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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 폴 틸리히『조직신학』I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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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폴 틸리히『조직신학』I 서론1) I. 관점

1. 메시지와 상황

신학은 교회의 한 기능으로서 교회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된 다. 곧 모든 신학체계는 다음과 같은 교회의 두 가지 기본적인 요구사항을 충족시키지 않 으면 안 된다; 기독교의 메시지의 진리를 진술하는 일과 이 진리를 모든 새로운 세대를 위 해서 해석하는 일.(the statement of the truth of the Christian message and the interpretation of this truth for every new generation)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은 두 극(極) 사이에서, 말하자면 신학이 그 토대로 삼고 있는 영원한 진리와 이 영원한 진리 가 받아들여지고 있는 시간적인 상황이라는 두 극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다. 단지 몇몇 신 학체계만이 이 두 요구사항을 완전하게 충족시키고 있다. 대부분의 신학체계는 진리의 요 소를 희생시키거나 아니면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양쪽의 단 점을 결합하고 있다. 이들은 영원한 진리를 잃어버릴까 두려워하여 영원한 진리를 이전의 신학작품이나 전통적인 개념 및 해결책과 동일시하고 있고 또한 이것들을 달라진 새로운 상 황에 부과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곧, 이들은 영원한 진리를 이 진리의 시간적인 표현과 혼 동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유럽의 정통주의 신학(theological orthodoxy)에 있어서 명백 하게 나타나고 있다―유럽의 정통주의 신학은 미국에서는 근본주의(fundamentalism)로 알려 져 있다. 만일 근본주의가 예를 들어, 성서적인-복음적인 형태의 근본주의가 보여주고 있 는 것처럼 반신학적인 편견과 결합된다면 어제의 신학적인 진리는 오늘이나 내일의 신학적 인 진리에 맞서서 불변의 메시지로서 옹호된다. 근본주의는 모든 상황을 초월하여 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과거의 상황으로부터 말하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과 접촉할 수 없다. 근본주 의는 유한하고 일시적인 것을 무한한 것으로 그리고 영원히 타당한 것으로 드높인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근본주의는 마성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근본주의는 진리를 탐구할 때 필요한 겸손한 정직성을 파괴하고, 지성적인 신자들의 양심을 분열시키고, 이들이 희미 하게 의식하고 있는 진리의 요소를 강제로 억압함으로써 이들을 광신적으로 만들고 있다.

물론, 미국의 근본주의자들과 유럽의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오히려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 는 역사적인 또는 개인적인 상황 때문에 그들의 신학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지지 받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그들이 말하는 사실은 명백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에 대한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모든 신학 작업의 한 극으로서 의 “상황”(situation)은 개인이나 집단의 심리학적인 또는 사회학적인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 다. 상황은 무엇보다도 실존에 대한 이들의 해석을 표현하고 있는 과학적인, 예술적인, 경 제적인, 정치적인, 윤리적인 형식을 의미한다. 신학이 적절하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 황은 개인으로서의 개인의 상황도 아니고, 집단으로서의 집단의 상황도 아니다. 신학은 설 교도 아니고 상담도 아니다. 따라서 설교나 목회에 대한 성공적인 적용이 반드시 어떤 신 학의 진리여부를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없다. 마치 개인이나 공동체의 통합의 시대

1) 틸리히, 유장환역,『폴 틸리히 조직신학』I (서울 : 한들출판사, 2001),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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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자유주의 신학의 성공이 그의 진리를 보증하지 못한 것처럼 근본주의자들의 신학사상이 개인이나 공동체의 분열의 시대에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그들의 신학의 타당성 을 증명하지 못한다. 신학이 고려해야만 하는 “상황”은 실존에 대한 창조적인 해석이다.

이 해석은 역사의 모든 시기에 모든 종류의 심리학적인, 사회학적인 조건들 속에서 수행되 어 왔다. 확실히 상황은 이러한 조건적인 요소들로부터 독립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신학 은 이러한 조건적인 요소들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이론이나 실천 속에서 발견하는 이러한 요소들의 문화적인 표현을 다루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신학은 동서의 정치적인 분열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고 이러한 분열에 대한 정치적인 해석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또한 신학은 정신병의 만연이나 정신병에 대한 우리의 점증하는 자각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고 이러한 경향에 대한 정신의학적인 해석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결국 신학이 응답해야 만 하는 상황은 어느 특정한 시대에 수행된 인간의 창조적인 자기 해석의 총체이다. 근본 주의와 정통주의는 이와 같은 신학의 과제를 거부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서 이들은 신학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

한편, “케리그마”(선포된 말씀)의 신학이 변화하는 상황의 요구에 맞서서 메시지의 “변화 하지 않는 진리”(kerygma)를 강조하는 한 케리그마의 신학은 근본주의나 정통주의와 밀접 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물론 케리그마의 신학은 정통주의를 포함하여 모든 신학을 기독교 의 메시지의 기준에 종속시킴으로써 근본주의의 단점을 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메시지는 성서 안에 내포되어 있지만 기독교의 메시지는 성서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또한 기독교의 메시지는 기독교 신학의 고전적인 전통 속에 표현되어 있지만 기독교의 메시지는 저 전통의 특별한 표현과 동일시 될 수 없다. 종교개혁의 신학과 오늘날의 칼 바르트와 그 의 학파의 신-개혁신학은 케리그마 신학의 뛰어난 예들이다. 루터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 정통주의 사상가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는데 오늘날 바르트와 그의 추종자들은 근본주의자들 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고 있다. 이것은 루터를 정통주의 신학자로, 바르트를 신정통주의 신학자로 분류하는 것이 전적으로 공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루터는 정통주의 자가 될 수 있는 위험 속에 있었고 바르트도 그렇게 될 수 있는 위험 속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루터와 바르트는 모두 왜곡된 전통과 도식적으로 성 서를 사용하는 그릇된 행태에 맞서서 싸웠고, 성서와 전통 안에 있는 영원한 메시지를 다시 발견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하였다. 심판과 은혜라는 성서의 결정적인 범주의 이름으로 수행 된 로마 카톨릭의 중재와 위계질서의 체계에 대한 루터의 비판, 바울의 메시지에 대한 루터 의 재발견 그리고 동시에 성서의 영적인 가치에 대한 루터의 용기있는 평가, 이 모든 것은 진정한 케리그마의 신학의 본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찬가지로 자유주의 신학이 성취한 신- 개신교의 부르즈와적인 종합에 대한 바르트의 비판, 기독교의 역설에 대한 바르트의 재발 견, 그리고 동시에 로마서에 대한 바르트의 자유로운 영적인 주석과 급진적인 역사 비평학 에 대한 바르트의 자유로운 수용, 이 모든 것은 진정한 케리그마의 신학의 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양자 모두 인간의 상황과 그 요구에 맞서서 영원한 진리를 강조하고 있었다. 양 쪽 모두에서 이러한 강조는 예언자적인 힘과, 우리의 영혼을 뒤흔들고, 변형시키는 힘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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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 있었다. 이와 같은 케리그마신학의 반발이 없었다면 신학은 ‘상황’이라는 상대성 속에 서 자신을 상실하고 말았을 것이다. 말하자면 신학은 하나의 ‘상황’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른바 독일 기독교인들의 종교 국가주의와 이른바 미국의 인본주의자들의 종교 진보주의는 이러한 상실의 실제적인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상황”은 신학의 작업에서 배제될 수 없다. 루터는 신학교리를 형성할 때 그 자 신의 유명론적인 지식과 멜랑히톤의 인본주의적인 지식을 사용할 정도로 편견이 없는 사람 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통주의자의 태도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피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상황”의 문제를 의식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그는 개신교의 정통주의 시대를 위한 길을 예 비했다. 바르트의 위대성은 그는 “상황”의 빛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사상을 수정하여 그 자신의 사상의 추종자가 되지 않도록 끝까지 노력했다는데 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케리그마 신학자이기를 중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 다. 그는 모든 진술을 궁극적인 진리로부터 직접 이끌어 오려고 시도했는데 그러한 시도 속에서 “신정통주의”(neo-orthodox)의 신학방법을 사용하는 잘못에 빠졌다. 예를 들어, 그 는 히틀러에 대한 투쟁의 의무를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이끌어 왔다.2) 신정통주의의 신 학방법은 오늘날 유럽에서 복고주의(repristination)의 신학이 강화되는데 일조했다. 이처럼 신학에서 “상황”이라는 극이 무시된다면 반드시 위험한 결과가 초래될 수 밖에 없다. 오직

