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의미와 의의에 대한 비판적 검토
홍 진 후*
1)
Ⅰ. 하이데거 예술철학의 난점들
Ⅱ. 하이데거의 예술철학과 작품
Ⅲ. 앎으로서의 예술
Ⅳ. 하이데거 예술론에서 작품의 특징
Ⅴ. 하이데거 예술론에서 예술가의 특징
Ⅵ. 감상자 또는 보존자의 지위
Ⅶ. 결론
Ⅰ. 하이데거 예술철학의 난점들
이 글의 주된 목적은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예술 논의들을 그 고유의 목적에 맞게 제한 규정하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하이데거의 철학 은 전후기를 통틀어 존재의 문제를 해명하는 데에 집중되어 있다. 하이데거의 평 생에 걸친 저술 활동에서, 예술 자체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전개한 문헌의
* 가톨릭대학교 강사
* DOI http://dx.doi.org/10.17527/JASA.53.0.09
양은 그리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고 볼 수 없다. 이런 제한된 분량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의 예술론(또는 예술철학)은 매우 많이 연구되고 잘 알려진 편에 속한다 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은 특히 국내에서는 하이데거 고유의 입장에 서서 그의 예술철학을 설명하고 해명하는 글이 주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1) 반면 이에 거리를 두고 외부의 시선으로 평가해 제한규정하는 연구는
1)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에 대한 선행 연구는 그 역사가 긴 만큼 양적으로도 매우 풍부하 다고 할 수 있다. 그 중 두드러지거나 참고할 가치가 현저한 연구들이라 판단되는 것 들만을 추려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하이데거의 예술철학 전반을 해명하고 보 충하는 연구는 다음과 같다. 박유정, 「하이데거의 미학」, 철학과 현상학 연구, 66집 (2015), pp. 27-51, 배상식, 「철학과 예술의 화해: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예술론」, 哲學 硏究, 76집 (2000), pp. 161-182, 염재철, 「하이데거의 예술 철학: 존재, 예술, 언어」, 예 술연구, 6집 (2001), pp. 23-61, 이선일, 「다시 써보는 예술 작품의 근원」, 현대유 럽철학연구, 7호 (2002), pp. 141-168, 이수정, 「하이데거의 예술론」, 현대유럽철학연 구, 7호 (2002), pp. 209-243. 같은 종류의 연구지만 회화작품에 초점을 맞춘 연구로 는 하피터, 「하이데거의 회화론–반 고흐의 구두회화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현대 유럽철학연구, 16호 (2007), pp. 33-59가 있다.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을 아름다움의 재 해석의 관점에서 다룬 연구로는 최상욱, 「하이데거에게서의 예술의 본질」, 현대유럽 철학연구, 7호 (2002), pp. 244-274이 있으며, 하이데거 예술철학 내의 작품존재에 대 한 연구로는 김동규, 「예술작품의 존재론적 토포스」, 현대유럽철학연구, 25호 (2011), pp. 117-145, 최상욱, 「하이데거에 있어 “위대한 예술”의 척도」, 현대유럽철학연구, 29호 (2012), pp. 231-254를 들 수 있다. 앞에서 언급된 김동규의 논문과 박유정, 「하 이데거 예술론에서 창작의 의미」, 철학논총 38집 (2004), pp. 245-257은 하이데거 예 술철학에서 창작과 창작자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예술을 진리와의 관계 안에서 다룬 연구로는 설민, 「하이데거와 예술의 진리」, 哲學 131집 (2017), pp. 73-96, 신승환, 「진 리 이해의 지평으로서의 예술」, 현대유럽철학연구 7호 (2002), pp. 275-307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국내에선 비교적으로 덜 연구되었던, 구체적 예술가와의 연관에 대해서 는 다음의 연구들이 눈에 띈다. 김경미․이유택, 「칠리다와 하이데거 그리고 공간 - 칠리다의 조각 작품에 대한 철학적 해석」, 현대유럽철학연구, 34호 (2014), pp. 1-35, 박서현, 「세잔 회화에 대한 하이데거 언명의 의미」, 철학사상, 60권 (2016), pp.
197-225. 해외의 연구는 양적으로 매우 방대하기에 한정된 지면에 언급하는 것은 무 리이다. 이에 대해서는 하이데거 연구자들이 대표적으로 참고하는 두 권위 있는 연구 서(번역서)를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라고 판단된다. O. 페겔러, 하이데거 사유 의 길, 이기상․이말숙 옮김 (문예출판사 1993), F.-W. 폰 헤르만, 하이데거의 예술
상대적으로 적다고 할 수 있다.2) 이에 이 글에서는 하이데거의 예술론이 가진 고 유의 전제들과 그 특유의 한계3)에 대해서 논하고, 이를 통해 하이데거 예술철학 의 특성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한다.
하이데거는 예술에 대해 많은 글을 쓰지는 않았지만, 평생에 걸쳐 지속적으 로 예술론을 전개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글이 일반 독자에게도 비교적 잘 알려진
「예술작품의 근원」이다. 이 외에도 하이데거는 강연이나 미발표 원고 등에서 자 신의 의견을 지속적으로 정리했다. 그의 글 목록에는 건축에 관한 강연, 조각에 대한 글, 세잔과 클레에 대한 글과 메모, 이 외 기타 예술에 대한 글들이 포함되 는데, 이것들의 분량을 다 합쳐도 하이데거 전체 저술 내의 분량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하이데거 예술철학에 대한 논의는 많 은 경우 양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예술작품의 근원」에 대한 주석이었고, 다 른 경우라도 가장 체계적인 논의가 전개된 「예술작품의 근원」은 하이데거 예술철
철학, 이기상․강태성 옮김 (문예출판사 1997).
2) 다음의 두 연구 또한 기본적으로는 하이데거의 입장을 충실히 소개하고 있으나, 하이 데거 본래의 관심영역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주제과 연결되어 비교적 새로운 시각을 제안하는 연구라고 판단되는 것들이다. 심혜련, 「예술과 기술의 문제에 관하여 - 벤야 민과 하이데거의 논의를 중심으로」, 시대와 철학, 17권 1호 (2006), pp. 7-37. 한충 수, 「하이데거의 모방미학」, 현대유럽철학연구, 42호 (2016), pp. 35-61. 심혜련의 연 구는 기술의 관점에서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을 해명하려 하고 있다. 하이데거와 벤야 민이 거론하는 “기술”은 실제 삶의 영역 에서는 한편으로 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철학 적 주제로서의 기본적인 접근방식은 완전히 상이하다. 심혜련은 이런 상이한 기술이 해를 비교하면서, 당대의 사회와 정치에 대한 두 학자 각각의 입장으로 인한 예술관 의 차이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미술관에서의 전시, 대중매체의 발달 등에 대한 입장 차이가 제시되면서 한편으로 드러나는 것은, 예술의 공공적 성격에 대한 두 학자의 태도이다. 한충수의 연구는 전통적인 하이데거 해석에서 완전히 반대되었던 모방의 개념을 다시 끌어들여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을 해석하고 있다. 그는 보다 근원적인 “진 리의 미메시스”가 하이데거 예술철학 안에서 작동한다고 보고, 하이데거를 새로운 방 식으로 모방 이론에 연결시키려 시도하고 있다.
