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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서의 미술론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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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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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강

인문학으로서의 미술론 강의

제1 주. 인문학으로서의 미술론 제2 주. 이성과 규칙으로서의 예술 제3 주. 상상과 감정으로서의 예술 제4 주. 현대 미술의 두 흐름과 특성 제5 주. 종합 토론

강 연 : 오 병 남 (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사 회 : 이 해 완 ( 서울대학교 부교수) 토 론 : 오 종 환 ( 서울대학교 교수) 토 론 : 김 승 환 ( 조선대학교 교수) 토 론 : 정 수 경 ( 홍익대학교 강사)

이 책자에 서술된 내용 또는 자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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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르네상스와 이태리 고전주의 ……… 5

1) 미술과 도덕적 원리

2) 모방으로서의 미술 3) 미술과 규범

(1) 이상적인 것의 모방과 수학적 방법 (2) 입법적 원리로서의 고전주의

II. 프랑스 신고전주의 미술론 ……… 24

1) 역사적 배경

2) 철학적 기초

3) 신고전주의 미술론

4) 르 브룅과 아카데미 지론 5) 아카데미의 논쟁

Ⅲ. < 참고 문헌> ……… 48

제8강

인문학으로서의 미술론 강의

제2주_ 고전주의: 이성과 규칙으로서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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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인문학으로서의 미술론 강의

고전주의 : 이성과 규칙으로서의 예술

오 병 남 (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Ⅰ. 르네상스와 이태리 고전주의

우리는 제1강에서 인문학의 일환으로서 미술론이 성립했음을 고 찰해 보았다. 그렇다면 이론적인 입장에서 르네상스 미술론의 원리 는 무엇인가?

르네상스는 회화 ․ 조각 ․ 건축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자각함으 로써 그들을 미의 개념에 결부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 결과 르네상스 이론가들은 “미술”이라는 말과 개념을 정립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말하면 르네상스는 미술에 대한 미적 의식을 자 각했던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를 통해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의식이 싹트고 자라왔다. 대표적으로 종교적 의식, 윤리적 의식, 그 리고 철학적 의식, 과학적 의식 등이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중 뒤늦게 자기가 바라보고 있는 회화나 조각 및 건축에 대한 경험 이 “아름다운” 것임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현대적인 용어를 쓰자 면 “미적 의식”(aesthetic consciousness)의 자각이다. 이 시기가 르네상스이고, 르네상스는 잠재되어 있던 그 미적 의식에 의한 로 마 미술의 부활이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발전된 것이 이태리 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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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5기 제8강 인문학으로서의 미술론 강의

상스 시기의 고전주의 미술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선 “고전 적”(classic 혹은 classical)이라는 말과 “고전주의”(classicism)라 는 말의 사용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고전주의”를 뜻하는 “클라시시즘”(classicism)은 라틴어 “클라시 스”(classis)에서 유래된 말이다. 학교에서 사용되고 있는 “학급”의 어원이기도 한 “클라시스”란 말이 지니고 있는 여러 의미들 중 하 나는 사회계급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로마의 행정기관은 시민의 소 득 규모에 따라 과세율을 5등급으로 분류했으며, 여기서 그 형용사 인 “클라시쿠스”(“클라시컬”) 곧 “고전적”이라는 말은 최고 등급의 계층을 평가하는 데 사용된 말이었다. 이런 의미가 최고 등급의 문 필가에게도 비유적으로 적용되었다. 그러므로 “고전적”인 문필가는 최상의 “탁월한” 문필가를 뜻하였다. 이러한 평가적 어법은 르네상 스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의미의 “고전적”이라는 말이 어느 특수한 시대를 지칭하 는 기술적 의미로 사용되기는 빈켈만이 피디아스 등이 활동하던 BC 5세기경의 고대 그리스 미술을 절정의 시기로 규정했고 그 시 기를 “고전적”이라고 부르고 있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 그가 “고귀 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eine edle Einfalt und stille Grösse / noble simplicity and calm grandeur)이라는 특성을 부여해 놓고 있는 그리스 미술이 바로 이 시기의 미술이다. 이처럼 어느 역사적 시기를 지시하는 용법이 확대되어 그 말은 철학에도, 문학에도 적 용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는 “고전 미술”이라는 말을 하고 있 듯 “고전 철학”이니 “고전 문학”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것은 가 장 훌륭한 시기를 통해 성취된 문화적 소산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말이다.

이에 관련시켜 생각해 볼 점이 있다. 우리는 한국의 “고전 문학”

이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그에 비슷한 한국의 “고전 미술”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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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주_ 고전주의 : 이성과 규칙으로서의 예술

말은 아직 듣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여기서 “고전적”이라는 말을 시대적으로는 고대 그리스

“고전적 시기”의 문 · 사 · 철과 미술은 물론 동시에 그들을 모범으 로 삼고 그들처럼 제작한 훌륭한 미술가와 당시의 박식한 이론가를 배출한 시기에 대해서도 적용할 것이다. 르네상스인들이 발전시킨 문화를 두고 그것을 “고전적”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이와 같은 입장 에서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르네상스인들은 아직 고대 그리 스 고전 시기의 미술을 직접 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대 그리스의 작품을 복제한 로마의 유산을 아름다운 것으로 자각했고, 그것을 모델로 하여 고대 로마(Greco-Roman)를 부활시켰던 것이 다. 이것이 이른바 이태리 르네상스의 고전주의 미술이요, 그것을 정당화한 것이 고전주의 미술론이다.

그렇다면 고전주의 이론가들이 말하는 미술의 원리는 무엇인가?

첫째로, 고전주의 미술은 도덕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라야 했다.

실제로 르네상스는 지나치게 이교적이었으며, 르네상스의 남자들과 여자들은 종종 쾌락적이고 방탕하였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그리고 그 이론의 설명에 따르면 르네상스는 도덕적 각성이었다. 미술이 보편적 인간상(Nature)으로서의 이념(Idea)의 모방이고, 그러한 이 념은 지고의 가치로서 누구나 따를 만한 미(beauty)라고 할 때, 그 러한 미의 모방인 미술은 도덕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만 약 미술이 훌륭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감상되고 이러한 감상이 미 술제작의 목적이기도 했다면 르네상스는 미술이란 훌륭한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할 의무를 자각한 입장에서 수행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이태리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인간 교화를 목적으로 한 미술을 그들의 주제로 설정하는 데로 발전해 나가게 되었다. 앞 으로 설명할 것이지만 바로 이 점 때문에 르네상스 이후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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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5기 제8강 인문학으로서의 미술론 강의

를 중심으로 한 서구미술의 주종이 풍경화보다는 인물화 · 역사화 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아카데미 지론에 따르면 풍경화는 고상한 사건이나 이념을 구현하기 힘든 장르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 에서 山水畵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 동양미술과 르네상스 전통의 서 양미술 간의 차이를 지적할 수도 있다. 요컨대, 양자 간에는 “자연”

의 개념에 차이가 있었다.

둘째로, 고전주의는 이념의 모방, 즉 이상(the ideal)을 추구하는 미술이었다. 자연에 거울을 갖다 댄 것처럼 사실적으로 모방하는 것이 화가의 기초로 요구되었으나 자연은 불완전한 것이어서 극복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예로, 자연으로서의 개인의 신체 는 고대에 잘 구현되었던 이상적 인간의 미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것 이었다. 따라서 회화와 조각은 결함 많은 개별적 인간이 아니라 이 상적 인간을 모방하고자 했다. 우리 식으로 이해하자면 개성적이고 파격적인 인물이나 장면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품격 있는 완전한 인간을 그려야 했다.

셋째로, 고전주의는 입법적이었다. 일단 좋은 것으로 확립된 이상 은 강제로 교육되고 강요되었다. 어느 미술가도 이상적인 것 이외 의 것을 제작할 수 없었고, 어느 비평가도 이상적인 것 이외의 것 을 찬미할 수 없었다.