“상황”에 대한 용감한 참여만이, 다시 말하면 현대인의 실존에 대한 해석을 표현하고 있는 다양한 문화적인 표현에 대한 참여만이, 진정한 케리그마 안에 내포된 자유와 그의 정통주 의적인 고착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케리그마 신학의 동요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케리그마 신학은 그의 완성을 위해서는 변증신학이 필요한 것이다.

2. 변증신학과 케리그마

변증신학은 “대답하는 신학”(answering theology)이다. 변증신학은 영원한 메시지의 힘 속에서 그리고 상황에 의해서 마련된 수단을 통해서 “상황”이 안고 있는 물음에 대답하려는 신학이다.

“변증”(apologetic)이란 용어는 초대교회에서는 높은 영예를 가지고 있었던 용어이지만 오늘날에는 기독교가 현대의 인본주의, 자연주의, 역사주의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 기 위해서 사용한 그릇된 방법 때문에 불명예스러운 용어로 전락되었다. 특히, 무지로부터 의 증명(argumentum ex ignorantia)의 방법을 사용한 변증학은 그 논리가 매우 빈약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불러 일으켰다. 곧, 이것은 완전히 계산 가능한 ‘내재적인’ 세계 속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행동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 우리의 과학 지식과 역사 지식 속에서 틈을 발견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이 발전할 때마다 기존의 변증 학이 내세운 방어선들은 하나씩 포기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열렬한 변증론자들은 이러 한 지속적인 후퇴에도 불구하고 결코 단념하지 않았고, 오히려 최근의 과학적인 지식의 새 로운 틈 속에서 신의 활동을 위한 공간을 정립하기 위해서 노력하였고 그 정립을 위한 새로

2) 바르트 “스위스에서 영국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오늘의 기독교인의 대의』, (뉴욕;맥밀란,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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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계기를 가장 최근에 발달된 물리학과 역사학 속에서 발견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와 같은 볼품없는 접근방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변증학’이라고 불리 우는 모든 것을 불신하게 만들 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변증적인 방법을 불신하는 것은, 특히 케리그마의 신학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보다 심오한 이유 때문이다. 사실, 누구든지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묻는 사람과 공통적인 어떤 것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변증학은 아무리 모호할지라도 공통근거를 전제한다. 그러나 케리그마의 신학자들은 “신학적인 순환”(theological circle) 밖에 있는 사람들과의 어떠한 공통근거도 부정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공통근거 가 메시지의 유일성을 파괴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그들은 로고스의 수용을 공통근거로 삼았던 초대 기독교의 변증학자들을 지적한다. 또한 그들은 플라톤주의를 공통근거로 삼았 던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지적한다. 또한 그들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을 사용한 것을 지적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변증신학이 계몽주의, 낭만주의, 헤겔주의, 칸트주의, 인본주의, 자연주의를 공통근거로 삼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들은 각각의 경우 에 공통근거라고 생각되었던 것은 실제로는 “상황”의 근거였다는 것과 신학이 이러한 상황 속으로 들어갔을 때 신학은 그 자신의 근거를 상실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노력한다. 최근 의 케리그마 신학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 모든 형태의 변증신학은 변하지 않는 진리인 케 리그마의 포기가 아닐 수 없다.(여기서 변증신학은 사실상 18세기초 이후의 모든 비근본주 의적인 신학을 의미한다) 만일 이것이 신학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면 참된 신학은 오직 케리그마신학 뿐이다. 그러나 신학이 상황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 어떠한 대답도 상황이 안고 있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서 주어질 수 없다. 적어도 어떤 대답도 대답으로 서 느껴질 수 없다. 메시지는 마치 돌이 던져지는 것처럼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던져 질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특별한 심리적인 상태, 예를 들어 신앙부흥운동과 같은 상태에 서는 효과적인 설교방법일 수 있다. 이것은 심지어 호전적인 신학용어를 통해서 표현된다 면 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의 신학적인 기능의 목적을 성취할 수는 없 다. 더욱이 이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심지어 케리그마 신학조차도 그의 시대의 개념적인 도구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성서의 구절들을 반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심지어 그렇게 할 경우에도 케리그마 신학은 성서의 다양한 저자들의 개념적인 상황을 피할 수는 없다. 언어가 모든 상황의 근본적인, 포괄적인 표현이기 때문 에 신학은 “상황”의 문제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케리그마 신학은 그의 배타적인 초월주의를 버려야만 하며, 오늘의 상황이 그 앞에 제기하고 있는 여러 물음들에 대해서 대 답하려고 시도하는 변증신학의 태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 변증신학은 케리그마 신학의 실존과 그의 여러 주장들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경 고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만일 변증신학이 자신의 진술의 실체이며 기준인 케리그마 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변증신학은 자기 자신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사실 지난 2세기 동안 신학은 변증적인 문제에 의해서 결정되어 왔다. “기독교 메시지와 현대정신”은 전통적인 정통주의의 종말이후 가장 지배적인 주제가 되어 왔다. 영속적인 문제는 과연 기독교의 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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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가 자신의 본질적인, 유일한 성격을 상실하지 않고 현대정신에 적용될 수 있을까였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몇 신학자는 기독교의 메시지 의 이름으로 또는 현대 정신의 이름으로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기독교의 메 시지와 현대정신 사이의 “대립”(diastasis)을 강조했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압도 적이 되었다―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긍정보다는 부정을 할 때 보다 강력해진다. 그러나 신학 은 “종합”(synthesis)을 시도했던 사람들의 끊임없는 노력 때문에 항상 살아있을 수가 있었 다. 그들이 없었다면 전통적인 기독교는 편협하고 미신적인 종교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 고 보편적인 문화운동은 그것이 필요로 하는 “육체의 가시” 말하자면 문화적으로 높은 위치 에 있는 정직한 신학없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전통주의 신학과 신정통주의 신학에서 유행 했던 지난 2세기 동안의 신학에 대한 전반적인 비난은 바르트 자신이 「19세기의 개신교 신학」(Die protestantische Theologie im neunzehnten Jahrhundert)에서 인정하고 있듯 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변증적인 경향이 각각의 경우에 기독교의 메시지를 해체 했는지 안했는지의 여부를 묻는 것은 확실히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 보다 더 필요한 것 은 메시지와 상황, 그 어느 것도 제거하지 않고 이 둘을 서로 연관시킬 수 있는 신학방법을 찾는 일이다. 만일 그러한 신학방법이 발견된다면 “기독교와 현대정신”이라는 지난 2세기 동안 물음은 보다 성공적으로 대답될 수 있을 것이다. 이후로 전개되는 나의 조직신학은 메시지와 상황을 결합하는 한 방법으로서 “상관관계의 방법”(the method of correlation)을 사용하려는 시도이다. 이것은 상황이 안고 있는 물음을 메시지가 안고 있는 대답과 연관시 키려는 시도이다. 이 방법은 자기 기만적인 변증신학이 한 것처럼 물음으로부터 대답을 이 끌어내지 않는다. 또한 이 방법은 자기 기만적인 케리그마신학이 한 것처럼 대답을 물음과 연관시키는 것 없이 대답을 제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상관관계의 방법은 물음과 대답, 상 황과 메시지, 인간의 실존과 신의 현현을 상관시키려는 방법이다.