3) 여기에서의 한계는 모자람을 뜻하는 한계가 아니라, 영역 제한으로서의 한계(limit)를 뜻한다.
학의 핵심문헌으로 여겨져 왔다.
하이데거의 ‘예술론’ 또는 ‘예술철학’을 이 「예술작품의 근원」으로부터 읽어 내려는 시도는 항상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직면하게 된다. 우선 첫 번째로, 단토 (Arthur Danto)의 명민한 지적처럼 우리는 이 하이데거의 ‘예술철학’ 또는 ‘예술 론’을 읽어내기 위해서, 하이데거의 철학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4) 이와 같은 난점은, 이 ‘예술철학’이 우선적으로 ‘철학’적 작업이라는 데에서 온다. ‘철학’
은 개념의 철저함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고 있고, 그 철학적 체계 내의 정 합성이 매우 중요한 학문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 철학적 작업으로서의 예술철학 은 필연적으로 그 철학자의 지평 안에서 이해될 때에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예술’이라고 칭하고 접하는 대상들은 그 자체로 온전한 ‘예술’일 뿐 철학은 아니라는 점이다. 반면 ‘예술철학’
은 예술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기본적으로 예술철학과 무관 하게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이데거 또한 「예술작품의 근원」에 서 예술계 또는 문화산업에 개입해 그것들에 대해 대화를 요청하려는 것이 아니 다. 하이데거는 예술을 주제로 삼아 철학적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는 현장으로서의 예술계와 예술철학이라는 사유 간의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존재 한다.
두 번째로 하이데거는 이 「예술작품의 근원」을 통해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 고 있다. 하나는 근대적 감성론으로 제한된 미학에 대한 비판이다.5) 하이데거는
4) A. 단토, 일상적인 것의 변용, 김혜련 옮김 (한길사 2008), p. 159.
5)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에 있어서 그 대결/극복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바로 미학(Ästhetik) 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은 “미학”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 런데 하이데거가 반대한 미학은 하이데거 이전 세대까지의 미학이다. 하이데거에게 있 어서 그의 바로 전 세대, 니체에까지 이르는 철학은 ‘근대적’인 것인데, 이 ‘근대적’이라 는 다소 모호한 규정은 실질적으로는 서구의 전통철학과 근대 이후의 인식론적 경향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 된다. “미학의 극복”에 대해 하이데거가 매우 명료하고 직접적으 로 언급하는 구절을 다음의 곳에서 찾을 수 있다. M. 하이데거, 철학에의 기여, 이선 일 옮김 (새물결 2015), p. 702. 이런 태도는 사실 매우 폭력적인 일반화라 볼 수도 있 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초기 그리스 이후, 전통철학의 시대를 거쳐 근대까지의 철학사
자신 이전의 미학적 관심(예술작품을 전통철학적 개념인 질료-형상을 통해 고찰 하는 점, 천재론 등)을 부정하고 그것이 근대적 사고의 결과라는 점을 들어 극복 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다른 하나는 하이데거 자신이 제시하는 예술에 대한 철 학적 논의의 개진이다. 하이데거는 예술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고 본다. 물 론 이는 하이데거 특유의 존재론에 기인한다. 반면에 작품은 사라질 수도 있다고 본다.6)
우리가 세 번째로 주의해야 하는 점은, 이 「예술작품의 근원」이 구체적인 개별 작품에 대해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예술작품의 근원」에는 몇 가지의 예술작품이 직접적으로 언급된다. 그중에서도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낡은 구두”7)에 대한 분석은 가장 유명한데, 하이데거는 기본적으로 이
(여기에는 미학사가 포함된다)는 모두 일정한 형이상학적 경향을 피할 수 없으며 이 런 경향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본다. 그렇기에, 하이데거에게서 “미학”은 그것이 전 통철학적 구도 안에서 전통철학적 개념들을 빌려오는 한, 모두 동일한 한계, 즉 형이 상학적 경향을 띄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당대까지의 상 이한 미학적 연구들을 부차적인 연구로 보고, 이것들보다 근원적인/존재론적인 차원에 서 예술을 사유하는 ‘예술철학’을 전개하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미학에 대한 입장에 대해서는 다음 연구를 보라: 박유정, 「하이데거의 미학」, pp. 27-51, 이수정, 「하이데거 의 예술론」, pp. 209-243. 하지만 하이데거 이후로도 다양한 미학이론이 전개되었고, 하이데거의 논의가 이와 같은 모든 이론에 대한 비판을 담지는 못하기에, 그가 비판 한 ‘미학’을 이 글에서는 ‘근대미학’이라는 말로 대치했다. 물론 이 또한 다양한 근대미 학의 경향을 하나로 묶으려는 지나친 동일화다. 이와 같은 지나침은 하이데거의 미학 비판에 대한 자세한 검토를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을 것이나, 연구의 범위나 지면상의 제약으로 이에 대한 본격적 논의는 이후의 연구를 기약하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한다.
6) M. Heidegger, “Die Kunst im Zeitalter der Vollendung der Neuzeit”, in: Besinnung, GA, Bd. 66 (Frankfurt/M: Vittorio Klostermann 1997), pp. 30-40.
7) 「예술작품의 근원」에서는 분석의 대상이 되는 “낡은 구두” 그림이 정확하게 어떤 것 인지는 적시되지 않는다. 하이데거의 「예술작품의 근원」을 분석하는 저술들에서 빈번 하게 등장하는 “낡은 구두” 삽화는 샤피로의 주장에 따라 1886년에 그려진 “한 쌍의 구두”로 추정된 것뿐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다음을 보라. M. Schapiro, “The still life as a personal object –A note on Heidegger and van Gogh”, in: Theory and philosophy of art: style, artist, and society (New York: George Braziller 1994), pp.
작품에 대한 설명에서 그 ‘구두’ 그림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관심하다. 그 독해에 는 하이데거의 ‘예술’, 그리고 ‘작품’에 대한 자신의 사유가 전개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작품론이나 작가론을 발견하려는 의도로 읽혀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예술작품의 근원」이 관심을 두는 대상이 매우 좁다는 점 또한 이 글을 해석하기 어렵게 만든다. 하이데거는 이 글에서 시(詩), 건축, 회화작품 등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예술의 매우 좁은 영역만을 대변한다. 그렇다면 이에 관해 「예술작품의 근원」이 “예술에 대한 일반론을 제시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 를 제기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미리 앞서서 답변하자면, 대답은 “그렇다”이다. 하 지만 여기서 이 긍정은 예술이론으로서 라기보다는 예술철학적 입장에서의 긍정 이다. 즉 하이데거의 철학적 작업이라는 틀 안에서는 이 물음에 긍정으로 대답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하이데거가 모든 예술 장르와 모든 예술 적 시도들을 두루 인정하고 고민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 차이점에 대해 서는 뒤에 다시 다루어질 것이다.
