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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 기우만의 시세계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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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송사 기우만의 시세계 고찰*

40)

김 기 림**

❙국문초록❙

송사 기우만

(

松沙 奇宇萬

)

은 개항 직전인

1846

년에 태어나 개화기를 거쳐 조선이 멸망하는 역사적 격동기 를 고스란히 목도

,

겪어낸 호남의 대표적 유림이었다

.

노사 기정진 손자로서 그 학문과 위청척사 정신을 계승 하여 항일의병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

문학에 대한 그의 인식을 보면

,

문학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도를 꿰뚫어 내는 도구로 보는 관도지기 임을 강조했다

.

문학은 사람의 성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면서 인품과 문학을 연계하였다

.

그리고 문학은 시대를 살피는 데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효용론적 입장을 취했다

.

그의 시세계를 보면

,

우선 현실에 대해 암울하게 인식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

그리고 현실에 의해 자신의 포부가 꺾이는 좌절감과 그로 인한 자조의식을 표현하고 있다

.

후학들에게는 이설

(

異說

)

에 미혹되지 말고 유 학 – 성리학을 배우고 고수하기를 권면한다

.

그럼으로써 국가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

개화기 한시는 적극적인 현실 비판

,

외세 및 일본에 항거하는 투쟁의식

,

국난에 처한 시대를 걱정하는 우국 적 성향 등을 드러냈다

.

반면 기우만 시는 시국에 대한 근심이나 소극적 현실 비판 경향을 드러낸다

.

이런 점 에서 도학자 출신 의병들의 시세계와 다르며 당대 문인들의 날카로운 현실 비판적 시와도 거리를 두고 있다

. [

주제어

]

송사 기우만

,

개화기 한시

,

위정척사

,

항일의병투쟁

,

노사 기정진

,

난와 오계수

,

완물상지

❙목 차❙

.

서 론

.

기우만의 생애와 문학작품 개관

.

기우만의 문학 인식

.

기우만의 시 세계

.

결 론

* 이 논문은 2014년도 조선대학교 학술연구비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

**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조교수 / cathi7@hanafos.com

(2)

Ⅰ. 서 론

송사 기우만

(

松沙 奇宇萬

)

은 개항 직전인

1846

년에 태어나 개화기를 거쳐 조선이 멸망하는 역사적 격동기 를 고스란히 목도

,

겪어낸 호남의 대표적 유림이었다

.

한말 성리학자의 대표로 꼽히는 노사 기정진

(

蘆沙 奇 正鎭

)

의 손자이며 제자였다

.

노사의 학문은 스승의 학문인 동시에 가학이었다

.

어린 시절부터 노사를 보필하 면서 그 학문을 익히고 계승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

노사 사후 노사 문집 간행을 주관하면서 호남과 영남 우 도의 노사학파 문인들의 결속력을 다졌다

.

또 노사가 배출한 문인들의 자제 및 후학을 대상으로 활발하게 강 학활동을 펼쳐 노사 성리학의 확산에 큰 기여를 하였다

.

그리하여 호남 선비들에 의해 유림의 종장으로 추대 되었다

.

노사 문하에서 공부했던 난와 오계수

(

難窩 吳繼洙

)

송사는 성문

(

聖門

)

의 사손

(

思孫

)’

이라고1) 하였 고 강화학파를 대표했던 이건창은

박학

(

樸學

)

이 둔 후손

이라고2) 칭하면서 노사 학문의 계승자로 인정하였 다

.

또한 쌍석 이희용

(

雙石 李熙容

)

선비들이 귀의할 곳이 생겼고 부지런히 가르쳐 우리들이 바로 설 수 있었다

.’

3) 하면서 그 시대의 스승으로서 추앙하였다

.

이로써 기우만은 명실상부한 노사학파 계승자이며 호 남 유림들의 스승으로서의 확고한 위상을 차지했다

.

그의 현실 인식과 대응은 조부였던 노사의 위정척사 정신에 토대를 두고 실천에 옮겼다

.

초기 호남항일의 병 활동을 선도했고 이후 의병활동 및 항일 운동에 관한 논의자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호남 의병의 정신적 지 도자라는 위상도 지녔다

.

호남 문학계에 있어서도 그는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

.

호남의 누정기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호남 지역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사람으로서 그 문학적 위상이나 영향력은 대단하였다고 평가했다

.

4)

이처럼 기우만은 호남 유림과 의병의 지도자로서 당시 호남은 물론이거니와 영남 우도 및 전국 유림들 사 이에서 그 위상과 영향력은 매우 컸다

.

그러나 생애와 활동

,

문학적 면모 및 의의

,

사상 및 의식 경향 등 그에 관한 전반적인 연구는 매우 소략하 다

.

호남 의병 활동을 시작하고 이후 활발한 의병 활동의 동기를 부여하는 데에 기여했지만 정작 그의 의병 활동에 대해서는 호남 의병활동의 한 부분으로서 미약하게 다루어졌을 뿐이다

.

5) 이 밖에 누정 관련 시문과 서간에 대한 연구

,

여성 의식을 다룬 연구들이 있을 뿐이다

.

6)

1) 吳繼洙, 뺷難窩集뺸 권1, 「壇享後追賦二絶呈松沙」, “仰惟松沙公卽聖門之思孫也.”

2) 李建昌, 뺷明美堂集뺸 권5, 「過蘆沙奇公故宅 與有肖孫松沙寢郞 晤言」, “精心造道無前輩 樸學家承有後人.”

3) 李熙容, 뺷雙石集뺸 권1, 「松沙先生壽韻泰和」, “先生年壽蓋由仁 士有依歸國有人 繼述平生誰盡孝 指提不倦我存身.”

4)권수용, 「기우만의 수신간찰과 교유의 성격」, 뺷영남학뺸 24, 영남문화연구원, 2013, 163쪽. 권수용은 호남 문인들의 누정기를 조사하면서 기우만의 작품은 대략 250여 누정의 기문이 있으며 당시 호남 문인 중 가장 많은 누정기 작가로 평가했다. 누정 기가 명망있는 사람에게 청탁하여 지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문인으로서의 기우만의 영향력이 크다고 하였다. 5)홍영기는 호남의병의 창의 이념에서 기우만이 근왕지향의 전기의병에 속하다고 평가하면서 간략하게 다루었다. 홍영기, 뺷대

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뺸, 일조각, 2004, 106~112쪽.

6)권수용, 「기우만의 수신간찰과 교유의 성격」, 뺷영남학뺸 24, 영남문화연구원, 2013; 권수용, 「호남의 근대 누정 작가·작품 연구: 기우만, 오준선, 고광선을 중심으로」, 뺷동방학뺸 19, 동양고전연구소, 2010; 김기림, 「개화기 호남 유림의 여성인식; 송 사 기우만을 중심으로」, 뺷한국고전연구뺸 30, 한국고전연구학회, 2014.

(3)

그가 당시 유림들의 폭넓은 인정과 관심을 받았고 그 만큼 유림 및 후학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점을 감안 할 때 기우만에 관한 연구는 확산되어야 할 필연성을 갖는다

.

왜냐하면 그의 문학

,

사상 및 인식

,

활동 등을 고찰하여 개화기 문학적 또는 사상적 지형 속에서 기우만이 차지하는 위상을 밝히고 이로써 개화기 한문학 및 사상의 다양한 양상을 재구하는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따라서 본 고에서는 기우만의 문학

,

그 중에 서 시세계의 특성을 살펴봄으로써 당대 한시 경향 속에서 그의 시가 차지하는 위상을 밝히고자 한다

.

그리하 여 개화기 한시 지형도를 재구성하는 데에 한 단서를 제공하고자 한다

.

Ⅱ. 기우만의 생애와 문학작품 개관

기우만의 자는 회일

(

會一

),

호는 송사

(

松沙

)

이며

1846

8

7

일 장성의 탁곡에서 태어났다

.

본관은 행주이 다

.

중종 기묘사화 때 기준

(

奇遵

)

이 화를 입자 그의 둘째형인 기원

(

奇遠

)

은 장성으로 이사했다

.

이후 기씨 집안 은 대대로 장성을 중심으로 터를 잡고 살았다

.

아버지는 기만연

(

奇晩衍

)

이며 어머니는 이시성

(

李蓍成

)

딸이다

.

기우만이 태어났을 때 그의 집안은 호남의 명문가로 성장해 있었다

.