이제, 위의 세 원리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1) 미술과 도덕적 원리

고전주의가 도덕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보편적 자연, 아름 다운 자연의 모방이라는 개념 속에 이미 함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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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주_ 고전주의 : 이성과 규칙으로서의 예술

여기서 우리는 르네상스 미술가들이 얼마큼이나 도덕적이고 교화 적인 목적을 의식하고 있었는지를 알려줄 한 사례로서 피에트로 아 렌티노와 미켈란젤로 간에 있었던 논쟁을 들어 보기로 하겠다. 르 네상스를 통해 자각되기 시작한 개인으로서의 화가라는 사고는 그 들의 작품에 대한 비평을 수반하는 결과를 낳았다. 아마도 이것이 가장 초기의 아마추어 비평(amateur criticism)의 출발이 아닌가 한다. 아렌티노는 당시 이 같은 비평을 수행한 인물이었다. 미술가 들은 그의 글 때문에 그를 두려워했으나 그 스스로는 자신을 미술 의 후원자라고 생각했다. 라파엘, 티치아노, 틴토레토 등은 그와의 친분을 원했으며, 그에게 스케치와 그림 등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 러나 미켈란젤로만은 그와 가까워지려는 아렌티노의 노력을 회피하 였다. 아렌티노는 베니스에서 미켈란젤로에게 정기적으로 서신을 보냈다. 그는 이 서신을 통해 미켈란젤로와 대등한 입장에 서고자 했으며, 마치 천재의 신임을 받을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려는 듯 회 화에 대한 그의 지식을 재치 있게 보여주고자 했다. 미켈란젤로는 단 한 번의 답장을 주는 데 그치고 말았다. 답장을 받고 아렌티노 는 우쭐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더 이상의 대꾸를 하지 않은 채 그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 상처받은 아렌티노는 분개했고, 미켈란젤 로라는 이름을 거의 6년 동안이나 거명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는 중 아렌티노는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반종교개혁 (Counter-Reforation)의 경향과 함께 미술에서도 청교도주의가 부 활된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풍조에 편승하여 아렌티노는 미켈란젤 로의 「최후의 심판」에 그려진 나체상을 공격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 서신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르네상스 비평가들이 미술에 부여해 놓고 있는 도덕적 입장의 일면을 읽을 수 있다.

세례 받은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당신이 우리의 모든 진실 된 신앙이 열망하는, 이른바 그 종말의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행한 극악무도한 파격을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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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5기 제8강 인문학으로서의 미술론 강의

당신은 신성한 허식하에 동료의 우정 따위는 받아들이지 않았 을 것이며, 교회의 위대한 추기경 · 신부님 · 교황께서 예배를 거행하며 성경을 낭송하며 기도하고 고백하고, 주의 육체와 살과 피를 숭배하는 그 위대한 신전을 위해 그것을 제작하였 을 것이 아닌가? …… 심지어는 나체의 비너스를 묘사하는 이 교도들조차도 가려야 할 부분을 손으로 덮어 가리고 있지 않 은가? …… 우리의 영혼은 쾌활한 그림보다는 헌신적인 측면 을 더욱 필요로 한다는 점을 기억하라.1)

한마디로 「최후의 심판」은 외설이라는 것이다. 교황 파울Ⅳ세 는 이 서신이 외치고 있는 강렬한 항의에 귀를 기울였으며, 미켈란 젤로에게 「최후의 심판」을 수정할 것을 명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이때 프랑스의 샤를 Ⅷ세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 그는 로마를 떠나 볼로냐로 도피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모욕을 피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렌티노의 비난과는 달리 미켈란젤로는 미술의 목적이 도덕적이라는 생각을 굳게 갖고 있었던 사람이다. 미켈란젤로의 서 기였던 프란시스코 드 홀란다는 자신이 저술한 『대화』에서 위대 한 대가의 말을 기록해 놓고 있다. 홀란다에 의하면 보다 고귀한 기술인 회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모두 본받게 하기 위하여 덕망 있 고 경건한 사람 · 영광스러운 순교자 · 용맹한 군인 · 강력한 군주 등을 재현하고 있다. 회화는 전쟁 시에는 축성술의 디자인 · 지도 · 무기장치 등을 그리는 데 있어 유용하다. 그러나 평화 시에는 명예 롭고 고귀한 지식인들에게 특히 잘 어울린다. 회화는 대중들의 두 려움과 경외심을 고취시켜 주며 신의 창조물을 찬양한다.2)

1) Frank P. Chambers, 『미술 : 그 취미의 역사』, 오병남 · 이상미 공역, p.60에서 인용.

2) Francisco de Hollanda, Four Dialogues on Painting, A. F. G. Bell 역 (1928), Dialogue I and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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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주_ 고전주의 : 이성과 규칙으로서의 예술

그러므로 16세기 말 이후 17세기를 통해서는 무엇이 회화의 가 장 고상한 주제인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는데, 주로 역사적인 주제가 가장 높은 지위를 부여받았다. 바자리가 이따금씩 모호하게 언급한 “위대한 양식”(la gran maniera /The great style)은 역사 와 하나로 이해되었고, 역사는 모든 고대의 작가들이 주장했듯 도 덕적 함양을 위한 최고의 학교였다. 신화(myth)와 우화(fable)는 위 대한 양식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었으며, 만약 신화나 우화의 재 현이 불가피하다면 그들은 최소한 도덕성을 구현해야 했고, 진실성 을 띠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발명(invention)은 그것이 사실 에 충실할 때에만 허용되었으며, 공상(fancy)은 우스꽝스러운 배열 에 지나지 않았다. 상상(imagination)이라는 말이 등장하고는 있었 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성능력의 구속하에서였다. 그림 속에 우 화가 섞여 있는 것은 좋은 취미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되었다. 요컨 대, 이 시대에 있어 기본적으로 중요한 미술의 문제는 실물다운 도 덕적 주제의 선택이 되고 있었다. 가장 고상한 주제에 관한 이 같 은 논의는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계속 강조되었으며 19세기 말까지 간헐적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2) 모방으로서의 미술

후기 르네상스 시기를 통해 실물다움인 사실성과 생동감은 르네 상스 미술의 회화와 조각의 원리로 확립되었으며, 회화는 자연에 거울을 갖다 댄 것처럼 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 모든 이들의 지침 으로 부과되었다. 따라서 미술에 의한 자연의 정복이란 성공적인 미술가들을 존경하는 데 있어 사용되는 찬사의 주제가 되고 있었 다. 판테온에 있는 라파엘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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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5기 제8강 인문학으로서의 미술론 강의

여기 라파엘이 잠들어 있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자연은 정복당할까 두려워했고, 이제 그가 죽었으니 죽을까 두려워하고 있다.

이런 식의 추도문은 상투적인 수사가 아니라 시험을 거친 당시의 취미의 격률이었다. 그래서 르네상스 미술가는 심지어 조각상 앞에 서서 마치 그것이 살아 있는 것인 양 그것에 말을 거는 척하기도 했고, 플로렌스의 화가 스테파노는 “자연의 원숭이”(nature's ape) 라는 이름을 얻었을 정도였다.3) 티치아노는 “세상의 사랑을 받았으 나 자연의 시기심을 샀고”, 보카치오는 지오토에 대해 “그는 재능 이 너무나 뛰어나기 때문에 그가 펜과 연필로 묘사하여 단순히 닮 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 보이도록 하지 못하는 것이 없 다. 또한 사람의 눈을 속여서 단지 그려졌을 뿐인 것들을 실제인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4)고 쓰고 있다.

