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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리ㆍ삼별」에 반영된 현실주의 정신의 비판적 고찰

김덕환*1)

Ⅰ. 머리말

Ⅱ. 「삼리·삼별」의 창작배경

Ⅲ. 「삼리·삼별」에 반영된 현실주의 정신 1. 고대 현실주의 정신의 계승과 발전 2. 유가적 처세관의 탈피와 도전 3. 충군과 애민 사이의 모순과 한계

Ⅳ. 맺음말

◁ 목차 ▷

* 경상대학교 인문대학 중어중문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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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Critical Consideration of Realistic Spirit Reflected in

Sanli and Sanbie

Kim, Dukhwan

Dufu criticized the lavish life of the ruling authorities, reflecting the confusion of the times from various angles. This aspect is best seen in his Sanli and Sanbie, a masterpiece of his realistic poetry. This paper critically examines the realistic spirit in Dufu's Sanli and Sanbie. He wrote poems that actively participated in reality, and his attitude is seen as an act outside of the traditional principles of Confucianism because Mengzi emphasized that one should cultivate oneself if he or she cannot be a good government official. Dufu did not bend his will to save the people of the world, even in distress. In his poem, both loyalty to the monarch and love for the people were shown at the same time. He, however, did not perfectly represent the people's plight with all the loyalty to the monarch, meaning that his aristocratic stance supports the ruler rather than the people. This aspect is the biggest contradiction and limitation of Dufu's realistic poetry, and this should not be overlooked when reading his realistic poetry. Despite these weaknesses, his realistic spirit and narrative technique played a crucial role in bringing the artistic level of ancient Chinese poetry to a new level.

Key Words

Dufu, Sanli, Sanbie, realism, Dufu’s poetry, realistc sp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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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시성 두보(杜甫)는 자신의 시가창작에 안사의 난으로 야기된 사회적 혼란을 다양한 각도에서 반영하면서 집권자들의 방탕하고 사치스런 생활 과 가렴주구를 집중적으로 폭로하고, 여기에 자신의 애수와 격분을 기탁 하여 안사의 난 전후 십여 년간의 역사를 사실적으로 펼쳐내었다. 이러 한 내용이 비교적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 바로 「삼리(三吏)·삼별(三別)」

이라 불리는 여섯 수의 사회시이다. 「삼리·삼별」을 포함하여 시사(詩史) 라 일컬어지는 그의 사회시는 일반적으로 시경·초사와 한위악부의 현실 주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중국시가 창작의 예술적 수준을 새로운 단계 로 끌어올려 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와 동시에 그는 나라와 백성 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시대적 현실을 반영하고 비판한 시를 많이 창 작하였다고 하여 위대한 현실주의 시인이자 인도주의자·애국주의자라 일 컬어지고 있다(蕭滌非 1956: 1).

두보의 대표적인 사회시인 「삼리·삼별」은 이상과 같은 평가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이를 좀 더 세밀히 들여다보면 그 이면에는 몇 가지 일관되지 못한 사상적 모순과 한계점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전통유가로 서 전대의 현실주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킨 가운데 나타난 반유가적인 처 세태도, 애민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반애민적인 사상, 충군과 애민 사이 에서 갈등하는 모호한 입장 등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두보의 대표적인 사회시 「삼리·삼별」을 중심으로 그의 현실주의 정신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그 모순과 한계점을 규명하는 데 연구의 목적을 두 었다.

Ⅱ. 「삼리·삼별」의 창작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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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755년 겨울 두보의 나이 44세 때 안녹산이 간신 양국충(楊國忠) 의 토벌을 명분으로 내걸고 범양(范陽, 지금의 하북성 保定市 또는 北京 市)에서 난을 일으킨 후 계속 남하하여 순식간에 낙양과 장안을 함락시 켰다. 두보는 이때 마침 부주(鄜州, 지금의 섬서성 富縣)에 있다가 현종 이 서촉(西蜀)으로 피난 가고 그 아들 숙종이 영무(靈武, 지금의 영하회 족자치구 영무시)에서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로 달려갔으나 불 행히도 반란군에게 붙잡혀 장안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약 반년 동안 적 진에 있으면서 황폐해진 경성과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또 반격을 가하던 정부군이 진도(陳陶)와 청판(靑坂)에서 연이어 패했다 는 소식에 비분을 참지 못해 「비진도(悲陳陶)」·「비청판(悲靑坂)」·「춘망 (春望)」·「애강두(哀江頭)」 등의 명편을 지었다.

757년 정월 안녹산이 그의 아들 안경서(安慶緖)에게 피살된 후 4월에 두보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장안을 탈출하여 숙종이 임시로 머무르 던 봉상(鳳翔, 지금의 섬서성 寶鷄市)으로 달려가 좌습유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방관(房琯)을 구하기 위해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 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문책을 받았다. 8월에 그는 부주로 돌아가서 아 내를 만나보고 「자경부봉선현영회오백자(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와 아 름다운 장시 「북정(北征)」을 완성하여 여행길의 처참한 풍경과 빈궁해진 가정형편을 묘사하여 당시의 어려운 상황에 대한 감개와 비분을 표출하 였다. 그해 가을에 장안과 낙양이 수복되자 그도 장안으로 돌아가서 계 속 좌습유를 맡았다가 겨울 말에 잠시 집안을 살펴보기 위해 화주(華州) 에서 낙양으로 갔다.