퇴계와 사단칠정을 논했던 고봉 기대 승

(

高峰 奇大升

, 1527~1572),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기효간

(

奇孝諫

, 1539~1593)

등이 있고

,

그의

7

대조인 기정익

(

奇廷翼

, 1627~1690)

은 송시열 문하에 출입하면서 송시열의 가문 및 학계와 긴밀한 관계를 맺 고 있었다

.

7) 그의 조부는 노사 기정진

(

蘆沙 奇正鎭

, 1798~1879)

으로서 당대 영호남을 대표하는 뛰어난 학 자였다

.

기정진은 충청 학계의 대표였던 송병선

,

화서학파였던 최익현 등과도 교유했고 정재규

,

조성가 등 영 남 우도 출신의 제자들을 길러냄으로써 자신의 학문적 영향력을 크게 확대할 수 있었다

.

기우만은 이러한 가 문적

,

학문적 배경을 갖고 조부인 기정진으로부터 학문을 배울 수 있었다

.

기우만은 생애 전반기를 기정진과 함께 했다

.

8) 그는 기정진의 강학 활동을 보조하면서 집안일도 주관했 다

.

낮에는 일하고 밤에 글을 읽었다고 한다

.

9) 이런 생활은 기정진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

기정진이 죽자 기우만은 조부이며 스승인 노사문집 간행을 주관하면서10) 호남과 영남 우도의 노사학파 문인들의 결속력을 강화했고 노사 학문 확산시키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

그 사이 영남 학자들과 전우 등이 노사가 쓴 「외필

(

猥筆

)

,

「납량사의

(

納凉私議

)

」에 대해 공격하자 정재규가 「외필변변

(

猥筆辨辨」

,

「납량 사의기의변

(

納凉私議記疑辨

)

」을 지어 반론을 펼쳤는데 이 일로 기우만과 정재규는 돈독해졌고 후에 의병활

7) 박학래, 뺷기정진: 한말성리학의 거유뺸, 성대출판부, 2008.

8) 연보에 의하면 병약했던 기정진은 50대에 병 요양을 위해 하사리(下沙里)로 옮겼고 당시 8살이었던 손자 기우만을 데리고 갔다. 이후 16세 때(1861년)에 갈전으로, 30세 때(1875년) 고진원 창리로 옮길 때도 기정진을 따라가 옆에서 모셨다. 뺷송 사선생문집습유뺸 권2, 「연보」.

9) 양회갑, 뺷송사선생문집습유뺸 권3, 「행장」, 159쪽.

10) 기정진의 유문을 정리하여 1883년(38세), 봄에 담대헌에서 뺷노사집뺸을 1차로 간행했다. 1890년(45세)에 기정진이 친구나 문인들과 문답했던 글을 엮어 뺷답문유편(答問類編)뺸을 간행했다. 1898년(53세) 10월에 부록을 추가하여 뺷노사집뺸을 중간 했고, 1901년에는 단성의 신안정사에 간역소를 설치하여 목판으로 3차 간행을 준비하였다.

(4)

동을 같이 논의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

한편 그는 항일 운동에도 주력하였다

.

당시 서양 열강과

,

,

일본 등은 정치적

,

경제적으로 조선을 침탈하 고 조선 국권을 차지하고자 각축전을 벌였다

.

천주교가 확산되고 새로 유입된 서양 학문

,

사상은 전통적인 유학 사상과 마찰을 일으키면서 사상적으로도 혼란했다

.

개화파에 의한 문화 및 제도 변혁 추진으로 일상 생 활 및 행정 체계도 변화했다

.

그는 전통 유학 사상을 강화하려고 했고 외세와 서양 문명을 배척했다

.

이는 기정진의 위정척사 정신의 실천적 계승이었다

.

척사 대상은 각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데

,

11) 당시 일본이 조선의 국권을 장악하고 침탈을 일삼았기 때문에 그의 척사 활동은 항일의병운동과 항일적 태도를 견지하는 데에 집중되었다

.

기우만은 항일 투쟁을 위해 두 차례 걸쳐 의병을 일으켰다

. 1895

년 일본군에 의해 민비가 죽임을 당하고

,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였으며

,

단발령까지 포고되었다

.

이 때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나주로 가 전 열을 정비하고 광주로 가려고 했다

.

하지만 선유사가 임금의 밀지를 전하자

왕명을 따라야 한다

는 명분으로 의병을 해산했다

.

1905

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종이 한 조각으로 나라를 잃게 되었다

고 격분하면서 최 익현과 정재규가 의병을 규합할 때 동참하고자 했다

. 1906

년 의병을 다시 모아 곡성에 모이기로 했으나 사 전에 발각되어 무산되었다

.

그러자 의병 활동을 주도했다는 죄명으로 광주 경무소에 갇혀 곤욕을 치렀다

. 1907

(62

) 3

월에 을사오적 암살 사주 혐의를 받아 영광

,

목포

,

서울까지 가 옥고를 치렀고

4

20

일에 풀려났다

.

집으로 온 후

1909

년 「호남의사열전」을 저술하였는데 이는 의병활동이 현실적으로 어려웠기 때문 에 대신 택한 항일 실천이었다

.

비록 항일 의병활동에 참가했지만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이들을 기리고 그 척사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

항일 투쟁에서 그는 최익현과 가장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

기우만이 장성 의병을 해산하고 좌절하여 삼 성산으로 들어갔을 때 최익현은 기우만의 항일적 기개를 칭송했다

.

12)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순국하자 기우만 은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몸소 정산까지 가서 조의를 표하였다

.

의병으로 활약했던 기삼연

,

고광 순

,

조우식 등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13) 의병 활동에 대한 논의를 함께 함으로써 호남 의병 활동의 지도자적 위상을 지니기도 했다

.

한편

,

기우만은 호남에서 누정기 제작을 가장 많이 지어줄 정도로 영향력 있는 문인으로서도 활약했지만

11) 국사편찬위원회, 뺷한국사뺸 38– 개화와 수구의 갈등 –, 탐구당, 2003.

12) 최익현, 뺷勉菴集뺸 권9, 「答鄭季方」, “松沙杜門深谷 木食澗飮 而爲畢命之計者 自不勝欽仰萬萬 先生之靈 若有在者 豈不莞爾 此外倭洋輩一類人說話 不足掛齒牙間也.”

13) 기삼연과 기우만은 숙질 사이이고 기우만이 1896년 의병을 일으킬 때 참여했으며, 기우만과 논의하면서 의병활동 했다. 1907년 호남창의맹소 대장에 추대되었고 영광, 부안, 정읍 등지에서 활동을 하다가 1908년 1월 1일에 잡혀 1월 2일에 광주 에서 총살당했다. 기우만은 그의 항일 정신과 의병 활동에 대해 「호남의사열전」을 통해 기록했다. 고광순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고경명의 후손이며, 1895년 광주에서 의병을 모아 기우만과 합세했다. 1907년 창평에서 의병대를 조직, 10월 에 화개의 연곡 부근에서 전사하였다. 기우만, 「호남의사열전」, 뺷송사선생문집습유뺸 권1; 김상기, 「한말 호남의병의 항전과 의병장」, 뺷인문학연구뺸 98, 충남대 인문과학연구소, 2015; 홍영기, 「한말 고광순의 의병활동과 지리산근거지론」, 뺷역사학연 구뺸 47, 호남사학회, 2012; 홍영기, 「한말 나주의병의 주도인물과 활동」, 뺷한국학논총뺸 34,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2010.

(5)

현재 남아 있는 작품 중 시의 비중은 매우 소략한 편이다

.

그의 문집으로는 본집과 속집으로 구성된 뺷송사선 생문집뺸과 뺷송사선생문집습유뺸가 있다

.

14)뺷송사선생문집뺸에 실린 작품은 모두

3,394

편인데 그 중 시는

208

344

수이며

,

뺷습유뺸에는

16

편의 작품이 있는데 그 중 시는

2

2

수가 실려 있다

.

문집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편지이며 그 다음으로는 묘갈명이다

.

15)

시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과 관계된 시를 앞 부분에 두었고 후반부로 갈수록 기우만의 제자들과 관련된 시 로 배열되어 있다

.

현재 남아 있는 시를 보면 거의 차운시 및 화답시

,

증시

(

贈詩

),

만시

(

挽詩

)

등이다

.