화가요 건축가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최초의 미술사가로 잘 알 려진 바자리(1511-1574)는 그 당시 미술가들의 전기에 대해서 뿐 만 아니라 비평적 기질에 대한 믿을 만한 권위자였다. 그는 교양 있는 사람으로 간주될 만한 “교양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눈과 귀 와 재능을 이용하였으며, 자신보다 훌륭한 미술가들과의 친분이나 교제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당시 그의 미학적 정통성은 한 번도 의 문시되지 않았으며, 그의 의견은 동시대인들에게 일반적으로 수용 되고 있었다. 그는 항상 자연의 정확한 모방으로서의 미술에 대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저술들 속에는 그림을 말하는 중에

“거울”(mirror)이나 창문에 대한 언급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 같은 바자리에게 있어서 가장 위대한 화가는 라파엘이었으며, 그의 『열전』에서 그는 왜 라파엘을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하는지

3) Vasari, Lives of the most excellent painters, sculptors and Architects(1550, 증보판 1568): Stefano.

4) Boccaccio, Decameron, VI,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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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주_ 고전주의 : 이성과 규칙으로서의 예술

그 이유를 상세히 설명해놓고 있다. “다른 대가들의 회화는 회화라 고 불리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나 라파엘의 것은 생명 그 자체로 불려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라파엘의 그림에 나타나는 모든 인 물들에서 살이 떨리고 숨을 쉬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맥박이 뛰고 생명이 박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바자리는 한 번만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여러 차례 “실물다움”(verisimilitude), 현대적인 용어로 말하면 사실주의(realism) 미학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죽어 있는 자’(inamorata)의 초상을 그렸는데, 그 것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진실되게 그려졌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것이 그려진 것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며, 오 히려 그것이 실물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만큼 그 화가는 대단 히 어려운 이 주제를 힘차게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 속의 인물들은 단순히 위장되어 평면 위에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완전한 양각과 생명을 갖춘 것 같다. 벨벳 같 은 피부의 부드러움이 최고의 충실함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교황이 입고 있는 예복도 충실히 묘사되어 있다. 다마스크 천 은 광택으로 빛나고, 그의 예복의 라이닝을 형성하는 모피는 부드럽고 자연스러우며, 금과 명주는 어찌나 잘 복제되었는지 그린 것 같지 않고 실제의 금과 명주 같다”

이러한 서술과 평가는 바자리의 『열전』에서 서술되고 있는 매 우 전형적인 사례들이다. 바자리는 이 모든 것이 사실임을 입증하 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예들을 들고 있다. 브라만티노는 밀라노 근 교의 마구간에서 말들을 그렸는데, 이 그림은 말들을 속여 마구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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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5기 제8강 인문학으로서의 미술론 강의

길질을 당하였다. 베르나쪼네는 정원 주변에 프레스코로 풍경화를 그렸는데 이 그림이 자연에 너무도 충실하여 정원에서 기르던 공작 들이 여기에 그려진 딸기밭을 쪼아 먹었다. 또한 프란체스코 몬시 뇨리가 그린 개의 그림에는 개가 뛰어 들었다. 또한 매를 부리는 사람의 손목에 앉도록 훈련된 새는 프란체스코가 그린 아기 예수의 손목에 앉으려고 하였다. 새들은 베로나의 필사본가였던 지롤라모 의 그림 속의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려고 하였다는 등.5) 우리는 이 미 제1강 3절에서 비록 문헌을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이 같은 사실 주의 예술과 이론이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

바자리의 시대가 지난 지 오랜 후에도 미술가들과 비평가들은 여 전히 사실주의, 당시의 말로는 “실물다움”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실물다움을 통해 그들은 도덕적 교훈을 가르치고자 했다. 아주 훌 륭한 화가들은 아주 훌륭한 시인들에 비유되었으며, 라파엘은 호머 에, 카라치는 버질에, 티치아노는 오비드에 비유되기도 했다. 따라 서 회화는 지식의 매개체, 일종의 시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제1강 결론부에서 언급했듯 미술이 지적인 활동으로서의 인 문학으로 승격되는 과정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3) 미술과 규범

(1) 이상적인 것의 모방과 수학적 방법

그러나 미술의 실제에 있어서 르네상스가 때때로 사실주의의 경 향을 띠었다면 이론적으로는 이상주의의 경향을 띠고 있었다. 즉 이상적인 것을 추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 를 인용하고 있는 듯한 알베르티는 모델을 이상화하고, 뚜렷한 결

5) Vasari, 위의 책, Piero della Francesca, Bernazzone, Monsignori, Girola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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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주_ 고전주의 : 이성과 규칙으로서의 예술

함들을 확실하게 생략하라고 화가들에게 충고하곤 하였다. 이 같은 미술적 이상의 문제에 대한 최초의 연구는 로렌조 드 메디치의 도 움으로 피시노가 설립한 플라톤 아카데미의 모임을 통해 이루어졌 을 것이다.

이상적인 것에 관한 문제는 이태리인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 학』을 잘 알게 됨에 따라 점점 더 심각해져 갔다. 최초의 라틴어 역서가 1498년에 출간되었으며, 1508년 그리스어 판이 출간되었 다. 16세기에 이르러서 형이상학과 과학의 영역에 관한 아리스토텔 레스의 권위가 쇠퇴해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시학』이 보 다 애호되기 시작했다. 거기에서 그는 시란 개별적인 것보다는 보 편적인(universal) 것을 다루며, 현재의 상태나 또는 과거의 사건을 기술하는 일이기보다는 무엇일 수 있는가 또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what ought to be)를 논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시는 이상의 모 방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미술에 대해 플라톤이 가했던 가 장 당혹스러운 반론들을 거의 해결한 인물로 여겨졌다.

여기서, 르네상스의 위대한 시기인 이태리 미술가들은 인간 정신 의 가장 오래된 문제들 중의 하나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르네상스 미술가들에 따르면 미술은 자연을 모방해야 하는 것이었으나, 이론 상으로는 이상적인 자연(ideal Nature)의 모방을 동경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화의 과제는 불완전한 자연을 재현하기보다는 자연으로부터 많은 아름다움들을 선택하여 이상적인 자연을 구현하 는 것이었다. 그들이 명명했던바 “아름다운 자연”(beautiful Nature)만이 미술의 적합한 주제였다. 여기서, 고대 미술은 르네상 스 미술가들이 요구하고 있는 식의 이상과 자연적 현실을 절충한 전형적인 예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이 절충이 아주 간단한 것이지만, 실제 적용에 있어서 그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자연의 여러 아름다움으로부터 선택(selection)한 다는 것은 좋았으나, 소위 그 선택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가 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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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5기 제8강 인문학으로서의 미술론 강의

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르네상스 고전주의 미술가들이 사용한 선택의 원리는 수 학이었다. 수학은 벌써 오랫동안 리버럴 아트의 하나였으며, 르네상 스 시기를 통해 과학이 부활하는 동안 이 시대의 거대한 지적 활동 의 대열에 재빨리 흡수되었다. 그러므로 르네상스의 미술가들이 건 축 · 회화 · 조각에 있어서 그들의 이상에 도달하는 데 사용했던 방 법은 모두 수학적인 것이 되고 있었다. 그들이 왜 수학에 의지했느 냐는 문제에 대해 우리는 불가피하게 제1강에서 했던 설명을 다시 반복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들에게 있어 우주는 수학적으로 조 화롭게 설계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은 완전하다. 그러므로 회화도 자연과학이나 마찬가지로 완전한 조화를 위해 수학에 의지 해야 했던 것이다. 여기서의 수학이란 주로 비례의 이론을 말한다.

