는 무의미한 단어고. 사랑도- 그.. 개종이 아니라 관계의 삶으로 나아가는 거죠.
종교라는 단어를 안 쓴다면, 다른 신앙인의 삶을 이해한다면- 이해라는 단어.
정우) 스미스- 다원주의가 아님. 귀납적이기 때문에 공통적 속성, 연구가 맞다 위해서 그런 거 지, 다원주의 위한 게 아님. 실천적 측면을 위한 것이지, 다원주의로 나가자, 넘어서서 어디 가자 그런 게 아님. 소스가 있네. 하나의 귀납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 저도 그런 생각을 하기는 하는데- 그냥 넌지시 던져보는 것. 들으면서 느끼는 것도 굳이 그
럴 필요가 있었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가능성을 열어둔 것은 하고는 싶은데 아직 힘든. 그 런 선에서 여지가 있을 수 있다고.
^) 발제 3쪽. 공통적 요소. 이야기 했다는 차원에서. 다원주의… 꼭 그렇지는 않다. 스미스가 다름을 인정하는 실존적 보편성. 다름을 인정한다는 차원에서 축적적 전통. 두 가지 의미로 해석 될 수 있지 않을까. 억압의 형태로… 그런 것은 배격되어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고. 축적적 전통 이라고 하는 것이 기술적 다원주의. 다원적인 상황에 놓여있다. 그런 차원에서 인정해야 한다. 실 존적 차원으로 가지고 와서 이야기 될 수 있는데. 삶의 차원. 체험의 차원. 신앙의 보편성. 연결 되었을 때, 신앙에 이르는 경의적 차원. 보편성에 발견할 수 있지 않는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실존적인 보편성. 그런 차원에서, 그 안에서 참된 초월적 보편성. 대화 가능하다.
$) 선교학 신학, 방교수님 이야기. 혼종성. 어떤 지역적인 에어리어의 개념이 있다는 거죠. 불 교인 기독교인 다 한 방에 집어넣고 생활하게 되면? 나름대로의 조화가 이루어지고, 나름대로의 규범이… 그렇게 될 것이죠. 그렇게 이루어진 전혀 새로운 형태의… 뭐가 이루어지면, 그걸 뭐라 고 할 것인가. 새로운 종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규범성이라든지. 가변적으로 갱신되면 서… 역사적 인간의 신앙표현 가미되면서 새로운 어떤 것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기독교의 정체성 이 거기서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스미스는 그런 건 계산 안 했겠지만, 여러 상상을 독자로 하게 하는 것 아닌가…
정우) 그러면 해체 필요?
$) 그게 되어야 가능. 자기거만 찾다가, 다름으로.
정우) 축적적 전통이 있는데.
$) 종교일반을 말하기 위해…
정우) 넘어서는게 가능?
#) 혼종성- a b c가 섞여서 d가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그냥 상태죠.
진호) 그건 어색. 겨우 삶으로 돌아왔는데. 또다시 씌우나.
지수) 그거 실체화. 노노. + -. 초월 신과 인간 사이의 종교적인 삶. 스미스가 계속 비판하는 것은 종교 단일성 하나로 엮어내는 것을 단수로 표현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여기서 단수에서 복수가 아닐까. 표현하신 이유가…
성수) 첫 수업시간. 1-3장. 단수와 복수는 종교와 종교들. 오해를 낳게 되어 죄송합니다.
교) 자. 시간이- 예정보다 상당히 갔는데. 잠시 쉬죠 뭐. 쉬었다가. 한마디 하고 싶어졌는데.
또 길어지니까.
(휴식)
책 다 할 수는 없고, 몇 개 중요한 것. 역시 지금도 마찬가지죠. 시간이 넉넉하면 다할 수 있 지만.
다만, 여러분 토론 중에 토론자의 한 사람으로 이런 저런 말 하고 싶었지만, 여러분 하십시오 라고 하도록.
쉬기 직전에 한 것- 생각나는대로 읊고 해보죠.
시간이 멈추는 것이지 이야기가 멈추는 게 아니죠.
혼종성 이야기했죠, 혼종성은 현상에 해당하는 거다라고 했죠.
#) 저는 그렇게 말했는데요. 혼종성이 사실- 종교에 대한 부분보다는, 개인의 심리, 정신적인 부분, 상황에 대해서 연결해서 생각해서. 정치나 경제나 그런 부분의 혼종성이 종교의 영역으로 들어가서 정신분석까지 할 수 있는지.
교) 그래서 다시 받아서 뭐라고… 하여간. 현상을 가치평가절하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하여간.
스미스는 실체서 현상으로. 통상적인 철학적 개념에 대조해서 완전히 맞는 것은 아니지만.
Appearence반대로 reality로 쓰기도 해요. 관념론에서도 써요. 현상과 실재, 현상과 본질. 대립 개념으로 쓴다고. 철학적인 개념의 정리인데요. 근데 여기서- 길희성 교수님이 상당히 정확한 번 역을 했어요. 포괄적인 의미, 대체가능한 용어로서 실체. 결국 맥락에서 보면 본질로 읽어도 되지 않나. 결국 뒤에 본질이 나오잖아요. 현상과 본질. 그렇다고 할 때 실체에서 현상으로. 전환의 요 구. 구호로 정리했을 때. 읽어도 좋을 것이고요. 그러면 현상을 평가 절하할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 다음. 오히려 더- 더- 더 본격적으로 얘기하자면, 현상이 삶을 가리키는 거잖아요. 그죠?
