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21세기 ‘이야기꾼’의 등장과 역사 되쓰기의 예술실천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1

Share "21세기 ‘이야기꾼’의 등장과 역사 되쓰기의 예술실천"

Copied!
24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역사 되쓰기의 예술실천

: 일민미술관 ≪불멸사랑≫(2019)을 중심으로

조 주 현

*1)

Ⅰ. 들어가며

Ⅱ. 역사구성의 잠재태로서 ‘에피소드’적 서사 구조 1. 에피소드와 신화: 재생과 붕괴의 역사

2. ≪불멸 사랑≫: 새로운 매체 환경에서 등장한 ‘이야기꾼’

Ⅲ. 이마골로기: 시선과 불멸의 이미지

1. 카메라, 시선, 이미지: 21세기 불멸을 향한 욕망 2. 기억과 경험의 재구성

Ⅳ. 나가며

* 일민미술관 학예실장

이 논문은 한국미학예술학회 2019년 특별기획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원고를 수정보완하여 게재한 것임.

* DOI http://dx.doi.org/10.17527/JASA.57.0.06

(2)

Ⅰ. 들어가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유한한 자신의 삶을 극복하고 죽음 이후까지 생을 연장하고자 하는 불멸과 영생에 대한 갈망으로 초월적 존재자를 상상해왔다.

그것이 종교의 시작이며, 역사와 문학을 이끈 원동력이었다. 이러한 인간의 불멸 에 대한 상상은 21세기 들어 현실이 되었다. 유발 하라리(Yuval Harari, 1976- ) 는 저서 사피엔스 Sapiens: A Brief History of Humankind (2011)에서 죽지 않 는 인공지능을 만들어, 혹은 자신의 복제를 통해 인간이 영원히 생을 연장하는 조물주가 되는 순간의 도래를 예견한다. 이제 인간의 존재는 사후에도 데이터로 영생이 가능하다. 한 사람이 일생 동안 축적한 기억이나 경험이 AI를 통해 크라 우드에 저장되고 후세의 인간들의 삶 안에 머물며 물리적으로 존속하게 된다. 그 러한 세계에서, 사후의 생을 약속함으로써 유구한 시간을 존속해온 종교는 과연 어떤 역할로 살아남을까. 기록이나 역사는 어떠한가.

주지하다시피, 인류의 역사는 각 시대를 대표하는 매체가 만들어낸 서로 다 른 코드에 의해 인간의 의식과 지각을 변화시키며 진보해왔다. 최초의 매체 기술 인 ‘문자-인쇄술’은 근대적 자아의 핵심적 미디어로, “억압을 통한 질서화”라는 근 대성의 표본을 이루었다. 근대적 자아는 활자들을 조작하고 세계를 활자화함으로 써 스스로를 역사 속으로 기록한다. 그러나 오늘날 기술적 환경은 선형적, 원근법 적으로 구성된 균질적인 세계가 모자이크 조각으로 해체된 탈역사의 시대를 이끌 었으며, 그것은 시각적으로 직관할 수 있는 사고와 형상을 지닌 하이퍼텍스트의 시대로 표상된다. 동시대 디지털 세상의 인간 존재는 언어가 아닌, 수학적 알고리 즘 체계 속에서 불멸의 방식을 고안하게 된 것이다.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1929- )가 1990년에 발표한 소설 불멸 L'Immortalite

1)

의 모티프들을 바탕으로 기획된 ≪불멸 사랑 Immortality in the

1) 밀란 쿤데라의 불멸 L'Immortalite (1990)은 사후에도 후세의 기억 속에 살아남고자 하는 인간 본성을 다룬 소설이다. 불멸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사랑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소설은 인간이 불멸을 얻는 방법으로, 생전에 알고 지낸 사람들의 기억에

(3)

Cloud≫(2019. 2. 22-5. 12, 일민미술관)은 동시대 미술이 역사를 다룰 때 어떠한 방식으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것인지 질문을 던지고자 했던 전시이다. 본 논문 은 ≪불멸 사랑≫에 나타난 ‘이야기’ 구조의 특성을 분석하여, 모더니티와 대립되 는 개념의 동시대성(contemporaneity)의 조건 하에서 역사가 어떻게 새로운 양식 화를 이루는지, 특히 서로 다른 문화들, 종교들, 언어들 사이의 조우가 심화된 오 늘날의 상황에서 어떻게 역사적, 민족적, 문화적 특징들이 ‘되쓰기(rewriting)’ 되 고 있는가를 논증하고자 한다.

피터 바이벨(Peter Weibel, 1944- )이 주장했던 바와 같이, “우리는 모두 되 쓰기의 시대를 경험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전지구적 규모로 미술사의 되쓰기, 정치적, 경제적 역사의 되쓰기”

2)

등을 경험하고 있다. 되쓰기의 방법은 결코 그 어떤 “헤게모니를 창조하지 않으며, 지역과 지방을 재평가하고, 은폐된 지도와 망 각된 역사를 재등장시킨다.”

3)

이러한 되쓰기의 시대 불멸의 방식은 니체가 꿈꾸 었듯 “말하거나 글 쓰지 않은 우리의 생각을 물질에 새겨 넣는 기계”

4)

의 등장으 로 가능할 것인가?

소설 불멸에 등장한 낭만주의 문학의 거장 괴테가 가졌던 불멸에 대한 욕 망은 자아라는 절대와 세계라는 절대, 이 양극(세계와 나) 사이에 있는 모든 인간 을 미리 간과하고 탈락시키는 것을 전제로 했다. 이 양극의 표적만 존재했던 모 더니티와 대비되는 동시대에는 세계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타자와 이웃 등 과의 관계 속에서 지속될 수 있는 사랑의 몸짓과 언어의 발명만이 불멸을 얻는

남는 작은 불멸과 생전에 몰랐던 이들의 머릿속에도 남아 역사가 되는 큰 불멸로 나 누면서도, 이러한 욕망을 세속적이고 허망한 인간의 숙명으로 묘사한다. 밀란 쿤데라,

불멸, 김병욱 옮김 (민음사 2010).

2) Peter Weibel, “Globalization and Contemporary Art”, in: The Global Contemporary and the Rise of New Art Worlds, eds. Hans Beliniig, Andrea Buddensieg and Peter Weibel (Cambridge, MA: MIT Press 2013), p. 20.