그가 시를 주고 받았던 이들은

143

여 명에 달하는데 그의 시가 모두

212

제라는 점에서 볼 때 어느 한 사람과 집 중적으로 주고 받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16)

반면 생활 속에서 느끼는 개인적인 감회만을 읊은 시는 아주 드문 편이다

.

그는

29

세 때에 고양

(

高陽

)

의 선영을 다녀오면서 성환

,

전의 등을 들러 최익현

,

임헌회를 만났고 계룡산을 유람했다

.

기정진 사후 노사문집 간행 관련 일로 삼가

.

진주

,

단성을 다녀왔고 지리산도 유람했었다

.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산수유람의 정회

,

노정 중의 감회를 시로 표현했을 가능성도 많지만 문집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

17) 기우만 행장에 의하면 평소 시를 지어 울분을 드러냈지만 문하인들이 기록하고자 할 때 전할 가치가 없다고 하면서 거절했다고 한 것으 로 보아 시를 짓기는 했지만 굳이 남겨 놓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18)

Ⅲ. 기우만의 문학 인식

기우만은 조부인 기정진의 학문을 수용

,

강학 활동을 하며 의병활동 및 시국 전환을 위한 실천에 주력했

14) 뺷송사집뺸 간행 작업은 그가 죽은 직후부터 진행되었다. 양회갑을 비롯한 제자들이 모여서 1917년부터 1919년까지 3년에 걸쳐 기우만이 남긴 글을 베껴 써서 문집 50권을 만들었다. 이를 저본으로 하여 1931년 뺷송사선생문집뺸을 간행하였다. 이 문집은 본집 50권과 속집 2권이 26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뺷송사선생문집습유뺸는 1980년에 남은 원고를 모아를 간행한 것 으로 3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15) 뺷송사선생문집뺸(1931刊)의 내용을 보면 본집에는 시 192제와 상소문 5편, 書 1025편, 잡저 176편, 序 285편, 記 420편, 跋 116편, 銘 4편, 箴 1편, 贊 1편, 辭 33편, 墓表 上樑文 12편, 祝文 9편, 祭文 44편 神道碑銘 16편 碑 51편, 墓碣銘 583, 墓誌銘 67편, 墓表 162, 行狀 104, 傳 36편 등이 실려 있다. 속집에는 詩 16제, 書 10편, 雜著 12편, 序 4편, 記 27편, 跋 7편, 辭 1편, 神道碑銘 3편, 碑 4편, 墓碣銘 17편, 墓誌銘 3편, 墓表 7편, 行狀 2편, 遺事 2 등이 실려 있다.

뺷송사선생문집습유뺸는 3권 1책이다. 내용을 보면 권1에는 시(2제), 書(5편), 잡저(1편), 記(2편), 축문(1편), 신도비명(1편), 묘갈명(2편), 행적(1편), 전(1편), 부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2와 권3은 부록이다. 권2에는 양회갑이 편찬한 연보가, 권 3에는 양회갑이 지은 행장, 李光秀가 지은 묘갈명, 洪錫憙가 지은 묘표, 呂昌鉉이 지은 묘지명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권3의 맨 앞에는 홍석희가 1975년에 지은 序가, 말미에는 1979년에 변시연이 지은 年譜跋이 있다.

16) 시를 준 사람들을 보면 이승학 9, 정호운 4, 오계수 4, 조의곤 3, 구혁모2, 기동준 2, 기홍연 2, 범형식 2, 안병렬 2, 양상행 2 등이며 나머지 사람들은 각각 한 번씩 나온다. 이는 기우만의 교제 범위가 매우 폭 넓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17) 그 이유는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기우만이 시를 전혀 짓지 않았거나 남겨 놓은 시가 없었으므로 문집에 넣지 못했 을 수도 있다. 기정진 고택에 소장된 고문서를 조사한 권수용의 증언에 의하면 기우만이 수신한 간찰만 있을 뿐 기우만이 쓴 시는 없다고 한다.

18) 梁會甲, 뺷송사선생문집습유뺸 권3, 「行狀」, “有遊賞不喜作詩 或有意會而見志 不拘聲病 惟攄發幽鬱而止 酬應文字多 操筆立書 未嘗起草揮灑如流簡嚴而淋漓 子姪門人 欲鈔集 一切禁止曰 吾文豈足傳耶.”

(6)

.

반면 문학에 대해 전문적으로 논의하지 않았다

.

다만 편지 및 다른 사람의 문집에 써 준 서문 등에서 그 편린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

그는 평소 유학 – 성리학 배우기를 강조하였지만 문학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

지금 학자들은 처음부터 의리

(

義理

)

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고 다만 사장

(

詞章

)

만을 암기하여 공교 로움을 뽐내고 화려함을 과장하면서 일생동안 이것만 합니다

.

이것에 힘쓰려고 하다면 차라리 그것을 배우지 않는 것은 어떨까요

?

송사가 답하기를

화려한 데에만 힘쓰고 실질

(

實質

)

에 힘쓰지 않는 것이 진실로 요즘의 폐단이다

.

하지만 또한 완전히 폐하는 일은 온당치 않다

.

다만 이것

(

실질

)

을 중히 여기고 저것을 가볍게 여겨 완 물

(

玩物

)

하여 뜻을 잃는 데에

(

喪志

)

이르지 않는다면 괜찮다

.”

고 하였다

.19)

이 글은 구혁모

(

具赫謨

)

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

구혁모는 최익현

,

송병선 등 당시 유명했던 성리학자들 을 사사했다

.

의리의 성리학과 화려한 사장

(

문학

)

은 모두 배워야할 것이었다

.

화려함과 기교만을 내세우는 사장의 폐단이 심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사장을 배우지 않으려고 질문한 것이었다

.

기우만은 의리지학이 사장보다 중요하며 문장의 실질을 보장한다고 보았다

.

다만 중요도의 경중이 다르다 고 하였다

.

사장이 실질이 없고 겉만 화려한 폐단이 있지만 완전히 배우지 않는 일은 온당치 않다고 하였다

.

문학이 지닌 가치를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

다만 그가 경계했던 것은

완물상지

(

玩物喪志

)’

에 있었다

.

당시 사장계가 완물에 빠져 학문의 방향을 상실 한 폐단을 지적하면서 문장의 화미함만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면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

20)

그가 문학의 가치를 인정한 것은 문학을 관도적 관점에서 이해했기 때문이다

.

이한

(

李漢

)

은 한창려의 문의 서문에서

문은 관도지기

(

貫道之器

)

이다

.’

고 했다

.

도를 꿰어 문장을 짓 는 일이 어찌 가히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인가

?

크고 부섬

(

富贍

)

하며 위대하고 화려한

(

偉麗

)

하다거나 넓 고 우아하며 정밀하고 상세한 것들은 모두 그것을 비유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21)

관도지기는 이한이 한유의 문집 서문에서 이른 말이다

.

문은 도나 도의 가치를 일관되게 꿰어 드러낸다는 말이다

.

문은 도와 떨어질 수 없고 도 또한 문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

이는 도와 문의 관계에 있어서 문의 독 립성을 인정하는 관점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

22) 그러나 기우만은 도와 문을 대등하게 여기지 않았다

.

도는 어

19) 具赫謨, 뺷愼菴遺稿뺸 권2, 「松沙問答」, “問今之學者初不知義理之如何 但以記誦詞章爲務 矜巧誇華 以終一世 與其務此寧無學 如何 松沙曰 務華不務實 固今之弊 亦不當全廢 但令此重彼輕 不至玩物喪志 可也.”

20) 기우만, 뺷송사집뺸 권8, 「答南國洪」, “看君之詩 看君之文 足令人開眼 少年文華 此豈易得 而士之爲志 非止於此但已.”

21) 기우만, 뺷송사집뺸 권13, 「韜菴文集序」, “李漢序昌黎文 謂‘文者貫道之器’ 貫道爲文 豈可易言哉 宏贍偉麗 博雅精詳 皆未足以 喩也.”

22) 황갑연, 「유가철학에 있어 문과 도의 관계에 대한 연구 – 주자의 주기론을 통해본 문과 도의 관계를 중심으로 –」, 뺷범한철학뺸 36, 범한철학회, 2005, 189쪽.

(7)

디에나 다 있다고 여겼고23) 그 도를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것이 필요하며 그것이 문이라고 했다

.

