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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전주의 미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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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초 이성적인 정신을 회화에서 발휘하고 있는 이가 니콜 라 푸쌩이었다. 그는 1594년 레 앙들리에서 태어났으며, 일찍이 그 의 재능을 인식한 그 지방의 화가 밑에서 공부하였다. 그 후 그는 자연스럽게 파리에 끌려 플랑드르13) 출신의 화가 밑에서 수학하였 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미술이 과도기에 처해 있으며, 낡은 도제제 도(apprenticeship system)가 가망 없이 쇠퇴하고 있음을 발견하였 다. 숱한 실망과 지연 끝에 마침내 그는 1624년 로마에 도착하였으 며, 이곳에서 다사다난했던 26년간을 보내다 파리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유명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2년 동안 궁전의 음모와 시기에 시달린 그는 파리에 염증을 느껴 다시 로마로 돌아갔다. 그 는 로마에서 1665년에 사망하였다.

13) Flanders, 현재의 벨기에 서부 · 네덜란드 남서부 · 프랑스 북부를 포함한 북해에 면한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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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쌩은 몇 세대에 걸쳐 알프스 이북의 화가들의 선구자였다. 그 는 화가일 뿐만이 아니라 미술이론에도 전념하였다. 그는 로마에 처음 도착하자마자 로마쪼를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그가 죽기 직전 에 쓴 편지에서도 그가 여전히 미학이론에 몰두하였음이 잘 드러나 고 있다. 고대 미술과 라파엘 같은 옛 거장들이 그의 모델이었다.

의례껏 그 역시 색보다 드로잉을 중시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항상 말한 것처럼 드로잉은 회화의 본질이며, 색은 하나의 액세서리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플랑드르인 스승의 영향을 지 니고 있었던 푸쌩의 초기 그림들은 감정이 넘치고 화려한 색상으로 되어 있었으나 그가 아카데미 저술가들의 글을 읽은 뒤로부터는 자 신의 방법이 잘못된 것임을 인식하였으며, 그 이후 색의 대가인 티 치아노(1487-1576)나 루벤스(1577-1640)의 작품들을 대면하게 될 때마다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하였다. “저들과 같은 천재들이 그 런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유감스러운 일인가!” 따라서 그는 그림에 그 유명한 “회색”(greyness)을 도입하였는데, 그의 비 판자들은 이를 비난하였으나 그의 숭배자들은 이를 옹호하였다. 그 러한 그에게 있어서 이성(reason)은 최상의 안내자였다. 그는 말하 기를 “우리의 취미(appetite)는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오 직 이성만이 판단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푸쌩은 프랑스 고전주 의 회화의 창시자였으며, 그의 네 가지 강령으로 이루어진 미학, 곧 고대미술, 자연, 드로잉, 이성은 1세기 동안 화가들이 준수해야 할 법칙이 되었다.

푸쌩이 미래에 나타날 아카데미의 골조를 만들고 있을 당시, 영 국에서는 그의 사색을 확증해주는 문헌이 출간되었다. 저자는 프랑 스에서는 프랑스와 뒤 욘(François du Jon)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프란시스쿠스 쥬니우스(1591-1677)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일생의 대부분을 영국 아룬델 경의 집에서 보냈다. 그의 책 『고대 회화론』(De pictura veterum)은 1637년 옥스포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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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되었으며, 순수한 학문적 저작으로서 고전 인용의 백과사전이 며,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문헌에 남아 있는 회화미술에 대한 모든 기록들을 속속들이 망라하고 있다. 그러나 그림의 실제와 기교적 측면은 완전히 무시하였다. 그러므로 이 논문은 그 당시까지 알려 진 고대 문헌들 속의 자료를 모두 담고 있다. 쥬니우스는 기교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으나, 그의 문학적 학식 자체만으로 도 그 자신을 감식가와 교수의 위치로 올려놓기에 충분하였다. 이 책의 영문판은 라틴어판 출간 1년 뒤인 1638년에 나와 널리 보급 되었다. 이 논문은 특히 프랑스에서 인기가 높았다.