지금까지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을 검토하는 데에 제기되는 난점들에 대해 간 단히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이런 난점들에 유의하면서, 하이데거의 예술론이 가지 는 제약들을 명확하게 하려고 한다. 하이데거는 예술가가 아니었다. 분명히 그는 철학자였으며, 예술작품에 그는 감상자로서 참여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예 술에 대한 철학적 접근 이외의 것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하이데거는 매우 제한적인 예술작품들만을 평하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하이데거 가 자신의 철학적 작업에 필요한 작품들만을 선별했다는 뜻이 될 수도 있지만, (선별이 임의적이라는 것과는 구분되는 의미에서) 그의 이론이 모든 예술작품이 나 예술현상에 두루 적용해 읽어낼 수 있는 만능 이론이 아니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하이데거 예술철학 고유의 특성과 제약을 명확히 할 때, 오히려 하이데거의 작업은 예술작품에의 접근방법을 제시하는 하나의 뚜렷한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하이데거 예술철학에 대한 간략한 설명으로부터 이 작업을 시
136-138.
작해보자.
Ⅱ. 하이데거의 예술철학과 작품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이 가진 특징들을 명확히 제시하기에 앞서, 우리는 먼 저 하이데거에게 ‘예술철학’이라고 부를만한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해서 논해보아 야 한다.
먼저 주목해야할 것은 하이데거의 “「예술작품의 근원」이라는 논문은 결코 일종의 ‘예술철학’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푀겔러(Otto Pöggeler)의 주 장이다.8) 이런 입장에 따르면 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들은 단지 예술작품을 그 소재로 삼을 뿐, 하이데거의 사유의 일부로서, 그저 그의 철학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예술이라는 주제에 대한 접 근 또한 하이데거에게 있어서는 순수하게 철학적 차원에서만 고려되고 있다는 해 석을 함축하고 있다. 반면에 폰 헤르만(Friedrich-Wilhelm von Herrmann) 은 “미 학에 대한 거절이 예술철학 자체에 대한 거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예술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숙고’는 예술의 본질에 대한 하나의 철학적 물음, 즉 일종의 예술철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9)라고 주장한다.
사실 이 두 주장은 모두 일부분 옳은 면이 있다. 하지만 폰 헤르만의 설명 이 조금 더 포괄적이다. 예술철학이 반드시 근대미학이나 미술이론을 포함하는 것이거나, 이와 동일한 것으로 이해될 필요는 없다. 앞서 설명했듯이, 하이데거는 이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철저하게 자신의 사유의 틀 안에서 자리 잡고 철학적 작업을 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는 분명히 철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 시 이것을 예술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단지 이 때 예술철학은 예술의 기예적 측면을 분석하거나 평가하는 것, 또는 감각적 아름다움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이
8) O. 페겔러, 하이데거 사유의 길, p. 236.
9) F.-W. 폰 헤르만, 하이데거의 예술철학, p. 22.
데거 고유의 기획에 따라 진리(Ἀ-λήθεια)에 대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뿐이 다.10) 하지만 그의 “철학적 예술철학”이 현실세계의 예술과 예술계에 대해 전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 본인은 그의 예술론을 분명히 당대 의 현실적-역사적 상황과 연결시켜 논의했다. 그 증거를 우리는 여러 곳에서 발 견할 수 있다. 우리는 우선 그가 근대적 예술에 대해 비판하는 지점, 키치(Kitsch) 에 대한 평가 절하, 표현(Ausdruck), 설치(Anlage)에 대한 비판 등에서 간접적이 지만 현실적인 예술의 상황에 대한 개입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11)
그렇다면 우리는 또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철학이 예술을 규정한다는 것이 정당한가? 그리고 예술과 철학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가? 예술과 철학의 관계는 현장의 예술가와 직업적 철학자의 간극만큼이나 멀기도 하다. 하 지만 서구의 철학은 전통적으로 끊임없이 예술을 정의내리고 예술의 본질에 개입 해 왔다. 그러므로 예술이라는 독립적인 영역(또는 독립적인 것으로 보이는 영역) 을 철학이 개입해 규정하고 논하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 정당한가에 대한 물음도 진지하게 접근되어야만 한다.
앞서 언급했듯, 하이데거는 예술을 주제삼아 철학적 작업을 하고 있다. 그렇 다면 예술철학적 작업은 그 자체로 철학이지, 예술은 아닌 것이다. 물론 예술 또 한 철학은 아니다. 하지만 이 둘은 전혀 다른 역사적 흐름 안에서 서로를 분명히 가리켜 온 것이 사실이다. 이 관계에 주목했던 소수의 철학자 중 하나인 단토에 의하면, “예술이 진정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철학이 취하 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잘못된 형식의 물음”이다.12) 그가 이런 지적을 하는 이유
10) 이에 대해 다음을 보라. M. Heidegger, “Der Ursprung des Kunstwerkes”, in: Holzwege, GA. Bd. 5 (Frankfurt/M: Vittorio Klostermann 1977), pp. 67-70. 다음의 언급도 참조 할 것. 하이데거, M., 「예술작품의 근원」, 숲길, 신상희 옮김 (나남 2007), p. 119:
“미적인 것은 진리의 생기함에 속해 있다. 미적인 것은 마음에 들든 아니 들든 그 흡 족함의 여부에 단지 상대적으로 달려 있는 것이 아니며, 또 이러한 흡족함의 대상으로 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이 글에서 「예술작품의 근원」에 대한 번역은 기본적으로 신상희의 것을 따르나, 경우에 따라 불가피한 경우 일부 수정하였다.
11) M. Heidegger, “Die Kunst im Zeitalter der Vollendung der Neuzeit”, pp. 30-40.
는 철학이 어떤 것을 다른 것 보다 더 나은 예술로 규정하는 것은 철학이 할 일 이 아니며, 철학의 월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술을 본질로부터 규정하려고 하면, 이는 필연적으로 이 본질을 더 잘 구현한 예술작품과 덜 구현한 예술작품 으로 구분하게 되고, 이는 예술작품의 우월함과 열등함을 규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단토에게는 예술이 제기한 철학적 물음에 응답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이다. 단토가 예술철학적 작업을 시작한 이래로 그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였던, “양자 사이에 흥미로운 지각적 차이가 존재하지 않을 때 예술작품과 예 술작품이 아닌 어떤 것 사이의 차이를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13)라는 주제는 분 명히 철학적 답변을 요하는 물음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 물음은 철학이 아닌 예술에 의해 제기된 물음이다.
단토는 예술철학이 니체와 하이데거를 제외하고는 헤겔 이후 불모지와 같았 다고 언급하며,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한 철학적 이해에 도달하고자 했던 예술은 아주 많이 있었다”고 주장한다.14) 즉 그에 의하면 헤겔 이후의 시대에는 오히려 예술이 철학에 물음을 던지고 응답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며, 예술계 가 예술의 자기규정성을 획득하기 위해 철학적인 물음들을 예술로 표현하려 노력 했다는 것이다. 그는 “예술계의 구조가 정확하게 말해서 ‘예술을 다시 창조하는’데 있는 게 아니라 명백히 예술이 무엇인지를 철학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 예술을 창조하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15) 묻는다. 물론 모 든 예술이 이런 주장에 부합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가 주장하고 싶은 바의 핵심은 철학이 예술을 자신의 사유거리로 삼는 것보다는, 예술이 철학적 물음을 제기하는 경우가 헤겔 이후의 시대에는 더 많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전 시대 에는 “철학적 사변의 풍요가 예술생산의 풍요와 상응하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16)
12) A. 단토, 예술의 종말 이후, 이성훈 옮김 (미술문화 2004), p. 93.