즉 문은 표현 형식 또는 표현 매체로서 어떤 것을 꿰어 하나의 계통으로 만들 수 있는 속성을 지니고 있으므로24) 그 것을 이용하여 도를 드러낼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

그리하여 굉섬

(

宏贍

)

하거나 위려함

(

偉麗

),

박아

(

博雅

),

정상

(

精詳

)

등의 말로는

관도

(

貫道

)’

의 묘함을 드러낼 수 없다고 하였다

.

그리하여 구혁모가 화려함만을 추구 하는 사장계의 폐단을 말하면서 문장을 배울 필요가 없음을 주장하자 문장을 폐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던 것 이다

.

한편 기우만은 문학을 인품과 연계하는 의식도 보여주면서

덕이 있는 이는 반드시 말이 있다

.’

고 하였 다

.

25) 하산

(

霞山

)

의 제월시에 대한 평가에서 한 말인데 같은 정경을 만나더라도 그 드러나는 것은 다르다

.

시가 쇄락한 풍격을 지닌 것은 내면에 덕이 있기 때문이다

.

덕은 수양의 결과이며 이에 따라 인품도 나뉜다

.

덕이 있음

말함

의 전제가 되며 이는 곧 인품이 문학과 연계될 수 있다는 말이다

.

그는 주자가 문학과 덕 성 사이에 개연성이 있다고26) 주장한 것과 같은 입장을 보인 것이다

.

덕이나 인품은 인간 내면이며 이는 성 정

(

性情

)

과도 연계된다

.

이에 기우만은 문학의 근본이 성정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

27)이는 화려함이나 문학적 기교만을 중시하는 태도를 부정했던 문학 인식과도 상통한다

.

그는 문학을

덕 있는 자의 말

로 이해했으므로 그것은 세교

,

명교와 관계되어야 함도 강조했다

.

사람은 태어날 때 사시

(

四時

)

의 기운을 타고 난다

.

현달하여 윗자리에 있으면 그 기운이 정사

(

政事

)

하는 데에 발휘되고 현달하지 못하여 아래 자리에 있게 되면 그 기운이 풍아

(

風雅

)

에 나타난다

.

만나는 바가 같지 않지만 그 기는 한 가지이다

.

그러므로 위에서 정사를 잘하면 풍아는 그 바름을 얻게 되고 풍아가 노래로 불려지면 또한 족히 선정

(

善政

)

을 도울 수 있다

.

옛날에 시를 가르친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

만약 이런 기운으로부터 나오지 않으면 말이 아름답고 음률이 기이하다 해도 각 계절의 풀벌레나 시들이 한 때 울어대는 것에 불과하다

.

어찌 족히 풍아의 체를 얻겠는가 …

(

중략

)

… 그 자상 하고 온아함은 봄에서 얻은 것이고 가지와 꽃이 무성하게 피어난 듯함은 여름에서 얻는 것이다

.

감개 하고 걱정함은 가을에서 얻은 것이고 깊이 숨어 있음은 겨울에서 얻은 것이다

.28)

사람은 사시의 기운을 타고 태어나는데 그 기운은 각각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발휘되는 양상이 달라 진다고 하였다

.

특히 아래에 있는 사람은 이러한 사시의 기운을 내면에 갖고 있으면서 자신이 만나는 상황에 23) 양회갑, 뺷송사선생문집습유뺸 권3, 「행장」, “天地之萬化萬象 無非示我以道也.”

24) 신승훈, 뺷조선 후기 한문학의 전변과 양상뺸, 신지서원, 2010, 185쪽.

25) 기우만, 뺷송사집뺸 권14, 「霞山遺稿序」, “公嘗謂余近賦霽月一絶句曰 月何嘗不好 好看霽後天 今宵灑落意 又是梧桐邊 余沈吟 數匝曰 有德者必有言 亶其然乎.”

26) 황갑연, 「유가철학에 있어 문과 도의 관계에 대한 연구 – 주자의 주기론을 통해본 문과 도의 관계를 중심으로 – 」, 뺷범한철학뺸 36, 범한철학회, 2005, 204쪽.

27) 기우만, 뺷송사집뺸 권13, 「晩德遺稿序」, “蓋詩多於文 其爲唐爲宋非余敢知 而本乎性情 樂而不淫 哀而不傷 淘寫其中和之氣 信 乎與國家元氣同其淳厖 而彼衰季浮 靡新巧之作 惡足以窺其壼閾哉.”

28) 뺷송사집뺸 권13, 「晩羲集序」, “人之生 得四時之氣 達而在上則其氣發于政事 約而在下則其氣發于風雅 所遇雖不同 而其爲氣一也 故上有善政則風雅得其正 風雅登歌 亦足以助發善政 此古詩之 所以爲敎也 若不從此氣中流出來 麗辭奇音 不過爲候蟲時鳥自鳴於 一時者 烏足以得風雅之軆也 …(중략)… 其慈祥溫雅 有得於春 條暢敷榮 有得於夏 感慨憫惻 有得於秋 隱淪深藏 有得於冬.”

(8)

부합하는 기를 시로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

.

정사가 잘 이루어져 세상이 올바르면 시도 바르게 되어 봄

,

여 름 기운과 같은 시가 나온다

.

그런데 선정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세상을 근심하는 마음을 시로 드러내 며 이는 가을과 겨울 같은 기운의 시로써 표현한다는 것이다

.

그럼으로써 도가 쇠미해져가는 세상을 드러내 고 걱정하며 성세를 지향하도록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

이처럼 문학은 상황에 부합하여 선정을 펼 수 있도록 기능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풀벌레나 새가 의미없이 울어대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

이것이 곧 풍아의 정신이며 기우만은 시가 이러한 풍아의 정신을 본받아 세상을 교화하는 데에 이바지해야함을 강조한 것이다

.

그는 관도적 관점에서 문학을 인정했고

,

문학을 덕성 또는 인품과 관련지었으며 세교적 기능을 강조했다

.

이런 문학 인식은 기존의 유학적 문학관에서 볼 때 새로움이 전혀 없어 보인다

.

하지만 그의 시대에는 유학 적인 가치를 강조하는 일이 중요했다

.

그는 국외로부터 유입된 사상을

이설

(

異說

)

로 규정했고 이설이 횡행하 여

신주

(

神州

)

가 육침

(

陸沈

)’

당한 때라고 인식했다

.

전통적 유학 및 성리학적 가치관은 도전을 받았고 학파 적 성향에 따라 현실 대응방식도 다양하게 분화했다

.

29) 유학유학 및 성리학 관점에서 보면 위기의 시기였으 므로 그는 유학적 가치를 강조하는 태도를 취했다

.

그의 문학인식은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유학적 가치를 지키고자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특히 관도적 문학 인식은 한유의 문학 정신과 부합한다

.

불교와 도가가 성행했던 시대에 살았던 한유는 일찍 이 자신의 도에 대해

불교나 도가도 아닌 요임금으로부터 공자

,

맹자로 이어지는 성인의 도

라고30) 밝혔다

.

기우만이 이설 – 외래 사상이 융성해가면서 유학적 가치가 약화되어 가는 상황 속에서 유학을 지키려는 처지 는 한유와 비슷하였다

.

따라서 기우만은 문장을 통해 유학적 가치를 고수

,

회복하고 이를 통해 세상을 교화 하고자 했다

.

그리고 문장이 그 역할을 해야함을 강조한 것이다

.

이런 측면에서 유학적 문학관을 계승하고 그것을 한층 더 강화하고자 하는 기우만의 문학 인식은 중요한 시대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

Ⅳ. 기우만의 시 세계

1. 암울한 시대 인식과 현실 비판

기우만은 개항 시대 이후에 태어나 일본과 서양 세력에 의해 조선이 침탈당하고 마침내 멸망하는 과정을 목격

,

체험했다

.

이러한 일생 경험에 의해 그는 현실을 암울하게 표현했다

.

角羅猾夏三百年 각라가 중화를 어지럽힌 지 삼백 년

亢極必反竟生事 지나치게 높이 올라가면 반드시 그 끝에 일이 생기는 법

. 29) 이숙인, 「개화기(1894~1910) 유학자들의 활동과 시대인식」, 뺷동양철학연구뺸 37, 동양철학연구회, 2004.

