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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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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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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6)차승기**

목 차 1. 노동자들의 도시, 흥남

2. 제국의 프론티어와 소모되는 신체 3. 규율화의 실패와 도주하는 신체들 4. 통치불가능한 신체들의 증식

<국문초록>

이 글은 식민지/제국의 신흥 콘체른 일본질소가 세운 도시 흥남을 중심으로, 제국의 식민지 개발과 공업화가 불러일으킨 노동자의 이동과 그 효과를 다루고자 한다. 특히 식민지/제국의 역내 이동을 공간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다민족 구성 노 동자들의 경험의 차원에 주목하면서, 식민지 개발 및 공업화가 식민지/제국의 통 치성의 구조와 연계되는 측면을 ‘노동력’의 배치와 신체성의 전환을 중심으로 고찰 하고자 한다.

일본질소의 식민지 개발은 특히 식민지/제국 범위에서 노동시장을 새로이 창출 하거나 조정하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식민지/제국의 통치성과 깊이 관련된 것이었다. 총독부 및 일제 당국의 긴밀한 협조 속에 일본질소는 ‘내지’와 조선의 노동력들을 효율적으로 배치해 ‘사용’했는데, 그 본질은 직급별 위계와 민족적 차 이를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이 다민족 노동력 구성에서 조선인은 소모적이고 일시 적인 노동에 배치되었다.

이곳에서 식민주의적 통치의 본질적 국면이 드러난다. 피식민자들의 생명을 소 * 이 논문은 2015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5S1A5A8013768)

** 조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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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적인 ‘노동력’으로 배치하는 전략은 근본적으로 식민지를 별개의 생태계로 간주 하는 식민주의적 통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식민주의적 통치는 통 치불가능한 것을 확대재생산하는 역설적 결과를 낳는다. 패전 후 일본질소는 식민 주의적 ‘경영’을 지속하며 재도약하고자 했지만, 역시 통치불가능한 것을 낳을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수은중독의 치명적 공해병인 미나마타병이었다.

주제어 : 흥남, 식민지/제국, 일본질소, 노구치 시타가우, 역내 이동, 통치성, 생태계

1. 노동자들의 도시, 흥남

고향은 알아볼 수가 없게 변하였다. 변하였다느니보다 없어진 듯했다. 그리고 우중충한 벽돌집, 쇠집, 굴뚝들이 잠뿍 들어섰다. ……

검푸른 공장복에다 진흙빛 감발을 친 청인인지 조선사람인지 일인인지 모를, 눈에 서투른 사람이 바쁘게 쏘다닌다. 허리를 질끈질끈 동여맨 소매 길다란 청 인들이 왈왈거리며 지나간다. 조선 사람이라고 보이는 사람은 어울리지 않는 감 발을 메고 상투를 갓 자르고 남도 사투리를 쓰는 패뿐이다.

1)

만주로 떠나 살 터전을 마련하려다 실패하고 4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창선에게 더 이상 고향은 없었다. 조용한 어촌마을은 사라졌고 대신 들어선 거대한 공장 주변에는 중국, 일본, 조선 각지에서 온 낯선 사람들이 넘쳐 흘렀다. “철도길이 고개를 잘라 먹고 창리 포구에 어선이 끊어졌다. 구수한 흙냄새나는 마을이 없어지고 맵짠 쇠냄새나는 공장과 벽돌집이 거만스러 히 배를 붙이고 있다. 소수레가 끊어지고 부수레(기차)가 왱왱거린다. 농군 은 산비탈 으슥한 곳으로 밀려가고 노가다떼가 제노라고 쏘다닌다. 땅은 석 탄 먼지에 꺼멓게 절고 배따라기 요란하던 포구는 파도소리 홀로 쓸쓸하

1) 한설야, 「과도기」, 조선지광 192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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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2) 창선이 황망하게 목격하고 있는 이곳은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이하

‘일본질소’로 약칭]를 중핵으로 하는 신흥 콘체른이 조선총독부의 전폭적인 후원 아래 부지를 매입하고 공사를 추진해 완성을 앞두고 있는 자회사 조 선질소비료주식회사[이하 ‘조선질소’로 약칭] 흥남공장이다. 일본질소의 창 업자 노구치 시타가우(野口遵, 1873~1944)는 1926년에 조선수전주식회사 (朝鮮水電株式會社)[이하 ‘조선수전’으로 약칭]와 조선질소를 설립하고 우선 압록강 상류 부전강(赴戰江)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해 막대한 전력을 생산하면서, 1929년 말 조선질소 흥남공장이 완공된 후 1930년 초부터 유안 비료 제조를 개시하는 동시에 조선수전을 조선질소로 합병해 거대한 콤비 나트를 구성했다.3)흥남을 중심으로 확장되어간 전기․화학 콘체른은 노구 치를 “조선의 사업왕”4)으로 만들어주었다.

동양 최대규모를 자랑하는 전기․화학 콘체른이 조성된 흥남은 기업도 시인 동시에 ‘노동자 도시’이기도 했다. 한설야의 소설에서도 묘사되었듯이, 달라진 것은 고향의 땅, 풍경만이 아니라 ‘사람’이기도 했다. 공장부지로 선 정된 곳에 이전부터 살고 있던 이들은 반강제로 이주당해야 했고, 근대적 공장가가 형성된 새로운 도시 ‘흥남’에는 중국, 일본, 조선 각지로부터 낯선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1929년 세계대공황 직후의 실업사태로 인해 이른 바 ‘유휴노동력’ 또는 ‘산업예비군’이 대량으로 발생하기도 했거니와, 대규 모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식민지/제국 규모에서 그에 상응한 노동자의 이동 도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이 글은 식민지/제국의 신흥 콘체른 일본질소가 세운 도시 흥남을 중심

2) 같은 글.

3) 姜在彦 編, 朝鮮における日窒コンツェルン, 不二出版, 1985, 148~152면 참조. 이 후 일본질소 콘체른는 제철, 화약, 석유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장해가면서 전체 자본금의 80% 가까이를 조선에 투자했고,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에 발맞춰 만주, 중국, 타이완, 동남아시아 등까지 진출했다. 같은 책, 101~107면 참조.

4) 藤島宇内, 「朝鮮における企業犯罪」, 朝日ジャーナル vol.14, no.33, 1972. 8. 18,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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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제국의 식민지 개발과 공업화가 불러일으킨 노동자의 이동과 그 효과 를 다루고자 한다. 특히 식민지/제국의 역내 이동을 공간적인 차원만이 아 니라 다민족 구성 노동자들의 경험의 차원에 주목하면서, 식민지 개발 및 공업화가 식민지/제국의 통치성의 구조와 연계되는 측면을 ‘노동력’의 배치 와 신체성의 전환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거칠게 말해서 지금까지 식 민지/제국 시기 사람과 노동력의 이동은 ‘정책론적’ 접근과 ‘일상사적’ 접근 이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 주로 탐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책론적’ 접근의 경우, 인구통제, 도항규제, 강제동원 등 조선인에 대한 일제의 식민주의적 수탈과 억압의 실상을 입증하기 위해 식민지 인구의 이동․이주를 강제 또 는 규제하는 일제의 정책적 결정들을 비판적으로 대상화해 왔다. 이러한 연 구 흐름에는 정책들의 성공 또는 실패의 효과로서 나타난 이동․이주의 구 체적인 양상들에 대한 연구까지 포함시킬 수 있다.5) 그리고 일제 및 총독 부의 이주 관련 정책에 대한 고찰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이동․이주하는 사 람들의 삶과 경험을 ‘일상사’ 또는 ‘생활사’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연구들이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다. 재일조선인의 역사로 수렴될 수 있는 부분도 포함 하는 이 연구들은 식민지/제국의 역내를 가로지르는 이동의 네트워크를 추 적하기도 하고 민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지역적 정체성들을 찾아내기도 한 바 있다. 이 접근의 연구에서는 특히 ‘접촉지대(contact zone)’에서 발생하 는 사건들과 더불어 종족적(ethnic) 타자와의 마주침에서 생성되는 다양한 효과들(타자를 통한 자기인식, 문화적 정체성의 재구성, 배타적 이데올로기 의 형성 등)이 주목된 바 있다. 이 연장선 위에서 재조일본인들이 형성하고 있던 ‘식민자 사회’의 성격을 해명하는 작업도 이루어졌다.6)

