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20 주님을 아는 것의 중요성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2

Share "20 주님을 아는 것의 중요성"

Copied!
7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20 주님을 아는 것의 중요성

요한복음 17장 3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우리는 지난 두주에 걸쳐서 우리 신앙의 본질인 주님을 아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주님 을 안다는 말이 무슨 말이고, 주님을 아는 것에는 어떠한 것들이 포함되는가? 하는 부분을 살펴보 았습니다.

오늘부터는 주님을 아는 것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주님을 아는 것은 우리 신앙 전반에 걸쳐 그 뿌리요 핵심입니다. 주님을 아는 것은 우리의 구원, 우리의 성화, 우리의 사역, 우리의 영적인 승리 등 우리의 신앙 모든 면에서 가장 핵심이요 필수입 니다. 그래서 이것을 신앙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우리는 그동안 율법주의적인 사고에 매우 깊이 길들여져 왔기 때문에 이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을 아는 것의 중요성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우리 구원과 주님을 아는 것의 관계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 구원을 위해서 주님을 아는 것이 얼마나 필수인가라는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 설교를 주위 깊게 듣지 않으시면 제가 말하는 부분과 여러분이 듣는 부분이 다를 수 있습 니다. 그런데 달라지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구원에 대해서 다룹니다. 아주 중요한 핵심적인 내용인데 자칫 잘못 들으면 제가 의도하는 봐와 듣는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설교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실하게 의식하면서 설교자가 기도가 저절로 나오 게 되더라고요.

첫째는 구원에 대한 왜곡된 이해입니다.

우선 먼저 우리가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은 다 압니다. 예를 들면 에베소서 2장 8절“너희가 그 은 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뿐 만 아니라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날 우리는 구원을 믿음으로 받음을 너무너무 잘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에 대한 그릇된 이 해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성격을 잘못 이해함으로서 그 결과로 우리가 구원을 믿음으로 받는데 그 구원에 대한 이해조차도 왜곡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먼저 성경적인 예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5장 46절부터 47절 “46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 라 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여기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 중에서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너희가 모세의 즉, 율법을 오늘날로 말하면 성경을 가리킵니다. 너희가 성경도 믿지 아니하면서 어 떻게 내 말을 믿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바리새인들만 하더라도 그 당시 신앙인들 중에 가장 보수적인 신앙인들 가운에 하나였습니 다. 여러분 오늘날은 교파에 따라서 다 보수적입니다. 침례교는 침례교대로 보수라고 말하고, 성서 침례교는 우리가 더 보수라고 말하고, 장로교 중에는 합동측이 보수라고 말하고, 고신은 우리는 진

(2)

짜 더 보수라고 말하고, 합동 보수는 우리가 더 진짜 정통 보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 보수인데 오늘날 우리에 비하면 바리새인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못지않았다 는 말입니다. 이 말은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을 단 하나도 틀림없이, 일점일획도 틀 림없이 그대로 다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 등 다 믿었습 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였냐면 너희는 하나님 말씀도 안 믿는다는 말입 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잘 믿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안 믿는 다는 겁니다.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 똑같은 믿음에 대해서 말하면서도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생각했던 믿음 과 예수님이 생각했던 혹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달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가졌던 믿음은 무엇이 믿음이었습니까?

그들이 생각하는 믿음은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는 것이었습니 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고 예수님이 의미했던 믿음은 그러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닙 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교리를 그대로 믿는 게 아니라 그 성경이 말씀하시는 인격체이신 하나 님을 신뢰하는 게 믿음입니다. 다릅니다.

그러니까 여기 요한복음 5장 37절을 여러 번 보았던 것처럼 바리새인들은 교리적으로 하나님의 관 해서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그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 하나님 을 신뢰하는 믿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전혀 없으면 그들의 삶은 하나님 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삶을 반영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외적으로는 신앙의 모양을 누구보다도 잘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의 내부에는 온갖 세상의 죄악과 타락이 그대로 있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 이처럼 믿음은 성경에 나오는 교리를 그대로 믿는 게 아니고 그 성경이 말씀하시는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신뢰하려면 그 하나님을 성령의 조명으로 알아야 합니다.

자 그러면 이것을 구원에 대비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믿음을 이해하되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이해했던 대로 이해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아멘.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를 아시되 머리카락 까지 세신바 되실 만큼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는 것을 믿습니까? 아멘.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 님으로써 우리의 필요를 채우실 능력 있음을 믿습니까? 아멘.