13) A. 단토, 예술의 종말 이후, p. 93.
14) A. 단토, 예술의 종말 이후, p. 88.
15) A. 단토, 예술의 종말 이후, p. 87.
16) A. 단토, 예술의 종말 이후, p. 88.
다시 하이데거의 입장으로 돌아와서, 그의 작업을 단토의 주장과 비교해 보 자.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예술에 대해 직접 정의를 내리려 하지 않 는다. 이런 태도는 그가 ‘예술’이라는 개념에 대해 취하는 고유의 철학적 입장에 의한 것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예술은 고대 그리스적 의미에서의 테크네(τέχν η) 개념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17) 하이데거는 이 개념을 역사학적 맥락과 는 구별되는 방법으로, 그의 철학 안에 들여온다. 그러므로 예술개념은 하이데거 에게 있어서 오히려 철학적 개념으로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 실제의 예술활동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어야 하는 개념은 아니다. 오히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실 제의 예술활동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는 개념은 ‘작품(Werk)’이라는 개념이다.18) 그렇기 때문에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예술’의 본질적 의미를 밝히는 것과, ‘작품’에 대해서 사유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작품에 대하여 하이데거가 무엇을 말했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예술작품은 오로지 “위대한 예술작품”만이 고려의 대상이 되 는 것이다.19) 그런데 이런 제한규정은, 한편으로는 단토의 지적을 통해 우리가 검 토했던 바와 유사하게 예술작품의 우열을 논하려 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는 여지 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런 작품 간의 가치의 차별은, 결과적으로 보다 예술의 본질을 잘 구현한 작품을 예술작품으로 규정하려는 경향으로 방향 잡을 것이라는 우려가 함께 제기된다. 하지만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이 “위대한 예술”
이라는 것이 그가 제시하고자하는 고유의 철학적 방향성에 부합하는 것을 가리킨
17) M. Heidegger, “Der Ursprung des Kunstwerkes”, p. 47 (「예술작품의 근원」, p. 84), M. Heidegger, “The provenance of art and the destination of thought”, trans. by D.
Latsis, in: Journal of the British Society for Phenomenology, vol. 44, no. 2 (2013), p. 120.
18) M. Heidegger, “Die Kunst im Zeitalter der Vollendung der Neuzeit”, p. 30.
19) M. Heidegger, “Der Ursprung des Kunstwerkes”, p. 26 (「예술작품의 근원」, p. 52).
이 부분에서 하이데거는 정확하게는 “위대한 예술(der großen Kunst)”이란 표현을 쓴 다. 맥락상 이 부분에서 ‘예술(Kunst)’은 ‘예술작품(Kunstwerk)’이라는 뜻으로 읽혀야 한다.
다는 뜻이 있음에도 주목해야만 한다. 이는 비단 하이데거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사유에 보다 부합하는, 더 거칠게 말해 철학 적이고 사변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작품들을 “위대한 작품”이라고 언급하는 경향이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20)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위대한 예술”은 하이 데거 철학의 고유한 기획에 부합하는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
하이데거는 1930년대에 예술에 대한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다. 「예술 작품의 근원」 뿐만 아니라 시(詩)에 여러 편의 글들이 이때부터 작성된다. 이때 하이데거의 관심사는 예술을 존재진리가 드러나는 장으로 해석하는 데에 있었다.
그러므로 예술에 대한 관심은 그것이 진리 드러냄의 탁월한 방식이라는 입장 아 래에서만 유효한 것이었다.21) 그러므로 이 예술론(또는 예술작품론)의 대상이 되 는 작품 선택의 기준은 자신의 고유한 철학적 기획에 따른 기준, 즉 존재진리의 장으로서 기능하는 예술작품에 부합하는지 여부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 론 이를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선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철학자 각각의 고유성을 인정하고, 예술가 각각의 고유성을 인정하듯이, 하이데거의 철학적 기획 이 선별하는 작품은 반드시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이는 곧 그 예술론의 고유 한 성격을 제시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을 무엇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예술작품의 어떤 점을 철학적 작업에 끌어들이려 하는지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하이데거
20) 예를 들어, 들뢰즈의 경우도 “위대한 화가가 회화사를 요약하는 방식은 결코 절충주의 에 의한 것이 아니다”라는 표현을 쓰지만, 그 말이 예술작품 간의 가치의 차이와 차별 을 전제하고 사용된 것은 전혀 아니다. G. Deleuze, Francis Bacon. logique de la sensation (Paris: Éd. du Seuil 2002), p. 127.
21)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을 진리문제와 연결시켜 논의한 연구로는 다음을 참조. 신승환,
「존재의 역동적 움직임으로서의 예술의 진리-“진리”개념에 대한 탈형이상학적 이해 시도」, 현대유럽철학연구, 2호 (1997), pp. 163-233, 신승환, 「진리 이해의 지평으로 서의 예술」, 현대유럽철학연구, 7호 (2002), pp. 275-307, 오병남, 「예술과 진리」, 철 학과 현실, 86호 (2010), pp. 166-187, 이기상, 「존재진리의 발생사건에서 본 기술과 예 술」, 현대유럽철학연구, 2호 (1997), pp. 131-181, 한상연, 「사물, 예술, 존재 - 하이데 거의 사물 개념에 대하여」, 현대유럽철학연구, 20호 (2009), pp. 101-132.
스스로의 정의에 따르면, “예술의 본질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존재자의 진리가 작품-속으로-스스로를-정립하고-있음(das Sich-ins-Werk-Setzen der Wahrheit des Seienden)’”. 이 정의에 따르면, 예술작품은 그 안에서 진리가 드러나는 것으 로 존재할 때에 예술작품이 된다. 그러면서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을 논하는 데에 있어서 아름다움이 중심이 되면 안 되며, 예술작품의 본질에 진리를 놓아야 한다 고 주장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지금까지 예술은 대개 아름다운 것(das Schöne)이나 아름다움(das Schönheit, 美)과 관계하는 것으로 여겨졌을 뿐, 진리 와의 연관 속에서는 전혀 숙고되지 않았다.”22) 이런 비판과 함께 하이데거는 존 재의 진리가 드러나는 장으로 예술작품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이 예술작품에 대한 정의를 그저 원칙적으로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예를 들어 이 정의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예술작품의 근원」
안에서 드러내 보인다.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근원」중 앞부분에 속하는 “사물과 작품”에서 직접 반 고흐의 구두를 분석하면서, 도구의 도구성에 대한 의미를 밝혀 낸다.23) 하이데거는 이 과정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우리는 작품으로 하여금 도구가 무엇인지 말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무엇이 작품 속에서 작용하고(am Werk) 있는지가 마치 금새라도 손에 잡힐 듯 백 일하에 드러났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재자의 밝혀짐(Eröffnung, 개시)이며, 다시 말해 진리의 일어남(das Geschehnis der Wahrheit)이다.24)
그러므로 이를 통해 하이데거는 작품 안에서 진리가 드러나는 예를 직접 밝 혀 보인 셈이다.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을 자신의 고유한 철학적 작업을 통해 새롭 게 규정하려고 하며, 이는 철학적 기획으로서 정당하다. 하지만, 이 철학적 기획이
22) M. Heidegger, “Der Ursprung des Kunstwerkes”, p. 21 (「예술작품의 근원」, p. 46).