5) 정진성․길인성, 「일본의 이민정책과 조선인의 일본 이민: 1910~1939」, 경제사학

25권 1호, 1998; 김기훈, 「일제의 조선인 만주이주정책 논쟁: 1932~1934」, 한국민족운 동사연구 20집, 1998; 최홍빈, 「1930-1940년대의 한인의 강제이주와 통제, 안정 정책」,

백산학보 54집, 2000; 김광열, 「1940년대 일본의 도일한인 규제정책에 관한 연구」, 한 일민족문제연구 10호, 2006; 김광열, 한인의 일본이주사 연구, 논형, 2010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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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광범한 연구들을 통해 식민지/제국 역내에서의 ‘이동’과 얽혀 있 는 제도적, 정책적, 사회적, 문화적 측면의 많은 부분들이 드러났고 실증되 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제 및 총독부의 이주정책 및 통제 시스템을 이 동 실천의 기본적 작인(作因)으로 전제함으로써 정책의 변화에 따른 이동 양상의 변화 또는 그 정책의 실효성 여부를 확인하는 데 그치거나, 다른 한 편으로는 일상 속에서의 (종족적) 타자와의 만남에서 민족적 정체성 형성 의 메커니즘 또는 그 메커니즘에 기입된 식민주의적 구조를 재확인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식민지/제국 시기 사람 및 노동력 의 역내 이동이 식민주의적 정책에 의해 좌우되었고, 또한 이동의 필연적 부산물인 타자와의 조우가 집단적․민족적 자기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을 (재)생산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것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하 지만 식민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비전 속에서 사태의 본질을 비판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식민주의적 정책과 실천들이 초래한 변화를 구체적으 로 확인하는 데서 멈추기보다, 식민지/제국의 통치성의 통치성의 통치성의 구조를 숙고하는 데통치성의 통치성의 통치성의 구조구조구조구조구조 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통치성의 구조를 숙고한다는 것은 식민지/제국 체제가 삶과 죽음을 관리하는 차원까지 사고의 범위에 넣는다는 것을 뜻하 며, 따라서 그 관리에 의해 분할․재구성․생산되는 신체의 차원까지 고려 한다는 것을 뜻한다.7) 구체적인 정책 또는 타자 조우의 효과는 통치성의

6) 재일제주인의 생활사를 기록하는 모임, 김경자 옮김, 안주의 땅을 찾아서, 선인, 2012;

차승기, 「지방주의의 역사-지정학」, 디아스포라연구 6권 2호, 2012; 다카사키 소지, 이규수 옮김,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 역사비평사, 2006; 양지혜, 「‘식민자 사회’의 형성」, 도시연구 7호, 2012; 박광현․신승모, 월경의 기록, 어문학사, 2013; 도미타 세이이치 엮음, 우정미 옮김, 식민지 조선의 이주일본인과 지역사회, 국학자료원, 2013 등.

7) 물론 통치성이라는 개념은 푸코로부터 온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푸코에게 권력과 주체 화 과정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통치란 바로 이 양자의 연결을 특정하게 형태짓 는 기술이자 실천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셸 푸코, 안전, 영토, 인구, 오트르망 옮김, 난장, 2011; 미셸 푸코, 「통치성」, 콜린 고든 외, 심성보 외 옮김, 푸코 효과: 통치성에 관한 연구, 난장, 201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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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 속에서 사고될 때 식민주의로부터 이탈할 수 있는 근본적인 비전과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식민지/제국의 노동력 이동을 초경계적 생명정치와 통 치성의 차원에서 고찰하고자 한 연구들이 주목된다.8) 김예림의 연구는 이 른바 ‘쿨리(苦力)’라고 지칭되던 중국인 노동자를 포함해 식민지/제국의 이 동하는 노동력들이 제국의 표상-담론 정치 내에서 ‘하층 노동자 에스노그 라피’에 기입된 양상을 고찰하면서 ‘경계관리’에 나타나는 통치의 역학을 드러냈다. 김예림의 연구가 통치성의 구조를 주로 ‘관리’의 차원에서 주목 했다면, 이종호의 연구는 식민지/제국의 전력과 전기통신이라는 인프라가 형성한 네트워크의 이중성에 착목하면서 통치적 관리에 의해 분할․재구 성되는 신체뿐만 아니라 부단히 생성․변화하는 신체의 가능성까지 포착 하고자 했다. 정책적 관리의 차원을 넘어 ‘식민지/제국’과 ‘노동/자본’ 사이 의 간극 속에서 노동력 이동을 고찰하는 이종호의 연구는 특히 식민지/제 국 통치성의 구조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를 준다.

이 글은 식민지/제국의 노동력 이동을 초경계적 생명정치와 통치성의 차 원에서 고찰한 최근 연구의 성과를 계승하고 있다. 다만 이 글에서는 행정 권력의 이주 통제․관리뿐만 아니라 이른바 ‘식민지 개발’과 연동된 ‘노동 력’ 생산의 맥락에서 식민지/제국의 통치성의 구조를 포착하고, ‘노동력’ 생 산과정에서 나타나는 신체성의 변화로부터 식민주의적 통치의 한계지점을 숙고하고자 한다. 특히 흥남은 일본질소의 본사가 있는 미나마타와 노동력 공급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고, 공장 현장에 식민자와 피식민자 ‘노동

8) 김예림, 「‘노동’의 제국: 경계 관리와 하층 노동자 에스노그라피의 정치학」, 국가를 흐르는 삶, 소명출판, 2015; 이종호, 「혈력(血力) 발전(發電/發展)의 제국, 이주노동의 식민지: 니가타현(新潟縣) 조선인 학살사건과 염상섭」, 사이間SAI 16호, 2014 등 참 조. 특히 이종호의 논문이 발표된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의 학술대회 <동아시아 노동 다중의 역사: 유랑, 이동, 순환, 배치, 일탈의 역학>(연세대학교, 2014. 2. 19)는 이러한 초경계적 통치성의 관점에서 노동력의 이동을 고찰하고자 한 대표적인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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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이 차별적으로 분할․배치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식민주의적 통치의 민 족적․계급적 차원을 함께 포착하기에 적합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 여 식민지/제국의 전기화학공업 도시 흥남을 통해, ‘식민지 개발’이 초래한

‘노동력’ 생산과 신체성 전환의 맥락에서 식민지/제국의 통치성에 접근함으 로써 그 식민주의적 통치의 한계지점까지 도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2. 제국의 프론티어와 소모되는 신체

내가 북선(北鮮)의 전인미답의 땅에 화학과 전기의 이상향을 건설한 이래 우 리 회사의 자본은 쇼와 2년[1927년] 4500만엔이 되었고, 4년 후인 쇼와 6년[1931 년]에는 일약 9000만엔으로 증가했다. 약진 또 약진하여, 현재는 회사 정관에 등 기된 자본 2억엔, 사업에 투하된 자본 5억엔, 자회사 20여개라는 성적을 보여주 고 있는데, 허천강, 압록강 100만 킬로에 걸친 수리개발도 만주국과의 협력에 의 해 착착 진행되고 있다. 나는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화학공업을 앞으로 도 계속해서 일으킬 예정이다.