3) 피터 바이벨의 ‘되쓰기’ 개념에 대해서는 김기수, 「‘1989년 이후 컨템퍼러리 아트’에서

‘동시대성’의 문제」, 현대미술학 논문집 21집 (2017), pp. 53-112, pp. 73-78 참조.

4) 최소영, 「키틀러 매체론에서의 문자매체와 문학 연구」, 미학예술학연구 53집 (2018), pp. 327-358 (DOI: 10.17527/JASA.53.0.10), p. 347.

(4)

방법일 것이다. 궁극적으로 본 논문은 죽음, 붕괴, 사라짐 등 인간의 숙명인 ‘필멸’

의 모티프와의 관계 속에서 살았던 삶의 무게와 흔적을 통해 이야기의 권위를 획 득하는 21세기 진정한 ‘불멸’의 서사의 가능성과 ‘이마골로기’라는 자본주의 욕망 을 탈피해 나가는 예술의 힘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Ⅱ. 역사구성의 잠재태로서 ‘에피소드’적 서사 구조

1. 에피소드와 신화 : 재생과 붕괴의 역사

쿤데라의 불멸은 뚜렷한 줄거리나 플롯 없이 다양한 사건들이 끊임없이 교차되며, 상관없어 보이는 에피소드들만으로 구성된다. 본래 “플롯은 작중 인물 들의 행동이 작품 전체를 일관하는 의미 있는 행동이며 통일성에 기여하는 역할 을 함으로써 이를 통해 인과관계에 의한 연결이 가능해진다.”

5)

그러나 쿤데라는

 불멸에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연결하기 위한 플롯 구성 원칙을 전면으로 부정 하며,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각 부의 주제와 모티프들 사이의 인과성을 눈에 띄 게 약화시키고, 몇 가지 인과 관계는 아예 감추거나 넌지시 암시하기만 함으로써

‘에피소드’적 서사 구조가 갖는 중요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처음, 중간, 끝으로 구성된 ‘전체’의 규칙을 따른 플롯과는 반대로 개연적이고 필연적이지 않은 여러 에피소드들의 연속인 에 피소드식 구성을 가장 나쁜 것이라 평가한 바 있다.”

6)

그에게 에피소드는, 이야기 의 인과적 연쇄 고리 바깥에 놓여 전체 구성에서 빠진다 해도 전혀 무관한 ‘실없 는 우연’일 뿐, 등장인물들의 삶에 흔적을 남기지도 못하는 대수롭지 않은 사건들 일 뿐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한 이야기 구성의 의미로서 ‘뮈 토스(mythos)’가 “인간의 행위를 재현하는 사건들의 결합”

7)

이라면, 그가 논의한

5)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이상섭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5), p. 39.

6)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p. 39.

(5)

‘훌륭한 뮈토스의 조건’은 사실상 매트리스를 가득 채운 솜털처럼 수없이 많은 에 피소드들의 연속이 아닐까?

주지하듯, 진보의 시간 속에서 의미가 승인되는 근대적 역사기술은 처음, 중 간, 끝으로 구성된 ‘플롯’의 인과적 서사구조에 따라 기획된 것이다. 비가역적 진 보의 시간 속에서 역사가들은 그 진보를 획득하기 위한 기회비용으로 역사의 고 통과 공포를 타자로서 은폐하며 허위적인 보편사를 서술해왔다. 예를 들자면, 대 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 100년의 한국 근대사는 한강의 기적을 이룬 남한의 눈부신 경제 발전과 근대화를 중심으로 기록되었다. 해방 이후 군사적 긴장과 억 압적 정치현실로 희생된 남북한의 젊은이들, 분단 이후 급증한 부랑자들과 경제 적 불평등에 의한 빈곤의 세습화 등의 실패담은 인과적 연쇄 고리 바깥에 존재하 는 사건들로 치부되어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못한 것이다. 응당 역사가는 진보의 타자들, 감추어진 역사적 인간들의 고통을 은근슬쩍 잔해더미 속에 묻어두고, 승 자의 관점에서 역사적인 것에 대한 의미부여를 해나간다.

이에, 우리는 은폐된 역사의 잔해더미 속에서 고통과 공포의 모티프를 ‘구원’

할 수 있는 서사구조의 또 다른 가능성을 탐색해야 할 것이다. 불멸의 여러 주 요 인물 중 작가가 실제 에피소드를 각색해서 등장시킨 괴테와 그의 젊은 연인 베티나의 모티프는 역사와 관련해 전기와 에피소드의 기능과 역할이 어떻게 역전 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소설 속 26살의 젊은 여성 베티나는 62세의 대문호 괴테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불멸을 얻고자 한다. 괴테는 베티나의 자신에 대한 애정이 동경과 존경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아니라, 그의 명성을 이용하여 실 현하려 한 불멸에 대한 것임을 일찌감치 눈치 채고 있었다. 그러나 괴테는 그녀 가 행여 자신의 거장 이미지에 먹칠을 할까 두려워 그녀를 완전히 거부하기보다 다소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괴테가 보기에 베티나와 자신의 만 남은 그의 일생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하나의 에피소드였다. 그는 이 만남을 자신의 전기에서 도려내고 에피소드로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7) 권혁성, 「아리스토텔레스에서의 미메시스와 예술」, 미학 74집 (2013), pp. 1-48 (UCI: G704-000246.2013..74.001) 참조.

(6)

그런데 괴테의 이 에피소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어떤 반전을 일으켰 다. 괴테의 특별한 사랑을 얻는 데에 실패한 베티나가 괴테의 죽음 이후 그와 주 고받은 편지들을 모아 사실과 다르게 각색하고 조작해 괴테가 한 아이와 주고받 은 편지 Goethes Briefwechsel mit einem Kinde (1835)

8)

라는 이름의 책으로 출 간한 것이다. 쿤데라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에피소드의 이러한 상대성에 주목하며, 에피소드적 사건에 잠재된 인과적 결과들이 어느 날 문득 되 살아나 갖가지 결과들을 유발할 수 있음을 피력한다. 쿤데라가 지목한 ‘어느 날’이 란, 문제의 인물이 죽은 후에도 도래할 수 있는 날로서, 이를테면 괴테가 죽은 후 괴테 삶의 일부로 통합되어 베티나의 승리가 확인된 날이다.