758년(47세) 6월에 두보는 숙종과 현종의 신구 신하들 사이에 일어난 권력쟁탈에 연루되어 화주사공참군(華州司功參軍)으로 좌천되었다. 이 시 기에 안경서는 낙양에서 황하 이북으로 퇴각하여 업성(鄴城, 지금의 하남 성 안양현)을 지키고 있다가 바로 곽자의(郭子儀)·이광필(李光弼)·왕사례 (王思禮) 등 9명의 절도사가 이끄는 수십만 대군에 포위되었다. 대세가 상당히 호전되어 정부군의 승리를 눈앞에 두는 듯했으나 숙종의 어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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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판단으로 형세가 돌연히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숙종은 곽자의와 이광필 등 국가재건 공신끼리 서로 통솔하 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내부에 원수를 두지 않고 환관 어조은(魚 朝恩)을 관군용선위처치사(觀軍容宣慰處置使)로 파견하여 절도사 군대를 총괄하게 하였다. 업성을 포위 공격하던 9명의 절도사 군대는 지휘계통 의 문란으로 사기가 땅에 떨어지게 된 데다 양식마저 부족하여 반란군과 다음해 봄까지 대치하였다. 이때 한차례 투항하였다가 다시 모반한 사사 명(史思明)이 위주(魏州)로 부터 군대를 이끌고 와서 업성을 구원하니 결 과는 절도사 군대의 대패로 끝났다. 이에 낙양과 장안이 다시 위태롭게 되자 즉시에 사사명(史思明)의 서진을 저지하고 후방의 방어병력을 보충 하기 위한 대단위 징집이 불가피해졌다. 이 잔혹한 징집은 먼저 낙양의 서쪽과 동관(潼關)의 동쪽, 즉 신안(新安, 지금의 하남성 신안현)·석호(石 壕, 지금의 하남성 陝縣) 일대의 백성들에게로 떨어졌다. 이 일대는 지역 이 협소하고 3~4년간 지속적으로 전란을 겪은 터라 남아 있는 장정이 거의 없었는데도 조정에서는 이러한 사정을 무시한 채 수단과 방법을 가 리지 않고 잔악한 강제동원 정책을 시행하였다. 업성의 대패 소식으로 낙양이 크게 술렁거리자 두보는 급히 낙양에서 동관을 거쳐 화주로 되돌 아갔다. 이때 그는 길을 따라 가면서 곳곳에서 벌어지는 처참한 상황을 보고 도저히 묵과할 수 없어 「삼리·삼별」이라 불리는 여섯 편의 시를 지 어 사실적인 묘사에 감회를 기탁했다.

Ⅲ. 「삼리·삼별」에 반영된 현실주의 정신 1. 고대 현실주의 정신의 계승과 발전

현실주의란 작가나 예술가가 생활 가운데 실존하는 양식에 의거하여 전형 형상을 통해 현실생활을 진실하고도 역사적·구체적으로 반영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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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방법의 하나이다(임춘성 1989: 186). 현실주의 작가는 생활의 본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창작하여 예술형상의 진실성을 강조하고, 세부묘사 와 줄거리·배경에서 인물의 외형과 내면에 이르기까지 모두 실제 생활에 논리적으로 부합하도록 해야 한다. 이로써 작가의 사상 감정과 경향성이 생동적인 언어와 이미지를 통해 자연스럽게 밖으로 표출된다. 현실주의 는 원래 19세기에 서구에서 도입된 문학이론 용어이지만 고대 중국문학 전통 속에서도 그러한 현실주의적 창작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사상 경향 면에서 주로 봉건제도의 비판, 봉건예교와 착취 반대, 통치자 의 황음무도함과 호전성 폭로, 백성들의 자유롭고 행복한 생활 추구 등 을 반영하고 있다(吴志林 2000: 63).

고대 중국문학의 현실주의 전통은 중국문학의 시원인 시경에서부터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공자는 논어 「양화(陽貨)」에서 시의 사회적 효용에 대해 전면적인 개괄을 하였다.

시는 의지(意志)를 흥기시킬 수 있으며, 정치의 득실을 관찰할 수 있으며, 무리 지을 수 있으며, 원망할 수 있다.

詩可以興, 可以觀, 可以群, 可以怨. (成百曉 2014: 403)

여기에서 관(觀)이란 정치의 득실, 통치자의 잘잘못을 살필 수 있다는 뜻 이고, 원(怨)이란 윗사람의 잘못된 정치를 비평하고 풍자한다는 의미이 다. 그러나 이러한 원망은 합리적이고 타당한 방법으로 해야 하되 그 과 정에서 충효와 인의라는 유가의 본의를 잃어서도 안 되고 ‘친친(親親)’과

‘존존(尊尊)’의 예법을 위반해서도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전통유가에서 말 하는 온유돈후(溫柔敦厚)의 시교로서 공자가 말한 ‘사무사(思無邪)’와 그 궤를 같이 한다. 「모시서(毛詩序)」에는 고대 중국의 통치자들이 정치에 대한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여 나라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시를 하 나의 방편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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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세의 음은 편안하고 즐거워서 그 정치가 조화롭고, 난세의 음은 원망하 고 분노하여 그 정치가 어긋나며, 망국의 음은 슬프고 그리워하여 그 백성들 이 곤궁하다. 그러므로 득실을 바로잡고 천지를 감동시키고 귀신을 감응시키 기에는 시보다 가까운 것이 없다. 선왕은 이로써 부부를 바로잡고, 효경을 이 루고, 인륜을 두텁게 하고, 교화를 아름답게 하고, 풍속을 바꾸었던 것이다.