따라서 르네상스의 미술가들은 수학과 미술의 제작 행위를 상치 되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술과 과학, 관찰과 이성 의 절대적 대립이 오늘날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그 당시에는 그 같은 대립이 존재하지 않았다. 제1강에서 언급된 바 있는 레오나르도처럼 르네상스의 미술가들과 과학자들 또한 미 술의 제작과 미의 지각을 “인식 능력”(knowing powers)에 결부시 켜 놓고 있었다. 한 예로, 이태리의 많은 시인들은 논리학의 지식이 시의 제작에 필수적이라고까지 믿었던 터이다. 이태리와 프랑스의 르네상스 화가들이 종종 사용한 단어인 “발명”은 미술적 주제를 고 안해냄을 의미하는 것이었지, 오늘날처럼 창의력이 풍부한 천재의 순간적인 창조적 섬광에 결부되는 것이 아니었다. 바자리는 마치 미술과 “과학”(science)이 상호 교환 가능한 단어인 양, 종종 어떤 때는 미술을 어떤 때는 과학을 말하는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그 러므로 예술과 과학 간의 엄격한 구분은 상상력이 강조되기 시작하 는 낭만주의 시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능했던 것임을 우리는 제 3강에서 고찰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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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주_ 고전주의 : 이성과 규칙으로서의 예술

브루넬레스키, 레오나르도 다 빈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등 르네상스의 수많은 미술가들은 뛰어난 수학자였다. 특별한 수학적 재능이 없었던 미술가들조차도 수학을 미술가 수련을 위한 필수적 인 준비 단계로 권고하였다. 알베르티가 이상적인 자질의 화가에게 요구했던 수많은 지식의 분야 중에서 수학만큼 필수적인 것은 없었 다. 따라서 원근법은 철저한 지적 훈련이었고, 르네상스의 모든 미 술가들은 평면 위에 입체의 모양을 어떻게 재현할 수 있는가를 수 학적으로 확실하게 가르쳐 줄 수 있는 원근법의 연구에 사로잡혀 있었다. 따라서 수학적 비율(ratio)의 문제가 미술의 영역을 침범해 들어와 지배하였다. 황금분할(Golden Section)과 조화중항 (harmonic Medium)이 자연의 비밀스러운 은신처로부터 끌려 나왔 다. 프란체스코회의 수사이며 수학자이자 레오나르도의 친구였던 파치올로는 신성한 비례에 관한 논문을 출판하였다.6) 이처럼 르네 상스는 수학에 몰두하였으며, 수학이 모든 미술적 사고의 출발점이 었다. 고전주의 이론에 있어서 건축 · 회화 · 조각의 기초는 모두 수학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수학은 하나의 큰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수학에는 색 (colour)에 대한 규정이 없다는 점이다. 라인-드로잉(line-drawing) 하나만은 수학에 의해 설명될 수 있었으나, 색의 법칙은 알 수 없 었다. 그 결과 플로렌스의 화가들은 색의 중요성을 전적으로 무시 하였다. 당시 현존했던 대리석 작품들은 편리하게도 원래의 색을 잃었기 때문에 라인-드로잉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상적인 모델로 쉽게 간주되었다. 그 기법과 전통의 기원을 프레스코화에 두었던 플로렌스 화가들은 일차적으로는 선 제도공(line-draughtman)이었 으며, 따라서 그의 초기 수련은 기하학이 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전통에 공감했던 저술가들은 “디자인”(이념)을 말하던 그 입으로 동시에 “규칙(regola) · 질서(ordine) · 척도(misura)”를 언급하고

6) Luca Pacciolo, De Divina Proportione, Venice,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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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알베르티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어떠한 구성이나 채색도 윤곽이 불완전하다면 칭찬을 받을 수 없다. 윤곽은 종종 그 자체로 서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7) 앞서 인용한 프란시스코 드 홀란다의

『대화』에서는 회화가 윤곽을 그리는 것과 동일시된 것처럼 보인 다. 바자리는 드로잉을 모든 미술의 출발점으로 보았으며, 회화를 색으로 “윤곽을 채워 넣는 것”8)이라고 정의해 놓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베니스인들은 색에만 몰두하였다는 비난을 받았 다. 그래서 티치아노는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만큼 의심도 많이 받았던 화가였다. 티치아노는 항상 “디자인, 디자인, 디자인!”의 주창자였던 미켈란젤로와 비교가 되었다. 대가들을 능가 하려 했던 틴토레토는 “미켈란젤로의 드로잉과 티치아노의 색”이라 는 좌우명을 내걸었다. 16세기에 인기 있고 유명했던 화가이자 이 론가였던 쭈케로는 드로잉을 일종의 신비스러운 과정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드로잉은 미술 바로 그것의 개념이며 이념이다. 이는 물질적이고 신체적이고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형태 그 자체이자 법칙이며 질서이고 지식인의 목적이다”9) 18세기까지도 이태리인들 은 여전히 미술을 “아름다운 디자인의 아트”(le belle arti del disegno)로 설명하고 있었다.

이처럼 선과 색의 대립은 르네상스 미학의 주요 쟁점이 되고 있 었다. 수학에 기초를 두고 있던 고전주의는 자연적으로 선의 원리 를 받아들였으며, 베니스인들과 같은 색의 주창자들은 일반적인 고 전주의 운동의 외곽에 남아 있었다. 그 후 17세기에도 색은 어떤 수학적 법칙으로도 설명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직접 관찰이라는 원 리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현상이라 하여 그것을 배척했다. 그랬던 만큼 라인-드로잉은 모든 고전주의 미술의 공통분모가 되었다. 색 의 미학이 공식적으로 승인된 것은 그 후 18세기 프랑스 아카데미

7) Alberti, Treatise on Painting, II.

8) Vasari, Technique.

9) Federigi Zucchero, L'Idea de'Pittori, Scultori et Architetti, Turin,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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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야기된 논쟁을 거치면서 새로운 주목을 받기 시작하다 낭만주 의에 이르러 룽게와 들라크루아 같은 화가를 거치면서부터였으며, 그 최종적인 승리는 인상주의에 의해 쟁취되었다.

(2) 입법적 원리로서의 고전주의

르네상스 미술가는 낡은 중세 길드의 독재를 벗어 던지기는 했으 나 이보다 더 엄격한 독재인 정확성의 독재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고전주의가 발견한 아름다운 자연의 이상은 입법적 원리가 되었으며 강제로 부과되었다. 취미는 정의될 수 있는 것이 고, 따라서 규정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의 필수적 기반이었던 수학 적 법칙처럼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이라는 신념이 유행되었다. 미술 에 관한 저술가들은 일정한 규칙을 정하고, 이에 위배되는 것을 통 렬히 비난하였다.

입법적 고전주의의 최상의 모델 중 하나는 비트루비우스의 건축 이었다. 한때 미켈란젤로의 헌신적인 추종자들조차 그가 비트루비 우스의 규준을 지키지 않는다고 격분할 정도였다. 그들은 미켈란젤 로를 대신하여 사과하였으며, 만약 그가 이미 나이가 들어서가 아 니라 청년 시절에 건축을 보다 많이 공부하였더라면, 실수를 보다 덜 범하였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또한 세를리오는 다음과 같 이 쓰고 있다. “비트루비우스의 교훈에 반대로 행하는 것을 나는 과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느 미술의 경우에 있어서나 그렇듯 그 말이 전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의심할 여지없이 신봉하게 되는 권 위가 주어지는 보다 학식 있는 한 사람이 있는 법이며, 건축에서도 비트루비우스가 최고의 명성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으며, 그의 저 술들이 다른 이유나 원인으로 우리를 감동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것 자체의 가치로서 어김없이 준수되어야 하고 다른 어떤 로마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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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보다 더 신뢰되어야 하는가를 그 누가 만약 그가 무지하지 않 다면 부인할 것인가”10)

따라서 비트루비우스의 건축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다. 비트 루비우스적 기둥 양식의 세목을 설명하고 있는 일련의 출판물이 발 행되었고, 비트루비우스의 이설은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 (1508-1580)에 의해 최종적으로 공식화되었다. 그는 1518년에 태 어나 얼마간 로마에서 수학하였으며, 1570년에 『건축론』11)을 발 표하였다. 그의 건축 작품은 비쎈짜, 베니스, 브레스치아, 파두아 등 지에 아직도 현존하고 있으며, 18세기에는 영국과 독일 건축가들의 순례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1580년에 명예롭게 죽었으며, 건축의 탁월한 스승으로서 그의 이름은 건축의 한 시기와 동의어로 남아 있다.

