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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구***

목 차

1. 들어가며

2. 혐오와 혐오에 대한 이론들: 자연주의적 관점과 사회-문화적 관점 3. 진화심리학적 관점

4. 사회심리학적 관점

5. ‘올드 노멀(old normal)’을 꿈꾸며

<국문초록>

팬데믹 상황에서 확산되고 강화되는 혐오의 본질적인 특징은 그것이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경계가 흐려지는 그 순간 발생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특수 성에 대한 고려 없이 기존의 혐오에 대한 이론들을 반복하는 일은 이론을 실재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끝내 무력한 것으로 만들 뿐이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혐오에 대한 기존의 두 대표적인 관점, 진화심리학적 관점과 사회심리학적 관점 아래서 팬데믹 상황에서 발생하는 혐오에 대해 설명하고, 그 각각의 관점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비판과 그것의 한계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는 각각의 관점이 제기하는 혐오에 대한 비판들이 팬데믹 상황에서 발생

* 이 논문은 2019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9S1A6A3A04058286)

** 이 논문은 2020년 6월 19일,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이 주최한 2020년도 인문학연구 원 광주학연구소 정기학술대회 ‘불안과 혐오: 판데믹 시대의 새로운 인종주의’에서 발표 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당시 비판적 조언을 해주셨던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를 드린다. 특히 논평을 맡아주신 공병혜 선생님께서 제시해주신 여러 생산적인 논점들은 후속 연구들을 통해 발전시켜 나가도록 노력하겠다.

***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통합의료인문학 연구단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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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혐오에 대해서는 무력하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그런데 이는 너무도 당연할 결과이다. 팬데믹이라는 상황이 해체시키는 것이 바로 혐오에 대한 이런 비판들이 전제하고 있는 세계와 그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가치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팬데믹 상황이 야기한 혐오의 시대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선 회복해야하는 것은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 개인이라는 근대적 가치, ‘올드 노멀’의 가치일 것이다.

주제어 : 혐오, 팬데믹, 코로나19, 마사 누스바움, 행동면역체계

1. 들어가며

사태가 완연한 진정세를 보이던 지난 4월 13일, 정세균 총리는 그간 유지 해왔던 “강도 높은 사회적 거리두기”로부터 “생활방역 체제”로의 전환 여 부를 논의할 것임을 밝혔다. 그리고 곧바로 “생활방역은 코로나19 이전 삶 으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예전과 같은 일상으로는 상당 기간, 어쩌면 영원히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강조했다. 실제로 “생활 방역”은 “코로나19 이전 삶으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생활방 역으로의 전환을 선언한 지 20일이 지난 5월 26일, 정부는 대중교통과 택시 에서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했다. 생활방역으로 전환 직후 발생한 이태원 클 럽 관련 감염 사례가 늘어가자 정부가 내린 조치였다. 단속을 하거나 과태 료를 물리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운수종사자들은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손님의 승차를 정당하게 거부할 수 있으며, 사람들은 더 이상 얼굴을 가리지 않고는 버스나 지하철을 정당하게 이용할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여 기서 마스크를 쓰지 않고 버스나 지하철을 탔을 때 사람들이 마주해야했던 경계와 두려움, 불쾌감과 증오의 시선은 더욱 날카롭고 적극적인 무엇이 될 수 있는 동기를 발견한다. 마스크 착용이 의무로 부여됨으로써, 마스크를 쓰지 않은 자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은 이제 다만 공동체의 다수가 유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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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판단하는 행위에 동참하기를 거부한 이기적인 한 개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 마련된 규칙을 어긴 정책 위반자를 향한 것 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자를 향한 사람들의 이런 경계와 두려 움, 불쾌감과 증오의 시선이 정확히 “혐오의 시선”이라는 점이다. 진화론적 관점에 따르면, 감염 가능성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행동의 측면에서는 회피 (avoidance)로 나타나고, 감정의 측면에서는 혐오(disgust)로 나타난다.1)마 스크를 쓰지 않은 자에게 던져지는 사람들의 혐오 시선은 적어도 진화적 관점에서는 매우 자연스럽다. 물론 사람들이 배설물이나 피, 시체와 같은 혐오 대상을 혐오하는 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자를 혐오하는 것은 아니다. 마스크를 쓰지 않는 자에 대한 사람들의 혐오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즉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자를 다만 본능적으로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팬데믹 상황에서는 누구나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보균 자일 수 있고, 그 알 수 없는 누군가로부터 내가 감염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마스크를 쓰지 않은 자를 혐오한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자는 과학적 사실에 의해 오염원으로 의심받고, 그가 오염원일 수 있다 는 이런 합리적인 의심으로부터 혐오가 촉발된다. 과학적 사실에 대한 믿음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자에 대한 혐오를 구성하는 주요한 인지적 측면이다.

실제로 아무런 사전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자를 혐오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러한 혐오가 발생한 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정당한 것으로 주장하기는 쉽게 않을 것이다. 그러나 팬데믹 상황에서 각종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과학적 정보들은 사람들에게 감염 가능성을 인지시킴으로써 혐오를 준비하고, 혐오를 정당한 것으로 설 명할 수 있는 나름의 논거를 제공해준다. 제도와 교육을 통해 억제되어왔던 혐오는 팬데믹 상황에서 보다 자유롭게 분출될 수 있는 환경을 만났고, 비

1) 박한선, 「전염병은 왜 혐오를 일으키는가?」, 뺷SKEPTIC Korea뺸 21권, 2020, 74쪽. 박한 선은 disgust를 ‘역겨움’이라고 옮겼지만, 우리는 논의의 맥락상 ‘혐오’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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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으로부터 보다 쉽게 벗어날 수 방법을 찾았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현재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혐오와 인종주의에 대한 대응이 마주하고 있 는 어려움이 드러난다. 기존의 논의들이 해왔던 것처럼, 혐오를 단순히 효 용성이 다한 진화적 적응 반응으로 규정하거나, 그것의 인지적 측면이 가지 는 비합리성을 드러내는 것으로는 이제 충분하지 않다. 팬데믹 시대의 혐오 는 과학적 사실에 기반을 둔 자연적 반응이다. 그것은 나름의 합리성을 갖 추고 있고, 자연적인 것이라 쉽게 억제되지도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뺷경향신문뺸에 게재된 누스바움의 인터뷰는 실망 스럽다. 혐오에 대한 법철학적 논의로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그녀는 팬 데믹 상황에서 발생하는 혐오의 특이성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 인터뷰 제목 “코로나가 드러낸 편견과 혐오? 그 둘은 한 번도 숨겨진 적이 없다”가 암시하는 것처럼, 그녀는 코로나19가 가져온 팬데믹 상황에서 특별히 더 많 은 혐오가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번 사 태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계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인종주의에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질문자가 직접 언급했음에 도 불구하고, 긴 인터뷰에서 그녀는 동아시아계 사람들에 대한 혐오가 강화 된 현재 상황에 대해 지나가듯 짧게 언급할 뿐이며, 그 강화된 원인도 “미 국의 대통령”의 부추김에서 찾고 있다.2) 즉 그녀는 팬데믹 상황에서 발생 하는 이러한 혐오를 자연적인 것이기 보다는 “비이성적 망상”3)에 의존하여 형성된 사회-문화적인 산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바이러스의 전파 방식이 가지는 특성에 의해 개인과 개인의 직접적 만남이 통제되고, 이렇게 해체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정부의 개입이 그 어느 때보다 강화된 현재의 상황 속에서 혐오라는 의심스러운 감정이 입법

2) 「[7인의 석학에게 미래를 묻다] ③마사 누스바움 “코로나가 드러낸 편견과 혐오? 그 둘은 한 번도 숨겨진 적이 없다”」, 뺷경향신문뺸, 2020.5.21.