“어떤 에피소드도 영원히 에피소드로만 남도록 선험적으로 예정되지는 않았 다. 아무리 하찮을지라도 모든 사건은 나중에 다른 사건의 원인이 되고, 그리하여 어떤 이야기로, 어떤 연애 사건으로 탈바꿈할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9)

쿤 데라는 에피소드를 ‘지뢰’에 비유하며, 어떤 역사적 사건을 구성해낼 수 있는 잠재 태로 인정한다. “대부분은 영원히 폭발하지 않으나 가장 하찮은 지뢰 하나가 부메 랑이 되어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날이 올 수 있음

10)

을 경고하는 것이다.

한편, 역사 구성에 있어 에피소드의 잠재성에 대한 쿤데라의 관점과 차용은 루마니아 출신의 종교사가이자 문학가인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의 신화론을 통해 뒷받침되고 확장된다. 1949년 파리에서 출간된 그의 저서 우주와 역사-영원회귀의 신화 Le Mythe de L'éternel retour: archetypes

8) 베티나폰 아르님(Bettina von Arnim, 1785-1859)은 두 개의 서로 다른 모습을 후대에 남겨놓고 있는데, 그 하나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 실현을 요구하는 정치적 투사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끝없이 괴테를 연모하는 문학소녀의 모습이다. 자신의 어린 시절 일화를 일기 형식으로 발표해, 당시에는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 덤에 올랐으나, 후대에 그녀가 조작한 편지 원본들이 발견되면서 쿤데라에 의해 “우스꽝스러운 세속적인 불멸”

의 전형으로 평가된다. 이와 관련해서 박광자, 「괴테가 한 아이와 주고받은 편지와 베 티나 폰 아르님」, 괴테연구 16집 (2004), pp. 5-26 (UCI: G704-000438.2004..16.015), pp. 22-23 참조.

9) 밀란 쿤데라, 불멸, p. 486.

10) 밀란 쿤데라, 불멸, p. 486.

(7)

et repetition에서 엘리아데는 고대 세계의 원형회귀 신화의 기능과 특성에 의거 해 근대 역사주의적 관점을 비판한다.

11)

그는 근대 이전의 시간의식이 ― 순환론 적 시간성이건, 직선적 시간성이건 ― 공통적으로 ‘붕괴’의 모티프를 가지고 있다 는 점에 주목한다. 일례로, 고대인들에게 의례를 통해 태초의 신화적인 시공간에 서 신이나 영웅, 우주와 천지창조의 행위를 모방하여 지금 현재에 재현해내는 행 위는 자기 존재 가치의 획득을 의미하는 한편, 신화적 시공간에 위치한 원형과 범주로부터 일탈하는 행위는 죄악으로의 붕괴를 의미한다. 따라서 고대인들의 주 기적인 영원회귀는 역사를 소거하는 반역사주의적 계기가 되며, 신적인 원형과 범주로부터 일탈하는 순간 인류는 고통과 공포의 역사를 오롯이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점은 진보의 시간 속에서 역사가 의미를 승인받는 근대 역사주의적 관점 이 지닌 문제를 환기시킨다. 엘리아데는 근대 계몽주의 철학 전통이 인간의 가치 를 존재 외부에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내부에서 찾기 때문에 역사가들 이 근대 이전의 시간들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감에 사로잡혀 역사에 감춰진 인류 의 고통들을 해결할 기제가 없다고 보았다. 궁극적으로 엘리아데가 제시하는 역 사의식은 “태어났다가 결국은 소멸하여 다시 새로운 탄생을 준비한다”는 순환 의 식을 기반으로 고대인들이 지녔던 ‘붕괴’의 모티프로부터 ‘역사의 고통, 공포’의 모 티프를 추출하는 것이다.

12)

이것은 곧 근대적 역사가들이 외면해 온 역사적 타자 의 고통에 대해 동감하는 것이며, 타인의 신체를 온전히 겪고 이에 감응하는 경 험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쿤데라가 주장한 에피소드가 지닌 역사 재구성의 가능 성은 신화적 시간의 재생과 붕괴의 역사 속에서 ‘구원’되는 인간의 고통을 포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실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1) 유진홍, 「어느 종교학자가 역사가에게 던지는 질문, 미칠치아 엘리아데: 우주와 역사 - 영원회귀의 신화, 현대사상사, 1976.」, 중앙사론 제14집 (2000), pp. 219-255 참조.

12) 유진홍, 「어느 종교학자가 역사가에게 던지는 질문, 미칠치아 엘리아데: 우주와 역사 - 영원회귀의 신화, 현대사상사, 1976.」, p. 224.

(8)

2. ≪불멸 사랑≫: 새로운 매체 환경에서 등장한 ‘이야기꾼’

최초의 매체 기술인 ‘문자-인쇄술’이 발명되자, 근대 지식인들은 활자들을 조작하고 세계를 활자화함으로써 스스로를 역사 속에 기록했다. 그러나 역사에 개입되는 큰 불멸 앞에서 지금까지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지 않았다. 그것은 영원 히 기억되고자 하는 소수의 권력자들이 가질 수 있는 욕망일 뿐이었다. ≪불멸사 랑≫에 참여한 작가 서용선(Yongsun Suh, 1951- )의 역사화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 원본에서부터 인쇄 윤전기, 기자 책상 등 신문 관련 유물과 기 록들이 역사적 사건들을 중심으로 디스플레이되어 있는 일민미술관 5층 신문박물 관 곳곳에 틈입되어 전시되었다. 70여 점에 달하는 그의 드로잉과 대형 회화 작 품들은 마치 한국근현대사의 ‘에피소드들’처럼 연대기적 서사에 따라 전개되는 기 존 박물관의 구성을 상상적 차원에서 해체시켰다. 그의 작업들은 특유의 강렬한 필치와 색채, 과감한 몽타주 기법의 화면 구성 등으로 한 세기에 걸친 한국 근대 역사의 무게를 리듬감 있게 재배치했다.

서용선은 한국 전쟁이나 사회적 사건을 소재로 다루면서도 이데올로기적 관 점이나 메시지를 담기보다는, 전쟁의 이면, 즉 전쟁의 결과로 발생하는 개인들의 실존적 고통을 그려낸다. “전쟁은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 다”

13)

고 지적한 수잔 손택(Susan Sontag, 1933-2004)의 시선을 따라가듯, 그의 역사화는 전쟁의 참혹했던 현실이나 현대사의 어두운 사건들을 묘사하여 우리를 구경꾼으로 전락시키는 대신, “끊임없는 사실 확인과 의심에 기초하는 비결정적 시선”

14)

에 기반해 끝없는 역사적 상상력이 가능한 시공간으로 진입시킨다. 다시 말해 역사적 사건들을 단발적으로 소비하는 태도와는 완전히 다른, “만약 역사의 어떤 시점에 다른 스토리가 펼쳐진다면 하는 가정에 근거해 상상력을 펼치며 고 정되지 않은 역사를 제시”

15)

하는 것이다.