23) 이 글의 목적 상 도구성 분석의 내용 보다는 그 결과가 중요하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 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다.
24) M. Heidegger, “Der Ursprung des Kunstwerkes”, pp. 23-24 (「예술작품의 근원」, p.
49).
곧 예술작품 일반에 대한 논의는 아니다. 이 때문에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은 모든 예술작품을 설명할 수 있는 ― 그리고 모든 예술작품을 설명하려고 하는 ― 이론 화 작업은 아니다. 바로 이와 같은 특성 때문에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은 분명히 선별적 대상을 갖는다. 물론 이런 제약은 새로운 예술작품이나 새로운 예술사조 가 등장한다고 해서 제한되는 그런 성격의 제약이 아니라, 그의 철학적 기획의 고유한 방향성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성격의 것이다.
이제 작품과 하이데거 철학의 관계가 간략하게 해명되었으므로, 다음으로는 하이데거가 예술 자체를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검토해 본다.
Ⅲ. 앎으로서의 예술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에서 이 예술 개념은, 단순히 실제 현장에서의 예술작 품 등을 가리키는 차원의 낱말이 아니라, 하이데거의 철학적 구도 안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예술이 테크네(τέχν η)이며, 기술(Technik)이 아니”25)라고 주장한다. 이 말의 뜻은 그리스 말 테크네 가 고대 그리스 인들에게 실제로 드러내 보여 주었던 바로 그 의미를 가장 가깝 게 담아낼 수 있는 현대어가 ‘예술’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테크네라는 말이, 그 어원적인 변천사의 직접적인 연관에도 불구하고 기술이라는 현대 독일 낱말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이 테크네라는 낱말이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미했던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검토해보자. 하이데거는 “테크네는 수공업과 예 술을 뜻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오늘날의 의미에서의 기술적인 것을 의미하지도 않았고, 그것은 그 어디에서도 결코 실천적 행위의 한 방식을 의미하지 않았”26) 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하이데거는 이 테크네라는 그리스 말이 역사 25) M. Heidegger, “The provenance of art and the destination of thought”, p. 120.
26) M. Heidegger, “Der Ursprung des Kunstwerkes”, p. 46 (「예술작품의 근원」, p. 83).
학적으로는 ‘수공업’과 ‘예술’이라는 두 서구어의 공통의 어원이 되었다는 점을 인 정한다. 이는 일견 서로 배치되는 주장으로 보인다. 하이데거는 그렇지만 그 낱말 의 본래적 의미를 따져볼 때에는, 이 고대 그리스의 테크네라는 말이 유럽인들이 사용하는 통속적인 의미에서의 ‘수공업’과 ‘예술’이라는 말에 완전히 동일한 뜻으 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다시 지적한다.27) 이 지적을 통해 하이데거는 서구 의 번역어로서의 ‘수공업(Handwerk)’과 ‘예술(Kunst)’이라는 말이 공통적으로 담 고 있는 실천적 행위로서의 특성은 고대 그리스의 낱말 테크네가 뜻하던 바가 아 니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점에 대해 의문이 생길 수 있 다. 하이데거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테크네라는 낱말은 그리스 이후 세대 의 유럽인들에 의해, 그리고 이후 2000년이 넘도록 완전히 잘못 번역되어 왔다는 말인지, 그리고 만약 사태가 그러하다면 왜 이런 오역이 이루어졌는지가 설명되 어야 한다. 이 점에 대한 해명을 위해 먼저 하이데거의 설명을 살펴보자.
오히려 테크네라는 낱말은 앎의 한 방식을 지칭하는 말이다. 여기서의 ‘앎 (Wissen)’이란, ‘보았음(gesehen haben)’을, 즉 넓은 의미에서의 ‘봄(Sehen)’
을 뜻하며, 이러한 ‘봄’은 현존하는 것(das Anwesende, 현존자)을 그것 자 체로서 받아들이며 인지하는 행위(vernehmen)를 가리킨다. 앎의 본질은 그 리스적 사유에서는 알레테이아(ἀλήθεια)에, 즉 존재자의 탈은폐(Entberg- ung)에 깃들어 있었다. 알레테이아는 존재자와 관계하는 모든 태도를 지탱 하면서 이끌어준다. 현존하는 것을 그것 자체로서 은닉성으로부터 이끌어 내서 고유하게 그것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는 비은폐성 가운데로 데려오는 행위(aus der Verborgenheit her eigens in die Unverborgenheit seines Aussehens vor bringen)가 하나의 [탁월한] 산출행위인 한에 있어서, 이렇 게 그리스적으로 경험된 앎으로서의 테크네는 존재자를 산출하는 하나의
27) 물론 여기서 예술은 앞서 인용된 “예술은 테크네이다”라는 언술과 배치되는 것으로 읽혀서는 안 된다. 여기서 예술은 그리스 말 테크네에서 파생되어 기술적으로 이해되 어 온 전래된 ‘예술’개념이다. 그러므로 이는 “예술은 테크네이다”에서 하이데거가 의 미하는 바의 예술개념과는 다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산출행위(Her-vor-bringen)이다. 테크네는 결코 만듦(Machen)의 행위를 의 미하지 않았다.28)
하이데거는 테크네라는 낱말을 ‘앎’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여기서 이 ‘앎’은 역사 깊은 서구의 지성사적 연관인 앎과 봄의 일치를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된 말 이다. 즉 여기서 설명되는 ‘앎’은 실제로 있는 사물을 시각적으로 바라보고 그 사 물을 있는 그대로 마음으로 파악하여 아는 것을 의미하는 바로 고대 그리스적인 (그리고 특히 철학적인) 의미로 제시되는 것이다.29) 그렇기 때문에 앎의 본질은 그리스 말 알레테이아, 즉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게 한다”는 의미에서의 진리에 있다고 언급되는 것이다. 여기서 인지하는 행위, 즉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만든다는 의미에서의 봄은 곧 진리라는 말과 의미상으로 매우 밀접하게 관계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탈은폐로서의 진리를 감추어진 것을 시야 안으로 가져오 는 행위로서, 즉 하나의 산출행위로 이해한다. 이 산출행위(hervorbringen)는 소크 라테스적 전통을 암시하는 한편, 탈은폐라는 의미의 진리이해를 다시 한 번 반복 하는 용어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테크네는 손기술로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여기서 테크네는 어떤 감추어져 있던 것을 시야 안으로 데려와 그것에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 아는 것, 즉 진리의 드러 냄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경우 테크네는 일차적으로 눈으 로 보고, 마음으로 아는, 인식과 이해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 때 문에 하이데거는 테크네를 단순히 ‘수공업’과 ‘예술’로 번역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제 앞서 제기된 문제, 즉 이 번역이 전적으로 틀렸는지의 문제에 답할 수
28) M. Heidegger, “Der Ursprung des Kunstwerkes”, pp. 46-47 (「예술작품의 근원」, pp.
