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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의 논쟁

문서에서 인문학으로서의 미술론 강의 (페이지 43-47)

아카데미가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로마를 그리스의 파생물로서 막 연히 억측하고 있는 중에 그 같은 사실이 고고학의 발굴로 증명되 기 시작했다. 1738-1756년 사이에 고고학 발굴이 있었다. 터키 정 부가 분쟁지역에서 확보할 수 있었던 평화의 기간 동안 고고학자들 이 그리스 본토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우드나 도우킨 같은 영국의 건축가들은 조를 편성하여 소아시아와 그리스를 탐험하였다. 1750 년의 그랑프리 수상자인 르로이는 그리스에서 공부하였다. 따라서 그리스에 대한 많은 여행기들이 출판되었다. 이태리와 시실리를 포 함하여 고대 그리스 유적지는 대순회여행(Grand Tour) 일정에 포 함되기 마련이었다. 이런 과정 중에 1737년에 허큘레니엄 (Herculaneum)과 파에스툼(Paestum)의 발굴작업이, 1748년에 폼 페이의 발굴작업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르네상스 이래로 고대 로 마 문명에 대한 위대한 이념들에 수정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르네 상스와 아카데미가 모델로 삼았던 로마의 미술과 본래의 그리스 미 술, 특히 비투르비우스와 그리스 건축 간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 을 인식하게 되었다. 문헌을 통해서가 아닌 실제의 작품을 통해 고 대 그리스 미술이 서구 근대인들에게 알려진 것은 이 시기부터였 다.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첫째로 고고학의 발굴이 로마-르네상스를 모델로 한 아카데미의 외곽을 공격해 왔다면, 다음으로 A. 뒤보는 아카데미 중심부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성찰』20) (1719)에서 “때로 위대한 미술가와 영리한 기교가인 평범한 직인이 구분되고 있는 것은 화가나 시인의 의도에 의해서이거나, 그의 의 도를 수행하기 위해 그가 이용하고 있는 우리를 감동시킬 수 있는

20) A. Dubos, Reflexions critiques sur la poésie et sur la peinture (1719). 이 책이 1748년에 Critical reflections on poetry, painting and music이라는 제목으로 영역되었음.

제2주_ 고전주의 : 이성과 규칙으로서의 예술

생각이나 이미지를 발명해 냄에 의해서이다. 가장 뛰어난 운문가가 가장 위대한 시인이 아니듯, 가장 정교한 제도공이 훌륭한 화가는 아니다”라고 쓰고 있다. 이어 그는 예술의 법칙은 준수되어야 하나 법칙만으로는 단조롭고 지루한 평범함만을 만들어 낼 뿐이라고 하 면서 아카데미 내 법칙의 근간을 흔들어 놓고 있다.

세 번째로, “색채 논쟁”(color controversy)에서 색의 승리에 대 한 암시가 점증하고, 그것은 특히 문외한들 사이에서 선호되기 시 작했다. 한 예로 드 필르는 『색채론』21)에서 “채색은 회화의 필수 적 부분일 뿐만 아니라 그 종차이며, 바로 화가를 화가답게 만드는 부분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드로잉이 그림의 신체라면 색은 그 영혼이라는 식으로 색의 의미를 확대시켜 놓고는 “나는 기술자 (artist)로서는 라파엘을 선호하나 화가(painter)로서는 티티안이 더 위대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제껏 색의 이론이 간과되어 왔 던 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커다란 변화라 할 수 있다. “드로잉에는 비례와 해부학에 기초를 둔 규칙이 있으나 …… 색에는 알려진 어 떠한 규칙도 없다. 즉 오직 관찰만이 색을 알아볼 뿐인데, 관찰에는 규칙이 요구하는 정확성이 결핍되어 있다.”는 견해 때문에 이제껏 색이 간과되어 왔던 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커다란 변화라 할 수 있 다. 이처럼 색에 대한 점증적인 평가 때문에 이태리 대가들에 대해 서만 표해졌던 독점적인 존경심이 다소 수정되었다. 드 필르는 유 럽을 여행하는 동안 그가 보았던 반 아이크, 브뤼겔, 뒤러와 같은 작가들의 그림에도 장점이 전혀 없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 다. 그런 변화된 입장에서 드 필르는 렘브란트의 그림을 구매하고 전시한 최초의 프랑스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러는 중 루벤스의 명성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미술계를 공격해 들어 왔으며, 드로잉 과 색의 옹호자들은 마치 그들의 이상을 상징할 이름을 원했다는 듯 각각 푸쌩과 루벤스의 편에 가담했다. 다소의 이단적인 소지를 담고는 있지만 그의 견해들은 고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21) Roger de Piles, Dialogue sur le coloris (1673)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5기 제8강 인문학으로서의 미술론 강의

하고 있음을 피력하고 있다. 따라서 푸쌩주의자들과 루벤스주의자 들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졌으며, 아카데미는 루벤스를 티티안이나 카라치와 같은 대가의 차원으로 그 명부에 올려놓게 되었다. 아카 데미의 사고방식을 지니기는 했지만 드 필르는 대가들의 수치상의

“저울”(Balance)을 작성해 놓고 루벤스에게 라파엘과 같은 점수를 매겨 주고 있다.

구분 구도 드로잉 색 표현 합계

라파엘 17 18 12 18 65

렘브란트 15 6 17 12 50

루벤스 18 13 17 17 65

티티안 12 15 18 6 51

푸쌩 15 17 6 15 53

마지막으로, 색채논쟁과 함께 사실주의 논쟁(realist controversy)이 있다. 신기하게도 드로잉 대 색, 이상 대 현실이라 는 아카데미의 두 논쟁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 이른바 이상적 형상 은 드로잉만으로 그 모방이 가능하며 현실적 형상은 색으로만 그 표현이 가능하다는 연관성이 있는 듯한 식의 사고가 발전되고 있었 다는 점이다. 따라서 색에 대한 관심은 사실주의를 여는 데 참여하 게 되었다. 여기에는 이상이 아닌 개체들에 대해 철학적 의미를 확 보해 준 라이프니츠 단자론(monad-theory)이 관계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여기서 긴 설명을 할 수가 없다.

어느덧 구체제가 되어버린 아카데미의 힘은 나약해졌고, 그것의 붕괴는 임박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카데미 이설이 성립되기 이전의 먼 과거로 눈과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고 전적 사고를 보다 깊이 연구하거나 혹은 그것을 완전히 거부하는

제2주_ 고전주의 : 이성과 규칙으로서의 예술

데로 나아갔다. 이를 깊이 연구한 자들은 고고학자처럼 고대 그리 스를 발굴하거나 빈켈만처럼 신고전주의 이론을 정립하는 데로 나 아갔으며, 이를 거부한 자들은 중세를 선망하는 데로 인도되었다.

문서에서 인문학으로서의 미술론 강의 (페이지 4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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