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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브룅과 아카데미 지론

문서에서 인문학으로서의 미술론 강의 (페이지 36-43)

제2주_ 고전주의 : 이성과 규칙으로서의 예술

1643년 즉위한 루이 ⅩⅣ세 시대의 마자랭에 의해 1648년 창설된 회화 · 조각 아카데미는 필요한 모든 권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필요 한 책임감을 받아들이는 일을 게을리 하지도 않았다. 오랜 고대 시 기를 달려오면서 확실성의 평화를 갈망하던 미술가의 영혼은 이제 하나의 군주, 하나의 미학의 기준에 기꺼이 승복하게 되었다. 때문 에 미술의 역사상 문학에 있어서나 다름없이 미술의 영역에 있어서 도 새로운 신고전주의 미술론의 기초가 확립되었으며, 그 무대가 아카데미였다. 그리고 이 무대 감독을 맡은 사람이 바로 르 브룅이 었다.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5기 제8강 인문학으로서의 미술론 강의

카데미”(French académie at Rome)가 설립되었고, 그것은 로마에 가서 미술교육을 시키기 위한 국가적 제도의 소산이었다. 그것은 아카데미에 예속되어 있었으며 아카데미 회원의 감독 하에 운영되 었다. 경쟁을 통해 선발된 학생들은 아카데미에서 배운 그들의 공 부를 완성하기 위해 국비로 로마에 가서 수학할 수 있었다. 따라서 아카데미는 처음부터 교육기관으로서의 책임과 아카데미 미술의 이 태리적 전통을 인식하고 그것을 프랑스적으로 강화시키기 위한 국 가기관이었다.

아카데미의 설립과 아카데미의 부설 기관을 이끌어 나간 사람은 샤를 르 브룅(1619-1690)이었다. 그는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푸쌩 보다 26년이나 아래였다. 그는 이미 15세 때에 리슐리외로부터 그 림 제작 의뢰를 받았다. 그는 이미 옛날의 길드에 반대하던 센터 역할을 했던 시몽 부에의 아틀리에에서 작업을 하였다. 루이 ⅩⅣ 세가 즉위하기 1년 전인 1642년 그는 로마에서 푸쌩을 만났고, 거 기서 약 4년간 공부하였다. 그가 파리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화 가로서 명성을 얻은 후였으며, 왕실 생활이 적성에 맞았기 때문에 마자랭과 콜베르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영향력이 있고 열정적인 골동품 애호가였던 드 샤르무와의 친분을 통해 르 브룅은 오랜 전 통의 중세 길드에 대항하여 그것을 타도할 수 있었다. 콜베르는 르 브룅을 아카데미의 모든 공직에 잇따라 임명하였으며, 루이 ⅩⅣ세 는 그에게 작위까지 수여하였으며, 첫 국왕담당 “상임 화 가”(painter in ordinary)로 임명하기도 하였다. 르 브룅은 특히 루 브르와 베르사유와 같은 궁전의 중요한 장식적 작업에 관한 일을 맡았으며, 또한 작업을 감독하였다. 1683년 콜베르가 사망하자 루 이 ⅩⅣ세의 지속적인 총애에도 불구하고 르 브룅의 권력은 쇠퇴하 였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19세기 나폴레옹 Ⅰ세의 몰락 이후의 샤를 다비드를 연상시켜주고 있다. 지병 때문에 그의 실망은 더욱 악화되어 결국 1690년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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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브룅에 의해 교육되고 실행된 아카데미의 미학은 푸쌩으로부 터 유래된 것이다. 르 브룅은 푸쌩을 열렬히 칭송하였다. 그는 푸쌩 의 양식을 모방하였으며, 자신의 그림이 푸쌩의 그림을 닮고 있는 정도에 따라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에 의해 주도 된 아카데미는 정기적으로 회의(Conférences)를 열었다. 특히 콜베 르가 의장으로 있을 당시에는 학생들에게 매년 상을 수여하곤 했는 데, 이러한 행사에서 르 브룅이나 그의 동료는 푸쌩이 한때 그랬던 것처럼 고대 미술에 관한 이론과 아름다운 자연의 모방에 관해 상 세히 설명하곤 하였다. 이처럼 아카데미의 회의는 항상 호의적이고 적극적인 데가 있었다.