물론 이러한 상관관계의 방법은 임의로 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다. 이 방법은 잔꾀도 아 니고 기계적인 장치도 아니다. 이것은 그 자체가 신학적인 주장이며, 모든 신학적인 주장 처럼 정열과 모험 속에서 실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이 방법은 궁극적으로는 그 위 에 세워진 신학체계와 다른 것이 아니다. 체계와 방법은 서로에 속하여 있는 것이며, 서로 를 통해서 판단되는 것이다. 만일 미래의 세대의 신학자들과 비신학적인 사상가들이 이 방 법을 통해서 기독교 메시지를 그들 자신과 모든 인간의 상황 속에 내포되어 있는 물음에 대 한 대답으로서 이해할 수 있었다고 인정한다면 이 방법은 긍정적인 판단을 얻을 수 있을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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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폴 틸리히『조직신학』제1부 계시론 II-4. 계시의 근거3)

1) 하나님과 계시의 신비

변증신학에서 사용된 신학방법을 적용한 결과, 우리는 계시의 개념을 위로부터(above) 곧 계시의 신적인 근거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below) 곧 계시의 상황 속에 있는 인간으 로부터 고찰해 왔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앞에서 계시의 의미와 현실성의 문제를 고찰했으 므로 계시의 근거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자.

계시의 근거(ground)는 “원인”(cause)이라는 말의 범주적인 의미에서의 계시의 “원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계시의 근거는 실존 속에 나타난 “존재의 근거”를 의미한다. 한편, 존재 의 근거와 그의 계시적인 현현 사이의 관계는 최고의 존재자에게서 기원하고 있는 그리고 유한한 사건들의 과정을 변형시키고 있는 유한한 행동들의 견지에서만 표현될 수 있다. 이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계시의 근거와 계시를 받는 사람의 관계는 단지 인 격적인 범주 속에서만 생각될 수 있다. 왜냐하면 한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은 비록 인격 이 상일 수 있고 또한 인격 이상이어야만 할지라도 인격 이하의 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와 같은 상황 때문에 신학자는 자기-계시의 신적인 행위를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된 모든 개념들의 상징적인 성격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신학자는 그들의 의미가 범주적 이지 않다는 것을 지시하는 용어들을 사용하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한다. “근거”(ground)는 바로 그와 같은 용어이다. 이 용어는 원인과 실체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으며, 동시에 이들 모두를 초월하고 있다. 이것은 계시의 근거란 계시의 결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원인도 아니고, 스스로 계시의 결과를 발산하고 있는 실체도 아니고, 오히려 계시 속 에 나타나지만 그의 나타남 속에서도 여전히 신비를 상실하고 있지 않은 신비라는 것을 지 시하는 것이다.

이른바 존재의 근거에 대한 종교적인 언어는 하나님이다. 모든 조직신학의 주요한 어려 움은 조직신학의 각각의 부분이 그 밖의 다른 모든 부분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계시 의 근거로서의 신론은 “존재와 신”의 교리를 전제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존재와 신의 교 리는 계시의 교리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볼 때, 신론의 맥락 안에서만 충 분하게 설명될 수 있는 몇몇 개념들을 미리 설명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일 우리가, 확실히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처럼, “신적인 삶”(divine life)이라는 상징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경험된 삶의 기본적인 구조와 우리 삶이 근거하고 있는 존재의 근거사 이에는 유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유비에 근거하여 조직신 학의 모든 부분 속에 각기 다른 방법으로 나타나 있는 그리고 궁극적인 계시에 대한 삼위 일체적인 해석의 토대가 되고 있는 신적인 삶의 세 가지 요소들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신적인 삶은 깊이와 형식의 역동적인 통일성이다.(the divine life is the dynamic unity

3) 틸리히, 유장환역,『폴 틸리히 조직신학』I (서울 : 한들출판사, 2001), 254-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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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 depth and form) 먼저 신적인 삶의 깊이 곧 신적인 삶의 무진장하고 지울 수 없는 성 격은 신비적인 언어로는 “심연”(abyss)으로서 일컬어지고 있다. 다음으로 신적인 삶의 형 식 곧 신적인 삶의 의미와 구조는 철학적인 언어로는 “로고스”(logos)로서 일컬어지고 있 다. 끝으로 이 두 요소의 역동적인 통일성은 종교적인 언어로 “영”(spirit)으로서 일컬어지 고 있다. 신학자들은 계시의 근거를 지시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세 가지 용어를 모두 사 용해야만 한다. 계시를 신비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신적인 삶의 심연적인 성격이다.

신비의 계시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신적인 삶의 논리적인 성격이다. 그리고 기적과 탈아 (계시는 여기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의 상관관계를 창조하는 것은 신적인 삶의 영적인 성 격이다. 계시의 근거를 지시하고 있는 이와 같은 세 개념들은 모두 사용되지 않으면 안 된 다. 만일 신적인 삶의 심연적인 성격이 무시된다면 합리주의적인 이신론이 계시를 정보로 바꾸어 버릴 것이다. 만일 신적인 삶의 논리적인 성격이 무시된다면 비합리주의적인 유신 론이 계시를 타율적인 복종으로 바꾸어 버릴 것이다. 만일 신적인 삶의 영적인 성격이 무 시된다면 계시의 역사는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론은 항상 신적인 삶과 그의 자기-현현에 대한 삼위일체적인 해석에 근거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결국, 계시와 구원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창조성의 요소들이다. 하나님은 개인적인, 사회 적인 그리고 우주적인 삶의 과정들을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그들의 성취를 향해 이끈다.

여기서 계시적인 경험들은 일반적인 경험들 속에 파묻혀 있다. 계시적인 경험들은 이러한 일반적인 경험들과 구별될 수는 있지만 분리될 수는 없다. 세계사는 계시의 역사의 토대이 며, 계시의 역사는 세계사의 신비를 계시한다.

2) 궁극적인 계시와 하나님의 말씀

계시론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론으로서 전개되어 왔다. 만일 말씀이 존재의 근거 안에 있는 로고스적인 요소로서 해석된다면 이것은 가능한 것이다. 사실 고전적인 로고스 론은 말씀을 이와 같이 해석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자주―반(半) 문자적으로 그리 고 반(半) 상징적으로―선포된 말(spoken word)로서 이해되어 왔고 특히 오늘날 “말씀의 신 학”은 말로 말하여진 말의 신학으로서 대두되고 있다. 계시의 이러한 지성화는 본래의 로 고스 기독론의 의미와는 상반된 것이다. 로고스 기독론은 지나칠 정도로 주지주의적인 것 이 아니었고 실제로는 이러한 위험성을 막을 수 있는 무기였다. 만일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가 로고스로서 일컬어진다면 로고스는 계시적인 말이 아니라 계시적인 실재를 지시하는 것 이다.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로고스론은 선포된 말씀이나 씌여진 말씀의 신학의 형성을 방 지할 수 있는 교리였다―이와 같은 신학의 형성은 오늘날 개신교가 자주 빠지고 있는 함정 이 아닐 수 없다.4)

4) 그리스 정신에 의한 기독교의 수용이 기독교의 지성화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던 리츨학파의 견해와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그리스의 정신은 그 자체가 아니라 단지 그의 제한되고 왜곡된 현 상들 속에서만 “주지주의적”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식은 “불변적인 것과의 결합” 곧 “정말로 실제하는 것과의 결합”을 의미했다. 형이상학적인 지식은 실존적인 지식이었다.