9)

노구치 시타가우는 조선과 만주에서 거침없이 전개한 개발의 성과를 자 랑스럽게 선전하고 있지만, 그가 만든 “화학과 전기의 이상향”은 결코 “전 인미답”의 땅에 세워진 것이 아니었고, 그 유토피아적 공간을 건설한 자도 그 개인은 아니었다. 그는 총독부와 경찰의 힘을 빌려 백수십 호 규모의 마 을을 형성하고 있던 조선인 농어민을 그들의 터전으로부터 추방했고,10)그 곳에 일본, 중국, 조선 각지에서 ‘구입’한 수만의 ‘노동력’을 배치했다. 그리 고 이 노동력 배치에 총독부가 깊이 개입해 있었다.

9) 野口遵, 今日を築くまで, 生活社, 1938, 103~104면.

10) 흥남 공장부지 매입이 총독부와 경찰의 지원 아래 반강제적으로 이루어졌음에 대해서 는 「咸興窒素敷地問題眞相 重大事件接踵으로 千餘住民生活不安」, 東亞日報

1927. 6. 14; 「偉大한 資閥과 官力 咸興窒肥紛爭內容」, 東亞日報 1927. 8. 27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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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기로 인해 사업계가 부진한 내지로 막연히 돈벌이를 떠나는 조선인이 해 마다 많아지는 것을 저지하고, 조선 내에서 충분히 일하며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 수습방법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총독부에서는, 함남의 수력전기사업이 막대한 인부를 필요로 하는 점에 착안한 결과, 노동에 뜻을 두고 내지로 도항하는 사람들을 부산에서 저지하고 함남으로 향하도록 애 쓰고 있는데, 이 일을 위해 사회과에서는 일부러 과원(課員)을 부산으로 파견해 우선 시험적으로 함남행의 조선인 인부를 주선하고 있다.

11)

일본질소의 부전강 수전(水電)공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해 내지로 도항하고자 하는 조선인을 부산에서 저지하고 총독부 사회과 직원 이 직접 부산까지 파견 나와 이들에게 함남행을 알선하고 있다. 일본질소라 는 식민지/제국의 기업이 식민지에 자본을 투자하여 대대적인 전기․화학 공업을 개발하는 데 총독부의 행정적 지원이 뒤따르고 있었음을 이곳에서 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실에 못지않게 주목해야 할 지점은 조선인을 “조선 내에서” 먹고 살게 해야 한다는 인구관리의 시선이다.

식민지 인구에 대한 이같은 통제와 관리의 시선은 식민지/제국의 범위 전체에 걸친 노동시장 통제의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총독부는 ‘중국인 노동자들의 조선 유입 → 조선인들의 실업률 증가 → 조선인들의 ‘내지’ 도 항’의 연쇄가 일어나고 있다고 파악했고, 이는 다시 ‘내지’ 일본인들의 실업 률 증가로 이어지리라 우려했다. 이렇게 식민지/제국 규모에서 발생하는 노 동시장의 불균형과 그것이 초래할 불안을 우려하고 있던 총독부 및 일제 당국의 입장에서 일본질소의 식민지 개발은 중요한 해결책을 제공해준 셈 이었다. 즉 최근 “지나인의 석공인부 때문에 조선인 노동자가 압도당하고 있다는 비명소리”가 높아졌는데, 마침 일본질소의 수력발전소 및 비료공장

11) 「鮮人勞働者の福音 不景氣な内地へ行くよりも有望な咸南の水電に行け 總督府 で周旋する」, 京城日報 1926. 8. 13. 또한 「渡日勞働者를 咸南으로 輸送 함남수력 뎐긔공장으로 보내 渡日防止와 當局의 彌縫策」, 東亞日報 1926. 8. 1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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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을 전후해 “유망한 사업이 차례차례로 일어나 다수의 인력을 필요로 하는 시기가 되고 있기 때문에 굳이 내지나 해외로 도항하지 않아도 쉽게 일하며 살아갈 수 있다”12)는 낙관적 전망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일본질소 의 대규모 공사는 식민지/제국 내의 노동시장을 불안하게 하는 역내 인구 이동을 저지하고 지역 내 노동력의 안정적인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리라 기 대되었던 것이다.

일본질소의 조선 진출은, 기존 재벌이 미처 개척하지 않은 중화학공업 분 야에 투자하고 식민지에서 막대한 전원(電源)과 노동력을 활용하여 이윤을 극대화하고자 한 신흥 콘체른의 모험적 행보가 조선총독부(특히 우가키 총 독 부임 후)의 ‘농공병진’ 정책과 맞물린 데다가, 이후 전쟁으로 인한 통제 적인 군수산업화의 특혜를 독점하면서 비약적인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었 다. 이에 덧붙여, 식민지에 대규모의 노동력 수요를 창출함으로써 인구 이 동이 ‘내지’에 미칠 노동시장 교란의 요소를 방지․조절하고자 하는 제국의

‘경계 관리’의 입장에서도 ‘자본의 이식’은 소망스러운 것이었다.13) 이렇게 볼 때 흥남 일대에 형성된 일본질소의 전기․화학 콘체른은 노동 인구의 이동과 집중을 촉발하는 한편으로 또한 그들의 이동을 저지하는 효과를 낳 았다고 할 수 있고, 식민지/제국 체제의 포괄적인 통치구조 내에서 자본과 국가의 이해가 합치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의 전시 기, 일본질소의 군수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자본과 국가의 관계는 보다 구조 화되어간다.

일본질소 콘체른이 흥남에 세운 자회사 조선질소는 기본적으로 ‘내지’로 부터 기술자, 숙련공 등을 전근시키는 방식으로 생산력을 확보했고, 조선인 과 중국인은 단순 노동 및 일용 노동에 종사시키는 방식으로 노동자의 직

12) 위의 京城日報(1926. 8. 13) 기사 참조.

13) 제국의 ‘경계 관리’를 중국과 조선의 노동자에 대한 담론-표상 정치를 통해 비판적으로 살핀 것으로는 김예림, 앞의 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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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별 위계를 민족적 구성에 거의 일치시켰다. 전문기술자들은 대부분 제국 대학 이공계를 졸업한 자들로서 새로운 제품, 설비 및 생산 공정의 개발을 담당했고, 내지에서 온 숙련공 및 일반 직공들은 정밀한 작업을 담당하는 한편 조선인, 중국인 노동자에 대한 관리․감독 업무를 맡았다. 조선으로 이주해 온 ‘내지인’ 노동자의 “거의 전부는 조선인 노동자의 지도적 입 장”14)에 있었던 사정은 흥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흥남 공장은 초기 부터 기본적으로 ‘내지’ 노동자들을 그 생산력의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에 대체로 7:3으로 ‘내지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표 1> 조선의 산업별 내지인 공장노동자 수15)

산업별 내지인 공장노동자 수

방적공업 242

금속공업 370

기계기구공업 904

요업 358

화학공업 3,286

제재(製材) 및 목제품제조공업 125

인쇄제본업 209

식량품제조업 378

가스 및 전기업 109

기타 공업 189

6,169

1931년 말 시점에 이루어진 위의 조사에서 조선의 화학공업에 종사하는

‘내지인’ 노동자가 전 조선 ‘내지인’ 노동자의 절반을 넘는 규모를 보이고 있다. 물론 이 화학공업 노동자가 모두 흥남에 있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

14) 南滿洲鐵道株式會社經濟調査會, 朝鮮人勞働者一般事情, 南滿洲鐵道株式會 社, 1933, 69면.