治世之音安以乐, 其政和, 乱世之音怨以怒, 其政乖, 亡国之音哀以思, 其民困.

故正得失, 动天地, 感鬼神, 莫近於诗. 先王以是经夫妇, 成孝敬, 厚人伦, 美教化, 移风俗. (孔穎達 2000: 9-11)

시의 사회적 효용에 대한 중시는 유가경전의 사상적 기반을 토대로 시가창작에서 현실주의 전통이라는 하나의 중대한 축을 형성하면서 명도 (明道)와 치용(致用)의 이론으로 발전하였다. 유협(劉勰)은 문심조룡(文 心雕龍)에서 문학의 본원과 사회적 효용에 대해 말하면서 시가창작은 현실생활을 반영하고 사회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재 도(載道)와 명도(明道)를 표방한 당대의 고문운동 역시 내용면에서 전통 적인 유가의 현실주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봉건사회의 전성기에 접어 든 당대에는 정치·경제의 구조적인 변화와 문화예술의 대대적인 성행에 힘입어 사람들의 사상 감정이 해방되면서 현실주의 이론도 그 속에서 더 욱 온양되고 성숙되어 나갔다.

두보는 중국문학사상 위대한 현실주의 시인으로서 「삼리·삼별」은 그의 현실주의 시편의 걸작이라 일컬어진다. 그는 안사의 난으로 혼란의 소용 돌이에 휩싸인 조정과 도탄에 빠진 민생을 직접 보면서 점점 쇠락의 길 로 향해가는 당나라 백성들의 잔혹하고 고통스런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전란의 상황을 세심하게 관찰하면서 진지한 태도로 창작에 임하여 나라와 백성을 망치 는 지배층의 죄행과 부패상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곽자의와 이광필을 비롯한 9명의 절도사가 업성에서 패한 후에 당나라 조정에서는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장정들을 마구잡이식으로 징집 해갔다. 마침 이때 두보는 낙양에서 화주로 돌아가는 도중에 이 잔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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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상을 보고 「삼리·삼별」을 지었다.

먼저 「신안리(新安吏)」에서는 나이 어린 중남(中男)을 징집하는데 대한 부당함, 여러 차례의 징집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 징집되어 가는 자의 비통한 모습과 그들에 대한 작자의 위안을 묘사하였다.

客行新安道, 나그네 신안의 길을 지나다가, 喧呼聞點兵. 떠들썩한 병사 점호소리 들려.

借問新安吏, 신안의 관리에게 물었다, 縣小更無丁. 마을이 작아 장정도 없지 않소?

府帖昨夜下, 관청의 소집 영장이 간밤에 내려와,

次選中男行. 다음으로 중남을 뽑아가오. (彭定求等 1986: 517)

「동관리(潼關吏)」에서는 고생하며 성을 쌓는 병사와 동관에 대한 총괄 적인 묘사를 하고 자신감에 충만한 동관 관리의 말을 통하여 작자가 오 랫동안 씻지 못한 침통비분의 감정을 표현하였다.

士卒何草草, 병사들 얼마나 고생하는가!

築城潼關道. 동관의 길목에 성을 쌓느라고.

大城鐵不如, 큰 성은 무쇠보다 견고하고,

小城萬丈餘. 작은 성도 만 길이 넘는구나. (彭定求等 1986: 517)

759년 봄에 당나라군이 상주(相州)에서 대패하자 반란군은 기세를 타 고 낙양으로 진격하였다. 낙양이 재차 함락되어 반란군이 서쪽으로 장안 을 공격한다면 장안과 관중지역의 바람막이인 동관은 반드시 한바탕의 악전을 치러야만 했다. 만일에 대비해서 정부군은 낙양에서 장안으로 통 하는 요지인 동관에 방어진지 구축을 위한 대대적인 공사를 하였다. 어 느 날 작자는 이곳을 지나다가 성곽을 쌓느라고 상하가 분주한 모습을 보고 동관의 관리에게 도림전(桃林戰)에서 참패한 교훈을 거울삼아 경거 망동하지 말고 험난한 요새를 굳게 잘 지키라고 당부했다.

황혼이 질 무렵 석호(石壕)를 지나던 작자는 어느 농가에 투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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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관리들이 밤중에 집안으로 들어가 사람을 잡아가는 참극을 목도하 고 늙은 할멈의 비분한 하소연을 들었다.

暮投石壕村, 날 저물어 석호촌에 묵었더니, 有吏夜捉人. 관리가 밤중에 사람을 잡아가네.