심지어 경험주의자이면서 논리주의자인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도 형이상학은 신비적인 요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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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이란 용어는 여섯 가지의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말씀”

은 존재의 근거 자체 안에 있는 신적인 자기-현현의 원리이다. 근거는 모든 형식이 그 안 에서 사라지는 심연일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형식이 그로부터 나오는 근원을 의미한다.

따라서 존재의 근거는 자기-현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곧 존재의 근거는 로고스적인 성 격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신적인 삶에 첨가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신적인 삶 자체이다. 존재의 근거는 그의 심연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논리적”이다. 곧 이것은 자신의 “로고스”를 포함하고 있다.

둘째, 말씀은 창조의 매개체이다. 곧 말씀은 존재의 심연의 침묵의 신비와 구체적인, 개 별화된, 자기 연관적인 존재자들의 충만함 사이를 매개하는 생동적이며 영적인 말이다. 신 플라톤주의가 제시한 유출의 과정과는 반대로 말씀을 통한 창조는 창조의 자유와 피조물의 자유 이 모두를 상징적으로 지시하고 있다. 따라서 존재의 근거의 현현은 영적인 것이지 기계적인 것은 아니다.(예를 들어 스피노자의 경우처럼)

셋째, 말씀은 계시의 역사에 나타난 신적인 삶의 현현을 의미한다. 곧 말씀은 계시의 상 관관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인 말이다. 만일 계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일컬 어진다면 이것은 모든 계시가 (비록 그의 매개체가 인간이하의 것일지라도) 중심을 가지고 있는 자아에게 전달된다는 것과 이 자아가 그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모든 계시가 로고 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계시의 탈아는, 비록 이것이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생산될 수 없을지라도, 비로고스적인 (비합리적인)것은 아니 다. 이것은 영감을 받은 것이며 영적인 것이다. 곧 이것은 신비의 현현 속에서 심연의 요 소와 로고스의 요소를 결합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말씀은 궁극적인 계시 속에 나타난 신적인 삶의 현현을 의미한다. 곧, 말씀은 그리 스도로서의 예수에 대한 이름이다. 신적인 모든 현현의 원리인 로고스는 실존의 조건 아래 에서 역사적인 존재가 되었고, 이 형식 속에서 우리에 대한 존재의 근거의 근본적이면서도 결정적인 관계,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신적인 삶의 마음”을 드러냈다. 말씀은 예수가 말한 말들의 총체가 아니다. 말씀은 그리스도의 존재이며 그의 말과 행동은 그의 존재에 대한 표현이다. 이와 같이 말씀과 말로 말하여진 말들을 동일시하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게 불가 능한 것이기 때문에 성육신을 받아들이고 있는 신학자들이 어떻게 그와 같은 혼란을 주장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다섯째, 말씀이란 용어는 궁극적인 계시의 문서와 그의 특별한 준비인 성서에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일컬어진다면 우리는 거의 피할 수 없는 신학적인 혼란에 부딪치게 된다. 축자영감설, 성서 본문에 대한 부정직한 연구 태도, “단성

있었다. 지식을 통제를 위해서 객관적인 관찰로 환원하는 것은 그리스적이지 않고 현대적 인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리스 철학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가 그리스 철학에 의해서 지성화되었다 고 본 모든 교리사에 대한 재해석을 요구한다―하르낙은 그와 같은 해석의 고전적인 대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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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적”인 성서무오류론 등과 같은 결과들은 그와 같은 동일시에서 비롯되었다. 성서는 다음 과 같은 두 가지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다. 먼저 성서는 궁극적인 계시의 문서이 다. 다음으로 성서는 궁극적인 계시에 참여하고 있는 문서이다. 아마도 말씀과 성서의 동 일시만큼 말씀의 교리를 오해시킨 것도 없을 것이다.

여섯째, 설교와 교육을 통해서 선포된 교회의 메시지는 말씀으로서 일컬어질 수 있다.

말씀이 교회에 주어져 있는 그리고 교회에 선포되어야만 하는 객관적인 메시지들을 의미하 는 한 이것은 성서의 계시나 다른 모든 계시도 똑같이 말씀이라는 의미에서 말씀이다. 그 러나 말씀이 교회의 실제적인 설교를 의미하는 한 이것은 단지 말이지 전혀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 안에는 신적인 현현이 없는 인간의 말에 불과하다. 말씀은 설교의 말들의 의미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선포되고 있는 말들이 가지고 있는 힘에도 의존한다. 또한 말 씀은 듣는 사람의 이해력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설교의 내용에 대한 듣는 사람의 실존적인 수용성에도 의존한다. 말씀은 설교자와 듣는 사람 어느 한쪽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상 호 연관 속에 있는 양쪽 모두에 의존한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요소와 그들의 상호 의존성 은 인간의 말들이 말씀이 될 수 있도록 곧, 신적인 현현이 될 수 있도록 그 “배열”을 구성 한다. 인간의 말들은 말씀이 될 수도 있고 말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교회의 어떠한 활동도 그것이 말씀을 표현하고 있다는 확실성 속에서 실행될 수 없다. 어느 성직 자도 그가 설교할 때 말씀을 말하려고 한다는 그의 의도 이상의 것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그는 그가 과거에 말씀을 말했다거나 앞으로 말씀을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는 계시적인 배열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한 이상 그는 말씀을 설교할 수 있는 어떠한 힘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리 신학적으 로는 옳은 말을 하고 있을지라도 단지 인간의 말들을 말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아무리 그 의 명제가 신학적으로 옳지 못할지라도 말씀을 말할 수 있다. 끝으로 계시의 중보자는 설 교자나 종교적인 교사가 아닐 수도 있고 단지 우리가 늘 만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말들이 특별한 배열 속에서 우리에 대한 말씀이 되고 있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말씀”이란 용어의 이와 같이 다양한 의미들은 “하나님의 현현”(God manifest)― 곧, 자 신 속에, 창조 속에, 계시의 역사 속에, 궁극적인 계시 속에, 성서 속에, 교회의 말들 속에 그리고 교회의 구성원들 속에 현현한 하나님―이라는 하나의 의미 속 에서 모두 결합될 수 있다. “하나님의 현현”―구체적으로 말하면 신적인 로고스를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신적인 심연의 신비―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상징이 지시하고 있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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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폴 틸리히『조직신학』제4부 성령론 II. 영적 현존5)