저 옛날 형이상학에서는 본질이 진짜고 현상이 껍데기지만, 오늘날은 현상이 진짜야. 현상이 그 런 겁니다. 그런 비중을 지니게 된 것으로 개념. 현상이라는 말 가지고 했죠? 형이상학에서 현 상. 중세, 근세, 현대의 현상. 중세는 가짜. 근대는 그렇게만 알 수 있는 현상. 앎의 거리들. 한정 된. 현대 와서 현상은 삶이라고 했어. 그거 넘어, 뒤로 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출발해야 해.
근데 현상학은 거기서 시작해서 안으로 들어갔어. 거기서 시작은 현대지만, 안으로 들어가는 봉 창 두드리는 짓으로 얼마 안 되었어. 결국 해석학의 산실 역할로 끝났지. 주도권을 내주고. 앞서 거니 뒤서거니 실존철학과 해석학- 현상에서 현상의 생리구조를 파헤치는 구조로 진행되었어. 가 짜였다가, 물자체 앞의 초라한 것- 초라만은 아니지. 하여간 제한된 것. 이제는 여기서 시작. 있 는지 없는지 난 모르지만- 알 수 없으니 이제 할 것도 없고. 우리가 만나는 것에서 신도 가치도 얘기한다면 여기서 출발하고 여기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거지.
혼종성. 아까… 그… 한 방에 여러 종교인들 넣고, 그냥 살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서로 간에 뭔가 벌어질 것이다. 벌어지겠죠. 그러다보면, 새로운 삶의 형태가- 새로운 종교가. 그 런 비슷한 얘기했어. 혼종성이 그런 것일지는 물음표야. 그것에 대해 현상이다. 얘기 주고받은 것 같은데. 혼종성은요. 그렇지 워낙에 물리화학의 개념에서 나와 가지고, 정치경제사화과학, 문화단 위, 그러다 종교단위도 될까? 라는 것인데. 그런 눈으로 보면 이미 그런 거야. 뭐냐? 그래서 이 미 종교 안에서 쓰는 용어가 있었어. 격의성. 종교적인 격의성. 한 개의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수 억개의 그리스도교가 있다. 하나의 종교라는 허상을 깨부수는 용어를 선포하잖아. 1천4백년 종교 와 지금 종교. 이게 같다고 할 수 없는 거야. 그죠? 이름은 같애. 근데 같다고 할 수 없어. 격의 성의 요체가 역사죠. 2천년의 역사. 다 역사야. 근데- 이런 맥락에서- 굉장히 상식적인데. 격의 성만 있는 것이 아니야. 통시적인 틀에 관한 표현인데. 격의성. 그러니까 그때 종교와 지금 종교 가 같은 종교일 수가 없어. 그러니 어떻게 돼요? 시간만큼이나 공간에 따라서도 달라. 200년 역 사의 한국기독교와 1500년의 로마와 2000년의 동방정교회, 500년의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 같을 수가 없잖아. 시간만이 아니라 공간의 버전도 있을 것이야.. 차이가 어디까지 갈 것인가? 우리 대한민국이 한반도 땅에- 끝에 여기까지 왔다. 그래서 반만년 역사야. 땅에서 폭 솟은 게 아니 야. 이미 엄청난 복잡다단한 삶의 얼개를 가지고, 그걸 일컬어 자연이라고 하고, 자연과 문화가 얽히고 종교라고 이름 붙여질만한 것이 흘러왔어. 복잡다단하게. 토착화신학에서는 토착화의 재 료이자 상대이지만- 토착화라는 거에요. 한때 많이 읊어졌어. 금화 터널 지나가면 거기서 많이 주장했어. 근데 요즘 조금 조용해졌어. 그리고 버전이 달라졌어. 2세대 3세대 분류하지만- 종교 신학, 문화신학으로 가요. 그그그그… 담론을 이어받은 후예들에게 그렇게 표현되지만. 그 뒷얘기 는 나중으로 미루고.
토착화 신학이라는 것이- 화라는 것- 된다는 현상도 될 수 있고, 되게 한다는 행위일 수도 있 어요. 토착화는 현상이기도 하고 행위이기도 해. 근데 토착화는 실제로? 행위에 많이 초점을 맞 췄어.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중요한 한쪽 면을 간과했어. 이미 벌어지는 현상으로써 토착화. 맨 날 정화수 올리고 기도하는 할매가 쪽복음을 받았어. 그리고 엄청 감동이 오는 거지. 이거구나.
그 길로 틀고 자르고 빨간 십자가 찾으러 갔어. 아까 개종 얘기했지만. 개종이지 개종. 이름은 개종이야. 벌어진 현상은 개종이야. 근데 그 안에서 실제로-- 그- 응? 그 분의 종교적인 성정을 분석하자면, 어도로게 될가? 마태, 누가 많이 읽은 게 문제가 아니고요. 밑도 끝도 없이. 이게 있 음으로 얘기하면- 앎도 가능해요. 삶은? 그렇게 되는게 아니야. 있음과 앎은 깔끔하게 개종으로 말할 수 있어요. 하지만 삶은? 아니야. 칸트 뒤로는 아니야. 헤겔은 삐딱선 탔다고 보고, 신칸트, 그리고 반(反)헤겔의 흐름. 있음과 앎 선택이 아니야. 삶. 근데 삶 속에 있음과 앎이 돌아가고 있 어. 해석학이 그거야. 해석이 어떻게 돌아가나. 어떤 것에도 우선을 세울 수 없는 해석학적인 순 환. 있음과 앎을 머금되, 주도권 싸움이 되었어요. 있음이 먼저면 객관, 앎이 먼저면 주관주의.