83-84). 번역문에서 대괄호 안의 내용은 옮긴이의 보충이다.
29) 실제로 고대 그리스어 동사 “εἴδω”는 본다는 1차적 의미와 더불어 안다는(즉 마음으 로 본다는) 뜻도 가지고 있는 낱말이다.
있게 되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테크네를 ‘수공업’과 ‘예술’로 번역하는 것은, 테 크네라는 말로 그리스 인들이 가리켰던 표면적 의미만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 러므로 이 번역은, ‘실천적 행위’라는 표면적이고 파생적인 뜻만을 본다면 분명히 틀렸다. 하지만 한 편으로 ‘수공업’과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본래 그리스인들 이 체험했던 고대의 경험 그대로 파헤쳐 옮겨 본다면, 이 번역은 전적으로 틀린 것이 아니기도 하다. 실제로 “그리스인들이 수공업과 예술을 지칭하기 위해 테크 네라는 동일한 낱말을 사용하였으며, 또 테크니테스(τεχνίτης, 장인)라는 동일한 낱말로서 수공업자와 예술가를 지칭하였다는 사실”30)에 대한 하이데거의 언급만 보아도 이 번역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그가 주장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앎이 선행되는 행위로서 테크네를 이해하여, 먼저 어떤 형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행위자로서의 장인과 예술가를 떠올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 리는 하이데거가 테크네라는 그리스 말에 있어서 그 본래적 바탕에 있는 의미 (앎)가 표면상의 의미(‘수공업’, ‘예술’, ‘실천적 행위’)보다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의 정리를 통해 테크네로서의 예술 개념에 대한 의미가 간략히 밝 혀졌다. 이제는 이를 토대로 하이데거의 예술론에서 작품, 예술가, 감상자를 어떻 게 규정하는지에 대해 명확히 해보도록 한다.
Ⅳ. 하이데거 예술론에서 작품의 특징
앞서 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을 언급함에 있어 “위대한 예술”에 대해서만 논의 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제시한 바 있다. 여기서는 하이데거가 읽어내고자 하는 작 품(즉 위대한 예술작품)이 어떤 특성을 가지는 것이며, 어떤 작품들을 읽어낼 수 있는지 명확히 드러내 보기로 한다.31)
30) M. Heidegger, “Der Ursprung des Kunstwerkes”, p. 46 (「예술작품의 근원」, p. 83).
31) 편의상 이 절에서는 ‘작품’이란 개념을 하이데거의 표현 “위대한 작품”에 한정시켜 논
하이데거는 작품을 진리가 드러나는 곳으로 보았는데32), 이런 접근방법의 특성에 따르면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창작물이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그 작품 안 에서 어떤 의미를 읽어낼 수 있어야만 한다. 작품은 진리를 드러내는 터전이 되 어야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전제는 하이데거가 예술을 기본적으로 시(詩) 적인 것으로 이해하려는 태도와도 연결시켜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창작물이 읽어낼 아무런 의미 따위는 없는 채로 감각적 쾌감만을 만족시키는 것이라면, 하 이데거에게 있어서는 이는 작품이 될 수 없다.33) 하이데거 또한 이 부분을 명확 히 하는데, 그에게 있어서 감정의 동요는 예술과 전혀 관계없는 것이다. 예를 들 어 다음의 인용에서 하이데거는 바그너(Richard Wagner)를 비판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하이데거가 음악에 대해 글을 남기지 않은 이유를 추정할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34)
의하기로 한다.
32) 예술작품을 진리라는 기준으로 읽어내는 하이데거의 독특한 해석방식의 의의에 대해 서도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이미 국내 학계에서도 많은 논의가 이루어진 점, 그리고 하이데거 예술론의 한계를 명확히 하려는 이 논문 의 범위 상 논외로 하였다. 관련된 연구자료 관해서는 각주 21를 보라.
33) 구체적으로 어떤 기준을 적용해 작품을 구별해 낼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를 보라: 최상욱, 「하이데거에 있어 “위대한 예술”의 척도」, pp. 231-254. 이 연구 는 “존재의 의미”를 드러내야만 “위대한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하이데거의 기본 입장에서 더 나아가 보다 구체적으로 작품존재 가능성에 대해 논한다.
34) 폰 헤르만은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에서, 하이데거가 그의 예술 논문에서, 주로 조형 예술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반해 음악 예술작품에 대해 다루지 않은 것이 거듭 유감 스럽다고 언급한다 (F.-W. 폰 헤르만, 하이데거의 예술철학, p. 26). 하지만 음악 이 외에도 하이데거가 다루지 않은 예술의 분야는 매우 많다. 하이데거가 음악에 대해 다루지 않은 것은, 뒤에 이어질 인용문에도 나와 있듯이 일부 음악이 하이데거의 기 준으로는 작품이 될 수 없다는 사실과 관련해 이유를 추정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음악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여지를 포함하는 것이 어떤 방식에서 가능한 지, 그리고 그런 경우 음악은 어떤 시대의 어떤 것이 가장 하이데거적인 의미에서 작 품이 될지 따로 논해볼 문제이다. ‘악극’에 봉사하는 것으로서의 바그너의 음악이 어 떤 의미를 담지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이를 통해 일정한 진리의 터전으로 기능하지 못한다면, 고전음악에서는 작품이 될 가능성이 있는 대상이 존재하기 상당히 어려운
오히려 음악이 이러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술 전체에 대한 근 본적인 입장이 갈수록 미학적인 성격을 띠었던 데 근거가 있다. 즉 음악이 우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예술을 한갓 감정 상태로부터 파악하고 평가하는 예술관과, 감정 상태가 제멋대로 부글부글 거품을 내면서 끓어오르는 감정 으로 갈수록 더 야만화되어가는 것에 근거가 있는 것이다.35)
하이데거는 바그너를 비판하면서 그의 음악은 갈수록 미학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고 언급한다. 물론 여기서 음악은 바그너의 ‘종합 예술작품 (Gesamtkunstwerk)’, 즉 ‘악극(Musikdrama)’에 종사하는 부분으로서의 음악이며, 여기서의 미학은 비판의 대상인 근대미학이다.36) 하이데거는 감정에 대한 단순한 도취, 그리고 이를 통한 ‘생’의 구원에 몰두하는 음악의 경향을 강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음악을 예술로 파악하는 바그너와 당대의 경향에 대해, 하이데 거는 예술 이해에 대한 미학적인 성격의 강화로 파악했다. 그렇기에 이런 대상들, 즉 정동을 고취하는 데에 몰두하는 대상들은 하이데거에게는 예술작품이 될 수 없는 것이다.37)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35) M. 하이데거, 니체Ⅰ, 박찬국 옮김 (길 2010), p. 108. 번역본의 오식은 수정하였다.