老翁踰牆走, 할아범은 담을 넘어 달아나고,

老婦出看門. 할멈이 문을 나가 보더라. (彭定求等 1986: 517)

「석호리(石壕吏)」에서는 밤중에 사람을 잡아가는 관리에 대한 형상 묘 사를 통해 관리의 횡포를 폭로하여 봉건왕조의 잔혹함과 백성들의 고난 을 반영하였다.

「신혼별(新婚別)」에서는 갓 결혼한 여자가 결혼한 이튿날 하양(河陽)의 수자리로 징집되어 가는 남편과 이별을 앞두고 한 말을 묘사하였다.

暮婚晨告別, 저녁에 혼인하고 새벽에 이별하는 건, 無乃太匆忙. 너무도 황망한 일 아닌가요.

……

君今往死地, 당신은 지금 죽을 곳으로 가시니, 沈痛泊中腸. 깊은 설움이 가슴 속에서 치밀어.

誓欲隨君去, 맹세코 당신을 따라 가려 했으나,

形勢反蒼黃. 상황이 오히려 기막히네요. (彭定求等 1986: 517)

이 시에서는 독백 형식을 취하여 먼저 병사와 결혼한 것을 질책하고 후회하지만 결국에는 남편을 격려하고 남편에 대한 그녀의 충정을 표현 하여 영원히 서로 잊지 말고 사랑하게 되기를 희망했다.

「수로별(垂老別)」에서는 징집되어 가는 노인의 하소연을 통하여 전란 이 백성들에게 가져다준 거대한 재난과 통치자가 백성들을 잔혹하게 징 집하는 참상을 폭로하였다.

子孫陳亡盡, 자식과 손자가 모두 전사하였으니, 焉用身獨完. 어찌 나만 홀로 온전히 살아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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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杖出門去, 지팡이 던지고 문밖을 나서니,

同行爲辛酸. 일행조차 안쓰럽게 생각하네. (彭定求等 1986: 517)

노인의 자손은 모두 전사하였는데 지금 또다시 그가 전선으로 갈 차례 가 돌아왔다. 늙은 아내는 길에서 울며 전송하고 동행하는 사람도 그를 위해 가슴아파한다. 그는 이때 스스로 자신을 위로하기도 하지만 이번에 가면 돌아오지 못하고 당장에 초가집을 버려야함을 생각할 때 그는 가슴 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무가별(無家別)」에서는 전쟁에서 패하여 돌아온 병사가 다시 병역에 복무하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집 없이 이별해야 하는 처량한 심정을 묘사 하였다.

存者無消息, 산 자는 소식이 없고, 死者爲塵泥. 죽은 자는 진토가 되었다.

賤子因陣敗, 미천한 이 몸은 전쟁에서 패하여,

歸來尋舊蹊. 돌아와서 옛길을 찾는다. (彭定求等 1986: 517)

「무가별」은 「삼별」 중의 다른 두 수와 마찬가지로 서사시의 서술자가 두보 자신이 아니라 시 속의 주인공이다. 시의 주인공은 일차로 징병되 었던 독신자로서 송별해 줄 사람도 없고 이별할 사람도 없었기에, “사람 이 태어나서 집 없는 이별 당하니,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으리.(人生無 家別, 何以爲蒸黎)”라고 하며, 재차 징병의 길에 임해서는 집 없이 이별 하는 비애를 하늘에 호소하듯 자술하였다.

두보는 백성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눈으로 직접 목도하고 몸으로 몸소 체험한 현실생활을 능동적으로 시에 반영하였다. 그는 진지한 태도로 눈 앞에 펼쳐진 처참한 상황을 관찰한 다음 그것을 엄정하면서도 사실적인 태도로 표현하였다. 여기에는 현실과 역사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 고 나라와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집권자와 그들의 부패와 무능에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 두보의 현실주의 정신이 잘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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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두보의 현실주의 정신은 백거이에 이르러 ‘문장은 시대에 부합 하여 지어야 하고 시가는 사실에 부합하여 지어야 한다.(文章合为时而著, 歌诗合为事而作)’는 풍유시로 계승되었다. 여기에서 시대를 위하고 사실 을 위하는 것이란 바로 시정의 폐단을 폭로하고 민생의 질고를 반영하는 현실주의 정신을 의미한다. 따라서 두보는 시경으로부터 한위육조의 악부시가에 이르는 우수한 현실주의 전통을 계승한 바탕 위에 정교한 서 사 기교를 발휘하여 중국 고대시가를 새로운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렸다 고 할 수 있겠다.

2. 유가적 처세관의 탈피와 도전

두보는 일찍이 「진조부표(進雕賦表)」에서 “신의 선조 두서(杜恕)와 두 예(杜預) 이래로 유학을 받들고 벼슬을 지켜 대대로 이어온 가업을 포기 한 적이 없었습니다.(自先君恕·预以降, 奉儒守官, 未坠素业矣)”라고 하면 서, 초당시대 문장사우의 한 사람으로 명성을 떨친 조부 두심언(杜審言) 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명문 유가집안 출신으로서 어릴 때부터 독서에 열중하여 일곱 살에 시를 배우기 시작하고 열다섯 살에는 이미 시문으로 낙양의 명사들의 주목을 받았다.