피히테도 나오고. 독일 관념론자보다 살짝 위로 올라가면, 주체 객체야. 인식론에서. 근데 형이상 학이면? 물질 정신, 자아냐 비아냐. 내 버전이면 있음이냐 앎이냐. 자아는 앎이야. 자아가 앎에서 시작해. 그러니 Deutsches Idealismus야. 근데… 음….
그런데 그렇게 직조된 삶에서는, 토착화는 그죠? 그냥 하는 거야. 이미. 100% 깔끔한 개종으 로 볼 수 없어. 나는 이미 그런 삶 위에 덧붙여지고, 가다머의 융합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벌어지는 거야. 삼신할미와 하나님 사이의 지평융합이 일어나. 그 양반이 공부하고, 가다머 대로… 그게 아니야. 있음에서는 될 거 같애. 앎에서는 돼. 근데 삶에서는 안 된다고. 그게 삶이 거든요. 그래서 그걸 개종이 아니라 가(加)종이라고 해요.
격의성 얘기했죠. 시간축이야. 근데 한 사람 안에서 삼신할매 안에서 바꿔치기하고 있어. 삼신 할미 들어가 있어. 무속의 맨탈리티도 들어갈 것이고. 기복신앙도 자연스럽게 자리 잡을 것이고.
하나의 단위를 전제하고 보면, 한 사람의 삶 안에 여러 종교들이 설정할 수 있는 것, 동시에 출 현하는 거야. 종교의 중층성이라고 말해. 종교 자체가 격의적이고요, 그렇게 축적이 되는데. 시간 적으로 다르면 다르고, 공간적으로도 다르고요. 시간 공간- 이게 다 관찰자의 그림 속에서 펼쳐 질 수 있는 그림이야. 그림이 달러. 프랑스와 한국 기독교 달러. 천주교와 달러. 한국은 유럽과 달리 미국, 특정한 미국- 더 자세히는 않겠어요. 미국에서도 특정한 동네 버전이 한국화 된 거겠 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한국 천주교도 달라요. 관찰자 입장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축 으로 종교를 단위로 두고 말할 수 있어. 근데 얘기는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야. 인간이거든. 종 교간 대화는 종교간 대화가 아니라 종교인간의 대화야. 쯥. 인간의 대화라고 할 때, 종교간 대화 가 얼마나 떠 있는 얘기인지 비판할 수밖에 없죠. 그래서 보살예수… 광우가 그런 얘기했는데.
내가 한번 그런 얘기할 때 비판하니 배은망덕하다고, 선조들이 한 걸… 욕 먹었는데. 조작적인 합성. 실체가 있다는 것으로 생각해서 할 수 있는 거야. 인간 안에 자리잡고 있는- 신이 표상하 고 있는 초월이라는 것을 담아내면 그쪽으로 쏠리거나, 아예 지나가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 월적 실재가 없다고 하더라도, 부정한다고 하더라도, 없는 초월적 실재를 있다고 착각하는 환상.
그 삶의 모습이 여전히 탐구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종교 간의 대상을 예수-보상 -노자- 관계 비슷하다 말다 그거 아니야. 착각을 붙잡고 있는 삶을 봐야하는데. 붙잡힌 것 간의 관계들. 그런 이중적인, 시대착오적인 발상들. 그렇습니다만. 그건 그 얘기고.
종교적인 격의성이 결국은- 종교라는 단위보다 더 근본단위로 인간으로 파고들었더니. 인간 안 에 동시 다발적을 출현하더라. 한국 기독교인. Korean christian. 제가 맥락마다 잘 하는. 한국 기독교인은요. 두 가지 문제가 있어. 한국인이라는 정체가 있어. 국호가 한국이라는 것은 50년이 지만- 그 전에 대한제국, 조선을 통체로 한국이라고 하죠. 헌법에 명시된 것 말고 한반도 땅을 한국이라고합시다. 근데 100년 전 한국이랑 지금 한국은 너무나 달라요. 그리고 이 100년은 인 류 역사상 가장 큰 100년이에요. 적어도 우리가 알기로는 그래. 우리가 읽어가는 역사의 틀로서 는 그래. 15세기 변화도 엄청나지. 근데 8세기 변화. 별로 없어. 우리가 알기에는. 한반도에서는?