르 브룅 하에서 아카데미는 미술에 법칙과 규칙을 강화했다. 리 슐리외와 콜베르가 정치의 영역에서, 말레르브와 브왈로가 문학에 서 그러했던 것처럼, 르 브룅은 미술의 영역에 있어서 질서와 정확 성의 법정을 개정하였으며, 그의 결정에는 아무도 반대할 수가 없 었다. 따라서 아카데미의 보좌역이라는 별 볼품없는 그의 지위에 반대했던 “무소속자”(Indépendent)들은 억압과 배척을 당하거나 외 국으로 추방되어야 했다. 푸쌩은 아카데미가 그렇게 되기 전에 이 미 파리를 떠났고, 고전주의 풍경 화가인 클로드 로랭(1600-1682) 은 프랑스를 떠나 이태리에 영주하였다. 아카데미 창립멤버였던 르 넹(Le Nain) 형제는 전통과는 무관한 다소 자연주의적 그림을 그렸 다고 해서 외면당한 채 무명의 생활을 견디어 냈으며, 아카데미의 쇠퇴기에 와서야 비로소 그들의 작품은 빛을 보기 시작하였다. 아 브람 보스(1602-1676) ― 훌륭한 조각가이며, “명예 아카데미 회 원”(académicien honoraire)이자 “고문”(Conseiller)이며, 가장 엄 격한 고전적 원리주의자 ― 는 르 브룅과 불행스러운 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며, 인쇄물을 통해 자신이 무죄임을 선포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파리로부터 추방당했으며, 아카데미로부터 받았던 많은 혜택 들도 취소되었다. 뒤프레스느와의 『화론』을 출간한 바 있는 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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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미냐르(1612-1695)만이 감정을 감추고 불만을 조장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르 브룅의 저서로는 그가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수년간 행한 교육내용을 종합해 편찬한 『미술교수법』(1698)16)이 있다. 거기에 “정념의 표현”에 관련된 부분이 있다. 이는 아카데미 의 방법론ㆍ추론ㆍ정의ㆍ분류의 전형을 밝혀 놓고 있는 책이다. 이 책 때문에 루이 ⅩⅣ세는 그에게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그 역시 데카르트의 방식을 따라 “정념을 명확하게 규명”

하고자 하였으며, 인간 본성의 다양한 현상들을 규칙적이고 실행 가능한 체계에 종속시키려 하였다. 우리는 제 3강에서 “감정”에 관 한 부분을 다룰 때 이에 관련하여 언급을 해 볼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아카데미는 회화의 모든 기술을 드로잉ㆍ비례ㆍ명암ㆍ배 열ㆍ색으로 분류하였으며, 의미심장하게도 드로잉을 가장 먼저 그 리고 색을 가장 마지막에 놓고 있다. 각 분야에 적용될 수 있는 이 러한 지시가 지침표로 작성되어 학생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출판되 었다. 기하학은 항상 모든 것의 기초였고, “실물다움”은 미술의 수 단이었으며, 정신의 고귀함(nobility)은 미술의 목적이었다.

프랑스인들에게 박식한 쥬니우스의 저술을 소개한 프레아르 드 샹브레이(1606–1676)는 그의 『회화론』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 다. “회화를 기계적 기술(mechanical arts)과 혼동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폐해이다. 왜냐하면 회화는 의문과 의혹만을 낳는 현학적 철학에 비해 보다 명료하며, 이성적인 논증적 과학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회화는 기하학의 원리 위에 성립되었기 때문에 재 현하고자 하는 것을 동시에 그리고 이중으로 논증할 수 있다. 그러 나 이 밖에도 그것의 아름다움을 진정으로 감상할 수 있는 다른 두 눈이 필요하다. 지성의 두 눈이 그 첫 번째이자 제일 중요한 작품