3) 마사 누스바움, 뺷혐오에서 인류애로: 성적지향과 헌법뺸, 강동혁 역, 뿌리와 이파리, 2016,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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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 정책결정의 적절한 근거가 될 수 없음을 말하는 누스바움의 주장은 여전히 유용하다. 그러나 팬데믹 상황에서 확산되고 강화되는 혐오의 본질 적인 특징은 그것이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경계가 흐려지는 그 순 간 발생한 것이라는 점이다. 감염 가능성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은 과학적 사실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촉발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아무런 고려 없이 기존의 논의를 반복하는 일은 이론을 실재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끝내 무 력한 것으로 만들 뿐이다. 혐오는 더욱 확산되고 강화될 것이며, 아직 무엇 인지 알 수 없는 그 소위 “뉴 노멀”의 세계는 개인이나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와 통제가 적절하게 균형을 이룬 어떤 끔찍한 무엇으로 우리 앞에 나 타나게 될 지도 모른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팬데믹 상황에서 발생하는 혐오를 기존의 이론들을 통해 설명하고, 그 각각의 이론들이 현 상황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비판과 그 한계를 살펴볼 것이다. 먼저 2장에서는 혐오의 개념과 혐오에 대한 두 대표적인 관점을 간단히 정리하고, 3장과 4장에서는 각각 이러한 관점들 아 래서 팬데믹 상황에서 발생하는 혐오를 설명하고 비판한 뒤, 그 비판들에 내재된 난점들을 드러낼 것이다.

2. 혐오와 혐오에 대한 이론들: 자연주의적 관점과 사회 - 문화적 관점

누스바움을 포함한 많은 영미 연구자들은 혐오를 표현할 때 disgust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다윈의 혐오에 대한 연구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 는데, 사실 혐오를 표현하는 영어 표현은 disgust 외에도 abhorrence, aversion, detestation, hate, repulsion 등 다양하다. 그러나 김용환이 말하고 있는 것처 럼 이 표현들은 한국어로 옮겼을 때 거의 아무런 차이를 갖지 않는다.4)따라

4) 김용환, 「혐오주의란 무엇인가?」, 뺷혐오를 넘어 관용으로- 관용: 혐오주의에 대항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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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본 연구에서는 다른 연구자들이 그러한 것처럼 혐오를 disgust의 의미로 사용할 것이며, 특히 밀러가 제시하는 다음의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밀러에 따르면 혐오(disgust)는 영어 사전에서 “메스껍고(repulsive) 비위 상하게(revolting) 하는 사물들이나 행동들을 나타내거나, 메스꺼움(revulsion) 과 증오(abhorrence), 역겨움(disgust)으로 묘사되는 반응을 일으키는 사물들 이나 행동들을 나타내는 표현들로 표시될 수 있는” “복잡한 감정”을 가리킨 다. 따라서 밀러에게 혐오(disgust)는 하나의 단일한 상태라기보다는 이 용어 들이 표현하고 있는 모든 상태들을 포괄하는 “일련의 증상(syndrome)”의 이름이다. 그리고 밀러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 용어들이 모두 “위험한 것으로 인식된 어떤 것에 대한 강한 반감(aversion)”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때 이러한 위험에 대한 인식을 일으키는 것이 대상이 가진 “근접, 접촉 혹은 섭취를 통한 감염 혹은 오염의 힘” 때문이라면, 이제 혐오는 무엇보다 감염 혹은 오염 가능성을 가진 무언가에 대해 나타나는 부정적인 반응 감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5)

이러한 혐오라는 부정적 감정의 발생과 관련해서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이 존재한다. 하나는 혐오를 자연적인 것으로 보는 진화심리학적 입장이고, 다 른 하나는 혐오를 자연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사회-문화적인 산물로 보는 사 회심리학적 입장이다. 물론 이 두 입장이 서로 전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아 니다. 진화심리학적 입장에서도 혐오라는 자연스러운 감정이 사회-문화적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으며, 사회심리학 적 입장에서도 혐오라는 사회-문화적 산물의 밑바탕에 진화적 근거가 있다 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혐오라는 감정에서 자연적인 것과 사회 -문화적인 것이 차지하는 중요성과 비중에 대해 두 입장은 서로 생각이 다 르며, 이런 이유로 이 둘은 분명히 구분된다. 진화심리학적 입장에서 혐오

윤리뺸, 김용환 외, 서광사, 2019, 22~23쪽.

5) 이 단락의 모든 인용은 William I. Miller, The Anatomy of Disgust,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97, p.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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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그것이 아무리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그 본질에서는 여 전히 본능적이며, 사회심리학적 입장에서는 매우 제한된 대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심지어 그러한 대상들에 대한 혐오조차도 많은 부분 사회-문화 적 학습에 의존한다.

그러나 이 두 입장들 간의 차이가 어떠한 것이든 이 두 이론은 모두 현재 팬데믹 상황에서 발생하고 있는 혐오와 인종주의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 는 방안을 제시하는 데 한계를 가지고 있다. 먼저 진화심리학적 입장을 살 펴보자.

3. 진화심리학적 관점

3.1. 행동면역체계로서의 혐오

오랜 옛날부터 감염병은 인류의 생존에 가장 큰 위협이었다. 실제로 브라 운 등에 따르면, 페스트와 천연두와 같은 대규모 감염병뿐만 아니라 “유아 사망률을 높이는 덜 극적이고, 이름 없는 바이러스 및 박테리아성 감염병”

까지 고려할 경우 감염병에 의해 사망한 인류의 수는 그간 인류가 겪은 모 든 전쟁과 비감염성 질병, 자연적 재해에 의해 사망한 인류의 수 모두를 합 한 것보다 더 많다.6) 이러한 상황에서 감염병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돌연변 이가 출현할 경우, 이 돌연변이는 진화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되어 개 체군 전체로 퍼져나간다. 이는 바이러스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숙주가 갖춘 면역체계를 회피할 수 있는 신종 바이러스가 출연할 경우, 이 바이러 스는 숙주가 되는 개체군 전체로 급속히 확산될 수 있다. 물론 숙주에 기생 해야만 하는 바이러스 입장에서는 확산을 위해 한 가지 조건이 더 필요하 다. 즉 너무 치명적이지 않을 것. 숙주를 순식간에 사망에 이르게 하는 치명

6) Peter J. Brown and Marcia C. Inhorn, “The anthropology of infectious disease”, Annual Review of Anthropology, 19, 1990,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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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바이러스는 미처 확산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소멸해버린다. 바이러스 는 인간과의 공생관계를 모색해야 한다.

흔히 ‘창과 방패의 싸움’ 혹은 ‘군비경쟁’으로 묘사되는 바이러스와의 적대 적 공생관계 끝에 인류는 현재의 면역체계를 갖추었고, 이 면역체계는 크게 선천면역(innate immunity)과 후천 면역(acquired immunity)으로 구분된다.