36) 미학을 감정상태로 보는 입장에 대한 부연설명이 같은 책에 언급되어 있다. “예술의 아름다움에 대한 성찰은 이제 오직 인간의 감정 상태, 즉 아이스테시스(αἴσθησις)와 관계하게 된다. 따라서 근대의 수 세기 동안 미학이 그러한 것으로서 의식적으로 수 행되고 근거지어진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일찍이 준비되 어왔던 고찰 방식을 가리키는 ‘미학’이라는 명칭이 출현하게 된 근거이기도 하다. 논 리학이 사유 영역에서 행하고 있는 역할을, ‘미학’은 감성과 감정 영역에서 행하는 것 이 된다. 따라서 그것은 ‘감성의 논리학’이라고 불린다” (M. 하이데거, 니체Ⅰ, p.
103). 이런 지적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으나, 하이데거는 일관되게 미 학을 감정상태에 대한 것으로 여기고, 근대적인 경향을 드러내는 것으로 본다.
37) 또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도 감정에 대한 부정적 언급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것들이 아무리 질적으로 탁월한 것으로 평가되고, 그것들이 주는 감명이 아무리 크더 라도, 또 그것들의 보관상태가 아무리 좋고, 그것들에 대한 해석이 아무리 정확하다 하더라도, 박물관 가운데로 옮긴다는 것은 그것들을 그것들 자신의 세계로부터 빼내
오히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예술은, 가장 오래되고도 본질적인 진리 발견 의 터전이다. 예술에서 하이데거는 지속적으로 형이상학화된 철학의 비판과 현대 문명의 기술비판, 그리고 이에 대한 극복가능성마저도 발견하려고 한다.38)
그렇다면 하이데거는 어떤 예술작품을 작품이라 여기며, 어떤 대상을 작품 (즉, 위대한 작품)이라고 여길 것인가. 다시 거칠게 말해 어떤 작품을 그의 예술 철학으로 읽어 낼 수 있으며, 어떤 작품은 논외로 쳐야 하는 것인지가 문제가 된 다. 일단 가장 잘 알려져 있듯 우리는 시(詩)가, 그 중에서도 횔덜린(Friedrich Hölderlin)의 시가 주로 하이데거에게 예술이 됨을 알 수 있다. 반 고흐의 작품 또 한 그 대상이 되었다. 몇몇 건축이 논의 되었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자신의 사유 안으로 끌어들인 대상들의 공통점을 살펴보기만 해서는 위대한 작품의 기준을 찾 아내기 어렵다. 오히려 하이데거가 예술 일반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그 중에서도 부정적인 언급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것이 예술작품이 되지 못하는지 유추해 가 려 볼 수 있다.
하이데거는 후기에 파울 클레(Paul Klee)의 작품을 접하고 몇 개의 노트를 남기는데, 이중 간접적으로 공개된 것들을 검토하다 보면 다음과 같은 언급을 발 견할 수 있다. “오늘날의 예술: 초현실주의=형이상학; 추상 예술=형이상학; 대상없 는 예술=형이상학”.39) 여기서 하이데거는 대상없는 예술(gegenstandlose Kunst) 을 형이상학이라고 적어 놓았다.40) 물론 여기서 형이상학은 근대의 완성으로서의
는 것이다” (M. Heidegger, “Der Ursprung des Kunstwerkes”, p. 26 [「예술작품의 근 원」, p. 52]).
38) 이점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M. 하이데거, 「기술에 대한 물음」, 강연과 논문, 이기상․신상희․박찬국 옮김 (이학사 2008), pp. 9-49.
39) G. Seubold, “Heideggers nachgelassene Klee-Notizen”, in: Heidegger Studies 9 (1993), p. 10.
40) 이 구절의 “대상없는 예술(gegenstandlose Kunst)” 이란 표현을 “대상적/객관적 예술 (gegenständliche Kunst)”로 읽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이 의견은 그 해석에 어려움 이 있을뿐더러 독해의 부자연스러움을 감수해야만 한다. 이 구절을 “gegenständliche Kunst”로 대체해 읽는 해석자들은 이를 철학적 용어로 단순하게 치환해 “객관적”이라 고 읽었을 가능성이 제일 높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이 경우도 “객관적 예술”이라는 말
형이상학이며 하이데거에게는 극복해야 할 것으로 이해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노트에서 하이데거는 간접적으로 대상없는 예술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 셈 이다. 그런데 여기서 대상이 없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가 문제가 된다. 하이데 거는 “형이상학적-미학적”으로 파악된 예술이해를 부정하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 서 모방으로서의 예술은 예술이 아니다.41) 그러므로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모방의 원본이 되는 것으로서의 대상은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의 대 상은 재현의 원본과는 관계없이, 그 안에서 진리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세계를 투사하고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상(像)이면 어떤 것이든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반 고흐의 구두는 그 재현적 성질과는 전혀 관계없이 어떤 진리를 드러나게 해 주는 것으로 기능했었다. 그 그림 안에서 구 두는, 그것이 실제로 구두인지 아닌지, 농부의 구두인지 화가의 구두인지와는 상 관없이 실제의 구두를 가지고 사유를 할 수 있게 해 주는 대상으로서만 기능을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두는 여기서 분명 어떤 대상이다. 이 점은 하이데 거가 ‘추상 예술’을 ‘형이상학’과 동치에 놓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점에 대해 물론 하이데거가 사유거리로 삼았던 다른 화가들 (예를 들어 클레)을 언급하며 반박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점과 관련하여 하이데
의 어느 부분이 부정적인 함의를 가지는 지는 불명확하다. 이를 말 뜻 그대로 “대상 적 예술”이라고 읽을 경우는 더 모순이 된다. 하이데거 본인이 대상이 존재하는 예술 작품을 읽어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대체어 “gegenständliche Kunst”는 일반적으로 영어로 번역될 때 “figurative art”, 또는 “representational art”로 번역된다. 이 중 후 자인 재현적 예술(모방으로서의 예술)이라는 뜻 또한 대체 해석자들이 생각한 해석일 수 있다. 그런데 이 해석의 경우 뜻은 맞지만 “초현실주의”, “추상 예술”과 전혀 어울 리지 못하는 치명적 단점이 있다. 이 구절의 해석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O.
Pöggeler, Bild und Technik. Heidegger, Klee und die moderne Kunst (München:
Wilhelm Fink 2002), p. 150., H. W. Petzet, Encounters and dialogues with Martin Heidegger. 1929-1976, trans. P. Emad & K. Mal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3), p. 146.
41) M. Heidegger, “Der Ursprung des Kunstwerkes”, p. 22 (「예술작품의 근원」, pp.
46-47).
거에게 있어서는, 특히 조형예술에 있어서 어떤 작품이 예술의 양식사적 판단에 의해 구상이냐 추상이냐를 따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하이데거에게 있 어서 중요한 것은 그 작품에서 대상을 취할 수 있느냐 없느냐이다.