원효대사, 신라 쯤. 하고… 그때 변화는 우리가 알기로는 크지 않아요. 지금 변화는 엄청나. 그러 니 1894년 동학의 한국하고. 20세기 한국은 엄청난 변화야. 한국인의 정체성, 어떻게 말할 수 있을지. 다 고려해야 해. 다 있잖아. 국적 개념에 다 포함되는 거잖아. 한국인 정체성해도 100년 전과 다름. 그러다가 그리스도인? 한국에서 종교학 하는 사람 모두 하는 말- 압도적으로 갖는 게 유교와 무교야. 어떤 종교든. 거기에 기독교나 불교가 좀 들어가. 기독교는 역사가 좀 짧으니까 좀 괜찮은데. 불교는 좀 그럴 거야. 오래 되었으니까. 종교학자의 눈에는 왜 인간의 심성이 불교 는 별로 없고, 무교에 흡수된 불교야. 껍데기 속은 샤머니즘이라는 거지. 압도적인 무교야. 그리 고 유교? 고려시대- 조선조 때 유교가 지금 500년 역사. 지금 우리에게 문화적인 파생 영향이 상당하다는 거야. 의식 제도적인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유교. 무교와 유교를 합치면? 개인에게는 다 50%가 넘을 꺼야. 심성으로 보면. 우리가 다 기독교인이어도. 종교로만 놓고 보면. 한 인간 안에서- 종교가 여러 종교가 나와. 종교의 중층성이야. 격의성이라는 세로축과 중층성이라는 가 로. 종교학자가 뭐라고 하던 난 100% 기독교인이야 라고 할 수 있지. 뭐. 종교 자체의 격의성과 한 개인 안에서 출현하는. 그러면 2000년 기독교 전통의 동방정교회 사람들은 어떨까. 상대적으 로 저런 중층성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적을까? 그렇게 기대할 수는 있어. 하지만 삶이 이렇게 생 겨먹었어요. 격의성, 중층성, 혼종성. 본질과 대립각을 세우는 말이야. 살짝 부정적인 뉘앙스를 포함하는 것 같기도 하는? 혼종성- 순수 단일 품성에 비해서는 해결해야 하는 것 같은. 그래서 예찬해야 해. 근데 삶의 눈으로 보지 않아도, 삶이 이미 그러고 있어. 그리 본다면, 아까 그 얘기 가 그렇게 되겠고.
*) 저 개인적으로 부딪히는 문제- 제사, 믿음을 갖고 있는데. 어떤게 더… 이런 중층성으로 보 면, 지내야…
교) 좌중에 더 현명한….
() 담임목사님께…
교) 나한테 묻지 마라는 거지. 여러분 현명한 대답 갖고 있을꺼라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그그 그그그그그. 상가에 가서. 그죠. 절을 하는 분도 있고, 향 꽂고 하는 분도 있고, 국화하는 분도 있고, 큰절 말고 목례하고(상주와) 하는 경우도 있는데. 얼…. 글쎄요. 저는 그때 가서 시설이 향 이면 향으로 하고. 저는 절해요. 그건 인사해요. 어떤 의미도 없어. 생명현상 중에 이쪽 면과 저 쪽면이 같이 있다가. 한 쪽 면이 간 거 아니야. 사체지. 생명의 삶과 죽음이 한 데 있는 게 접수 가 안 되면 다음에 또 할께. 고인에 대한 인사의 의미야. 제사를 내 종교로서 종교로 등위에 놓 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애. 난 제사갈등은 없었지만. 할아버지부터 목사여서. 자. 개인마다 이리저 리 있을 수 있겠고요. 아까- 몇 가지 하고 싶었는데.
주원이가 읽은 글에서 고 대목에서 말하고 싶었는데. 또 적절한 기회로 하고. 들으면서 뭘 확 인할 수 있었냐면, 축적적 전통과 신앙. 둘 다 초월과 내재로 분석할 수 있겠다. 전통은 세로축, 신앙은 가로축. 그 때? 이쪽 저쪽- 그러니 아까 같은 이야기들. 네 가지 경우의 수. 그렇게 매치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주원이가 읽은 거 생각 안 나죠?
그 다음에. 시간(4:44).
본문으로 들어가서 살펴봅시다. 살펴보는데~
용세는 이걸 켜가지고- 아까 얘기하는 것 잊어버렸네. 두 번째 그림. 지난번에 했던게 네번째 그림. 다 여러분에게 상식적으로 정리된 것인데. 3장 제 끝절에.
3장 7절. 개별적 이름들… 문명사의 대전환이 이렇게 이뤄졌다는 거야. 본질로부터 실존으로의 변화. 언제 앞에서 참 놓고 존재 무 본질 실체 실존 관계. 실존이다 관계다. 존재론적인 근거가 무에요. 실존이라는 말. 사르트르는 래디컬하게 실존은 무라고 질러버려. 형이상학의 전제가 본질
이라는 전제. 본질이라는 말을 칸트가 말할게 물자체에요. 현상학자들이 말하는 현상에서 시작해 서 본질- 앎의 이야기야. 앎으로 들어가. 삶에서 시작하지만 앎으로 끌고 들어갔어. 그런 개념의 변천 과정을 겪고 있던 빈천이거든요. 고대 중세 시대. 본질주의 시대에는 본질 안에 있었어. 깔 끔하게. 토마스. 존재가 밑바닥. 그 위에 본질이야. 존재 범위가 제일 넓어. 참으로 있는 것이 실 재. 그 토대가 존재, 본질, 실존. 실존이 핵심이 아님. 신에게는 세 개가 완전히 일체해. 토마스 의 그림이 그래요. 내내 저 세 범주로 설명해. 존재는 있다. 본질은? 이것이다 고. 실존은? 산다.