팔라디오는 독창성(originality)을 결핍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아 왔다. 그러나 독창성은 당시의 건축가들이 원하던 매력 중 가장 마 지막의 것이었다. 그는 고대인들의 가르침의 수집가였으며, 지난 수 백 년간의 고고학적 작업의 요약자였다. 그의 현학적 특성은 그의 글에 훌륭한 학식의 필수적 분위기를 부여해 놓고 있다. 그는 서문 에서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건축의 연구에 관심이 많았다”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이에 전념하기로 결심하였으며, 고대 로마인들이 다른 모든 것에서도 그러하지만, 특히 건축에서 후세인들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믿었기 때문에 비트루비우스를 나의 스승이자 길 잡이로 정하였다. 비트루비우스는 이 주제에 관해서라면 지금 까지 현존하는 유일한 고대 저술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는 세월의 흐름과 야만인들의 거친 손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

10) Sebastiano Serlio, Architecture, III, iv, fol. 21.

11) A. Palladio, I Quattro Libri dell Architettu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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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이와 같은 고대 구조물의 잔존을 찾아내고 탐구하는 데 몰두하였다. 그리고 그것들이 처음 보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 씬 더 면밀한 관찰을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서 나는 극도의 정확성으로 각각의 최소한의 부분까지도 그대 로 측정하기 시작하였다. 실로 나는 그들의 용의주도한 조사 자가 되었지만, 그중 어떤 것도 정확한 이유와 극도의 미세한 비율 없이는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한 번만이 아니라 여러 번 이태리의 몇 군 데를 여행했으며, 그것만으로도 이러저러한 편린들로부터 전 체 건물이 어떠했었는가를 파악하고 그에 따라 설계도를 그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

이런 식으로 그는 많은 페이지를 적고 있다. 현대의 건축들은 어 느 점에서는 이와 같은 팔라디아주의의 법칙과 규정들로부터의 해 방이라고 생각될 정도이다.

팔라디오와 동시대인인 밀라노의 지오바니 로마쪼는 『회화, 조 각 및 건축론』(1584)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 그는 고전주의의 여러 원리들을 확고한 아카데미의 체계로 정립시켜 놓고 있다. 로 마쪼는 화가로서 교육을 받고, 밀라노에서 활동하였으나 눈이 멀어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미술 이론의 연구에 그 의 생애를 바치게 되었다. 그런 만큼 그의 유명한 이 논문은 이태 리 르네상스의 에필로그인 셈이다.

그에 따르면 인류는 글을 발명한 것처럼 기억에 도움을 주고, 정 신에 종교를 불어넣으며, 영웅의 미덕을 보여 주고, 후세에 본보기 가 될 수 있도록 회화를 발명하였다. 그는 회화와 조각의 장점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는데, 둘은 다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결론 을 내리고 있다. 즉 “회화와 조각은 대상을 실물과 가장 비슷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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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화와 조각은 그 모방 방식이 다른 미술일 뿐이다. 이것은 르네상스 미술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 을 했던 회화에 관련하여 회화와 조각 간에 있어왔던 논쟁, 즉 회 화가 더 우월한 것인가, 조각이 더 훌륭한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 논쟁의 타협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역시 미술에의 수학의 중요성을 거론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수학의 가 치에 대한 옛 대가들의 견해를 인용하고 있다. “기하학과 수학 없 이는 어느 누구도 화가가 될 수 없다 … 원근법을 모르는 화가는 문법을 모르는 학자와 같다.” “회화는 비례를 갖춘 선 (proportionate lines)과 살아 있는 색(life-like colours)을 가지고 원근법적 빛(perspective light)을 준수함으로써 사물들의 본성을 모방하여 평면 위에 두꺼움과 입체감뿐만 아니라 동작을 재현하고 영혼의 감동과 열정을 보여 주는 아트이다.” “이로부터 회화는 자 연적 사물을 가장 정확하게 모방하기 때문에 그리고 모방자는 자연 의 원숭이(ape of nature)가 되고 있기 때문에 아트가 되고 있다.

회화는 자연의 양각 · 색채 · 특성을 모방하고자 하며 기하학 · 산 수 · 원근법 · 자연철학의 도움으로 이를 행할 수 있다.”

그러나 회화는 자연의 단순한 모방만이 아니다. 그것은 완전한 비례를 통해 자연을 이상화시켜야 한다. “비례는 회화에만 적합한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미술에도 적합하다. 비례는 사람의 신체 ― 비트루비우스가 지적했듯 주로 화가들이 제시해 놓고 있는 인체 ― 에서 유래된 것인 만큼 건축가 역시 그가 건물을 짓는 규칙에 있어 서도 비례를 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비례 없이는 조각가이건 수공의 직인이건 어떠한 작품도 완성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식으 로든 비례의 은혜를 입지 않은 미술이란 없다.” 로마쪼는 얼굴의 길이를 척도의 단위로 하는 인체 비례의 체계를 제시하고도 있다.

그 역시 색보다 선을 존중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자연의 색을 모방 하는 데 있어 화가의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화가가 디 자인에 숙달하지 못하였다면 그는 미술의 제일의 자질을 갖추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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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있는 것이다.” 미술가는 디자인에 의해 비례를 나타내며 그의 이상을 성취한다. 왜냐하면 미술은 반드시 자연의 결점을 보완해주 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여인의 신체가 균형이 맞지 않는 다고 한다면 화가는 그림에서 이를 너무 엄밀하게 표현해서는 안 된다 … 그러나 유사성의 어떠한 점도 잃지 않은 채, 오직 자연의 결점만이 미술의 베일에 의해 가려질 수 있도록 배려하면서 그려야 한다.”

로마쪼의 미학은 논리적이며 산술적인 것이다. 그는 당대 철학자 들의 문체를 닮아 인간의 정념(passion)마저 하나의 체계로 환원시 켜 놓고자 했다. 그는 파격에 대해 다소 두려움을 가졌으며, 고대인 들이 아폴로와 뮤즈의 탓으로 돌렸던 “마음속에 지속적으로 숨겨져 있는 돌발적인 심성”에 대하여 걱정스럽고 당혹스럽게 말하고 있 다. 그에 의하면 가장 완전한 대가는 미술의 근본적인 법칙을 신중 하고 분별력 있게 준수함으로써 천부적 재능(gift)의 분노를 억제하 는 사람이다.

이태리 르네상스에 있어서 수십 년간 혼란스럽게 전개되었던 고 전주의의 여러 갈래는 로마쪼에 의해 하나로 모아졌고, 벨로리를 통해 보다 큰 진보의 다음 단계를 향해 나아간다.