1. 인간의 영 안에 나타난 영적 현존

1) 인간의 영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의 현현의 특징 (1) 원리적으로 살펴본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의 관계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목적으로 위해서 거의 금지된 단어인 영(소문자로 된 spirit)을 감히 사용했다: 첫째, 인간을 인간으로서 특징 지워주고 있으며 또한 도덕과 문 화와 종교 속에 실현되어 있는 생명의 기능에 적합한 명칭을 제시해 주기 위해서. 둘째, 하 나님의 영이나 영적 현존과 같은 상징들에서 사용되고 있는 상징적 재료를 제공하기 위해 서. 영의 차원은 이 재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생명의 한 차 원으로서의 영은 존재의 힘과 존재의 의미를 결합하고 있다. 영은 힘과 의미의 통일성의 실 현으로서 정의될 수 있다. 우리의 경험의 한계 내에서는 이것은 오직 인간에게서만 -전체 인간과 이 인간 안에 현재하고 있는 생명의 모든 차원들 속에서만- 발생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을 인간으로서 경험할 때 인간은 그의 본성이 그의 생명의 한 차원인 영에 의해서 결정 되어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이와 같은 직접적인 경험이 하나님에 대해서 성령이나 하 나님의 영으로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을 가능케 해준다. 신에 대한 다른 모든 주장들처럼, 이 용어들은 상징이다. 이 용어들에서 경험적 재료는 전유되면서 동시에 초월된다. 이와 같 이 영을 자신 안에 있는 힘과 의미의 통일로서 경험하는 것이 없었다면, 인간은 ‘성령’이 나 ‘영적 현존’과 같은 용어들을 통해서‘현존하시는 하나님’의 계시적인 경험을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다시 한 번 어떠한 성령론도 영을 생명의 한 차원으로서 이해하 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영 사이의 관계의 문제는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의 영은 인간의 영 안에 거하면서 역사한다는 은유적인 주장에 의해서 대답되고 있다. 이 문맥에서‘안’(in) 은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관계의 문제와 무조건적인 것과 조건적인 것의 관계의 문제 와 창조적인 근거와 피조물적인 실존의 관계의 문제 모두를 포괄하는 단어이다. 만일 하나 님의 영이 인간의 영 안으로 꿰뚫고 들어간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거기에서 안식한다 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을 그 자신 밖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을 의미 한다. 하나님의 영의‘안’은 인간의 영에 있어서는‘밖’인 것이다. 유한한 생명의 한 차 원인 영은 성공적인 자기초월로 이끌려진다. 말하자면, 인간의 영은 궁극적이며 무조건적인 어떤 것에 의해서 사로잡히게 된다. 인간의 영은 여전히 인간의 영이다. 인간의 영은 그 본 질 그대로 존재한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영은 하나님의 영의 영향(impact) 속에서 자신 밖으로 나간다.‘황홀경’(=탈아 ecstasy)은 이와 같이 영적 현존에 의해서 사로잡혀 있는 상태를 나타내주는 전통적인 용어이다. 이 용어는 영적 현존 속에 있는 인간의 상황을 정확 하게 묘사해주고 있다.

5) 틸리히, 유장환역,『폴 틸리히 조직신학』IV (서울 : 한들출판사, 2008), 169-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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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제1부 “이성과 계시”의 부분에서 계시적 경험의 본성과 계시적 경험의 황홀한 성격과 그리고 계시적 경험과 인간의 영의 인식적인 측면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았 다. 그 부분에서 우리는 또한 구원의 경험의 본성에 대해서도 비슷한 설명을 제시하였다 : 계시적 경험이 구원의 경험의 한 요소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구원의 경험은 계시적 경험의 한 요소이다. 영적 현존은 이처럼 계시적 경험과 구원의 경험 모두 속에서 황홀경을 창조 한다. 이 황홀경은 인간의 영의 본질적 구조 즉 합리적 구조를 파괴하는 것 없이 인간의 영 을 그 자신 너머로 이끌어간다. 황홀경은 통전된 자아의 중심을 파괴하지 않는다. 만일 황홀경이 통전된 자아의중심을 파괴한다면, 마성적인 사로잡음이 성령의 창조적인 현존을 대체할 것이다.

비록 영적 현존의 경험의 황홀한 성격이 인간의 영의 합리적인 구조를 파괴하지 않을지라 도, 영적 현존은 인간의 영이 스스로는 행할 수 없었던 어떤 것을 행한다. 영적 현존이 인 간을 사로잡을 때, 영적 현존은 모호하지 않은 생명을 창조한다. 인간은 그의 자기초월 속 에서 영적 현존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먼저 영적 현존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그는 영적 현존을 붙잡을 수 없다. 인간은 그 자신 안에 머물고 만다. 인간은 그의 자기초 월의 본성에 의해서 모호하지 않은 생명에 대한 물음을 묻도록 이끌린다. 하지만 대답은 영 적 현존의 창조적인 힘을 통해서 그에게 오지 않으면 안 된다.“자연신학”은 인간의 자기 초월과 이 자기초월의 모호성에 대한 인간의 의식 속에 내포되어 있는 물음들을 잘 설명하 고 있다. 그러나 자연신학은 그 물음에 대답할 수는 없다.

이것이 사사하는 바는, 인간의 영은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 안으로 들어오도록 강요할 수 없다는 진리이다. 그렇게 하려는 시도는 직접적으로는 종교의 모호성에 속하고 간접적으 로는 문화와 도덕의 모호성에 속하는 것이다. 만일 종교적 헌신이나 도덕적 순종이나 과학 적 정직이 하나님의 영으로 하여금 우리에게‘내려오도록’강요할 수 있다면, ‘내려온’성 령은 종교적으로 위장한 인간의 영일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자기초월의 자연적 형태일 것 이고 때때로는 단지 인간의 영의 상승일 것이다. 유한한 것은 무한한 것을 강요할 수 없다.

즉, 인간은 신을 강요할 수 없다. 생명의 한 차원인 인간의 영은 모든 생명이 그러한 것처 럼 모호한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영은 모호하지 않은 생명을 창조하신다.

이것은 어떻게 생명의 다차원적인 통일성의 주장이 영적 현존과 연관될 수 있는가의 문제 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생명의 다차원적인 통일성은 인간 그 자신에 대한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이원론적 교리와 초자연주의적 교리를 저지하는 기능을 수행했었다.

이제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 사이의 대립이 이원론적인 요소와 초자연적인 요소를 다시 도입하는 것이 아닌지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대 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 (따라서 유한한 것의 모든 비교를 넘어서 있는 것)의 관계는 측정될 수 없으며, 유한한 영역들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주는 은유에 의 해서는 적절하게 표현될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유한한 재료와 상징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존재의 신적인 근거와의 관계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 어려움은 완전히 극복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의 상황 자체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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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적인 언어에서는 궁극적인 것과의 관계를 표현하려는 모든 시도의 불가피한 한계를 포함 하여 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자각을 지시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이것을 행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차원(dimension)이라는 은유를 사용하는 것이다. 물론 이 은유의 사용은 깊이 의 차원, 궁극적인 것의 차원, 영원한 것의 차원을 말할 때에 포함되어 있는 근본적인 전제 조건을 덧붙여서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나 자신이 몇몇의 경우에 수행해오고 있는 것처 럼). 이 구절들에서 사용되고 있는‘차원’이란 은유는 우리가 생명의 여러 차원들에서 설 명했던 것과는 다른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것은 생명의 여러 차원들 중의 한 차원이 아니다. 생명의 차원들은 그들의 실현에 있어서 이전의 차원의 실현에 의존한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되는 차원은 생명의 차원들 모두의 존재의 근거이며 그들이 자신을 초월 해 나가는 목표이다. 그러므로‘깊이’라는 용어가‘깊이의 차원’에서처럼(이것은 이미 벌 써 일반화된 용어이다) 다른 말과 결합되어 사용된다면, 이것은 모든 차원들이 근거하고 있 는 차원, 모든 차원들이 부정되는 동시에 긍정되는 차원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은 은유를 상징으로 바꾸는 것이다. 더욱이 이처럼 같은 말을 이중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과연 권장할 만한 것인지 매우 의심스럽다.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의 관계를 나타내는 어려움을 다루는 또 다른 방법은‘차원’이 라는 은유를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유한한 것은 잠재적으로 또는 본질적 으로 신적인 생명의 한 요소이기 때문에, 유한한 모든 것은 이러한 본질적인 관계에 의해서 성격 지워져 있다. 그리고 유한한 것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실존적인 상황은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의 본질적인 통일성으로부터의 분리와 동시에 그 통일성에 대한 저항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유한한 것은 더 이상 실제로는 무한한 것과의 본질적인 통일성에 의해서 성격 지워져 있지 않다. 무한한 것과의 본질적인 통일성의‘기억’이 보존되어 있는 곳은 생명의 자기초월 밖에 없다. 이와 같은 용어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이원론적인 요소는 말하자면 예비 적인 것이고 일시적인 것이다. 이것은 단지 현실적인 것을 잠재적인 것으로부터 그리고 실 존적인 것을 본질적인 것으로부터 구별하기 위해서만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단계의 이원론도 아니고 초자연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한편,‘단계’의 은유를‘차원’의 은유로 대체하는 것이 실존적인 물음과 신학적인 대답 을 상호연관시키는 상관관계의 방법과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의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 만 일 하나님의 영이 생명의 여러 차원들 가운데 있는 하나의 새로운 차원을 대표한다면, 이것 은 참으로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의도되지 않았으며 이전의 고찰에 따르면 오히 려 배제되어야만 한다.‘차원’은 그것이 신에게 적용될 때는 범주와 대극성처럼 상징적으 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차원은‘궁극적인 것의 차원’이란 구절에서는 상징적 으로 사용되고 있는 반면에 생명의 다양한 차원들과 관련해서는 은유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실존적인 상황은 상관관계의 방법을 요구하면서도 단계의 이원론을 금지시 킨다.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의 본질적인 관계 속에서는 상관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상호 내재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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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조와 황홀경