13)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 이재원 옮김 (이후 2004), p. 78.

14) 이윤희, 「서용선의 단종 이야기 - 역사에 대한 실존적 탐구의 기록」 (아트센터 화이트 블럭 2014), p. 4

(9)

에피소드의 상대성은 지나간 사건으로부터 도래한 예기치 않은 폭발 이외에 도, 누군가의 이야기, 몸짓, 어떤 냄새나 맛으로부터 불현듯 활성화된 뇌의 작용이 기억의 흐름을 촉발하여 상상과 모순의 서사를 창조하게 하는 데에도 기여한다.

체험한 삶에 대한 기억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의 잃어버린 시간 을 찾아서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1913)에서 아침 식사와 곁들여 마시 는 차 속에 떠 있던 마들렌의 맛으로 인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쿤데라의 불멸

에서는 우연히 수영장에서 보게 된 한 중년 여인의 손짓으로부터 아녜스라는 인 물을 떠올리게 된 것을 계기로 기억의 흐름이 시작된다. ≪불멸사랑≫ 작가 권하 윤(Hayoun Kwon, 1981- )은 <새 여인>에서 자신의 프랑스인 스승 다니엘의 젊 은 시절 이야기를 듣고 주관적 시점으로 재구성해 환상적인 동화 속 공간을 만들 어냈으며, <489년>(2015)에서는 실제 DMZ에서 수색대원으로 근무했던 한 구술 자의 경험담을 듣고 가보지 못한 그 장소를 3D 애니메이션을 통해 상상의 시공 간으로 재현해냈다. “몇 년 전에 깨달은 것이 하나 있는데 결국 이 세상에는 주관 적인 시점만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려고 해도 결국 기억에 남는 것은 역사책의 한 줄이 아니라 옆에서 들려준 한 마디입 니다.”

16)

구술적 소통 방식을 중심으로 작업하는 권하윤은 타인의 기억과 이야기 를 자신의 주관적 시점에서 재해석해 3D 애니메이션을 도구로 풀어내는 자신의 작업이 관계적으로 구성된 것이라 점을 강조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픽션인지 알 수 없는”

17)

이야기의 속성, 즉 이야기를 하는 그 순간에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계속 재구성되는 이야기의 유동적이고 불확실성은 인쇄매체의 발달 이 후 사라진 구술문화의 공동체적 경험의 교환 능력을 회복시킨다. 이야기는 “입에 서 입으로 전해지는 경험”

18)

에 원천을 두고 있다. 벤야민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

15) 이윤희, 「서용선의 단종 이야기 - 역사에 대한 실존적 탐구의 기록」, p. 6.

16) 권하윤, ≪불멸사랑≫ 작가 인터뷰 (2019. 3).

17) 권하윤, ≪불멸사랑≫ 작가 인터뷰 (2019. 3).

18) 김남시, 「트위터와 새로운 문자소통의 가능성.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 개념을 중심으

(10)

야기꾼은 ‘먼 장소’, ‘먼 과거’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자신의 이야기 속에 녹여 넣 고, 다시 청자들의 경험으로 만들어낸다. 구술문화의 전통에서 신화나 설화, 영웅 의 이야기들이 암송을 통해 사람들에게 들려지고 전달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재 창작이나 개작이 이루어져 동일한 설화나 이야기의 수많은 변본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은 인쇄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소설이나 정보와 같은 근대적 소통 형식에서 사라졌다. 이는 근대라는 시기에 그만큼 “경험의 전달 가능성이 감소”

19)

했음을 반 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권하윤은 3D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 환경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발 견한다. 주어진 환경을 그대로 캡쳐하는 실사영화와 달리, 3D 애니메이션 상에서 작가는 조물주처럼 무엇이든 창조해낼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3D 애니메이 션 이미지들은 그 내용이 진실이어야 한다고 강요받지 않는다. 이러한 속성으로 인해 권하윤의 작업은 작가 또는 관객 그 누구든 타자의 서사 위에 자신의 주관 적인 시점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되쓰기 할 수 있는 틈이 창출된다. VR이라는 매 체는 이미지들 사이로 신체적 경험을 가능케 하여 인간 존재의 일시성에 더욱 집 중하게 만드는 도구이다. 실재와 가상의 경계가 사라진 모순적인 공간 안에 들어선 관객은 자기만의 성찰을 통해 역사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되는 것이다.

III. 이마골로기: 시선과 불멸의 이미지

오늘날 기술적 환경은 최근 밀레니얼 세대들의 역사의식에도 큰 영향을 주 고 있다. 빅데이터와 인터넷상에서 자신들이 경험하지 못한 시대를 새로운 이미 지로 발굴해내는 ‘뉴 레트로’와 같은 문화 현상이 이런 흐름의 대표적 단상일 것 이다. 감춰져 있던 역사적 이미지들이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되는 긍정적 측면도

로」, 기호학 연구 30호 (2011), pp. 9-35 (UCI: G704-001064.2011.30..007), p. 12.

19) 김남시, 「트위터와 새로운 문자소통의 가능성.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 개념을 중심으 로」, p. 13.

(11)

물론 있으나, 역사의 이면에 감춰진 사실이나 정당성, 진실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 찰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단순한 이미지로 추상화시키거나 대상화시켜버리는 경향 도 종종 감지된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사건들이나 그 증거물들도 원 소유주의 죽음 후에는 그의 손을 떠나 산 자들에게 그것을 다룰 권리가 넘어가며 통제할 수 없게 된다.

이미지를 결정하는 ‘시선’은 개인의 자유를 박탈한다. 이처럼 시선은 이미지와 연 결되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카메라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신의 눈이 인간의 행 동을 제약했지만, 지금은 카메라를 잡는 사람의 시선이 개인의 이미지를 규정하 고 있다. 타인의 시선, 카메라의 눈은 현대 사회에서 족쇄처럼 우리 삶을 옭아매 고 있다. 사진의 대중화 이후 사람들은 모두 손쉽게 타인의 이미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으며, 동시에 우리는 모든 이들의 눈동자를 신경 쓰게 된 것이다. 개인 은 시선을 통해 타인의 소유가 되어버렸고 사진 찍는 권리는 다른 모든 권리보다 상위에 군림한다.