선천면역은 생명체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면역체계로서 대상을 특정 하지 않고 침투한 모든 병원균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면역체계인 반면, 후천면역은 선천면역을 피해 표적조직이나 장기로 전파되어 2차 증식을 하는 특정 병원균에 대해 신체가 적응하면서 갖게 되는 면역체계이다.7) 그러나 선천면역이든 후천면역이든 이러한 면역체계는 일단 감염된 이후 작동한다 는 점에서 일정한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면역방식이다. 감염된 이후 반응하 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감염 자체를 효과적으로 회피할 수 있는 면역체계를 갖춘 개체가 있다면, 이 개체가 진화에 매우 유리할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실제로 많은 연구자들은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에게 이런 방식으로 감염 을 회피할 수 있는 진화적 기능이 있다고 주장했으며, 샬러는 이를 “행동면 역계(behavioural immune system, BIS)”라고 불렀다. 그에 따르면, 행동면 역계는 “병원균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리는 지각 신호”에 반응하며, 이 러한 신호가 지각되었을 때, “자극은 행동 회피에 도움이 되는 적응적 심리 반응을 유발한다.”8) 그리고 이러한 “적응적 심리 반응”의 대표적인 예가 바 로 혐오이다. 혐오는 불쾌한 냄새처럼 “전염성 병원균과의 근접성을 가장 분명하게 나타내는 감각적 신호”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개인위생과 성관계 등 “질병 전염과 관련된 행동 영역에서 발생하는 규범적 기대를 위반하는 행동”에 대해서도 촉발된다.9) 혐오는 감염 가능성이 높은 대상과 행위에

7) 이원우, 「바이러스, 우리에게는 면역계가 있다」, 뺷SKEPTIC Korea뺸 21권, 2020, 46쪽.

8) Mark Schaller and Justin H. Park, “The behavioral immune system (and why it matters)”, Current Directions in Psychological Science, 20(2), 2011, p.99.

9) Ibid,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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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 발생함으로써 개체가 감염을 유발할 수 있는 대상과 접촉하거나 감염 가능성을 높이는 행동을 하는 것을 사전에 막고, 그러한 예방을 통해 감염 병의 위험으로부터 개체를 보호한다. 혐오는 병원균을 식별하는 “일종의 직관 미생물학”10)이며, 정확히 어디에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감염의 위험 에 대해 인류가 취한 선제적인 대응 전략이다.

3.2. 혐오는 효용성을 다한 진화의 잔재일 뿐인가?

이제 행동면역계 이론에 따라 현재 팬데믹 상황에서 발생하는 혐오와 인 종주의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현대 사회의 심각한 사회문제인 외국인에 대한 혐오나 장애인에 대한 편견, 통상적이지 않은 성 행위에 대한 반감 등은 진화된 행동면역계의 결과로서 오랜 기간 감염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노력해온 인류가 진화 과정을 통해 획득한 삶의 전략이다. 혐오는 자연스럽고 따라서 팬데믹 상황에 이러한 혐오가 존재한 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이상한 점이 없다. 혐오는 자연적인 것으로서 언제나 존재해왔다. 다만 제도와 교육에 의해 그것의 표출이 억압되어 왔을 뿐이 며, 팬데믹이라는 예외적 상황으로 인해 이러한 억압이 잠시 느슨해지자 이 를 기회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 것뿐이다.

그런데 행동면역계 이론이 제시하는 감염 가능성과 혐오 그리고 혐오로 인한 회피의 상관관계는 팬데믹 상황에서 발생하는 혐오와 관련해서 보다 적극적인 설명을 또한 제공해준다. 사실 감염 자체가 아니라 감염 가능성에 대해 반응하는 행동면역계는 언제나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이러한 오류는 감염 가능성이 있는 것을 감염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는 “잘못된 음성 오류”일 때보다 감염 가능성이 없는 것을 감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 는 “잘못된 양성 오류”일 때가 진화적 관점에서 더 유리하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로 인해 발생하는 손해와 이득이 모든 개체에게 동일한 것은 아니다.

10) 박한선, 앞의 글, 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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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와 관련해서는 언제나 이득과 손해의 문제가 있다. 가령 감염에 취약한 개체는 “잘못된 음성 오류”를 범할 경우 치러야하는 손해가 막대하지만, 그렇 지 않은 개체의 경우 이런 오류로 인한 손해가 대수롭지 않을 수 있다. 또 감염에 상대적으로 강한 개체는 혐오로 인해 먹이가 될 수 있는 어떤 대상을 회피해버렸을 때 얻게 되는 이득이 그로 인해 발생하는 손해보다 작을 수 있다. 혐오와 관련된 “비용 대비 이득의 상대적 비율은 개체의 감염에 대한 취약성의 함수”이다. 그리고 이는 개체가 병원성 감염에 취약할수록 혹은 취약하다고 느낄수록 더욱 병원균의 존재 가능성을 알리는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강한 혐오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11) 이제 팬데믹 상황에서 보다 강하고 광범위한 혐오가 발생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이유가 설명된다. 팬데믹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사람들이 감염에 취약한 상태이고 그 취약함을 인식하고 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이러한 환경 속에서 보다 강하고 광범위한 혐오가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사람들이 보다 폐쇄 적이 되어 사회적 교류가 줄어들고, 외국인을 배척하며, 친숙한 것에 집중함 으로써 자민족중심주의가 나타나는 것 또한 자연스럽다.12)

물론 자연스럽다는 것이 올바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금까지의 논의 는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현재 팬데믹 상황에서 벌어진 사태에 대해 납득 할만한 설명을 제공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태에 대해 진화심 리학적 입장이 제시할 수 있는 비판은 무엇인가? 오직 하나의 답이 있을 뿐이다. 혐오와 그것에 기반을 둔 다양한 행태들은 이미 그 효용성을 다한

11) 지금까지의 논의와 인용은 모두 Mark Schaller and Justin H. Park, Op. cit., pp.99- 100.