영적 현존은 영의 차원의 담지자인 중심화된 자아의 구조를 파괴하지 않는다. 황홀경은 구조를 부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논의한‘일시적인 이원론’의 결과들 중 하나 이다. 단계의 이원론은 논리적으로는 유한한 것의 파괴로 나아간다. 예를 들어, 인간의 영 은 하나님의 영을 위해서 파괴된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은 세계 안에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가 창조한 세계를 파괴할 필요가 없다. 이 세계는 그 본질에 있어서는 선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기적’의 의미와 관련해서 논의했었다. 우리는 초자연주의적 인 의미의 기적을 배격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인간의 영의 구조의 파괴를 초래하는 것으 로서 이해되는 영적 현존에 의해서 창조된 황홀경의 기적을 배격했다(조직신학I.114-118를 참조하시오).

그러나 만일 우리가‘영적 현존’의 현상학을 제시한다면, 우리는 종교의 역사 속에서 성 령의 역사로서의 황홀경이 창조된 구조를 파괴하는 것을 지시하는 무수한 보도들과 설명들 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 이래로 영적 현존의 현현은 성서문학에서처럼 기적적인 성 격을 가지고 있다. 성령은 신체적 효과들을 결과시킨다: 사람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 겨감, 새로운 생명의 임신과 같은 몸 내부의 변화, 단단한 물체를 통과해 나감, 등. 또한 성령은 비범한 성격의 심리학적 효과를 지니고 있는데 이 효과는 지성이나 의지에 인간의 자연적 능력의 범위 안에 있지 않는 힘을 부여해 준다-예를 들어, 낯선 언어의 지식, 다른 사람의 가장 깊은 생각을 꿰뚫어 봄, 먼 거리에서도 치유의 효과를 나타냄, 등. 제 아무리 그들의 역사적인 신빙성이 의심스러울지라도, 이러한 보도들은 영적 현존의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요한 특징들을 지시해준다: 영적 현존의 보편적 성격과 비범한 성격. 생명의 모든 영역에 대한 영적 현존의 보편적인 영향은 그와 같은 모든 차원의 기적의 보도들 속에 표현 되어 있다. 이 보도들은 초자연주의적 언어로 생명의 통일성의 진리를 지시해준다. 영적 현존은 생명의 모든 차원의 모호성들이 내포하고 있는 물음들에 대한 대답이다. 여기서는 공간적-시간적 분리와 신체적-심리적 혼란이나 한계들이 극복된다. 우리는 이것을 뒤에서

‘비신화화된’용어들 속에서 보다 자세하게 논의할 것이다.

영감(inspiration)과 주입(infusion)은 인간의 영이 영적 현존의 영향을 받아들이는 방식 을 나타내주는 용어들이다. 양쪽 모두 공간적 은유이며, 각각 인간의 영 안으로‘불어 넣는 다’와‘부어 넣는다’라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계시에 관한 논의 속에서, 우리는 영감의 경험이 신과 신적인 문제들에 대한 정보 전달로 전환될 때 발생하는 왜곡을 날카롭게 배격 했었다. 영적 현존은 교사의 임재가 아니고 인간의 영을 황홀한 경험 속에서 사로잡고 있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힘(meaning-bearing power)의 임재이다. 이 경험 이후에, 교사(조직신 학자가 하고 있는 것처럼)는 영감의 황홀경 안에 있는 의미의 요소를 분석하고 정식화할 수 있다. 하지만 교사의 분석이 시작될 때, 영감의 경험은 이미 지나가버린 것이 된다.

영적 현존의 영향을 공간적 은유 속에서 설명해 주는 다른 용어는‘주입’이다. 이것은 초대교회와 카톨릭교회에서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영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중심적인 개념이 었다. 신앙의 주입(infusio fidei)나 사랑의 주입(infusio amoris)과 같은 용어들은 성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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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입(infusio Spiritus Sancti)에서 온 말이다. 개신교는 이 용어에 대해서 회의적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회의적이다. 그 이유는 이 개념이 후기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마술적-물질주 의적 개념으로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은 하나의 실체(substance)가 되었고, 이 실체의 실재는 인격의 중심화된 자의식에 의해서 반드시 인지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일 종의‘물질’이 되었고, 그것은 받는 주체가 저항하지 않는다면 성례전의 행위 속에서 사제 에 의해 전달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영적 현존의 비인격적인 이해는 종교 생활의 객관화 를 초래했고, 이 객관화는 면죄부 판매의 상업행위 속에서 절정에 다다랐다. 개신교적 사고 에 있어서, 성령은 언제나 인격적이다. 신앙과 사랑은 중심을 지닌 자아에 대한 영적 현존 의 영향의 결과이며, 이 영향의 매개체는‘말’이다. 이것은 심지어 성례전의 집행에 있어 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바로 개신교가 영적 현존의 영향에 대해서 주입(infusion)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를 꺼려한 이유이다.

그러나 이 꺼려함은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개신교는 이에 대해서 전적으로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개신교가 신약성서, 특히 사도행전이나 서신(특히, 바울 서신)에서 나오는 오순절 이야기와 그와 비슷한 이야기들을 읽고 해석할 때, 개신교도 성령의 쏟아부음(outpouring)의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개신교가 그렇게 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가‘영감’이란 말을 선호할지라도 우리는 실체적인 은유 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숨’도 성령을 받아들이는 자 안으로 들어가는 실체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감뿐만 아니라 주입이란 말도 함께 사용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 가 있다. 그것은 현대 심리학이 무의식의 중요성을 재발견한 결과이며, 그에 따라서 성령의 매개체로서 교리적 말과 도덕적 말을 강조한 전통적인 개신교와는 대조적으로 상징과 성례 전을 재평가한 결과이다.