두보는 20세 이후 금릉(金陵, 지금의 南京)·고소(姑蘇, 지금의 蘇州)·절 강(浙江) 등 강남일대를 유람하고 24세에 낙양으로 가서 진사에 응시하 였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천하를 유람하다가 35세에 관직을 구하기 위해 장안으로 가서 십여 년 동안 지냈다. 당시에 현종이 문학적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장안으로 불러들여 과거시험을 열었을 때 그는 36 세의 나이로 참가하였지만 중서령 이임보(李林甫)의 음모와 방해로 그를 포함한 응시자 전원이 낙방하였다. 이에 실의에 가득 찬 그는 정치적 출 로를 찾기 위해 가는 곳마다 시를 지어 기회를 만들어보려고 무던히도 애썼지만 어떠한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십년을 보내야만 했다.

751년 현종이 현원황제 노자와 태묘·천지에 성대한 제사의식을 거행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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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을 때 그는 세 편의 「대례부(大禮賦)」를 지어 바쳐 현종의 칭찬을 받 았으나 관직에 임용되지는 못했다. 현종은 만년에 정사를 돌보지 않고 궁중 유희에 빠져 있었던 터라 개원성세(開元盛世)의 영예는 이미 사라 져 버렸으며, 이에 간신배들이 마음대로 국정을 농단하여 조정은 극도로 부패해지고 백성들은 잔혹한 조세와 부역에 날로 시달리게 되었다. 이러 한 상황 하에서 벼슬길의 좌절은 그에게 집권자들의 부패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하였고,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는 개인의 고통은 그에게 백성 들의 질고를 체험하도록 하였다.

유가의 인정(仁政)과 민본(民本)은 그의 사상을 지탱하고 있는 양대 기둥이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평생 동안 나라와 백성을 근심하고 민생 을 구휼하였을 뿐만 아니라, 용감하게 부패와 폭정을 폭로하여 통치자의 죄행을 질책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삼리·삼별」을 비롯하여 「병거행 (兵車行)」·「여인행(麗人行)」·「전출새(前出塞)」·「후출새(後出塞)」 등의 사 회시를 지어 당시의 시가형식에 대한 새로운 표현방법을 제시하기 시작 했던 것이다.

배워서 여력이 있으면 관직에 나아가는 것은(成百曉 2014: 535) 모든 유가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공자는 일생동안 천하를 주유하며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는데 온 정열을 쏟았으며, 이를 본받아 후세의 유 가들은 대부분 백성을 구제하고 사직을 안정시키는 등 적극적으로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본연의 임무로 삼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공 자는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는 말을 높게 하고 행실을 높게 하며, 나라 에 도가 없을 때에는 행실은 높게 하되 말은 공손하게 하여야 한다”(邦 有道, 危言危行, 邦無道, 危行言遜)라고 하여(成百曉 2014: 392), 성군을 만나 나라가 정상적으로 다스려지면 정치일선에 나아가서 자신의 지혜를 발휘해야 하지만 폭군이나 우매한 군주를 만나 나라가 혼란에 빠지면 자 신을 낮추고 어리석은 듯 처신하라는 주장을 하였다. 이는 바로 맹자가 말한 “궁하면 그 몸을 홀로 선하게 하고 영달하면 천하를 겸하여 선하게 한다”(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라는 처세태도로 이어졌다(成百曉 2010: 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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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논어에서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를 도모하지 않는 다”(不在其位, 不謀其政)라고 하였고(成百曉 2014: 233), 반고(班固)는 한 서(漢書)에서 굴원과 사마천이 위난의 환경에 처하고서도 명철보신(明 哲保身)과 전명피해(全命避害)를 알지 못한 것을 질책하였다. 오로지 재 능을 과시하여 자기를 내세우려 하거나, 세상에 쓰이지 못한다고 해서 원망이나 분노를 발출하는 것은 군자의 덕행에 미치지 못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보는 나라에 도가 없는 혼란의 와중에도 조용히 물 러나서 선을 쌓지 않고 시종일관 벼슬에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삼리·삼별」을 비롯한 사회시의 창작으로 발분(發憤)의 길을 걸었다. 이는 바로 시대적 상황에 따라 처신을 달리하는 전통적인 유가 의 처세관을 탈피하여 난세와 치세를 막론하고 끊임없이 현실정치 참여 를 위한 도전을 시도하였음을 말한다.

그런데 두보는 유·불·도 3교가 함께 성행하던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유·무형적으로 그러한 시대적 사조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 시절에는 유·불·도 3가의 사상이 머릿속에 혼 재된 가운데서도 대체로 유가사상이 그 중심을 이루었으나, 유랑시기에 는 이백과 만나면서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불교와 새로운 인 연을 맺기도 하였다. 화주에서 관직을 버리고 인천(人川)에 이른 이후에 그는 도교와 불교의 사상에 다소 경도되었다가 만년에는 도교에 더욱 심 취하였다. 그래서 그는 「증이백(贈李白)」 제1수에서 “2년을 낙양에서 나 그네로 지냈는데, 그간에 잔꾀와 교활함이 싫어졌네”(二年客東都, 所歷厭 機巧)라고 한(孫建軍等 2002: 1746) 후 앞으로 신선약초를 찾아갈 것이라 고 하였고, 제2수에서도 “가을이 와서 돌아보니 아직도 떠도는 신세, 아 직도 단사를 얻지 못해 갈홍 보기 부끄럽네”(秋來相顧尙飄蓬, 未就丹砂愧 葛洪)라고 하여(孫建軍等 2002: 1747) 도교의 불로장생과 신선사상을 추 구하였던 것이다.