12) 샬러 등은 과장된 언론 보도에 의해 잠재적 감염에 대한 인식이 일시적으로 증가하는 경우 발생되는 혐오의 증가와 사회적 상호작용의 감소 경향에 대해 언급할 뿐만 아니라, 보다 오랜 기간에 걸쳐 오염 환경을 매개로 형성되는 여러 문화적 차이에 대해서도 언 급하고 있다. 가령 샬러 등이 제시하는 연구들에 따르면 오염에 취약한 지역에 사는 사람일수록 개방성이 낮고, 개인주의보다는 집단주의적 성향을 가진다. Mark Schaller and Justin H. Park, Op. cit., pp.99-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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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적 잔재일 뿐이다. 오랜 옛날 감염병에 대한 지식도 없고 따라서 그에 대한 마땅한 대응책도 없을 때, 외국인을 배척하고, 생김새나 행동이 통상 의 범주를 벗어나는 개인이나 집단을 낙인찍어 고립시키는 일은 그들이 혹 시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병원균에 의한 감염을 예방하는 가장 효과적인 대응 전략일 수 있었다. 그러나 감염병에 대한 많은 지식들이 있고, 효과적 으로 대응할 수 있는 기술도 갖추고 있는 오늘날, 무지에 기반을 둔 이런 전략을 취하는 일은 시대착오적이다. 또 정보통신과 교통의 발전으로 전세 계가 문화-경제적으로 서로 긴밀하게 얽혀 하나의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는 오늘날 외국인에 대한 배척은 불가능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마찬가지로 특 정 개인이나 집단을 낙인찍어 고립시키는 일도 근대적 인권 개념 위에 세 워진 민주적 사회에서는 비난을 무릎 쓰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혐오 는 진화적 본능으로 인간에게 남아있고 여전히 작동하지만, 의식은 이 진화 적 산물을 통제할 수 있다. 에이즈의 전파방식과 감염률에 대한 정확한 앎 은 기꺼이 에이즈 환자에게 손을 내밀 수 있게 만든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비판이 팬데믹 상황에서 벌어지는 혐오에도 적절 하게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팬데믹이라는 예외적 상황은 혐 오를 효용성이 다한 진화적 잔재로 규정하는 조건들을 하나하나 제거해버 리는 듯하다. 우선 팬데믹이란 상황은 지금까지의 지식과 기술이 무력화되 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팬데믹 상황에서 ‘무지’는 도처에 있다. 감염의 위험 이 어디에 있는지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이 감염병에 대처할 수 있는 기술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얼굴을 가린 마스크와 서로 간 멀리 떨어져 앉은 거리가 이런 무지의 상황을 상징한다. 팬데믹 상황에서는 길에서 마주 치는 모든 낯선 자들이 나를 감염시킬 수도 있는 이방인이거나 통상의 범 주에 벗어난 자이다. 다른 한편, 전 세계가 하나의 생활권을 이루고 있는 오늘날 외국인에 대한 배척은 불가능하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했지만, 팬 데믹 상황에서 사람들이 목격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생활권의 해체이 다. 국경은 잠겼고, 도시는 봉쇄되었다. 외국인에 대한 배척은 오늘날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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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한 일이 아니라 가장 먼저 실행된 일이다. 마지막으로 특정 개인이나 집 단에 대한 낙인과 고립도 안전이라는 목적으로 실행되는 정부의 여러 조치 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감염자의 동선이 공개되고, 그가 속한 집단이 언론에 특정되어 보도된다.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정보공개 와 격리는 낙인과 고립을 양산하고 있다. 정보공개와 격리가 낙인과 고립과 결과적으로 얼마나 다를 수 있을지 의문이다.13)

결국 행동면역계의 작동원리가 ‘감염 가능성-혐오-행동 회피’로 구성된다 고 할 때, 팬데믹 상황인 오늘날 이 중 두 항은 이미 채워져 있다. 감염 가능성 은 알 수 없는 무엇으로 모든 곳에 유령처럼 존재하고 ‘행동 회피’라는 반응은 정부의 주도 하에 다양한 형태로 이미 실행되고 있다. 혐오가 이 행동면역계 에 마지막 남은 자신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너무 당연해 보인다. 앞서 말한 것처럼, 혐오는 팬데믹이라는 예외 상황을 맞아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분명하 게 드러날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바로 이 지점에 ‘뉴 노멀’이라는 말이 가지는 두려움이 있다. 혐오를 과거 의 산물로, 효용성이 다한 진화적 잔재로 비판할 수 있었던 이유들은 코로 나19 이전 사회를 구성하던 제도들과 가치 규범들이었다. 이것들이 무너지 고, 심지어 폐기되어버릴 때, 혐오는 다만 억압에서 풀려나 ‘감염 가능성’과

‘회피’ 사이에 위치한 자신의 빈자리를 채우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행동 면역계의 작동원리 자체를 본래의 순서대로 복원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가 령 한국은 지난 4월 27일 ‘안심밴드’라는 이름의 전자팔찌를 자가격리 위반 자에게 채우기 시작했다. 당초 자가격리자 전원에게 채우려던 계획을 정부 가 자가격리 위반자에게만 채우는 것으로 수정한 것인데, 이런 인권 침해적 요소가 다분한 정책을 정부가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국민들의 전적인 지지가 있었다. 자가격리자에게 전자팔찌를 채우는 방안에 대해 찬반을 묻

13) 이와 관련된 문제제기는 다음의 글을 참조할 수 있다. 박지영, 「코로나19 유행과 ‘슈퍼 전파자’라는 낙인」, 뺷코로나19 데카메론뺸,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통합의료인문 학연구단, 모시는사람들, 2020, 142~149쪽.

(13)

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응답자들은 예외 없이 80% 안팎의 찬성 의사를 밝혔 다. 아직 감염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한 개인에게서 감염 가능성을 인식하 고, 그러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시행되는 낙인과 고립. 이 여론조사에서 찬성 의사를 밝힌 이들이 실제로 혐오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과정은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행동면역계의 작동방식과 너무 도 닮아있어서,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혐오를 기반으로 정책이 결정될 수 있으며, 그 정책이 매우 유용한 것일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을 엿보게 한 다. 과연 혐오는 정말 효용성이 다한 진화적 잔재에 불과한가?

4. 사회심리학적 관점

4.1. 사회 - 문화적 산물로서의 혐오: 원초적 대상에 대한 혐오와 투사 적 혐오

그런데 뺷혐오와 수치심뺸, 뺷혐오에서 인류애로뺸 등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 져 있는 법철학자 누스바움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혐오가 공적 활동의 신뢰할만한 지침이 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녀가 아주 긴 논의 를 통해 주장하는 바는 매우 간결하다. “혐오는 어떠한 행위를 범죄 행위로 규정하는 일차적 기반이 되어서는 안 되며, 현재하고 있는 것처럼 형법에서 죄를 무겁게 하거나 경감시키는 역할을 해서도 안 된다.”14)생활상의 소음 이나 악취, 생활 거주지에 설치되는 혐오시설 등 타인에 대한 실제적인 위 해나 재산권의 침해가 발생하는 경우가 아닌 한, 혐오는 어떠한 경우에도 입법을 위한 적절한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그녀가 이렇게 혐오에 기반을 둔 정책결정이나 입법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것이 현대사회에는 더 이상 적응적이지 않은 효용성이 다한 진화

14) 마사 누스바움, 뺷혐오와 수치심뺸, 조계원 옮김, 민음사, 2020, 37쪽.

(14)

적 잔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혐오를 입법의 적절한 근거가 될 수 없 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그녀가 혐오를 타당하지 않은 감정이라고 판단하 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감정에 대해 타당하거나 타당하지 않다고 판단하 는 것이 가능한가? 누스바움에 따르면, 모든 감정은 대상에 대한 사실적이 고 평가적인 믿음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믿음을 매개로 그 타당성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15)가령 절벽 위에서 느끼는 나의 두려움은 여기서 떨어지 면 죽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과 그 죽음이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에 게 불행한 일이라는 평가적 믿음을 담고 있다. 감정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 다. 그것은 인지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누스바움에 따르면, 감정에 수 반되는 이런 인지적 요소들은 “감정을 확인하거나 정의하고, 어떠한 감정 을 다른 감정과 구분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서, 단순한 감정의 “부수물이나 인과적 필요조건”이 아니라, “감정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다.16)

따라서 사람들에게 만연한 혐오감을 근거로 인간복제를 금지할 것을 주 장하는 카스를 누스바움은 비판하고, 그녀의 이런 비판은 사실 두 층위로 나누어져 있다. 즉 카스는 혐오를 “이성의 힘을 넘어서는, 깊은 지혜의 감정 적 표현”으로 이해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논증 없이” 주어지는 신뢰할 만한 경고이며, 인간성이 위협받는 오늘날에 “우리 인간성의 핵심 을 보호하기 위해 외치도록 남겨진 유일한 목소리”라고 주장하지만,17) 누 스바움에게 혐오는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논 증 없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혐오는 인지적 요소를 자신의 본질로서 포 함하고 있다. 따라서 카스에게 “혐오는 논증[의 대상]이 아니”18)지만, 누스 바움에게 혐오는 그 타당성을 따져볼 수 있는 논증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

15) 같은 책, 67쪽.