그러나 만일 영적 현존의 황홀한 수용이 영감이나 주입 또는 이 모두로서 설명된다면, 우 리는 영적 현존의 수용이란 황홀경이 구조를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는 기본적인 법칙을 준수해야만 한다. 황홀경과 구조의 통일성은 전통적으로는 바울의 성령론 에 표현되어 있다. 바울은 무엇보다 성령의 신학자이다. 그의 기독론과 종말론은 모두 그와 같은 사상의 중심점에 의존하고 있다. 바울의 은혜에 의한 믿음을 통한 칭의론은 그리스도 의 출현과 함께 만물의 새로운 상태가 성령의 창조 속에서 존재하게 되었다는 그의 핵심적 인 주장을 지지하고 있고, 변호하고 있다. 바울은 강하게 영적 현존의 경험 속에 있는 황홀 한 요소를 강조한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그것이 기술되어 있는 신약성서의 모든 이야기와 일치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와 같은 경험을 그 자신에 대해서도 주장하고 있고 다 른 사람에게서도 인정하고 있다. 그는 모든 성공적인 기도는 즉 하나님과 재결합된 모든 기 도는 황홀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와 같은 성공적인 기도는 인간의 영에 있어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인간을 통해서 기도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심지 어 인간이 말을 사용하지 않을지라도(말할 수 없는 탄식-바울) 가능한 일이다. 바울이 자주 사용하는‘그리스도 안에 있음’이란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심리학적인 감정이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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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영이신’그리스도에 대한 황홀한 참여를 뜻한다 -이로써 우 리는 이 영적인 힘의 영역 안에서 살게 된다.

이와 동시에 바울은 구조를 파괴하는 황홀경을 허용하려는 모든 경향에 대해서 저항한다.

이에 대한 전통적인 표현이 고린도전서에 주어져 있다. 여기서 바울은 성령의 은사들에 대 해서 말하면서 만일 황홀하게 방언을 말하는 것이 혼란을 낳고 공동체를 분열시킬 경우에는 그리고 개인적인 황홀한 경험이 휘브리스를 낳을 경우에는 그리고 다른 은사들이(성령의 선 물들이) 아가페에 종속되어 있지 않을 경우에는 그러한 은사들을 배격해야만 한다고 말한 다. 그 다음에 그는 영적 현존의 최고의 창조인 아가페 자체에 대해서 논의한다. 고전13장 의 아가페 찬가에는, 도덕적 명령의 구조와 영적 현존의 황홀경이 완전히 결합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같은 서신의 처음의 세 장에는 어떻게 인식의 구조가 영적 현존의 황홀경과 결 합될 수 있는지가 암시되어 있다. 하나님의 영을 통한 존재의 신적인 근거와의 관계는 영지 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마치 그것이 비도덕적인 것이 아닌 것처럼). 오히려 이 관계는 신적 인 것의‘깊이’의 지식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이 장들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 럼 이 지식은 테오리아 즉 인간의 영의 수용적 기능의 열매가 아니다. 이 지식은 바울이 이 장들과 아가페의 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지시하고 있는 것처럼 황홀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바울은 황홀한 언어로 아가페와 그노시스 즉 황홀경과 구조가 결합되어 있는 도덕과 지식의 형태들을 지시하고 있다.

교회는 구체적인 황홀경 운동들 때문에 바울의 이념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과거에도 문제 를 가지고 있었고 현재에도 계속해서 문제를 가지고 있다. 교회는 황홀경과 혼돈을 혼동하 는 것을 막아야만 한다. 그리고 교회는 구조를 위해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한편으 로, 교회는 성령의 제도적인 세속화를 피해야만 한다. 이 세속화는 초기 카톨릭교회가 은사 를 성직으로 대체한 결과로서 초기 카톨릭교회 내에서 발생했다. 무엇보다, 교회는 현대 개 신교의 세상적인 세속화를 피해야만 한다. 이 세상적인 세속화는 황홀경을 교리적 구조나 도덕적 구조로 대체할 때마다 발생하고 있다. 바울이 말한 구조와 황홀경의 통일성은 이 같 은 두 종류의 세속화와 맞서 싸울 수 있는 규범이다. 이 규범의 사용은 교회에 언제나 현재 하는 의무인 동시에 언제나 현재하는 모험이다. 이것은 의무이다. 왜냐하면 제도적인 형태 속에 살면서 영적 현존의 황홀경의 측면을 무시하는 교회는 황홀경의 혼돈스러운 또는 분열 적인 형태들에 문을 열어주게 되기 때문이고 또한 심지어 영적 현존에 대한 세속적인 반동 의 증가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황홀경의 운동을 진지하게 다루 는 교회는 영적 현존의 영향을 심리학적으로 결정된 지나친 흥분과 혼동할 수 있는 위험성 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위험성은 황홀경과 생명의 다양한 차원들의 관계를 탐구함으로써 줄어들 수 있 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창조된 황홀경은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의 관계에 대한 앞장 의 논의에서 밝혀진 것처럼 영의 차원 속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생명의 다차원적인 통일성 때문에 모든 차원들은(그것들이 인간 안에서 실제적인 것처럼) 성령에 의해서 창조된 황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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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속에 참여한다. 이것은 직접적으로는 자의식 차원을 지시하며 간접적으로는 유기물의 차 원과 무기물의 차원을 지시한다. 종교 특히 종교의 황홀경의 측면을 심리학적인 역동성으로 부터 유추하려는 시도는 자기초월의 환원주의적인 세속화이다. 이것은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측면들과 관련해서 그리고 심리치료를 통해서 제거가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측면들과 관련해 서 압도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이전의 사회들 뿐 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감정적 성격을 지 니고 있는 종교적 운동들은 그와 같은 환원주의적 시도들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그리고 교회의 권위주의는 언제나 반대쪽의 공격과 연합할 준비가 되어 있다. 성령운동은 이와 같 은 교회의 비판가들과 심리학적 비판가들의 동맹에 맞서서 그 자신을 변호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나의 현재의 신학체계의 모든 부분들은 그와 같은 교회의 비판가들에 맞 서서 영적 현존의 황홀한 현현을 변호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 변호에 있어서 가장 강 력한 무기는 신약성서 전체이다. 하지만 이 무기는 동맹관계의 다른 쪽(심리학적 비판가들) 이 거부되거나 적어도 본래의 관점에 놓일 때에만 합법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생명의 다차원적인 통일성의 이론은 그러한 변호를 위해서 기본적인 토대를 제공해준다.

모든 황홀경의 심리학적인 (또는 생물학적인) 토대는 이 이론의 맥락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영의 차원이 자의식의 차원에 잠재적으로 현재하고 있기 때문에, 심 리학적 자아의 역동성은 인격적 자아 내에서 의미의 담지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수학문제 가 해결되거나 시가 쓰여 지거나 법적인 결정이 내려질 때마다 발생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예언자적 선포와 신비적인 묵상과 성공적인 기도 속에서 발생하고 있다. 말하자면, 영의 차 원은 자의식의 역동성 내에서 그리고 자의식의 생물학적인 조건들 속에서 자신을 실현하고 있다.