현실정치에서의 좌절과 실패로 인해 그는 언제든지 멀리 바다로 떠나 세상과 다투지 않는 야로(野老)가 되기를 원했다. 아래의 「입추후제(立秋 後題)」에는 도연명처럼 미련 없이 관직을 버리고 전원에 은거하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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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망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다.

平生獨往願, 평생동안 혼자 가기 바랐었는데, 惆悵年年百. 슬프게도 나이 벌써 반백이로다.

罷官亦由人, 관직을 떠나서도 사람들과 얽히니,

何事拘形役. 무슨 일로 몸뚱이에 얽매이리오. (彭正求等 1986: 517)

전통유가의 처세관은 난세에 물러나서 수신에 힘쓰고 치세에는 나아가 서 천하를 크게 다스리는 것이었지만, 두보는 그러한 전통적인 유가의 처세관과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난세에 세상을 구제하기 위해 현실정치 에 참여하려 애쓰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의 바깥을 배회하며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한 데서 두보의 현실인식과 처세태도에 대한 문제 점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말하면 바로 그것이 또한 「삼 리·삼별」을 비롯한 뛰어난 사회시를 탄생시킨 동력이 되었음을 간과해서 는 안 된다.

3. 충군과 애민 사이의 모순과 한계

고대 중국의 문인들은 대부분 군왕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충성으로 섬 기겠다는 사군이충(事君以忠)이나 ‘행지충(行之忠)’·‘언사충(言思忠)’ 등의 유가적 가르침을 가슴깊이 새기고 있었다. 굴원·신기질·육유·악비·문천상 등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애국지사들은 충군관념에 대해 더욱 독실하였 으며, 그들의 시문에는 ‘천자에 보답하겠다(報天子)’는 말이 빠짐없이 들 어가 있다(沈榮森 2001: 12).

두보는 59년이란 그렇게 길지 않은 일생 동안 인구에 회자하는 시가를 비교적 많이 창작하였는데, 1400여 수나 되는 그의 시편들에서 대부분 자신의 깊은 충군애국(忠君愛國) 정신과 나라에 공훈을 세우고 싶은 간 절한 소망을 표출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유가사상의 가르침을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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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 사안(謝安)·제갈량 등과 같은 역사인물을 본받아 위로는 현명한 군 왕을 보좌하여 정치를 청명하게 하고, 아래로는 사회를 안정시키고 풍속 을 순화하여 인민들이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하고자 하였다.

圖以奉至尊, 상서로운 도서를 지존에게 바치고, 鳳以垂鴻猷. 봉황으로 원대한 뜻을 드리워, 再光中興業, 중흥의 위업을 다시 빛내어,

一洗蒼生憂. 백성의 근심을 단번에 씻어내리. (彭正求等 1986: 520)

이 「봉황대(鳳凰臺)」 시에서는 봉황이 도서를 물고 날아와서 황제에게 바친 고사를 예로 들어 군왕을 향한 자신의 포부를 노래하였다. 또 「봉 증위좌승장이십운(封贈韋左丞丈二十二韻)」에서는 “황제를 보필하여 요순 위에 서게 하고, 다시 세상의 풍속을 순박하게 하겠어요”(致君堯舜上, 再 使風俗淳)라고 하여(彭正求等 1986: 509)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현실참여를 열렬히 희망했으며, 「강상(江上)」에서도 “시절이 위태로 워 주군 보답 생각에, 노쇠하여 물러나도 쉴 수가 없어라”(時危思報主, 衰謝不能休)라고 하여(彭正求等 1986: 571) 군왕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무 한한 충성심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특히 “부잣집 대문에는 술과 고기 썩는 냄새 진동하는데, 길가에는 얼 어 죽은 시체가 나뒹구네”(朱門酒肉臭, 路有凍死骨)라는 명구는(梁鑒江 1988: 143) 당시 집권자들의 부정부패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비참한 운명을 고발한 것으로 유명한데, 이 시구가 담겨있는 원래의 시 「자경부 봉선현영회오백자(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에서 조차 두보는 “생전에 요·순 같은 임금을 만나, 차마 이대로 죽을 수가 없었다”(生逢堯舜君, 不 忍便永訣)라고 하여(梁鑒江 1988: 142),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하듯 오로지 군왕을 바라보았으며, 상고시대의 은자인 소부(巢父)와 허유(許由)처럼 처신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면서도 군왕에 대한 충성심을 결코 바꿀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장기간의 전란과 유랑생활로 곤궁에 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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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과 환난을 함께 하면서 뇌리에는 우환의식과 평민의식이 깊이 각 인되었으며, 이로 인해 종묘와 사직의 안위에 대한 근심을 넘어 백성들 의 고통을 가슴 아파하며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동정하는 마음을 굳 게 가지게 되었다.