이제 우리는 고전주의가 어떻게 프랑스로 계승되었으며, 아카데 미를 통해 더욱 강력한 미술로 발전되었는지를 알아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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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프랑스 신고전주의 미술론 1) 역사적 배경

프랑스 고전주의는 이태리보다 거의 1세기가 뒤진다. 프랑스의 르네상스는 무엇보다도 1494년 샤를르 Ⅷ세(재위 1483-98) 때 시 작해서 루이 Ⅻ(재위 1498-1515)를 거쳐 프랑수와 Ⅰ(재위 1515-1547)에 이르기까지 연속된 이태리 전쟁(1494-1559)을 통 해 프랑스에 소개되었다. 이태리 르네상스의 호화로움과 찬란함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샤를르 Ⅷ세는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20여 명의 이태리 미술가들을 데려와 앙브와즈 성에 머무르게 했다. 그 중에는 건축가인 수사 지오콘도도 있었다. 그는 비트루비우스의 금 과옥조들을 프랑스에 충실히 전파한 사람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들의 작품을 앙브와즈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후, 루이 Ⅻ세와 특히 프랑스와 Ⅰ세는 이태리 미술가들의 제 2차 거류지를 퐁텐블 로에 마련하였으며, 중개상을 고용하여 이태리 미술품과 고대 미술 품을 수집하고 그들을 프랑스에 수입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 집단에는 B. 첼리니, 안드레아 델 사르토, 레오나르도, 프리마티 치오, 로쏘, 비뇰라, 세를리오 등이 속해 있었다. 프랑스와 Ⅰ세의 둘째 아들인 앙리 Ⅱ세, 그의 애인인 디안느 드 프와티에와 여왕 까트린느 드 메디치는 공무를 소홀히 하였으며, 국가의 자산을 전 쟁에 낭비하였다. 그러는 중에도 그들은 미술에만큼은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루이 ⅩⅢ세(1610-1643) 시대의 재상 리슐리외와 그 후 루이 Ⅹ

Ⅳ세 시대의 재상이었던 마자랭의 통치하에서 프랑스는 마침내 거 의 중세적이었던 혼돈에서 벗어나 권력의 상징이자 모든 국가들의 본보기로 부상하였다. 이른바 유럽의 모든 국가들 중 처음으로 왕 을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제를 확립하여 절대군주를 확립했다. 1643 년 왕위에 오른 루이 ⅩⅣ세는 1715년 죽기까지 장기 집권을 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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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마자랭이 죽은 후의 재상이 콜베르이다. 그는 경제 법안을 제정 하였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루이 ⅩⅣ세를 유럽의 통치자 중 가장 힘세고 위대한 군주로 만들어 놓았다. 따라서 프랑스의 문학과 미 술은 궁중에 집중되었으며 왕정을 찬미하기 위해 바쳐졌다. 신 · 구 논쟁을 유발시키기도 했던 루이 ⅩⅣ세에 대한 페로의 헌시 「루이 대왕의 세기」(1687.1.26)는 이 같은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름다운 고대는 언제나 존경받을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일찍이 그를 찬양할 만하다고 여겨본 적이 없 다.

나는 무릎을 꿇지 않고 고대인을 바라본다.

그들은 위대하다, 정말로. 그러나 우리와 같은 인간들이다.

루이 왕의 세기를 아름다운 오거스트의 세기에 비교해 본다 하여,

부당하다는 말을 들을 아무런 것도 없지 않은가.12)

절대군주였던 루이 ⅩⅣ세는 미술에 대한 새로운 철학의 필수적 인 토대였다. 프랑스의 미술가들은 의식적으로 이태리의 미술을 수 용하면서 그들의 이론과 세세한 문제점들을 열거 · 정식화시켜 놓 고자 했으며, 로마식 기둥처럼 명백하고 논리적이며 기존의 규준 이외의 것은 어떠한 것도 인정하지 않은 아카데미의 이설을 구축해 나갔다. 아카데미에 관해서는 본 Ⅱ장 4항에서 곧 언급하게 될 것 이다. 왜냐하면 아카데미가 신고전주의 이설을 체계적으로 정립하 고자 했을 때 그 철학적 기초를 제공한 합리주의(rationalism)에 대 한 설명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12) 김붕구 · 박은수 · 오현우 · 김치수 공저, 『새로운 프랑스 문학사』, p.115-116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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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철학적 기초

근대 합리주의는 데카르트(1596-1650)에게서 출발하고 있다. 그 의 저술 어느 곳에서도 미학에 관한 서술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대목에서 그를 언급한다는 것은 참으 로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데카르트는 그의 초기 저술인 『음악개 요』(1618)를 제외하고는 오늘날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한 바가 없다. 그럼에도 17-8세기를 통해 다른 모든 철학의 분야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미학의 분야에 있어서도 그의 철학사상은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어떠한 미학이론이든 데카르트의 철학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는 근거는 없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 시대의 미학이론이라면 그의 철학적 사고와 무 관한 것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이 경우 그의 대표적인 저술인 『방법서설』(1637)이 거론되기 마련이다. 그것은 프랑스어로 쓰여진 최초의 철학 전문서이기도 하 다. 데카르트가 살던 17세기는 그에 앞선 15-16세기를 통해 서서 히 형성되어 온 새로운 자연과학이 체계적 통일을 확립하던 시기이 다. 16세기의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에 의한 천문학의 혁신과 이에 병행하여 갈릴레이가 기반을 닦은 새로운 역학은 17세기 말에 이 르러 뉴턴의 물리학에서 하나로 통일된다. 이 같은 발전 과정을 통 해 자연과학이 이룬 찬란한 업적은 당시의 철학에 진지한 반성을 촉구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 자연과학이 제공하는 지식은 누구에 게 언제나 보편타당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유를 묻게 만들었다.

자연과학이 그처럼 성공한 비결은 무엇인가?

여기서 자세히 언급할 주제는 아니지만, 이 같은 자연과학의 성 공에 대한 두 가지 철학적 반성이 나타난다. 하나는 F. 베이컨을 시조로 하는 영국의 경험론(empiricism)이고, 다른 하나가 데카르 트의 합리론이다. 전자에 의하면 자연과학의 성공은 모든 철학적 내지 신학적 선입관 ― 그가 말하는 바 “극장의 우상” ―을 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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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는 직접적인 감각 경험에서 출발하여 오로지 관찰과 실험 에만 호소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다고 본다. 이에 대해 후자인 데카 르트는 자연과학의 성공은 일체의 정확한 인식의 모범이라고 할 수 학을 적용한 데 그 비결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이렇듯 근대 철학의 두 사조는 신흥 자연과학의 눈부신 성과에 자극되어 명백한 방법론 적 의식에서 출발하였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앞으로 설명하게 될 프랑스의 고전주의 이론은 위의 철학사조 중 데카르트 의 합리론을 그 방법론으로 수용하고 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자연과학의 성공은 그것이 수학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학이란 어떤 학문인가? 만약 수학 그 자체에 서 발휘되고 있는 방법이 자연과학을 진리의 학문으로 발전시킨 것 이라면, 그러한 수학적 방법을 철학에도 도입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철학도 “극장의 우상”을 벗어나 자연과학이 제공하는 것과 같은 올바른 지식, 곧 모든 사람이 언제나 수용할 수 있는 진리를 제공할 수 있지 않겠는가? 바로 이 점에서 수학자 이기도 했던 데카르트는 수학에 대한 철학적 반성을 하기 시작했 다. 그래서 그는 기하와 대수의 학문적 원리를 물었다. 알고 보니 그것은 간단한 것이었다. 기하학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점이라 는 자명한 공리로부터 출발하여 그로부터 연역적으로 사유하는 학 문임을 그는 깨달았다. 그러나 철학에서 그 같은 자명한 공리를 어 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가 문제였다. 그것은 대수학이 가르치는 바 라고 그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y=ax2+bx+c”와 같은 수식에서 보 듯, 대수학은 기지항(a, b, c)의 관계 속에서 미지항(x)을 찾는 일이 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데카르트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자명한 기하학의 제 1공리에 해당되는 철학의 제 1원리를 찾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 그는 기지수의 관계 속에서 미지수를 찾아내는 대수학의 방법을 이용하여, 모든 기존의 철학이론들이 제공하고 있 는 관념 · 지식을 하나씩 분석하여,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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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이것이 확실한 것을 찾기 위한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 의”(Cartesian doubts)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나는 생각한 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표현되는 철학의 제 1원 리를 발견했다. 가끔 오해되곤 하는 이 명제의 뜻은 이런 것이다.