마지막 예에서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창조된 황홀경의 경험들을 지적했다. 그러나 여기서 는 이제 우리는 하나의 특별한 현상에 대해서 고찰해야만 한다. 황홀경은 그것이 주-객 구 조를 초월할 때에 자의식의 차원 하에서 위대한 해방적인 힘이 된다. 그러나 이 해방적인 힘은 정신의 주-객 구조 이하의 것을 이 구조의 이상의 것과 혼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 어낸다. 도취(intoxication)는 그것이 생물학적인 형태이든지 아니면 감정적인 형태이든지 간에 자의식의 현실성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것은 언제나 객관화의 구조 이하의 것이다. 도 취는 인격적인 중심성과 책임성과 문화적 합리성의 짐을 지고 있는 영의 차원으로부터 도피 하려는 시도이다. 비록 그 시도는 결코 궁극적으로 성공할 수 없을 지라도(왜냐하면 인간은 영의 차원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인격적, 공동체적 실존의 짐으로부터의 일시적 인 해방을 부여해 줄 수 있다. 그러나 결국에는 도취는 그것이 피하고자 하는 긴장을 고조 시키고 파괴적인 것으로 끝난다. 도취의 구별된 주요 특징은, 그것은 영적인 생산성과 영적 인 창조성 모두를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취는 객관적인 세계로부터 오는 이와 같은 내 용들을 소진시켜버리는 텅빈 주관성으로 되돌아간다. 도취는 자아를 진공상태로 만들어버린 다.

황홀경은 테오리아와 프락시스에서의 문화적 역동성의 생산적인 정열과 비슷하게 그 자신 속에 객관적 세계의 다양한 풍부함을 가지고 있는데 이 풍부함은 영적 현존의 내적인 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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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 의해서 초월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는 사회의 날카로운 분석가처럼 그의 시대의 사회적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자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영적 현존의 영향 하 에서 영원성의 빛 속에서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는 자이다. 명상하는 자는 우주의 존재론적 인 구조를 잘 알고 있는 자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영적 현존의 영향 하에서 모든 존재의 근거와 목표의 빛 속에서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는 자이다. 진지하게 기도하는 자는 그 자신 의 상황과 그의 이웃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자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영적 현존의 영향 하에서 그리고 생명의 과정들의 신적인 방향의 빛 속에서 바라보고 있는 자이다. 이와 같은 경험들에서는 객관적인 세계의 어느 것도 단순한 주관성 속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모두 보존되며 심지어 증가된다. 그러나 이것은 자의식의 차원 하에서 그리고 주객 구조 속에서 보존되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독립된 실존이 극복되는 주체와 객체의 연합이 발생한다. 말하자면, 새로운 통일성이 창조된다. 황홀한 경험의 가장 보편적인 예는 기도의 유형이다. 성공적인 기도는 많은 기도자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친밀한 상대자와 대화하듯이 하나님과 대화하는(talk) 것이 아니다. 모든 성공적인 진지한 기도는 하나님에게 말하는 (speaking)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도하는 자에 대해서 대상이 되어준다는 것을 의미한 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일 그가 동시에 주체가 아니라면 결코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우리를 통해서 자신에게 기도하는 하나님에게 기도할 수 있을 뿐이다. 기도는 주객구조가 극복되는 한에서만 가능성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황홀경의 가능성(ecstatic possibility)이다. 바로 여기에 기도의 위대함이 놓여 있는 동시에 기도의 끊임없는 세속화 의 위험성이 놓여있다.‘황홀경’이란 용어는 일반적으로는 그 사용이 많은 부정적인 의미 들을 지니고 있지만 그 용어가 기도의 본질적 성격으로서 이해된다면 아마도 그 용어가 지 니고 있는 긍정적인 의미가 구해질 수 있을 것이다.

정신의 비범한 상태가 영적 현존에 의해서 창조된 황홀경인지 아니면 주관적인 도취인지 를 결정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야만 하는 기준은 전자에서는 창조성이 나타나 있지만 후자에 서는 창조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 기준의 사용은 위험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 이 교회가‘성령을 판단’하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하게 타당한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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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폴 틸리히『조직신학』제5부 하나님나라론 제3장 역사의 목적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6) I. 역사의 종말 또는 영원한 생명

1. “역사의 종말”의 두 가지의 의미와 종말의 영원한 현존

역사 속의 하나님의 나라의 단편적인 승리는 그 성격상 역사 “위”(above)의 하나님의 나 라의 비단편적인 측면을 지시한다. 그러나 역사 “위”의 하나님의 나라까지도 역사와 연관되 어 있다. 즉, 역사 “위”의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의 “종말”(end)이다.

영어의 단어 “end”(끝)는 종결(finish)과 목적(aim)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단어 자체는 하나님의 나라의 두 측면 즉 초월적인 측면과 역사내재적인 측면을 나타내주는 탁월한 도구이다. 우주의 발달의 어느 시기에 인류의 역사와 지구 위의 생명과 지구 그 자체와 그것이 속해 있는 우주의 단계는 끝에 도달할 것이다. 즉, 그것들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을 멈추게 될 것이다. 이 사건은 우주의 시간적 과정 내의 작은 사 건일 것이다. 그러나 “end”는 또한 목적을 의미한다. 라티어의 finis와 헬라어의 telos는 시 간적 과정이 그것의 목적으로서 가리키고 있는 것을 지시하고 있다. “end”의 첫 번째 의미 가 신학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은 단지 그것이 예를 들어 묵시문학이나 성서의 일부 관념 들에 주어져 있는 것처럼 역사적인 시간의 끝에 관한 극적인, 초월적인 상징주의를 탈신화 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생물학적 또는 물리학적 가능성의 끝은 두 번째 의미에서 의 역사의 끝이 아니다. 이런 의미의 역사의 끝은 우주(유비적으로 말하자면, 역사)의 보다 광대한 발전 내부에 있는 한 순간이 아니다. 이것은 시간적 과정의 모든 순간들을 초월한 끝이다. 즉, 이것은 시간 자체의 끝 곧 영원이다. 역사의 내적인 목적 또는 역사의 텔로스의 의미로서의 역사의 끝은 “영원한 생명”이다.

“역사의 끝”의 교리에 관한 고전적인 용어는 “종말론”(eschatology)이다. 헬라어의 eschatos는 영어의 end처럼 시간적-공간적 의미와 질적-평가적 의미를 결합하고 있다. 이 것은 시간과 공간의 마지막의 것과 가장 먼 것 그리고 가장 높은 것, 가장 완전한 것, 가장 숭고한 것 모두를 지시한다(또한 이것은 때때로는 가치가 가장 낮은 것, 극단적으로 부정적 인 것을 지시하기도 한다). 만일 “종말론” 즉 “마지막의 것의 교리” 또는 “마지막 일들의 교리”가 사용된다면, 그러한 의미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 용어의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원 시적인 신화적 의미는 “모든 날들의 사슬의 마지막”이다. 이 날은 시간적 과정을 구성하는 모든 날들 전체에 속한다. 이 날은 전체 날들 중 하루이다. 그러나 그 날 뒤에는 다른 날이 없을 것이다. 그 날에 발생하는 모든 사건은 “마지막 일들”(ta eschata)이라고 불린다. 이런 의미의 종말론은 모든 날들의 마지막 날에 발생할 것에 관한 묘사이다. 시적, 극적, 회화적 상상력이 묵시문학에서부터 최후의 심판과 지옥과 천국의 회화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묘사를 풍부하게 제공해 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 “이 모든 상상의 신학적인 의미는 무 엇인가?” (여기서 이 상상은 결코 유대교나 기독교의 것만은 아니다). 나는 eschatos의 질 적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단수 eschaton을 사용하고자 한다. 종말론의 신학적인 문제 는 발생할지도 모르는 많은 것들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것”에 의해서 구 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것은 하나의 사물이 아니고 영원한 것에 대한 시간적인 것의

6) 틸리히, 유장환역,『폴 틸리히 조직신학』V (서울 : 한들출판사, 2010), 145-15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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