30) 한유, 뺷韓昌黎文集뺸 권1, 「原道」 “曰斯道也 何道也 曰斯吾所謂道也 非向所謂老與佛之道也 堯以是傳之舜 舜以是傳之禹 禹以 是傳之湯 湯以是傳之文武周公 文武周公 傳之孔子 孔子傳之孟軻 軻之死 不得其傳焉.”

(9)

氐羌乘時起陸梁 오랑캐가 때를 틈타 일어나 제멋대로 날뛰니 房杜束手指如臂 방현령이나 두여회조차 손 묶인 형세와 같네 心蠱根蠧竟莫救 중심과 뿌리가 벌레에 먹히니 구할 수 없고 尾大難掉今天地 꼬리는 너무 커져 지금 천지에 흔들기도 어렵네 箕敎百年廉風掃 기자 가르침 백년 염치 있는 풍조는 쓸어 버렸는지 斗粟尺布輸剝吏 한 말 곡식

,

한 자 베까지도 아전들이 긁어 가버리누나 牛鳴馬應開化家 개화가들이 소 울면 말이 응대하듯 하니

女無貞操士喪志 여자들은 정조도 없고 선비들은 뜻을 잃었네

虛位挾天作孤注 임금을 위협하여 자리를 비우게 하여 노름판의 막돈처럼 만들었으니 危忠那顧軀命毁 높은 충정심에 어찌 제 목숨 없어질까 되돌아볼까

31)

(

하략

)

기우만이 보기에 당시 현실은 기자에 의해 교화되어 중화에 가까웠던 그 유풍은 모두 사라졌다

.

기자가 주나라 중화 문명을 가져와 조선 땅에 예악과 문물이 융성하고 윤리가 떳떳했었다

.

하지만 이제는 염치 없는 풍조가 성행해서 아주 적은 양의 곡식과 옷감조차도 모두 다 빼앗아 가버리는 아전들이 횡행한다

.

아전들은 백성을 보호해야 하지만 도리어 가혹하게 세금을 걷고 자신들의 사욕을 채우는 데 급급하다

.

아전의 임무를 다하기는커녕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할 염치조차 없다

.

한편 개화가들은 임금을 겁박하고 노름판의 막돈처럼 함부로 대하는 행위를 자행한다

.

개화파들은 일본이 나 서양을 개화 모범으로 삼았다

.

조선의 전통적인 문화

,

사상

,

제도는 개혁해야할 대상이었다

.

일본과 서양 도 직접적으로 조선을 침탈하는 것보다는 조선 내의 정치가들과 결탁하는 편이 훨씬 유리했다

.

그 과정에서 민비 시해

,

고종의 아관파천

,

청에 의한 대원군 납치 사건 등이 발생했다

.

이는 신하가 왕권에 도전하는 행위 로서 유학 윤리 관점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

또한 개화파들은 외국의 사상 등을 수용

,

확산시키면 서 유학적 윤리 사상을 비판했다

.

그 결과로 여자들은 정조 관념이 없어지고 선비들은 뜻을 잃어버리는 상황 이 되었다

.

이는

오랑캐가 틈을 타 날뛴

결과이다

.

그래서 서두에서

각라 – 청 오랑캐 –가 화하

(

華夏

)

곧 중화를 흔 들

었고 시간이 지나 극성하여 조선에도 오랑캐 힘이 미쳤다고 서술한 것이다

.

조선의 위기를 오랑캐와 중화 의 대립적 관점

,

곧 화이론적 관점에서 파악한다

.

그러므로 조선은

짐승 발자욱이 가득하고 귀신이나 도깨비 들이 출몰

하는 공간이며 인간의 나라가 아닌 것으로 인식하는 암울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

더욱 심각한 것은 방현령이나 두여회 같은 능력이 뛰어난 이들도 이 위기 상황을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 이다

.

게다가

선비들이 상심하고 청산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에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도 임금의 걱정을 덜어줄 이 하나 없는

32) 현실은 더욱 암울할 수밖에 없었다

.

특히 걸출한 인재들의 부재는 암울함을 더욱 절

31) 기우만, 뺷송사집뺸 권1, 「靑皋效黃山谷二十八宿歌 寄示責和 卒賡呈 祇露不平之氣 蓋靑皋吾同志 甘酸與同 撥吾憫 亦所以撥 靑皋之憫也」.

32) 기우만, 뺷송사집뺸 권1, 「齋居愁寂 朴君純汝 以南州詞宗 不鄙酬唱隨 輒拚和八絶」, “傷心志士盡靑山 誰使吾君一解顔 昨夜宮

(10)

실하게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

一死扶陽國有人 한번 죽어 양을 붙잡은 이가 나라에 있으니 千秋光岳獨精神 천추의 광악에 홀로 그 정신 높구나 忠魂應化朱雲劒 충성스런 영혼은 응당 주운의 검이 되어

殿陛頭頭斷佞臣 아첨만 하는 간사한 신하들을 궁궐 계단 앞에서 하나하나 목 베어내리

.33)

이 시의 애도 대상은 박영원

(

朴永源

)

이다

. 1896

년 기우만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박영원도 참여했다가 관 군에게 잡혀 죽었다

.

기우만은 그의 충의 정신 기리며 한나라 주운에 비견했다

.

주운은 당시 사부였던 장우

(

張禹

)

가 직언을 하지 못하고 아첨하는 것을 보고 검을 빌려 장우의 목을 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기우만은 박영원이 주운과 같이 강직함과 충정심을 가졌다고 칭송한 것이다

.

기우만은 이런 인재가 활약하기를 희망하 지만 현실은 간신들만 가득하다

.

결국 주운 같은 박영원이 살아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므로 그저 상상 속에서만 간신들을 죽이는 데에 그친다

.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인재가 죽는 허탈감으로 인해 현실의 암울함은 더욱 절실해지는 것이다

.

이처럼 기우만은 현실의 암울함을 보여주면서 그런 현실에 대해 비판을 동시에 가한다

.

첫 번째 시에서는 임금을 업신여기고 배신하고 사리사욕만 채우는 관리들의 탐학과 부패를 비판한다

.

이들은 모두 왕과 나라에 대한 충정심이 전혀 없고 사욕을 채우기 위해서는 간사한 인간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

두 번째 시에서와 같이 충신에 의해 죽어야할 사람들이다

.

박영원의 영혼을 빌어 간신의 목을 벤다는 것은 간신만 가 득하다는 의미이다

.

오랑캐가 강해져 조선도 이적화

(

夷狄化

)

되는 때에 조선 땅의 신하들과 관리들은 상황을 깨닫고 막아야한다

.

하지만 오랑캐에 빌붙어 이적으로 변화하는 데에 앞장 서서 이적의 풍조로 바뀌는 현실 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

2. 포부 좌절과 자조

기우만은 기정진 손자로서 촉망을 받았고 기정진 사후 호남의 유림들 사이에서 종장으로서의 위상을 지녔 다

.

민비가 시해된 을미사변 직후 이에 항거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킴으로써 행동하는 유림의 모습을 보이기 도 했다

.

하지만 세상은 자신의 뜻과 맞지 않았다

.

그 자신이

경영했던 일들은 모두 뜬 구름과 같았고 거의 모든 일들이 세상과 어긋났다

.’

34)거나

어릴 적 춘추를 천 번이나 읽었는데 날마다 초심을 저버리고 세월만 흘렀다

.’

35) 말했듯이 당시 현실 속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한 좌절감과 자조를 드러내기도 했다

.

梧秋氣早 色鴻天外已驚寒.”

33) 기우만, 뺷송사집뺸 권1, 「挽鴉山朴君源永 三絶」.

34) 기우만, 뺷송사집뺸 권1, 「安君處仁寄詩四絶 百朋不足爲珍 忘拙拚和」, “經營多少摠浮雲 與世相違已十分 歲寒相信云誰在 手折 靑松寄贈君.”

35) 기우만, 뺷송사집뺸 권1, 「安公三圭容 六詠寄意和呈」, “少年千遍讀春秋 日負初心歲月流 歸泊三山風不動 會須水到放吾舟.”

(11)

知己相逢皆燕趙 지기를 만나니 모두 조

,

연의 사람이어서 擊劒長歌歌且雄 검을 만지며 장가 부르니 또한 씩씩하구나

.

衰甚遂斷四方志 늙어가면서 사방의 뜻을 끊어버리니

志事揣摩負桑蓬 뜻과 일을 헤아려보니 초년 때의 포부를 저버렸네

.