“내가 나(자아)라고 할 수 있는 것(존재)은 사유(정신)뿐이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유하는 정신의 가장 정선된 형태가 수학이나 과 학과 같은 활동을 할 때 발휘되는 지적 능력인 이성(reason)이라고 규정해 놓고 있다. 이처럼 그는 르네상스 이래 도덕이나 예술과 같 은 활동에도 적용되었던 넓은 의미의 이성을 수학적 의미로 제한시 켜 놓고 있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바로 이 지점으로부터 출발하여 형이상학으로 발전되고 있다. 그 결과 그는 전통적인 신학의 문제였던 “신 · 인간

· 세계”의 문제를 “신 · 정신 · 물질”로 대체시켜 놓고 있다. 그의 형이상학의 이 같은 전환 이후의 문제는 여기서 더 이상 거론할 필 요가 없을 것 같다. 다만 예술과 미학 이론에 관련된 한에서 그의 철학을 개입시키고자 했을 뿐이다.

그에게 있어서 예술은 인간 정신의 문제이다. 그러나 『방법서 설』에서 그는 시와 웅변은 “연구의 결실이기 보다는 정신의 산물”

이고, 이성적 기술이기 보다는 생득적 재능이라고 말하고 있다. 말 하자면 시나 음악 등은 과학과 같은 지적 활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 르네상스의 고전주의에 영향을 받은 시인

· 음악가 및 비평가들은 데카르트가 말한 지식의 기준을 위의 예술 활동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 같은 희망은 여전히 직인으로부터 벗어나자는 사회적 요구와도 깊은 관 련이 있었던 것임은 물론이다. 즉 르네상스 시대를 통해 힘겹게 리 버럴 아티스트의 자격을 획득한 미술인들이 다시 길드의 조합원으 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리일지언정 그들의 활동을 이성의 이 름으로 정당화해야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다루기 힘든 주제, 이성적인 활동이기는커녕 절망적으로 무질서해 보이는 인간영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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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주_ 고전주의 : 이성과 규칙으로서의 예술

대해서까지 이성에 의해 정복하려고 시도했다. 이 같은 시도는 처 음에는 문학에서, 그리고 18세기 이후로는 미술의 영역으로까지 확 대되었다. 그러므로 프랑스 고전주의는 르네상스의 고전주의를 데 카르트의 철학정신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의 철학으로 강화시켜 놓 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같은 특징을 띠고 있는 고전주의를 르 네상스의 그것과 구별하기 위해 후대인들이 그에 대해 신고전주의 (neo-classicism)라는 명칭을 부여해 놓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새로운 고전주의 경향은 르네상스가 모델로 삼았던 로마로부터 고 대 그리스에로의 이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 같은 이동이 미술에 서는 18세기 중엽 고대 그리스의 유물에 대한 고고학의 발굴로 더 욱 촉진되었다.

어떻든 지식에 관한 데카르트의 이 같은 입장은 전 유럽으로 확 산되었고, 그 같은 입장을 취하려는 희망은 예술에 관한 연구에까 지도 파급되고 있다. 문학의 영역에서 말레르브는 합리주의적 입장 에서 언어의 정확성(correctness)을 주장했고, 주인공의 성격과 행 동에서 예의범절(decorum)을 요구하였으며, 모든 장르에 있어서 그 들을 지배하는 규칙에 대한 엄격한 고수 및 그 모든 점을 위해 고 대인들을 모방할 것을 강조했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브왈로는

『시학』(1674)을 통해, 그리고 르 보쉬와 라펭은 각기 그들의 저 술을 통해 대륙에 신고전주의 이론을 보급하는 주역의 역할을 했 다. 여기서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자.

― 진리와 미에 관해서

아름다운 것이란 진실한 것에 다름 아니다. (Boileau,

The art of poetry

)

― 이성과 예술에 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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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5기 제8강 인문학으로서의 미술론 강의

이성을 사랑하라. 그리고 당신이 쓰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지 그것으로 하여금 그것의 미를 이성으로부터 빌려 오도록 하라.(Boileau,

The art of poetry

)

― 예술과 규칙에 관해서

시의 영혼인 픽션의 실물다움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이들 법칙들에 의해서 만이다. 왜냐하면 위대한 시에서 장소 · 시간

· 행동의 통일이 없다면 실물다움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시가 정확하고 비례에 맞고 자연스럽게 되는 것은 이들 규칙에 의 해서이다. 왜냐하면 그들 규칙은 권위나 본보기에 기초해서라 기 보다 훌륭한 센스(sense)와 건전한 이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René Rapin,

Reflections on Aristotle's treatise

, 1674)

― 예술과 과학에 관해서

예술과 과학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전자는 후자나 다름 없이 이성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예술에서도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빛(light)에 따라 자신이 인도됨을 허 용해야만 한다. (Le Bossu,

Treatise on poetical epic

, 1675.)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 같은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문학이론은 영국에서 일어난 연이은 정치적 사건들로 영국 사람들의 손으로 들 어가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 지식인들의 초기 접촉은 찰스Ⅰ세와 앙리에타 마리아와의 결혼을 통해서였다. 그 후 영국에서 있었던 퓨리턴과 왕당파들간에 있었던 시민전쟁(1642-48)을 통해 토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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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주_ 고전주의 : 이성과 규칙으로서의 예술

홉스, 윌리엄 데이브넌트 등 왕당파들이 프랑스로 망명을 했다.

1660년 군주제의 회복과 함께 프랑스 망명에서 돌아 온 사람들에 의해 프랑스의 영향은 문학에 있어서 뿐만이 아니라 의상, 예절, 도 덕의 영역에서 영국인들의 지적 생활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문학의 분야에서 프랑스의 이론을 소개 · 조화해낸 대표적인 인물이 J. 드 라이든이나 A. 포프 같은 사람들이다.

이와 같은 신고전주의적 정신은 거의 같은 시기에 미술론의 영역 에서도 그대로 발휘되고 있다. 우리는 그 같은 사실을 다음과 같은 대표적인 3명의 이론가들로부터 발견할 수 있다. N. 푸쌩과 F. 쥬 니우스, 그리고 미술의 브왈로라 할 수 있는 뒤프레스느와가 그들 이다. 그리고 영국에서는 J. 레이놀즈가 이 같은 고전주의를 강조한 대표적 인물이다.

3) 신고전주의 미술론

17세기 초 이성적인 정신을 회화에서 발휘하고 있는 이가 니콜 라 푸쌩이었다. 그는 1594년 레 앙들리에서 태어났으며, 일찍이 그 의 재능을 인식한 그 지방의 화가 밑에서 공부하였다. 그 후 그는 자연스럽게 파리에 끌려 플랑드르13) 출신의 화가 밑에서 수학하였 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미술이 과도기에 처해 있으며, 낡은 도제제 도(apprenticeship system)가 가망 없이 쇠퇴하고 있음을 발견하였 다. 숱한 실망과 지연 끝에 마침내 그는 1624년 로마에 도착하였으 며, 이곳에서 다사다난했던 26년간을 보내다 파리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유명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2년 동안 궁전의 음모와 시기에 시달린 그는 파리에 염증을 느껴 다시 로마로 돌아갔다. 그 는 로마에서 1665년에 사망하였다.

13) Flanders, 현재의 벨기에 서부 · 네덜란드 남서부 · 프랑스 북부를 포함한 북해에 면한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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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5기 제8강 인문학으로서의 미술론 강의

푸쌩은 몇 세대에 걸쳐 알프스 이북의 화가들의 선구자였다. 그 는 화가일 뿐만이 아니라 미술이론에도 전념하였다. 그는 로마에 처음 도착하자마자 로마쪼를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그가 죽기 직전 에 쓴 편지에서도 그가 여전히 미학이론에 몰두하였음이 잘 드러나 고 있다. 고대 미술과 라파엘 같은 옛 거장들이 그의 모델이었다.