15) 같은 책, 75~76면.

(11)

만, 1932년 6천여 명의 직공 중 ‘내지인’ 노동자가 70% 정도를 차지하고 있 었다16)는 증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흥남공장의 생산력의 기본은 내지인 노 동자들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었다. 따라서 식민지/제국 전기․화학공업의 유토피아 흥남은 ‘내지’가 연장된 장소였다고 할 수 있다. 공장 안에서는 일 본어만이 사용되어야 했고,17)조선인과 중국인은 기술적 노동으로부터 배제 된 채 “일본인의 보완적 노동으로서 육체소모적인 노동”18)에 배치되었다.

가장 높은 지위에 있던 ‘내지인’ 전문기술자는 임금과 근무환경은 물론 일상생활의 편의에 이르기까지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다. 이들에게 흥 남은 실험 결과를 현실에 맘껏 적용해 볼 수 있는 이상적인 실험실이었 고,19) 전쟁으로 인한 새로운 화학제품의 수요에 대응해 새로운 분야를 개 척해가는 프론티어 정신의 실천장이었다.20)

그런가 하면 대체로 미나마타를 비롯해 일본질소 공장과의 연결선을 통

16) 全美男, 「窒素肥料工場探訪記」, 中央日報 1932. 2. 7.

17) 岡本達明․松崎次夫 編, 聞書水俣民衆史 第五巻, 草風舘, 1990, 93면; 大石武夫,

「興南工場の終焉とソ連抑留」, 日本窒素史への証言 第二十集, 1983. 10, 46면 참조.

18) 姜在彦 編, 앞의 책, 73면.

19) 흥남질소비료공장의 차장을 역임했던 우에키 젠자부로(植木善三郎)에 따르면, “보통 은 파일럿 플랜트를 시행하고 그것을 스케줄 업해서 본 플랜트에 착수하지만, 일본질소 는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본 플랜트를 단번에 만든다. [……] 단번에 본 플랜트를 하는 것은 위험성도 크고 경제력이 필요하지만, 어쨌든 빠르다.” 植木善三郎, 「興南工 場の思い出」, 日本窒素史への証言 第六集, 1979. 4, 10면. 인산계(燐酸係)에서 근 무했던 미쓰야 다카시(三ツ谷孝司)에게도 흥남공장은 “처음부터 본 플랜트를 건설하 고 시운전을 했는데 예상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나타난 현상을 분석하고 대책을 세우고 개조해서 애초에 노렸던 목표를 단기간에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세계에서도 드문 공업화 기술을 가지고 있던 공장”이었다. 三ツ谷孝司, 「興南の風土と燐酸工場 の建設運転」, 日本窒素史への証言 第七集, 1979. 6, 121~122면.

20) 일본질소 계열사인 조선인조석유 아오지공장의 연구과장을 역임했던 시바타 겐조(柴 田健三)는 만주사변 등으로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추진하던 시기에

프론티어 정신과 행동으로 가득 넘쳐나고 있었다”라고 증언하며, “안 되면 아무리 고생 이 되더라도 어떻게든 될 때까지 해낸다고 하는 의지와 정열”을 느끼면서 “‘사는 보람’

을 만끽”했다고 기억한다. 柴田健三, 「興南赴任から積水転任まで三十年間の日本窒 素生活を顧みて」, 日本窒素史への証言 第十三集, 1981. 7, 73면.

(12)

해 조선으로 건너온 일반 직공들은 민족적으로 분할된 공장 서열구조에 익 숙해져 갔다. 이들의 조선 전근은 공장 건설 시기인 1927년 11월부터 시작 된 것으로 보이지만,21)개별적인 경로를 통해 ‘내지’ 각지에서 건너온 노동 자들도 적지 않았다. 또한 군인으로 조선에 와 있다가 전역 후 흥남에 취직 한 ‘내지인’도 적지 않았다. 특히 공사 하청 조직인 각 구미[組]의 조장인 고가시라[小頭]는 대부분 헌병 출신이었다는 증언도 있다.22) 공장이 건설 된 후에도 기본적인 업무는 ‘내지인’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미나마타와 노베오카(延岡)에서 전근해 온 이들이 주체가 되어, 조 선에서 군대를 만기 제대한 일본인을 현지 채용해 보충했습니다. [……] 조선인 은 공사가 있을 때마다 조금씩 들어왔습니다. 일용잡역이라든지 수리(修理) 보 조였죠. [……] 조선인은 어지간히 우수하지 않고서는 3교대 운전공(運轉工)으 로는 쓰지 않았습니다.

23)

이른바 ‘조선수당’을 비롯한 각종 수당을 받는 ‘내지인’과 조선인 사이에 2배 이상의 임금격차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작업장 내에서의 엄격한 서열구조와 폭력적인 ‘노무관리’가 민족의 계급화 또는 계급의 민족 화를 굳혀갔다. 요컨대 계원, 직공, 일용잡역 사이의 업무상 위계에 민족적 배치가 겹쳐지면서 일종의 ‘신분적’ 차이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구조 화된 신분관계에서는 예컨대 조선인과 ‘내지인’이 ‘이(李)’와 ‘다나카(田中)’

로 만나기는 어려웠다.24)나아가 조선인 잡역에 대해 ‘내지인’ 계원 또는 직

21) 岡本達明․松崎次夫 編, 앞의 책, 66면.

22) 같은 책, 62~63면.

23) 같은 책, 84~85면.

24) “대기소에서는 일본인과 조선인은 절대로 같은 테이블에서 밥을 먹지 않죠. 문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말을 섞지 않아요. 그래서 식민지에는 김이나 이라는 개인은 없습니다.

다나카와 김도 없습니다. 있는 것은 일본인과 조선인뿐, 있는 것은 민족과 민족의 관계 뿐이죠.” 같은 책, 123면. 물론 극히 드문 예로 인간적 관계 또는 이념적 연대가 없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조선인 지하운동가들과 함께 태평양노조건설운동에 참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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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 취하는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태도 또는 ‘신분적’ 격차는 ‘내지인’ 사이 의 직급서열 사이로도 전이되었다.25)즉 식민자와 피식민자 사이의 민족적 차별이 공장 내 엄격한 서열구조 속에 기입됨으로써, 서열구조의 하층에 속 하는 자들은 조선인 노동자든 ‘내지인’ 노동자든 ― 결코 실제에 있어서 완 전히 동일했다고 가정할 수는 없겠지만 ― 마치 피식민자로 ‘민족화’되는 듯한 폭력적인 차별구조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와 정반대의 방향, 즉 조 선인 중 극소수의 노동자가 승진해 직공으로 편입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 지만, 그 경우에는 직급 상의 위계에서 비롯되는 차별관계가 동일한 조선인 이라는 ‘민족적’ 규정성을 압도함으로써 조선인 노동자 내의 분열을 야기했 던 것으로 보인다.26)

대부분의 조선인 노동자는 공장 내의 단순 잡역에 배치되어 직급 서열의 가장 낮은 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비고용’ 상태의 조선인 다수 가 공장 주변에서 대체가능한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기도 했다. ‘내지’ 도항 이 어려운 상황에서 흥남으로 일자리를 찾아오는 조선인들이 증가했고, 수 요를 넘쳐나는 노동력들은 공장 주변에서 이른바 ‘산업예비군’을 형성하고 있었다.27) 따라서 자본의 입장에서는, 스트라이크, 태업뿐만 아니라 질병,

이소가야 스에지(磯谷季次)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25) “계원과 공원의 신분격차는 어떤 의미에선 미나마타 이상이었죠. 그건 사택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어요. 공원이 무릎을 꿇고 계원에게 사죄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같은 내지인이라는 의식이 있었는데도 말이죠.” 같은 책, 86면.