산다의 특정한 예로 한다. 그래서 산다가 이다의 범위 안에 있어. 생명이 있음이야. 생명은 삶만 뜻했어. 여기서는 죽음을 포함 못해. 근데 생명이 죽음을 포함하는 것은 이 구도가 깨져. 존재의 근저. 이 밑. 엄청난 무. 존재는 이 밑도 있어야 한다. 아울러서 존재로 새겨야 한다. 그게 하이 데거. 실재를 존재와 무로 쪼갰잖아. 쪼개놨단 말이지. 없음, 죽음도 실존의 모습으로 자리 잡는 거야. 생명 개념 안에 한대 버무러지는 거고. 그런 개념의 혁명적인 전환을 벌려줄 만큼, 이상에 서 현실로, 본질로부터 실존으로의 전환이야. 내가 이걸 찾았었나.
5시에 끝내려고 했는데. 이걸 지금 끝내면 어떻게 되지?
있음 앎- 동일성- 일방성의 문제. 딴소리 하지 마! 지켜! 환원주의, 중심주의. 그것에 대한 반 동이 육체서 터져 나왔어. 그걸 아울러서 실존의 반동이라고 할 수 있어. 서구에서는 실존. 동구 에서는 물질. 영미에서는 사변에 대한 실증의 반동들이 펼쳐진 게 19-20세기. 150년 전 얘기, 현대의 시작. 그래서 이 그림이 여기 삶. 삶의 다름으로, 비환원, 탈중심으로.
그냥 두고. 더 하겠어. 에….
지난 시간 5장. 내가 5시라고 생각했는데, 나 스스로 타협해서 5시반. 칼로 끝낼게요. 근데 이 정도면 엄청 양호해진 겁니다. 축적적 전통으로는 6시반은 기본이었는데. 다 사라진 거고. 전통 으로. 지금은 생동적으로 5시. 현재적으로 살겠습니다.
5장, 좀 주목할게 있죠.
기독교 신학계, 바르트 브룬너 틸리히 본회퍼. 기독교 신학계가 나와. 종교라는 개념이, 반대 대상들이었어. 여러 얘기가 나오는데~ 그걸 또 다른 그림. 그- 이번 학기 새로 그린 그림. 탈비 무종교. 그 그림에서 보면? 한번 켜볼래? 원래 종교성이 있었고. 원래 있던 걸 거슬려서 쓴 거 죠. 뭐 다 그렇죠. 사회, 역사 다 그렇죠. 인간의 자기 이해에 자기 범주로 쓴 거예요. 자연이라 는 말을 과학이 부각시켜줬죠. 알깨기 작업을 했어요. 이신론과 범신론. 자연주의적 범신론. 합리 주의적 이신론. 중세에서는 초자연적인 유신론. 근대에서는 자연을 범주로 하니 이신론과 범신론.
근데 이후에는 역사와 사회가 등장하거든. 범주의 확장, 자기이해 축의 확장이라고. 근대가 그렇 게 커졌어. 인간을 자연사회역사의 눈으로 봐. 사회와 역사, 시간공간이라는 유한성의 시각이야.
삼라만상을 그렇게 해. 선험적 구성설로 정당화 해. 칸트가. 기본틀이 시간 공간이잖아. 그런 작 업이 벌어지고. 사회 역사가 그렇게 등장하고 거슬러 올라가. 그렇게 정착되었는데- 탈반무의 일 련의 부정어들이. 지금 이제- 첫 시간에 해놨는데. 지금, 책을 터는 이 순간- 근데 개념만의 문 제인가요? 결국 인간 세상, 인간에 대하여 지껄이잖아. 종교 따로 있어? 종교가 표상하는 초월자 는 별도의 영역이지만, 함께 하지만- 분명히 인간이 인간에게 한 짓이라고. 외계에 벌인 짓이 아 니라 인간이 인간에게. 그러면 탈반무에 대해. 부정의 반응들이, 스미스의 이야기. 해체의 이야기 들- 절규와 관련해서, 충분히- 이렇게 마무리할 때 보니 수렴되는 게 느껴지면서 공중부양 하려 고 했는데, 여러분은 그런 게 없었나… 나 혼자 그랬나. 나 하고 싶은 이야기는 탈반무라는 종교 바깥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종교 안의 이야기에서는- 사회적인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근데.
종교에 있을 터인데. 동시에 해법이야. 탈반무가 동시에 해법이라고. 요 순간이 엑스타시의 순간
이야. 저기서 해법의 통찰을 끌어내야 해. 종교 바깥의 … 사회에서. 종교를 향해서 던진 부정적 인 언어들이 종교에서 연원되었지만, 동시에 그것에 대해 탈이다 반이다 무다 쎄개 부정어를 때 려줬지만, 동시에 원인에 대한 해결의 통찰을 읽게 해주는. 그걸 해주는. 스미스와 함께 그런 성 찰의 작업으로 기억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런 맥락에서 바르트에서 본회퍼까지. 일련의 궤적을 비종교화. 탈반무와 구분해서. 탈반무가 비의 해법을 줘. 특히 반에 대한 신학적인 반응이 비로 나왔어요. 탈반무에 대한 해법을- 동시에 주는 것으로 사회적인 흐름으로 읽어야하지 않겠냐. 그 걸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이 말이야. 여기 스미스가 열거해준 것 뿐이겠어요? 많은 신학적인 흐름이 다 그런 통찰을 지니고 있죠. 구체적으로 역사적으로, 탈종교화에 대한 기독교의 반응?