이미지(image)와 이데올로기(ideology)의 합성어로 쿤데라가 불멸에서 창 안한 용어 ‘이마골로기’는 현대인이 더 이상 논리적인 체계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 동하는 인간이 아니라, 감성적인 이미지에 지배를 받아서 살아가는 존재를 표현 하기 위해서 만든 말이다. 이미지가 곧 이데올로기를 대신하는 것을 뜻한다. 쿤데 라는 카메라의 눈이 지배하는 이마골로기의 시대에 “광고 에이전시들, 정부 수반 들의 커뮤니케이션 고문들, 신형 자동차나 헬스장 설비를 기획하는 디자이너들, 유행 창조자들과 유명 패션 디자이너들, 미용사들, 신체 아름다움의 규범을 결정 짓는 쇼비즈계의 스타들 등, 이마골로기의 모든 분과가 이들을 본받을 것”

20)

이라 며 그 어떤 현실도 능가하는 권력의 소유자로서 이마골로그들의 영향력에 대해 우려를 표한다. ≪불멸사랑≫의 작가들은 SNS와 같은 새로운 매체 환경에서 개 인들이 자신의 이미지를 직접 생산하고 기록하는 시대의 반작용으로 나타난 ‘이 미지를 통한 왜곡된 불멸의 욕망’을 다양한 어법으로 드러내고, 이러한 이마골로 기에 대항하여 진정한 삶의 리듬에 대한 회복을 요청한다.

20) 밀란 쿤데라, 불멸, pp. 187-188.

(12)

1. 카메라, 시선, 이미지: 21세기 불멸을 향한 욕망

전시실 입구에 들어선 관객들은 즉각 핸드폰 카메라 앱을 켜고, 자신의 이 미지를 가장 핫하게 만들어줄 훌륭한 배경을 찾아 공간을 배회한다. 파비앙 베르 쉐르(Fabien Verschaere, 1975- )는 작가로서 본인의 사적 이야기를 입힌 천진난 만한 모양의 포토 콜을 입구에 세우고 #Fabienoppa라는 헤시테그를 달아 SNS에 올려 달라고 관객들에게 요청한다. 소셜미디어 환경에서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 다 자신의 이미지를 치장하는데 주력하며, 연출된 자아를 끊임없이 온라인 무대 위에 전시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21세기 인류가 꿈꾸는 ‘불멸을 향한 욕망의 뜨 거운 몸짓’이다. 인간의 존재가 사후에도 데이터로 영생이 가능한 오늘날, 사람들 은 자신의 생전에 가능하면 좋은 이미지들을 더 많이 만들어내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불멸이 무엇인지, 불멸의 여파가 어떠한 반전을 가져오 는 ‘지뢰’와 같은 것인지 알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갈구하고 있다. 불멸이란 무엇 인가? 신이 아닌 이상 인간은 언젠가 죽기 마련이다. 인간의 한계에 대한 거부는 불멸에의 욕망으로 형상화된다. 결국 불멸이란 사후에도 지속되는 인정과 사랑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타인들의 시선, 나아가 카메라의 시선에 의해 부여되는 ‘이 미지’로 귀결된다. 현대 매스미디어는 이러한 이미지의 문제를 심화시켜 인간의 불멸에 대한 욕망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죽은 자들에 대한 조작이나 그릇된 취급의 작용 가능성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크라우드 상에서의 불 멸은 이제 단순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이미지에 대한 더욱 강한 책임감이 요구 되는 것이다.

우리는 불멸을 생각하지만, “죽음과 함께 생각해야 함을 망각"

21)

하고 있다고

쿤데라는 지적한다. 사후세계에서 괴테와 헤밍웨이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불

멸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이다. 죽어서 불멸의 칭호를 얻는 데에 성공

한 위대한 두 작가 괴테와 헤밍웨이는 자신들이 죽은 이후 산 자들이 내리는 재

평가로 의도하지 않은 불멸을 얻게 되는 것에 대해 당혹감을 드러낸다. 죽은 자

21) 밀란 쿤데라, 불멸, p. 117.

(13)

들에 대한 판결은 산 자들에 의해 내려지는 것이다. 그것은 죽은 자들이 아직 살 아있을 때의 이미지와 결부된다. 이미지란 더 이상 죽은 자들의 것이 아닌 산 자 의 것이기 때문이다.

베르쉐르는 영적인 요소들을 팝적인 이미지로 그려내며 서로 다른 문화의 사람들과 다양한 요소들이 시공간을 초월해 관계를 맺고 끊임없이 재탄생되는 동 시대적 불멸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전시실을 가득 채운 그의 신화적 이미지들은 상징적 죽음을 통해 새로운 탄생을 거듭해 왔다. 마을 앞 수호신인 전통적 장승 이미지가 도시 곳곳에 풍선 입간판이 되어 서있는 것처럼, 전시실에 울려 퍼지는 보사노바풍의 곡 <부산항 Port of Busan> ― 작가가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 1947-2016)의 <The Port of Amsterdam>을 커버한 곡 ― 은 일종의 제 의적 ‘낭송’이 되어 그의 공간을 점유한 관객들의 일상적 삶을 무한히 재생 가능 한 원초적 시간으로 들어가게 만든다. 베르쉐르가 제시한 동시대적 불멸은 이처 럼 상징적 죽음과 더불어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재탄생되는 것들이다.

신은 ‘태초에 빛이 있으라(Fiat Lux)’고 명함으로써 ‘세상을 창조(Fiat

anima)’하였다. 이 창조 신화는 오늘날 모든 컴퓨터 네트워크와 시스템에도 그대

로 적용된다. ‘빛-광케이블’이 네트워크상에서 세상을 재창조한 것이다. 이렇게 우

리는 네트워크로 구축된 코드 안에서 살게 되었고, 알고리즘에 의해 컴퓨터가 처

리하는 데이터에 광범위하게 의존하고 있다. 강이연(Yiyun Kang, 1982- )은 이러

한 매트릭스 공간에 살고 있는 인간의 신체성에 주목한다. <연속체

Continuum>(2019)에 투사되는 영상물들은 컴퓨터로 렌더링한 영상들과 4K로 촬

영한 실제 퍼포머들의 섬세한 신체 이미지들이 뒤섞인, 디지털, 실재, 추상적, 구

상적 이미지가 모두 담긴 하이브리드 무빙이미지(hybrid moving-image)이다.