자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이러한 것을 잘 믿으면 그게 믿음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믿음 은 바리새인들이 우리보다 더 많이 가졌으면 가졌지 결단코 적게 갖지 않았습니다. 그러데 우리는 이것을 다 그대로 믿는다고 말하는데, 막상 우리에게 중대한 필요가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채워져도 안 채워져도 상관이 없지만 그 필요가 채워지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것이 거기에 달려 있 으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아시며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 를 채우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우리가 신뢰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채워주 시기를 위해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분의 인도를 기다립니까?

날짜는 자꾸 가는데,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우리가 아는 수단과 방법을 다 동 원하죠.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 수단과 방법을 통해 역사해 주시기를 구하죠. 기도하죠. 그리고 믿 는 다고 말하죠. 그러나 수단과 방법이 무너지면 우리는 낙심하고 실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죠. 그

(3)

것은 전혀 하나님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처럼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이해하되 왜 곡 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에 대해서도 왜곡되게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 성경에 나오는 구원의 교리를 그대로 믿으면 그게 구원받는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 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사랑의 하나님을 믿습니까, 우리가 죄인인 것을 믿습니까, 예수 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믿습니까, 이렇게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그 진 리, 다시 말하면 교리를 그대로 믿으면 동의하면 그게 구원받는 믿음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구원에 대한 잘못된 이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초래 했습니다. 여러분 그게 구원받는 믿음이라면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 서 여기 요한복음 5장 37절을 다시 한 번 보시죠.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 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 이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은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 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

여기 보십시오. 성경은 하나님을 계시하신 책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에 대상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이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에 관해서 교리적으로는 누구보다 잘 알고 그 교리를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그대로 믿었지만 이 성경에 말하는 하나님을 알 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로 나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아까 본문 읽은 말씀 뭐에요.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 말은 그분에 관해서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그분을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 합니다.

첫 번째는 구원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살펴보았습니다.

두 번째, 구원과 성령

요한복음 3장 5절을 한 번 보시죠. 다같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 어갈 수 없느니라.”

우리가 잘 아는 또 한 가지는 우리가 구원을 얻되 오직 믿음으로만 얻죠. 또한 동시에 그것은 은혜 로 얻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이에요 정확하게. 그런데 동시에 우리가 구원 얻는 것은 오직 성령 으로만 가능합니다. 맞습니까? 이 구 절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우리가 구원 얻는 것은 오직 성 령으로만 가능한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이 의미를 잘 알면 믿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도 알 수 있고 그리고 우리가 구원을 위해서 얼마나 하 나님을 아는 것이 필수인가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오늘날 많은 성도들 중에 왜 하나님의 능력이 그 토록 고갈 돼 있는가 문제가 무엇인가 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자 성경을 같이 찾아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여기에 보시면 사도 버울이 복음 전하는 것에 대 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절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 가리운 것이라”

그러니까 복음의 빛이 비치는 데 사람들에게 가리우는 것이 있다는 것이에요. 가리우는 것이 있으 면 빛이 비쳐요 못 비쳐요. 못 비추죠. 그러니까 이들이 복음의 빛을 받아들일 수 있어요 없어요.

못 받아들이는 것이죠. 그러니까 구원받아요? 못 받아요? 못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구원 을 받으려면 이 복음에 가리는 것이 무너져서 복음의 빛이 저들에게 비쳐져야 된다 그 말이죠.

자 그러면서 여기 4절 “그 중에 이 세상 신이(사단을 가리킵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4)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 니라.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 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여기에 보시면 구원과 관련해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어요. 사도 바울이 누구를 전한다고요.

예수님을 전합니다. 그러데 예수님을 무엇으로 전한다고요. 주로 전한다고요. 주란 말은 주인이라 그 말이죠. 여러분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예수님을 주로 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삶의 모 든 영역에서 주가 되라 이러한 삶을 잘 전하지 않습니다.

왜요?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어떻게 전하는가 하면, 예수님을

‘주’로는 전하지 않고, 많은 경우에 ‘구세주’로만 전합니다. 구원을 주시는 주님!

그래서 세상에서 죄악을 많이 짓고 하나님과 많이 멀어져 있는데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 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 그리고 ‘예수를 믿음으로 복받으라! 문제 해결 받으라! 치유받으 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뭐라 그러냐 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주가 되시는 삶은 맞되, 그것은 나중에 성숙한 다음 에, 그러니까 예수 믿고 나중에 성숙을 위해서 그 부분이 필요할지 몰라도, 구원받는 초신자들에게 그 말을 말하는 것은 너무나 부담을 준다’ 그렇게 말합니다.