퀸틸리안과 그 후, 2-3세기경의 필로스트라투스와 같은 후기 고 대의 저술가들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거의 낭만적이기까지 한 상 상과 영감의 개념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너무 많은 제약은 기를 꺾는 효과가 있음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 전히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앞서 언급한 교훈들을 통해서 우리 는 미술 작품들을 진보적이고 관대한 방일로 이끌게 하는 것을 배 운 바 있다. 그럼에도 훌륭한 위트(wit)는 불타는 영혼의 뜨거운 격 정(hot furie of firie spirits)을 절제할 것이 요구된다. 어린 초보 자들은 종종 그들의 상상력(imagination)의 매혹에 너무 사로잡혀 있어 판단력(judgement)보다는 크나큰 환희 속에 빠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무엇을 고안해내는 미술가(artificer)는 그의 헛 된 자만심과 방종에 의해 자연에 알려지지 않은 갖가지 터무니없고 기괴한 형상을 고안해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예컨대 쓸데없고 경솔한 여러 가지 상상의 소산들, 그러나 이러한 환상(phantasy)들 도 사물의 진실된 본성에 입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미술 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환상적이고 변덕스러운 고안품보다는 자연 과 일치하는 진실되고 꾸밈없는 작품을 선택해야 한다”14) 따라서 쥬니우스는 미적 자유와 미적 독단 사이에서 현명한 절충을 취하고 있다. “회화는 무던한 노력, 끈기 있는 연습, 훌륭한 경험, 깊은 지

14) Frank P. Chambrers, 앞의 책, p.105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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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 그리고 분별력을 요구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쥬니우스는 화가에 게 필수적인 “기하학, 산수, 광학, 철학, 역사, 시” 등의 학문을 논 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르네상스 미술론을 계승하면서 미술과 비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고 있다. “균제, 유비, 조화”라는 고대의 분 류가 비례와 같은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인체 구조를 연구하여, 미 의 이상에 상응하는 수학적 법칙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상 은 자연에서는 절대로 실현될 수 없으나, “가장 아름다운 신체를 모방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고대인들은 “올바른 균제의 법칙과 규칙에 따라 완전한 미를 창조하기 위해 많은 연구를 하였 으며, 이는 어느 특정한 신체에서는 발견될 수 없는 것이기에 고대 인들은 여러 명의 신체에서 보여진 그러한 미의 우아함을 끊임없이 열망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므로 쥬니우스에게 있어서도 역시 색은 일종의 부수적 치장에 불과하며, 항상 훌륭한 드로잉에 희생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푸쌩의 기법과 쥬니우스의 이론은 샤를르 알퐁스 뒤 프레스느와 에 의해 완성되었다. 뒤 프레스느와는 원래 의학도였으나 르네상스 의 매력에 이끌리면서 로마로 건너가 그림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그는 화가로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는 타고난 “문 인”(littétateur)이었으며, 자신의 미학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줄 수 있는 라틴어 시의 제작에 25년 동안 몰두하였다. 그는 푸쌩이 사망 한 해인 1665년에 파리 근교에서 사망하였다. 시 형식으로 쓰인 이 라틴어 『화론』(De arte graphica)은 그의 사후 동료였던 피에르 미냐르에 의해 곧 출간되었다. 시의 형식으로 씌어진 이 책은 예기 치 못한 큰 명성을 얻었으며, 아카데미 화가들이 준수해야 할 신조 로 수용되었다. 이 시는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다. 즉 로저 드 필 르에 의해 불어(1668)로, 드라이든에 의해 영어(1695)로 각각 번역 되었다. 1750년 카일루스 백작은 르 브룅이 그린 뒤 프레스느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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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를 아카데미에 선사하면서 다음과 같은 헌사를 바치고 있다.

“뒤 프레스느와 이후 언급된 모든 것은 그의 훌륭한 라틴어 시에 처음으로 그가 표현한 존경할 만한 생각들을 부연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15)

뒤 프레스느와에 의하면 미술은 “자연의 아름다운 것”을 모방함 으로써 즐거움을 주는 기술이다. 고대미술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모 방한 영원한 모델이다. 고대 미술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리는 자연 속의 아름다움을 모방함에 있어 준수해야 할 특정한 규칙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들 규칙들은 미술가의 노력을 방해하거나 억제하는 것이 아니며, 신에 의해 재능을 부여받은 예술가들에게 있어서는 쉽게 획득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학생들로 하여금 이러한 규칙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이 바로 미술교육의 목적이다. 미술교육의 첫 필수과목은 아름다운 형식들의 과학인 기하학이다. 기하학의 토대 위에서 학생들은 고대미술에 대한 지식을 쌓고, 그들보다 앞서 고 대미술을 연구한 훌륭한 이태리의 대가들을 그대로 모방해야 한다.