비록 궁벽한 골목에서 곤궁한 삶을 살아도 고상한 절개와 청운의 뜻을 잃지 않는 것은 선진 이래 유가들이 지켜온 우수한 전통이었다. 안회(顏 回) 이래 이러한 정신을 가장 잘 실천한 인물로는 동진시대 전원시인 도 연명을 꼽을 수 있다. 두보는 도연명과 마찬가지로 곤궁함은 잘 견뎠지 만 사상적으로 군왕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원칙을 일관되게 지켰다는 점에 있어서는 매우 다르다. 그의 충군과 우국은 어떠한 곤궁한 처지 속 에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인내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정신은 군왕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애국과 애민정신은 두보의 현실주의 시가의 핵심적인 주제의 한 부분 을 구성하고 있으며, 그것은 천하를 자신의 임무로 삼는 마음과 천하 백 성들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체현되었다. 그는 자신이 언제 어디에 몸담고 있든지를 막론하고 나라의 흥망과 민족의 운명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어관(漁關)이 함락된 후에 그는 난민의 대열에 합류하여 적 지 않은 애국시를 썼다. 그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춘망(春望)」에서 “나라 는 부서져도 산천은 그대로이고, 성안에 봄이 오니 초목이 무성하다”(國 破山河在, 城春草木深)라고 하여(梁鑒江 1988: 12), 반란군이 점령한 장안 의 황량함과 침통함을 묘사하였다. 대지에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에 서 제목을 「춘망」이라 하고 나라의 안정과 백성의 안녕을 갈망하였다.

「삼리·삼별」에 반영된 두보의 애민사상은 주로 사회적 약자들을 동정 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신안리」에서는 아직 징병될 나이도 되지 않는 열여덟 살의 미성년자, 그 중에서도 특히 전송할 부모도 없는 가난한 집 아이에게 더욱 많은 연민의 정을 표하였다.

中男絶短小, 중남은 너무 왜소한데, 何以守王城. 어찌 왕성을 지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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肥男有母送, 살찐 아이는 어미가 전송하지만, 瘦男獨伶俜. 여윈 아이는 외로이 혼자로구나.

白水暮東流, 하얀 강물은 저녁에 동으로 흐르지만,

青山猶哭聲. 푸른 산엔 여전히 울음소리 들리네.(彭定求等 1986: 517)

「석호리」에서는 야밤중에 징집되는 허약하고 연로한 할머니, 「신혼별」

에서는 이제 막 신혼에 단잠에 젖어든 새신랑, 「수로별」에서는 아들과 손자를 모두 전장에서 잃은 노인, 구사일생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늙은 병사 등이다. 이들은 모두 한결같이 사회의 취약계층 신분이다.

두보는 조국을 열렬히 사랑한 애국주의자였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백 성을 걱정하고 그들의 고통을 동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국가와 민족의 입장에 서서 문제를 생각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국가와 민 족의 생존에 종속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蕭滌非 1963: 150~151). 그는 불합리한 병역에 대하여 냉정하게 폭로하였지만 결코 그것을 직접적으로 규탄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는 백성들이 병역을 받는 고통에 대하여 무한한 동정을 표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이 이러한 고통을 참으면서 전쟁터로 나아가 목숨을 바쳐 조국을 수호하기를 눈물로써 격려하였던 것이다.

「신안리」에서는 미성년의 중남이 강제로 징집되어 가는 상황을 보고 한편으로는 징집제도의 부당함을 폭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징집을 명령한 황제와 조정에 대해서는 잘못을 묵인하고 징집을 긍정하였다.

況乃王師順, 더구나 왕의 군대는 천리에 순응하고, 撫養甚分明. 보살핌도 매우 주도면밀하다오.

送行勿泣血, 배웅하는 길에 피눈물 흘리지 마시오,

僕射如父兄. 곽복야가 그들을 부형같이 대하리니.(彭定求等 1986: 517)

「동관리」에서는 반란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동관의 길목에 성을 쌓는 병사들의 고초를 노래하면서 “큰 성은 무쇠보다 견고하고, 작은 성도 만 길이 넘는구나”(大城鐵不如, 小城萬丈餘), “오랑캐 들어와도 지키기만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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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어찌 다시 장안을 근심하리오”(胡來但自守, 豈復憂西都)라고 한(彭定 求等 1986: 517) 후 관문을 지키는 장수에게 지난날 이곳을 지키다 참패 한 가서한(哥舒翰)의 전철을 밟지 말고 잘 싸울 것을 격려하였다.

「석호리」에서는 비록 드러내놓고 할머니를 격려하지는 않았지만 할머 니와 관리와의 대화 중 “서둘러 하양의 부역에 응한다면, 새벽밥은 지어 드릴 수 있을 거요”(急應河陽役, 猶得備晨炊)와 같은 구를 보면(彭定求等 1986: 517), 자진하여 전선으로 향하는 할머니를 응원하는 작자의 심정이 내포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신혼별」에서도 하양의 수자리로 징집되어 가는 새신랑에게 이별에 임 하여 당부하는 신부의 입을 빌어 “신혼의 생각일랑 하지 마시고, 군대 일에 노력을 다하세요”(勿爲新婚念, 努力事戎行)라고 하여(彭定求等 1986:

517), 처음에는 병사와 결혼한 것을 질책하고 후회하지만 결국에는 남편 을 격려하는 것으로서 작자의 충정을 표현하였다.