大官謀國輕房杜 큰 관리되어 나라를 경영함에 방현령이나 두여회를 가볍게 여기고 小吏作縣屈黃龔 작은 관리나 되면 고을 다스림에 공수

,

황패를 굴복시키고자 했었지 認賊爲子君知否 적을 인정하여 자식으로 삼는다는 말을 그대는 아는지

傷心時事大脫空 시사에 마음 상했지만 모두 헛되기만 했다네

.36) (

하략

)

이 시는 이교우

(

李敎宇

)

에게 준 시이다

.

정재규

(

鄭載圭

)

문인이었지만 곽종석

,

최익현 등을 찾아 다니며 배웠다

.

기우만은 그에 대해

나이는 어리지만 학문을 잘 알고 신칙을 잘하여 마음으로 기특하게 여겼다

.’

라 고37)평했다

.

나이가 어리지만 기우만은 이교우를 지기를 삼았다

.

이교우에게 시를 주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 아 보고 자신의 포부와 그것이 좌절되는 과정을 솔직하게 서술했다

.

38)

기우만은 자신의 지기

(

知己

)

들이 모두 조나라나 연나라의 충신들과 같다고 했다

.

이 두 나라 사람들은 나 라를 위해 죽음조차 가볍게 여기는 풍조를 숭상했다

.

이 시에서 기우만은 특히 형가와 고점리

,

그리고 서부 인

(

徐夫人

)

등과 같은 의리와 기개를 갖고 나라를 위해 충정을 다하려는 의지가 있었음을 밝힌다

.

또한 기우 만 자신의 포부도 있었다

.

높은 관리가 되면 방현령이나 두여회 같은 재상들도 굴복할 정도로 나라를 잘 경 영하고

,

작은 고을의 수령이 되면 공수

(

龔遂

)

나 황패

(

黃覇

)

같이 유능하게 고을을 다스릴 포부를 갖고 있었다

.

하지만 현실과 포부는 부합하지 않았다

. 1896

년을 전후로 세 번 상소를 올렸지만 물리침을 당했고 의병을 일으켰을 때 왕은 선유사를 보내 의병해산을 명하였다

.

결국 기우만은 여기에 실망하여 삼성산으로 들어갔 다

.

현실과 포부 사이의 괴리를 절감한 것이었다

.

그리하여

사방지를 끊어버리게 되었고 젊은 날의 포부를 저버리게 되었다

고 했고

, ‘

그릇된 생각을 진실한 것으로 여기며 살았던 것

이어서

힘만 허비하고 성취해 낸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삶이었음을 고백한다

.

현실과 포부의 괴리로 인한 좌절감을 다음과 같이 드러내기도 했다

.

從今處世學甯愚 이제부터 영우의 처세를 배우고자 하나

大廈誰將一木扶 어느 누가 큰 집을 기둥 하나로 지탱할 수 있으랴

.

已知代斲徒傷手 서투른 목수가 대신 하려다 손만 다침을 이미 깨닫고서 縮首山菴作腐儒 목 움츠리고 산에 들어 썩은 선비가 되었네

.39)

36) 기우만, 뺷송사집뺸 권1, 「李君致先敎宇 以十韻贐行, 感興餘意, 韻以和」.

37) 기우만, 「송사집뺸 권35, 「壁山李公墓碣銘」, “記余昔遊艾山 明湖間 見李生敎宇 年妙知學 生雅飭 心異之.”

38) 이교우(李敎宇)는 1881년에 태어났으므로 이 시는 적어도 1900년 전후에 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 기우만은 50대 중후반이었다.

39) 기우만, 뺷송사집뺸 권1, 「漫題」.

(12)

기우만은 처음에 영무자

(

甯武子

)

와 같은 처세를 지향했다

.

영무자는 위나라 대부로서 위 성공이 무도하여 나라를 거의 잃을 지경이었는데도 조정을 떠나지 않고 온갖 노력을 하면서 몸을 아끼지 않았다

.

공자가

영무 자의 어리석음을 따라갈 수 없다

.’

40)말할 만큼 우직하게 충성을 다했다

.

기우만도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 하고자 하는 포부를 가졌고 노력했었지만 그의 노력은 현실에서 받아들어지지 않았다

.

그 과정에서 하나의 나무만으로는 큰 집을 지탱하기 어렵고

,

노련한 목수 대신 나무를 깎으려는 이들이 손만 다치는 것처럼 자신 도 그렇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

그의 처지

,

노력

,

재능으로써 현실적 위기를 개선하거나 극복하지 못한 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깨닫고41)목을 움츠려 산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

그런 자신에 대해

썩은 선비

라고 통렬하게 비평한다

.

당시 유림들의 현실 대응은 척사론에 의거한 의병활동이나 외세에 대한 항거

,

은거하는 것42) 등이었다

.

기우만은 의병을 일으켜 항일 정신을 고취하며 국권을 수호하는 데에 앞장섰고

,

윤리 기강 확립을 통해 나라 의 안정을 주구하기 위해 향음주례나 석채를 거행하는 등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

이런 점에서 은거하 여 수구하는 자세와는 거리가 있다

.

그럼에도 자신을 썩은 선비로 자처했음은 지배세력이나 변한 세상에 의 한 좌절감이 컸음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

이런 좌절감으로 인하여 기우만은 자신의 처세나 처지에 대해 스스로 비웃는다

.

滔天洪水吾其魚 하늘에 닿을 듯하나 홍수 속에 나는 작은 물고기 같으니 豈有人閒樂地居 인간 세상에 즐거운 곳이 있으랴

.

庸愚不及木居士 어리석고 어리석기는 목거사에도 못 미치는데

求福君行計太疎 복을 구하고자 하는 자네 계획은 참으로 미련하구나

.43)

이 시는 이석용

(

李錫庸

, 1878~1914)

이 배움을 청할 때 지어 준 시이다

.

이석용은 임실 출신으로 최익현과 송병선 등에게 배웠고 의병으로 활약하다가

1914

년 대구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

시에서 기우만은 자신이 다 른 사람의 스승으로서 적합하지 않음을 토로했다

.

세상은 큰 물이고 자신은 작은 물고기여서 거센 물결에 휩쓸릴 위험이 있기 때문에 마음 놓고 즐겁게 살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다고 하였다

.

큰 물과 아주 작은 물고기를 대비함으로써 자신의 영향력이 보잘 것 없음 을 시사한다

.

그리고 또 자신을 목거사와 비교한다

.

목거사는 한유의 시에 나오는 나무이다

.

오랫동안 버려 져 있었는데 그 모양이 불상과 흡사하여

목거사

라는 팻말을 붙였는데 사람들이 오해하고 와서 복을 빌어 신 처럼 여겼다고 한다

.

44) 실제로 목거사는 어떤 능력이나 재주가 없는데도 세상 사람들이 오해하여 큰 능력이

40) 뺷論語뺸, 「公冶長」, “甯武子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可及也 其愚不可及也.”

41) 기우만, 뺷송사집뺸 권8, 「答孔道卿向日進言 五賊發明投章之後 納他疏 進而三退 賤宜然而亦見世變 之徹亦何補」.

42) 유인석은 변란에 대처하는 데에는 세 가지(處變三事)가 있다고 하면서 거의소청(擧義掃淸), 거지수구(去之守舊), 치명수지 (致命遂志) 등을 제시했고, 전우는 치명수지(致命遂志), 포목고사(抱木枯死), 은거수도(隱居授徒) 등을 제시했다. 43) 기우만, 뺷송사집뺸 권1, 「李君敬恒錫庸 雲水佳士 妙齡文華閒架不草草 紆顧入山 以一絶求益 步韻以謝」.

44) 韓愈, 뺷韓昌黎集뺸 권9, 「題木居士」, “火透波穿不計春 根如頭面幹如身 偶然題作木居士 便有無窮求福人.”

(13)

있는 존재로 과장되었다

.

목거사는 능력이 없는데 자신은 그만도 못하다고 하면서 후학들을 가르칠 만한 능 력도 재주도 없다

.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기우만이 대단한 스승이라고 오해하고 배우기를 청하므로 스스로 부끄럽고 한탄스럽다는 것이다

.

이에 자신을 찾아 온 이석용을 향해

참으로 미련한 계책

이라고 경계한다

.

결국

세상은 변하고 자신은 도움이 될 수 없다

.’

는 것을 깨달았다

.