의례껏 그 역시 색보다 드로잉을 중시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항상 말한 것처럼 드로잉은 회화의 본질이며, 색은 하나의 액세서리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플랑드르인 스승의 영향을 지 니고 있었던 푸쌩의 초기 그림들은 감정이 넘치고 화려한 색상으로 되어 있었으나 그가 아카데미 저술가들의 글을 읽은 뒤로부터는 자 신의 방법이 잘못된 것임을 인식하였으며, 그 이후 색의 대가인 티 치아노(1487-1576)나 루벤스(1577-1640)의 작품들을 대면하게 될 때마다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하였다. “저들과 같은 천재들이 그 런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유감스러운 일인가!” 따라서 그는 그림에 그 유명한 “회색”(greyness)을 도입하였는데, 그의 비 판자들은 이를 비난하였으나 그의 숭배자들은 이를 옹호하였다. 그 러한 그에게 있어서 이성(reason)은 최상의 안내자였다. 그는 말하 기를 “우리의 취미(appetite)는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오 직 이성만이 판단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푸쌩은 프랑스 고전주 의 회화의 창시자였으며, 그의 네 가지 강령으로 이루어진 미학, 곧 고대미술, 자연, 드로잉, 이성은 1세기 동안 화가들이 준수해야 할 법칙이 되었다.

푸쌩이 미래에 나타날 아카데미의 골조를 만들고 있을 당시, 영 국에서는 그의 사색을 확증해주는 문헌이 출간되었다. 저자는 프랑 스에서는 프랑스와 뒤 욘(François du Jon)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프란시스쿠스 쥬니우스(1591-1677)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일생의 대부분을 영국 아룬델 경의 집에서 보냈다. 그의 책 『고대 회화론』(De pictura veterum)은 1637년 옥스포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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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되었으며, 순수한 학문적 저작으로서 고전 인용의 백과사전이 며,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문헌에 남아 있는 회화미술에 대한 모든 기록들을 속속들이 망라하고 있다. 그러나 그림의 실제와 기교적 측면은 완전히 무시하였다. 그러므로 이 논문은 그 당시까지 알려 진 고대 문헌들 속의 자료를 모두 담고 있다. 쥬니우스는 기교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으나, 그의 문학적 학식 자체만으로 도 그 자신을 감식가와 교수의 위치로 올려놓기에 충분하였다. 이 책의 영문판은 라틴어판 출간 1년 뒤인 1638년에 나와 널리 보급 되었다. 이 논문은 특히 프랑스에서 인기가 높았다.

퀸틸리안과 그 후, 2-3세기경의 필로스트라투스와 같은 후기 고 대의 저술가들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거의 낭만적이기까지 한 상 상과 영감의 개념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너무 많은 제약은 기를 꺾는 효과가 있음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 전히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앞서 언급한 교훈들을 통해서 우리 는 미술 작품들을 진보적이고 관대한 방일로 이끌게 하는 것을 배 운 바 있다. 그럼에도 훌륭한 위트(wit)는 불타는 영혼의 뜨거운 격 정(hot furie of firie spirits)을 절제할 것이 요구된다. 어린 초보 자들은 종종 그들의 상상력(imagination)의 매혹에 너무 사로잡혀 있어 판단력(judgement)보다는 크나큰 환희 속에 빠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무엇을 고안해내는 미술가(artificer)는 그의 헛 된 자만심과 방종에 의해 자연에 알려지지 않은 갖가지 터무니없고 기괴한 형상을 고안해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예컨대 쓸데없고 경솔한 여러 가지 상상의 소산들, 그러나 이러한 환상(phantasy)들 도 사물의 진실된 본성에 입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미술 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환상적이고 변덕스러운 고안품보다는 자연 과 일치하는 진실되고 꾸밈없는 작품을 선택해야 한다”14) 따라서 쥬니우스는 미적 자유와 미적 독단 사이에서 현명한 절충을 취하고 있다. “회화는 무던한 노력, 끈기 있는 연습, 훌륭한 경험, 깊은 지

14) Frank P. Chambrers, 앞의 책, p.105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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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 그리고 분별력을 요구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쥬니우스는 화가에 게 필수적인 “기하학, 산수, 광학, 철학, 역사, 시” 등의 학문을 논 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르네상스 미술론을 계승하면서 미술과 비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고 있다. “균제, 유비, 조화”라는 고대의 분 류가 비례와 같은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인체 구조를 연구하여, 미 의 이상에 상응하는 수학적 법칙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상 은 자연에서는 절대로 실현될 수 없으나, “가장 아름다운 신체를 모방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고대인들은 “올바른 균제의 법칙과 규칙에 따라 완전한 미를 창조하기 위해 많은 연구를 하였 으며, 이는 어느 특정한 신체에서는 발견될 수 없는 것이기에 고대 인들은 여러 명의 신체에서 보여진 그러한 미의 우아함을 끊임없이 열망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므로 쥬니우스에게 있어서도 역시 색은 일종의 부수적 치장에 불과하며, 항상 훌륭한 드로잉에 희생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푸쌩의 기법과 쥬니우스의 이론은 샤를르 알퐁스 뒤 프레스느와 에 의해 완성되었다. 뒤 프레스느와는 원래 의학도였으나 르네상스 의 매력에 이끌리면서 로마로 건너가 그림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그는 화가로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는 타고난 “문 인”(littétateur)이었으며, 자신의 미학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줄 수 있는 라틴어 시의 제작에 25년 동안 몰두하였다. 그는 푸쌩이 사망 한 해인 1665년에 파리 근교에서 사망하였다. 시 형식으로 쓰인 이 라틴어 『화론』(De arte graphica)은 그의 사후 동료였던 피에르 미냐르에 의해 곧 출간되었다. 시의 형식으로 씌어진 이 책은 예기 치 못한 큰 명성을 얻었으며, 아카데미 화가들이 준수해야 할 신조 로 수용되었다. 이 시는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다. 즉 로저 드 필 르에 의해 불어(1668)로, 드라이든에 의해 영어(1695)로 각각 번역 되었다. 1750년 카일루스 백작은 르 브룅이 그린 뒤 프레스느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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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를 아카데미에 선사하면서 다음과 같은 헌사를 바치고 있다.

“뒤 프레스느와 이후 언급된 모든 것은 그의 훌륭한 라틴어 시에 처음으로 그가 표현한 존경할 만한 생각들을 부연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15)

뒤 프레스느와에 의하면 미술은 “자연의 아름다운 것”을 모방함 으로써 즐거움을 주는 기술이다. 고대미술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모 방한 영원한 모델이다. 고대 미술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리는 자연 속의 아름다움을 모방함에 있어 준수해야 할 특정한 규칙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들 규칙들은 미술가의 노력을 방해하거나 억제하는 것이 아니며, 신에 의해 재능을 부여받은 예술가들에게 있어서는 쉽게 획득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학생들로 하여금 이러한 규칙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이 바로 미술교육의 목적이다. 미술교육의 첫 필수과목은 아름다운 형식들의 과학인 기하학이다. 기하학의 토대 위에서 학생들은 고대미술에 대한 지식을 쌓고, 그들보다 앞서 고 대미술을 연구한 훌륭한 이태리의 대가들을 그대로 모방해야 한다.

다시 말해, 고대인들의 모방이 곧 아름다운 자연의 모방이라는 것 이다. 그리고 난 다음에라야 자연 자체에 접근할 수 있다. 이와 같 은 훈련과정을 성공적으로 통과한 학생만이 자연의 대상과 광경을 자신 있게 관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때 가서야 그들 자신의 취 미를 신뢰할 수 있으며 조야한 견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 다.

뒤 프레스느와에 따르면 회화의 구성 요소는 “발명”과 “드로잉”

과 “색”이다. 발명이란 회화가 모방하고자 하는 아름다운 사물을 제시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드로잉은 회화와 그 밖의 모든 미술 의 기술적 기초이다. 마지막으로, 색은 드로잉된 선들 사이의 공간 을 메워 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색은 드로잉을 명료하게 해줄 때에

15) Count Caylus, Discours……au sujet du portrait de Du Fresnoy, in the Procès verbaux de l'Académie Royale de Peinture et de Sculture, VI, p. 22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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