26) 鈴木音吉, 「九年間の興南生活断片(その一)」, 日本窒素史への証言 第二十八集, 1986. 8, 33~34면 참조. 이 증언자는 조선인 노동자 중에 승진하는 자가 생기면 주변의 동료 조선인 노동자들이 비협조적으로 돌변했다고 회고하면서, 이를 출세에 대한 질투 또는 “민족적 배반”에 대한 응수가 아닐까 해석한다. 그러나 이 증언자의 해석과는 상관 없이, 일부 조선인 노동자의 ‘승진’이 동료들 사이에 ‘분열’을 결과했다면, 그 사실 자체 가 직급 상 차별관계의 강력한 현존을 방증해준다고 할 수 있겠다.

27) 「인부 80 채용에 2000여 명이 쇄도」, 朝鮮日報 1931. 6. 20; 「지방시론: 흥남의 실업 자 문제」, 朝鮮日報 1931. 9. 9; 「60명 모집에 500여 명 응모」, 朝鮮日報 1933. 11.

2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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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 등, 공장 내의 생산의 시간을 방해하는 어떤 움직임도 즉각 제거하고 노동력을 대체․보충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더욱이 조선 인 노동자들이 종사한 단순잡역은 어떤 고유성도 갖지 않는 힘 자체만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힘의 소유자는 반드시 조선인일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중국인 노동자의 대량 유입은 식민지/제국 내 노동시장의 안정화 를 위해 총독부가 통제하고 있었다. 당국은 내훈 「지나인 노동자 취체에 관 한 건(支那人勞働者取締に關する件)」(1930년 11월 17일)을 통해 작업장 에서 중국인 노동자 사용에 제한을 두도록 했다.28)총독부는 특히 중국인 노동자 조직이 이른바 ‘쿨리가시라(苦力頭)’를 중심으로 통제되어 있는 데 반해 조선인 노동자들은 분산적이고 통제되지 않는 측면을 우려하고 있었 고, 이것이 조선 노동시장의 불안정뿐만 아니라 사회불안 요인으로 전환될 지도 모를 가능성을 최소화하려 하였다.29) 물론 이러한 이동 통제 정책이 실제적으로 얼마나 효과적이었는가는 불확실하지만,30)일본질소 콘체른과 관련해서는 초기 수전공사 및 공장건설 공사에 중국인 계절노동자가 대량 으로 사용된 데 반해, 공장이 가동된 후에는 현장에서 빠르게 배제되고 소 수의 일용잡역에만 참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민족 노동력 구성이 민족의 계급화 또는 계급의 민족화의 형태로 이루 어지고, 이 위계를 넘어서 공정에 대한 정보 또는 기술의 전이 등이 이루어

28) 南滿洲鐵道株式會社經濟調査會 編, 앞의 책, 33~35면. 이 내훈은, 중국인 노동자 사용수를 관영사업의 경우 전체 노동자의 10분의 1, 민영사업의 경우 5분의 1로 제한할 것, 그리고 30명 이상의 중국인 노동자를 사용할 경우 관할 경찰서의 승인을 받을 것 등을 정하고 있다.

29) 朝鮮總督府學務局社會課, 朝鮮の社會事業, 朝鮮總督府, 1933, 89~90면 참조. 이 시기 중국인 노동자와 조선인 노동자 사이의 차이와 대립에 대한 인식은 폭넓게 퍼져 있었다. 小田内通敏, 朝鮮における支那人の經濟的勢力, 東洋協會出版部, 1926, 45~53면; 南滿洲鐵道株式會社經濟調査會, 滿洲の苦力, 南滿洲鐵道株式會社, 1934, 37면 등 참조.

30) 각종 법령에 의한 중국인 입선 통제의 무력함에 대해서는 김예림, 앞의 논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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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수 없는 구조가 생산과정에 관철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일본질소 콘체른 의 식민지 개발 및 투자의 식민주의적 성격을 드러내준다. 단적으로, 식민 본국의 엘리트 기술자들에게는 자기실현과 국가적 대의가 일치되는 이상 적인 생산 현장이었던 공장31)이 조선인 노동자 ― 또한 중국인 노동자 ― 에게는 ‘죽음의 공장’이었다. 흥남질소비료공장 노동자 출신의 작가 이북명 이 반복해서 묘사한 바 있듯이, 공장은 노동자들이 폐결핵에 걸리거나(「질 소비료공장」, 「출근정지」32)), 암모니아 가스에 질식당하거나(「암모니아 탱 크」33)), 탱크 폭발로 형체도 없이 해체되어 버리는(「출근정지」) 곳이다.

민족차별과 직급차별이 조응하는 이 공장에서는 노동규율의 실천과정을 통해 일본인에게 식민자 아비투스를 학습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역으로

‘식민자/피식민자’라는 폭력적 위계에서 형성된 차별관계를 직급 상 서열에 전이시키게 했다. 따라서 피식민자의 ‘노동력’을 특정 부문의 노동에 배치 하는 서열 구조는, 거꾸로 특정 부문의 노동을 도덕적으로 가치화하는 직업 이데올로기를 산출․강화하기도 했다.34) 흥남공장의 다민족 노동력 구성

31) 日本窒素史への証言(1977~1992)의 필자들은 대부분 엘리트 기술자로서, 인양(引 き揚)의 고통스런 순간을 제외하곤 대체로 자신의 능력을 맘껏 발산했던 행복했던 시간 으로 흥남을 기억하고 있다. 특히 이 증언록은 일본질소의 성장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이들이 식민지 개발의 전성시대를 되살림으로써 미나마타병의 원인이 밝혀진 후 실추 된 일본질소[チッソ]의 명예를 복원함과 동시에 스스로 자기긍정의 서사를 구성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인 카마다 쇼지(鎌田正二)는 후기에서 “칫소 (チッソ)라고 하면 오늘날에는 공해기업의 대명사적인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만, 저희 들은 지금도 일본의 근대산업을 개척한 대표선수였다고 마음속으로 은근히 긍지를 느 끼고 있습니다. 이번 증언집은 이 긍지를 뒷받침해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소중히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라고 쓰고 있다. 日本窒素史への証言 第二集, 1977. 11, 106면.

32) 李北鳴, 「窒素肥料工場」, 朝鮮日報 1932. 5. 29~31; 「初陣」, 文學評論 臨時增 刊新人推薦号, 1935. 5; 「出勤停止」, 文學建設 1932. 12.

33) 李北鳴, 「암모니마 탕크」, 批判 1932. 9.

34) 흥남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해 온 한 미나마타 출신 노동자는 ― 고향인 미나마타에서 그렇게 했듯이 ―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농사를 짓다가 동료 일본인 노동자들로부터 조선까지 와서 지저분한 일을 한다며 경멸당한 경험을 증언하고 있다. 또한 일부러 표 준어를 사용하며 ‘시골출신’임이 드러나지 않도록 애썼다는 증언도 있다. 민족차별과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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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세계와 사회에 대한 식민주의적 관계 자체를 일상 속에서 재생산하는 장치의 일부분이었다.