16) 같은 책, 62쪽.

17) 수정 인용, 레온 카스, 「혐오감의 지혜」, 뺷인간복제 무엇이 문제인가뺸, 박찬구 외 역, 울력, 2002, 47쪽. (Leon R. Kass, “The Wisdom of Repugnance”, The New Republic, Jun 2, 1997, p.20.)

18) 같은 책.

(15)

타당성을 따져보았을 때 결코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밝혀질 무엇이다.

그렇다면 누스바움이 말하는 혐오를 구성하는 인지적 요소는 무엇인가?

누스바움은 자신의 혐오이론을 대부분 로진의 이론에서 빌려오고 있으므 로 먼저 로진이 말하는 혐오에 대해 살펴보자. 로진은 혐오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혐오는] 역겨운(offensive) 대상의 (입을 통한) 체내화 가능성에 대한 불쾌 감(revulsion)이다. 역겨움의 대상은 오염물이다. 즉 오염물이 우리가 먹으려 하 는 음식물에 살짝이라도 닿게 된다면, 그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된다.”19)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로진에게 혐오는 무엇보다 음식의 섭 취와 거부와 관련되어 있으며, 섭취를 통한 오염, 즉 감염에 대한 관념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로진에 따르면, 이러한 섭취를 통한 오염에 대한 관 념은 여러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너는 너가 먹는 그것이다(You are what you eat)”라는 단순하고 원초적인 생각으로부터 비롯된다.20) 따 라서 혐오에는 자신의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경계에 대한 관념이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배설물은 내 안에 있을 때는 어떤 혐오감도 일으키지 않지만, 내 밖으로 나왔을 때, 즉 더 이상 나에게 속하지 않을 때, 나와 다른 것이 됨으로써 혐오의 대상이 된다. 내 몸의 경계 밖에 있는 것은 이물질이며, 이 이물질이 내 몸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것이 나를 내가 아닌 다른 것으로 변화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혐오의 감정에는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혐오대 상에 대한 다양한 조사결과들은 “거의 모든 혐오감이 동물에서 비롯된다”

는 점을 보여주고, 로진은 이런 결과로부터 더 나아가 “모든 동물이나 동물 생산물은 잠재적으로 역겹다”고 말하고 있다.21)결국 혐오가 자신의 경계

19) Paul Rozin and April E. Fallon, “A Perspective on Disgust”, Psychological Review, 94(1), 1987, p.23. 번역은 누스바움, 뺷혐오와 수치심뺸, 166쪽의 인용문을 사용했다.

20) Ibid, p.27.

21) Ibid, p.28.

(16)

에 대한 염려와 관련되어 있다면, 이 염려는 무엇보다 인간성과 동물성의 경계에 대한 것이며, 동물과 다른 것이고자 하는 인간의 자기 정체성에 대 한 것이다. 동물은 식물보다 훨씬 더 인간과 닮아있기 때문에 섭취를 통한 오염 가능성을 더 쉽게 상기시킬 수 있고, 인간은 자신을 동물과 다르다고,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기에 동물성에 의한 오염 가능성은 인간에게 강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누스바움은 이런 로진의 이론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면서 다만 두 가지 부분을 보완한다. 먼저 로진은 혐오의 주요기관을 입이라고 생각하고 주요 감각을 미각이라고 말했지만, 누스바움이 보기에 이는 너무 협소한 관점이 다. 혐오에 담긴 핵심적 사고가 경계에 대한 것이라면, 이와 관련된 감각은 무엇보다 촉각이며, 후각, 미각이다. 혐오와 관련된 주요감각은 전통적으로

“접촉적 감각”이라고 여겨지는 촉각, 후각, 미각으로 확장되어야한다. 또 로 진이 동물성에 집착하는 것 역시 문제이다. 사실 모든 동물성이 혐오감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광야를 가로지르는 사자의 힘과 속도는 혐오보다는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누스바움은 혐오적 사고를 일으키는 것은 다 만 동물성이 아니라, 인간이 동물과 공유하고 있는 “일정한 형태의 취약성 이며, 우리 자신이 퇴화되거나 폐기물이 되어 가는 경향”, 즉 죽음과 관련된 것이라고 봐야한다고 주장한다.22)

이러한 누스바움의 지적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누스바움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로진이 죽음과 관련된 취약성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로진은 이러한 취약성 자체를 동물성으로 이해한다. 로진에 따르면, 인간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고 속에 있던 내장을 밖으로 드러낼 때, 그 피와 상처가 보여주는 것은 인간이 동물과 공유하고 있는 신체적 특성 이다. “인간의 몸은 동물의 몸과 마찬가지로 죽는다. […] 신체 손상(envelope violations)과 죽음이 혐오스럽다면, 이는 그것들이 우리의우리의우리의우리의우리의동물적 취약성을

22) 마사 누스바움, 같은 책, 174~175쪽.

(17)

상기시키는 불쾌한 것이기 때문이다.”23)

사실 로진이 동물성이라고 말할 때, 이는 단순히 동물이 가진 어떤 특성 을 의미하기보다는, 인간이 동물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특성, 즉 인간의

인간의 인간의인간의

인간의동물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누스바움은 로진이 힘이나 민첩 성과 같은 긍정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동물성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명확 하게 지적한 바 없다고 비판하지만,24)로진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동물성은 자신이 말하는 동물성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동물성은 인간 역시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마주했을 때 인간 스스로가 자신이 가진 동물성을 떠올리게 되는 어떤 인간적 특성이다. “인간은 정확히 동물과 마찬가지로 먹어야하 고, 배설해야하며, 몸의 표면을 닦아야하며, 섹스를 해야 한다.”25) 이것이 모든 문화권에서 이러한 행위들에 대한 규정이 있는 이유이고, 이 규정을 어길 때, 그러한 사람을 “혐오스럽다거나 동물 같다”고 매도하는 이유이다.

결국 혐오는 인간이 가진 취약성과 유한성을 포함한 부정적 의미의 동물성 에 대한 감정이며, 이러한 동물성에 오염되기를 거부하는 감정적 표현이다.

그리고 이렇게 혐오를 규정했을 때, 혐오를 비이성적인 망상에 기반을 둔 신뢰할 수 없는 감정이라고 말하는 누스바움의 주장은 이미 그 타당성을 얻는 것처럼 보인다. 혐오는 동물성에 오염될 것을 우려하는 인간의 감정이지 만, 이러한 동물성을 이미 인간이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한, 오염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적 측면이 있다고 할지라 도, 인간은 분명 동물과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언제나 동물 이상이기를 추구해왔다. 인간이 이룩한 문명은 인간 자신이 가진 동물성을 극복하려는 인간적 노력의 산물이다. 따라서 혐오가 포함하고 있는 인지적 측면, 즉 ‘인간

23) 필자의 강조, Paul Rozin, Jonathan Haidt and Clark McCauley, “Disgust”, Handbook of Emotions, 4th edition, Lisa Feldman Barrett, Michael Lewis and Jeannette M.