어떤 분은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교회 몇 천명 되는데도 불구하고, ‘교회는 양적인 성숙 도, 영적인 성숙도 다 중요한데, 우선 양적인 성숙이 되야 그 다음에야 영적인 성숙이 될 것이 아 니야. 그러니까 지금은 양적인 성숙을 추구할 때라’ 이렇게 말하면서, 사람들을 교회 불러 모으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이렇게 양적인 성숙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까,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데 절대로 정직하게 전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주’로 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구원자로는 전하고, 복을 주시는 분으로 전할지 몰라도, 주로는 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결과를 가져버렸는가 하면,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인으로 반쪽으로 쪼개버렸습니다.

구세주인 반쪽은 전하고, 주님은 반쪽은 나중을 위해 보관해 놓는 식이에요.

근데 여기에 보시면 사도 바울은 처음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전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 수님를 전하되 예수님을 구세주로 전했을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주인으로 전했습니다.

제가 성경을 잘못 봤나요?

우리가 전파하는 것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사도행전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로 삼았다고 그랬습니다. 잘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오늘날 많은 교회가 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좋은 메시지를 전해서, 저 들을 설득시켜서, 어떻게 해서든 저들을 교회 붙잡아 놓으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전하되 가감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로 전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어떻게 하기를 원하셨는가? 하나님의 성령께서 저들의 마음속에 빛을 비추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게 해주시기를 신뢰했습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몇 가지 교훈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구원받는 믿음이 아니고, 예수님을 가감 없이 구세주로 뿐만 아니라 주님으로 주인으로 전하되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들의 마 음눈을 밝히사 그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죠. 신뢰함으로! 구원받도록 하셨습니

(5)

다. 거기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주님을 알게 하는 것, 주님의 영광의 빛을 보게 하는 것이 누구의 역할이냐? 그 게 성령님의 역할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 그 말입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여러분이 쉽게 이해되기 위해서.

베드로와 바리새인들의 차이.

그 둘 다 똑같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렇죠? 똑같은 시대입니다. 똑같이 구약성경이 그 들의 성경이었습니다. 신약이 아직 안 쓰였습니다. 똑같은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똑같은 일들을 다 보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바리새인들 차이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 차이를 보시면 이 점을 선명 히 볼 수 있을 겁니다.

자, 우선 하나 보시죠!

➀마태복음 16:15~17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 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자, 먼저 보십시오. 이 16절 시몬 베드로가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이 고백에 대한 그 당시의 이해와 오늘의 이해가 많은 경우 다릅니다.

오늘날 이 구절 읽을 때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우리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 라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알잖아요!

그래서 그걸 그대로 믿으면 그게 베드로가 믿고 고백한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성경을 통해서 보고,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에 관한 교훈들을 그대로 믿으면, 그게 여기서 말하는 이 믿음이라고 생각합 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이날 여기에 고백한 것은 그 당시 쓰인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에 관해서 알고, 그 예수님 에 관한 진리를 그대로 동의하는 그러한 믿음을 표현하는 게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자’ 그분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조명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알게 분이 네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그랬습니다.

반면에 보십시오. 똑같은 상황인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안에서 메시야를 못 봤습니다. 예수님 안 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못 봤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까 요한복음 5:38에서 “성경이 내게 대해 증거하거니와 너희는 내게 오기를 거부 한다”고 그랬습니다. 이 차이를 보십니까?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예수님에 관해서 이론적으로 안 것이 아니라, 그들은 성령의 조명으로 한 사 람을 예수님을 보았고, 다른 한 무리는 예수님을 못 보았기에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이 구원자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 혀 돌아가신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는 믿음이 있기 위해서는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6)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을 깨달아야 합니다.

단순히 교리적인 것을 지식적으로 긍정하는 것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믿음이 아니고, 바로 우리 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 아는 것은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좀 더 살펴보기 위해서 정보와 계시의 차이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정보와 계시.

자, 책을 들고 나왔는데 이 책은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중보기도⌟라는 책입니다. 더취 쉬츠 목 사님이 썼고요, 우리나라에서는 베다니 출판사에서 번역된 거고요, 우리가 훈련원 중보기도 교재 중에 하나로 이 부분을 쓰고 있습니다.

C.C.C. 세계 총재, 바비 비얼리라고 하는 어글로 미국 대표, 딕 이스트만, 테드 헤거드, 신디 제이 콥스 그 외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진 분들이 추천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동원 목사 추천 이렇 게 나와 가지고 많은 분들이 추천했습니다.