3. 규율화의 실패와 도주하는 신체들

중일전쟁 발발을 전후해 흥남일대 일본질소 콘체른에는 큰 변화가 발생 한다. 하나가 군수산업화에 의해 새로운 생산분야(화약, 마그네슘, 인조석 유 등)가 확충되고 콘체른의 규모가 더욱 비대해진 것이라면, 그와 반대로 징병으로 인해 ‘내지인’ 노동자들이 현저하게 감소해갔다는 것이 다른 하나 였다. 노동력의 수요는 증대해갔지만, ‘내지인’ 노동자의 부족으로 콘체른 내 노동인구의 민족구성은 빠르게 역전되어 갔다. 결국 전쟁 말기에는 8:2 이상으로 조선인 노동자가 다수를 점하게 된다.

<표 2> 전쟁말기 일본질소 콘체른 남자노동자의 일본인, 조선인 비율35) 구별

공장 일본인 조선인 工員중

일본인의 비율 자료

흥남비료공장 987 4,554 17.81% 19453 흥남금속공장 887 3,791 18.96% 19455

본궁공장 761 3,651 17.25% 19456

용흥공장 577 1,698 25.36% 19456

화약공장 465 1,207 27.81% 19455

제련소 91 873 9.45% 19456

무위계가 일치하는 세계에서 일본인이 식민자로서의 아비투스를 학습하는 과정은 그들 내부의 지방성을 억압하는 자기검열의 과정이기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골=농업=

방언’은 식민자와 피식민자 사이의 뚜렷한 구별짓기를 방해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 이다. 岡本達明․松崎次夫 編, 앞의 책, 200~201면 참조.

35) 鎌田正二, 北鮮の日本人苦難記: 日窒興南工場の最後, 時事通信社, 197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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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기 노동자의 충원은 총독부와의 더욱 긴밀한 협력을 통해 집단적으 로 동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주로 조선 남부의 농민들 가운데 징발 해 오는 방식을 취했다.

전쟁이 말기에 접어듦에 따라 일본인 노동자만이 아니라 조선인 모집도 어렵 게 되었다. 그래서 농촌에서 조선인을 강제적으로 공장에 끌고 오는 일이 행해 졌다. 그리고 처음으로 행해진 것이 산업보국대(産業報國隊)였다. 약칭으로 산 보대라고 말했다. 우선 공장이 도(道)를 통해 이 산보대의 출동을 총독부에 신청 한다. 총독부는 그것을 도로, 도는 군(郡)으로, 군은 면(面)으로 할당해 간다. 면 은 출동 가능한 자의 명부에서 출동할 산보대원을 선발한다. 2개월을 기한으로 출동하는 산보대는 이번엔 누구누구, 그 다음엔 누구누구라고 정해, 순서가 된 사람을 내보내는 방식이었다.

36)

남부지역 농민들의 전시 노력동원은 중일전쟁이 장기지구전으로 전환되 고 조선의 병참기지로서의 위상이 명확해지면서 점차 본격적․체계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일본질소 콘체른에의 노동력 충원 역시 그 일환으로 이루어 졌다.37)전쟁 말기 일본질소 콘체른의 ‘내지인’ 노동력을 조선인이 대체해 가는 현상은 흥남 일대에서만이 아니라 미나마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 본질소 미나마타 공장 노동자들의 회고에 따르면 1942년 무렵부터 카바이 드 공장에 조선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해 예컨대 한 작업조를 이루고 있는 75명 중 50명 정도를 조선인이 차지하는 경우도 있었다.38)물론 조선인 노

36) 같은 책, 15면.

37) 예컨대 1939년 봄 북선지역의 철도, 수전 등 각종 공사에 동원된 전남지역 농민만 해도 만명을 초과했다. 「북조선행 전남 役軍」, 朝鮮日報 1939. 4. 30. 흥남에의 동원과 관 련해서는 「남선 노동자 160명 흥남着」, 조선일보 1939. 4. 30; 「나주서 흥남에로 노동 자 100명 출발」, 조선일보 1940. 4. 16 등 참조.

한편, 전쟁 막바지에는 노동력 부족으로 산업보국대 이외에도 학도동원, 심지어는 수 인(囚人)과 전쟁포로까지 흥남 공장에 동원했다. 鎌田正二, 앞의 책, 18~19면 참조.

38) 岡本達明․松崎次夫 編, 聞書水俣民衆史 第四巻, 草風舘, 1990, 281~28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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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들이 다수를 점했지만 흥남에서도 미나마타에서도 ‘내지인’ 노동자는 조선인 노동자를 관리․감독하는 지위에 놓였다.

그러나 강제동원 도중 또는 공장 노동 도중에 도망하는 자들이 빈번히 발생했다.39)노동자들의 도주 및 작업장 이탈은 1920년대 후반 일본질소의 수전 공사에 동원된 이들에게도 광범위하게 나타났고, 결국 총독부의 알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 바 있다.40)특히 전시기에 접어 든 후 흥남공장 일대 의 민족별 노동력 구성비가 역전되면서 이른바 ‘노무관리’에 더 많은 ‘빈틈’

이 발생한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도주 또는 이탈은 일차적으로는 강제적인 동원과 노역에 대한 거부행위로서 나타난 것이지만, 식민주의적 노동력 통 제의 한계와 관련된 보다 구조적인 차원에 닿아 있는 현상으로 봐야 할 것 이다. 식민주의적 통치의 성격을 드러내주는 이 현상은 무엇보다도 피식민 자 ‘노동력’에 대한 체계적인 평가절하와 직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식민지/

제국의 자본-국가는 ‘내지인’ 노동자 및 중국인 노동자와의 비교를 통해 조 선인 노동자의 조직력과 규율의 부재를 비판하는 언설을 창안․유포하면 서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통제․관리 실패의 원인을 조선인 노동자 자체에 서 찾으려 했다. 실제로 총독부에서 흥남의 ‘내지인’ 노동자들에 이르기까 지 조선인 노동력에 대한 평가절하는 일반화되어 있었다.

(1)동작이 민첩하지 않고 일에 대한 열의를 결여하고 있어 공정이 향상되지 않는 점.

(2)치밀한 일 또는 화급한 순간에 대응하지 못하는 점.

39) 韓五赫, 「長津江水電工事場踏査記」, 東亞日報 1936. 5. 16; 「북조선에 간 노동자 탈출귀환 팔백명」, 東亞日報 1937. 6. 22. 또한 鎌田에 따르면 조선 남부에서 동원되 어 오는 노동력 중 10% 정도는 흥남까지 오는 도중에 도주했다. 鎌田正二, 앞의 책, 16면 참조.

40) 노동현장 이탈 이유는 알선시와는 현저하게 다른 임금과 가혹한 노동조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손정목, 「일제하 화학공업도시 흥남에 관한 연구(上)」,

한국학보 16권 2호, 1990, 214~216면 참조.

(19)

(3)일에 싫증을 잘 내고 노동의 계속성이 결핍되어 있어 숙련공이 되기 어려 운 점.

(4)3, 4일 동안 일을 하고 임금을 모으면 먹을 것이 떨어질 때까지 휴업을 해 사용자 측이 일의 계획을 세울 수 없게 하는 점.

41)

조선인은 내지인처럼 신뢰할 수 없는 걸요. 내지인이라면 이런저런 사정이 있 으니까 내일 몇 시까지 운전할 수 있도록 용접해 놓아라, 라고 말하면 되지만, 조선인은 그렇게 해서는 되지를 않아요. 책임이 없는 걸요. 책임감이라는 것이 없는 걸요. [……] 미나마타의 직인(職人)들처럼 죽을 때까지 일을 배우겠다는 정신따위는 약에 쓰려고 해도 없어요. 그저 그 자리에서 발뺌하려고만 하지.