22)

이 이미지들은 바닥에 설치된 거울을 통해 반사되어 시공간의 겹을 영속적으로

추가한다. 이 매혹적인 설치는 관객이 구조물 안에 들어갔을 때, 그리고 구조물

밖 타자의 시선에 그의 모습이 포착되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우리가 거주하고

있다고 믿는 디지털 세상은 사실상 코드로만 이루어진 ‘텅 빈 상태’이며, 그 무엇

22) 강이연, ≪불멸사랑≫ 작가 인터뷰 (2019. 4).

(14)

보다 불안정하기에 데이터로 환원될 인간의 존재에 불신의 시선을 갖게 될 수밖 에 없다. 디지털 이미지들과 혼재된 상태로 존재하는 신체와 그 정신성이 훨씬 강력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GPS부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 플랫폼, Amazon, Netflix, YouTube 상의 콘텐츠에 이르기까지 컴퓨터가 제시해주는 결정들에 따라 움직이 고 문화를 소비하는 이 시대, 우리의 일상은 자신 안에 내재한 낯선 ‘욕망’을 끊임 없이 들이대는 자본의 힘에 완전히 지배되고 있다. 자본에 모두 잠식되어버린 거 리와 온라인 세계가 “그 공적 기능을 모두 상실하고 모든 공간을 자본의 상품광 고에 내줬기 때문”

23)

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적 공간도 소거되어 버렸다. 여 기엔 “선택과 거부를 행하는 주체도, 삶의 방식도 없다.”

24)

자본의 괴물 같은 포 획력은 인간의 불멸을 향한 욕망마저 지배한다.

2. 기억과 경험의 재구성

정치가는 기자 손에 달려있다. 그러면 기자는 누구 손에 달려있는가? 이마 골로그들에게 달려 있다. 그는 기자에게 그의 신문(혹은 그의 텔레비전 프 로그램이나 라디오방송)이 해당 시기 이마골로기 체계의 정신에 부응할 것 을 요구한다. 이마골로그들이 어떤 신문을 지지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 할 때, 수시로 확인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25)

쿤데라는 불멸에서 이데올로기 시대가 종식되고 ‘이마골로기’의 시대가 도 래했다고 선언하였다. 마르크스주의가 신봉하던 이데올로기가 이마골로기로 변해 버렸다는 쿤데라의 선언은 오늘의 세계는 더 이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이미지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

23) 김명주, 「‘욕망’ 개념을 통해서 본 들뢰즈 철학의 의미: ‘탈주’와 ‘생성’」, 철학논총 57

집, 2009, pp. 31-50 (UCI: G704-000634.2009.3..016), p. 35.

24) 김명주, 「‘욕망’ 개념을 통해서 본 들뢰즈 철학의 의미: ‘탈주’와 ‘생성’」, p. 35.

25) 밀란 쿤데라, 불멸, p. 186.

(15)

가 지배하던 시대에는 모든 신념, 가치, 규범이 이데올로기의 논리적 관념체계에 의해 통제되었지만 이제는 이미지가 이데올로기를 접수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세 상을 지배하는 시대가 된 것”

26)

이다.

오늘날 이마골로그들은 타인들의 고통마저 스펙터클한 구경거리로 만들었 다. 수잔 손택은 자신의 저서 타인의 고통에서 카메라를 터뜨리는 일과 ‘총을 쏘는 일’이 같은 의미라고 말한다.

27)

또한 남의 고통을 형상화한 수많은 사진들은 우리에게 마치 몰래 카메라로 남을 훔쳐보는 은밀한 즐거움의 대상이 된다고 경 고했다.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끔찍한 재난의 현장 사진들은 즉각적으로 우리의 동정심과 연민의 감정을 유발시킨다. 그러나 그 순간 우리는 사진이 묘사하는 피 해자들의 고통에 대해 동정심을 느끼는 동시에, 나는 저 곳에 있지 않았다는 묘 한 안도감을 느낀다. 손택에 따르면, 타인을 불쌍하게 느끼는 연민의 감정은 그 고통이 내가 겪은 일이 아니라는 안도감 이외에도, 고통의 원인에 자신이 연루되 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 무책임함,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 다는 무능력함도 함께 유발시킨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 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 그들의 고통을 관조적으로 소비해버리는 것 과 같다.

28)

1966년 인도네시아에서 발발한 대학살에서 고초를 당하고 살아남은 스리 무 하야티(Sri Muhayati)라는 한 여성을 묘사하는 조은지(Eunji Cho, 1973- )의 <우 산을 쓴 여인의 초상>(2019)은 의도적으로 이미지를 추상화시킴으로써 이마골로 기의 문법을 완전히 비껴나간다. 무엇을 경험한 신체에 대한 비디오 초상화인 이 영상의 초점은 노구의 눈과 피부, 의복에 맞춰지고, 그 움직임에 따라 부유한다.

줄곧 무언가를 증언하고 있으나 특정한 부분을 제외하고 소리가 없다. 증언자의 생생한 사연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 한 사람의 신체에 집중한 이 작업에서

26) 박정흠, 「‘이미지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8세기 성화상 논쟁의 발단원인 고찰」, 한국교 회사학회지 47호 (2017), pp. 321-353 (DOI: 10.22254/kchs.2017.47.09), p. 343.

27)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 p. 78.

28)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 p. 154.

(16)

작가는 역사의 진실성, 또는 진정성을 드러내는 작업이란 애초에 가능하지 않았 다고 말하며, 오로지 삶 속에서 삶을 수행해온 피해자의 신체가 ‘추상적인 상’을 갖게 되었음을 강조한다.

29)

궁극적으로 이 작업은 과거의 어떤 일을 듣고 아는 것이 아닌, 관람자로 하여금 전혀 모르는 타인의 신체를 온전히 겪고 이에 감응 하는 경험을 가능케 한다.