「수로별」에서도 “온 나라가 모두 전쟁터라, 산봉우리마다 봉화 오르네.

시체가 쌓여 초목도 비릿하고, 피가 흘러 평원도 붉게 물들었네. 어느 곳 이 낙토이겠는가? 어찌 감히 주저하며 망설이리오”(萬國盡征戍, 烽火被岡 巒. 積屍草木腥, 流血川原丹. 何鄕爲樂土, 安敢尙盤桓)라고 하여(彭定求等 1986: 517), 산하가 파괴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으니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 없어 목숨 걸고 돌진해야 하는 노인의 애국심을 함께 반영하였다.

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폭로하고 부패한 정치를 풍자하며 백성을 대신 하여 청원하는 것은 고대 중국문인들의 우수한 전통이다. 그러나 그 시 대를 지배하고 있는 주요사상은 모두 지배계층의 사상이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통유가의 온유돈후(溫柔敦厚)와 사무사(思毋邪) 사상은 오히려 시가의 원망과 풍자의 기능을 특정한 범위 안으로 국한시킴으로 써 그것의 현실비판의 예봉을 약화시켰으며, 그러한 사상적 한계로 인해 작품 속에는 통치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경우가 많았다(陳伯海, 1980:

100). 다시 말하면, 통치자들의 근본적인 이익과 민감한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 범주 내에서 창작활동을 했기 때문에 폭로나 비판이 철저할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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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배계층의 일원으로서 때로는 백성들의 대변자 가 되기도 한 고대 문인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그러한 이중성이 있었으며 (陶新民 1998: 98), 두보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두보의 「삼리·삼별」 뿐만 아니라 사회시 어디에도 왕권을 부정하거나 군주제의 전복을 요구하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서 두보는 처음 부터 끝까지 공자의 유가사상을 받들어 한시도 군위신강(君爲臣綱)의 태 도를 잊지 않은 전형적인 봉건문인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결 론적으로 두보의 현실주의 정신은 혼란한 사회에서 병립할 수 없었던 양 대 가치인 충군과 애민을 동시에 추구함으로써 근원적인 모순과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다고 하겠다.

Ⅳ. 맺음말

일반적으로 두보의 시를 시사(詩史)라고 말하는데 이를 가장 잘 대변 해 주는 작품이 바로 「삼리·삼별」이다. 이것은 명백히 역사의 진실을 묘 사한 시이며 백성을 대신해서 쓴 기록이다. 그 주된 내용은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안녹산의 난으로 인하여 징집에 시달리며 잔혹하게 핍박받 는 백성들의 모습과 황폐해진 농촌의 풍경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여 당시 의 시대상을 통렬히 비판한 것이다.

두보가 처한 안사의 난 시대는 백성들의 재난이 혹심하면서도 그들의 역량이 두드러지게 드러난 시대이다. 그는 백성들과 다를 바 없는 곤궁 한 생활을 하면서 그들과 조국을 열렬히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중국문 학 유산의 우수한 전통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의 작품 속 에서 풍부하고도 명확한 인민성을 형성하게 되었다.

두보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유가사상에 근원을 두고 있지만, 한편으로 는 그것을 계승하여 현실참여 정신을 발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 유가의 처세 원칙에서 위배되는 반유가적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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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는 “궁하면 그 몸을 홀로 선하게 하고, 영달하면 겸하여 천하를 선 하게 한다”라고 하였지만(成百曉 2010: 535), 두보는 궁달(窮達)에 관계없 이 겸선천하(兼善天下)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통유가는 “그 자리에 있 지 않으면 그 정사를 도모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지만(成百曉 2014: 233), 두보는 그 직위에 있든지 없든지에 관계없이 현실정치에 참여하여 자신 의 뜻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보는 군왕과 나라에 충성하겠다는 마음을 계속 잃지 않았으며, 또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겠다는 마음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그의 사회시에는 임금에 대한 충성과 백성에 대한 사랑이 동시에 나타나 있는 데, 임금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충성을 보인 반면, 백성들에 대해서는 완 벽하게 그들의 처지를 대변하지 못하였다. 임금과 백성은 지배층과 피지 배층의 관계이고, 그의 신분도 사대부계층이기 때문에 그는 지배자의 입 장에 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두보의 현실주의 시가 가진 가장 큰 모순이자 한계점이며, 두보의 현실주의 시를 읽을 때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두보는 시경·초사 이래로 발전해 온 중국의 고대시가를 집대성한 시인 으로서 후세에 남긴 족적과 영향은 다방면이면서도 심원하다. 그의 현실 주의 시가에 나타난 몇 가지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창작 정신과 기법 은 중당시기의 백거이를 주축으로 한 신악부운동으로 계승됨으로써 고대 중국 시가의 예술적 수준을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 을 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주요어

두보, 두시, 사회시, 삼리, 삼별, 현실주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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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Kim, Dukhwan

Belong Dpt. of Chinese Language and Literature, Gyeongsang National University

E-mail mugam20@hanmail.net

투고일 2019/12/07 심사일 2019/12/19 게재확정일 2019/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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