카톨릭은 철저하게 고전적인, 중세적인 패턴. 근대화를 철저하게 거부. 개신교는 근대정신과 앞서 거니 뒷서거니 했지만- 개혁자들이 다 개탄하듯이- 이름만의 개혁이고, 다시 우상숭배로 돌아가 는 누를 범했다. 다 자가진단이잖아. 결국 탈종교에 대하여- 카톨릭 말할 것도 없고. 결국 18세 기, 계몽주의와 함께 몰락하는 궤도 밖에 없었죠. 사회적 근대화와 게토화. 급기야 반종교의 그림 이 되었고. 그래서 비종교화의 대화잖아요. 결국 비종교화의 대화는 반종교와의 대화입니다. 하지 만 탈종교화의 대화를 보고 싶어요. 지금 세속사회에서는 다 중첩되어서 보여요. 다 지난 것 아 님. 그러면 탈종교에 대한 response. 탈종교라는 사회적 비판에 반응해야 할 종교, 기독교. 버린 말 줏어서 쓰고 있다고 생각합시다. 기독교가 반응을 못했어요. 정통경건자유주의. 못했어요. 지 정의 정신 세요소 붙들고 늘어졌어. 그러니 포이에르바하 같은 양반한테 디립다 욕먹지. 지성 의 지 감정 쫙쫙 올렸다. 조지잖아. 그들은 점점 더 축소, 환원시켰다니까. 신을. 그래서 신앙을. 정 통경건자유주의는 신앙의 유형이지, 신의 유형이 아니잖아요. 우리는 신학사 열심히 경건주의자 뭐니 공부하지만- 그게 한 짓이- 그렇게 한쪽으로 몰고 가서 축소시켜. 바깥은 탈종교 가고 있는 데. 결국 탈종교에도 반응하지 않았어. 21세기에도 벌어지는 일이야. 한 개인 안에서 탈반무 다 얘기할 것입니다. 결국 선배들이 하지 않은 처방작업이 필요해. 탈종교에 대한 비종교, 반종교에 대한 비종교. 그 다음에? 지금. 창궐하고 있는 무종교에 대한 비종교. 거기까지 가야해. 여기 열 거한 것은 반종교에 대한 비종교화야. 구호로 내건 거고. 비종교화인데. 신학사에서는 반종교에 대한 비종교만 찾을 수 있어요. 급한 건 무종교에 대한 비종교야. 여기서 스미스는 매우 중요한 착상이에요. 개념 대체가 다 아니지만. 목회 교회 현실에 어떻게 할 것인가. 탈종교, 무종교에 대 한 비종교. 필요합니다. 사실 반종교에 대한 비종교도 일부에요. 신학의 압도적인 다수는 반종교 를 외면했어요. 신학의 일각에서 반종교에 대해 비종교로 반응했거든요. 그걸 3장 지나가며 확인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요. 다 읽어했으니 그렇고.
신학사에서는 굉장히 당연. 계시에 관한 논의. 자연계시 특수계시. 자연의 역할. 인간도 타락 교회도 타락. 그러니 두 권의 책이 아니야. 그게 개신교 이야기잖아요. 두 권의 책은 카톨릭 동 네 이야기죠.
신 역사 다 얘기했고. 어제 읽을 때는 할 말이 많았는데. 멀리서 보니 다 좋은 얘기네.
여러분이 충분히 얘기했는데.
211페이지. 매개로서의 인간. 두 영역 간의 관계- 아주 분명하다. 인간이다. 역사가가 본다고 하잖아요. 종교가는 어떨까요? 역사가를 일부러 대립하는 거예요. 가라고 하니 가라고 했어요. 종 교인이지. 종교가 하면 프로페셔널하게 작업한다고 해도 마찬가지고. 매개고리로 인간을 보는 일 이 유감스럽게도 신학에는 없어요. 구약이든 신약이든. 교회사든. 조직신학, 교부신학 쫘라락- 인 간이 매개고리로 위치가 있어? 구원받을 놈… 그것도 이미 앞선 교리를 적용한 거야. 신버전을 인간에게 옮겨놓은 거예요. 또 다른 인간 얘기가 아니에요. 매개로서의 위치를 설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신학자체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이 성찰 대상. 그러면 지금까지 내내 인간을 제낀 거지.
그러니 이상을 얘기하고. 최대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을 돌아볼 길이 없지. 그렇게 하는 것이 종 교를- 그리고 종교가 표상하는 신을 보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인간 콤플렉스야. 이걸 부추 기는 게 은총에 대한 왜곡된 얘기야. 왜곡된 상념. 은총- 인간이 뭘 해도 안 돼. 은총의 절대성, 선행성… 지장 받는다고 생각해. 얼마나 인간을 눌러. 행위 업적… 그것과 함께 다 짓눌러. 은총 에 대한 왜곡이죠. 은총을 어떻게 읽어야 해. 종교학적 성찰로부터 배워야 하는 꺼리가 될 겁니 다. 인간. 인간 중심주의로 회귀하는 게 아니고요. 단적인 예를 볼까요? 상식적이지만 강조할 필 요가 있어. 토마스, 신학대전. 신. 15가지 나와. 무한성 보편성 필연성 산재성 쫙 나온다고. 절대 성. 당연히 나오죠. 이의 없죠? 그런데 무엇이 되었든지 좋아요. 곱하기 100배가 되어도 좋아요.