다시 말해, 고대인들의 모방이 곧 아름다운 자연의 모방이라는 것 이다. 그리고 난 다음에라야 자연 자체에 접근할 수 있다. 이와 같 은 훈련과정을 성공적으로 통과한 학생만이 자연의 대상과 광경을 자신 있게 관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때 가서야 그들 자신의 취 미를 신뢰할 수 있으며 조야한 견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 다.

뒤 프레스느와에 따르면 회화의 구성 요소는 “발명”과 “드로잉”

과 “색”이다. 발명이란 회화가 모방하고자 하는 아름다운 사물을 제시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드로잉은 회화와 그 밖의 모든 미술 의 기술적 기초이다. 마지막으로, 색은 드로잉된 선들 사이의 공간 을 메워 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색은 드로잉을 명료하게 해줄 때에

15) Count Caylus, Discours……au sujet du portrait de Du Fresnoy, in the Procès verbaux de l'Académie Royale de Peinture et de Sculture, VI, p.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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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유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색들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할 때라면 가장 흐린(pale) 색을 사용해야 한다.

뒤 프레스느와는 또한 진정한 회화는 “투명함”(pellucidity), “우 아함”(grace), “아름다움”(beauty)으로 충만해야 한다고 쓰고 있다.

그러므로 평범한 것, 야만스러운 것, 잔혹한 것, 외설적인 것은 피 해야 한다. 그림의 인물들은 이상적이며, 색은 순수하고, 선은 부드 럽고 물 흐르듯 하며, 구성은 균형이 잡히고 조화로워야하며, 발명 은 고상하고 장엄한 것이어야 한다. 다양성은 있어도 좋으나 각 부 분들은 서로 어울려야 하며, 노력의 흔적은 억제되어야 한다. 또 정 념(passion)은, 그것을 지니고는 있으나 이를 드러내지 않은 고대의 철학자와 같이 억제된 열정이어야 한다. 그림의 공간은 골고루 메 워져야 하며, 주인공을 중앙에 배치하고 가장 강한 빛으로 구분해 주어야 한다. 그림의 측면과 가장자리는 그리 중요치 않은 것으로 채워져야 한다. 그러므로 전경은 밝은 색으로 처리하고, 배경에 비 해 정교하게 마무리해주어야 한다. 인물은 모두 균형과 중심이 잡 혀 있어야 하며, 현실성이 있어야 하고, 고부조(high relief)로 눈에 잘 띄게 그려야 한다. 선들은 서로 대립하거나 불일치해서는 안 된 다. 나이가 있고 위엄이 있는 인물은 모두 긴 옷을 입어야 하며, 노 예나 시골 사람들은 짧고 거친 옷을, 처녀는 가볍고 얇은 옷을 입 어야 한다. 손과 발은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미술가는 다른 어떤 것보다 자기의 미술을 우선시해야 하며, 종이와 연필을 들고 다니면서 항상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는 영광을 사랑해야 하 며,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그러나 재물은 진심으로 멀리해야 한다.

이처럼 프랑스 아카데미 회화의 법칙은 푸쌩이 발견하고, 쥬니우 스의 학식의 기초 위에서 뒤 프레스느와에 의해 정형화되었다. 그 러므로 바자리, 로마쪼, 알베르티 등의 사고는 최종적으로 뒤 프레 스느와를 통해 입법적 체계가 되었으며, 이 체계는 그 엄격하고 효 과적인 관리를 위한 집행부의 협력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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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3년 즉위한 루이 ⅩⅣ세 시대의 마자랭에 의해 1648년 창설된 회화 · 조각 아카데미는 필요한 모든 권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필요 한 책임감을 받아들이는 일을 게을리 하지도 않았다. 오랜 고대 시 기를 달려오면서 확실성의 평화를 갈망하던 미술가의 영혼은 이제 하나의 군주, 하나의 미학의 기준에 기꺼이 승복하게 되었다. 때문 에 미술의 역사상 문학에 있어서나 다름없이 미술의 영역에 있어서 도 새로운 신고전주의 미술론의 기초가 확립되었으며, 그 무대가 아카데미였다. 그리고 이 무대 감독을 맡은 사람이 바로 르 브룅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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