현실에 부딪쳐 겪은 좌절감은 자신의 무기력함을 스스로 비웃게 하며 후학들에게조차 무능함을 고백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

이러한 좌절과 자조는 한편으로는 암울한 현실을 적실하게 드러낸 것이기도 하며 그런 현실을 만들어낸 이들에 대한 분노의 또 다른 표현이다

.

조나라 연나라 사람들의 강개함이 인정받지 못하고 능력과 재능이 없 는 목거사 같은 사람이 과장되게 인정받으며 떠받들어지는 세상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

기우만 은 자신에 대한 비웃음을 통해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에 충분한 인재들이 용납되지 못하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

3. 이설(異說) 경계와 후학에 대한 기대

기우만은 암울한 현실 속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자조했지만 후학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학문을 권면하는 뜻 을 시로 나타내기도 했다

. 1896

년 의병활동이 무산되고 삼성산으로 들어온 이후부터는 후학을 길러내는 일 에 집중하였다

.

우선 전통적 유학를 수호하고 학맥 및 도통을 재정립하는 일을 급선무로 여겼다

.

일본 및 서양 사상과 학 문이 들어오고 천주교 및 동학 사상이 사람들의 의식을 흔들었다

.

그는 이를 삿된 것으로 규정하고 사회적

,

국가적 위기의 원인이라고 보았다

.

위기 타개 방법은 전통 유학 고수 생각했다

.

45)

향음주례나 석채 거행은 이런 의식에서 나왔다

.

46) 삼성산에 단을 쌓고서 공자를 비롯하여 안자

,

증자

,

자 사

,

맹자 그리고 송나라의 유학자와 조선의 송시열

,

기정진 등을 대상으로 석채를 거행했다

.

후학들에게 유학 과 그 도통을 다시 일깨워줌으로써 전통적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

이와 같이 유학을 권장하면서 다양한 학문과 사상이 퍼져 있는 세상을 주의하라고 경고한다

.

遠遊無遠遊 멀리 간다하는데 멀리 가지 말기를 遠遊此非時 멀리 가는 일 지금은 그 때가 아닐세

.

見今異言異服 보아하니 지금은 다른 말들과 다른 복식들이 있으니 何忍聞而見而 어찌 차마 듣거나 볼 수 있겠나

衰季幾箇人 도가 쇠미해져가는데 몇 사람이나

45) 기우만, 뺷송사집뺸 권10, 「與諸同志」, “扶正斥邪 有非二致 扶正則邪自斥 年前邪類之滋蔓 皆由於吾道之不明 爲吾儒者 豈非反 省惕然處也 崇正學以闢異端 爲吾儒第一義諦 而今日尤爲急先務也.”

46) 기우만, 뺷송사집뺸 권10, 「與諸同志」, “扶正斥邪 有非二致 扶正則邪自斥 年前邪類之滋蔓 皆由於吾道之不明 爲吾儒者 豈非反 省惕然處也 崇正學以闢異端 爲吾儒第一義諦 而今日尤爲急先務也 此不可無一席爛商 相率而面勖也 第以三月望日 說行飮禮 嗚呼 一日賓主百拜 豈遽爲崇明正學 而變移風俗基本立矣 聖人明言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 此亦可援以爲證案也.”

(14)

不爲聞見所推移 보고 들은 대로 옮겨가지 않을 수 있는지

.47)

이 글은 심상복

(

沈相福

, 1876~1951)

에게 준 것으로 일명 「遠遊賦」라고 한다

.

단성 출신으로 조성가

,

정재 규

,

최숙민 등을 사사했다

.

이들은 모두 노사 기정진 제자로서 영남 우도에서 노사학파를 형성하였는데 심상 복은 이들을 사사하여 노사학파의 한 사람이 되었다

.

정산

(

定山

)

에 와 있던 최익현에게 가는 도중 장성에 들 러 기우만에게 인사하였는데 이 때 지어준 시이다

.

48) 최익현은

1900

4

월에 정산으로 옮겼으므로 이 글은 그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

심상복은 영남에서 충남 정산까지 가려했다

.

멀리 가서 배우려는 심상복의 학문 자세에 대해 기우만은 격 려하면서도 한편으로 경계심 가득한 말을 건넨다

.

서두에서 그는

원유

의 효용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

멀리 가서 배우는 일은 이른 바 박학

(

博學

)

을 위해서이다

.

이런 원유는 매우 긍정적이다

.

하지만 그는 원유하는

시기의 적절성

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지금은 원유하기에 마땅하지 않다

.’

고 한다

.

그가 판단하건대

,

세상은 이언

(

異言

)

과 이복

(

異服

)

이 가득하다

.

이 글이

1900

년대 이후에 지어진 것을 감안 한다면

,

사회 전반에는 서양에서 유입된 사상

,

학문이 퍼져 있었다

. 1884

년부터 계속된 복식 개혁과

1895

년 단발령 등으로 인해 전통적인 복식은 서양식 복식으로 점차 대체되고 있었다

.

그는 전통 복식을

선왕의 법

으로

,

서양식 복식을 오랑캐 문화로 생각했다

.

일찍이 갑신정변 때 개복령

(

改服令

)

이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신주

(

神州

)

가 망하고 이적이 침탈하여 융성했다

.’

49)한탄했다

.

단발령이 포고되었을 때에는

온 나라를 오 랑캐와 금수의 나라로 만들었다

.’

고 분개했다

.

50)그는 당시 조선은 오랑캐로 변했다고 판단했고 이런 상황에 서 박학

(

博學

)

을 명분 삼아 원유하는 일은 마땅치 않다고 경계했던 것이다

.

더구나 이언

(

異言

)

정학

(

正學

)’

인 유학의 도와 성격이 전혀 다른 학설들이다

.

이것은 오랑캐 땅에서 오 랑캐들에 의해 만들어진 학설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조선의 젊은이들이 배워서는 안될 삿된 학문이었다

.

세상 은 온통 오랑캐 것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젊은 나이에 원유하여 보고 듣게 되면 오히려 그것에 유혹당할 위험 이 크다고 경계한다

.

이언에 대한 기우만의 우려는 다음과 같은 시에도 나타난다

.

莫向他歧惑 다른 갈림길을 향해 미혹되지 마시라 道源自有眞 도의 근원은 저절로 참됨이 있다네

.

而今多異說 지금은 다른 학설들이 많으니 誰是能言人 능히 말 잘할 사람은 누구인지

.51)

47) 기우만, 뺷송사집뺸 권1.

48) 기우만, 뺷송사집뺸 권1, 「贈沈景晦」, “景晦嶺表之秀 操守文識 久已欽尙 紆顧三山广室 喜可知也 謂將遠遊至薇蕨山下藏龜洞 謁勉菴尙書 遠遊不可無贐 賦此以贈.”

49) 梁會甲, 뺷송사선생문집습유뺸 권3, 「행장」. “甲申朝廷行改服令十月之變又作先生歎曰 今神州陸沈 夷狄浸盛.”

50) 뺷송사선생문집습유뺸 권2, 「연보」, “見今矯制者 擧一國而爲夷狄禽獸.”

51) 기우만, 뺷송사집뺸 권1, 「贐李國彥」.

(15)

다른 갈림길을 향하지 말라는 말은 이미 세상에 갈림길이 많다는 역설적 표현이다

.

여러 갈림길에서 방향 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준은 참된 도이다

.

기우만이 말하는 참된 도는 유학의 도이다

.

이설은 유학과 대립되 는 것으로서 동학 교리

,

천주교 교리

,

개화와 관련된 학설

,

서양에서 들어온 학문과 사상 등을 의미한다

.

동 학이나 천주교는 모든 인간이 신분 고하 없이 평등하다는 논설을 전파했고 개화의 논설은 조선의 전통적 문 명

,

제도를 개혁 대상으로 여겼다

.

유입된 서양 학문은 실용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신학문이란 이름으로 근 대식 학교의 교육 내용으로 편입되어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

.

젊은이들은 신학문과 전통 유학이 병존하는 환경에 놓였던 것이다

.

그러나 기우만은 신학문을 배척했고 융성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신학문 학보를 불태우기도 했다

.

52) 그는 후학들이 유학을 지키고 다른 학문에 의해 미혹되지 않으며 더 나아가 능히 말을 잘하여 유학을 전수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

이와 같이 기우만 생존 시기는 신학문이 그 위세를 확장하면서 전통적 유학과 대척점에 있었고

,

성리학적 내부에서도 분화가 일어났다

.