인간의 어휘들. 유한과 무한. 이런 단어를 써봐. 또- 신의 완전 불완전 써봐. 고 중세 시대, 초자 연적인- 후속적인 부정으로서 인간- 때려져. 중세로 가면?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치를 차지 하는지 소스라치게 생각하면서. 이게 철학 종교학에서 나오는 거야. 그런 궤도가 있었거든? 일어 서면 5분 안에는 못 끝나는데. 그래도 간단히 하겠습니다. 말 나올 때 해야지. 다 맥락이 있으니 까. 단답형이 아니니께.
아- 할 말이 많은데.
교리는 축적적 전통- 신과 역사. 다 연관된 얘기인데. 스미스가 다 꿰는 얘기에요. 다 생략이 다.
완전이 먼저지. 봐. 어떤 게 부정어요. 무가 부정어지. 그러니 유한이 먼저야. 우리에게 분위기 로 보면, 무한이 긍정이고 유한이… 딸리는 것 같고… 근데 개념어로는 유한이 긍정이야. 여기는 자연주의야. 지평이. 자연에 의해 유한이거든. 이게 기준이 돼. 요거로부터 유추해서 유한과 무한 의 그림이 돼. 칼뱅 루터가 다 이거 가지고 씨름했어. 토마스 아우구스투스 플라톤은 다 완전 불 완전이야. 그거 설명하려고 무한유한 초월 다 나와. 왜 언어가 이렇게 바뀌었을까? 왜 완전 불완 잔에서- 다른 것처럼 보이는- 다른 게 안 쓰인 건 아니지만, 기준언어야. 루터. 유한무한의 관계 얘기하잖아. 포함해 말아? 싸우잖아. 근세 끝자락까지 계속 가. 무한이 뭐냐? 초월로 뒤바뀌어.
초월 유한.
내가 원래 하려고 했던 이야기는. 여기서는 유한에서 무한으로 가. 초월 유한은 치워. 두고. 유 한에서 무한으로 가. 왜 바뀌는가는 말 안 해. 시대적인 배경은 뭘까. 근데- 유한에서 무한. 긍정 어와 부정어에요. 무슨 얘기냐면- 매개가 인간이라는 것에 대한 예를 역사적으로 살피기 위해 근 세를 보는데. 근세에서 확인하면 고중세도 된다는 것을 확인해야 해. 신을 묘사하기 위해 자연주 의의 지평에서 유한성을 기본구도로 한계 너머 저편, 없음으로 갔어. 그건 고중세의 무한과는 아 예 달라. 근세는 유한에 대한 종속개념으로 무한이야. 전환이 벌어졌어. 무한이라는 말은 유한을 먼저 경험해야 해. 한계 있음에 대해 한계 없음을 설정하는 거야. 어휘적으로는 반대말 같은데, 실제는 개념으로 잡힐 수 있느냐? 유한은 잡혀요. 새삼스럽게. 그건 개념이야. 잡혀야. 근데 무한 은 말은 했는데. 내 질렀는데. 몰라. 뜻은. 유한이라는 말의 뜻, 사전적 정의- 한계 없음은 아무 뜻도 아니야. 뜻을 알려면 경험해야 해. 경험 가능해? 경험하는 순간? 가다머 동원 안 해도, 경 험 순간 유한화된 무한이야. 그게 무한이야? 그게? 결국 저 무한은 개념으로 잡히지 않는, 상징 이겠지. 가리키는. 저게 표준전과에서는 반대말 표시되어있지만, 반대말이 아닙니다. 개념과 상 징. 문명사에서는 상징 먼저, 개념이 나중이지만, 지금은 다 개념으로 생각해. 사실 개념이 파생 인데. 와꾸고. 그렇게 돼버렸어. 얼마만큼 거리가 멀고 얽히고 섥히고… 학문적인 태도는 더더욱 이나… 어의의 정확성, 통용가능성하고는 쨉이 안 돼. 개념은 다 가능하지. 상징은 예쁘게 하면 다의성이지만, 사실 모호한 거야. 자. 거꾸로 개념으로부터 상징으로 후속적으로 파생시키는. 인
간이 신에 대하여 표상하는 것이 근세 와서 엮어져. 외형적으로는 근세와 고중세는 정반대 같애.