42)

조선인 노동력에 대한 평가절하는 중국인 노동자 및 ‘내지인’ 노동자와의 비교를 통해 확립되어갔는데, 조선인 노동자의 문제로서 파악하고 있는 내 용의 핵심은 ‘예측불가능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부여된 명령의 결과를 예 측할 수 없고, 무엇보다도 현장에서의 노동의 지속 자체를 예측할 수 없다 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인 노동자의 노동 능력에 대한 이와 같은 불만은 근 본적으로 조선인 노동력에 대한 ‘통치불가능함’의 토로에 다름 아니다.

사실 민족의 계급화 또는 계급의 민족화가 관철되고 있는 공장에서 일용 잡역에 종사하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내지인’ 기술자 또는 직공과 같은 수 준의 ‘주체성’을 갖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또한 공정에 대한 지식 및 기술의 습득으로부터 배제된 상태에서 근대적인 노동규율이 자동적으 로 이루질 수도 없었다. 따라서 조선인 노동자를 소나 말처럼 생각하고 사 용하라는 노구치의 전언43)과 함께, 노무관리라는 명목으로 일상적인 폭력

41) 朝鮮總督府學務局社會課, 앞의 책, 87면. 한 ‘내지인’ 노동자도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해 “어떤 패거리들은 급료를 받으면 2, 3일 나오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岡本達明․松崎次夫 編, 聞書水俣民衆史 第五巻, 85면.

42) 같은 책, 119~121면.

43) 같은 책, 94면.

(20)

이 구사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인 노동자에게 특징적인 노동 규율의 부재, 책임감의 부재, 예측불가능성 등은 노동의 숙련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식민지적 노동유동성의 조건과 분리될 수 없는 현상이며, 또한 노동에 대한 식민주의적 위계구조를 유지하면서 노동력의 가치를 과소평가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했다. 요컨대 한편으로는 조선인 노동력에 대한 가치절하 언설을 생산해가면서 동시에 절하된 가치를 지속시키는 노동유동성을 강 화시켜 간 것이 식민지/제국 자본-국가의 ‘노동력’ 관리의 메커니즘이었다.

그러나 이렇듯 노동력에 대한 식민주의적 통치를 강화시켜 갈수록 도주와 이탈의 가능성은 확대되어 간다. 민족차별과 직급차별이 상응하는 식민주 의적 노동력 관리 구조에서 피식민자의 ‘노동력’ 또는 하층 직급의 노동은 체계적으로 과소평가될 수밖에 없고, 이러한 과소평가는 그 ‘노동력’과 직 급에서의 다양한 이탈을 촉진한다. 역설적으로 식민주의적 통치가 통치불 가능한 것을 확대재생산한다. 그러므로 ‘노무관리’의 이름으로 조선인 노동 자의 신체에 가해진 폭력은 가치절하된 노동력의 위치를 강제적으로 확인 시키는 행위인 동시에 통치불가능한 것에 대한 조바심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 통치불가능한 것이란 노동자 개개인이라기보다 ‘노동력’으로 수렴되 지 않는 신체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식민지 통치권력과 자본은 이 통치불가능한 것들조차 남김없이 ‘노동력’(때로는 ‘군사력’)으로 산정하려 하지만, 식민지적 노동유동성은 노동력에 대한 규범적 이해를 불가능하게 한다. 흔히 이 유동성은 ‘산업예비군’으로 파악되거나 ‘잠재적인 노동력’으 로 포함되곤 한다.

조선 노동계의 장래를 관찰해 보면, 농민은 교통이 열림에 따라 점차 농사짓 기를 싫어하고 도회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으며, 또 한편에서는 점차 조선 내에 서의 산업개발에 따라 각종 공장의 신설 및 철도 공사, 하천 개수 공사, 도로 항 만 공사, 수리 개간 공사, 대 수전(水電) 공사 등이 점차 발흥해가면서 노동자의 수요는 증가해 가는 추세에 있습니다. 이 수요 증가수는 모두 농촌에서 충당하

(21)

지 않으면 안 됩니다. 현재 조선인의 8할은 농민이며, 게다가 그 중의 8할은 소작 농 또는 자작 겸 소작농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특수한 숙련직공을 제외하고는 부족한 노동자를 농촌에서 충당하는 것은 곤란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44)

1933년의 시점에서 총독부는 조선의 농민을 ‘산업예비군’ 또는 ‘잠재적인 노동자’로서 파악하고 있다. 인구와 노동에 대한 통치의 시선은 농민에서 노동자로의 전이를 단절 없는 연속성에서 이해하고 있는 바, 이러한 시선은 그 신체들의 차이를 추상적인 ‘노동력’으로 평면화시킬 때만 가능한 것이다.

또한 이는 상대적 과잉인구가 “‘노동력 자체를 상품으로 제공’하기 위해 대 기하고 있다고 기대되는 존재”인 ‘산업예비군’으로 상정되고 “아직 관계를 체결할 약속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예정대로 진행되리라고 상정되고 있 는”45) 자본의 예정조화론과도 합치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인간은 ‘노동력’

으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을뿐더러, 노동력에 대한 평가절하는 역설적으로 노동력들을 이 예정조화의 세계로부터 이탈하는 신체들로 전환시킨다.

4. 통치불가능한 신체들의 증식

식민지/제국 신흥 콘체른의 식민지 ‘개발’은 일제 당국과 총독부의 지정 학적 전략 속에서 독점적 이익을 보장받으며 날로 확대되어 갔다. 특히 흥 남 지역을 중심으로 한 일본질소의 식민지 ‘개발’은, 전기, 비료, 화약 등 공 공재 생산을 통해 식민지/제국 전체 삶의 물질적 조건에 중대한 변화를 초 래했을 뿐더러, 식민지/제국 범위에서 노동시장을 새로이 창출하거나 조정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식민지/제국의 통치성과 깊이 관련된 것이 었다. 식민지/제국 ‘내지’의 노동시장 안정을 위해 중국에서 유입되는 인구

44) 朝鮮總督府學務局社會課, 앞의 책, 89면.

45) 富山一郎, 流着の思想, インパクト出版会, 2013, 2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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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차단하고 ‘내지’로 도항하는 조선인들을 통제하는 한편 유효한 ‘노동력’

을 식민지/제국의 역내 경계를 가로질러 재배치하는 행위는 자본과 국가가 함께 참여하는 식민주의적 통치의 본질적 국면을 드러내준다.

노동시장의 관리와 관련된 식민주의적 통치는 식민지의 이른바 ‘유휴 노 동력’을 생산력으로 전환할 수 있게 해주는 다양한 ‘개발’에 의해 뒷받침된 다. 수력발전, 공장건설, 토목사업 등의 형태로 전개된 식민지 ‘개발’과 공장 노동은 피식민자들이 ‘노동력’으로서 살아가게 하는 제한된 통로를 제공한 다. 대규모 공사와 전쟁은 노동력의 수요를 증대시켜 갔고, 피식민자들은 요구되는 노동의 형태에 자발적으로 또는 강제적으로 자신의 신체를 조절 해 갔다. 그러나 피식민자들이 맞춰가야 할 노동의 형태는 식민지/제국 자 본이 최대의 생산성 확보를 위해 고안한 노동력 배치의 틀 속에 고착되어 있었다. 그것은 민족의 계급화 또는 계급의 민족화의 틀이었고, 이 틀 안에 서 피식민자들은 가치절하된 노동력으로서만 참여할 수 있었다. 책임감도 없고 향상될 가능성도 없다고 평가된 노동력은 다만 일시적이고 소모적인 노동에만 배치될 뿐이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모적인 노동에 배치하기 위해 식민지의 노동력은 평가절하되어야 했다. 또한 민족의 계급 화는 동시에 계급의 민족화이기도 해서, 식민주의적 통치의 구조 속에서 피 식민자 노동력에게 분배된 이데올로기적 가치가 노동의 위계구조 최하층 에 속하는 단순 육체노동에 부착되기도 한다. 요컨대 평가절하된 피식민자 노동력에는 소모적 노동이 분배되고, 소모적 노동은 피식민자들에게나 어 울리는 노동으로 가치화된다.