그리하여 다양한 학문과 학파적 성향이 병존했다

.

기우만이 후학들에게

이설

(

異 說

)’

또는

이언

(

異言

)’

에 대해 경계하는 것은 오랑캐의 삿된 학설을 배척하여 성인의 학문인 유학을 다시 흥성 시키고자 한 것으로서 이는 위정척사 의식의 현실적 실천이기도 하다

.

또한 조부이면서 스승이었던 노사 기정 진의 학설을 성실히 계승하여 지켜내 노사학파의 대표자로서

,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자 한 것이기도 하다

.

Ⅴ. 결 론

이상과 같이 기우만 시를 살펴 보았다

.

그는 시를 통해 암울한 현실 인식을 드러냈다

.

이로 인하여 좌절된 포부와 국가 위기 속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을 자조하기도 했다

.

그러나 후학에 대한 기대를 저버 리지 않고 학문 – 유학을 수호하고 그에 매진하기를 권면했다

.

기우만이 살던 시대는 조선 내부적 모순으로 사회가 혼란했고 외세에 의한 침탈까지 더해져 국가로서 총체 적인 난맥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문인들은 자신들의 시를 통해 다양한 현실 대응적 면모 를 보였다

.

국가의 위기 및 사회적 혼란상에 대해 우려하고 비판하는 경향의 시들이 나타났다

.

무엇보다 당시 현황에 대해서는

유학 및 유교적 정신의 쇠퇴

’, ‘

이적화

(

夷狄化

)

된 조선

이라는 인식이 공통적으로 나타났는 데 이는 기우만이 시에서 보여준 시대 인식과도 동일한 것이었다

.

송병선은 춘추 정신이 사라지는 것을 우려 하고53)유중교는 유교 회복의 의지를 표출함으로써 유교적 정신의 쇠퇴를 우회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

54)기 우만도 마찬가지였다

.

거기서 더 나아가 당시 유교가 다양한 사상 및 학문들이 포진해 있는 상황에 놓였음을 명확히 인식

,

그것들을

오랑캐의 것

’, ‘

이단

으로 규정하면서 이설

(

異說

)

에 현혹되지 않도록 경계했다

.

52) 뺷송사선생문집습유뺸 권2, 「연보」, “焚學報 – 新學之說 日盛 所謂學報者至 先生見而焚之.”

53) 이영휘·송기섭, 「연재 송병선의 학맥과 작품세계」, 뺷어문연구뺸 43, 충남대 어문연구회, 2003.

54) 이동재, 「省齋 柳重敎의 詩文學 一考」, 뺷한자한문교육뺸 20, 한국한자한문교육학회, 2008.

(16)

한편 당시 한시들은 현실에 대해 주목하여 비판하는 경향도 강하게 띠고 있었다

.

그것에 특히 관리들의 부정부패

,

사회 및 경제적 위기 속에서 고통 받는 백성들의 삶에 관심을 둔 시들이 많았다

.

곽종석의 「유월 십육일시대우

(

六月十六日始大雨

)

,

이건창의 「숙광성진기선중새신기

(

宿廣城津記船中賽神記

)

,

황현의 「종어 요

(

種菸謠

)

,

허훈의 「기민탄

(

飢民歎

)

」 등은 가뭄

,

전염병

,

굶주림에 시달리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백성 들을 고통을 그려내면서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

55) 이처럼 한말 및 개화기에는 경제적 위기 속에서 고통 받는 백성들의 삶

,

현실의 부조리

,

사회적 혼란상 등을 드러내고 비판하는 적극적인 현실 참여적 시들이 많았다

.

56)

반면 기우만의 시에 백성의 삶에 시선을 두고 그들의 고통스런 삶을 표현한다든지

,

부패한 관리들을 신랄 하게 비판하는 것은 거의 없다

.

암울한 현실 인식이나 자조감을 표출함으로써 현실에 대해 우회적으로 비판 하는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

유교 수호를 위해 향음주례

,

석전제 등을 행하고 항일 의병 활동 등 적극적인 현실 대응적 태도를 보여준 것과는 달리 시에서는 오히려 소극적인 태도로 현실 비판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이런 면은 당시 현실 비판적 시들과 대비해볼 때 기우만 시가 지니는 한계점이라 할 수 있다

.

당시의 한시들은 외세 침탈이나 일본의 국권 침탈에 항거하여 투쟁의식을 보이고57)그에 부응하는 위정자 들에 대한 분노 표출하기도 했다

.

유인석은 「통원곡읍

(

痛寃哭泣

)

」에서 망국의 울분을 토로하고 항일의지를 강하게 드러냈으며

,

58) 황현은 「문변

(

聞變

)

」에서 충신은 없고 간신만 가득하다고 직설적으로 비판하였다

.

59) 이들의 시는 대체로 개화나 서양문명

,

일본 침탈에 대해 적극적으로 거부 또는 항거하는 의지를 표명했던 것 이다

.

기우만은 최익현

,

유인석과 같이 항일 투쟁에 나서고 상소 활동을 통해 매국적 위정자들을 없앨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

그러나 그의 시에서 항일 투쟁 의식이나 위정자들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의식은 찾아 보기 어렵다

.

이 또한 실제 실천 모습과 시가 일치하지 않는 점인 만큼 한계점이기도 하다

.

이런 점에서 볼 때 기우만의 문학은 소극적 척사 및 현실 비판 성향을 띠고 있다

.

그러나 유학적 가치를 강조하고 후학들에게 유학을 고수하기를 권유함으로써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만의 해법으로 시대의 문 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

그리고 전통 유학의 가치를 재인식하여 계승하고자 했다

.

시를 통해서 이러한 의식을 드러낸 것은

문학은 시대 상황을 보여주어야 하며 세상을 바른 데로 이끌어야 한다

는 문학의 사회적 효용을 실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

그런 점에서 그의 시세계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

55) 조홍근, 「면우 곽종석의 한시연구 – 자연시와 농민시를 중심으로 –」, 뺷퇴계학논총뺸 20, 퇴계학부산연구원, 2012; 윤경희, 「황 현의 세계관과 시세계」, 뺷한국학문학연구뺸 14, 한국한문학회, 1991; 이지혜, 「방산 허훈의 한시 창작배경과 주제의식」, 뺷동 양예학뺸 32, 동양예학회, 2014.

56) 심경호, 「근세 한시의 지향의식 분화」, 뺷한국시가연구뺸 26, 한국시가연구회, 2009.

57) 김영철, 「개화기 한시의 현실 인식 연구」, 뺷한국시학연구뺸 5, 한국시학연구회, 2001.

58) 박준호, 「면암 유인석의 한시에 대한 연구」, 뺷대동한문학뺸 21, 대동한문학회, 2004.

59) 윤경희, 「황현의 세계관과 시세계」, 뺷한국학문학연구뺸 14, 한국한문학회, 199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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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2015

5

29

일에 투고되어

,

2015

6

9

일까지 편집위원회에서 심사위원을 선정하고

, 2015

6

30

일까지 심사위원이 심사하고

,

2015

7

6

일 편집위원회에서 게재가 결정되었음

.

(18)

❙Abstract❙

A Study on Ki Woo-man’s Poetry

60)

Kim, Girim*

Ki Woo-man is a writer an d Con fucian Scholar in the age of en lighten men t in Korea. His grandfather was Ki Jung-jin, Nosa, who was a great Confucian Scholar. He had the thought of drive out a perverse religion, and participated in the anti-Japanese movement.

He thought that it is a tool deliberded Do(

). And he believed that the literature shows personality, the phases of the times, so Ki Woo-man’s view of literature emphasised on utilitarian value.

His Poetry described the phases of the times when he lived, which was dark image. He thought that Chosun was controled by barbaric outlander and criticize persons of enlightenment party severely, because they colluded with the Japanese or Western foreigners.

He expressed his frustration and abase himself in his poetry. He defined himself a man uncapacitated-incompetent classical scholar, and frankly confessed it.

Meanwhile he pointedly emphasized that young man had to learn Confucianism and resist temptation of western study, Western thought which was called sinhakmoon(

新學問

).

It’s important that he depicted his times and criticized reality even if passively criticize.

[Key Words] Ki Woo-man, Ki Jung-jin, False positive cheokssapa, the time of enlightenment, Utility a literature

* Assistant Professor, Chosun University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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