그래서 천동설->지동설이라고 해. 거기까지는 정당해요. 근데. 한발자국 더 생각할 게 있어. 과 연. 저 완전 불완전이- 위로부터 아래로부터 신학. 하잖아요. 마찬가지 여기서도. 정통주의 자연 주의 방법, 스콜라가 어떻게 교통정리 하려고 하고…했다고. 계속 있어. 그런데- 내가 그 망치로 책에서도 말했지만. 과연 위로부터가 과연 가능하냐? 묻는 거예요. 형이성학에서는 그렇게 그려 져. 근데 과연 현실적인가? 저 그림의 정체는 무엇인가. 유한 무한 연장선상에서- 상대 절대 관 계 생각해봅시다. 개념이 먼저고 유한이 먼저야. 없음의 부정어가 나중에 나왔어. 유한이 근거가 되고, 도출시킨 것으로. 근데 상대 절대는 어떨까. 그 쌍을 가지고, 완전 불완전을 그릴 논거로 주장해요. 절대 상대는 어때. 역시 무한 유한처럼 반대말이에요. 근데? 유한과 무한과 똑같이- 주고받음의 논리, 생의 방식이야. 그것의 뜻에 대해. 절대가 어떠냐. 무한과 마찬가지로, 절대는 절대로 파악할 수 없어. 똑같이 유한 무한 똑같애. 절대를 어떻게 설정했죠? 뜻도 모르고 경험도 못하는데? 무엇이 무엇을 먼저 반대했어- 유한무한은 유무니까. 유가 먼저, 무가 나중에. 근데 절대상대는 달라. 절대가 먼저고 상대가 나중에 딸려오는 거야- 라고. 고중세 패러다임으로 주장 하는 종교철학적 논의가 있어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상대는 경험할 수 있어. 절대는 경 험할 수 없어. 경험할 수 없는 것은 절대적이야. 그래서 완전과 불완전에서, 절대와 상대로 설명 하거든요? 근데 카운터가 있어. 절대를 경험하지 못해. 그래서 파악 못하는데, 반대말 설정을 어 떻게 하나- 그래서 상대의 반대말로. 근데 반대말은 뭐에요? 그야말로 상대적인 거야. 상대에 대 해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 A 를 not A로 이해하는 거야. 결국 상대부터 시작인거야. 그러고 보 니까. 절대의 절이라는 말이 부정어에요 부정어… 상대는 서로주거니 받거니인데. 절대는 끊을 절자 쓰는 거에요. 상대를 끊어냄으로. 상대에 대한 부정어. 서양어에서도 마찬가지에요.
Absolute에서 ab은 삭제한다에요. 자. 그러면 완전 불완전은? 용어상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에 서 상대의 고리를 깨는 것으로 절대, 있는 한계를 없애는 것으로 무한. 이 단계를 밟아올라가니, 첫출발을 부정하는 단계까지 가는 소급의 관계라고 가요. 그리고 그걸 신의 본성으로 봤어. 인간 에서 신으로 갔어. 앎의 과정이. 있음의 순서는 당연히 신부터게지. 그렇게 계보가 있는 거겠지 만. 앎의 순서에서는 그게 끝인 거예요. 앎의 끝이 시작이야. 신학방법론 한 친구들은 어디서 들 었는지 알아야 하는데. 이런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때문에. 방법적인 차원에서 출발이야. 이게 근 데 종교 안에서 너무 많이 억제되고 왜곡 되고. 인간 콤플렉스. 교회 안에서- 그건 너무 인간적 인 생각이야- 좋은 예. 인간이 인간적으로- 인간 아니야? 인간이 아닌 것처럼. 인간 억제의 강박 이죠. 인간이 잘났다면- 인간중심주의로 가자는 것도 아니에요. 행복한 길이 아니야. 그러면 완전 불완전 어떻게 풀까. 앎의 끝이 있음의 시작이다. 그런데 형이상학은 있음의 언어니까 있음에서 시작하는 거지. 그리고 완전한 정도에서 쫙쫙 내려오는 거지. 계층질서로. 있음의 시작인 신이 앎 의 끝자락에 있고. 우주론 존재론 거치면서, 대체가 없는 다름으로 내팽겨두지 않고, 이렇게 저렇 게 다를 때. 무수한 다름 가운데도 이런과 저런 다름. 이런 안에 묶일 수 있는 것과 저런으로 추 론돼. 형이상학적인 추론과정은 그랬어. 서로 다르잖아. 책의 종류가 여러 개 있어. 이 컵 저 책 다 다른데, 그 가운데서도, 마구 다름에도 불구하고, 개별로부터 보편으로 올라가는. 구체에서 추 상으로. 앎의 시작이 구체여도. 우주론 존재론이 내내 그런 과정을 겪었어요. 그리고 신론으로 가 요. 앎의 끝이 있음의 시작이 되는 거예요. 있음의 장르니 시작을 당연히 그런 거죠. 자. 인간 얘 기… 가 그런 것이어서.
연결시켜주는 고리- 이런 정도의 표현으로 머물 것이 아니라, 더 진지하게 새길 필요가 있겠 다.
그 뒤 종교의 격의성, 그 눈으로 보시면 될 꺼고요.
지나가면 도저히 안 되는 것이 눈에 띄나 살폈지만. 있긴 있을 터인데. 지금 눈에 띄지 않습니 다. 크흐흠.
쯥.
딱 이 한마디. 노파심.
위 3줄. 인간의 종교적 역사에서- 자의식 도래는 극적인 출현이다. 이걸 주목해가지고- 확 질 러댄 듯한 느낌을 주는 것에 대한 통찰인데. 뭘 향하는지에 대한 전략적 어휘인지- 여전히 열린 채로 책으로 덮지만- 덮어도 열린 책이야. 끝낸 것이 아니니까. 자의식의 출현이 버리지 말고 주 목할 것으로. 책 전체를 개괄하는 정리는 하지 않습니다. 텅텅 빈 구멍을 잘 채워서, 여러분의 버전을 잘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시간 관계상, 더 주고받을 이야기가 있겠다만. 수고 많으셨습 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