따라서 피식민자들에게 ‘노동력’으로서의 삶의 길은 소모되는 삶의 길이 었다. 이것이 식민주의적 통치의 본질적 국면을 드러내준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제국의 자본과 국가는 식민지 ‘개발’을 통해 피식민자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새로운 터전을 제공했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피식민자들이 그 터 전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이 소진되어야만 했다. 식민주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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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의 역설은 그것이 살게 하는 곳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데 있다. 그 리고 이렇게 피식민자들의 생명을 소모적인 ‘노동력’에 배치할 수 있는 것 은, 통치하는 자가 통치되는 자와 동일한 생태계에 속해 있다는 의식이 부 재할 때이다. 식민주의란, 식민주의적 주체가 개입하고 작용을 가하는 세계 의 생태계가 그 주체 자신과 분리되어 있다는 판단이 전제될 때 작동하는 것으로, 곧 식민자가 식민지에서 행하는 모든 행동의 기초를 이룬다. 따라 서 어떤 행위자가 그 행위의 대상을 자신은 영향 받지 않는 별개의 생태계 에 속한 것으로 간주할 때 그 대상은 식민지가 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식민주의적 통치가 궁극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통치의 가능성 의 조건이 되는 식민지의 생태계를 스스로에게서 분리시키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식민주의적 통치합리성에 입각해 공간의 지정학적 배치, 노동력 의 효율적 사용, 사물의 경제적 결합 등이 아무리 치밀하게 기획된다 하더 라도, 그것이 분리시키고 있는 식민지의 생태계에서 삶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증식해 간다. 식민주의적 통치는 ‘노동력으로서’ 소모되기 전에

‘노동력으로부터’ 이탈하고자 하는 삶의 운동을 완전히 저지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생명을 ‘노동력’으로 표상하는 세계의 ‘지하’에서 이루어지는 신 체들의 증식을 완전히 파악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 본격적인 총동원체제에 진입하기 전까지 흥남에서는 매년 반복적으로 적색노조 건설운동이 지하 에서 전개되었는데, 이 운동의 행위자들은 식민주의적 통치가 마련해놓은 통로를 벗어나 ‘노동력’으로 환원될 수 없는 ‘능력들’을 사용하며 다양한 방 향으로 신체를 확대해 갔다.46)

일본질소 콘체른은 노동력의 효율적 배치를 통해 피식민자들을 소모적

46) 이와 관련해서는 식민지/제국의 언어-법-미디어 표상체제 바깥에서 다른 형태의 접속 과 전환의 가능성을 시론적으로 다룬 차승기, 「식민주의적 신체의 변신을 위하여」, 역 사문제연구 32호, 201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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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일회적인 노동에 구속하면서 식민지에서 ‘자유롭고’ 과감한 실험을 행 할 수 있었고, 총독부 및 일제 당국의 협조와 전시통제경제체제에 힘입어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성장은 식민지와 피식민자들 을 소모적으로 착취함으로써, 즉 동일한 생태계에 속해 있지 않은 대상으로

‘사용’함으로써 일시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것이었다.

패전과 함께 식민지에 투여한 80% 이상의 자산을 상실한 후, 일본질소 콘체른은 본국으로 돌아가 미군 공습으로 파괴된 미나마타 공장에서 재출 발한다. 공교롭게도 한국전쟁은 이 전기․화학 콘체른의 재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러나 식민지/제국의 식민주의적 통치구조 속에서 성장한 일본질 소는 전후의 미나마타에서 ‘식민주의적 경영’을 반복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 다. 1935년부터 흥남공장에서 근무하다 일본 패전 후 본국으로 인양되어 일 본질소에서 계속 근무한 한 기술 엘리트가 “신일본질소[1950년에 신일본질 소주식회사로 변경]에서도 전전(戰前) 일대(一大) 화학공업회사로서 웅비 한 때의 사고방식, 일 처리방식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47)고 회고할 만큼, 일본질소는 권위적인 직급서열과 폭력적인 노무관리를 생산효율성의 기초 로 여기고 있었다.48)물론 식민지와 피식민자를 상실한 전후 일본에서 식 민지/제국의 통치구조가 동일하게 반복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소모적 노동 에 대한 식민주의적 처리방식, 따라서 소모되는 것들의 생태계를 스스로에 게서 분리시키는 실천은 변형된 형태로 상당기간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 다. 그리고 이곳에서 통치불가능한 것은 유기수은 중독의 치명적 공해병이 라는 죽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식민지/제국의 흥남과 전후 일본의 미나마타를 단순한 상상력으 로 연결시킬 수는 없다. 한반도는 한반도대로, 분단 이후 사회주의 체제가

47) 柴田健三, 앞의 글, 92면.

48) 신일본질소의 권위적 지배구조에 대한 노동자들의 투쟁 및 미나마타병 환자들과 노동 자들의 연대에 대해서는 花田昌宣․井上ゆかり․山本尚友, 水俣病と向きあった労 働者の軌跡, 熊本日日新聞社, 20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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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선 북한에서의 흥남, 즉 식민본국과의 생산-유통-소비 체제는 물론 한 반도 남쪽과의 전력 네트워크도 단절된 이후의 흥남은 전혀 다른 위상에 놓인다. 일본의 패전과 동아시아 냉전체제 형성과정,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새로운 통치성의 형태 속에서 흥남과 미나마타를 사고하는 일은 추후의 작 업으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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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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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nxious Encounters

-Migrant workers in Heungnam-Minamata during the colonial/imperial era

49)Cha, Seung-ki*

This paper deals with the workers’ migration, which the empire’s exploitation of its colony brought about, and the effects of labor mobility, focusing on the case of Heungnam, the city built by the emerging conglomerate, Japan Nitrogen Fertilizer Company. This paper especially pays attention to the colonial/imperial intra-regional migration in the dimension of multi-ethnic workers’ experience as well as in the spatial dimension. In doing so, this paper attempts to reconsider the effects of colonial industrialization and labor management through the colonial governmental power and imperial capital.

The colonial development of the Japan Nitrogen Fertilizer Company was related to the colonial/imperial governmentality, in the sense that the Company regulated the labor market within the range of the colony/empire. The Company arranged and used Japanese and Korean labors efficiently in close cooperation with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in a way that matched job class hierarchy to national distinction. In this multi-national labor formation, Koreans were arranged into wasteful and temporary labor.

Here, the fundamental phase of colonialism is shown. The strategy of arranging the lives of the colonized is rooted primarily in colonialism, which essentially regards colony as separate ecosystem. However, this colonialist governmentality produces paradoxical results that enlarge the ungovernmentable. After the Defeat, the Company attempted to continue its colonialist ‘management’, but it was inevitable that it could not help

* Chosun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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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ducing the ungovernmentable. This was the deadly disease of mercury oisoning, the Minamata-disease.

Key Words : Heungnam, colonial/imperial, Japan Nitrogen Fertilizer Company, Noguchi Shitagau, intra-regional migration, governmentaliy, ecosystem

<필자 소개>

이름 : 차승기

소속 : 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전자우편 : neuzeit@hanmail.net

논문투고일: 2017년 6월 26일 심사완료일: 2017년 8월 11일 게재확정일: 2017년 8월 22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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