지금 세대들에게 가장 강력한 이마골로기는 소셜미디어,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이미지들을 양산해내는 인스타그램 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우성 (Woosung Lee, 1983- )은 자신과 주변인들의 일상 모습을 대상화한 핸드폰 속 사진의 이미지를 가공하여 11cm 사이즈의 작은 정사각형 종이에 ‘컷 만화’ 형식 으로 드로잉 연작을 진행해 왔다. 카메라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를 작가의 주관적 시선으로 재가공해 다시 인스타그램 매체에 적용시킨 이우성의 드로잉 연 작 <밤, 걷다, 기억>(2017-2019)은 카메라와 모바일 디바이스의 운용 시스템에 맞춰 자신의 기억, 개인의 역사를 구축해나가는 현대인들의 삶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는 핸드폰 타임라인을 따라 수직으로 저장되어 있는 사진들을 보면서

“기억을 정리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30)

자신에게 의미 있었 던 순간이나, 소중한 누군가와 함께 한 기억이 디지털 저장 매체 시스템에 의해 시간이 갈수록 뒤로 밀려나며 그저 과거로 머무는 것이 아닌, 현재와 계속 연결 되어 시간이 섞이는 상태를 만들었다. 관객들의 걸음과 감상 방법에 따라 매번 타임라인이 다르게 전개되는 이 작업은 진정한 삶이란, 다른 누군가의 생각 속에 계속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리듬과 감성에 충실한 삶이고, 그것이 크라우드 상의 불멸을 대하는 태도라는 것을 일깨운다. 그것은 이마골로그들의 절대적 권위로부터의 탈출이며,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찾는 계기이자 시작점이 된다.

29) 조은지, ≪불멸사랑≫ 작가 인터뷰 (2019. 4).

30) 이우성, ≪불멸사랑≫ 작가 인터뷰 (2019. 4).

(17)

Ⅳ. 나가며

지금까지 논의한 바와 같이, 에피소드의 상대성은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평 가되는 사건들을 선별하는 기준이 타인들의 시각, “행정적 설문지나 경찰 조서의 시각”

31)

에서 완전히 벗어나, 굉장히 내밀하고 사적인, 자신만의 주관적 시각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일깨운다. 그것은 오늘날 새로운 역사 기술의 중요한 방법론으 로 제기될 수 있으며, 선형적 시간관에 따라 언제나 승자의 이야기, 권력자의 이 미지만 남게 된 근대적 역사 쓰기로부터 탈피해 누구나 삶의 주체로써 그동안의 역사를 ‘되쓰기’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연다.

우리가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평가하는 사건들의 연속을 기술하는 전기 (biography)는 이 사회가 만든 성공의 기준에 부합된 사람들, 이마골로기에 선택 된 사람들만이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자본과 결합한 대중매체 사회에서 여론조사, 설문지, 전화 설문조사, 시청률 등은 이마골로기 권력의 완벽한 도구이다. 밀란 쿤 데라가 ‘이마골로그’라고 부르는 이미지와 여론의 기술자들은 이것을 재빨리 현실 에 적용시켜 몇몇 잘나가는 영웅을 만들어 낸다. 자신의 목표, 비전, 희망, 가치 기준 등을 상실한 사회에서 이런 식의 통계적 수치는 그 무엇보다 쉽게 권위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쿤데라의 조언대로 소소한 각자의 삶에 가득 찬 에피소드들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에 무엇이 중요 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스스로의 욕망에 귀 기울이고 질문해야 할 것이다.

이마골로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이 시대, ≪불멸사랑≫은 바로 자신이 욕망의 주체가 되고, 삶의 방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조건들, 예 술적 힘을 탐색한 것이다.

각기 다른 에피소드를 구성한 6명의 작가들은 타자와의 만남에서 서로의 경

험을 전달하는 과정 속에 발생하는 불투명하고 흐릿한 기억을 매개한다. 기억, 그

것은 한 사람에게 고유한, 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권하윤에 따

31) 밀란 쿤데라, 불멸, p. 487.

(18)

르면 자신도 모르게 왔다가 사라지는 동화 속 ‘파랑새’ 같은 것이다. 누구나 파랑 새를 잡고 싶은 꿈을 꾸지만, 그 누구도 쉽사리 잡지 못한다. 예기치 못한 순간 내 손등 위로 살짝 앉았다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는 것이 기억이다. 누군가의 체 험된 삶, 지나간 사건들은 집단의 기억으로부터 쉽게 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조 련사의 ‘손짓’에 의해 날아드는 새처럼, 타인이 내 뱉는 날숨을 기꺼이 들이마시려 는 몸짓에 의해 지나간 삶의 순간들은 치장하지 않은 날 것의 상태로 우리 앞에 존재할 수 있다. ≪불멸사랑≫이 제시하는 상상과 모순의 내러티브는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의 몸짓이 불러들이는 불투명한 삶의 기억들을 끊임없이 탈바꿈 시켜 지속적으로 역사가 ‘되쓰기’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꿈꾼다.

32)

* 논문투고일: 2019년 4월 15일 / 심사기간: 2019년 4월 16일-2019년 6월 20일 / 최종게재 확정일: 2019년 6월 21일.

(19)

참고문헌

권혁성, 「아리스토텔레스에서의 미메시스와 예술」, 미학 74집, 2013, pp. 1-48 (UCI: G704-000246.2013..74.001).

김기수, 「‘1989년 이후 컨템퍼러리 아트’에서 ‘동시대성’의 문제」, 현대미술학 논 문집 21집, 2017, pp. 53-112.

김남시, 「트위터와 새로운 문자소통의 가능성.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 개념을 중심 으로」, 기호학 연구 30호, 2011, pp. 9-35 (UCI: G704-001064.2011.30..007).

김명주, 「‘욕망’ 개념을 통해서 본 들뢰즈 철학의 의미: ‘탈주’와 ‘생성’」, 철학논총

 57집, 2009, pp. 31-50 (UCI: G704-000634.2009.3..016).

미르치아 엘리아데, 우주와 역사, 정진홍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7.

밀란 쿤데라, 불멸, 김병욱 옮김, 민음사 2010.

박광자, 「괴테가 한 아이와 주고받은 편지와 베티나 폰 아르님」, 괴테연구 16 집, 2004, pp. 22-23 (UCI: G704-000438.2004..16.015).

박정흠, 「‘이미지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8세기 성화상 논쟁의 발단원인 고찰」, 한 국교회사학회지 47호, 2017, pp. 321-353 (DOI: 10.22254/kchs.2017.47.09).

발터 벤야민, 서사(敍事)․기억․비평의 자리: 프리드리히 횔덜린, 요한 페터 헤 벨, 고트프리트 켈러, 카를 크라우스, 마르셀 프루스트, 폴 발레리, 니콜라 이 레스코프 외, 최성만 옮김, 길 2012.