Haviland-Jones (eds), New York: A Division of Guilford Publications, 2016, p.820.

24) 마사 누스바움, 뺷혐오에서 인류애로: 성적지향과 헌법뺸, 53쪽, 각주 22.

25) Paul Rozin, Jonathan Haidt and Clark McCauley, Op. cit., p.819.

(18)

은 동물과 다르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과 ‘인간은 동물보다 우월하며, 따라서 동물과 같아진다는 것은 저열한 일이다’라는 평가적 믿음을 전적으로 오류라 고 볼 수는 없다. 사실적 측면에서 인간이 다만 동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고, 평가적 측면에서는 동물성에 대한 극복이야말로 인류가 추구 해온 가치이기 때문이다. 혐오가 인간에게 내재된 동물성에 의해 오염되기를 거부하는 감정적 표현이라는 점은 혐오가 전적으로 자연적인 것이 아닌, 인간 적 가치가 반영된 사회-문화적인 산물이라는 점을 보여줄 뿐이다.

실제로 누스바움은 배설물과 체액, 시체와 같은 “원초적 대상”, 즉 “인간 의 동물성과 유한성을 일깨워주는 존재들”에 대한 “감각상의 혐오”와 이러 한 원초적 대상에 대한 혐오가 특정한 집단이나 개인에게 확장된 “투사적 혐오”를 구분하고,26)전자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여러 연구 결과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원초적 대상에 대한 혐오 역시 사회적 학 습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27)그것은 모든 문화권에 공통적으로 존재하 는 혐오로서 진화적 근거가 있음이 명백해 보이며, 원초적 대상이 야기하는 불쾌한 감각과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위험을 고려할 때 타당한 감정 반응 이라고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투사적 혐오는 사회적 맥락에 따라 구성되는 혐오로서, 원초적 대상에 대한 혐오를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게 확장함으로써 형성된다. 이러한 혐오는 원초적 대상에 대한 혐오와는 달리 어떠한 위험과도 실제적으로 연결되지 않으며, 그것 역시 하나의 혐오로서 분명 오염에 대한 관념을 포함하지만, 여기서 오염의 가능성은 다만 상상으 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누스바움에 따르면, 이러한 투사적 혐오 역시 원초적 대상에 대한

26) 마사 누스바움, 뺷혐오에서 인류애로: 성적지향과 헌법뺸, 53쪽; 뺷혐오와 수치심뺸, 239~

240쪽.

27) “대략 5세까지, 오염을 포함한 완전한 혐오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사회적 교육과 인지적 능력향상 둘 모두가 필요한 것 같다”(Paul Rozin, Jonathan Haidt and Clark McCauley, Op. cit., p.823).

(19)

혐오와 마찬가지로 동물성에 오염되지 않으려는 인간적 욕구에서부터 출발 한다. 사람들은 자신 안에 있는 동물성을 자신으로부터 가능한 멀리 위치시키 고 싶어 하고, 이를 위해 원초적 대상이 가진 속성을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게 투사함으로써 자신과 동물 사이에 “유사 동물”이라는 완충지대를 설치한다.

투사적 혐오의 대상이 된 인간은 이제 인간이기보다는 동물이며, 이렇게 “유 사 동물이 우리와 우리 자신의 동물성 사이에 존재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 의 동물성과 유한성에서 한층 더 멀어지게 된다.”28)투사적 혐오는 자신 안에 내재된 동물성을 자신으로부터 떨어뜨리기 위한 효과적인 방식이다. 그리고 이때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가 이런 투사적 혐오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점은 너무나 자명하며, 더 나아가 그것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도 자명하다. 투사적 혐오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 되는 것인 한, 한 사회는 혐오의 대상을 인위적으로 조직함으로써 사회적 위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 밀러가 말한 것처럼 “혐오는 그것이 만지는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그 대상의 하찮음과 저급함을 선언한다.”29)투사적 혐오는 사회적 위계를 공고히 하거나 심지어 그것을 창조해낼 수 있다.

따라서 투사적 혐오는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타당한 감정일 수 없다. 사회 적 맥락에 따라 투사적 혐오에는 다양한 믿음들이 결부될 수 있겠지만, 투사 적 혐오를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인지적 요소는 ‘저 사람은 나와 다른 종류 의 사람이다(인간이기보다는 동물이다)’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과 ‘저 사람은 나보다 저급하다(혹은 나는 저 사람보다 종적으로 우월하다)’라는 평가적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들은 우선 사실적 측면에서 명백한 오류이며, 평가적 측면에서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결코 비난 없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생각이다. 혐오적 투사는 자신 안에 내재한 동물성을 제거함으로써 순수해지 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에서부터 출발하며, 이러한 열망을 위해 아무런 합리적 인 이유 없이 타인을 낙인찍어 인간 이하의 것으로 만들고 사회적 위계를

28) 마사 누스바움, 뺷혐오와 수치심뺸, 201쪽.

29) William I, Miller, Op. cit.,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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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고히 하거나 심지어 형성한다. 혐오는 카스가 말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 인간성의 핵심을 보호하기 위해 외치도록 남겨진 유일한 목소리”30)가 아니 라,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가해진 가장 끔찍한 폭력이다.

4.2. 혐오는 비이성적 망상의 산물일 뿐인가?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혐오에 대한 비판이 팬데믹 상황에서 발생하는 혐 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투사적 혐오가 이 미 악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에 우선 논점은 팬데믹 상황에서 발생하는 혐오 를 과연 투사적 혐오로 볼 수 있는가에 맞춰져야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자에 대 해 발생하는 혐오를 생각해보자. 이러한 혐오가 투사적 혐오가 아니라는 점 은 명백해 보인다.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자에게서 감염의 위험을 인식하고, 이러한 위험은 단순한 감기의 위험과 전혀 다르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의해 목숨을 잃는 상황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자에게서 인식된 감염에 대한 위험은 곧 죽음에 대한 위험이다. 따라 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자는 인간이 가진 취약성과 유한성, 즉 동물성을 사 람들에게 상기시키고, 그렇게 마스크를 쓰지 않은 자는 배설물이나 시체와 같은 혐오의 원초적 대상과 동일한 역할을 수행한다. 물론 그가 실제로 감 염자일 가능성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에 비해 훨씬 낮을 것이다. 그러나 감 염 가능성이 어디에나 존재하는 팬데믹 상황에서 사람들은 각종 매체들을 통해 감염의 위험이 다만 상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그렇게 가정하도록 권고 받는다. 정부의 정책들은 감염 가능성이 실제로 존 재한다는 믿음 아래 이루어지며, 마스크 착용에 대한 권고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팬데믹 상황에서는 감염의 가능성을 단지 가능성이라고 생각하는 태도가 위험하고 지탄의 대상이 된다. 마스크를 쓴 자에게서 감염의 위험을

30) 레온 카스, 같은 책, 47쪽. (Leon R. Kass, Op. cit.,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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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하는 태도는 합리적이며, 정부가 정책적으로 권고하는 바이다. 마스크 를 쓰지 않은 자에 대한 사람들의 혐오는 타당한 감정 반응이다.