제가 이 얘기를 이렇게 드리는 것은 이 분이 단편적인 한 자기만의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그 말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제가 말씀드렸고.

그러면서 여기에 보시면, 중보기도에 대해 다루면서 이 부분을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정확하 게 같은 내용인데요, 좀 더 여러분에게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또 예를 듭니다.

이 분이 말하면서 정보와 계시의 차이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다고 고백하지만, 예를 들어서 사영리 같은 것을 통해서 예수 님 영접하겠냐고 말했을 때에, 근데 영접하지만 그 중에 10% 이하가 자기로 이하가, 자기가 알기로 는 통계적으로 겨우 3%정도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른다는 거죠. 100명 중에 3명만 뭐가 차이 나느 냐는 거죠, 왜 그러느냐는 거죠. 다 100명이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그러는데···. 여기에 가장 핵심이 뭔가 하면, 정보 지식과 계시의 차이라는 거죠. 그럼 이분이 말하는 지식은 정보로

‘information’,계시는 ‘revelation’라는 단어를 썼는데요. 그럼 정보는 뭐냐 하면 머리로 아는 지식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이론적으로 아는 지식이죠. 그럼 계시는 뭐냐 하면 그 성경의 진리가 성령의 조명으로 깨달아지는 겁니다. 가슴으로 아는 겁니다. 우리의 삶은 이 가슴으로 아는 지식으 로 나옵니다. 누가 말한 대로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먼 거리는 머리에서 가슴까지라도 그러 잖아요. 자, 그러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지식과 계시의 차이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가 못한 것 같다. 지식은 이성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계시는 비록 이성과 관계가 있고 또 이성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마음’, ‘하트’ 이 중심에서 나오는 것 이다. 영적인 능력은 오직 계시지식을 통해서만 흘러나온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서도 시편119편 18절 같은 경우에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우리가 지난주에도 살펴 보았지만 시편 119편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시편으로서 가장 긴 시편인데 그 저자를 보더라도, 단순히 성경말씀을 이론적으로 잘 배워서 하나님에 관해서 교리적으로 잘 아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 않다고요. 그는 진실로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목적과 길을 알기원해서 심지 어 성경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마음눈을 밝히사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길을 자 기가 깨닫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고요. 시편에서 도요.

그러면서 이분이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예를 얘기하고 있어요. 오늘 설교하고는 약간 내용이 다르지 만 중요하기에 얘기를 드릴게요. 자기가 처음 구원받았을 때요. 그러니까 믿음의 선배들 설교를 들 으면서 앞서간 주님과 동행하는 분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래 나는 이제 세상을 이길 수 있겠어.

나도 저대로 살면 죄를 이길 수 있겠어. 나도 저대로 살면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가질 수 있겠어”

마음이 벅찹니다. 그런데 며칠 못가서 실패합니다. 넘어집니다. 좌절합니다. 변하지 않는 자신의

(7)

모습 때문에 너무너무 실망하고 좌절한 때가 있었대요. 저분의 가르침은 분명히 맞는데 왜 내게는 그게 안될까? 실제로 화요모임이나 우리 포도나무교회에 오신 분들 중에 그런 분들이 많이 계실 텐 데, 화요모임이나 새물결선교회에 오신 분들이 많이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몇 년 전에 한 목사님 같은 경우에는 요. 여기 몇 달 동안 다니셨는데 안 왔어요. 왜? 안 오냐 그랬더니 그 가르침이 맞 으면 내가 변해야 될 텐데 왜 내가 안 변하느냐는 거죠. 그래서 안 오셨어요. 지금 이분이 겪었던 거랑 똑같은 것을 겪는 거죠. 그때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이것을 깨닫게 해 주셨데요. 전하는 사람 이 전하는 것은 계시오.

참조

관련 문서

제 얘기는 뭐냐 하면,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해 가시는데 우리가 하나님 안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우리를 만지시고 우리에게

홍해 앞에서 죽게 되었으면 하나님의 탈출구를 구했고, 광야 생활하면서 먹을 것이 없을 때에는 먹 을 것을 구했고, 마실 물이 없을 때에는 마실 것을 구했고, 물이 써서 못마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련이 있고요,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 주이며, 우리의 유일한 주인이시며, 우리의 생명

글을 시작했으면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넣으려는 것이 아니라 쓰 고자 하는 논점에 집중 해야 함. 글속의 모든 것이 주요 목적에 부합해야 하며, 글속의 모든 것의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가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 이러한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것을 신뢰하라.. 하나님께서 축복해

• 구약 성경은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언급하고 있으 나 성령은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기 때 문에 항상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 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 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 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