16) Le Brun, A method to learn to design the passions, proposed in a conference on their general and particular expression, T. William 역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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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재판관이기 때문이다”17)라고 말한다. 훌륭한 회화라면 자세한 말로 설명될 수 있다고 확고히 믿었기 때문에 완전한 화가가 꼭 배 워야 할 필수적 원리들이 있었다. 이 원리는 비트루비우스주의에서 금과옥조로 신봉되어온 “신의 질서”(l'ordre divin)와 유사한 것이 었다. 비례, 원근법, 해부학 등의 문제점들을 다룬 많은 문헌이 있 었으며, 이들은 아카데미의 학설을 설명해주는 것들이었다. 아카데 미는 그들 그림의 주제까지도 지정하였으며, 미술의 도덕성과 고상 함을 강조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바자리에 의해 간단히 언급되었 던 “위대한 양식”의 개념은 미술의 중요성을 드높였다. 회화의 “가 장 고상한 주제”에 관한 심오한 토의가 열리곤 하였는데, 역사와 고전적 신화가 통상적으로 고상함의 명예를 부여받고 있었다. 이 같은 신고전주의의 이론은 문학의 경우처럼 그대로 영국으로 들어 갔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조슈아 레이놀즈를 맞게 된다.

프랑스 아카데미가 설립된 지 100년이 지난 1768년에 영국에서 는 왕립미술원(Royal academy of arts)이 설립되었다. 여기에 화 가 J. 레이놀즈 경이 초대 원장을 맡았으며, 회화 · 조각 · 건축의 분야에서 40여 명의 고위 회원들에 의해 그 사무가 집행되었다. 이 는 프랑스 아카데미의 수정판이었으며, 영국 신고전주의 및 그것을 주도하는 미술학교가 되었다. 프랑스 아카데미를 따라 상 제도를 제정하여 매년 또는 격년마다 학생들이 프랑스와 이태리를 여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시상식에서 행해진 레이놀즈 경의 『미술 강연』18)과 아직도 모 든 금메달 시상에 수반되고 있는 『강연』의 사본은 당시 영국에서 교육된 아카데미 이설의 충실한 증명서가 되고 있다. 그의 『강 연』은 엄숙하고 진실된 것이기는 하나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로 마쪼나 쥬니우스의 장황한 의역처럼 들린다. 레이놀즈는 단호하고

17) Fréart de Chambray, Idée de la perfection de la peinture, John Evelyn 역(1668), p. 3.

18) J. Reynold, Discourses on art (1769부터 1790에 이르기까지 행해졌던 강연. 제7강까지의 강연은 1778년에 처음 출판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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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고전주의를 권하고 있다. 그는 항상 새로운 것을 시기하였 고, 천재의 공상적인 작품을 규제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고대미술과 옛 대가들을 연구할 것을 명하였으며, 그에 따르면 훌륭한 취미는 누구나 개발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위대한 화가들에 의해 확립된 미술의 규칙에 젊은 학 생들이 복종할 것을 권한다. 여러 시대의 동의를 얻은 그러한 모델은 비평의 주제로서가 아니라 모방의 주제로서 완전하고 절대 필수적인 지침으로 간주되어야 한다.19)

따라서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회화에 있어서 장엄한 주제를 선호 하였다. 따라서 라파엘, 미켈란젤로, 푸쌩 등이 그에게는 정확한 모 델이었다.

의례 그러했듯, 레이놀즈는 색의 구성을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편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의 그림들에는 이러한 측면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가장 밝은 색조, 또는 물감의 광택보다는 가장 순수하고 정확한 윤곽선을 원하였다.

색은 단지 표면적인 우아함일 뿐이다. “작품이 장엄함(grandeur)과 숭고함(sublimity)을 열망함에 있어 색은 연약하고 고려될 가치도 없다.” 따라서 그는 베니스 화가들을 다른 회화만큼 높이 평가할 수도 없었으며, 계속 티티안의 서투른 제도술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모델이 지니고 있는 개인적인 특이함을 관찰할 것을 충고하기 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그는 이상주의자였다. 그를 그렇게도 감동시 켰다고 그가 말하는 위대한 양식(The Great style)이란 괴상하고, 평범한 것을 회피하는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내 견해로는 미술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은 하나의 형태, 즉 지역적인 관습, 개별성, 세부 사항 등을 초월하는 것 속에 있는 것 같다”고 쓰고 있다. 이처럼 레이놀즈는 완벽한 아카데미인이었다.

19) 위의 책, 제1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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