그렇다면 팬데믹 상황에서 발생한 아시아인들, 특히 중국인에 대한 혐오 는 어떠한가? 이러한 혐오가 기존에 존재하던 것으로서 다만 팬데믹이라는 예외적 상황을 기회로 강하게 분출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즉 각적으로 생기는 반감과는 달리, 팬데믹 상황에서 불거진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는 방금 기술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자에 대한 혐오와 본질적으로 다 르지 않다. 코로나19의 발원지가 중국 우한으로 특정된 상황에서 각종 매체 를 통해 전달된 정보들은 사람들에게 감염의 위험을 인지시키고, 거리에서 마주치는 아시아인들은 이런 위험을, 따라서 죽음과 관련된 동물성을 상기 시키기에 충분했다. 물론 혐오의 대상이 된 아시아인이 실제로 바이러스의 보균자일 가능성은 매우 낮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모른 다. 그가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중국인인지 알지 못하고, 그가 계속 유럽 에 거주하던 자인지, 방금 중국에서 귀국한 자인지, 우한에서 온 자인지, 결 국 감염자인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다. 모든 중국인이 감염자가 아님에 도 불구하고 중국인의 입국에 대한 여러 나라들의 금지 조치와 그런 금지 를 요청했던 사람들의 주장에는 어떠한 합리적 근거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 이 아니라면, 팬데믹 상황에서 발생한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에 나름대로 근 거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한다.

그런데 아시아인들에 대한 혐오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자에 대한 혐오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말의 의미를 보다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렇 지 않을 경우, 팬데믹 상황에서 발생한 아시아인들에 대한 혐오를 확률에 근거를 둔 다른 인종적 혐오들과 구분하기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 령 누스바움은 하이드파크에서 일어나는 범죄의 대부분이 흑인 남성들에 의해 발생한다는 통계적 사실을 근거로 하이드파크에서 만나는 모든 흑인 남성들을 혐오하는 한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다.31)이 사람이 확률을 근거 로 하이드파크에서 만난 흑인 남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것과 중국

(22)

의 상황을 근거로 길에서 만난 아시아인을 감염자로 취급하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 차이는 무엇인가?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차이는 전자의 경우 한 인간의 인격이 문제가 되는 반면, 후자의 경우는 그의 상태 가 문제가 된다는 점이다. 즉 흑인에 대한 혐오에서 흑인이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는 믿는 것은 그의 의지, 따라서 그의 인격에 대해 판단하는 것이라 면,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에서 아시아인이 바이러스를 보유하고 있을 것이 라고 믿는 것은 그의 상태에 대해 판단하는 것으로서, 여기서 인격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거리에서 만난 아시아인은 타인을 감염시키겠다는 의지를 가진 ‘누구’이기보다는 바이러스를 가진 ‘무엇’이다. 그는 시체와 배설물과 같은 오염원, 혐오의 원초적 대상이다.

결국 팬데믹 상황에서 발생한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는 마스크를 쓰지 않 은 자에 대한 혐오와 마찬가지로 투사적 혐오이기 보다는 원초적 대상에 대한 혐오이다. 실제로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가 크게 문제가 되었던 유럽에 서는 코로나19의 중심지가 유럽으로 이동한 3월 중순 이후 아시아인에 대 한 혐오 기사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32)또 팬데믹 상황에서 발생하는 혐오 와 인종주의가 아시아인에게만 한정된 것도 아니다. 프랑스인들은 독일 국 경에서 돌을 맞았고, 중국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을 배척했으며, 마스크를 쓰 지 않고 돌아다니는 백인들은 한국인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된다. 문제는 무 슨 인종인가가 아니라, 오염의 가능성이 어디에 있는가이다.

그러나 팬데믹 상황에서 발생하는 혐오가 투사적 혐오가 아니라는 점이 그러한 혐오가 정당한 것이라는 점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사실 누스바움 이 “혐오는 어떠한 행위를 범죄 행위로 규정하는 일차적 기반이 되어서는

31) 같은 책, 70쪽.

32) 물론 이는 정부와 언론의 홍보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팬데믹 상황에서 발생한 인종주의 관련 보도들을 모아놓은 다음의 자료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incidents_of_xenophobia_

and_racism_related_to_the_COVID-19_pandemic#Ita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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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되며, 현재하고 있는 것처럼 형법에서 죄를 무겁게 하거나 경감시키는 역할을 해서도 안 된다”33)고 말했을 때, 여기서 말하는 혐오는 투사적 혐오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팬데믹 상황에서 발생하는 혐오는 범죄 행위로 규정하는 일차적 기반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죄의 경감 요인 은 될 수 있지 않을까? 가령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을 폭행했을 때, 이런 폭행죄는 혐오를 이유로 경감될 수 있지 않을까? 누스바움은 혐오를 이유로 죄의 경감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세 가지 구분을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는 원초적 대상에 대한 혐오와 투사적 혐오의 구분이고, 두 번째는 원초적 대상 에 대한 혐오라고 할지라도 그것에 의한 실제적인 공격적 행위가 있었는가 없었는가의 구분, 마지막으로 공격적 행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피 할 수 있었는가 아닌가의 구분이다.34)마스크를 쓰지 않은 자에 대한 혐오를 예로 하나하나 살펴보자.

이미 살펴본 것처럼, 첫 번째 구분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자에 대한 혐 오는 원초적 대상에 대한 혐오로 판단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판단은 상황 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상황이 안정적으로 유지될수록, 마스크를 쓰지 않 은 자에 대한 혐오를 원초적 대상에 대한 혐오로 판단할 근거는 점점 줄어 들 것이다. 사실 혐오 자체가 사라질 것이다. 이제 두 번째 구분을 살펴보 면, 실제적인 공격 행위를 실제적인 위협으로 이해하는 한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자로부터 비롯되는 실제적인 공격 행위가 있다고 말해야할 것이 다. 이는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와 비교할 때 그 의미가 뚜렷해진다. 동성애 자와 함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야기하는 어떠한 실제적인 위협도 없는 반 면, 마스크를 쓰지 않은 자와 함께 있다는 사실 자체는 그 감염 가능성에 의해 실제적인 위협이 된다. 마지막으로 피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 살펴보 면, 이는 길거리인가, 지하철 안인가, 또 지하철 안이라도 사람이 붐비는 상 황인가 아닌가 등등, 상황에 따라 다양한 답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회피

33) 마사 누스바움, 뺷혐오와 수치심뺸, 37쪽.

34) 같은 책, 239~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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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불가능한 상황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결국 누스바움이 제시한 세 가지 기준을 모두 만족함으로써 혐오가 범죄 의 감경 요인이 될 수 있는 상황은 분명 존재한다. 가령 출근시간 사람들로 가득 차 옴짝달싹 못하는 지하철 안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고 기침을 하는 사람의 뺨을 누군가 참지 못하고 내리쳤다고 해보자. 그가 보통의 경우 받 는 처벌보다 낮은 수위의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이 과연 지나 친 일일까?35)혐오는 정말 비이성적인 망상에 기반을 둔 것으로서 신뢰할 수 없고, 따라서 어떠한 공적 활동의 기준으로도 고려되어서는 안 되는 것 인가? 팬데믹이라는 상황은 여기 어딘가 구멍을 내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구멍은 혹시 점점 더 커지고 있지 않은가?