하이데거는 작품의 규정을 미술사적/사회적 맥락과 단절시킨 곳에 위치시키 는데, 이를 통해 작품은 일종의 탈역사학적 자리에 놓이게 된다. 작품의 역사학적 맥락(미술사, 사조, 작가 등)과 작품은 단절되며, 철학자는 작품 자체와 단독으로 관계를 맺는다. 이처럼 맥락이 제거되기에, 하이데거에서 예술작품의 읽기(감상) 는 순수한 철학적 사유의 특징을 갖는다. 이 경우 감상자의 세계를 상기시키고 사유의 빛을 던져줄 대상이 필요하게 된다. 이 대상은 실제 세계와의 연관이 흐 릿하거나 양식상 다소 추상적이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대상화 할 상(像) 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점은 ‘추상 예술’에 대한 하이데거의 견해를 검 토해보면 더욱 명확히 드러날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구상/추상 구분이 부차적이라는 점을 지지해 주는 매 우 중요한 예는, 실제로 하이데거가 1969년에 「예술과 공간」42)이라는 글을 쓰면 서 명백한 추상 예술작품을 염두에 두었다는 점이다. 이 글을 작성할 당시 하이 데거는 에두아르도 칠리다(Eduardo Chillida)의 생각과 작품에 큰 관심을 보였다 고 한다.43) 다름슈타트에서의 강연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44) 이후로 하이데거는 공간의 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칠리다의 “내게 관심사는 형태 가 아니라, 형태와 다른 형태 간의 관계-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이다.”45)라 42) M. 하이데거, 「예술과 공간」, 사유의 경험으로부터, 신상희 옮김 (길 2012), pp.
265-274.
43)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에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H. W. Petzet, Encounters and dialogues with Martin Heidegger. 1929-1976, Chap. 6, pp.
133-158. 하이데거와 칠리다의 교류와 그들의 사유에 대한 연구로는 다음을 보라. 김 경미․이유택, 「칠리다와 하이데거 그리고 공간 - 칠리다의 조각 작품에 대한 철학적 해석」, pp. 1-35.
44) M. 하이데거,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 강연과 논문, 이기상․신상희․박찬국 옮김 (이학사 2008), pp. 183-209.
45) H. W. Petzet, Encounters and dialogues with Martin Heidegger. 1929-1976, p. 156.
는 언급을 하이데거가 전해 듣고 흥미를 보이며, 이후 하이데거와 칠리다는 만남 까지 갖게 된다.
여기서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앞서 확인했던 바와 같이 클레-노트에서 하 이데거는 ‘추상 예술=형이상학’이라며 비판을 가한 바 있다. 그렇다면 왜 칠리다 의 생각과 작품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는가가 의문시된다. 이를 하이데거의 입 장변화로 해석해야 하는가, 아니면 칠리다는 단순 예외로 여길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더해서 클레의 입지 또한 단순히 양식적 차원에서 놓고 보았을 때는 애매하 기는 마찬가지이다.46) 이는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인 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의 근원
」의 2부 집필을 생각했었다는 전언과 더불어 해석자들에게 큰 난제로 다가온 다.47)
몇몇 해석자들은 하이데거가 ‘추상 예술’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영(Julian Young)은 하이데거가 추상 예술을 “서구 전통의 형이상학적 성격을 진정으로 부수지 못한”48) 것으로 본다고 주장한다. 즉 그는 여기서 유보 적인 입장을 보이는데, 하이데거가 추상 예술이 서구의 형이상학적 전통을 부술 능력은 없지만, 또한 근대적 기술의 지류로 여겨질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는 결론 을 내린다.49) 반면 투센(Ingvild Torsen)은 하이데거의 철학 안에는 “추상을 유의 미하며 잠재적으로 중요한 예술적 혁신으로 이해할 여지”50)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헤겔 미학과 하이데거 예술론의 유사성을 길게 논하는 한편, 하이데거의 예
46) 물론 하이데거는 클레와 관련하여, “대상은 없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하며” 오히려 대상을 ‘물러나는(zurücktreten)’ 것으로 묘사한다 (G. Seubold, “Heideggers nachge- lassene Klee-Notizen”, p. 10). 즉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클레의 작품들은 “대상없는”
작품은 아니었던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 점에 관해 다음의 의견을 참조: J.
Young, Heidegger's philosophy of ar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p. 161.
47) H. W. Petzet, Encounters and dialogues with Martin Heidegger. 1929-1976, p. 146.
48) J. Young, Heidegger's philosophy of art, p. 166.
49) J. Young, Heidegger's philosophy of art, pp. 166-167.
50) I. Torsen, “What Was Abstract Art? (From the Point of View of Heidegger)”, in:
The Journal of Aesthetics and Art Criticism, vol. 72, issue 3 (2014), p. 291.
술론 안에서 추상 작품을 승인하고 해석하게 해줄 단초들을 찾고 있다. 그런데 그의 주장에서 핵심적인 논증은 하이데거가 칠리다의 생각과 작업을 인정했다는 부분에, 즉 명백한 추상 작업을 인정했다는 단순한 사실에만 의존하고 있다.51) 그 러므로 바로 이 지점에서 지적해야만 하는 점은, 칠리다의 작품이 분명 추상이고 하이데거가 긍정적인 평가를 한 것도 사실이지만, 한 편으로 그의 작품 안에는 그것이 추상이나 아니냐의 문제와는 별도로 진리의 밝힘을 위한, 어떤 의미를 읽 어낼 수 있게 해 주는 대상성이 구현되고 있다는 점이 간과되고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앞서도 지적했다시피, 하이데거가 ‘추상 예술’을 부정적으로 묘 사한 메모가 있다고 해서, 추상을 하이데거로 읽어내는 것이 가능한지 불가능한 지를 논하는 것은, 하이데거 예술론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이데 거의 예술론에서는, 그의 예술론으로 읽어내고자 하는 작품이 그 안에 대상성을 구현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렇지 못한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 대상이 곧 그 예술 작품의 작품적 성격을 해석해 나가기 시작하는 단초가 되고, 이로부터 사유로서 의 감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작품 안의 대상성은, “진리 일어남의 열 린 장”으로 예술작품을 바라보는 하이데거 예술론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바 로 그렇기에 하이데거는 클레의 작품 안에서도 일종의 대상성을 발견하고, 그 작 품을 읽어 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하이데거가 형태(Gestalt)에 대하여 언급한 다음의 구 절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다.
균열(Riß, 선) 속으로 데려와 대지 속으로 되돌려 세워짐으로써 확립된 투 쟁이 곧 형태(Gestalt)이다. 작품의 창작된 존재란, 진리가 형태 속으로 확 립되어 있음을 뜻한다. 형태란, 균열[선]이 안배됨(sich-fügen, 이어짐)으로 써 구성된 전체적-짜임새(Gefuge)이다. [이렇게] 안배된 균열(der gefügte Riß)은 진리의 빛남이 [형태를 구성하는 선으로] 이어진 것(die Fuge des 51) I. Torsen, “What Was Abstract Art? (From the Point of View of Heidegger)”, pp.
297-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