______,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폭력비판을 위하여; 초현실주의: 외, 최성만 옮 김, 길 2008.

______,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 최성만 옮김, 길 2007.

______,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옮김, 민음사 1983.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 이재원 옮김, 이후 2004.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이상섭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5.

오토 루드비히, 쓰기의 역사: 고대부터 서적 인쇄술의 시대까지, 이기숙 옮김,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3.

(20)

유진홍, 「어느 종교학자가 역사가에게 던지는 질문, 미칠치아 엘리아데: 우주와 역사 - 영원회귀의 신화, 현대사상사, 1976.」, 중앙사론 14집, 2000, pp.

219-255.

이윤희, 「서용선의 단종 이야기 - 역사에 대한 실존적 탐구의 기록」, 아트센터 화 이트블럭 2014.

임홍배,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꾼에 나타난 서사이론적 함의」, 독일어문화권연구

26권, 2017, pp. 189-210 (UCI: I410-ECN-0102-2018-800-003678689).

최소영, 「키틀러 매체론에서의 문자매체와 문학 연구」, 미학예술학 연구 53권, 2018, pp. 327-358 (DOI : 10.17527/JASA.53.0.10).

Weibel, Peter, “Globalization and Contemporary Art”, in: The Global Contemporary and the Rise of New Art Worlds , eds. Hans Beliniig, Andrea Buddensieg and Peter Weibel, Cambridge, MA: MIT Press 2013.

강이연, ≪불멸사랑≫ 작가 인터뷰 2019. 4.

권하윤, ≪불멸사랑≫ 작가 인터뷰 2019. 3.

이우성, ≪불멸사랑≫ 작가 인터뷰 2019. 4.

조은지, ≪불멸사랑≫ 작가 인터뷰 2019. 4.

(21)

국문 초록

인간의 불멸에 대한 상상은 21세기 들어 현실이 되었다. 이제 인간의 존재 는 사후에도 데이터로 영생이 가능하다. 한 사람이 일생 동안 축적한 기억이나 경험이 AI를 통해 크라우드에 저장되고 후세의 인간들의 삶 안에 머물며 물리적 으로 존속하게 된다. 그러한 세계에서, 사후의 생을 약속함으로써 유구한 시간을 존속해온 종교는 과연 어떤 역할로 살아남을까. 기록이나 역사는 어떠한가.

밀란 쿤데라가 1990년에 발표한 소설 불멸 L'Immortalite의 모티프들을 바탕으로 기획된 ≪불멸 사랑 Immortality in the Cloud≫(2019. 2. 22-5. 12, 일민 미술관)은 동시대 미술이 역사를 다룰 때 어떠한 방식으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것인지 질문을 던지고자 했던 전시이다. 본 논문은 ≪불멸 사랑≫에 나타난 ‘이야 기’ 구조의 특성을 분석하여, 모더니티와 대립되는 개념의 동시대성 (contemporaneity)의 조건 하에서 역사가 어떻게 새로운 양식화를 이루는지, 특히 서로 다른 문화들, 종교들, 언어들 사이의 조우가 심화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어떻 게 역사적, 민족적, 문화적 특징들이 ‘되쓰기(rewriting)’ 되고 있는가를 논증한다.

궁극적으로 본 논문에서는 죽음, 붕괴, 사라짐 등 인간의 숙명인 ‘필멸’의 모티프 와의 관계 속에서 살았던 삶의 무게와 흔적을 통해 이야기의 권위를 획득하는 21 세기 진정한 ‘불멸’의 서사의 가능성과 ‘이마골로기’라는 자본주의 욕망을 탈피해 나가는 예술의 힘을 고찰하고 있다.

핵심어

밀란 쿤데라, 불멸, 불멸사랑, 신화, 에피소드, 역사 되쓰기, 일민미술관

(22)

ABSTRACT

The Appearance of Storyteller in the 21st Century and Art Practice for the Rewriting History

Ju-Hyun Cho

**33)

We as humans desire to be recognized of our being. We hope to be loved and cherished forever by our close friends, and even hope to remain in history for general others. Individuals with great and small desires come together to form a society and create countless events. The human desire for the immortality has driven the lives of individuals and has written history by repeating transition and progress.

In the near future, one's memories and experiences for a lifetime accumulated in the brain continue to stay in future generations and physically exist as they are stored in the cloud by artificial intelligence. In such a world, promising life after death, what role does religion will maintain after it has perdured eternal time? What about human records and history?

By analysing the characteristics of storytelling structure revealed in the art works in the exhibition Immortality in the Cloud , this essay observes how history is newly being conventionalized under conditions of contemporaneity.

And, particularly, it aims to explore how historical, ethnic, and cultural characteristics are being “rewritten” in the present day where the encounter

* Chief Curator, Ilmin Museum of Art

(23)

among different cultures, religions, and languages has been intensified.

Key Words

Episode, Ilmin Museum of Art, Immortalite, Immortality in the Cloud,

Milan Kundera, Myth, Rewriting History

(24)

참조

관련 문서

---- 매년 매년 매년 매년 사람들이 사람들이 사람들이 사람들이 인터넷을 인터넷을 인터넷을 통해 인터넷을 통해 통해 통해 공유하는 공유하는 공유하는 공유하는

따라서 신 화는 인간을 실존적으로 구성한 최초의 이야 기를 인간에게 가르쳐 주는 인간행위나 제도 의 모범형으로 정의 될 수 있음... 본격적으로

- 자유주의와 부르주아의 권력 도전을 방어 - 노동계급의 사회주의적 저항과 혁명을 방지 국가가 노동계급의 복지제공자 역할 수행 노동자는 군주에게

행정국가의 등장과 현대행정의 특징... 행정국가의

유럽공동체(EC)조약 제83조 및 제89조에 따라 다른 공동정책분야와 마찬가지로 경 쟁정책에 관한 규정(Regulation) 및 지침(Directive)의 채택은

우리업체만 따로 있다 각기 다른 여러 산업의 업체들로 구성되어

뿐만 아니라 모둠활동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고 함께 팝업북을 제작하는 과정 속에서 타인에 대한 배 려뿐만 아니라 모둠 안에서의 개인적 책무성을 인지하며 협동심을 기를

식민지/제국 시기 사람 및 노동력 의 역내 이동이 식민주의적 정책에 의해 좌우되었고, 또한 이동의 필연적 부산물인 타자와의 조우가 집단적․민족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