5. ‘올드 노멀(old normal)’을 꿈꾸며

지금까지 혐오에 대한 두 대표적인 관점, 진화심리학적 관점과 사회심리학 적 관점 아래서 팬데믹 상황에서 발생하는 혐오에 대해 설명하고, 그 각각의 관점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비판과 그것의 한계 에 대해 살펴보았다. 먼저 진화심리학적 관점은 혐오를 진화 과정을 통해 인간이 획득한 삶의 전략으로서 이제는 효용이 다한 진화적 잔재일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논의는 팬데믹이라는 예외적 상황이 이러한 혐오가 표출되기 좋은 조건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촉발하고 심지어 그것이 어떤 정책 결정의 기반으로 활용될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반면 혐오를 사회- 문화적인 산물로 보는 사회심리학적 관점은 혐오를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것이 어떠한 공적 활동의 기준으로도, 따라서 어떠한 정책 결정의 기반으로도 사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시 논의가 보여준 것은

35) 법무법인 <세광>의 공도연 변호사는 제시된 예에 대해, “감경요소 중 “피해자에게 범 행 발생에 상당한 책임이 있는 경우”에 해당할 여지가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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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팬데믹 상황에서 발생되는 혐오가 사회심리학적 관점에서도 타당한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원초적 대상에 대한 혐오이며, 이러한 혐오는 제한 된 조건에서라면 신뢰할만한 것일 수 있으며, 공적 활동의 기준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각각의 관점으로부터 제기되는 비판들이 이렇게 팬데믹 상황에서 한계를 갖는 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팬데믹이라는 상황이 해체시키는 것이 바로 그 관점들이 전제하고 있는 세계와 그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가치 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진화심리학적 관점은 문화-경제적으로 긴밀하게 얽힌 세계와 평등하고 자유로운 개인들로 구성된 민주적 사회를 전제하지만, 팬데믹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해체된 것이 바로 이 세계이며, 가장 먼저 통제된 것이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이다. 또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혐오에 대한 비판은 주로 투사적 혐오에 맞춰져 있으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을

“유사 동물”로 만들고, 한 사람의 인격을 자의적으로 판단함으로써 발생하는 인격에 대한 폭력이지만, 팬데믹 상황은 인격 자체가 아예 고려되지 않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개인은 “유사 동물”이 아니라 오염원, 즉 사물로 고려될 뿐이며, 개인의 인격은 훼손되기 이전에 삭제된다.

이러한 팬데믹 상황의 특수함을 고려하지 않고 기존의 논의를 반복하는 것은 공허하거나 심지어 위험하다. 가령 누스바움은 앞서 인용한 인터뷰에 서 혐오와 편견에 의해 흑인과 백인의 거주지가 뚜렷이 구분되어 있는 시 카고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다른 인종들에 비해 매우 불균형적으로 바이러스에 취약한 상황”이 나타났고, 그로 인해 “편견과 혐오가 사회에 미 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해 대중들이 의문을 갖고 비판”하기 시작했다고 말 하고 있다.36) 물론 이런 긍정적인 모습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팬데믹 상황에서 발생하는 혐오가 누스바움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투사적 혐오이기보다는 원초적 대상에 대한 혐오인 경우도 고려해봐야 한다. 이 경

36) 「[7인의 석학에게 미래를 묻다]③마사 누스바움 “코로나가 드러낸 편견과 혐오? 그 둘은 한 번도 숨겨진 적이 없다”」, 뺷경향신문뺸, 202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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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다른 인종들에 비해 매우 불균형적으로 바이러 스에 취약”하다는 객관적 사실은 투사적 혐오가 가정하고 있는 상상적 위 험을 실제적 위험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즉 ‘흑인들이 우리를 오염시킬 것 이다’라는 투사적 혐오의 가설은 ‘실제로 흑인 감염자가 많다’는 객관적 사 실을 통해 검증받고, 그렇게 투사적 혐오는 원초적 대상에 대한 혐오와 결 합한다. 흑인들의 인격은 다만 훼손되는 것이 아니라 훼손된 채 굳어버린 다. 혐오는 입증된 가설, 결코 흔들릴 수 없는 과학적 진리가 될 것이며, 진 정한 혐오의 시대는 이렇게 완성될 것이다.37)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실 혐오에 대한 답은 이미 정해져있다.

한 사람을 고유한 인격을 가진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으로 존중하는 것. 투 사적 혐오에서처럼 한 사람의 인격을 함부로 훼손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원 초적 대상에 대한 혐오처럼 그의 인격을 지워버리지 않고 그냥 그대로 내 앞에 서있는 살아있는 한 개인으로 존중하는 것. 그렇게 한 개인을 한 사람 으로 그 자체로 인정할 때, 우리는 그에게 말을 걸 것이다. 혹은 우리가 말 을 건넴으로써 그는 아시아인이나 흑인이 아닌 바로 ‘너’라는 개인으로 나 타날 것이다. 그렇게 개인과 개인의 연대는 시작될 것이다.

이것은 분명 ‘올드 노멀’의 방식이다. 너무 오래되어서 그 소중함을 잊었 고, 너무 오래되어서 너무 많은 오류를 범했던 바로 그 ‘오래된 정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회복해야하는 상태이고, 비록 영원히 돌아갈 수 없을 지라도 끊임없이 돌아가려 노력해야하는 그곳이다. 현재 인류가 가진 모든 것들이, 심지어 ‘새로운 정상’을 찾으려는 그 욕구조차도 바로 이 ‘오래된 정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류는 너무 빨리 ‘새로운 정 상’, ‘뉴 노멀’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팬데믹 시대에 잃어버린 것들에

37) 반대 방향의 경우, 즉 원초적 대상에 대한 혐오가 투사적 혐오로 발전하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팬데믹 상황이 지속될수록 바이러스에 취약한 사회계층에 대한 혐오와 회피 는 지속될 것이고, 이런 장기적인 혐오와 회피는 팬데믹 상황이 종식된 이후에도 사람들 의 사유와 행동 속에 습관처럼 남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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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 고려하지 않고, 심지어 그것들을 다시 회복할 수 없는 것으로 가정한 채 논의되는 ‘새로운 정상’은 허망하고 위험하다. ‘새로운 정상’을 만들기 위 해서라도 우선 돌아가야 한다. 손을 마주잡기 위해, 얼굴을 마주하기 위해 노력해야하며, 서로를 끊임없이 호출하면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혐오의 시대가 완성되기 전에 이 시대를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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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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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Corona19 and the Era of Disgust

- Dreaming of ‘Old Normal’ -

38)Joe, Te-gu*

The essential characteristic of the disgust in a pandemic situation is that it occurred at the moment when the boundary between the natural and the social is blurred. Repeating existing theories of disgust without considering this particularity will only alienate the theory from reality and eventually make it powerless. Therefore, this article will explain the disgust in pandemic situation from the two existing representative views - the evolutionary and social psychological views - of disgust, and reveal the limitations of the criticisms that each point of view can raise about the current situation. This discussion will show that the criticisms of the disgust raised by each point of view are helpless against the disgust arising from the pandemic situation. This is so natural. It is because the pandemic situation destroys the world and its values that these criticisms presuppose. Finally, it would be the modern value of free and equal human individual, the value of "old normal", that must first be restored to escape the age of disgust caused by the Pandemics situation.

Key Words : Disgust, Pandemic, Corona19, Martha Nussbaum, Behavioral immune system

* KyungHee University HK+ Institute for Integrated Medical Humanities, Research Profess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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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이름 : 조태구

소속 :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통합의료인문학 연구단 전자우편 : joetegu78@gmail.com

논문투고일 : 2020년 6월 26일 심사완료일 : 2020년 8월 24일 게재확정일 : 2020년 8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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